Han Qin · 홍루몽: 새로 쓴 서른 회

제85회영민한 탐춘은 돛을 올려 남쪽 바다로 떠나고슬기로운 석춘은 머리를 잘라 서녕왕부를 거절하다

진한(秦漢)이 창작한 속편이며, 조설근의 잃어버린 원고가 아닙니다.

가모의 상사를 막 치렀으나 상중의 장막은 아직 다 걷히지 않았다. 전날 내관이 집에 와서 몇 마디를 전하고 갔는데, 이튿날 곧 이부의 공문이 내려왔다. 가정은 황명을 받들어 상기를 마치기 전에 복직하고 공부낭중으로 승진하였다. 문간에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소리가 한 번 울리자 각 처소의 관리인들이 모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축하하며 온갖 아첨을 늘어놓았다. 가정은 온몸에 소복을 입은 터라 잔치를 벌이기는 어려워 그저 분부하였다. “각자 예전대로 일을 보아라. 경사를 핑계 삼아 상금을 더 타 가서는 안 된다.” 바깥에서 축하 서찰이 한 통씩 들어오고, 새빨간 명함들이 책상 위에 쌓여 ‘근언신행’이라고 쓴 흰 종이를 밑에 덮어 버렸다. ‘신행’ 두 글자만 드러나 있었다.

왕부인은 은혜에 감사하는 예물을 준비하게 하고 가정과 함께 북정왕부로 인사를 갔다. 북정왕은 일이 있다며 만나 주지 않고, 장사에게 앞채 대청에서 가정의 차 상대를 하게 했을 뿐이었다. 장사는 손수 차를 권한 뒤 예를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공교롭게도 오늘 도무지 짬을 내실 수 없어, 특별히 저더러 여기서 나리를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댁에서는 큰일을 막 치르셨으므로 모든 예절을 요란하게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혹 소홀한 점이 있더라도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왕부인은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뵈었다. 왕비는 한차례 병을 앓고 난 뒤라, 엷은 푸른빛 바탕에 마주 보는 희상봉 무늬를 넣은 서양 모직 저고리를 평상복으로 입고 있었다. 왕부인을 보자 그저 말했다. “요즘 궁중에 일이 많으니, 우리 같은 친척들은 더욱 저마다 조용히 지내야겠지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문득 혼자 웃으며 말했다. “이 두 해 동안에도 딸아이를 보낸 집이 몇 있었는데, 글쎄 우리 왕야께서 모두 그대로 돌려보내셨답니다. 방은 많아도, 춥고 더운 것을 알아서 살펴 줄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면 싶어요.”

왕부인은 그 말을 듣고 손에 든 찻잔 뚜껑을 잔 가장자리에 살짝 부딪치며, 따라 웃고 물었다. “왕야께서 정말 한 명도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까?”

왕비가 다시 웃었다. “한 명도요. 아직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신 모양이지요.” 그러고는 말을 돌려 가모의 상사는 모두 잘 마무리되었느냐고 물었다.

왕부인은 하나씩 대답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문득 창가 탁자 위에 누렇게 빛나는 물건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자 남짓한 작은 배였는데, 돛대와 돛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밑에는 바퀴와 축이 달려 있었다. 왕부인은 한번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찻잔은 손에 받쳐 들고도 입가로 가져가지 않았다.

왕비는 그가 넋을 놓고 보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서양 사람이 만든 저절로 가는 배랍니다. 태엽을 감으면 물 위로 한동안 가지요. 우리 왕야께서 본디 이런 장난감을 좋아하셔서, 장씨라는 사람에게 부탁해 바깥에서 반년 넘게 수소문한 끝에 겨우 이 하나를 구했어요. 값이 무척 비쌌지만 감수했지요. 왕야 생신날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듣기로는 예전 그 집에서 흩어져 나온 물건이라는데, 요즘 이런 물건은 돈이 있어도 꼭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왕부인이 말했다. “왕비마마의 그 마음이 참으로 지극하십니다.” 그러고는 차를 내려놓고 몇 마디 한담을 더 나누다가 하직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중문을 들어서자 왕부인이 물었다. “왕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가정이 말했다. “장사와 인사만 나누었소. 마지막에 장사가 왕야의 분부를 전하더군. 요즘 바깥 기류가 심상치 않으니, 반드시 조심해서 일을 하라고.”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다시 물었다. “왕비께서는 당신과 무슨 이야기를 하셨소?” 왕부인이 말했다. “모두 집안의 자질구레한 이야기였지요.”

왕부인은 방으로 돌아와 왕부에서 준 향병 한 상자를 옥천아에게 건네 잘 간수하게 하면서 주서댁에게 물었다. “넷째 아가씨는 요즘 조용히 지내느냐? 농취암의 그 묘옥 아가씨는 아직 살고 있느냐?”

주서댁이 아뢰었다. “마님, 넷째 아가씨는 온종일 문을 닫고 계십니다. 밥도 채병이 문간에서 받아 안으로 들이고요. 묘옥 아가씨도 좀처럼 나오지 않으십니다.”

왕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만 가 보아라.”

가정은 서재로 돌아와 앉아 각처에서 온 축하 서찰을 보고 있었다. 조 이낭이 울면서 뛰어들어 와 말했다. “나리께서는 이제 벼슬이 오르셨고, 보옥도 노마님 말씀대로 혼사를 치르게 되어 온 집안에 경사가 났는데, 환이만 나리 아들이 아닌가 봅니다. 환이도 다 컸건만 나리께서는 그 애의 평생 일을 한마디라도 물어보셨습니까? 예전에 시녀 둘을 눈여겨보아 하나는 보옥에게, 하나는 환이에게 주겠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을 하신 지 몇 해인데 시녀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네요. 저쪽 방에서만 금이니 옥이니 하는 귀한 색시를 맞아들이고, 우리 모자는 평생 뒤로 밀려나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가정이 호통쳤다. “또 무슨 소란을 피우러 왔느냐! 상복도 벗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떠드느냐. 환이는 평소 글을 읽으려 하지도 않고 변변치 못한 패거리와 어울리기만 하는데, 어느 집에서 좋은 딸을 주겠느냐!”

