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한 나라의 답으로 여겨진 축구팀과 끝내 종결되지 않은 두 미제 사건
1998년 프랑스는 다문화 대표팀의 우승을 사회 통합의 완성으로 읽었다. 같은 날 호나우두에게 일어난 일은 국회 조사로도 결론 나지 않았다. 하나는 거짓 종결, 하나는 진짜 미결이었다.
이 글의 목차
1. 답으로 여겨진 그 팀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 팀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방식은 다른 우승팀과 사뭇 달랐다. 한 나라가 안고 있던 난제의 답으로 여겨진 것이다.
월드컵 역사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다. 보통 우승팀에 돌아가는 것은 영광과 트로피, 그리고 한 세대의 기억이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대표팀에는 그 이상이 주어졌다. 축구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기대가 실렸다. 사람들은 이 팀이 한 번의 승리로 축구가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 주기를 바랐다. 한 나라 안에서 피부색도 뿌리도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축구팀이 짊어져서는 안 될 짐이었다.
팀 자체는 축구를 하는 열한 명일 뿐이다. 그들의 할 일은 공을 잘 차고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1998년 사람들은 이 팀에 축구 바깥의 의미를 겹겹이 얹었다. 한 나라가 자기 안의 갈등을 풀었다는 증거이자 다양성의 이상을 실현한 모범으로 삼았다. 아름다운 기대였지만 무거웠고, 위험하기도 했다. 일단 한 팀이 답으로 여겨지면 그 팀의 승리는 곧 그 답이 옳다는 증명으로 과잉 해석된다. 정작 그 뒤에 놓인 난제는 승리에 가려 잠시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더는 힘들여 풀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을 낳는 것이다.
이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의 출신은 무척 다양했다. 튀랑은 과들루프에서, 드사이는 가나의 아크라에서, 비에라는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태어났다. 팀의 중심인 지단은 마르세유 태생의 알제리계였다. 피부색도 뿌리도 다른 이 팀이 프랑스에 월드컵 트로피를 안기자 한 구호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 이 세 가지 색이 모인 모습이 새로운 프랑스라는 것이었다.
이 세 단어는 프랑스 사회를 이루는 세 조각을 가리킨다. 흑인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도(道)에서 온 흑인들, 백인은 프랑스 본토의 백인들, 북아프리카계는 알제리와 모로코 같은 옛 식민지에서 온 아랍계 사람들이다. 현실의 프랑스 사회에서 이 세 집단 사이에는 줄곧 깊은 간극과 긴장이 있었다. 특히 옛 식민지 출신 이민자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차별받고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 팀은 그 세 조각을 같은 파란 유니폼 안에 모았다. 그 조각들은 빈틈없이 맞물렸고, 월드컵까지 제패했다.
이 구호가 지닌 무게는 경기장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 구호는 축구의 승리를 슬그머니 다른 무언가의 승리로 바꿔 놓았다. 피부색과 뿌리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다원적인 프랑스가 성공했다는 뜻으로 말이다.
이런 환산이 매혹적인 이유는 극도로 어려운 일과 상대적으로 눈에 잘 보이는 일을 등호로 이어 주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인종 집단이 진정으로 통합되는 일은 어렵고 더디며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반면 월드컵 우승은 구체적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온 국민이 지켜볼 수 있다. 후자를 전자의 증거로 삼는 순간, 그토록 어려운 일에도 갑자기 눈에 보이는 증빙이 생긴 듯하다. 하지만 이 등호는 허상이다. 경기장에서의 단결에는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이기는 것이다. 현실 사회에는 인종 간 차이를 압도할 만한 그런 공동의 목표가 없다. 그 목표를 빼고도 경기장 안의 단결을 바깥으로 옮겨 심을 수 있을까. 커다란 물음표가 남는다. 우승하던 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샹젤리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개선문에는 지단의 얼굴과 함께 한 줄의 문구가 비쳤다. “지단을 대통령으로.”
그날 밤의 장관은 사람들이 그 답을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로 했는지 보여 준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한 거리에 모여들었다. 나라에서 가장 엄숙한 기념물에 축구선수의 이름과 대통령이라는 말을 나란히 내걸었다. 축구 한 경기의 승리를 축하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 일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대표팀의 승리만을 기뻐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는 무언가를 축하했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모든 프랑스인이 하나가 되는 프랑스가 정말로 찾아온 듯했다. 그날 밤 파리는 한 팀을 위해 열광했다기보다 자기 자신에 관한 아름다운 상상에 열광했다. 공을 차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한 나라가 자신을 두고 꾸는 꿈이 된 것이다.
우리가 따라가 볼 것은 바로 이 환산이다. 축구 경기의 승패와 사회의 난제는 본래 별개의 일이다. 그런데 1998년에는 전자가 후자의 답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같은 월드컵은 또 하나의 미제 사건도 남겼다.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한 사건이었다.
