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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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세계 축구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 제14편 / 총 22편

로즈볼

뿌리 없는 땅에 팔린 월드컵과 한 사람을 짓누른 승부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사업으로는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계산되지 않는 위험은 사라지지 않고 바조의 한 발과 에스코바르의 목숨 같은 구체적인 사람에게 전가됐다.

Han Qin (秦汉)·2026
이 글의 목차

1. 가장 잘 팔린 월드컵

1994년 월드컵은 미국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은 변변한 최상위 프로리그 하나 없는 나라였다.

이 말부터 분명히 해 두자. 미국은 1988년에 개최권을 따냈고, 유치 계획에서 내건 핵심 약속 가운데 하나가 1부 프로리그 창설이었다. 그러니까 축구가 자랄 토양을 갖춘 뒤 월드컵을 맞은 것이 아니었다. 월드컵부터 들여오고, 축구의 토양은 나중에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렇게 약속했던 리그, 메이저리그 사커는 월드컵이 끝나고도 시간이 지난 1996년에야 정식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월드컵은 아직 뿌리가 없는 땅에 내려앉았다.

이 순서는 잠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보통은 한 종목이 어느 땅에 먼저 뿌리를 내린다. 거기서 리그가 생기고, 팬이 생기고, 여러 세대에 걸쳐 선수들이 자라난다. 그렇게 가지가 무성해진 뒤에야 월드컵을 치를 만한 곳이 된다. 미국은 이 순서를 뒤집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열매부터 따 온 다음, 돌아서서 나무를 심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대회를 여는 이들의 눈에 월드컵이 무엇보다 나무에서 맺힌 열매가 아니라, 어느 시장으로든 항공편에 실어 보내 팔 수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토양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살 사람이 그곳에 있느냐였다.

그런데 바로 그 뿌리 없는 땅이 상업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월드컵을 치러 냈다. 52경기의 총관중은 350만 명을 넘었고, 경기당 평균 관중은 6만 9천 명에 육박했다. 이 경기당 평균 관중 기록은 이후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대회가 끝난 뒤 미국 주최 측에는 약 5천만 달러의 운영 흑자가 남았다. 당시 관계 당국과 주류 언론은 대체로 이를 월드컵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번 대회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숫자는 이 장사가 구사하는 가장 정직한 언어다. 350만 명이 넘는 누적 관중, 5천만 달러의 흑자.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한 숫자들이다. 월드컵을 하나의 사업으로 운영하면 얼마든지 크게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숫자가 비추지 못하는 곳도 있다. 표를 산 사람이 몇 명인지는 보여 주지만, 그들이 어떤 축구를 보았는지는 보여 주지 못한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보여 주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선수들이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옮겨 온 잔디를 실내에서도 경기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했는지는 보여 주지 못한다. 숫자로 잴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대회는 모두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하지만 무엇을 먼저 지켜야 좋은 축구인지는 그 숫자만으로 정할 수 없다. 흥행의 성공이 그 판단마저 대신하면서, 한 스포츠는 자기 기반조차 없는 곳에서 일류 사업으로 운영되었다.

그 성공 자체를 탓할 일은 없다. 일을 훌륭히 치르고, 이익을 내고, 수백만 명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는 것은 분명한 능력이다. 문제는 성공했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떻게 성공했느냐에 있다. 또 그런 방식이 한 스포츠를 사업으로서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동안, 그 스포츠 안에서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가벼운지를 어떻게 조용히 바꾸어 놓았느냐에 있다. 장부가 모든 것을 재는 자가 되면, 장부에 적을 수 없는 것들은 조금씩 가치를 잃기 시작한다.

여기서 따라가 보려는 것은 이 장사 뒤에 있는 것들이다. 축구가 순수한 상품으로 취급되어 뿌리 없는 땅에 이식되고, 정교하게 포장되어 팔릴 때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 그리고 이 장사는 마지막에 누구에게 계산서를 내미는가.

2. 축구를 상품으로 다루다

먼저 이 장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자.

이 장사의 솜씨는 모든 것을 아주 세밀하게 계산했다는 데 있다. 어느 시간대의 중계가 가장 값이 나가는지, 어느 경기장에 관중을 가장 많이 밀어 넣을 수 있는지, 어떤 눈요깃거리가 가장 큰 화제를 낳을지, 하나같이 정확히 셈했다. 계산에 능한 장사였다. 축구에서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거의 모조리 한계까지 짜냈다. 그런데 이처럼 빈틈없이 계산하는 장사일수록, 계산에서 빠뜨린 단 하나의 무게는 더욱 선명해진다. 셈할 수 있는 것은 다 셈하면서도, 사람에게 붙어 있어 숫자로 환산되기를 거부하는 것들은 계산해 낼 수도, 계산으로 없애 버릴 수도 없었다.

몇 가지 세부를 보면 이 장사의 논리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 대회에서는 52경기 가운데 34경기가 정오에 시작하도록 편성되었다. 한낮의 미국에서는 해가 머리 위에서 내리쬐었고, 선수들은 높은 기온과 습도 속에서 힘겹게 버텼다. 당시 보도에도 관계자와 선수, 감독들이 혹서에 거듭 불만을 터뜨린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경기 시간을 바꾸지는 않았다. 미국의 정오가 유럽의 저녁과 밤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중계가 가장 비싼 시간이었다. 언제 경기를 할지는 선수들이 뛰기에 편한가가 아니라, 바다 건너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보기에 편한가에 따라 정해졌다. 선수의 몸이 중계 시간표에 자리를 내주었다.

