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 | 日本語 | Français | Deutsch | Español | 한국어
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세계 축구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 제08편 / 총 22편

멕시코

컬러 영상에 봉인된 팀,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잴 수 없다

1970년 브라질과 컬러 위성중계의 만남을 통해 ‘역대 최고’라는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상품이 되는지 묻는다.

Han Qin (秦汉)·2026
이 글의 목차

1.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팀

축구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1970년의 브라질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축구팀이었다고.

그 팀의 실력에는 거짓이 없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여섯 경기를 모두 이기고 열아홉 골을 넣었다. 자이르지뉴는 조별리그부터 결승까지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골을 터뜨렸다. 결승에서는 이탈리아를 4 대 1로 꺾었다. 공격진과 미드필드 곳곳에서 득점이 나왔다. 펠레가 있었고, 제르송과 히벨리누, 토스탕이 있었다. 오른쪽 풀백 자리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와 승부에 쐐기를 박은 주장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도 있었다. 하나같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기록이다.

여기에 흔히 함께 거론되는 기록이 하나 더 있다. 이 팀을 이끈 마리우 자갈루 감독은 선수로서 1958년과 1962년에 두 차례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70년에는 감독으로 브라질을 다시 정상에 올려놓았다. 선수와 감독 두 신분으로 월드컵을 제패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여섯 경기 전승을 거둔 팀, 매 경기 득점한 윙어,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우승한 사령탑. 이 모든 것을 모아놓으면 참으로 눈부신 이력이 된다. 이 이력을 두고 뛰어나다고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팀에 준 말이 ‘뛰어나다’가 아니라 ‘가장 아름답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였다는 데 있다.

‘뛰어나다’와 ‘가장 아름답다’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두 말은 성격부터 다르다. 뛰어나다는 말은 이력을 서술한다. 뒷받침하는 사실이 있고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왕관이다. 무엇을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왕관을 씌우려는 것이다. 지금껏 축구를 했던 모든 팀 가운데 한 팀을 골라, 단 하나뿐인 지고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런 왕관을 씌우려면 그 팀이 축구를 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온 세계가 동시에 그 팀을 보고, 동시에 그 왕관을 인정해야 한다. 1970년의 브라질은 마침 그런 순간을 만났다.

그전에도 위대한 팀은 있었다. 1954년의 헝가리와 1958년의 브라질도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는 축구를 했다. 하지만 그 팀들은 1970년의 브라질처럼 온 세계가 같은 시간에 컬러 화면으로 함께 보고 함께 기억한 팀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의 위대함은 주로 직접 본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흑백의 단편적인 영상 속에 남아 있었다. 1970년의 브라질은 공을 차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온 세계가 동시에 신화로 떠받든 최초의 팀이었다. ‘가장 아름답다’는 영예의 절반은 그 컬러 화면이 준 것이었다.

이 말은 그 팀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흔히 놓치는 사실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것이다. 한 팀이 가장 아름답다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느냐는 애초에 얼마나 잘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조건에서 그 훌륭함을 보았느냐도 중요하다. 똑같이 멋진 축구라도 컬러 텔레비전과 위성 중계가 없던 시대에 펼쳐졌다면, 아마 직접 본 소수의 기억에만 남았을 것이다. 전 세계가 공유하는 신화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70년의 브라질은 발끝으로 이겼고, 시대를 만나서도 이겼다. 영상이 처음으로 온 세계를 품을 수 있게 된 바로 그 순간에 축구를 했기에 이겼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평가다. 여섯 경기 전승은 셀 수 있고, 열아홉 골도 셀 수 있다.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셀 수 없다. 후대 사람들이 거듭 되풀이한 말, 하도 되풀이해서 거의 스코어만큼 확실한 사실처럼 느껴지게 된 말이다.

온 세계가 그 팀을 함께 기억하고 함께 가장 아름답다고 추대한 데에는 또 하나, 자주 간과되는 전제가 있다. 1970년은 마침 전 세계가 위성을 통해 컬러 텔레비전으로 하나의 월드컵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된 첫해였다. 그 팀과 온 세계로 퍼져나간 그 팀의 영상은 함께 태어났다.

2. 컬러로 보는 월드컵

1970년 월드컵은 중계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가장 신중하게 표현하자면, 이 대회는 컬러 텔레비전으로 대규모 중계된 최초의 월드컵이었다. 아울러 위성을 통해 더 넓은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월드컵 경기를 처음 실시간으로 전달해가는 데 중요한 이정표였다.

