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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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세계 축구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 제03편 / 총 22편

마라카낭

미리 판정된 승리와 가둘 수 없는 우연

1950년 마라카낭의 패배와 모아시르 바르보자의 삶을 따라, 국가가 우연을 죄인과 민족 신화로 바꾸는 과정을 해부한다.

Han Qin (秦汉)·2026
이 글의 목차

1. 시작도 안 한 경기의 승리를 미리 판정하다

1950년 7월 16일 아침, 리우데자네이루. 우승 팀을 가릴 경기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현지 신문 《오 문두》는 벌써 1면에 브라질 대표팀 사진을 실었다. 사진에 붙은 문구는 대략 이런 뜻이었다. 이들이 바로 세계 챔피언이다. 신문이 거리에 깔렸을 때는 킥오프까지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훗날 지어낸 전설이 아니다. 그 신문은 지금도 실물로 남아 있다.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우승 팀을 활자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은 무모해서가 아니었다. 온 나라가 하나의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반드시 이긴다. 이미 정해진 일이고, 남은 것은 절차를 밟는 것뿐이다.

축구를 한 모습으로 고정하려는 충동이 이번에는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토대 놓기를 다룬 대목에서 수호자들이 고정하려 한 것은 경기의 형태였다. 파시즘을 다룬 대목에서 정권이 고정하려 한 것은 경기의 의미였다. 이번에는 한 나라가 경기의 결과를 고정하려 했다. 공을 차기도 전에 승패를 이미 쓰인 사실로 여기고, 아직 열려 있는 결말을 확정된 답으로 미리 닫아버린 것이다.

그런데 축구만큼 사전 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없다.

축구에는 다른 종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구조적 특성이 있다. 골이 아주 적다. 한 경기에 한두 골이 전부인 경우가 많고, 한 골도 나지 않을 때도 있다. 90분 내내 어느 쪽이 상대를 몰아붙였는지, 어느 쪽이 슈팅을 더 많이 했는지, 누가 더 이길 만했는지가 최종 스코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연한 한순간, 굴절된 공 하나, 느닷없는 중거리 슛 한 방, 막아냈어야 할 니어포스트 쪽 슛 하나가 경기 내내 쌓은 우위를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다. 골이 드물수록 한 골의 무게는 커지고, 그 무게가 커질수록 우연이 뒤집을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진다. 수십 점이 흔히 나는 종목이라면 반복되는 득점 속에서 강약의 차이가 차츰 고스란히 드러난다. 진짜 강자는 끝까지 버티면 대개 이기고, 운이 판을 크게 뒤흔들기는 어렵다. 하지만 축구의 스코어는 너무 빈약하다. 우연이 그 안에 단단히 자리를 잡을 만큼, 한 번의 슛에 실린 운이 경기 전체의 이치를 덮어버릴 만큼 골이 적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가장 인정하기 싫어하는 균열이 숨어 있다. 이길 자격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이겼다는 것은 다르다. 한 팀이 경기 내내 상대를 압도할 수도 있다. 재능이 더 뛰어나고, 기대를 더 많이 받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에 더 어울릴 수도 있다. 그러고도 질 수 있다. 축구는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상으로 주지 않는다. 골 몇 개가 전부인 스코어에 따라 상을 줄 뿐이며, 그 스코어가 세는 것은 골이지 이치가 아니다. ‘받을 만하다’와 ‘받았다’ 사이의 이 균열은 득점이 쏟아지는 종목에서는 거듭된 득점으로 메워지지만, 축구에서는 끝내 열린 채로 남아 우연이 깃드는 곳이 된다. 한 나라가 자신들이 ‘당연히’ 이겨야 한다고 믿을수록, 그 균열이 벌어졌을 때는 더욱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번 대목에서 따라가려는 잔여항이 바로 이것이다. 확실성은 인간이 만든 구축물이고, 우연은 그 구축물로 영원히 가둘 수 없는 것이다. 한 나라는 시작도 하지 않은 경기에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미리 판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한두 골이 누구의 발끝에서 나오고 누구의 골문으로 들어갈지까지 판정할 수는 없다. 1950년 브라질은 단 한나절 만에 그 판정이 얼마나 허약한지 맛보게 된다.

2. 전쟁 뒤의 귀환과 이례적인 대회 방식

1950년 대회의 경기 방식은 후대가 기억하는 모습과 꽤 달랐다. 먼저 이 점을 바로 짚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 오후에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1950년에 월드컵이 다시 열렸을 때, 지난 대회로부터 벌써 12년이 흘러 있었다. 1942년과 1946년 대회는 전쟁과 전후의 혼란으로 열리지 못했다. 한 세대의 선수들 가운데는 가장 빛날 시절을 그대로 전쟁 속에서 소진한 이들도 있었다. 월드컵이 재개된 뒤에야 그라운드에서는 포화에 끊겨버린 흐름이 다시 이어졌다. 브라질이 전후 첫 대회를 맡았지만, 끝내 본선에 모인 팀은 16개가 아니라 13개였다. 대회를 둘러싸고 참가 철회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조 편성도 고르지 못했다. 세 팀이 속한 조가 있는가 하면 두 팀뿐인 조도 있었다. 인도는 조 추첨 전에, 프랑스는 추첨 뒤에 기권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는 일정에 불만을 품고 참가를 포기했다. 약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기후도 전혀 다른 두 도시를 오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이런 불참과 기권 때문에 이 ‘세계’ 대회에는 다시 한번 세계 전체가 모이지 못했다. 대회가 탄생한 이래 떨쳐내지 못했던 틈이 이번에도 이어졌다.

