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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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세계 축구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 제02편 / 총 22편

포섭

축구를 국가 안으로 거두어들이려 한 정권

1934년 이탈리아와 1938년 프랑스 월드컵을 통해 파시즘의 스포츠 포섭, 국가대표의 혼종성, 정치가 지우지 못한 개인을 다시 본다.

Han Qin (秦汉)·2026
이 글의 목차

1. 포섭: 경기장을 국가 안으로 거두어들이다

1934년 6월 10일, 로마. 결승전이 끝나자 무솔리니가 직접 트로피를 건넸다. 그것도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승국 이탈리아는 금으로 만든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컵을, 준우승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지도자의 컵’, 코파 델 두체(Coppa del Duce)를, 3위 독일은 이탈리아축구협회의 컵을 받았다. 결승전이 열린 경기장 이름에는 아예 국가파시스트당이 들어 있었다. 경기 시작 전 이탈리아 선수들은 관중석을 향해 파시스트식 경례를 올렸다. 차례로 건네진 이 컵들은 승리와 국가와 정권의 상징을 고리처럼 하나씩 이어 묶었다.

후세 사람들이 묵은 기록을 뒤져 찾아낸 정치적 해석이 아니다. 당시에 이미 누구나 볼 수 있게 씌워놓은 정치적 포장이었다.

축구를 한 모습에 고정하려는 충동이 이번에는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 첫 월드컵의 토대를 놓던 때, 경기를 그대로 붙들어두려 한 이들은 축구 내부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들이 지키려던 것은 경기가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모습, 아마추어의 순수함, 영국이 중심이라는 지위였다. 이번의 힘은 바깥에서 왔다. 한 정권에서 왔다. 고정하려는 것도 경기의 모습이 아니라 경기의 의미였다. 축구가 오직 한 가지만을 뜻하게 하려 했다. 국가의 강성함과 정권의 질서. 축구의 의미를 그 하나 안에 닫아걸고, 다른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은 한 차례의 식민화였다. 조건이 있는 것, 특정한 정권이 특정한 순간에 벌이는 정당성 확보 작업이, 조건이 없는 것인 양 행세하려 했다. 축구 자체의 의미를 사칭하려 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랬다. 우리가 이겼다. 그러므로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강하고 질서가 있으며, 세계가 우러러볼 만하다. 마치 축구가 태어날 때부터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수천만 명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는 운동을 단 하나의 용도에 억지로 욱여넣어, 오직 한 정권의 체면만을 위해 일하게 했다.

그런데 축구를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려 할수록, 포섭의 헛됨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정권이 그저 축구를 틈틈이 이용하는 정도였다면, 이기면 덕을 좀 보고 져도 그만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무솔리니 정권이 원한 것은 전부였다. 모든 승리가 오직 한 가지만을 증명하고, 이 운동의 의미가 온전히 국가의 소유가 되기를 원했다. 축구에 다른 내력이나 다른 뜻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주장이 그토록 빈틈없고 절대적이려 했기에,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 하나씩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순수하지 않은 팀, 제힘으로 이겼는지 남이 안겨준 승리인지 가릴 수 없는 경기,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사람. 이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는 곳에서라면 누구도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들이다. 하지만 축구의 의미를 한입에 삼키려는 정권 앞에서는 하나하나가 거슬리는 잔여항이 되었다. 식민화라는 행위에는 이런 통칙이 있다. 무엇의 의미를 모조리 차지하려 할수록, 차지하지 못한 자투리들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포섭이 철저해질수록 잔여항은 더 눈에 띈다.

축구를 포섭하는 행위 자체는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비판해야 한다. 한 정권이 운동 하나를 제 것으로 삼아 자신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데 쓰는 일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분명하게 짚어 비판해야 하는 몇 안 되는 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정권의 축구 포섭을 비판한다고 해서 축구 자체까지 통째로 지워도 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어려움은 바로 이 경계에 있다. 정권은 대회를 포섭하고, 상징을 포섭하며, 심지어 승리가 누구의 것인지까지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축구 자체를 포섭할 수는 없다. 축구는 그 정권의 설명 안에 담기지 않는 것을 거듭 만들어낸다. 담기지 않는 그 무엇을 똑바로 보는 일이야말로 이 시기를 살필 때 가장 중요한 과제다.