조 이낭이 울며 말했다. “못났어도 나리의 아들입니다. 못났다고 장가도 안 보내고 더욱 못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렵니까? 차라리 우리 모자가 죽어 버리면 깨끗하겠네요!”

가정이 책상을 내리쳤다. “고얀 것! 내쫓아라! 내쫓아!”

조 이낭이 또 죽겠느니 살겠느니 하려는데 문밖의 하인이 얼른 들어와 달랬다. 그는 할 수 없이 눈물을 닦으며 울었다. “어차피 우리는 군더더기지요. 노마님이 돌아가시니 이제 편들어 줄 사람도 없고요.” 그러고는 얼굴을 가린 채 나갔다.

가정은 한참 앉아 있다가 축하 서찰 한 통을 집어 들었다 도로 내려놓았다. 문득 길게 한숨을 쉬고 곁의 하인에게 물었다. “환이가 올해 몇 살이지?”

하인이 아뢰었다. “세는 나이로 벌써 열다섯입니다.”

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왕부인 방에 가서 조 이낭이 와 소란을 피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왕부인이 말했다. “행패를 부리기는 해도 그 말이 아주 이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환이의 그 성미로는, 여느 집안 처녀가 제어하기 어려울 듯하지요.”

가정이 말했다. “어머님께서 살아 계실 때 농취암에 있는 묘옥의 할머니 이야기를 자주 하셨소. 두 분은 몇십 년 된 옛 벗으로, 아직 시집가기 전부터 한 분은 육안차를 좋아하고 한 분은 노군미를 좋아하여, 사흘이 멀다 하고 함께 차를 마셨다오. 그 두 차의 좋고 나쁨을 두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다가, 끝내 각자 시 한 수씩 지어 우열을 겨루셨지. 어머님이 지으신 것은 노군미를 읊은 시였소.” 그러고는 천천히 읊었다.

수미는 이슬 머금어 맑은 물결 이루나니,
찬 창가에 앉아 쓰디쓴 괴로움을 구하지 말라.

백발의 술잔 앞에서 짙은 맛 씻어 내고,
소매 밑 맑은 바람 되어 묵은 병을 풀어 주네.

야성대로 서리와 추위를 업신여기기에는 맞지 않아도,
화려한 집에서 큰 화기를 기르기에는 제격이라.

쌀쌀한 얼굴의 육안은 부질없이 스스로 괴로울 뿐,
사람 사는 세상 그 속에서 지내는 이 얼마나 되랴.

읊기를 마치고 다시 말했다. “그 옛 벗도 지려 하지 않고 육안차로 화답했다오.”

비 온 뒤 차 향기 수놓은 규방으로 스며들고,
만나기만 하면 시제 겨루기를 즐기네.

찻잔 안 어린잎은 새 초록을 펴고,
솥가의 엷은 연기는 대숲 시내를 감도네.

짙고 단 맛은 입에 물린다 웃어 말하며,
쓴 차가 도리어 사람을 홀린다 한가로이 자랑하네.

내일 누가 먼저 굴복했는지 묻거든,
웃음 그친 뒤 손잡고 작은 길을 건너가리.

읊기를 마치자 방 안에서는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왕부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두 분 모두 누구 하나 양보할 마음이 없으셨군요.”

가정이 말했다. “어머님 말씀으로는 그 벗이 평생 외곬으로 지조를 지켰으며, 세상도 일찍 떠났다 하셨소. 묘옥은 할머니를 여읜 뒤 부모마저 차례로 돌아가셔서 혼자 남았지. 머리를 기른 채 수행하다 떠돌아 서울까지 왔고. 어머님께서는 그 옛정을 생각하여 그때 본래 묘옥을 집안사람으로 들이려 하셨으나, 뒤에 일이 많아 끝내 이루지 못하셨소. 이제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 묘옥도 이 집에서 의지할 곳이 없어졌구려. 그 못다 이룬 소원을 내가 대신 이루어 드리겠소. 묘옥을 환이의 정실로 맞아들이는 것이오. 첫째로 어머님의 옛 소원을 이루고, 둘째로 저쪽 방에서 온종일 떠드는 것도 막으며, 셋째로 의지할 데 없는 고아 처녀를 높여 주는 셈이지. 환이도 그런 사람이 단속하면 혹 조금은 달라질지 모르오.”

왕부인은 듣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머리를 기르고 수행한다 해도 역시 규중의 처녀입니다. 성품이 너무 도도해서 승낙하지 않을까 두렵네요.”

가정이 말했다. “먼저 사람을 보내 한번 물어보게 하시오. 다른 자리가 아니라 정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하오.”

이튿날 나이 든 하녀 하나에게 다과 두 가지를 들려 암자로 보냈다. 그 하녀는 이 심부름을 맡자 하늘만큼 큰 경사인 줄로만 여겼다. 문을 들어서니 묘옥이 손을 씻고 있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말했다. “아가씨, 큰 경사가 났습니다. 저희 나리와 마님께서 아가씨가 홀로 의지할 곳 없으신 데다 노마님께서 예전에 아끼시던 분이기도 하시다 하여, 이제 집안사람으로 들여 환 셋째 도련님과 짝지어 주실 생각이십니다. 마음 놓으세요. 어엿한 정실 부부가 되시는 것이지 첩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니랍니다. 앞으로 댁에서 돌보아 줄 테니, 이 쓸쓸한 암자를 지키시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묘옥의 손에서 물방울이 하나씩 구리 대야 안으로 떨어졌다. 고개는 들지 않았다.