전후 첫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것은 브라질에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의 변방에 있다고 느껴온 나라가 이 대회와 새로 지은 당시 세계 최대의 경기장을 통해 세계를 향해 자신의 등장을 선언하려 했다. 그래서 마라카낭을 짓고, 성대한 대회를 열고, 온 나라가 스스로에게 품은 기대를 촉망받는 대표팀 하나에 걸었다. 이런 배경을 알아야 그 패배가 왜 그토록 아팠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잃은 것은 트로피 하나가 아니었다. 이제 우리도 세계의 일원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한 나라가 공들여 준비해온 선언도 함께 잃은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1950년 대회에는 애초에 별도의 결승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네 조의 1위인 브라질, 우루과이, 스웨덴, 스페인이 최종 리그에 올라 서로 한 번씩 맞붙고, 그 성적으로 우승 팀을 가렸다. 브라질은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멕시코를 제치고 이 리그에 진출했다. 우루과이는 프랑스가 기권한 뒤 사실상 조별리그 한 경기만 치렀다. 볼리비아를 8 대 0으로 대파하고 올라온 것이다. 최종 리그에서 브라질은 스웨덴을 7 대 1로, 스페인을 6 대 1로 무너뜨렸다.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 대 2로 비기고 스웨덴을 3 대 2로 힘겹게 꺾었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우루과이의 승점은 3점, 브라질은 4점이었다. 승리에 2점을 주던 당시 방식으로는 브라질이 7월 16일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세계 챔피언이 됐다. 우루과이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따라서 후대가 결승전으로 기억하는 그 경기는 엄밀히 말하면 결승전이 아니라 최종 리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브라질은 이길 필요조차 없었다. 지지만 않으면 됐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 조건을 지우고 브라질이 결승전에서 패해 우승을 놓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절대적인 우승 후보가 마지막 고비에서 유리한 처지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었다. 황금 트로피를 품에 안기 위해 브라질에 필요한 것은 패배를 피하는 일뿐이었는데, 그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 브라질 대표팀은 정말로 그런 기대를 받을 만했다. 최종 리그 두 경기의 스코어가 7 대 1과 6 대 1, 득점은 모두 13골이었다. 공격진의 아데미르, 지지뉴, 자이르는 당시 남미에서 가장 화려한 공격수들에 속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플레이에 온 나라가 넋을 잃었다. 앞선 두 경기를 너무나 아름답게 치렀기에 ‘필승’의 확신도 그토록 당연해 보였다. 상대들을 초토화한 팀이 한 번만 더 지지 않으면 왕관을 쓴다. 이런 상황에서 우승을 알리는 신문을 미리 찍는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수순 같았다. 신문은 온 국민의 마음속에서 이미 내려진 결론을 한발 앞서 종이에 옮겼을 뿐이다. 확실성이라는 구축물은 이처럼 빈틈없어 보이는 우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빈틈이 없어 보일수록 골 하나가 그것을 뒤엎었을 때의 낙차는 더 끔찍했다. 이길 것이 확실해 보였던 팀이 그날 잃은 것은 한 경기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확실해 보였던 세계도 잃었다.

경기 전의 전력 구도 역시 정확히 짚어야 한다. 언론과 대중의 마음속에서 브라질이 압도적인 우승 후보였다는 것은 맞다. 바로 앞서 스웨덴과 스페인을 완파했고, 승부가 열릴 곳도 리우의 안방이었다. 그렇다고 우루과이가 뒤늦게 이야기에 끼워 넣은 무명 팀이었던 것은 아니다. 최종 리그에서 무패를 지켰고, 승점도 고작 1점 뒤져 있었다. 줄곧 경쟁력을 유지했기에 우승의 향방을 마지막 날까지 끌고 갈 수 있었다. 나중에 널리 쓰인 ‘브라질이 쉽게 이겼어야 했다’는 요약은 경기 전의 기대를 정확히 반영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지운다. 우루과이는 원래부터 살아남은 네 강호 가운데 하나였고, 마지막 경기 한 번만 이기면 우승을 가져갈 수 있었다. 과소평가를 당했어도 끝내 살아 있던 상대만으로 우연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연은 흔히 바로 그런 과소평가의 틈에서 고개를 내민다.

3. 그 이변에 앞선 또 하나의 이변

이 대회에서 우연은 그 유명한 오후가 오기 전에 이미 한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1950년 6월 29일, 벨루오리존치에서 열린 B조 경기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 대 0으로 꺾었다. 골을 넣은 선수는 게이젠스였다. 당시 미국 대표팀은 급히 꾸린 팀으로, 선수 대부분이 세미프로였다. 대회를 앞두고 함께 훈련한 것도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유일한 골을 넣은 게이젠스는 아이티에서 태어났고 당시에는 미국 시민조차 아니었다. 그런 팀이 현대 축구의 발상지를 쓰러뜨렸다.

