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가 읽는 『장자』 · 제48편
평가에는 보는 이의 자리도 들어 있습니다―「추수」 셋째와 넷째 물음
같은 확인이 우유부단함으로도, 마지막 안전장치로도 읽힙니다. 그래서 아무 평가나 괜찮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재는지 한마디 더 적어 봅니다.
평가서에는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습니다. 회의 몇 번이 떠오릅니다. 그는 정말 거듭 확인했고, 남들은 나아가려는데도 빠뜨린 것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평가에는 마지막 관문을 지켜 주는 사람이라고 적힐 수도 있습니다. 근거로 든 사례는 똑같은 회의들입니다. 둘 중 하나만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다른 면을 보았을 수도 있고, 같은 동작을 서로 다른 과제에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우리가 흔히 ‘이 사람이 어떤가’만 읽고, 뒤에 쓰지 않은 말을 못 본다는 점입니다. 어떤 일과 자리, 어떤 필요에서 보았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백과 북해약의 대화는 이 생략된 말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우선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인정합니다
천지와 털끝 이야기에 이어 하백은 세상에서 하는 두 말을 묻습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형체가 없고 가장 큰 것은 둘러 한정할 수 없다는데 정말 그러한가? 북해약은 작은 쪽에서 큰 것을 보면 다 보지 못하고, 큰 쪽에서 작은 것을 보면 똑똑히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어 형체와 수량, 언어와 마음이 닿는 범위를 나눕니다. 그런 구분을 넘어서는 곳은 여전히 정밀함과 거침이라는 양끝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논의는 아닙니다. 쉬운 말 몇 줄로 모든 철학적 차이를 해결한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일상으로 잇는 주의 하나는 붙잡을 수 있습니다. 더 큰 자리로 옮긴다고 반드시 더 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에서는 부분에 안 보이는 관계가 드러나지만 부분에서만 보이는 세부가 지워질 수도 있습니다. 가지런한 진척표에서 각자의 시간은 똑같은 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칸에는 승인을 거듭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다른 칸에는 남의 잘못을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표가 진척을 보고해도 그 경험을 모두 저절로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전체를 보는 것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나는 전체를 본다’가 구체적인 설명은 더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이어서 하백은 귀천과 크고 작음을 대체 어디서 나누느냐고 묻습니다. 북해약이 답합니다.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 귀천이 없다. 각각의 사물에서 보면 자신을 귀히 여기고 서로를 낮춘다. 세속에서 보면 귀천은 자기 혼자 정하지 못한다.
도에서 보면 고정된 귀천은 없습니다. 각각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중히 여기고 남을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세속의 평가에서는 자기 혼자 정하지 못합니다. 뒤에는 차이에서 보기, 쓰임에서 보기, 지향에서 보기가 더 이어집니다. 차이와 기능, 향하는 곳과 각자가 인정하는 것을 봅니다. 이 시작 표현대로 세면 여섯 관점입니다. 앞의 말들을 잘라 다섯 개의 독립된 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나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아닙니다. 더 급한 질문은 뒤에 나옵니다. 지금 북해약은 우선 귀천과 크기가 어디서 왔는지 보여 줍니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가격표가 영원히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로 사실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큰 면에 따라 크게 보면 만물 가운데 크지 않은 것이 없고, 작은 면에 따라 작게 보면 만물 가운데 작지 않은 것이 없다.
큰 면을 보면 크게, 작은 면을 보면 작게 보입니다. 첫 평가를 다시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빠르게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는 일에서는 반복 확인이 늦출 수 있습니다. 쉽게 틀리면 안 되는 단계에서는 같은 확인이 결과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는 사람이 평가를 전부 결정하고, 보이는 사람과 실제 일어난 것은 상관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꼼꼼하다 해도 실제 핵심 오류를 놓쳤다면 증거를 마주해야 합니다. 남이 느리다고 하면서 자료가 제때 안 왔다는 사실을 일부러 뺐다면 평가도 고쳐야 합니다. 관점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아닌 말에 검사 면제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 전에 물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답하려는가? 증거는 어떤 일들인가? 한 번의 모습을 영원한 성격으로 쓰고, 한 항목에 안 맞음을 사람 전체가 가치 없다는 말로 바꾸지 않았는가? 자의 출처가 있다고 수치를 마음대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출처를 알기 때문에 자를 맞는 곳에 썼는지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쪽은 왜 언제나 그렇게 중요할까요
자신을 귀히 여기고 서로 낮춘다는 말은 논쟁하는 자신을 알아보게 합니다. 제품을 만드는 쪽은 기다리는 사용자를 보고, 운영하는 쪽은 아직 불안한 시스템을 봅니다. 둘 다 실제 압력이 있고 꾸민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누가 더 진지한지만 물으면 길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심이라고 둘 다 옳지는 않습니다. 한쪽 자료가 낡고 다른 쪽 위험 추정이 과할 수도 있습니다. 양쪽이 조금씩 알면서도 남이 부담하는 대가를 가볍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유를 내놓는 것은 논쟁을 판단에서 면제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야 판단할 자료를 얻는 것입니다.