하녀는 대꾸가 없자 한 걸음 더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만, 이건 낭중 나리께서 베푸시는 은혜랍니다. 환 셋째 도련님이 몇 살 어리시기는 해도, 밖에서 하는 말로 ‘여자가 다섯 살 많으면 늙은 어머니보다 낫다’ 하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그 몇 살 위이시니 앞으로 도련님을 다루시기도 좋을 테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묘옥의 얼굴빛이 이미 변했다. 차갑게 한번 웃고 수건을 대야 가장자리에 얹더니, 하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일어나 푸른 무명 휘장을 걷고 안방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다. 휘장이 내려간 뒤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하녀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으나 안에서 문빗장을 거는 소리만 들리자 멋쩍게 물러났다. 암자 문을 나와서는 줄곧 중얼거렸다. “참 복도 없는 아가씨로군. 귀공자의 정실도 싫다니, 천왕이나 옥황상제가 모시러 오기를 기다린단 말인가.”

가정은 보고를 듣고 낯빛이 좋지 않았으나 그저 “그만두어라” 하고 말았다. 왕부인은 그 다과 두 가지를 거두어 두게 했다.

며칠이 지나 소상관 창 앞의 댓잎이 밤새 내린 찬비에 씻겨 푸르렀다. 대옥은 몸이 조금 나아져, 일찍 일어나 설안에게 자바 침향 한 향로를 피우게 하고 자신은 창 아래 앉아 금을 타 보려 했다. 자견이 얼른 여우 옆구리의 털가죽으로 만든 부드러운 베개를 등에 받쳐 주며 웃었다. “이제 겨우 좀 나으셨는데 또 이것을 하시려고요. 정신이 고단해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대옥이 웃으며 말했다. “금도 나를 지치게 할 마음은 없단다. 내가 이걸 빌려 마음을 좀 풀어 보는 것뿐이야.”

그러고는 한동안 줄을 골랐다. 그때 방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자견은 바깥방에서 약을 달이고 설안은 회랑 아래서 꽃가지를 손질하여, 안팎을 통틀어 이 주종 세 사람뿐이었다. 대옥은 먼저 〈의란조〉를 탔다. 처음에는 손끝이 몹시 느렸으며 소리는 빈 골짜기의 가벼운 바람 같았다. 몇 겹의 가락이 흐르자 난초의 뜻은 점점 깊어져, 화답하는 이가 없어도 절로 맑은 향기가 있었다. 곡이 끝나기 전에 창밖에서 문득 누군가 즉석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빈 골짜기 그윽한 난초는 봄을 기다리지 않고,
이슬 차고 서리 무거워도 스스로 기운이 맑네.

향기로운 뜻을 사람이 알아주어야 할 까닭 있으랴,
달 아래 바람 앞에 오직 한 줄기 참됨이 있네.

자견이 발을 걷고 보니 묘옥이었다. 어린 시녀 하나만 데리고, 엷은 푸른빛 민무늬 망토를 걸쳤는데 신 가장자리에 젖은 진흙이 몇 점 묻어 있었다. 대옥은 얼른 들어오시라 하였다. 묘옥은 금을 놓은 탁자 한쪽에 앉아 대옥이 마지막 가락을 마무리하는 것을 듣더니, 난초 이야기는 하지 않고 먼저 금 이야기를 했다. “이 곡은 예전에 타실 때보다 음 사이가 좀 성기군요.”

대옥이 웃었다. “줄도 낡았고 사람도 게을러졌지요.”

묘옥이 말했다. “성긴 데가 도리어 좋아요.” 자견이 차를 들고 들어오니 금의 줄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내려놓은 뒤 나갔다. 대옥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는 매화 위에 쌓였던 눈이 없으니, 그저 되는대로 드셔요.” 묘옥이 말했다. “오늘은 물을 따지지 않겠어요.”

대옥도 더 말하지 않고 손길을 돌려 〈고산유수〉를 탔다. 어느 순간에는 천 길 절벽이요, 어느 순간에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샘물 소리였다. 묘옥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두드리며 소리에 맞추어 낮게 읊조렸다. 반쯤 읊었을 때 곡의 뜻이 높은 산에서 흐르는 물로 옮아갔다. 물길은 멀어질수록 더욱 가닿을 곳이 없었다. 묘옥이 잔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대옥이 줄을 짚고 웃으며 말했다. “찾았다면 굳이 말할 것 없고, 찾지 못해도 말할 필요 없지요.”

묘옥은 그 말을 듣고 즉석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봉우리 높은 것은 남에게 귀히 여김을 받으려 함 아니요,
물길 먼 것은 오직 흘러갈 곳을 따라 길어지는 것.

오늘 줄 곁에서 알아주는 한 사람을 만났으니,
외로운 오동나무 본디 궁상의 가락을 바라지 않았네.

대옥이 묘옥을 한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은 꼭 당신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군요.”

묘옥은 다만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잠시 뒤 대옥은 곡을 바꾸어 〈소상수운〉을 탔다. 금 소리가 일어나자 창밖의 대나무 그림자가 마침 바람에 어지러워졌다. 앞부분은 안개 낀 물처럼 아득하고, 뒷부분에는 차츰 외로운 배와 먼 포구의 뜻이 어려 있었다. 묘옥은 한 대목을 듣다가 화답했다.