실버돔도 있었다. 실내에서 월드컵 경기를 치르기 위해 주최 측은 천연 잔디를 옮겨 심는 공학적 실험을 했다. 다른 곳에서 길러 놓은 잔디를 그 실내 경기장으로 가져왔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실내에서 열린 경기였다.

실내로 들어간 그 잔디를 보면 이 장사의 순서가 드러난다. 풀은 햇빛을 받아 자라지만, 실버돔 지붕이 통과시키는 햇빛은 바깥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그 조건에서 잔디를 유지하려면 별도의 기술과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잔디가 실내에 머문 기간은 3주가 채 되지 않았다. 관리를 맡은 미시간주립대 연구진에 따르면, 네 경기와 여섯 차례의 훈련을 치르고도 잔디의 상태는 좋았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다시 옮겨져 벨아일의 새 축구장에 깔렸다. 실내에서도 잔디를 유지해 낸 기술도, 대회 뒤에 다시 쓴 일도 분명한 성과였다. 다만 그 성과와 별개로, 무엇이 먼저 정해졌는지는 물어야 한다. 풀과 축구에 맞는 환경을 먼저 고른 뒤 대회를 꾸민 것이 아니라, 실내에서도 월드컵을 열겠다는 기획을 먼저 세우고 그 안에서 잔디를 유지할 방법을 마련했다. 햇빛 아래서 자라던 잔디는 기술과 사람의 손을 거쳐, 시장에 내놓을 새로운 경기 장면에 맞춰졌다. 이 장사의 솜씨는 자연의 조건마저 조정해 팔 만한 무대로 만드는 데 있었다. 그 솜씨를 인정하는 일과, 축구를 위해 장사를 하는지 장사를 위해 축구의 조건을 바꾸는지 묻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

이런 조치들은 하나씩 따로 보면 대단한 악행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데 놓으면 같은 논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축구는 제품이고 관중은 시장이며, 모든 것은 이 제품을 가장 잘 파는 데 복종한다. 잔디를 세심하게 돌보고 대회 뒤에 다시 쓴 것은 그 논리 안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잔디를 지켜 낸 기술이 선수들의 몸에 쌓인 한낮의 부담까지 덜어 준 것은 아니다. 잔디를 잘 관리했느냐와 축구에서 무엇을 앞세웠느냐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경기의 시간과 장소, 선수의 몸과 관중이 보는 장면은, 잘 팔릴 대회를 먼저 정해 놓은 뒤 거기에 맞추어졌다.

상품을 파는 수법이 정교해질수록, 그 상품은 자기 본성이 아니라 구매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오의 경기는 선수의 몸을 해치지만 유럽의 텔레비전에는 맞아떨어진다. 실내 경기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내놓기 위해서는 부족한 빛과 달라진 잔디의 생육 환경을 기술과 관리로 보완해야 했다. 이처럼 무엇을 먼저 정하고 무엇을 나중에 맞출지가 바뀌면서, 축구 자체의 사정은 뒤로 가고 시장의 요구가 앞자리를 차지한다. 한 경기를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보여 줄 것인가를 이 종목 자체가 정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고, 얼마나 팔 수 있느냐가 점점 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철저히 상품화된 모든 것의 공통된 운명이다. 서서히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게 된다. 대회를 여는 사람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다. 한 스포츠를 철저히 장사로만 운영하면, 그 안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은 하나씩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말이다. 이 대회는 그 논리를 당시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바로 그렇기에 그 논리의 대가도 처음으로 그토록 뚜렷하게 드러냈다.

축구를 철저히 장사로 삼는 일과 축구 자체 사이에는 언제나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장사가 원하는 것은 확실함, 통제 가능성, 투자한 한 푼마다 수익을 계산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런데 축구의 매력은 하필 불확실함에서, 통제할 수 없음에서, 누구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는 결과에서 나온다. 이 틈은 평소 성공을 자축하는 소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장사의 논리가 극한에 이르면 모습을 드러낸다. 1994년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참혹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장부 위가 아니라 두 사람의 몸 위에서였다.

3. 계산서는 결국 사람에게 돌아갔다

앞선 대회들에서 구축은 거듭 월드컵을 징발했다. 무솔리니는 그것을 확성기로 삼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알리바이로 삼았다. 그러나 그 징발의 대가는 대체로 명예와 자유의 차원에 머물렀다. 정권이 월드컵을 빌려 자신을 치장하고, 사람들의 함성을 다른 용도로 끌어다 썼다. 1994년 대회는 이 계산서를 훨씬 더 무거운 곳으로 밀어 보냈다. 사람의 목숨에 청구한 것이다.

