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가 읽는 『장자』 · 제67편 · 맺음
여기까지 읽고, 판단을 다시 자기 손에 놓습니다
예순일곱 편을 결론표 하나로 만들지 않고 책으로 가는 자기 길을 남겨 마칩니다. 마지막에는 서로를 잊을 수 있는 물로 돌아갈 물고기와 함께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면 독자에게 가지런한 무엇을 주고 싶어지기 쉽습니다. 예순일곱 편은 세 가지 이치로 요약되니 기억해서 가져가면 된다는 식입니다. 저에게도 그 충동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읽었으니 대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끝에 등장인물도, 잠시 멈춘 순간도,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전부 결론표 하나로 누르면 앞의 우회는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요? 그래서 여기서도 설명하되 책 전체의 끝을 말끔하게 봉하지는 않겠습니다.
줄곧 물은 것은 같은 일이었습니다
혼돈의 몸에 일곱 구멍을 내는 일에서 뒤의 기술과 대화, 논의까지, 이 해석들이 되풀이해 물은 것은 말한 뒤에도 읽는 사람이 스스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느냐입니다. 결론이 있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장자』는 판단하고 논쟁하며 어떤 삶이 다른 삶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포정도 칼을 놓고 영원히 입을 다물지 않습니다. 어떻게 칼을 쓰고 어려운 곳을 만나면 어떻게 신중해지는지 말합니다. 설명했다고 이야기가 손상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볼 것은 그 말들이 주의를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눈앞의 것이 더 잘 보이게 하는가, 내가 올바른 답을 말했는지 확인하느라 바쁘게 하는가? 경험을 펼쳐 보여 주면서 이 예로는 다른 처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남이 지적할 수도 있게 하는가? 여기에는 한 번 재면 결과가 나오는 자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계산의 걸음을 하나하나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학생이 선생님에게서 떠나도록 돕는 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한마디만 남긴 사람이 남을 몇 년이나 자기 앞에 붙들 수 있습니다. 말이 긴지 짧은지만으로 자유를 주었는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침묵도 꾸밀 수 있고 함축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독법을 거듭 묻는 일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진짜 모습을 가려내는 도구로 높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논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쓴 사람의 마음을 전부 읽을 수는 없고, 자기 취향의 어조만으로 이천여 년 전 누가 썼는지 확인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야기들은 한 줄로 설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에서 가장 놓기 아쉬운 것은 전할 수 있는 주장보다 주장이 모두 거두어 가지 못한 세부일 때가 많습니다. 포정은 힘줄과 뼈가 얽힌 어려운 곳에 이르면 여전히 경계하며 동작을 늦춥니다. 그렇게 익숙한 사람도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자기 속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자연을 따른다는 말보다 조금 더 얻었습니다. 다음에 익숙한 일을 하다 갑자기 막혀도 자기 숙련됨을 지키려고 억지로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혼돈의 이야기는 다른 순간에 돌아옵니다. 남을 도우려 하는데 자기 방법에는 문제가 없고 남은 것은 상대가 받아들이느냐뿐이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때 구멍을 내던 이들도 보답하려 했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도움은 나쁘다는 결론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정말 남의 손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막아야 할 해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자기 확신을 확인하게 하지 판단의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장자가 장석이 영 땅의 사람을 잃은 이야기를 빌려 혜자의 죽음을 말하는 장면은 효율에 관한 수업에 종속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장석에게 다시 그런 도끼 솜씨를 보이게 할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어떤 말과 기술은 구체적인 사람 한 명과 함께 자랐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어진 자리를 아무 청자나 찾아 메울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가져갈 세부는 다릅니다. 같은 사람도 몇 년 뒤 다시 읽을 때 같은 문장에 붙잡히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도 되는 것은 아니고 모든 풀이가 똑같이 좋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전히 글로 돌아와 자기 독법이 어디에 서 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 한 권의 쓰임이 모두에게 유효한 하나뿐일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에도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는 텍스트를 논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썼습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이야기가 펼쳐 놓은 자리를 나중의 단언이 너무 좁게 닫는다고 느꼈습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독서의 감각이지만 저자를 판정할 증거의 사슬은 아직 아닙니다. 『한서·예문지』는 『장자』를 쉰두 편으로 기록하고, 오늘 통행본은 서른세 편입니다. 육덕명의 『경전석문서록』에도 편수가 다른 주석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손에 든 책에는 전승과 편집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쉰둘에서 서른셋을 뺀다고 열아홉 편의 장자 친필 유실 원고가 무엇인지 찾은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편을 나누었고 어떤 자료를 함께 엮었으며 언제 취하고 버렸는지는 구체적인 증거가 더 필요합니다. 뺄셈 하나로 모르는 것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글이 힘 있다고 반드시 장주가 썼다는 뜻도, 어설프다고 반드시 후대의 위작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모방과 정리, 서로 다른 집필 목적 때문에 문체 판단이 빗나갈 수 있습니다. 