소상의 구름과 물이 참으로 사람을 시름겹게 하니,
노 하나로 두둥실 떠서 어느 나루로 가는가.

줄 속에서 나를 보는 듯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하늘 끝에서 함께 아직 돌아가지 못한 몸이니.

대옥이 말했다. “소상 두 글자를 본래 내가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군요.”

묘옥이 말했다. “장소에 본래 누구의 성씨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당신이 살았으면 당신 몫의 물과 구름 한 겹이 있는 거예요.”

대옥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유춘롱〉을 탔다. 이 곡은 가락이 경쾌했다. 반절쯤 이르렀을 때 설안이 회랑 아래서 꽃병을 갈다가 그 안의 수선화 한 가지를 건드려 살짝 흔들렸다. 대옥의 손끝에 문득 옛날의 봄빛이 조금 더해졌다. 묘옥이 또 절구 한 수로 화답했다.

꽃 아래 옛 책은 아직 다 넘기지 못했는데,
세월은 몰래 물소리를 따라 바삐 가네.

봄 가면 찾을 곳 없다 말하지 말라,
사람은 아직 굽은 회랑에 서서 석양을 맞네.

대옥은 그 말을 듣고 손끝을 잠시 늦추었으나, 그대로 곡을 끝까지 탔다.

마지막으로 다시 〈신인창〉을 탔다. 이 곡은 소리의 기세가 탁 트여, 처음 몇 가락은 맑고 높았다가 차츰 긴 바람이 산봉우리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묘옥은 눈을 감고 듣다가 가장 높이 치솟는 대목에서 문득 눈을 뜨고 즉석에서 읊었다.

속세의 문은 닫힌다 해도 하늘에 자물쇠 없고,
맑은 울림 길이 흘러 들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네.

한 소리 산봉우리 벗어나면 누구도 붙들지 못하니,
저녁 구름 앞에서도 져 본 적 없네.

대옥이 말했다. “문이라고 해서 꼭 모두 남이 닫아 놓은 것은 아니지요.”

묘옥이 대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묘옥은 차를 반 잔쯤 마신 뒤 물었다. “보옥 도련님은 요즘도 자주 오시나요?”

대옥이 말했다. “자주 오시지요.”

묘옥은 “아” 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마 뒤에야 말했다. “나는 며칠 더 있다가 떠나려고 해요.”

대옥이 물었다. “어디로 가시게요?”

묘옥이 말했다. “남쪽으로요.”

대옥은 손을 뻗어 금의 줄감개를 다시 고르고 따로 〈사현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첫 음부터 낮았다. 옛사람이 떠난 뒤에도 빈 대청에 아직 신발 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묘옥은 단정히 앉아 듣다가 중간에 이르러 말했다. “이 곡은 좀 지나치게 슬프군요.” 그러면서 손을 뻗어 떨리는 줄 위에 두 손가락을 가만히 얹었다.

대옥은 손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짚도록 두었다. 마지막 소리가 손가락 밑에서 떨어졌다. 향로 속 향도 마침 다 타 버렸다.

묘옥이 갈 때 대옥은 방문까지만 배웅했다. 묘옥이 말했다. “밖이 젖었으니 나오지 마세요.” 대옥은 문틀을 짚고 그가 대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본 뒤에야 돌아와 앉았다.

묘옥이 정원을 나설 때 마침 주서댁이 혼인한 하녀 둘을 데리고 이홍원 쪽으로 가는 것과 마주쳤다. 휘장과 옷감을 손에 받쳐 들고 걸으며 말하고 있었다. “나리와 마님 분부로 안채를 정돈하는 거야. 생년월일 적은 혼서도 찾아냈으니, 이제 날짜만 정하면 돼.” 묘옥은 멈추어 서서 두어 마디를 듣고 다시 앞으로 갔다. 어린 시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보옥의 혼사는 좀처럼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늦겨울 섣달을 보내고 어느새 정월도 다하여 벌써 이월이 되었다. 이날 명연이 밖에서 돌아와 보옥에게 은밀히 말했다. “남안군왕부에서 황명을 받들어 아가씨 한 분을 먼 바닷가 변경으로 보내 이민족과 화친하는 혼인을 시키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태비께서 친딸을 삼천 리 밖으로 보내기 아까워서 양녀를 들여 왕부 아가씨의 명분으로 대신 보내시려 한답니다.” 보옥은 듣고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소상관에 와서 대옥에게 말했다. “정말 화가 나 죽겠어! 어찌 저리 말이 안 되는 짓을 하지? 화친을 하려면 왕부에 친딸이 있잖아. 어째서 남의 집 딸을 딸로 삼아 대신 내보낸다는 거지?” 대옥은 창 아래 기대어 책을 정리하다가 그 말을 듣고 그저 말했다. “오라버니는 딸로 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만 하시는군요. 누군들 제 딸을 그 삼천 리 밖으로 보내고 싶겠어요?” 보옥은 멍해져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남안태비가 몸소 찾아왔다. 왕부인은 얼른 이환, 탐춘 등과 함께 안채에서 맞았다. 남안태비는 탐춘의 손을 잡고 한동안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지난번 너희 할머님 생신 때 이 집 아가씨들 가운데 너 하나만 불러 나를 만나게 하셨지. 그때부터 기억하고 있었단다. 오늘 먼 곳과 관계되는 일이 있어 우선 너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그러고는 화친과 양녀를 들이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고 다시 말했다. “이번 길은 산도 물도 멀어 서울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명분으로는 내 양녀가 되는 것이며, 모든 예법은 군왕부의 친딸과 똑같이 치를 것이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오늘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고 다른 집을 알아보마.”