그 사이에는 대가가 무거워지는 뚜렷한 흐름이 있다. 정권의 징발이 빼앗은 것은 상징이었다. 한 나라의 이미지를 빌려 겉모습을 꾸몄고, 손상되는 것은 명예라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반면 철저한 상품화의 논리가 빼앗는 것은 훨씬 실체적이다. 장사는 결국 구체적인 성패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며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것들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붙어 있다. 상징은 추상적인 국가가 감당할 수 있지만, 성패와 책임은 결국 살과 피가 있고, 아파하고, 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얹힐 수밖에 없다. 징발이 상징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옮겨 갈수록, 사람의 살과 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대목이다. 위험과 불확실성을 비롯해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장사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결과를 추구한다고 해서, 계산의 대상이 된 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떠넘겨질 뿐이다. 시스템에서 구체적인 사람에게로. 지난 대회에서 수비적인 팀들이 위험을 0으로 만들었을 때 그 대가는 지루한 축구였다. 이번에는 대가의 형태가 바뀌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짓눌렀다. 한 사람은 바조, 다른 한 사람은 에스코바르였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는 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수비수였다. 한 사람의 비극은 결승전의 조명 아래서, 다른 한 사람의 비극은 이국의 깊은 밤 길가에서 일어났다. 처지는 하늘과 땅처럼 달랐지만 두 사람을 덮친 것은 같았다. 이 장사, 완결을 추구하는 이 논리는 끝내 계산으로 없앨 수 없는 무게를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지워야 했다. 운명은 그 둘을 골랐다. 한 사람은 한쪽 발로, 다른 한 사람은 목숨 하나로 이 화려한 월드컵 전체를 대신해 장부 뒤에 숨겨진 대가를 치렀다.

경기는 끝내 승부를 가려야 한다. 구축의 철칙이다. 결과에는 끝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 사람 마음의 집착이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승패를 정해야 하는 경기와 반드시 누군가 떠안아야 하는 실수에 걸리는 순간, 그 무게는 더 이상 시스템이 짊어지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의 발끝, 어느 한 사람의 자책골 위에 내려앉는다. 구축이 말끔한 결과와 분명한 책임을 원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추상적인 시스템에서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사람에게 더 많이 옮긴다. 이 대회에서 가장 참혹한 것은 경기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경기장이 제 무게를 떠넘겨 두 사람의 삶을 짓눌러 무너뜨린 순간이었다.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개인에게 무게를 떠넘기는 일을 1994년 대회가 발명한 것은 아니다. 경쟁 스포츠에는 늘 있던 일이다. 한 경기가 끝나면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죄인이 된다. 그러나 이 대회는 그것을 극단까지 몰아갔다. 한쪽에는 바조가 있었다. 한 나라의 영광이 그의 한쪽 발에 매달렸고, 그 발이 힘을 잃자 온 나라가 낙담했다. 다른 한쪽에는 에스코바르가 있었다. 한 번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가장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그의 목숨에 물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그 전가가 이 대회에서는 두 가지 충격적인 모습으로 동시에 세상 앞에 나타났다.

4. 한 사람의 한쪽 발

먼저 바조 이야기부터 하자.

그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출발부터 휘청거렸다. 첫 경기에서 아일랜드에 0 대 1로 패했고, 죽음의 조에서 고전하다 조 3위 팀 가운데 성적이 좋은 팀에 들어 간신히 다음 라운드에 올랐다. 그 뒤에는 바조가 거의 혼자서 이탈리아 전체를 끌고 결승까지 갔다. 나이지리아전에서 이탈리아는 한 명이 부족한 상태였다. 바조는 88분에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에서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켜 2 대 1을 만들었다. 스페인전에서는 88분에 결승골을 넣었다. 불가리아와의 준결승에서는 두 골을 모두 책임지며 2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한 사람이 세 경기 내리, 이탈리아가 가장 절실히 그를 필요로 하는 순간마다 나섰다.

그 경기들은 거의 한 사람의 독무대였다. 이탈리아의 경기력은 좋지 않았다. 언제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다. 그 팀을 벼랑 끝에서 거듭 끌어 올린 것은 막판에 터진 바조의 골들이었다. 그는 팀 전체가 기댈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 모든 희망이 그에게 쏠렸다. 한 사람이 한 나라를 짊어진다는 것은 더없이 높은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이면에는 그만큼 엄청난 짐이 있었다. 모든 무게가 자신 한 사람에게 쏠리면, 그 무게를 나누어 질 사람도 더는 남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부상을 안고 뛰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오른쪽 햄스트링이 늘어나는 부상을 입었고, 경기 뒤에는 부축을 받아야 단에서 내려올 수 있을 정도였다. 결승을 앞두고 가장 큰 관심사는 그 다리의 상태였다. 그는 훗날 그저 근육이 피로했을 뿐이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야 한다고 해도 경기에 나가겠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그렇게 그는 다친 다리를 끌고 결승전 경기장에 섰다.

이 일화는 훗날 영웅주의를 뒷받침하는 이야기로 자주 전해졌다. 진정한 투사는 가벼운 부상 때문에 전장을 떠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사람을 인질로 붙잡는 것에 가까운 잔혹한 강요가 있다. 온 나라가 모든 희망을 그에게 걸었다. 그 기대 자체가 그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압력이었다. 다친 상태라 해도 출전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른바 영웅적 기개가 언제나 온전히 자발적인 것은 아니다.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더라도 뛰겠다는 바조의 말은 비장하게 들리지만, 그 밑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무거움도 깔려 있다.

결승은 1994년 7월 17일 로즈볼에서 열린 이탈리아 대 브라질전이었다. 90분이 지나도 0 대 0, 120분이 지나도 여전히 0 대 0이었다. 월드컵 결승전 역사상 처음으로 승부차기로 우승팀을 가려야 했다. 한 명씩 공을 찼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는 이미 뒤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마지막 희망을 살리려면 바조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그가 페널티 마크 앞에 섰다. 그리고 공을 높이 날려 보냈다. 공은 크로스바를 훌쩍 넘어갔다. 브라질이 우승했다.