두 사건 중 하나는 밝은 곳에서 떠들썩하게 펼쳐졌다. 온 나라가 답이 나왔다며 환호했다.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 있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진실을 두고 전 세계가 추측을 쏟아 냈다. 하나는 인종과 국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한 선수의 몸에 관한 문제였다.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지만,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으로 들여다보면 둘은 놀랍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2. 승패는 종결할 수 있어도 통합은 종결할 수 없다
먼저 이 환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분명히 해 두자.
이 환산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을 주기에 매력적이다. 인종 문제는 거대하고 막연해서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다. 반면 한 경기의 승패는 명료하고 구체적이며 한눈에 들어온다. 전자의 답을 후자에게 맡기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던 난제가 갑자기 손안에 들어온 듯해진다. 이 경기만 이기면 그 난제에도 답이 생길 것 같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단순화다. 답이 없는 큰 문제를 답을 낼 수 있는 작은 문제로 바꿔 놓고, 작은 문제의 답을 큰 문제의 답인 양 내세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인종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다는 안도감이다.
경기의 승패는 구축이 종결할 수 있는 것이다. 종료 휘슬이 울리면 점수가 확정된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 명백하게 기록되고 더는 논란이 없다. 3 대 0은 3 대 0이고 프랑스의 우승은 프랑스의 우승이다. 완전히 닫을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사회의 인종 간 통합, 한 나라 안에서 뿌리가 다른 사람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문제는 그렇지 않다. 종료 휘슬도 점수도 없다. 길고 반복적이며 확실한 종착점이 없는 과정이다.
두 일은 시간의 규모부터 전혀 다르다. 축구는 90분이고, 길어 봐야 연장전과 승부차기가 더해진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승자와 패자도 뚜렷하다. 사회의 통합에는 몇 세대,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시작 휘슬도 종료 휘슬도 없다. 어제 한 걸음 나아간 듯하다가 오늘 두 걸음 뒤로 물러날 수도 있다. 어떤 경기가 몇 분에 끝났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어느 사회의 인종 간 골이 어느 날 메워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가 점이라면 후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선이다. 선 위의 한순간을 선 전체의 종점으로 삼는 것부터 잘못이다.
1998년의 환산은 바로 여기서 어긋났다. 종결할 수 있는 승패를 종결할 수 없는 통합의 답으로 삼았다. 이렇게 말하는 셈이었다. 보라, 흑인과 백인과 북아프리카계가 함께 우승했다. 다원적인 프랑스가 성공했고 인종 간 균열은 아물었다. 늘 이민자를 공격하던 르펜은 망신을 당했다. 축구 한 경기에서 이겼으니 사회의 난제도 덩달아 해결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종결이다. 우승컵은 피부색이 다른 열한 명이 경기장에서 완벽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경기장 밖 수천만 명의 마음속 장벽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못 된다. 경기장은 엄격한 규칙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피부색은 중요하지 않고 골이 중요하다. 승리라는 공동의 목표가 잠시나마 모든 차이를 녹일 수 있다. 하지만 경기장 밖의 사회에는 그런 공동의 목표도 종료 휘슬도 없다. 안에서 거둔 승리를 밖에 놓인 난제의 답으로 삼는 것은 작고 확실한 일로 크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이 끝났다고 우기는 것이다. 구축이 언제나 가장 원하는 것은 깔끔한 종결, 명확한 답이다. 1998년의 한 사회는 그 답을 너무나 원했다. 그래서 축구의 승리를 붙들고는 실제로 얻지도 못한 승리를 스스로 선언했다.
그 충동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인종 간 장벽은 무겁고 까다로우며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난제다. 단번에 듣는 약은 없다. 길고 고된 노력으로 조금씩 허물어야 한다. 사람들은 답이 없는 그 무게에 지쳤다. 명확하고 고무적이며 한 번이면 영원히 끝나는 답을 갈망했다. 마침 1998년의 승리가 완성된 답 하나를 내밀었다. 눈부시고 감동적인 답이었다. 잠시나마 그 무게를 잊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 답을 움켜쥐었다. 실제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해결되었다고 믿는 일이 너무나 절실했기 때문이다.
3. 그 답은 어떻게 무너졌나
거짓 종결은 언젠가 현실 앞에서 들통난다. 그것을 드러낸 것은 이후 몇 년 사이에 벌어진 분명한 사건들이었다.