왕부인이 막 입을 열려는데 탐춘이 먼저 말했다. “제가 가도 되는 것이라면 태비마마께서 정해 주십시오.”

태비는 한동안 그를 보고 말했다. “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되겠느냐?”

탐춘이 말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만 시서를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그 밖에는 더 많이 붙여 주실 것 없습니다.”

태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아이로구나. 모두 네 뜻대로 해 주마.”

태비는 또 따라온 장사에게 바깥 서재로 가서 가정을 만나 황명을 받든 경위를 밝히게 했다. 가정은 듣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 “황명을 받든 일이고 제 딸도 스스로 응했으니, 태비마마께서 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 곧 양녀의 명분을 정하고 이월 스무엿새를 출발일로 골랐다. 그해 청명은 마침 이월 스무엿새에 들었고 예부에서도 몹시 재촉하여, 집에서 준비할 시간은 스무 날 남짓뿐이었다. 모두 탐춘의 옷과 혼수를 챙기느라 바빴다. 탐춘 자신은 먼저 예전에 정원을 관리할 때 남겨 둔 작은 장부 몇 권을 꺼내 이환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기 소작료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축 할멈의 대나무와 전 할멈의 논도 들어 있고요. 또 화원 두 집에 품삯을 주지 못했어요. 이제 정원에는 그 사람들을 다 쓸 일이 없으니, 치를 수 있는 것은 치러서 헛걸음하지 않게 해 주세요.”

또 작은 열쇠 꾸러미를 꺼내 취묵에게 주며 말했다. “내 방에 남은 물건은 아가씨들이 보고 나누어 가지셔도 돼. 이낭의 매달 은 몇 냥은 그대로 타시도록 해. 내가 간다고 줄일 필요 없어.”

취묵이 열쇠를 받으며 말했다. “아가씨, 더 당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탐춘은 그를 바라보고는 조 이낭이 늘 쓰는 약방문도 꺼내 열쇠 밑에 놓았다. 시서는 곁에서 가져갈 궤짝을 줄이고 또 줄여 네 개만 남겼다. 그런데 그중 하나에는 아가씨가 평소 임서하던 법첩과 벼루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애초 따라가기로 된 나이 든 하녀 둘은 뱃길이 험하다는 말을 듣고 뒤에서 울며 가기 싫어했다. 시서는 이를 알고 둘을 불러들여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목숨을 팔라고 하시지 않았어. 무서운 사람은 돌아가. 노자도 그대로 줄 테니. 다만 배에 오를 때가 되어서야 꾀병을 부려 일을 그르치면,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낯을 깎아 놓아도 원망하지 마.” 그러고는 한 사람씩 은 몇 냥을 주고, 가기를 원하는 혼인한 하녀 둘로 바꾸었다.

떠나기 전날 탐춘은 각 처소로 작별 인사를 다녔다. 조 이낭 방에 가자 조 이낭은 하늘과 땅이 떠나갈 듯 울다가 탐춘의 소매를 움켜잡고 더욱 목 놓아 울었다. “멀쩡한 딸아이를 왕부의 딸 대신 삼천 리 밖 불구덩이를 메우러 보내다니, 내 팔자가 어째 이리도 기구한가!” 한동안 울더니 문득 눈물을 거두고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네가 이제 왕부의 이름 아래 들었으니 전보다 열 배는 번듯해졌다. 이번에는 참으로 높은 가지를 골라 날아오른 셈이지. 환이는 어쨌든 너와 한 배에서 난 동생이니, 거기서 조금이라도 자리만 잡으면 그 애도 한번 끌어 주는 걸 잊지 말아라.” 탐춘은 그저 은 한 꾸러미를 온돌침상에 놓고 말했다. “이낭, 받아 두세요. 환이 일은 나리께서 계시잖아요.”

조 이낭이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네가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느냐?”

탐춘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배는 돌아올 날이 있어도 사람은 꼭 그렇지 않지요.”

조 이낭은 아연하여 그만 목이 메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탐춘은 소매를 살며시 빼내고 몸을 돌려 나갔다.

조 이낭 방에서 나온 탐춘은 다시 소상관으로 가 대옥에게 작별했다. 대옥은 애써 일어나 맞았고, 두 사람은 한참 마주 앉아 있었다. 탐춘이 웃으며 말했다. “임 언니, 몸조심하세요.” 대옥이 말했다.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야. 이렇게 떠나는 편이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탐춘이 말했다. “이 집 형편은 똑똑히 보여요. 나무가 쓰러질 때는 스스로 걸을 수 있는 사람부터 제 발로 한 걸음 먼저 나서야지요.” 대옥은 듣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눈가가 조금 젖어서야 말했다. “그 말은 나도 조금 알겠어. 다만 늘 네가 나보다 더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구나.” 탐춘은 담담히 웃었다. “언니는 본래 그렇게 똑똑히 보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지요. 나는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살아왔으니, 잘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어서예요.” 대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탐춘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게요. 언니는 몸을 잘 보살피세요. 무엇보다 그게 중요해요.”

청명날 하늘은 조금 흐렸다. 탐춘은 먼저 은은한 무늬가 있는 소복을 입고 종사에 들어갔다. 역대 조상들의 위패 앞에는 향연이 무겁게 서려 있었다. 맨 위부터 끝자리까지 한 분 한 분 절하되 모두 세 차례를 돌았다. 일어날 때 이마에 부들 방석의 먼지가 조금 묻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없었다. 가정은 사당 밖에서 기다리다가 탐춘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한마디만 했다. “그곳에 가거든 모든 일을 조심하여라.”

탐춘은 얼른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응한 뒤에야 아뢰었다. “아버님, 마마께서 말씀하신 그 네 글자가 중요합니다.”