오늘날에는 컬러 텔레비전도 위성 생중계도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그것이 당시 무엇을 뜻했는지 실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1970년에는 새로운 일이었다. 그전까지 멀리 유럽에 있던 시청자들은 월드컵의 실시간 화면을 아예 볼 수 없거나, 흑백 중계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0년, 초록의 그라운드와 브라질의 황금빛 유니폼, 잇따라 터지는 골이 처음으로 컬러 화면을 통해 거의 같은 시간에 머나먼 거실에 나타났다. 축구가 이토록 생생한 모습으로 이토록 많은 곳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영국의 한 과학·미디어 박물관 자료는 이를 분명히 적고 있다. 1970년 월드컵은 처음 컬러로 방송된 대회였을 뿐 아니라, 유럽 시청자들이 대서양을 건너오는 위성 신호를 통해 월드컵을 생중계로 볼 수 있었던 첫 대회이기도 했다. FIFA 역시 자체 회고에서 1970년 대회를 컬러로 전 세계에 중계된 최초의 월드컵이라고 명시한다.

다만 여기에는 신중한 설명이 하나 필요하다. 축구가 전 세계적인 텔레비전 행사로 바뀐 것은 1970년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미디어 역사 연구 중에는 축구와 텔레비전이 결합한 진정한 전환점을 1970년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1966년으로 보는 연구도 있다. 그러므로 1970년은 컬러와 위성 생중계라는 차원에서 결정적인 한 걸음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월드컵이 전 세계적인 텔레비전 행사가 되는 과정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점차 속도를 냈다. 어느 한 대회에서 느닷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전환점을 어느 한 해로 못 박으면 설명하기는 편하지만, 그런 설명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실제 변화는 좀처럼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 위성 기술의 성숙, 중계망의 확충은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쌓인 결과였다. 1970년이 기억되는 까닭은 그렇게 쌓인 것들이 마침 이 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모습으로 한데 모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970년 대회가 축구를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갑자기 세계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한다면, 점진적인 과정을 돌연한 기적으로 잘못 읽는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영상 뒤에 이미 체계를 갖춘 사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FIFA는 일찌감치 이 대회의 중계권을 멕시코의 한 방송사에 16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 뒤 유럽 중계를 놓고 유럽방송연맹과 거듭 협상했고, 1969년에는 제삼자가 개입한 재판매도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1970년에 이르면 월드컵 중계는 단순히 경기를 방송하는 일이 아니었다. 국제 중계권과 신호 배급을 둘러싼 하나의 거래 체계가 되어 있었다.

이 대목은 중요하다. 이때부터 축구를 보는 일이 더는 공짜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기를 볼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 뒤에는 일련의 계약과 가격, 협상이 얽혀 있다.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가장 순수한 것과 그것을 보고 싶어 하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 이제 사업으로 짠 그물이 한 겹 놓였다. 축구는 여전히 같은 축구였지만, 그것이 사람들 눈앞까지 전달되는 전 과정은 점점 커지는 사업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이 사업은 아직 초기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향한 방향으로 훗날 길은 훨씬 멀리 뻗어나간다. 한 스포츠가 이만큼 큰 규모로 중계될 수 있고, 이만큼 많은 중계권료를 받을 수 있으며, 이만큼 거대한 시청자층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상인의 눈에 비친 그 스포츠의 가치와 팬의 눈에 비친 가치는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팬이 보는 것은 축구 자체다. 반면 점점 더 많은 사람은 축구 뒤에 있는 거대한, 개발 가능한 시장을 보기 시작했다. 1970년은 이 두 시선이 나란히 움직이기 시작한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물론 1970년에는 이 모든 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의 중계권료는 훗날 툭하면 천문학적 액수를 기록하는 중계 계약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상업화도 훗날처럼 정교하거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한 경기를 온 세계가 동시에 볼 수 있고, 거듭 재생할 수 있으며, 좋은 값에 팔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축구는 더 이상 현장의 수만 명에게만 속했던 예전의 순수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축구는 사업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갈수록 몸집을 키우는 사업이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청했는지를 두고는 당시에도 매우 높은 추산치가 나왔다. 1970년 대회가 끝난 뒤 미국의 한 잡지는 약 7억 명이라는 규모의 수치를 제시했다. 이는 당시의 추정으로 인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훗날 기준이 통일된 정밀 통계인 양, 현대의 시청률 측정 결과와 곧바로 비교할 수 있는 수치로 여겨서는 안 된다.

3. 축구가 영상이 되다

1970년에 일어난 큰 사건 하나는 정작 그라운드가 아니라 화면 안에 있었다. 이때부터 축구는 두 번째 존재를 얻었다.

그전까지 한 경기는 대체로 그 90분 동안만 살아 있었다. 한 번 치르고 나면 사라졌다. 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은 보았고, 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음 날 신문에서 스코어 하나와 몇 줄의 글을 읽는 것으로 그쳤다. 경기 자체는 단 한 번뿐인,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것이었다.

한 번뿐이라는 것은 한때 축구의 본모습이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른 모든 일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뒤늦게 남겨진 드문드문한 글에 기대어 겨우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멋진 경기라도 그 빛의 대부분은 종료 휘슬과 함께 바로 그날 오후 속으로 흩어졌다.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그런데 1970년부터 축구에는 분신이 하나 생겼다. 온 세계로 퍼져나가고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컬러 영상이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그 대포알 같은 슈팅, 펠레가 골키퍼를 돌아 지나간 그 장면, 뱅크스의 그 선방은 더 이상 현장에 있던 수만 명의 기억 속에만 살지 않았다. 영상이 되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고, 세대가 바뀌어도 꺼내어 다시 보는 장면이 되었다. 한 번 치르고 사라졌어야 할 경기가 이 영상 덕분에 거의 영원에 가까운 생명을 얻었다.