먼저 이 꿈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자.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라는 말은 1998년에 갑자기 생겨난 구호가 아니다. 이 구호에서 북아프리카계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호칭 “뵈르(beur)”는 이미 1980년대에 프랑스의 도시 문화와 반인종주의 담론에서 쓰이고 있었다. 세 단어의 조합도 월드컵 이전부터 존재했다. 1998년이 한 일은 이 말을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 우승의 광희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 크게 증폭했다. 주변부의 표현을 다원적인 프랑스를 묘사하는 유행 구호로 바꿔 놓은 것이다. 어느 매체가 맨 처음 그 구호를 크게 외쳤는지는 확실한 출처를 찾을 수 없다. 다른 많은 구호처럼 출생 이력이 깔끔하지 않다. 다만 적절한 순간에, 그 말을 절실하게 원하던 사회가 덥석 붙들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는 앞선 글들에서 살펴본, 나중에 의미를 부여받은 말들과 맥을 같이한다. 사리아에서 “축구는 죽었다”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정확한 출처를 찾을 수 없다. “신의 손”을 복수로 보는 틀도 뒤에 거듭 덧대어졌다.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천재가 1998년에 번뜩 떠올린 발명품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있던 표현에 특정한 순간, 본래 없던 무게가 실렸다. 구호가 기억되는 방식은 누가 그 말을 했느냐보다 언제 그 말이 사람들이 가장 믿고 싶어 하던 것을 대신 말해 주었느냐에 달린 경우가 많다.
이 꿈에는 구체적인 적수가 있었다. 1996년 극우 정치인 르펜은 외국에서 불러온 선수들을 프랑스 대표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많은 선수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지 않으며, 심지어 부를 줄도 모른다고 불평했다. 이 발언은 1998년 우승 당시 거듭 소환되었다. 프랑스 사회가 이 팀을 이해하는 정치적 배경을 이룬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승 순간의 환호에는 이런 뜻도 담겨 있었다. 르펜이 틀렸다. 그가 인위적으로 만든 팀이라던 바로 그 팀이 프랑스에 최고의 영광을 안겼다.
그 환호에는 반격의 통쾌함이 있었다. 그 우승은 경기 상대를 이긴 결과일 뿐 아니라 르펜 같은 사람들에게 보란 듯 거둔 승리인 듯했다. 그의 배외주의 발언에 따귀를 시원하게 날린 셈이었다. 인위적인 팀이라고 했지만 그 팀은 보란 듯 프랑스의 자랑이 되었다. 프랑스를 대표할 자격이 없는 선수들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보란 듯 월드컵 트로피를 프랑스로 가져왔다. 그날 밤의 광희 속에서 축구의 승리는 자연스레 가치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다양성과 포용이 배외와 편협을 이긴 승리였다. 그 의미가 트로피를 유난히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몇 년 뒤 현실이 답을 내놓았다. 2001년 10월 6일, 프랑스와 알제리가 친선경기를 치렀다. 알제리 독립 이후 두 나라가 처음 맞붙는 경기였고, 화해의 상징이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는 76분에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하면서 중단되었다. 화해를 상징할 경기가 혼란으로 끝난 것이다. 이어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르펜이 1차 투표를 통과해 결선에 진출했다. 1998년에 망신을 당했다고 여겨진 그 사람이 4년 뒤 프랑스 정치 무대에서 권력에 가장 가까운 자리 가운데 하나에 서 있었다.
여기서는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의 범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 확증되는 것은 르펜이 1996년에 한 인위적인 팀과 「라 마르세예즈」에 관한 발언, 그리고 그 말이 1998년에 거듭 언급되며 낳은 정치적 효과다. 정작 1998년 우승 당시 르펜이 출처가 명확한 새로운 발언을 했는지는 신뢰할 만한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정해서 써서는 안 된다. 확실한 것은 1996년에 던진 공격과 2002년 결선 진출이라는 결과다. 이 시작과 끝만으로도 거짓 종결이 어떻게 세워지고 깨졌는지 충분히 그려진다.
이 반전은 잔혹할 정도다. 1998년 사람들은 한 번의 승리로 르펜과 그가 대표하는 것들을 역사의 구석으로 쓸어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4년 뒤, 이미 탈락했다고 믿었던 사람은 탈락하기는커녕 대선의 최종 승부까지 올라왔다. 이는 1998년의 승리가 선언한 “다원적인 프랑스는 승리했다”는 답이 실제로는 별로 많은 것을 바꾸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경기장에서 날린 따귀 소리는 요란했지만 경기장 밖 수백만 명의 마음에 실제로 자리 잡은 불안과 불만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것은 줄곧 그 자리에 있었다. 우승컵 하나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환호에 잠시 묻혔을 뿐이다. 4년 뒤에는 투표용지의 형태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올랐다.