전력표만 보면 승부를 점칠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 대결이었다. 한쪽에는 백 년 넘는 전통과 한껏 부푼 자부심을 지닌 축구의 종주국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경기 직전 한 번 얼굴을 맞댄 것이 전부인, 급히 모인 아마추어 선수들이 있었다. 그중 승부를 가른 선수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종료 스코어는 1 대 0이었다. 전력표상으로는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쪽이 이겼다. 전력표에 적힌 전통과 자부심이 그라운드에서 저절로 골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골을 넣지 못하면 아무리 뿌리 깊은 전통도 한 경기를 이겨주지 못한다.

이 결과의 의미는 진기한 일화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잉글랜드는 처음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 현대 축구의 규칙과 조직, 나아가 이 종목 자체가 영국에서 세계로 퍼져나갔기에 잉글랜드인들은 늘 자신들을 축구의 본가로 여겼다. 남들이 만든 월드컵에 허리를 굽혀 참가하려 하지 않고 오래 버텼다. 그런데 처음으로 몸을 낮춰 찾아온 대회에서, 단 한 번 함께 훈련한 아마추어 급조 팀에 조별리그 패배를 당했다. 칠레를 이긴 뒤 미국에 지고, 다시 스페인에 져 끝내 조를 통과하지 못하고 최종 리그 문턱에서 멈췄다. 축구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나라가 자신의 첫 월드컵 무대에서 예정된 궤도 밖으로 한순간에 내던져졌다. 잉글랜드인과 브라질인이 저지른 잘못은 사실 같았다. 둘 다 전력상의 우위를 그라운드에서 예정된 결과로 여겼다. 강약은 이미 정해져 있고 경기는 절차일 뿐, 당연한 결말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축구는 누구를 위해서도 결과에 미리 서명해주지 않는다. 확실히 이길 것이라 믿는 사람들에게 거듭 일러준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잉글랜드는 벨루오리존치에서 먼저 이 교훈을 배웠다. 그 교훈을 가장 똑똑히 새겨들었어야 할 개최국의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리우에서 자신이 겪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대회에서 이변이 두 차례 연거푸 터진다면 우연을 고립된 한 번의 예외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축구라는 구축물 자체에 난 구조적 균열이다. 골이 적은 종목은 애초에 이변이 일어날 공간을 넉넉히 남겨둔다. 약팀도 수비를 버텨내고 한두 순간을 붙잡으면 전력표의 강약을 바닥에 메칠 수 있다. 잉글랜드전이 그랬다. 미국은 1 대 0을 지켜냈다. 1950년 대회는 이 균열을 끝까지 드러내 보이려는 듯 그런 순간을 연이어 두 차례 내놓았다. 하나는 자만하던 잉글랜드를 덮쳤고, 다른 하나는 가장 자신만만하던 개최국을 리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4. 그 11분

마지막 경기는 1950년 7월 16일 마라카낭에서 열렸다. 잉글랜드의 리더가 주심을 맡았고,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2 대 1로 꺾었다. 득점 순서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47분 프리아사, 66분 스키아피노, 79분 기지아였다.

전반에는 골이 없었다.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프리아사가 브라질의 선제골을 넣었다. 경기장 전체가 이미 쓰인 결말을 축하하는 듯했다. 20만 명에 가까운 관중은 그 골을 대관식의 축포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우루과이의 스키아피노가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11분을 남겨놓고 기지아가 결승골을 넣었다. 거의 20만 명이 들어찬 마라카낭이 그 순간 죽은 듯 조용해졌다. 오랜 세월 뒤 기지아가 한 재치 있는 말이 널리 퍼졌다. 역사상 마라카낭을 침묵시킨 사람은 셋뿐이라고. 교황, 프랭크 시나트라, 그리고 자신이라고 했다. 물론 훗날 돌이켜보며 한 말이지, 1950년 현장에서 한 말은 아니다. 그래도 그 순간의 무게만큼은 정확히 짚었다. 슛 한 번에, 대관식을 보러 모인 경기장 전체가 말을 잃었다.

그날 오후 감정의 곡선은 우연에 꺾여버린 포물선에 가까웠다. 프리아사가 골을 넣었을 때 거의 20만 명의 함성은 지붕을 날려버릴 듯했고, 미리 쓰인 결말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스키아피노가 동점을 만들자 환호 속으로 처음 불안이 스며들었다. 기지아가 79분에 두 번째 골을 넣는 순간, 줄곧 치솟던 곡선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거대한 함성이 몇 초 만에 빠져나가고, 무게마저 느껴지는 침묵만 남았다. 경기장 전체는 확실한 한 가지 일을 확인하러 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목격한 것은 바로 눈앞에서 확실성이 부서지는 장면이었다.

우루과이가 버텨낼 수 있었던 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주장 오브둘리오 바렐라다. 후대의 회고에는 그의 말 몇 가지가 널리 전해진다. 경기 전에 가득 찬 관중석을 보지 말라며,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동료들에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 간단히, 그라운드에서는 열한 명 대 열한 명일 뿐이라고 요약하는 버전도 있다. 브라질의 우승을 미리 선언한 신문을 일부러 가져다가 선수들의 오기를 북돋웠다는 기록도 있다. 정확한 문구는 전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받아 적은 실황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사실에 단단히 뿌리를 둔 후대의 회고로 받아들이는 편이 신중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가리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온 나라가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고 믿던 때, 그 미리 쓰인 각본을 받아들이지 않은 열한 명이 있었다.