물론 좋은 일이다. 이 영상 덕분에 수십 년 뒤의 사람들도 1970년의 브라질이 어떻게 축구를 했는지 직접 보고, 그 골과 그 선방에 여전히 감탄할 수 있다. 그 순간들은 그날 오후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남아 온 인류가 함께 누리는 자산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상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경기를 붙들어두는 일이며, 아름다운 것을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대단한 일이다. 동시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도 하다. 영상과 그 경기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은 그 경기에서 잘라내어 전송하고 보관한 분신이다. 하지만 일단 독립하고 나면 원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갖는다. 원래의 것은 단 한 번뿐이지만 영상은 무한히 재생할 수 있다. 원래의 것은 우연이지만 영상을 자꾸 보다 보면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원래의 것에는 찍히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순간이 무수히 많다. 영상은 그중 가장 멋진 몇 장면만 남긴 뒤, 사람들이 그 경기와 그 팀을 바로 그 몇 장면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게 미묘한 바꿔치기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 경기를 기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기억하는 것은 그 경기의 영상이다. 영상은 경기에서 골라낸, 화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작은 일부일 뿐이다. 화면에 잘 어울리지 않는 순간들, 평범하게 공을 돌리던 시간, 실수와 망설임, 찍히지 않았거나 아무도 거듭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은 조용히 생략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교하게 편집된 영상이 오히려 실제의 거칠고 온전한 경기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대체물이 진짜 행세를 하는 것은 영상이 타고난 재주다. 현실의 한 단면을 잘라내어 사람들 앞에 거듭 보여준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것이 단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현실 전체로 받아들인다. 90분짜리 경기는 몇 분짜리 하이라이트로 편집되고, 한 달 동안 축구를 한 팀은 몇 번의 빛나는 순간으로 압축된다. 잘려나간 것은 숱하게 많고 평범하지만 똑같이 실제였던 부분이다. 남은 얼마 안 되는 부분은 오히려 반복해서 보인다는 이유로 현실을 압도하는 무게를 얻는다.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거듭 재생된 일이다.

축구에서 이 일의 여파는 특히 깊고 넓다. 이제부터 어떤 팀이나 선수가 역사에 기억될 수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는 얼마나 잘했는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찍혔는지, 어떻게 편집되었는지, 어떻게 방송되었는지도 중요해졌다. 카메라가 사랑하는 것은 끝없이 확대되고, 카메라가 놓친 것은 조용히 잊힌다. 위대한 순간도 찍히지 않았다면 마치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된다. 평범한 순간도 거듭 재생되면 명장면으로 추앙받을 수 있다. 이때부터 축구의 역사와 축구 영상의 역사는 더 이상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영상은 축구의 축복이자 족쇄다. 축복인 까닭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름다움이 마침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형태를 얻었기 때문이다. 족쇄인 까닭은 실제 축구가 이제 정교하게 편집되고 미화된 자신의 그림자와 사람들의 기억을 놓고 다퉈야 하며, 대개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친 현실의 경기를 애써 복원하기보다 완벽한 영상을 믿으려 한다. 그렇게 영상이 주인공이 되고, 영상이 기록했던 실제 경기는 오히려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이 영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1970년의 브라질을 영원한 기념비로 굳히는 것이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팀이라는 기념비로.

4.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잴 수 없다

하지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은 꼬치꼬치 물으면 버티지 못한다.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것인가? 잴 자라도 있는가? 1970년의 브라질은 1954년의 헝가리보다 아름다운가? 훗날 우승하지 못한 1982년의 브라질보다 아름다운가? 훨씬 뒤에 등장한 패스와 점유의 달인들보다 아름다운가? 어느 질문에도 정답은 없다. 아름다움은 본래 골 수처럼 나란히 놓고 높낮이를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팀을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단호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이 약속하는 최종 판정, 바로 이 팀이며 다른 팀은 없고 영원히 1위라는 판정은 도무지 입증할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조금 흥을 깨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느 팀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조차 잘못인가? 물론 아니다. 누구나 진심으로 1970년의 브라질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그 느낌은 진실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문제는 좋아하는 마음에 있지 않고, ‘가장’이라는 말에 있다.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일이지만 ‘가장’은 개인을 넘어선 최종 순위를 암시한다. 모든 팀을 견주어본 끝에 내려진 순위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순위에는 심판도 없고 끝도 없다. 당신은 이 팀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고 나는 다른 팀이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누구도 모두가 인정하는 자를 꺼내어 결판을 낼 수는 없다.