이 두 사건은 1998년의 거짓 종결을 가장 직접적으로 폭로했다. 축구 경기에서는 분명히 이겼다. 그러나 사회의 균열이 그 승리 덕분에 아물지는 않았다. 통합은 결코 닫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승컵 하나를 들이민다고 통합에 종료 휘슬을 불 수는 없다. 1998년에 선언한 답은 2001년과 2002년에 이르러 일방적인 바람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4. 말없는 상징
거짓 종결에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이번에는 한 사람, 지단의 이야기다.
우승 뒤 지단은 통합의 상징이라는 자리에 떠밀려 올라갔다. 개선문에 비친 그의 얼굴과 “지단을 대통령으로”라는 문구는 한 선수를 한 나라가 자신에게 품은 가장 아름다운 상상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알제리계 이민자의 후손이 온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다원적인 프랑스라는 꿈을 이보다 더 잘 보여 줄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어긋남이 있다. 지단을 통합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언론과 대중, 그리고 답을 서둘러 구하던 정치적 서사였다. 지단 자신이 아니었다. 여러 연구는 그가 정치 논쟁에 휘말리는 상황에서도 매우 절제되고 조용한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1998년부터 스스로 목소리를 높이며 그 깃발을 자청해서 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상징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그 상징이 되고자 나섰다는 주장까지 같은 강도로 뒷받침되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는 흔히 지워진다. 사람들은 통합의 상징으로 우뚝 선 지단의 모습은 기억한다. 그러나 그 상징의 무게를 그가 얼마나 자청해서 짊어졌고, 얼마나 남들이 억지로 얹었는지는 좀처럼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의 화신이 되는 것과 그 의미를 자발적으로 떠맡는 것은 별개다. 전자에는 우연히 갖춘 정체성이나 출신, 혹은 마침 알맞은 침묵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본인의 의사와 행동이 필요한 것은 후자다. 전자를 후자로 간주하면 선택받은 사람을 스스로 나선 사람으로 오인하게 된다.
이는 앞선 어느 글에서 본 상황과 멀리서 호응한다. 누군가 어떤 일을 했다. 골을 넣었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뒤늦게 거대한 의미를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마라도나의 손에는 한 나라를 향한 복수라는 의미가, 지단이라는 사람에게는 한 나라의 통합이라는 의미가 사후에 부여되었다. 차이는 마라도나가 나중에 그 의미를 직접 강화한 반면 지단은 대체로 말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징의 무게를 견뎠다는 데 있다.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자기 몫이라 선언하지도 않았다. 시끄러운 사회가 말없는 사람 하나를 골라 자신이 가장 원하는 답을 대표하게 했다. 정작 그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그다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상징이지 그 사람이 아니었다.
이 말은 상징이라는 것의 냉혹함을 드러낸다. 누군가 거대한 의미를 대표하도록 선택되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지닌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그는 오히려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무언가다.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라는 꿈이며, 다원적인 프랑스라는 답이다. 정작 그가 원하는지, 편안한지, 동의하는지는 진심으로 신경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상징이 요구하는 것은 얼굴 하나와 기호 하나, 의미를 투사할 수 있는 그릇이다. 온전하고 복잡하며, 어쩌면 그런 용도로 쓰이기를 바라지 않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상징이 되는 일은 선택된 사람에게 흔히 불공평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큰 의미를 떠받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일거수일투족이 그 의미의 틀 안에서 해석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침묵하면 사람들은 절제되고 겸손하다고 말한다. 입을 열면 그 말이 상징에 걸맞은 기대를 충족하는지 따진다. 덧씌워진 이미지가 실제의 자아를 조금씩 밀어낸다. 1998년 지단의 침묵은 어쩌면 무의식적인 자기 보존이었을지 모른다. 억지로 씌워진 월계관 앞에서 받아들이겠다고 나서지도, 거절하지도 않은 채 조용히 거리를 두는 것이다. 지단은 얼굴을 내주었다. 그 얼굴 뒤의 사람은 그렇게 상징에 의해 소리 없이 가려졌다.
마라도나를 다룬 글과 같은 이치이면서도 방향은 반대다. 마라도나에게는 복수라는 의미가 나중에 붙었고 그는 기꺼이 그 의미를 강화했다. 지단에게는 통합이라는 의미가 붙었고 그는 줄곧 거리를 두었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하나는 수동적으로 감당했다. 그래도 공통점은 있다. 뒤늦게 부여된 거대한 의미가 결국 구체적인 개인으로서의 실체를 덮었다. 이야기는 상징을 필요로 한다. 상징이 서고 나면 살아 있는 사람은 그 뒤로 물러난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기호다.
5. 결승전 날 오후
같은 월드컵에는 또 하나의 미제 사건이 숨어 있다. 억지로 답을 선언했던 앞선 사건과 정반대로, 누구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건이다. 결승전이 열리던 날 오후에 벌어졌고, 주인공은 호나우두였다.