바렐라가 거부한 것은 바로 확실성이라는 구축물이었다. 관중석의 20만에 가까운 사람들, 신문에 미리 찍힌 우승 선언, 온 나라의 확신이 합쳐져 빈틈없는 판결문을 이루었다. 브라질은 반드시 이긴다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그 판결문이 아무리 두꺼워도 그라운드의 11분을 눌러버릴 수는 없었다. 골 하나, 79분에 들어간 골 하나가 그 전부를 뒤집었다.

이것이 축구의 저득점 구조가 가장 날카로워지는 지점이다. 그날 오후 브라질이 더 나은 팀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축구는 ‘더 낫다’는 평가로 결산하지 않는다. 인정하는 것은 몇 골 안 되는 스코어뿐이다. 골이 그만큼 드물기에 그 스코어는 한순간에 다시 쓰일 수 있다. 90분 동안의 우세도, 온 나라의 기대도, 미리 인쇄한 신문도 기지아의 발끝 앞에서는 모두 소용없었다. 하지만 우루과이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변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강팀 중 하나였고, 바렐라처럼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며, 20만 명의 야유를 견디는 단단함도 있었다. 이 경기를 순전한 예외나 축구의 논리가 배반당한 사례로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우루과이는 반드시 이겨야 했고, 실제로 이길 능력도 있었던 경기를 이겼다. 우연이 우연인 까닭은 약자가 영문도 없이 강자를 꺾어서가 아니다. 온 나라가 이미 쓰였다고 믿었다 해도, 결말은 처음부터 누구도 미리 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지아의 결승골은 나중에 숱하게 정지 화면으로 되살아났고, 그때마다 골키퍼 바르보자에게 책임이 돌아갔다. 니어포스트 쪽으로 들어오는 슛을 내줘서는 안 됐다는 것이었다. 골이 들어간 문을 지키던 사람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 범인으로 가장 쉽게 지목된다. 그러나 그 11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끝까지 살아 있던 한 팀이 누구도 계산해낼 수 없는 순간을 붙잡아 온 나라의 확신을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을 골키퍼의 실수 한 번으로 압축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것 역시 우연에 이름 하나를 붙여보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더구나 우루과이는 인구가 고작 수백만 명인 작은 나라였으며, 바로 1930년 첫 월드컵의 우승국이었다. 거인들에게 거듭 과소평가를 받아온 이 작은 나라가 이번에도 모두가 확신한 각본 바깥에서 우승을 가져갔다. 과소평가받는 쪽은 흔히 우연이 몸을 숨기는 곳이다.

5. 우연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희생양 만들기

기지아의 골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그것은 참담한 패배 한 번으로 남았을 것이다. 1950년을 수십 년 동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만든 것은 경기가 끝난 뒤 벌어진 일들이었다.

한 나라가 우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연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이렇게 큰 고통 뒤에 그럴듯한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미워하거나 책임을 묻거나 손가락질하며 ‘바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할 상대도 없다. 가진 것을 다 쏟고 나라 전체의 기대까지 걸었는데, 결과는 중거리 슛 한 번의 운에 매달려 있었다는 뜻이다. 사람은 이런 이유 없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 이유가 틀렸다 해도, 이유가 아예 없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틀린 이유라도 있는 편이 견디기 쉽다. 이름이 있는 주범 하나가 끝없이 번지는 고통을 손가락으로 짚을 수 있는 한 점으로 모아준다. 그 점을 잘못 짚었다 해도, 어디에도 손쓸 곳 없는 허공보다는 낫게 느껴진다.

브라질이 만들어낸 이유는 몇몇 선수의 이름이었다. 골키퍼 바르보자, 그리고 비고지와 주베나우였다. 나중에 소급해서 책임을 돌린 것이 아니다. 그때 바로 시작되었고,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팀 전체의 패배, 더 나아가 우연이 빚은 패배를 두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붕괴에 눈에 보이는 주범을 달아주는 일이었다. 범인을 찾았으니, 감당할 수 없던 우연은 이제 이름 붙은 원인 안에 갇혔다.

책임 추궁은 빠르고 가혹했다. 경기장이 죽은 듯한 침묵에 잠긴 바로 그때부터 죄인을 찾는 눈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온 나라가 영웅으로 기대하던 대표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온 나라의 성토 대상이 되었다. 성토하려면 구체적인 얼굴들이 필요했다. 팀 전체의 패배와 우연한 한순간을 두세 사람의 죄로 환산하는 일은 감정적으로 몹시 손쉬웠다. 하늘을 뒤덮을 듯 밀려들면서도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실망이, 비로소 내려앉을 자리를 몇 군데 얻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선택된 이들이 치렀다. 본래 어느 개인의 몫도 아니었던 무게를 한 나라 전체를 대신해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 원인은 거짓이다. 사실은 승부가 너무 팽팽했고, 우루과이는 실제로 실력이 있었으며, 기지아는 누구도 계산할 수 없는 순간을 붙잡았다. 어떤 선수 하나가 혼자 승리를 ‘만들어낼’ 수 없듯이, 어떤 선수 하나가 이 패배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희생양을 만드는 장치가 하려는 일은 바로 이 사실을 덮는 것이다. 그 사실의 핵심에 놓인 우연이야말로 가장 마주하기 싫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 고통의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책임을 물을 곳 없는 고통은 주범이 있는 고통보다 마음에 둘 자리를 찾기 어렵다. 그래서 희생양을 만들어 우연의 자리에 놓았다. 눈에 보이는 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운을 대신해 벌을 받았다.