이런 대접을 받은 것은 1970년의 브라질만이 아니다. 같은 대회의 이탈리아와 서독 준결승은 4 대 3으로 끝났고, 연장전에서만 다섯 골이 나왔다. 훗날 ‘세기의 경기’라는 이름이 굳어졌으며, 아스테카 경기장 밖에는 지금도 그 경기를 기리는 동판이 서 있다. 뱅크스의 그 선방은 ‘세기의 선방’으로 불린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그 골은 ‘역사상 최고의 팀 골’로 불린다. 예외 없이 모두 당시 경기 기록에 쓰인 공식 명칭이 아니다. 후대가 덧붙인 최상급의 평가다.

이 최상급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거의 모두가 이 대회에 집중되어 생겨났다는 점이다. 가장 아름다운 팀, 세기의 경기, 세기의 선방, 역사상 최고의 팀 골. 마치 축구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최고를 1970년 한 대회가 싹쓸이한 듯하다. 1970년이 실제로 모든 면에서 역대 최고였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온 세계가 동시에 컬러 영상으로 본 최초의 월드컵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함께 본 것이어야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함께 최고로 추대할 수도 있다. 최상급의 범람은 바로 영상 시대가 왔다는 징후다.

최상급의 유혹은 여기에 있다. 단번에 결판을 냈다는 통쾌함을 준다. 마치 논쟁은 여기서 끝났고 답은 이미 정해졌다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게 정해버린 것은 애초에 정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경기가 역사상 최고인지, 어느 팀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지, 누가 역사상 가장 강한지 재어줄 기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결론처럼 들리는 이 말들은, 사실 끝내 결론 나지 않을 논쟁을 멋진 한마디로 잠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를 분명히 한다고 해서 1970년 브라질의 위상을 낮추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 대단한 팀이었다. 전승도, 골도,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순간들도 모두 사실이다. 구별해야 할 것은 실제로 증명한 실력과, 나중에 덧붙여져 스스로 최종 답인 양 행세하는 최상급이다. 앞의 것은 사실이고 뒤의 것은 평가다. 평가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되풀이해도 측정 가능한 사실로 바뀌지 않는다.

평가를 사실로 여기는 이 혼동은 별 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함정이 숨어 있다.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후대 사람들은 그 정설에 눌려 스스로 판단할 여지를 잃기 쉽다. 누구나 1970년의 브라질이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하는데 거기 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축구를 모르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 축구를 안다는 것은 무엇이 셀 수 있는 사실이고 무엇이 말로 내린 평가인지를 가릴 줄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자유를 남겨두는 것이다.

최상급의 진짜 문제는 잘못된 대상을 골랐다는 데 있지 않다. 끝내서는 안 될 논의를 끝낸 척한다는 데 있다. 아름다움은 세대마다 각자 느끼고 논쟁하고 새로 발견해야 한다. 오늘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사람이 내일은 다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 이 세대가 극치로 떠받드는 것에 대해 다음 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을 가질 수도 있다. 끊임없이 다시 평가하는 것은 본래 건강한 일이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살아 있게 한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는 한마디는 뚜껑처럼,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논의를 한 번에 닫아버리려 한다. 흐르고 열려 있는 것을 억지로 굳어 있고 결론 난 것이라 우긴다.

바로 여기에 굳히려는 힘과 흐르려는 힘의 끝없는 겨루기가 있다.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고정하고 봉인하여, 영원하고 의심할 수 없는 자리를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본래 흐르는 것이다. 세대마다 새롭게 느낄 때에만 생생함을 유지한다. 억지로 ‘가장’이라는 말에 굳혀놓는 순간 오히려 경직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경배하기는 해도 더 이상 느끼지는 않는 표본이 되어간다. 실제 축구는 이런 칭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경기를 이어가며 새로운 아름다움과 새로운 위대함을 끊임없이 세상 앞에 내놓는다.

그러므로 1970년의 브라질이 정말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는지를 붙들고 씨름하기보다, 애초에 답이 없고 답이 필요하지도 않은 질문임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가장 아름다웠든 가장 아름다운 몇 팀 가운데 하나였든, 그 팀이 실제로 펼친 감동적인 축구에는 아무 영향도 없다. ‘가장 아름답다’는 모자를 씌우거나 벗겨서 달라지는 것은 후대의 순위 놀이뿐이다. 그 한 달 동안 실제로 일어난 모든 일은 바꿀 수 없다. 실체 없는 ‘가장’의 자리를 다투는 데서 마음을 거두면 오히려 그 팀의 본모습을 더 또렷이 볼 수 있다.

5. 펠레도 넣지 못한 골이 있다

영상은 또 한 가지 일을 한다. 우연을 슬그머니 다듬어 필연으로 만든다.

영상 속 1970년의 브라질은 우승할 운명, 신화가 될 운명을 타고난 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의 그 한 달은 곳곳이 우연이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공교롭게도 펠레의 가장 유명한 두 번의 슈팅이다. 둘 다 골이 되지 못했다.