글 안의 단서는 논할 가치가 있지만 전해지는 판본과 고대의 인용, 다른 자료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증거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결론도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읽는 데 방해되지는 않습니다. 이 대목의 추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먼저 말하면서도 급히 책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장주가 쓰지 않은 대목도 생각할 가치가 클 수 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논증이 좋은지,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주는지는 서로 관련되어도 대신할 수 없는 세 질문입니다. 새 자료가 나오면 옛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모든 빈 곳이 채워져야만 눈앞의 페이지를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심하려고 이미 공백이 없어진 척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 해석들도 그 안에 놓습니다
앞의 글이 이런 검토를 받아야 한다면 예순일곱 편도 같습니다. 판단을 독자에게 돌린다고 계속 말하면서, 끝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는 틀림없이 장자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끼게 한다면 그 말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제 독법에 맞는 문장만 고르고 뒤의 논의를 숨긴다면 끝을 가볍게 썼다고 독자를 더 존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앞의 해석에서는 핵심 인용과 그 뒤의 말을 되도록 다시 가져오고, 원문이 한 말과 거기서 제가 떠올린 일을 나누려 했습니다. 찬성하고 반대하는 이유도 말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오류가 없다고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잘못을 지적받을 기회를 둡니다. 어떤 편은 받아들이고 다른 편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현대의 비유가 오히려 고문을 가렸다고 느껴 원래 책을 곧장 읽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산문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당신과 책 사이에 영원히 남을 자리를 자기 몫으로 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길잡이는 매번 질문 하나를 남긴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더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편마다 물음표로 끝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이 독자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차례와 설명, 읽는 경로는 들어오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나갈 여지가 있는지는 그다음 더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뒤에 네 권의 이론적 바탕을 두었더라도 다 읽어야만 이 여정을 마친 것으로 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하고 싶으면 계속하면 됩니다. 어느 곳까지 읽고 충분하다고 느끼면 멈추어도 됩니다.
다시 물로
마지막에는 「대종사」의 물고기를 다시 읽고 싶습니다.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함께 뭍에 놓여, 서로 젖은 숨을 불어 주고 거품으로 적셔 준다. 그러나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비교입니다. 그 장면을 좋아한다고 장자가 아무 판단도 주지 않은 척할 수는 없습니다. 뒤에는 요를 칭찬하고 걸을 비난하는 데 대한 논의도 곧바로 이어집니다. 사상과 무관한 순수한 그림이었는데 설명에 오염되어 순수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비교는 무엇을 보이게 할까요? 샘이 말라 물고기는 약간의 습기와 침으로 겨우 버팁니다. 그렇게 서로 돕는 일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계속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강과 호수는 서로를 돌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다른 삶의 조건입니다. 매 순간 상대가 목숨을 구해 주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것으로 이 산문을 읽는 것은 제가 여기서 하는 유비입니다. 책 속 물고기가 작가와 독자를 암시한다는 뜻도, 책을 다 읽으면 사람에게 더는 남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어떤 설명이 한동안 걸음을 도운 뒤에는, 내가 설명에 맞게 걷고 있는지 늘 돌아보라고 요구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전히 돌아올 수 있고 남과 함께 읽을 수 있으며, 책을 한쪽에 두고 여기서 대신 생각해 주지 않은 일을 하러 가도 됩니다. 예순일곱 편은 여기서 멈춥니다. 남는 것이 곧장 외울 수 있는 답 한 벌이 아니라, 다음에 남의 결정을 대신 내려 하다가 그 사람을 한 번 더 본 일이라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겠습니다.
원문과 출처
이 한국어판은 Non Dubito의 중국어 산문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장자』 원전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며, 고문 인용 부분도 여기서는 그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중국어 원래 페이지에는 고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기존 영어판 역시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고,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례에 빗대거나 거기서 논의를 더 펼친 부분은 이 산문 저자의 해석이지, 원전에 그런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과 해석에 관한 설명
원문과 읽기: 「대종사」 중국어 원문 ↗
중국어 페이지에는 고문 인용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기존 영어 서술은 이 판을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인용의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현대 사례에 빗대거나 더 펼친 생각은 저자의 해석이며, 원문에 그런 사건까지 따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편수와 전승본 참고: 『한서·예문지』 중국어 ↗ · 육덕명 『경전석문서록』 중국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