이탈리아를 내내 등에 업고 결승까지 온 사람이 마지막 한 번의 킥으로 우승을 놓쳤다. 그는 훗날 그 킥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선수 생활에서 한순간을 지울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일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팀 전체를 등에 업고 결승까지 데려온 사람이 선수 생활 전체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것은, 앞서 흐름을 뒤집어 놓았던 골들이 아니라 하필 마지막의 그 한 번이었다. 이 스포츠가 기억하는 방식은 여기서 잔인해진다. 사람을 공로로 기억하지 않고 결과로 기억한다. 바조가 이 월드컵에서 해낸 일이 그토록 많았지만, 대중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응축되어 남은 것은 높이 뜬 페널티킥이었다. 큰 공을 세운 한 사람이 한순간으로 규정되었다. 하필 그가 가장 무력했던 순간이었다.

5. 페널티 마크 앞의 한 사람

바조의 그 킥은 앞에서 거듭 등장했던 것을 다시 눈앞으로 밀어 올렸다. 페널티킥은 축구에서 가장 순수한 우연이다.

12야드의 거리, 한 사람과 골키퍼 한 명의 대결. 아무리 명성이 높고 기대가 무겁고 축적된 저력이 깊어도, 그 한 번의 킥이 향할 곳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앞서 베른을 쓸 때도, 골대를 쓸 때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구축이 아무리 거대한 준비를 해 두어도 공 하나를 붙들어 두지 못한다. 그런데 페널티킥은 그 이치를 가장 잔인한 지점까지 압축한다. 한 팀이 몇 주 동안 걸어온 길, 한 나라의 기대, 한 선수의 경력 전체가 지닌 무게를 한 사람, 한쪽 발, 한순간에 모두 밀어 넣는다. 그 공이 들어갈지 말지는 체계가 결정하지 않는다. 축적된 저력도 결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신경 상태, 누구도 정확히 셈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우연이 결정한다.

앞에서 여러 번 썼듯, 구축은 그 공을 가두지 못한다. 베른의 헝가리도 가두지 못했고, 골대 앞의 네덜란드도 가두지 못했다. 페널티킥은 이 가둘 수 없음을 가장 날카롭게 정제해 낸 경우다. 다른 때라면 붙잡지 못한 우연은 흐르는 경기 속에서, 수많은 선수가 맞부딪치는 와중에 조용히 빠져나간다. 반면 페널티킥은 그 우연만 따로 집어 한 사람 앞에 놓는다. 온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누구도 장악하지 못하는 그것을 그 혼자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모든 것을 벗겨 내고 사람과 우연이 맨몸으로 마주하는 장면만 남긴다.

페널티킥은 구축이 제 손으로 우연을 위해 세운 제단이나 다름없다. 경기의 모든 복잡함을, 모든 기술과 전술과 호흡을 걷어 낸다. 남는 것은 한 사람, 공 하나, 골키퍼 한 명, 그리고 12야드의 거리뿐이다. 이 제단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선수라도 자기 능력의 대부분을 잃는다. 드리블이나 움직임, 십수 년에 걸쳐 익힌 경기 지능으로 이길 수 없다. 그저 한 번 공을 차고, 그 뒤에는 얼마 안 되는 운의 판결에 맡겨야 한다. 구축이 승패를 페널티킥에 맡긴다는 것은, 더 이상 우열을 가려낼 수 없을 때 차라리 우연이 주관하는 공개 의식에 결과를 넘기겠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바조는 바로 그 한순간에 짓눌린 사람이었다.

운명이 그에게 마련한 길에는 조롱마저 깃든 듯하다. 앞선 세 경기에서 그는 온전히 실력에 의지했다. 의지와 기술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는 실제로 거듭 쟁취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더 이상 실력이 아니었다. 운이었다. 아주 미세한 오차 때문에 그 공이 높이 뜨느냐 마느냐였다. 실력으로 팀을 결승까지 등에 업고 온 사람이 마지막에는 실력으로 결정되지 않는 일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 아니다. 그를, 그가 쏟은 모든 노력과 타고난 재능까지 함께 우연의 처분에 맡긴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내내 짊어졌다. 팀의 무게 거의 전부를 혼자 감당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짊어지고 왔을 때 운명이 그에게 건넨 것은 순수한 우연의 12야드였다. 기술과 의지가 필요했던 앞선 세 경기는 감당할 수 있었지만, 오직 운만 필요했던 마지막 페널티킥은 감당하지 못했다. 운만큼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억해 둘 만하다. 사람은 책임을 짊어질 수 있고, 기술적 도전을 감당할 수 있으며, 수천만 명의 기대를 떠안을 수 있다. 모두 실력으로 응답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운은 그렇지 않다. 운은 실력을 따지지 않고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어떤 수단으로도 장악할 수 없는 변수다. 운에 승부를 건다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자리에 한 사람을 세우는 것과 같다. 바조의 비극은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다. 마지막 그 순간에는 강한가 아닌가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우연뿐이었다. 그 킥이 높이 뜬 것은 그가 충분히 위대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다. 이 스포츠에서 가장 이치가 통하지 않는 면이, 이 스포츠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에게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잔인한 일이 하나 있다. 팀 전체의 성패를 한 사람의 한 번의 킥에 매다는 것은, 경기를 단번에 끝맺기 위해 구축이 생각해 낸 방법이다. 어떻게든 승패를 가려야 한다. 90분으로도, 120분으로도 가리지 못하면, 경기의 결과를 내지 않은 채 두느니 차라리 그 천근의 짐을 한 사람의 어깨에 통째로 얹는 쪽을 택한다. 바조는 이탈리아 전체를 대신해 본래 한 사람이 져서는 안 될 무게를 떠안았다. 사람들은 그가 실패한 킥을 기억한다. 그러나 먼저 그 팀을 혼자 짊어지고 그 페널티 마크 앞까지 데려온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은 곧잘 잊는다.