하나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나왔다. 자기 진영에 있던 펠레는 상대 골키퍼가 앞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엄청나게 먼 거리에서 로빙슛을 날렸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골키퍼를 넘어갔으나 골대 바로 옆으로 빗나갔다. 세상을 놀라게 할 상상력이었다. 하지만 빗나갔다. 다른 하나는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에서 나왔다. 토스탕이 스루패스를 넣자 우루과이 골키퍼가 뛰쳐나왔다. 펠레는 공보다 먼저 나아가면서도 일부러 공을 건드리지 않았다. 공은 골키퍼의 한쪽으로 굴러가게 두고 자신은 반대쪽으로 돌아 지나간 뒤, 몸을 돌리며 슈팅했다. 공은 먼 쪽 골대 바깥으로 벗어났다. 또 한 번 상상을 벗어난 번뜩임이었다. 또 빗나갔다.

이 두 번의 실패한 슈팅은 훗날 성공한 골들만큼이나 유명해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영상이 덮어버리기 쉬운 사실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누구나 가장 위대하다고 인정하는 선수조차 천재성이 가장 빛나는 순간에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로빙슛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 가운데 하나가 될 뻔했다. 그러나 모자랐던 그 조금이 바로 우연이었다.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마침 들어가지 않았다.

성공한 골들보다 이 일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들어간 골은 천재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들어갈 뻔하다가 끝내 들어가지 않은 골은 천재의 진실을 드러낸다. 그 역시 우연 속에서 온몸을 던져 싸우는 사람이라는 진실이다. 펠레가 위대한 까닭은 번뜩이는 생각마다 골로 바꾸어서가 아니다. 보통 사람은 감히 떠올리지도 못할 일을 거듭 시도할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많은 것이 끝내 골대 밖으로 나가더라도 말이다. 그의 위대함을 백발백중의 기적으로 이야기하면,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위험을 무릅쓰는 살아 있는 그 사람을 도리어 지워버리게 된다.

브라질 팀 전체도 다르지 않았다. 여섯 경기를 모두 이겼지만, 하나하나 고지대와 고온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경기장에서 힘껏 싸워 얻어낸 승리였다. 고지대와 더위가 이 대회의 난관이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된다. 멕시코시티의 해발고도는 2,000미터가 넘고 날씨마저 더워, 각 팀은 이를 가장 큰 골칫거리로 다루었다. 그러나 특정 경기의 승패를 고도나 날씨 하나로 간단히 설명하는 것도 사후에 지어낸 단선적인 이야기다. 실제 경기는 결코 어느 한 요인이 좌우하지 않는다. 무수한 우연이 한데 얽힌 결과다.

복잡한 것을 한 가지로 환원하려는 충동은 영상이 가장 쉽게 빠지는 잘못이다. 전승을 거둔 팀을 영상으로 보면 모든 승리가 당연해 보인다. 실력이 자연스럽게 결과로 나타났을 뿐인 듯하다. 그러나 실제 경기마다 아슬아슬한 때가 있었고 위험한 때가 있었다. 어느 한 우연 때문에 다른 결말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 모든 우연을 지우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챔피언만 남기는 것은 영상이 가장 잘하는 미화이며, 가장 쉽게 사람을 속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승리는 결코 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잊게 한다. 달라질 수도 있었던 무수한 순간 속에서, 운도 따라준 치열한 싸움 끝에 얻어낸 것이 승리다.

그 운을 인정한다고 1970년 브라질의 위대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진실하고 더 귀하게 다가온다. 혹독한 경기장에서, 패배로 기울 수도 있었던 무수한 순간마다 다시 승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온 팀은 우승하도록 정해진 팀보다 훨씬 감동적이다. 정해진 승리에는 이야기가 없다. 우연 위에 매달려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던 승리만이 돌이켜 아찔하게 하고, 깊은 경의를 느끼게 한다. 영상은 우연을 말끔히 지워 그 팀을 높여주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대단했던 부분을 슬쩍 가져가버린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맞서 싸우는 용기를 빼앗는 것이다.

펠레의 빗나간 그 두 번의 슈팅이 바로 이 용기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안전한 길만 택하는 선수라면 자기 진영에서 덜컥 로빙슛을 날리지 않을 것이다. 공을 건드리지 않은 채 골키퍼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위험한 수에 승부를 걸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시도하는 사람은 평범함에 만족하지 않고, 만에 하나 나올 경이로운 장면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그는 실패했다. 공은 빗나갔다. 그러나 실패할 위험을 기꺼이 감당하는 바로 그 기질이 그를 펠레로 만들었다. 영상은 그의 성공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그를 신으로 모셨다. 하지만 진짜 살아 숨 쉬는 펠레는 바로 이런 실패한, 빗나간, 그러면서도 더없이 대담한 시도 속에 숨어 있다.