먼저 확인할 수 있는 뼈대부터 짚자. 결승전 당일 오후, 호텔 방에 있던 호나우두의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다. 동료 선수들과 팀 주치의가 불려 왔다. 그는 이어 병원으로 옮겨져 몇 시간 동안 검사를 받았다. 브라질이 처음 FIFA에 제출한 선발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에드문두가 대신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은 뒤이어 두 번째 명단을 제출했고 호나우두는 다시 선발에 포함되었다. 결국 그는 경기에 나섰지만 상태가 분명히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호나우두는 그 대회에서 가장 압도적인 선수였다. 골든볼 수상자이자 브라질의 모든 희망이 걸린 선수였다. 그런데 결승전의 호나우두는 다른 사람 같았다. 느리고 멍했으며 평소의 날카로움을 잃었다.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브라질의 공격 기계는 핵심이 작동을 멈추자 통째로 꺼져 버렸다. 결승이 일방적으로 흘러간 데는 경기 몇 시간 전의 이상과 분명한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연관이 느껴진다고 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날 오후의 신체 이상이 경기장에서의 붕괴를 어느 정도 초래했는지도 셈할 수 없는 문제다. 결승전은 프랑스의 3 대 0 승리로 끝났고, 브라질은 참패했다.
결승전의 흐름은 논란의 여지 없이 명확하다. 지단은 전반에 두 차례 헤더로 골을 넣었다. 둘 다 코너킥에서 나왔다. 추가시간에는 비에라의 도움을 받은 프티가 세 번째 골을 넣었다. 프랑스의 깔끔한 3 대 0이었다. 그런데 점수는 이토록 분명한 결승전의 뒤편에, 누구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날 오후 몇 시간이 숨어 있다. 경기장의 점수가 명확할수록 경기장 밖의 그 오후는 더 흐릿해진다. 종결할 수 있는 것과 종결할 수 없는 것의 또 다른 대비다. 점수는 닫을 수 있지만 그날 오후의 진실은 닫을 수 없다.
이 뼈대는 모든 당사자의 설명이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 뼈대를 넘어 그날 오후 정확히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묻기 시작하면, 각자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나의 온전한 답으로 맞춰지지 않는다.
당시의 혼란을 보여 주는 대목이 있다. 훗날 한 해설자는 선발 명단이 갑자기 바뀌자 기자석이 술렁였다고 회상했다. 동료 선수의 회고에 따르면 브라질 대표팀이 경기장으로 향하는 동안 음악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분위기는 끔찍할 만큼 무거웠다. 모두 그날 밤 브라질이 정상적인 상태로 결승전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증거다.
온 세상의 시선이 모이는 월드컵 결승을 앞두고 한 팀이 이토록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선발 명단은 막판에 바뀌고, 라커룸은 가라앉았으며, 선수들의 마음은 불안했다. 결승까지 올라온 팀이라면 보통 질서 있게 준비를 마치고 단단히 대비한다. 그날 밤 브라질의 어수선함은 예사롭지 않은 어떤 일이 그 모든 준비를 흔들어 놓았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 혼란은 사건이 드리운 그림자였다. 사람들은 그림자는 보았지만 무엇이 그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는 볼 수 없었다. 혼란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입증할 뿐,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입증하지 못한다.
6. 다섯 사람, 다섯 가지 이야기
그날 오후를 알려면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일치된 답으로 맞춰지지 않는다. 이것이 이 미제 사건의 핵심이다.
호나우두 본인은 2001년 브라질 의회 청문회에서 공식 진술을 남겼다. 그는 회복한 뒤에야 팀 주치의에게 앞서 자신의 몸에 이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안전하게 출전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검사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도 했다. 또 경기 전 약물 복용을 일절 부인했다.
이 부인은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 뒤에 떠돈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그날 오후는 어떤 약물, 어떤 상업적 음모와 자주 연결되었다. 그러나 공식 청문회에서 호나우두 자신은 약물 복용을 분명히 부인했다. 엄밀한 기록이라면 어느 이야기가 더 극적이라는 이유로 당사자의 명시적인 부인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가 한 말과 사람들이 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다르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그가 한 말뿐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아무 검사도 받지 않고 무모하게 나선 것이 아니라, 검사를 받은 뒤에도 출전 의사를 굽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명확하고 일치된 의학적 진단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제시할 수도 없었다.