이런 일은 브라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에 호되게 상처 입은 집단이라면 어디든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쉽다.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희생양 만들기는 브라질인들이 유난히 잔인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사람이 우연 앞에서 보이는 본능적인 반응이다. 우리가 품고 보듬을 수 있는 것은 그 본능 뒤에 있는, 이해할 만한 아픔이다. 한 나라가 뜨거운 소망을 전부 걸었다가 한순간에 잃었으니 출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능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본능이 낳은 억울함까지 눈감아줄 수는 없다. 한 나라가 왜 희생양을 찾는지 이해하는 일과, 잘못된 사람을 지목해 억울한 짐을 지웠다고 지적하는 일은 충돌하지 않는다.

우연을 죄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것. 이것이 1950년이 남긴 첫 번째이자 가장 깊은 깎아내기의 흔적이다. 그런데 우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사람은 왜 하필 이 세 명이었을까.

6. 왜 그 세 사람이었나

치욕의 기둥에 못 박힌 바르보자, 비고지, 주베나우는 그 브라질 대표팀의 흑인 선수들이었다.

오늘날의 비평가들이 새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브라질 축구 연구자들은 이미 이 양상을 포착하고, 1950년의 패배가 ‘팀의 흑인 선수 세 명’ 탓으로 돌려졌다고 기록했다. 이후 브라질 학계는 더 깊이 파고들어 더 분명하게 말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의 패배가 인종을 둘러싼 사건으로 비화한 이유는 비난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흑인 선수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바르보자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고, 흑인은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며 골문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인종적 고정관념이 그를 통해 거듭 재생산되었다. 흑인과 혼혈 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진다는 말이 당시 널리 떠돌았다. 나아가 당시 언론이 백인 선수를 비판할 때는 경기력을 문제 삼은 반면, 유색인 선수를 비판할 때는 성격과 담력, 믿을 만한 사람인지에 관한 인종적 함의를 띤 표현을 썼다는 연구도 있다. 은유를 한 겹 씌워 흑인 선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면서, 노골적인 인종차별 표현은 피했다. 다시 말해 인종적 코드가 작동한 곳은 누구를 탓했는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탓했는가에도 그 코드가 들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장치의 작동 방식이 완전히 드러난다. 한 나라는 우연을 받아들이지 못해 패배의 원인을 만들어야 했다. 그 원인을 어디에 붙일지는 빈 공간에서 무작정 고른 것이 아니었다. 원인은 이미 마련된 홈으로 들어갔다. 그 홈은 기존의 인종적 고정관념이었다. 주범을 필요로 하는 충동과 이미 갖춰진 인종적 편견이 빈틈없이 맞물렸고, 그 결과 주범 후보는 사실상 편견이 미리 골라놓은 셈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고정관념은 용의자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패배 한 번이 그 지목을 확정해주기만 기다렸다. 따라서 희생양을 만드는 장치에는 이중의 닫힘이 숨어 있다. 먼저 우연을 죄 있는 원인 안에 가두고, 다시 그 원인을 피부색에 따라 애초에 비난받을 이유가 없던 몇 사람에게 미리 배당한다.

이 부당함은 누가 목소리를 높여 판결할 필요도 없다.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무겁다. 세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저 잘못된 순간에, 그 고정관념 안에서 믿을 수 없다고 판정된 얼굴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연한 패배의 무게 전부를 이들에게 얹는 것은 인식의 게으름인 동시에 구체적인 사람에게 닥친 구체적인 가해였다. 한 나라가 우연과 마주하기를 거부한 대가를 이 세 사람이 치렀다.

여기서도 말은 정확해야 한다. 당시 브라질 사람 모두가 의식적인 악의를 품고 흑인 선수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뜻은 아니다. 인종적 코드란 오히려 언어의 관습과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고정관념 속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백인 선수를 비판할 때는 오늘 컨디션이 나빴다고 말한다. 흑인 선수를 비판할 때는 저런 부류는 믿을 수 없고, 압박을 못 견디며, 결정적일 때 버티지 못한다고 말한다. 앞의 말은 한 경기의 플레이를 겨냥하지만 뒤의 말은 한 부류의 사람을 겨냥한다. 표현 속에 숨은 이 이중잣대가 비난을 소리 없이 피부색의 결을 따라 흘려보냈고, 그 끝에 세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모욕적인 단어를 외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마련된 언어가 궂은일을 대신 해주었다.