6. 자책골 하나와 열흘 뒤

바조가 감당한 것이 승부의 무게였다면, 에스코바르가 감당한 것은 결과의 대가였다. 그가 지불한 것은 목숨이었다.

이 대목은 각별히 조심하며 한 겹씩 풀어 말해야 한다. 너무도 무거워서 조금의 모호함도 과장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확증할 수 있는 것부터 말하자.

여기서는 한 걸음마다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하겠다. 한마디도 더 보태지 않겠다. 이런 사건에 이야기를 더 가슴에 와닿게 만들려고 조금이라도 상상을 덧붙이는 것은 죽은 이에게 예의를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에는 그 자체의 무게가 있어 윤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절제하며 사실만 말할 때 이 사건의 무게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콜롬비아 대표팀에는 대회 전부터 큰 기대가 쏠렸다. 펠레는 공개적으로 그들을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점쳤고, 이들에게는 앞서 27경기 무패를 이어 간 기록도 있었다.

그 큰 기대도 훗날 그들을 짓눌러 무너뜨린 짐의 일부가 되었다. 공개적으로 유력한 우승 후보로 지목되고, 막 놀라운 무패 기록을 세운 팀은 온 나라의 자부심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런 팀이 뜻밖에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을 때, 자부심이 높았던 만큼 추락 뒤의 상실감과 엉뚱한 곳을 향하는 분노도 깊었다. 예측의 후광은 그들을 유난히 눈에 잘 띄고, 그만큼 위험한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대회 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그들의 필승을 점치지 않았더라면, 그 자책골에도 그토록 무겁고 치명적인 분노가 실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예측은 평소에는 한가한 자리의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거꾸로 예측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짓누르는 짐이 된다. 콜롬비아는 우승할 것이라는 예상을 받았다. 그 후광이 그들을 너무 높이 올려놓았기에, 떨어질 때의 참상도 유난히 컸다. 추락에서 생겨난 실망과 분노는 끝내 배출구를, 탓할 대상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그 자책골과 그 자책골을 넣은 사람이 집단적 분노의 한복판으로 떠밀려 갔다. 예측이 높이 떠받들수록, 어긋났을 때 되돌아오는 힘은 더 거세다. 이번에는 그 힘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무거웠다. 하지만 미국에서 그들은 루마니아에 지고, 이어 미국에도 져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예측은 또 한 번 빗나갔다. 펠레의 예언과 27경기 무패 행진은 유력한 우승 후보라는 이미지를, 널리 받아들여지던 미래에 대한 판단을 쌓아 올렸다. 그런데 막상 공이 굴러가기 시작하자 그 판단은 깨졌다. 그들은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것이 아니었다. 월드컵 무대의 무정한 우연에 부딪혔을 뿐이었다. 끝까지 살아남으리라 계산된 팀이 조별리그에서 짐을 싸고 돌아갔다. 이런 낙차는 앞선 대회에서도 보았고, 뒤의 대회에서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측이 단정적일수록 현실이 뒤집어 놓을 때 생기는 틈도 커진다. 이번에는 그 틈으로 피가 흘렀다. 미국전 전반, 수비수 에스코바르는 수비를 하다가 공을 자기 골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자책골이었다. 미국이 2 대 1로 이겼다.

이어서 그 범죄가 일어났다. 콜롬비아가 탈락한 뒤 에스코바르는 메데인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토록 큰 기대를 짊어졌다가 참담하게 탈락한 팀, 치명적인 자책골을 넣은 선수에게 당시 폭력으로 악명 높던 그 도시로 돌아가는 일은 위험했다. 그래도 그는 돌아갔다. 평범한 사람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이. 경기장의 실수 하나가 며칠 뒤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총알이 되리라고 예상할 이유는 없었다.

축구에서 자책골은 지극히 흔한 일이다. 어느 수비수든 선수 생활을 하다 보면 부주의하게 건드린 공이 자기 골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몇 번쯤 있을 수 있다. 그 포지션에 본래 따르는 위험이다. 한동안 속상해하고 나면 지나갈 일이다. 경기장 안에 머물러야 했고, 기술적인 실수 한 번으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그러나 1994년 여름, 콜롬비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경기장 안에 머물러야 할 그 실수가 경기장의 경계를 넘어 현실로 들이닥쳐 생사가 걸린 일이 되었다. 자책골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면, 축구는 더 이상 축구로만 남지 못한다. 자신보다 훨씬 무겁고 어두운 무언가에 휘말린 것이다. 이 둘 사이의 간격은 너무 커서 거의 부조리하다. 스포츠 경기의 실수 한 번과 한 생명의 끝은 본래 서로 까마득히 떨어져 있어야 할 일이었다. 1994년 7월 2일 새벽, 그는 현지의 한 유흥업소 밖에서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인 뒤 총에 맞아 숨졌다. 1995년 범인 무뇨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 43년형에 처해졌다. 그는 나중에 현지의 한 인물에게 고용된 운전기사였음이 밝혀졌다. 범행은 인정했지만 자기 윗선이 누구인지 밝히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약 11년만 복역하고, 2005년에 이른바 모범적인 수형 생활을 이유로 조기 석방되었다.