가정은 지팡이로 돌계단을 한번 짚어 내리며 말했다. “알고 있다.”

탐춘은 일어나 곧 수레에 올랐다. 나루로 가는 길에 성 남쪽 빈터에서 아이들 몇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새빨간 나비 연 하나가 한창 높이 날다가 문득 옆바람에 실이 끊겨, 흔들흔들 강둑으로 내려왔다. 탐춘은 수레의 발을 조금 걷어 올려 바라보았다. 연은 수레 지붕을 스쳐 강둑 쪽으로 갔다. 시서가 물었다. “아가씨, 무엇을 보십니까?” 탐춘은 발을 내리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루에 이르니 관선이 강 한가운데 정박해 있고, 물가에는 오가는 사람을 실어 나를 작은 배가 따로 있었다. 뱃사공 하나가 물 건너에서 외쳤다. “댁에서 오신 분들, 이쪽입니다!” 그러고는 삿대로 작은 배를 돌 언덕에 가까이 대었다. 왕부의 의장 행렬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깃발들은 모두 바람에 말려 있었다. 강바람이 몹시 세어 물결이 잇달아 달려들고, 강기슭 돌에 부딪쳐 흰 거품으로 부서졌다. 가정과 왕부인, 이환, 보옥, 보차 등이 물가까지 배웅했다. 조 이낭은 끝내 오지 않고 취묵을 시켜 까치가 매화에 앉은 무늬의 장식 비단 향낭만 보내왔다. 취묵은 향낭을 탐춘에게 주며 말했다. “이낭 곁에는 제가 있습니다.”

탐춘은 받아 궤짝 모서리에 매달았을 뿐, 한마디 당부도 하지 않았다.

시서는 급히 바꾸어 뽑은 혼인한 하녀 둘이 아직 물가에서 망설이는 것을 보고 얼른 말했다. “배가 떠나겠어. 갈 사람은 타고, 싫은 사람은 노자 받아 돌아가.” 두 사람은 그제야 뒤따랐다. 탐춘이 널빤지를 밟아 건너갈 때 보옥이 “셋째야” 하고 불렀다. 탐춘은 발을 멈추지 않고 그저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 돌아가세요.”

보옥이 더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왕부의 장사가 벌써 탐춘에게 선실로 들기를 청했다. 탐춘은 들어가지 않고 뱃머리에 서 있었다. 밧줄이 풀리고 작은 배가 돌 언덕에서 밀려 나갔다. 강물이 배 밑에서 묵직한 소리를 냈다. 물가에 선 사람들의 상복은 차츰 한 덩이 흰 그림자로 섞여 들었다.

작은 배가 관선에 닿자 탐춘은 큰 배로 옮겨 탄 뒤에야 선실에 들어가 앉았다. 시서는 선실의 바람이 찬 것을 보고 얼른 궤짝을 열어 새빨간 서양 모직 망토를 꺼내 덮어 주려 했다. 탐춘이 고개를 저었다. “넣어 두어라.” 다시 시서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하더니 선실에서 말없이 한 편을 썼다. 다 쓰고는 혼자 낮게 한번 읽었다.

추상에서 일찍이 은하수 끌어올 뜻 품었으나,
한 손 헛되이 내밀어 뭇 마귀를 다스리려 했네.

안채가 먼저 스스로 무너질 줄 진작 알았으니,
큰 집이 기울려는데 어찌할 수 있으랴.

오늘 아침 조정에서 바람결에 소식을 전하니,
붉게 단장하고 화친하러 먼 물결로 나서네.

뭇 꽃이 울며 붙들고 먼 시집길을 슬퍼하여,
내 몸 떠돌다 그물에 떨어진다 말하네.

어찌 알랴, 붉은 대문도 해진 신짝과 같은 것을,
속세의 그물 무너져 닥치기에 우선 스스로 벗어나네!

옛날 명비는 안문을 나서며,
누런 모래에 말 돌려 한나라 궁궐을 등졌지.

나는 이제 돛을 올려 남쪽 바다로 가니,
차라리 종사를 하직하고 겹겹 물결 건너리.

장기 어린 땅의 바람과 파도 험하다 원망 말라,
귀신 얼굴 많은 소양궁보다는 나으리라.

나는 이제 이 화친의 판을 빌려,
영국부와 녕국부의 피눈물 나는 끈을 끊으리.

내 몸이 고향 떠남을 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숲에서 그물 기다리는 이들에 가슴이 찢어지네.

돌아보니 신주의 봉화는 어둑하고,
백 년의 종정에 깃든 영화도 반은 닳아 없어졌네.

봉황의 분부 간곡한 당부 아직 귀에 남았건만,
근언신행은 끝내 헛되이 세월만 흘렀구나.

자매들은 아직 비단 휘장 속에 잠들어 있으나,
내일이면 재산 몰수에 피가 강을 이루리!

가련하다, 마른 뼈는 명부를 채우고,
탄식하노라, 고운 얼굴들은 재앙의 물결을 기다리네.

큰 꿈에서 놀라 깨어난 것은 오직 우리뿐,
뗏목 빌려 바다에 떠 황금 둥지를 버리네.

긴 바람에 파도 헤치며 구름 돛을 높이 달고,
바다 넓고 하늘 트인 곳에서 그물을 끊으리.

이 몸의 영욕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니,
한 점 조그만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지네.

이제부터는 금 새장 속 새가 되지 않으리,
만 리 긴 하늘로 바람과 물결에 맡겨 가리라!