팀 주치의 톨레두의 설명은 대중의 인상과 겹치는 부분도, 다른 부분도 있었다. 그는 경련과 비슷한 발작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모든 검사에서 뇌부종이 발견되지 않았고 어떤 이상도 나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전형적인 뇌전증 발작보다는 근긴장 이상에 가까웠다. 더 중요한 것은 출전 허용 과정에 관한 진술이다. 그는 호나우두가 병원에서 돌아온 뒤 최종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출전을 금지당한 상태였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후 전문의의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고 호나우두도 자신은 괜찮다고 거듭 주장했기에 비로소 출전이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자갈루 감독의 설명은 큰 틀에서 팀 주치의의 이야기와 이어지지만 세부는 완전히 같지 않다. 그는 주치의에게 들은 내용이 정서적 압박으로 일어난 경련 같은 것이었다고 했다. 정식으로 출전 허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병원의 검사 결과가 정상이었고 팀 주치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은 그것을 허가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는 주치의를 무시하고 결정을 강행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 나이키가 자신의 선수 기용에 개입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동료 선수들의 증언은 의학적 결론보다는 현장의 분위기에 관한 것이 많았다. 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날 밤 팀이 정서적으로 크게 동요했다는 사실이다. 호나우두의 이상이 뇌전증 때문이었는지,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증명하지 못한다.
다섯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맞물리지 않는 다섯 조각 같다.
조각이 맞지 않는 것은 누군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다. 다섯 사람이 서로 다른 다섯 자리에서 다섯 가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각자가 본 것은 그날 오후의 한 측면일 뿐, 진실 전체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호나우두는 자기 몸 안의 감각을 겪었다. 팀 주치의는 검사와 진단을 마주했다. 감독은 선수 기용과 책임을 저울질했다. 동료들은 라커룸의 분위기를 느꼈다. 각자는 자신이 본 면을 정직하게 말했지만, 그 면들을 모으면 이음매가 자꾸 어긋났다. 진실은 누군가 숨겨 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여러 사람의 시각 속에 흩어져 있었고,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손에 쥐지 못했다. 조각 하나하나는 모두 사실이지만 그 사이에는 늘 맞지 않는 틈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물음, 그날 오후 호나우두의 몸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것이 이 미제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다. 누군가 진실을 고의로 은폐한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방에 흩어진 진실을 하나로 맞출 수 없는 사건이다. 전자에는 이론상 명확한 답이 있다. 다만 숨겨져 있을 뿐이다. 후자에는 단 하나의 명료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답이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 그날 오후 호나우두의 몸에서 일어난 일은 어쩌면 그 자신조차,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조차 일부만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체 그림은 처음부터 누구의 손에도 온전하게 들어간 적이 없었다. 이런 진실은 가둬 놓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완전히 닫을 수 없는 것이다.
7. 조사마저 사건을 종결하지 못했다
가장 답을 내놓고 싶어 했던 곳은 브라질 의회였다. 그러나 끝내 의회조차 답하지 못했다.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나이키가 자갈루를 압박해 반드시 호나우두를 출전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한창 주가가 높던 광고 모델의 상업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다. 이 이야기는 대중의 기억 속에 매우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증거는 끝내 추측과 의혹 제기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브라질 하원은 실제로 이 일을 두고 공식 의회 조사를 시작했다. 다만 조사의 본래 명목은 브라질축구협회와 나이키의 계약이 규정에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승전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 큰 조사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한 갈래였을 뿐, 조사 전체는 아니었다. 조사에서는 자갈루와 여러 팀 주치의, 호나우두, 호베르투 카를루스 등의 증언을 들었다. 상업 계약과 평가전 일정, 후원 수익 등 더 넓은 문제도 살폈다.
이 요란한 조사가 마지막에 무엇을 남겼는지는 정확히 봐야 한다. 수많은 증언을 들었고 기록은 산더미처럼 쌓였다. 결론 초안도 작성되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끝내 위원회 표결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토록 많이 조사했어도 브라질 의회는 정식 표결을 거친 공동의 최종 결론을 내놓지 못한 것이다. 가장 자극적인 주장, 나이키가 선발 출전을 지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후의 주요 회고들은 나이키가 자갈루에게 명령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명시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구축 안에서 증거를 가장 중시하고 종결을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는 장치, 국가의 입법기관까지 동원한 공식 조사도 그날 오후 앞에서는 서로 맞지 않는 증언 더미에 이르러 멈췄다. 그 안쪽에 있는 진짜 답까지는 손이 닿지 않았다. 청문회를 열고 증인을 불러 진술을 기록했지만, 끝내 표결을 통과할 만한 결론 하나조차 맞춰 내지 못했다. 누구보다 종결을 원하던 기계가 이 사건에서는 자기 힘으로 닫을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조사가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단단한 증거가 남은 것들이다. 누가 현장에 있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계약에 어떤 조항이 적혀 있었는지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증거가 남지 않은 것은 확증할 수 없다. 특히 동기, 사람의 마음속에서 말로 나오지 않은 셈법이 그렇다. 의회는 당사자를 모두 소환하고 모든 증언을 기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모순되고 판가름할 물증도 없다면 아무리 정식 조사라도 증언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모을 수 있는 조각을 전부 모으고서야 가장 중요한 조각은 애초에 검증 가능한 형태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8. 두 미제 사건, 하나의 양면
두 흐름을 나란히 놓으면 1998년의 진짜 모습이 분명해진다.