훗날에는 브라질의 축구 박물관도 이 재해석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 박물관은 기존의 공적 기억이 바르보자의 생애를 ‘1950년의 실패’로 축소했으며, 그 기억은 주로 스포츠 행정가와 기자, 지식인들이 구축했고, 그들이 ‘모두 백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상설 전시도 바꾸었다. 두 번째 실점 뒤 바르보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상징적인 사진을 내리고, 분명한 문장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브라질의 패배가 1950년 대표팀의 ‘흑인 선수 세 명’, 주베나우와 비고지와 바르보자에게 부당하게 전가되었다는 문장이었다. 한때 유죄를 선고하는 데 쓰인 상징이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부당함으로 다시 인식되었다. 그 바로잡음 자체가 오랜 세월 뒤 눌려 있던 진실이 땅을 뚫고 다시 솟아난 사건이었다.

박물관의 ‘모두 백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문장은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공적 기억은 결코 중립적으로 자라나지 않는다.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말로 되풀이해서 이야기해야 비로소 굳어진다. 누가 마이크를 쥐는지, 누가 기사를 쓰고 책을 펴내는지에 따라 그 기억이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지가 정해진다. 1950년 흑인 선수들을 치욕의 기둥에 못 박은 기억은 바로 그렇게 한 가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구축했다. 그들의 편견은 자연스럽게 한 나라의 ‘공통된 인식’이 되었다. 수십 년 뒤 다른 사람들이 옛 기록을 다시 뒤지기 시작해서야, 못 박힌 진실이 기억의 틈으로 다시 밀고 나올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잔여항의 보존은 다른 모습을 띤다. 억눌린 정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다시 이야기해줄 사람을 기다릴 뿐이다.

7. 바르보자의 50년

이 모든 장치와 바로잡음 아래에는 구체적인 한 사람이 있다. 평생 골문을 지켰지만, 한 경기의 결과에 남은 생을 빼앗긴 사람이다.

바르보자는 생애 마지막 무렵 널리 알려진 말을 남겼다. 일흔아홉 번째 생일을 전후해, 브라질 법에서 가장 무거운 형량은 30년인데 자신은 이 ‘감옥’에서 벌써 50년을 살았다고 했다. 조금 앞선 1993년의 다른 버전에서는,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무슨 잘못을 했기에 40년이 넘도록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 밑에 깔린 자기 진술은 한결같다. 그는 생의 후반부를 사회가 강제로 내린, 형기가 끝날 날이 영원히 오지 않는 징역으로 이해했다. 골키퍼 한 사람이 골 하나 때문에 평생을 복역하듯 살았다.

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바르보자만이 아니었다. 비고지와 주베나우도 평생 짐을 졌다. 다만 바르보자가 지킨 곳은 골문이었고, 그 골이 그의 앞을 지나갔기에 그는 이 억울함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얼굴이 되었다. 나머지 두 사람의 몫까지 함께 짊어진 셈이었다. 온 팀이, 나아가 책임을 물을 길 없는 우연까지도 나누어 져야 했던 패배가 끝내 세 사람에게 얹혔고, 그중 한 사람을 특히 무겁게 짓눌렀다.

징역형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1994년 월드컵을 앞두고 바르보자가 브라질 대표팀 훈련장을 찾아갔지만, 문전에서 막혔다. 선수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이유는 그가 불운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국가대표의 골문을 지켰던 사람이 수십 년 뒤 자기 나라 대표팀에서 불길한 존재로 취급받으며 문밖에 세워졌다. 그가 지키던 골문으로 골 하나가 들어갔고, 나라는 거의 반세기에 걸쳐 그 골의 값을 치르게 했다. 한 번의 방문조차 허락받지 못할 때까지 치르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몇 년 지나면 흐려졌을 평범한 실점이 그에게는 굳어붙어 평생의 낙인이 되었다.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이 손가락질하며 ‘바로 너 때문이야’라고 말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가 갚아온 것은 그 골의 값이 아니었다. 우연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 나라의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너무 커서 한 사람의 일생을 대가로 삼았다.

여기까지 왔다면, 더는 그를 대신해 덧붙이지 말아야 할 말도 있다. 한 사람이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거대한 장치에 선택되었고, 그 장치가 그에게 맡긴 역할은 하나의 원인, 하나의 주범, 온 나라의 고통을 담는 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생은 막지 못한 골 하나보다 훨씬 넓었다. 희생양을 만드는 장치가 가장 계산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장치가 원하는 것은 상징이지만, 그 상징 아래에는 언제나 상징 안에 담기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 박물관이 무릎 꿇은 사진을 내린 것은 이미지 하나를 바꾼 데 그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그릇으로 취급받은 사람을 다시 한 사람으로 돌려놓은 일이다. 이 뒤늦은 회복이 말해준다. 온 나라가 수십 년 동안 못 박아두었어도, 그 살아 있는 사람은 실제로 그 상징 안에 못 박힌 적이 없었다고.