읽기를 마치고는 종이를 두 번 접어 궤짝 맨 아래에 끼워 넣었다. 뒤에 시서가 궤짝을 정리하다가 비로소 그 흰 종이에 ‘남명사망가’, 곧 남쪽 바다로 가며 그물을 벗는 노래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배는 점점 멀어지고 돛에는 바람이 가득 찼다. 탐춘은 다시 북쪽 물가를 바라보았다. 성 북쪽에서 푸른 연기 한 줄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마치 그 암자에서 오늘 아침 첫 향을 사른 듯했다. 탐춘은 보았으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가씨 집 사람들이 나루에서 돌아오는 동안 보옥은 줄곧 말이 없었다. 막 정원 문을 들어서다가 하인에게서 관선이 벌써 강굽이를 돌아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회랑 기둥 곁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셋째가 이번에 가 버리면 하늘 남쪽 바다 북쪽으로 떨어지는구나. 임 동생은 병들어 있고 둘째 누이는 그런 집으로 갔으니, 자매들이 하나씩 하나씩 흩어지는구나. 이런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보차는 곁에 서서 울음이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셋째 아가씨가 배에 오를 때 뒤를 돌아보던가요?”

보옥은 멍해져 말했다. “아니.”

보차는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든 수건만 건네주었다. 보옥은 받아 들고 정원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살구나무는 꽃이 아직 다 지지 않았는데 가지 사이로 새잎이 몇 장 돋아 있었다. 춘연이 어린 시녀 둘을 데리고 쓰러진 장미 시렁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밧줄을 겨우 매었으나 바람이 불자 다시 느슨해졌다.

탐춘의 배가 떠난 이튿날, 서녕왕부는 먼저 장사를 녕국부로 보내 넷째 아가씨를 양녀로 삼아 날을 골라 왕부로 모셔 가겠다고 전했다. 가진은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그 뒤 왕부의 공문 한 장이 영국부에 도착하자 왕부인은 사람을 석춘의 뜰로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그 하녀가 뜰 문에 이르니 채병이 문밖에 앉아 있고 발치에는 찬물 한 대야가 놓여 있었다.

하녀가 말했다. “얼른 아가씨께 아뢰어라. 왕부에서 큰 경사를 알리는 공문이 왔다.”

채병은 대답하지 않고 문 앞의 발만 잘 여몄다.

실은 채병이 문간에서 왕부의 공문이 왔다는 말을 먼저 듣고 곧 돌아와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하녀는 기다리다 성이 나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문에는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안에서는 ‘싹’, ‘싹’ 소리만 들렸다. 한 번에 이어 또 한 번, 몹시 느리고 몹시 흔들림 없었다. 하녀가 밖에서 몇 차례 불렀으나 안에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부인이 몸소 왔을 때 문이 조금 열렸다. 바닥에는 검은 머리칼이 흩어져 있었다. 석춘은 창을 등지고 앉았고 머리는 이미 반 넘게 잘렸으나, 손에는 작은 가위를 여전히 쥔 채 한 번 한 번 멈추지 않고 잘랐다. 경대 위의 낡은 꽃 장식 함은 열려 있었는데, 안에 있는 얇은 비단을 겹쳐 만든 조화 두 송이는 비단이 모두 누렇게 바랬다. 왕부인은 잠시 서 있다가 말했다. “넷째야, 할 말이 있거든 천천히 하자꾸나.”

안은 고요했다. 왕부인은 어쩔 수 없이 공문을 들고 돌아갔다. 채병은 여전히 문밖에 앉아 등불을 켤 때가 되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틀이 지난 뒤 묘옥이 그 어린 시녀만 데리고 석춘의 뜰 밖으로 왔다. 채병이 얼른 일어나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문이 안에서 열렸다.

석춘은 문 안에 서 있었다. 자르고 남은 짧은 머리를 소박한 끈 하나로 묶고, 묘옥을 보고도 인사말 없이 몸만 비켜 안으로 들였다. 방은 전보다 훨씬 비어 있었다. 벽에는 몇 년째 그려도 아직 마치지 못한 정원 그림이 반쯤 말린 채 기대어 있었다. 농취암 부근의 낮은 담은 겨우 밑그림만 잡았고, 매화 아래에 사람 그림자가 희미하게 서 있었다. 묘옥의 눈길이 그 위에서 잠시 멎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가의 작은 탁자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는데, 예전에 두다가 남겨 둔 그 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남은 판을 이어 두었다. 채병이 차를 들여오자 묘옥은 그 잔을 보았으나 끝내 손대지 않았다. 석춘도 권하지 않았다.

십여 수를 두고 나서 석춘은 왼쪽 귀의 돌 한 무리를 통째로 버렸다. 묘옥이 손을 멈추며 말했다. “여기는 아직 살릴 수 있어요.”

석춘이 말했다. “살려서 무엇 하게요.”

묘옥은 돌 하나를 든 채 한참 있다가 다른 곳에 놓으며 말했다. “나는 평생 더럽다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게 없었어요. 며칠 전 누가 나를 찾아와서는, 문에 들자마자 이 암자가 쓸쓸하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내 나이까지 입에 올리더군요.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곳에도 누가 찾아와 사람의 한평생을 정하려 드는군요. 피할 수 있으면 일찍 피해야 깨끗하지요.”

석춘은 대답하지 않고 묘옥의 머리를 한번 본 뒤 말했다. “당신의 머리는 아직 남겨 두셨군요.”

묘옥이 말했다. “머리를 기른 채 수행해도 본디 같은 것이지요.”

석춘이 말했다. “같지 않아요.”

세 번째 말은 없었다. 두 사람이 남은 반 판을 마쳤으나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곁에서 보던 채병은 알 수 없었다. 묘옥이 일어나 가려 하자 석춘이 문까지 배웅했다. 묘옥은 그의 귀밑에 잘리고 남은 짧은 머리를 보고 말했다. “깨끗이 자르셨군요.”