어쩌면 빗나간 이 두 번의 슈팅이 온 세계가 기억하는 그 골보다 축구의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축구의 진실은 본래 백발백중이 아니다. 열에 여덟아홉은 빗나가고, 가끔 한 번이 맞아떨어진다. 영상은 맞아떨어진 한 번을 골라 편집하고, 그것을 필연으로 부풀리기 좋아한다. 그러나 잘려나간 여덟아홉 번의 실패야말로 이 스포츠의 실제 바탕이다. 영상은 그 모든 우연을 지우고 전승의 브라질만 남겼다. 처음부터 승리를 손에 쥐고 있었던 듯한 브라질을.

6.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그 골

영상에 가장 온전하게 봉인된 것은 결승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넣은 골이다.

이 골은 흔히 역사상 최고의 팀 골로 불린다. 그 과정에 대한 여러 회고는 대체로 일치한다. 공격은 브라질의 후방에서 시작되었다. 토스탕이 먼저 공을 되찾고 전개 방향을 바꾸는 데 가담했다. 클로두아우두는 자기 진영에서 이탈리아 선수 여러 명을 연달아 벗겨냈다. 이어 공은 왼쪽의 히벨리누에게 전달되었고, 자이르지뉴가 다시 중앙으로 보냈다. 페널티 지역 앞의 펠레가 잠깐 멈췄다가 오른쪽으로 공을 밀어주자,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오른쪽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와 대포알 같은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후방에서 전방까지 이어진 패스의 행렬이 모든 것을 밀어버릴 듯한 강력한 중거리 슈팅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골이 감동적인 까닭은 그 팀이 가진 가장 좋은 것들을 십수 초 안에 압축해놓았기 때문이다. 후방에서 차근차근 밀고 올라가는 전개, 여러 선수의 가담, 물 흐르듯 이어지는 호흡이 모두 들어 있다. 어느 한 천재의 독무가 아니다. 팀 전체의 합주다.

바로 이것이 이 브라질 팀의 가장 매혹적인 점이다. 펠레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있었지만, 가장 멋진 골은 한 사람의 영웅적 활약을 과시하는 장면이 아니었다. 열한 명 가운데 여러 사람이 후방에서 전방까지 고리를 하나씩 이어 공을 밀고 나간 결과였다. 가장 높은 경지의 축구는 한 천재의 독주가 아니라 고수들의 합주임을 보여주었다. 개인의 번뜩임은 집단의 흐름 속에 녹아들 때에만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다.

하지만 이토록 거듭 칭송받는 골조차 그 기록은 영상만큼 말끔하지 않다. 어떤 기록은 86분의 골이라 하고, 어떤 기록은 87분이라 한다. 이 공격에 가담하여 연속된 패스 과정에서 공을 만진 브라질 선수도 어떤 회고는 일곱 명, 어떤 회고는 여덟 명, 또 어떤 회고는 아홉 명으로 센다. 이는 중대한 진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기록하고 인원을 세는 기준의 차이다. 그러나 바로 이 차이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 영상 속에서 완벽한 순간으로 굳어진 장면조차 꼼꼼히 따져 들어가면 그 아래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거친 부분이 남아 있다. 영상은 단정하고 분명한 화면을 주지만, 그 화면 아래 실제 과정에는 언제나 화면보다 조금 더 많은 모호함의 주름이 있다.

이런 모호함 때문에 그 골의 멋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상이 제시하는 단호한 명료함에는 얼마간 거짓이 섞여 있음을 일깨워준다. 원래 여러 설명이 존재하는 순간을, 마치 유일하고 정확한 모습인 듯 하나의 화면으로 고정하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는 사람은 자신이 진실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골이 정확히 몇 분에 들어갔는지, 공을 만진 사람이 몇 명인지조차 말이 갈린다는 사실은 모른다. 영상의 명료함은 잘라내기를 거쳐 만들어진 명료함이다.

그 골의 전설 속에서 잘라내기는 더 멀리 나아간다. 몇 분인지, 몇 명인지 같은 모호함만 잘라낸 것이 아니다. 골 뒤에 있던 팀 전체의 하루하루 훈련도 잘라냈다. 널리 퍼진 화면 속에서 이 골은 자연스럽게 태어난 듯 아름답다. 천재 몇 명이 문득 흥이 나서 호흡을 맞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 뒤에는 반복해서 연습한 움직임과 이미 서로 익숙해진 호흡이 있다. 바로 그 순간 그런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무도 보지 못한 무수한 오후에 팀 전체가 쏟은 고된 노력이 있다. 영상은 결과의 화려함만 즐겨 기록한다. 과정의 서투름과 고단함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래서 1970년의 브라질을 훈련 없이 재능만으로 해낸 팀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게으른 낭만이다. 독보적인 재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듭 다듬은 체계, 뚜렷한 역할 분담과 호흡이 없었다면 아무리 좋은 재능도 그처럼 물 흐르듯 움직이는 하나의 팀을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말 보기 드문 일은 천재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천재들을 모아 정밀하면서도 화려한 하나의 기계로 조직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은 그 화려함만 찍기 좋아한다. 정밀함 뒤의 지루함은 찍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재능은 확대되고 고된 노력은 가려진 채, 후대에는 천재들의 즉흥 연주였다는 신화만 남는다.