하나는 사회의 통합이고 다른 하나는 한 선수의 병인이다. 별개의 일처럼 보이지만 같은 것의 양면이다. 앞의 사건에서는 본래 종결할 수 없는 인종 간 통합을 두고 한 사회가 억지로 종결을 선언했다. 사람들이 그 답을 너무나 원한 나머지 한 번의 승리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종결을 위조했다. 뒤의 사건에서는 애초에 닫을 수 없는 결승전 당일의 진실을 누구도 닫혔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의회까지 동원하고도 결론을 맞춰 내지 못했다.
이 대비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사회의 사건은 본래 열려 있는 것을 인위적으로 닫은 경우다. 사람들은 인종 문제가 오래 걸리고 답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승리 하나를 붙들고 “해결되었다”는 뚜껑을 억지로 덮었다. 신체를 둘러싼 사건은 원래 닫히지 않는 것을 아무리 닫고 싶어 해도, 아무리 정식 절차로 조사해도 닫지 못한 경우다. 하나는 닫아서는 안 되는데 억지로 닫았고, 하나는 닫고 싶어도 닫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구축의 근본적인 약점을 가리킨다. 종결을 향한 구축의 갈망은 현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큰 경우가 많다. 현실에는 깔끔한 답이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구축은 늘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는 종결을 가장했고 다른 하나는 종결이 불가능했다. 둘이 가리키는 진실은 같다. 구축으로 닫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종 간 통합은 닫을 수 없기에 선포된 답은 몇 년 뒤 깨졌다. 그날 밤의 진실은 닫을 수 없기에 가장 공식적인 조사조차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1998년은 거울 같다. 한쪽에는 사람들이 깔끔한 답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얼마나 갈망하기에 답을 위조하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는지가 비친다. 다른 쪽에는 아무리 갈망하고 아무리 힘껏 조사해도 얻을 수 없는 답이 있다는 사실이 비친다.
두 미제 사건 중 하나는 떠들썩하고 하나는 말이 없다. 떠들썩한 사건에서는 온 세상이 그 답에 환호했지만 그 답이 정말인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없는 사건에서는 온 세상이 진실을 추측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둘은 함께 구축의 오랜 곤경을 말한다. 구축은 모든 것에 깔끔한 끝을 주고 싶어 하지만, 어떤 것에는 끝을 줄 수 없다.
이 곤경은 이 시리즈 거의 전편을 관통한다. 구축은 번번이 잔여항을 가두고 모든 경기와 사건에 확정적인 결말을 주려 한다. 잔여항은 번번이 빠져나온다. 어떤 때의 잔여항은 선을 넘었는지 알 수 없는 공이다. 어떤 때는 동기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살인 사건이다. 1998년에는 두 가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닫을 수 없는 인종 간 통합이었고, 다른 하나는 닫을 수 없는 결승전 당일의 진실이었다. 모습은 바뀌어도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애써도 완전히 종결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늘 남는다. 종결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깊을수록 닫히지 않는 이 잔여항에 찔리는 고통도 커진다. 결말을 줄 수 없으면 때로는 하나를 위조하고, 때로는 미결인 채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9. 떠받들린 사람과 아무도 보지 못한 사람
이 두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실제 사람들이 있다.
지단은 높이 떠받들렸다. 그의 얼굴이 개선문에 비쳤고 이름 뒤에는 대통령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러나 높이 올려진 것은 상징이었다. 말수가 적고 절제되어 있으며 정치적 입장 표명에 열성적이지도 않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사랑한 것은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라는 꿈이었다. 지단은 마침 그 꿈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 주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 뒤의 사람이 이 모든 일을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깃발을 들고 싶은지는 오히려 환호 속에 묻혔다. 한 나라의 답을 대표하도록 선택된 사람의 침묵을 그 답을 둘러싼 소란이 덮어 버렸다.
호나우두는 다른 방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결승전에서 온 세상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간 듯 뛰는 브라질의 9번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눈길 아래서도 그날 오후 그의 몸속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그가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경기장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사람이자 가장 외로운 사람이었다.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비밀을 혼자 품은 채 결승전의 잔디 위를 멍하니 달렸다.