이 조기 석방은 이미 불완전했던 정의에 또 하나의 틈을 냈다. 범인이 법의 처벌을 받은 것은 그나마 하나의 답이었다. 그러나 43년이라는 판결 가운데 약 4분의 1만 집행되었으니, 그 답의 무게도 줄었다. 43년형을 받은 살인자는 모범적인 수형 생활 덕분에 11년 뒤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가 목숨을 빼앗은 사람은 영원히 스물일곱에 멈추었다. 형기와 목숨 사이에서, 죄와 벌 사이에서 그 저울은 처음부터 제대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유일하게 확정된 이 부분조차 끝내 납득할 만한 마무리를 내놓지 못했다.

이것들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렇게 확인된 사실들을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겁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 국가대표 수비수가 경기를 치른 지 며칠 만에 자기 나라의 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전설도 각색도 아니다. 문서에 분명히 기록된 일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이 부분만으로도 온전한 비극이다. 생생하게 살아 있던 목숨이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갑자기 끊겼다. 자책골 하나, 목숨 하나,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지시한 사람을 밝히기를 거부한 범인 하나, 43년을 선고하고도 11년만 집행한 형기 하나가 남았다.

7. 확정할 수 없는 동기

여기서 더 들어가면 층위를 나누어야 하는 영역이 시작된다. 이 층위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이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에스코바르가 바로 그 자책골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돈을 잃은 도박꾼이나 분풀이를 하려던 마약 조직 두목이 직접 사람을 사서 보복했다는 것이다. 두 설명 모두 아무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당시 보도에는 말다툼 중 오간 욕설에 자책골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고 실제로 나온다. 판결을 전한 일부 기사에는 사건 당시 누군가가 자책골을 넣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범인이나 공범이 총을 한 발 쏠 때마다 골이라고 외쳤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아주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당시 보도에 담긴 증언과 풍문으로만 써야 한다. 법원이 규명한 최종적인 동기인 것처럼 써서는 안 된다. 그 경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법정이 확정한 것은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이 두 가지다. 법정이 확정하지 못한 것은 배후의 지시자까지 이어지는 완전한 연결 고리다. 법원이 최종적으로 확인한 그런 사슬은 없다. 범인은 자백했으나 끝내 자신의 고용주를 지목하지 않았다. 자책골에서 도박 빚으로, 청부살인으로,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로 이어지는 전체 사슬을 사법은 아직 맞추지 못했다.

윗선을 밝히기를 거부한 범인은 진실로 이어지는 사슬을 제 손으로 끊은 셈이다. 방아쇠를 당긴 고리만은 인정했지만, 그 이전의 모든 고리는 영원히 침묵 속에 가두었다. 43년형 가운데 약 11년만 집행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설명되지 않는 빈칸을 남긴다.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살인 사건의 범인이 왜 그렇게 일찍 풀려날 수 있었는가. 이런 빈칸들을 이어 보면 사건 전체는 반쯤 짓다가 공사를 멈춘 건물 같다. 기초와 1층은 확실하지만, 그 위는 허공에 매달린 채 뒤에 오는 사람들의 추측에 맡겨져 있다. 사건이 진정으로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한, 에스코바르의 죽음은 영원히 거대한 물음표 안에 머문다.

다 맞출 수 없는 이 사슬이 비극 전체에서 가장 괴로운 부분이다. 사람들은 완전한 설명을 너무나 원한다. 대체 왜 이 목숨이 사라졌는지, 누구에게 그 값을 물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이 내놓는 것은 끊어진 조각들뿐이다. 자책골 하나, 말다툼 한 번, 입을 열지 않는 범인 하나, 폭력이 자라나는 토양. 조각들은 하나하나 모두 진실이지만, 아무리 해도 완전한 인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이어지지 않기에 애도조차 놓일 곳을 찾지 못한다. 누구에게 정의를 요구해야 하는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 수사 당국과 언론은 한때 이 사건을 나이트클럽의 말다툼에서 시작된 거리의 폭력으로 이해했다. 자책골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단선적인 설명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현장의 언쟁, 술을 마신 뒤의 충돌, 대표팀의 성적, 지역에 만연한 폭력 환경, 범죄 조직과 얽힌 인맥까지 설명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단일하고 확실한 동기로 압축되지는 않았다.

이런 복잡함이야말로 이야기 속에서 가장 쉽게 지워진다. 자책골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설명은 너무 깔끔하고 너무 극적이다. 선수 한 사람이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완결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그 이야기보다 훨씬 진창에 가깝다. 당시 콜롬비아의 폭력 생태계 전체와 얽혀 있었고, 분명히 밝히기 어려운 술자리의 충돌과 뒷세계의 관계가 엉켜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자책골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기억하고 퍼뜨리기는 쉽다. 하지만 그 목숨과 그 복잡한 진실을 단순화하는 일이다. 진실은 흔히 전설만큼 깔끔하지 않다. 그래도 그것이 진실이다.