여기에는 또 다른 층위도 숨어 있다. 널리 퍼진 영상 속 1970년의 브라질은 흔히 재능만 믿고 즉흥적으로 뛰는 팀으로 이야기된다. 화려한 호흡이 모두 현장에서 떠오른 선수들의 영감인 듯하다. 그러나 훗날의 축구 전술사가들은 대체로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팀이 실은 극도로 철저하게 준비했고 역할 분담도 극도로 명확했다고 강조한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의 골은 물 흐르는 즉흥 연주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거듭 연습한 공격 전개 방식이 있었다. 영상은 자연스러운 그 아름다움을 남기면서, 아름다움 뒤의 고된 노력은 함께 가려버렸다.

7. 영원히 한 나라의 것이 된 트로피

1970년의 브라질은 이 세 번째 우승으로 다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까지 해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가장 먼저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한 나라는 쥘 리메컵을 영구 소유할 수 있었다. 1970년 브라질은 최초로 세 차례 정상에 오른 팀이 되었고, 이에 따라 트로피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가져갔다. 여러 나라가 번갈아 들어 올려야 했던, 돌고 도는 트로피가 이제 한 나라에 영원히 머물게 되었다.

겉으로는 원만한 완결처럼 보인다. 한 팀이 세 차례 정상에 올라 최고의 영예를 상징하는 트로피를 온전히 자기 소유로 삼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완벽한 마침표를 찍은 듯하다.

찬란했던 한 시기에 마침표를 찍고 영원히 봉인해두려는 충동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 팀이 세 차례 우승하며 정점에 올랐다면, 그 영광이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곳에 자리 잡기를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트로피의 영구 소유는 바로 그런 충동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일은 극치에 이르렀다. 이제 최종 결론을 내려도 되며, 더는 다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마침표가 실제로 끝낸 것은 없었다. 쥘 리메컵은 한 나라의 것이 되었지만 월드컵은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트로피가 만들어져 이전 트로피를 이어받았고, 나라들은 계속 그것을 놓고 다투었다. 영구 소유로 붙들어두려던 최종 결말은 결국 새 트로피 하나와 다음번 경쟁을 불러냈을 뿐이다. 흐르는 것을 단번에 영원히 고정하려 해도, 고정한 결과로 찾아오는 것은 흐름의 정지가 아니다. 또 한 번의 순환이 시작될 뿐이다.

이것은 실은 영원과 최종 결말을 구하는 모든 노력의 공통된 운명이다. 돌고 도는 트로피의 의미는 본래 그 움직임에 있다. 팀들이 차례로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놓는 데 있다. 어느 한 팀이 영원히 간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 순환을 담는 트로피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순환을 이어가야 한다. 순환을 끝내려는 행위는 결국 순환을 담는 그릇만 바꾸었을 뿐이다. 순환 자체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영원히 한 나라의 것이 된 그 금빛 트로피가 훗날 겪은 일은, 이 모든 것에 의미심장한 각주를 붙인 듯하다. 최고의 영예를 담은 트로피도 한 팀, 한 나라의 사유재산으로 확정되는 순간 흐르는 상징에서 실제 재물로 바뀐다. 재물에는 값을 매길 수 있고, 탐을 낼 수 있으며, 도난당할 가능성도 있다. 영예가 소유할 수 있는 실체로 굳어질수록 실체에 딸린 골칫거리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바로 그해 축구가 사고팔 수 있는 영상으로 취급되기 시작하고 중계권 계약 안으로 들어간 것과 같은 길이다. 무엇보다 재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 조금씩 재물이 되고 있었다.

이 변화는 그 대회의 화려한 모든 영상과 최상급 칭호 아래 가장 깊숙이 흐르는 숨은 줄기다. 축구는 처음 태어났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순수하게 승부를 내기 위해 운동장을 달리는 놀이였다. 그런데 1970년에 이르러 또 하나의 정체성을 얻기 시작했다. 중계하고 팔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금빛 트로피에 담긴 영예와 컬러 영상에 담긴 경기는 모두 이 새로운 정체성의 징후다. 가장 순수한 것이 가장 값나가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은 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팽팽해질 것이다.

영원히 한 나라의 것이 된 트로피는 훗날 의미심장한 각주가 되기도 했다. 최고의 영예로 여겨져 한 나라가 엄숙하게 간직하는 금빛 트로피. 그 안에 담긴 가치는 막중했지만, 결국 가져가서 보관할 수 있고 심지어 누군가 탐낼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영예가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있는 트로피로 굳어지면 재물의 성질도 얼마간 묻게 된다. 이는 그해 축구가 컬러 영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고 중계권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과, 실은 같은 일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가장 순수한 것이 조금씩 소유하고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8. 맺으며

이제 이 모든 이야기를 한데 모아보자.