이 모습은 그 대회에서 가장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장면 중 하나다. 8만 명의 관중이 있는 경기장과 수억 명의 텔레비전 시청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아무도 막을 수 없던 브라질의 9번이 다시 한번 기적을 보여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얼이 빠진 듯한 모습,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호나우두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지금 그를 뛰게 하는 것이 어떤 의지인지, 어떤 몽롱함인지도 아무도 몰랐다. 수억 명이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 수억 명이 느낄 수도, 심지어 알 수도 없는 외로움을 견뎠다. 세상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어도 몸속의 폭풍은 볼 수 없었다. 수년 뒤 의회조차 그를 대신해 그날 오후를 설명하지 못했다. 당시의 그는 그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패배가 정해져 있던 결승전을 끝까지 뛰어야 했다.
두 사람의 외로움은 달랐지만 똑같이 깊었다. 지단의 외로움은 너무 높이 떠받들린 사람의 외로움이었다. 그는 상징의 제단에 올려졌다. 그러나 제단 위에 모셔진 기호와 그 아래에 있는 말없는 실제의 그는 이미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래의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호나우두의 외로움은 너무 많은 사람이 보면서도 누구도 진정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외로움이었다. 수억 쌍의 눈이 그를 응시했지만 몸속의 알려지지 않은 폭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 사람은 잘못 읽혔고 다른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만인의 시선 한가운데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은 높이 들렸지만 들어 올려진 것은 그 자신이 아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무수한 시선을 받았지만 보인 것은 그의 실제 처지가 아니었다. 이것이 1998년 폭풍의 중심에 선 두 사람의 공통된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마저 떠들썩한 사건과 말없는 사건, 그 두 미제 사건에 함께 가려졌다.
10. 마무리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모아 보자.
1998년 프랑스는 축구팀 하나를 한 나라의 답으로 삼았다. 흑인과 백인과 북아프리카계로 이루어진 팀이 우승하자 한 사회는 인종과 통합에 관한 오래된 난제가 해결되었다고 선언했다. 개선문에 비친 얼굴, 샹젤리제를 메운 백만 인파, 거리마다 울려 퍼진 “흑인, 백인, 북아프리카계”라는 구호는 모두 그 답의 주석이었다. 그러나 거짓 종결이었다.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았던 경기장 안의 승리로 경기장 밖에 엄연히 남아 있는 균열을 가릴 수는 없었다. 2001년 친선경기가 중단되고 2002년 르펜이 결선에 오르기까지, 현실은 억지로 선포된 답을 조금씩 깨뜨렸다. 통합은 결코 닫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승컵 하나로 종료 휘슬을 불 수 없다.
한편 같은 월드컵의 결승전 당일 오후에는 정반대의 미제 사건이 남았다. 호나우두의 몸에서 일어난 일을 누구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국가의 입법기관까지 동원한 공식 조사도 끝내 표결로 결론을 채택하지 못했다. 하나는 종결을 억지로 선언했으나 실제로 종결되지 않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종결이 불가능해 누구도 선언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다. 둘은 하나의 양면이며, 함께 그 오래된 이치를 입증한다. 구축은 모든 것에 깔끔한 답을 주고 싶어 하지만 어떤 것에는 답을 줄 수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신 답을 위조하거나, 영원히 미결로 남겨 둘 수밖에 없다.
중심에 선 두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 답으로 설명하기에는 훨씬 더 생생했고, 두 사람은 그만큼 더 외로웠다. 지단은 한 나라의 상징으로 떠받들렸지만 들어 올려진 것은 말없는 그 자신이 아니었다. 호나우두는 온 세상의 시선을 받았지만 보인 것은 몸속에서 일던 아무도 모르는 폭풍이 아니었다. 사회는 조급하게 한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답으로 만들 수 있다. 동시에 만인의 시선 속에서도 그 사람의 실제 처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 구축은 승리를 선언하고 조사를 시작하며 한 사람을 높이 떠받들 수 있다. 그러나 통합을 선언할 수는 없고, 그날 밤을 밝혀낼 수도 없으며, 자신이 떠받든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도 없다. 구축이 원하는 종결과 두 사람이 실제로 처한 상황 사이에는 끝내 메울 수 없는 거리가 남는다. 축구팀 하나로 사회의 균열을 닫을 수 없고, 조사 한 번으로 어느 오후의 진실을 종결할 수 없다. 그 어느 쪽도 종결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답을 향한 사람들의 갈망에 잠시 가려졌을 뿐이다. 뚜껑은 언젠가 헐거워지고 답은 언젠가 허점을 드러낸다. 닫혔다고 선언한 균열과 거듭 조사한 미제 사건은 다시 사람들 앞에 돌아온다. 사람들이 답을 서둘러 구할수록 진짜 답은 오히려 더 깊이 숨는다. 아무리 조급해하고 아무리 힘을 쏟아도 그 균열과 그 미제 사건은 한 번의 승리로 정말 닫히지 않는다.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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