8. 흰 유니폼에서 노란 유니폼으로, 그리고 뒤늦게 붙은 이름

1950년 뒤, 브라질은 그 패배 위에 다른 것들을 한 겹씩 덮어 올렸다. 나중에 덧씌운 층들 역시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구분해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층은 유니폼 색이다. 오늘날 브라질의 상징인 노란 유니폼은 1950년 이후의 여파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유래는 ‘경기에서 져서 색을 바꿨다’는 손쉬운 요약만으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1953년 《코헤이우 다 마냥》은 브라질 스포츠 연맹과 함께 새 대표팀 유니폼을 공개 공모했다. 디자인에는 브라질 국기의 네 색을 모두 써야 했고, 유니폼에 ‘브라질’이라는 글자나 국기 그림 자체를 넣어서는 안 되었다. 기존의 흰 유니폼을 바꾸려 한 이유는 1950년 이후 대중의 감정 속에서 그 흰옷에 패배의 얼룩이 묻어, 나라를 대표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 되었기 때문이다. 응모자는 301명이었다. 당선자는 불과 열아홉 살이던 아우지르 가르시아 슐레였다. 그는 100장이 넘는 스케치를 그렸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국기의 네 색을 유니폼 한 벌 안에 조화롭게 담는 일이었다. 끝내 상의는 온통 노란색이어야 하고, 나머지 색들은 테두리 장식과 반바지, 양말에 나누어 넣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카나리아빛 노란 유니폼은 이렇게 태어나, 1930년부터 1950년까지 입었던 흰 유니폼을 대신했다. 옷의 색 하나를 갈아입었지만 그 행위 밑에는 국가의 몸에서 그 패배를 씻어내려는 소망이 숨어 있었다. 이후의 역사는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를 남겼다. 패배 한 번을 묻어버리려고 만든 노란 유니폼이 훗날 세계 축구에서 가장 눈부시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유니폼이 되었다. 노란색은 거의 브라질 축구 자체를 뜻하는 색이 되었다. 패배의 잿더미에서 골라낸 색이 끝내 승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묻어버리려던 패배는 바로 그 묻힌 자리에서 이후 모든 영광의 바탕색을 길러냈다. 이것 역시 우연은 한 번에 지워지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각주다.

또 다른 층은 이름, 어떤 마음가짐에 붙은 이름이다. 네우송 호드리기스는 브라질 축구의 이런 마음가짐을 ‘잡종개 콤플렉스’, 포르투갈어로 complexo de vira-latas라고 불렀다. 브라질인들이 세계 앞에서, 특히 축구에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한 수 아래에 놓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속한 해는 1950년이 아니라 1958년이다. 그 시간차는 중요하다. 이 말은 호드리기스가 1958년 5월에 쓴 칼럼에서 나왔다. 그는 그 글에서 1950년 이래 브라질 축구가 스스로를 믿는 일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고 썼고, 그 열등감을 우루과이에 진 경기와 명확히 연결했다. 나중에 수없이 인용되며 마치 1950년 그 자리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여겨진 이 콤플렉스는 사실 8년 뒤에야 이름을 얻고, 다시 그 패배에 소급해 붙은 것이다. 마음가짐에 이름이 생기자, 그 이름이 거꾸로 원래는 설명할 수 없던 고통에 마땅히 가져야 할 의미를 정해주었다.

현대의 역사 연구는 1950년을 둘러싼 더 큰 문화적 서사 전체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한 연구는 1964년에 나온 브라질 축구 속 흑인에 관한 책의 증보판이 훗날 스포츠를 둘러싼 기억 속에서 1950년을 서술하는 주요 모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인종, 도덕, 정치에 관한 여러 설명은 사후에 한 겹씩 올라가며 이 패배의 지배적인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연구자는 또 이 준우승에 대한 전국적인 집착이 너무 깊어, 그에 비하면 같은 대회의 다른 많은 경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거의 아는 바가 없다고 지적했다. 패배의 무게를 부정하려는 말이 아니다. 후대의 이야기가 그 의미를 굳히는 데 한몫했고, 동시에 좁혔다는 뜻이다. 한 경기는 본래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우루과이의 끈기로, 우연의 변덕으로, 그 세대 브라질 공격수들의 화려함으로, 새 경기장이 처음 20만 명을 품은 장관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뒤에 형성된 기억은 거의 한 방향으로만 모여들었다. 국가의 열등감, 인종, 운명에 관한 단 하나의 우화가 되었다. 그 거대한 서사가 대회의 다른 경기와 다른 가능한 이야기들을 덮어버려, 거의 누구도 그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의 의미가 지배하는 과정은 바로 다른 의미들이 하나씩 닫히는 과정이다. 닫힌 이야기들 안에는 그 경기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까운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덮인 이 층들은 모두 같은 일을 한다. 노란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것은 얼룩진 흰옷을 패배와 함께 묻어버리려는 시도다. 콤플렉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통에 납득 가능한 심리학적 설명을 찾아주려는 시도다. 인종과 도덕과 운명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것은 우연한 패배 한 번을 이 나라의 본성에 관한 우화처럼 읽히게 하려는 시도다. 한 층 한 층이 경기의 실제 모습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그 경기는 실력이 팽팽한 두 팀이 맞붙어 우연한 한순간에 승부가 갈린 축구 경기였을 뿐이다. 이 모든 의미가 덮이기 전에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이런 의미들이 모두 허공에서 지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패배는 한 나라의 마음에 실제 상처를 남긴다. 열등감이든 집착이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긴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그 감정을 굳혀 나라의 본성에 관한 확정된 결론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뒤의 것은 우연을 못 박으려는 또 한 번의 깎아내기다. 한 경기의 우연을 한 민족에게 예정된 운명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예전에 그것을 몇몇 선수에게 예정된 잘못으로 이야기한 것은 같은 수법이다. 둘 다 이유 없는 고통에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찾아주려 한다. 다만 이번에 못 박히는 것은 몇몇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한 나라가 스스로에 대해 품는 상상이다.