이것이 이 범죄의 가장 깊은 잔여항이다. 목숨 하나가 사라졌지만, 왜 사라졌는지는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구축 안에서 가장 증거를 중시하고 가장 완결을 추구하는 사법조차 이 목숨 앞에서는 총격범까지만 밝혀냈다. 그 안쪽의 동기, 지시가 내려온 사슬은 영원히 미결로 남는다. 살인자에게 판결을 내릴 수는 있어도 살인의 동기는 확정하지 못한다. 이 틈은 웸블리의 그 골보다, 브레메의 그 페널티킥보다 무겁다. 여기서 매달려 있는 것은 한 목숨의 값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느냐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들에서도 판결할 수 있음과 확정할 수 없음 사이의 이 틈은 거듭 나타났다. 웸블리의 그 골은 승패를 판정했으나 공이 정말 선을 넘었는지는 확정하지 못했다. 브레메의 그 페널티킥은 우승팀을 정했으나 그 판정이 공정했는지는 확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거기에 매달려 있던 것은 승패와 우승과 명예였다. 에스코바르의 사건에서 매달려 있는 것은 한 목숨이다. 그 목숨이 대체 왜 사라졌으며 누가 갚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똑같이 판결할 수는 있어도 확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게는 전혀 다르다. 한 나라는 풀리지 않은 억울함을 안고 수십 년 동안 우승 논쟁을 이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한 사람의 죽음이 유족에게 남기는 것은 영원히 아물 수 없는 상처다.

8. 계산된 것과 떠넘겨진 것

바조와 에스코바르를 나란히 놓으면 이 대회의 진짜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은 경기장 안에서, 다른 한 사람은 경기장 밖에서 같은 것의 양면을 감당했다. 바조가 감당한 것은 경기가 반드시 승부를 가려야 한다는 무게였다. 그 무게는 페널티킥 한 번으로 압축되어 그 혼자의 발 위에 떨어졌고 그를 무너뜨렸다. 에스코바르가 감당한 것은 결과에 반드시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는 집착이었다. 그 집착은 일그러져 총알 하나가 되었고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하나는 승부의 무게, 다른 하나는 결과의 책임이다. 이 두 가지는 본래 시스템 전체가, 이치가 통하지 않는 그 우연이 소화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구체적인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떠넘겨졌다.

바로 이것이 그 장사, 완결을 추구하는 그 논리의 가장 깊은 대가다. 모든 것을 남김없이 계산하려는 장사도 위험을 계산으로 없앨 수는 없다. 우연도, 경기 한 번의 불확실성도 없앨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계산으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시스템 바깥으로 밀어내 사람에게 떠넘기는 일뿐이다. 시스템이 말끔한 결과를 원했기에 바조의 발은 시스템을 대신해 우연의 잔혹함을 감당했다. 사람의 마음이 분명한 책임을 원했기에 에스코바르의 목숨은 한 번의 패배를 대신해 본래 그가 갚아서는 안 될 빚을 갚았다. 구축이 완결을 원할수록 사람의 짐은 더 무거워진다. 구축은 구체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 위에 자신이 바라는 확실함을 세웠다.

그런데 이 두 무게는 끝내 진정한 완결에 이르지도 못했다. 바조가 높이 차 버린 공은 아무리 큰 기대도 그 한순간을 계산해 내지 못함을 입증했다. 미결로 남은 에스코바르의 사건은 아무리 집요하게 책임을 물어도 그 동기 하나를 확정하지 못함을 입증했다. 구축은 자신이 원하던 깔끔한 마무리를 어느 쪽에서도 얻지 못했다. 천근의 무게를 사람에게 얹었고 사람은 무너졌다. 그런데 원하던 완결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9. 잘려 나간 또 다른 두 다리

이 대회에는 다른 방식으로 그 기계에 짓밟힌 또 한 쌍의 다리가 있었다.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는 그리스를 이기고 이어 나이지리아를 이겼다. 마라도나는 한창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전 뒤의 도핑 검사에서 그의 검체에 에페드린 계열의 금지약물 다섯 종류가 검출되었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곧바로 그를 대회에서 제외했다. 8년 전 두 발로 세기의 골을 넣고 한 손으로 몰래 골을 훔쳤던 사람이, 이번에는 한 장의 도핑 검사 결과에 밀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쫓겨났다.

그는 훗날, 그들이 내 두 다리를 잘라 버렸고 스스로를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했다.

두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그 말과,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더라도 뛰겠다는 바조의 말은 이 월드컵에서 다리에 관해 남은 두 마디 불길한 예언 같다. 한 사람의 다리는 부상에 시달렸지만 그는 끝내 그 다리로 결승 무대에 서려 했다. 다른 사람의 다리는 한 장의 출전 금지 통보에 상징적으로 잘려 나가 경기장에 설 기회조차 잃었다. 여기서 다리는 한 선수가 지닌 존엄과 능력 전부가 깃든 곳이 되었다. 그리고 이 대회는 서로 다른 두 방식으로 두 위대한 사람에게 다리를 빼앗기는 경험을 안겼다. 하나는 실제 부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판결이었다. 그 말과 다리를 톱으로 잘라 내더라도 뛰겠다는 바조의 말은 서로 씁쓸하게 호응한다. 같은 월드컵에서 한 사람은 실제로 다친 다리를 끌고도 출전하겠다고 고집했고, 다른 사람의 다리는 한 장의 출전 금지 통보에 비유적으로 잘려 나갔다. 이후 국제축구연맹은 마라도나에게 15개월 출전 정지 처분을 추가했다.