1970년 브라질은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고, 후대가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하는 팀을 남겼다. 하지만 그 대회의 진정한 전환은 위성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간 컬러 화면 속에 숨어 있었다. 이때부터 축구는 두 번째 존재를 얻었다. 한 번 치르고 사라지는 우연의 경기 외에, 무한히 재생하고 온 세계로 전하며 거듭 찬미할 수 있는 영상이 생겨났다.

이 두 번째 존재는 선물이자 난제다. 선물인 까닭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아름다움을 붙들어두어 후대도 누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난제인 까닭은 너무나 쉽게 경기 자체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상을 거듭 볼수록 쉽게 잊는다. 영상은 진실과 같지 않으며, 봉인된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아름답다는 찬사 또한 측정하거나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이 영상과 가장 아름답다는 왕관, 점점 커지는 사업 아래 서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실패하고 늙어가는 사람들이다. 펠레에게는 빗나간 로빙슛이 있었고, 골키퍼를 돌아 지나가고도 골대 밖으로 날려버린 번뜩임이 있었다. 영원한 팀으로 추대된 그 팀의 한 사람 한 사람도 결국 늙고, 물러나고, 새로운 우상의 등장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영상은 그들을 불멸의 이미지로 고정했다. 하지만 이미지 바깥의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처럼 우연 속에서 온몸을 던져 싸우며 시간 속에서 스러지는 평범한 인간이다. 카메라에 봉인된 것은 그들이 가장 빛났던 한순간이다. 그 순간 바깥에 펼쳐진 길고도 실제적인, 살아 숨 쉬는 삶은 오히려 화려한 영상 뒤로 가장 쉽게 가려진다.

그러므로 1970년이 후대에 남긴 것은 가장 아름다운 팀이라는 칭호를 얻은 한 팀에 그치지 않는다. 축구가 두 번째 존재를 갖기 시작한 출발점을 남겼다. 컬러 영상과 세계 중계, 상업적 중계권이 함께 만들어낸 거대한 축구의 거울상을 남겼다. 그 뒤 사람들이 사랑하고 찬미하고 논쟁하고 사고파는 것의 상당 부분은, 한 번 치르고 사라지는 경기가 아니게 되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 경기의 그림자가 되었다.

축구의 본모습을 분명히 보려면 늘 기억해야 한다. 사라지지 않는 그 그림자 뒤에는 단 한 번 일어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실제 경기가 언제나 있다는 것을. 그림자는 거듭 볼 수 있고 순위를 매길 수 있고 사고팔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경기는 끝나면 지나가버린다. 누구도 다시 불러올 수 없으며, 거기에 영원불변의 ‘가장’을 정해줄 수는 더더욱 없다.

이 영상은 세 가지 일을 했다. 대단했던 그 브라질 팀을 영원한 기념비로 굳히고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는 칭호를 주었다. 그 한 달의 무수한 우연, 펠레가 보여준 두 번의 빗나간 번뜩임, 고지대와 고온이 번번이 괴롭히던 경기장을 모조리 지우고 마치 이기도록 정해진 브라질만 남겼다. 그리고 원래 단 한 번뿐이었던 순수한 것을 전송하고 보관하고 사고팔 수 있는 물건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영상에 봉인된 이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는 결국 경기 자체가 아니다.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잴 수 없다. 그 말이 약속하는 영원한 1위란 결판낼 수 없는 논쟁을 멋진 한마디로 잠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 우연들도 지워지지 않는다. 가장 위대한 선수에게도 빗나가는 슈팅과 실패하는 순간은 있다. 금빛 트로피에 담기고 영상 속에 들어간 순수함 역시 누군가의 진정한 소유가 된 것은 아니다. 월드컵은 계속되고, 새 트로피를 놓고도 경쟁은 이어진다. 다음에 가장 아름답다고 불릴 팀은 어딘가에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상은 축구에 영원에 가까운 모습을 주었다. 하지만 축구 자체는 한 번도 영원했던 적이 없다. 단 한 번뿐이고 우연 속에서 벌어지며, 실패할 수 있고 새로운 이야기에 끊임없이 덮이는 것이다. 카메라에 고정되고 최상급으로 봉인되는 순간은 종착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종착점이었던 적은 없다. 진짜 경기는 끝나면 지나가버린다. 그 경기가 남긴 영상 속의 ‘가장 아름답다’는 단호한 판정은, 닫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질문을 이미 닫힌 답처럼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다음번 가장 아름다운 팀은 다시 나타나고, 다음 트로피를 놓고도 다시 다투게 된다. 그 누구도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어느 한 팀에 영원히 못 박을 수는 없다. 영상은 거듭 어느 한 팀을 뛰어넘을 수 없는 영원으로 떠받들 것이다. 실제 축구는 그때마다 다음 팀, 다음번 숨 막히는 순간으로 그 이른바 영원을 가볍게 뒤집을 것이다. 칭호는 죽어 있고 축구는 살아 있다. 못 박힌 ‘가장’이 봉인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영광이다. 살아 있는 축구는 언제나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다음 영광을 준비한다.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돌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중·영문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