9. 맺음: 우연도 가둘 수 없고 사람도 담을 수 없다

한 나라가 시작도 하지 않은 경기에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미리 판정한 적이 있다. 아직 열려 있는 결말을 확정된 사실로 미리 닫아버렸다. 신문은 우승 팀을 미리 인쇄했고, 관중석에는 거의 20만 명이 들어찼으며, 온 나라는 승패가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축구는 79분에 들어간 골 하나로 그 판결 전체를 뒤집었다. 저득점 구조 때문에 골 몇 개로 이루어진 그 스코어에는 언제나 우연이 살고 있다. 우연은 어떤 확실성의 구축물도 가둘 수 없는 잔여항이다. 온 나라가 결말은 이미 쓰였다고 믿어도,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내 중거리 슛 한 번의 운에 매달려 있었다.

패배 뒤에 브라질은 우연을 받아들이지 못해 두 번째 구축물을 만들었다. 책임을 물을 곳 없는 고통을 이름이 있는 몇 사람 안에 가두었다. 기존의 인종적 고정관념이 그 주범들을 미리 배당해놓았고, 선택은 흑인 선수 세 명에게 떨어졌다. 이 구축물 역시 가두려는 것을 가둘 수 없었다. 승부가 너무 팽팽했다는 것, 우루과이는 실제로 실력이 있었다는 것, 누구도 혼자 그 패배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그 뒤에는 노란 유니폼이 흰 유니폼을 덮고, 뒤늦게 붙은 이름이 그 고통을 덮었다. 인종과 도덕과 운명에 관한 의미가 겹겹이 쌓이며 팽팽한 축구 경기 하나를 국가의 우화로 바꾸어놓았다. 한 겹 한 겹은 모두 그 경기의 실제 모습을 완전히 덮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모든 층 아래에 실제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모든 구축물을 통과하고도 그 안에 담기지 않는 두 가지가 남는다. 하나는 우연이다. 축구의 저득점 구조가 우연의 자리를 끝까지 보장한다. 그래서 ‘더 나은’ 팀이 반드시 이기지는 않으며, 필연과 예정된 결말과 승리할 자격에 관한 어떤 말도 골 하나에 언제든 반박당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주범으로 만들어진 바르보자는 평생 골문을 지켰으나 50년 동안 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어떤 상징에도 담기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뒤 한 박물관이 무릎 꿇은 그의 사진을 내리고 그를 다시 사람으로 인정한 것은, 담아둘 수 없던 이 두 가지가 저마다 뒤늦게 땅을 뚫고 솟아난 일이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일의 양면이다. 축구에 우연이 있기에 결말은 미리 쓰이지 않는다. 결말이 미리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도 반드시 이길 운명에 있지 않으며 패배 때문에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우연을 죄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앞의 절반을 부정하면서 뒤의 절반도 짓밟는다. 한편으로는 결과를 통제할 수 있었던 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제할 수 없던 부분을 살아 있는 사람에게 떠넘긴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연을 인정하는 일이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길이 된다. 어떤 실패는 누구도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누구의 통제 아래 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골이 그냥 그렇게 들어갈 수도 있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누군가를 찾아내 수십 년 동안 못 박아둘 필요도 없다.

이 서사에 짓눌린 사람은 바르보자 같은 이들이었다. 이 서사가 과소평가한 것은 바렐라의 ‘열한 명 대 열한 명’이라는 말이었다. 짓누르든 과소평가하든, 끝내 사람을 미리 쓰인 각본 속에 완전히 집어넣지는 못했다. 1950년이 후대에 남긴 것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아니다. 더 소박하지만 받아들이기는 더 어려운 사실이다. 이 경기의 결과는 처음부터 미리 정해진 적이 없었다. 축구가 처음부터 미리 정해지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브라질은 이 교훈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천천히 배우기까지 수십 년, 여러 세대의 거듭된 되돌아보기를 거쳐야 했다. 사람을 치욕의 기둥에 못 박던 때부터 박물관이 그 사진을 내릴 때까지의 간격은, 바로 한 나라가 우연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는 긴 과정이었다. 화해란 그 경기를 잊는 일이 아니다. 그 경기의 결과에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던 부분이 있었으며, 그러니 누구도 그것 때문에 평생 속죄할 필요가 없음을 마침내 인정하는 일이다.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정해놓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계산할 수 없음 때문에 이 종목은 한 경기를 마치고도 언제나 다시 한 번 치를 가치가 있다. 다음 골에 언제든 다시 쓰일 수 있는 결말. 그것이 축구의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정직한 점이다. 축구는 누구에게도 예정된 승리를 약속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그 패배의 예정된 죄인이 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돌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중·영문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