마라도나가 대회에서 제외된 일과 바조의 페널티킥 실패, 에스코바르의 피살은 물론 같은 성격의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같은 월드컵 안에 놓으면 공통된 그림자가 보인다. 완벽함과 깨끗함을 추구하는 이 거대한 기계는 언제나 어느 지점에서 구체적인 한 사람을 짓밟는다. 누구의 발을 짓밟고, 누구의 명예를 짓밟고, 또 누구의 목숨을 짓밟는다.

이 기계의 작동은 누구 한 사람을 위해서도 멈추지 않는다. 바조가 페널티킥을 실축한 그날에도 시상식은 예정대로 열렸고 상업 후원 약속도 그대로 이행되었다. 에스코바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월드컵은 그대로 결승까지 진행되었다. 마라도나가 쫓겨난 순간에도 일정은 그대로 이어졌다. 기계의 위대함과 잔인함은 모두 이 ‘그대로’에 있다. 너무 크고 너무 견고해서, 구체적인 어느 한 사람의 비극도 톱니바퀴가 단 한 칸이라도 더디게 돌게 만들지 못한다. 기계에는 영웅도 필요하고 희생양도 필요하다. 하지만 영웅이든 희생양이든 거대한 작동 과정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고리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기계는 아무리 거대하고 냉담해도, 끝내 자신이 원한 것을 온전히 손에 넣지 못했다. 말끔하게 우승팀을 정하고 싶었지만 페널티 마크 앞에서 누구도 계산할 수 없는 한 번의 우연에 우승의 향방을 맡겼다. 분명한 마무리를 원했지만 메데인의 거리에는 영원히 끝까지 밝혀내지 못할 미결 사건을 남겼다. 기계는 사람을 짓밟고 톱니바퀴를 평소처럼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짓밟고 지나간 뒤에도 정작 원했던 확실함과 완결은 하나도 얻지 못했다. 사람을 희생시키고도 그 희생과 맞바꾸려던 것을 얻지 못했다. 이것이 이 기계의 가장 깊은 헛수고다. 기계는 그대로 돌아가고, 우승팀은 그대로 나오고, 장사는 그대로 번창한다. 다만 대회가 열릴 때마다 늘 한두 사람은 그 기계의 톱니바퀴 사이에 남겨진다.

10. 맺으며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보자.

1994년 미국은 축구를 상품으로 삼아 뿌리 없는 땅에 팔았고, 그 판매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경기당 평균 6만 9천 명의 관중, 5천만 달러의 흑자, 텔레비전 중계에 세심하게 맞춘 경기 시간, 실내 경기장으로 옮겨 공들여 관리하고 경기를 마친 뒤 다른 축구장에 다시 깐 잔디. 이것들이 함께 일류 사업의 모습을 그려 낸다. 그러나 잔디의 상태를 관리해 낸 솜씨로 경기의 우연까지 관리할 수는 없다. 장사가 모든 것을 계산하려 하고, 말끔하고 위험 하나 없는 결과를 추구할수록, 계산으로 없앨 수 없는 불확실성과 그 부담은 다른 곳으로 떠넘겨진다. 그 전가가 끝나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

이 대회는 구축이 축구를 징발하는 대가가 어떻게 한 단계씩 무거워지는지 똑똑히 보여 주었다. 처음에 징발한 것은 명예였다. 정권이 월드컵을 빌려 자신을 치장했다. 그다음에 징발한 것은 자유였다. 떠들썩한 환호가 몇 블록 떨어진 감방을 가렸다. 1994년에 이르러 계산서는 목숨에 청구되었다. 바조는 한쪽 발로 팀 전체를 대신해 이치가 통하지 않는 승부의 무게를 감당했다. 높이 뜬 그 한 번의 킥이 그를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박아 놓았다. 사람들은 먼저 혼자서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등에 업고 간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을 곧잘 잊는다. 에스코바르는 목숨 하나로 한 번의 패배를 대신해 본래 자신이 갚아서는 안 될 빚을 갚았다. 그 빚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그 동기는 무엇인지, 지시가 내려온 사슬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사법은 총격범까지 밝혀내고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영원히 미결로 남았다.

그 기계에 짓밟힌 사람들은 끝내 기계가 원하던 말끔한 완결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승패는 갈렸지만 바조의 그 킥은 아무리 두터운 저력도 우연의 그 한순간을 계산해 내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범인에게 판결은 내려졌지만 에스코바르의 사건은 아무리 집요하게 책임을 물어도 진짜 동기 하나를 확정하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구축은 천근의 무게를 구체적인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얹어 그들을 무너뜨렸다. 그러고도 그토록 갈망하던 확실함을 얻지 못했다. 기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장사는 여전히 이어진다. 그러나 톱니바퀴 아래 짓눌린 사람들,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 무덤 앞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는 애도야말로 이 화려한 장사의 진짜 비용이다. 모든 것을 계산하려는 장사도 끝내 사람을 다 계산하지 못한다. 누구도 정확히 셈할 수 없는 공을, 누구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목숨을 가두지 못한다.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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