이 고문이 누구나 언제나 자신을 최고로 여긴다는 수학 정리도 아닙니다.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고 타인의 척도를 배우며, 남의 필요를 진심으로 중히 여기기도 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기 쉬운 성향을 눈앞에 가져와, 모르는 사이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곳을 차지했는지 보게 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맞은편 사람에게도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알아본다고 자기 판단을 버릴 필요는 없을지 모릅니다. 적어도 상대를 아무 이유 없이 시비 거는 사람으로 먼저 만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쓰임 밖에도 살아갈 날이 있습니다
쓰임에서 본다는 것은 능력과 용도를 구체적인 일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뒤의 글은 준마가 먼 길을 가는 데는 능하지만 쥐 잡기는 이성(狸狌)이라는 짐승만 못하다고 합니다. 말이라는 동물이 열등하다고 판정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특기가 모든 일을 대신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에 대입하면 분명합니다. 아이디어가 좋아도 인수인계를 세밀히 하는 데는 약할 수 있습니다. 인수인계를 잘한다고 평생 남의 일을 마무리하는 역할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배우고 방향을 바꿉니다. 장점이 드러났다고 특정 도구로 고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향에서 본다는 말은 사람마다 추구하고 인정하는 것이 다름을 보입니다. 원문은 요와 걸이 각자 자기를 인정하고 서로 부정하는 예까지 듭니다. 그 대립을 폭정과 어짊도 똑같이 좋다는 말로 지워서는 안 됩니다. 누가 다쳤고 이유가 성립하는지 여전히 물어야 합니다. 입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하는 것과 면책하는 것은 다릅니다. 뒤에는 다투고 양보한 다른 결말을 들어, 겉으로 비슷한 행동도 시세와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고대 정치 서술이 오늘날 성공 여부로 모든 정당성을 결정해도 된다는 허가증은 아닙니다. 동작을 흉내 내도 왜 그 한 번에 유용했는지 아직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남의 평가는 영향을 주지만 전부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세속에서 귀천은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말은 실제적입니다. 명성과 몸값, 채용 여부는 자기 말만으로 정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혼자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과 영원히 영향을 못 준다는 것은 다릅니다. 설명하고, 일을 보여 주고, 잘못된 기록을 고치며, 남과 함께 부당한 규칙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해와 사회 평가가 영원히 못 겹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낮은 평가는 기회에 영향을 주고 아프기도 합니다. ‘신경 쓰지 마’라는 말로 결과를 지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최종 결산은 아닙니다. 생산량만 적는 표에 없는 돌봄과 인내, 배움도 기록 안 됐다고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남의 평가를 쓸 때도 같습니다. ‘이번 설명에는 필요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말이 ‘당신은 판단력이 전혀 없다’보다 정확하며 개선의 길도 남깁니다. 문제를 가볍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문제 하나가 한 사람의 전부인 척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가장 높은 관람석을 남기지 않도록
도의 관점에서 보면 귀천이 없다는 말은 고정된 등급을 풀고, 부분적인 선호 하나로 만물을 영원한 위아래에 놓지 않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아무 자리도 없는 곳에 섰고, 남들은 다 편견이 있지만 나만 각자의 한계를 판정할 수 있다고 빨리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귀천이 없다는 말이 오히려 내게 가장 높은 관람석을 만듭니다. 앞의 원문에는 남을 해치는 행동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분명히 있고 뒤에도 행동상의 요구가 있습니다. 무조건 상관없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업신여김을 줄이는 데 빌리면서도 해를 알아보고, 이유를 설명하고, 상대의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 읽고 쓸 다음 평가가 ‘각자 보는 것이 다르다’뿐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일이 무엇을 요구하고 누가 무엇을 했으며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여전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쓰기 전에 생략한 말 한마디를 더합니다. 이 조건에서 이 물음에 답하려고 여기서 본 것입니다. 긴 문장은 아닙니다. 판단에 경계를 남기고 판단받는 사람에게 계속 자랄 여지를 조금 남깁니다.
원문과 출처
이 한국어판은 Non Dubito의 중국어 산문 전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독립적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장자』 원전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며, 고문 인용 부분도 여기서는 그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중국어 원래 페이지에는 고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기존 영어판 역시 영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고, 중국어 간체·번체판에는 전문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례에 빗대거나 거기서 논의를 더 펼친 부분은 이 산문 저자의 해석이지, 원전에 그런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문과 해석에 관한 설명
원문과 독법: 「추수」.
중국어 페이지에는 고문 인용을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기존 영어 서술은 이 판을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이 한국어판에서는 인용의 내용을 한국어로 풀어 전합니다. 현대 사례에 빗대거나 더 펼친 생각은 저자의 해석이며, 원문에 그런 사건까지 따로 기록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참고한 주석: 『장자집석』 「추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