석춘이 말했다. “깨끗해 보이려고 자른 게 아니에요.”

어린 시녀가 바둑판을 거두려 하자 묘옥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두어라.” 그러고는 가 버렸다.

춘연은 날마다 이른 아침 나무 물통을 들고 이홍원에서 형무원까지 길을 따라 물을 주었다. 예전 화초 명부에 적힌 꽃과 나무는 열에 서넛이 이미 말라 죽었다. 늦게 핀 해당나무 한 그루가 바람에 꺾인 것을 보자 쪼그려 앉아 밑동에 흙을 좀 북돋우고, 풀로 꼰 줄 몇 가닥으로 둘러서 사람들이 밟아 망가뜨리지 않게 했다.

또 하루는 취루가 상운을 대신하여 명절 선물을 가지고 왔다. 가씨 집이 아직 상중이라 상운이 몸소 오기는 어려웠고, 보낸 것도 해산물 몇 가지와 무늬 없는 명주 두 필, 위씨 집에서 새로 만든 떡 한 상자뿐이었다. 뜰의 어린 시녀들은 그 해산물들을 본 적이 없어 취루를 에워싸고 이것저것 물었다. 그중 껍데기에 가시가 난 것이 하나 있었으나 아무도 이름을 대지 못했다. 한 아이가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물고기예요, 열매예요? 왜 온몸에 가시가 났지요?” 다른 아이는 손가락으로 건드렸다가 얼른 거두며 말했다. “뭔지는 몰라도 손 찌르는 것만은 틀림없네.” 옆에 있던 아이가 웃었다. “네가 먼저 먹어 봐. 입 찔렸다고 취루 언니 탓하지는 말고.” 모두 웃었다. 그 소리가 희봉의 방에까지 곧장 들어갔다.

희봉은 막 약을 반 사발 마셨는데 바깥 웃음소리를 듣고 침상 가장자리를 짚어 일어나려 했다. 평아가 얼른 붙들고 말했다. “마님, 움직이지 마세요. 취루는 선물만 전하러 왔어요. 조금 있다가 안으로 불러 절을 올리게 하겠습니다.”

희봉은 반쯤 몸을 일으키다가 눈앞이 캄캄해져 다시 베개 위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말했다. “누가 그 애 절 받는 게 아쉽다더냐. 선물 목록이나 가져와 보아라. 남에게 보내는 답례가 모자라서는 안 된다.”

평아가 말했다. “모두 마련해 놓았습니다.” 희봉이 또 물었다. “너, 옛날에 나를 따라왔던 그 몇 사람을 아직 기억하느냐?” 평아는 “기억합니다” 하고 대답한 뒤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옆방에서 어린 시녀 하나가 맑은 소리로 웃었다. 희봉은 눈을 뜨고 잠깐 듣더니 말했다. “웃으려면 바깥에 가서 웃으라고 해라. 마님께 시끄럽게 해 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말이 끝나자 평아는 얼른 휘장을 내리고 풍아에게 뜨거운 물을 갈게 했다. 창턱의 대나무 체 두 개에는 약 찌꺼기가 널려 있었고 아직 버리지 않았다.

조금 뒤 평아가 일을 돌보러 나가자 방에는 희봉 혼자 남았다. 창 너머로 취루가 하직하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가면서도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분부가, 이 선물은 둘째 마님 손에 직접 전해야 일이 끝난 것이랬어요.” 희봉은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으로 이불 위를 더듬다가 갈아 놓은 낡은 천 반 폭을 만져, 한동안 움켜쥐었다가 다시 놓았다.

그날 밤 희봉은 열이 올라 몽롱하게 잠들었다. 진씨가 발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예전처럼 맑고 고운 모습으로, 옷깃에는 풀잎 한 가닥도 없고 손에도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희봉이 일어나 앉으려 하자 진씨는 침상 앞에 서서 그저 말했다. “운수가 끝날 때가 되었어요.” 그러고는 몸을 돌려 갔다. 희봉이 눈을 떴을 때 휘장 밖의 등잔 심지는 몹시 길게 타 있었다. 평아는 발판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고 손에는 피에 물든 낡은 천 반 폭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다. 희봉은 한동안 바라보았으나 깨우지 않았다.

이튿날 가련이 방에 들어와 침상 앞에 서서 희봉을 보았다. 희봉은 평아를 내보내고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가련이 말했다. “할 말 없소.”

희봉이 차갑게 웃었다. “할 말도 없는데 서서 무엇 하세요?”

가련은 조금 더 서 있다가 돌아 나가 바깥방에 앉았다. 책 한 권을 손에 들었으나 펼치지 않고 이리저리 뒤집기만 했다. 손가락으로 책등을 꼭 움켜쥔 채 안의 기척을 들었다. 희봉은 침상 곁의 약 사발을 집어 입술까지 가져갔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후에 평아가 죽을 가져왔으나 한 입만 먹었다. 가련이 다시 들어와도 묻지 않았고 희봉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채명에게 낡은 장부를 베갯머리로 옮겨 오라 했다. 두 쪽을 넘기자 붉은 붓이 손가락 사이에서 이불 위로 떨어져 붉은 점 하나를 찍었다. 평아가 얼른 수건을 가져다 닦으려 하자 희봉은 고개를 젓고 여전히 장부를 넘겼다. 뒤에 이 장부에서 무엇이 밝혀졌는지, 다음 회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 번역에 관하여

인명은 최용철·고민희 번역을 참조한 한국어 독서 전통과 프로젝트의 표기 원칙을 따릅니다. 진한의 중국어 원작에서 독립적으로 번역하여 대화와 시가, 서술의 여백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