먼저 어떻게 포섭했는지 보자.

이탈리아 축구가 파시스트 국가 사업 안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현대의 연구는 대체로 이 과정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축구는 국내에서 국민을 하나의 국가로 묶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 쓰였다. 각지에 흩어진 마음들을 하나의 국기 아래 모았다. 국외에는 이 나라의 질서와 근대성, 위신을 과시하는 데 쓰였다. 1934년 월드컵 개최는 그 과정의 정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축구협회는 막대한 개최 비용을 떠안았고, 대회 전체를 국가의 진열창으로 삼았다. 손님을 맞는 넉넉함과 조직력, 관광지로서의 매력을 내보였다. 당국은 특별열차도 대거 편성해 국경 너머의 관중을 불러들였다. 파시스트 경기장, 몸소 참석한 지도자, 경기 전의 경례, 경기 뒤 정권의 상징을 달고 잇달아 수여된 트로피. 이 모든 것을 합치면 대회 하나를 치렀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람들 앞에서 연극 한 편을 올린 셈이었다. 이 파시스트 국가가 얼마나 큰일을 잘 해내고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또 온 세계가 찾아와 볼 만한 나라임을 연기했다.

세 개의 컵을 주던 시상식은 그 뜻을 대놓고 드러냈다. 우승국의 금제 컵과 별도로, 준우승국 체코슬로바키아는 무솔리니의 호칭을 딴 ‘지도자의 컵’을 받았다. 건네는 사람도 바로 무솔리니였다. 본래 축구의 것이고 선수들의 것이어야 할 트로피에 독재자의 이름이 붙고, 그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다. 이 순간 축구의 영예와 정권의 체면은 서로 떼어낼 수 없게 용접되었다. 포섭의 가장 노골적인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승리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일.

이 몇 년 사이 축구라는 구축이 얼마나 자랐는지는 또 다른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34년은 실제로 예선을 도입한 첫 월드컵이었다. 서른두 팀이 신청했고, 열여섯 팀으로 추려 본선을 치렀다. 개최국 이탈리아마저 예선을 통과해야 본선에 갈 수 있었다. 월드컵 역사에서 유일한 일이었다. 첫 대회 때만 해도 초대장을 보내고 누가 오겠다고 하는지 보면 되었다. 불과 4년 뒤에는 서른 팀이 넘는 참가국을 여러 차례 걸러내야 했다. 축구는 자랐다. 한 정권이 큰 힘을 들여 포섭하고 싶어 할 만큼 자랐다. 무엇이든 먼저 무게를 얻어야 그것을 제 것으로 탐내는 사람도 생긴다. 무솔리니가 눈독 들인 것은 바로 이 몇 년 동안 축구가 제힘으로 얻은 무게였다.

2. 배제된 이들의 귀환: 우루과이의 불참

1934년, 가장 눈에 띄는 빈자리는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였다.

이 불참을 이해하려면 4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30년 첫 월드컵은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유럽에서 먼 바다를 건너 오겠다고 한 팀은 넷뿐이었다. 유럽 대부분이 빠졌다. 당시 유럽이 내세운 이유는 항해 거리와 비용, 선수를 보내주지 않는 클럽들이었다. 현실적인 사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사람들의 눈에는 달랐다. 당시 올림픽 챔피언인 자신들이 처음으로 월드컵을 여는데, 구대륙 대부분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섭섭함이 가슴에 남았다. 1934년, 유럽이 개최할 차례가 되자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는 이탈리아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월드컵 역사에서 타이틀을 지키러 나오지 않은 유일한 우승국이 되었다.

한 번의 부정이 남긴 잔여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보다 명료한 예도 드물다. 1930년 푸대접을 받은 쪽은 우루과이와 남미였다. 4년 뒤에는 그 서운함이 방향을 바꾸어, 우루과이가 유럽을 외면하는 일이 되었다. 배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방향만 바꾼 채 한 번 더 돌아왔다. 배제된 쪽은 자신이 배제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똑같이 불참하는 방식으로 그 기억을 드러냈다. 청산되지 않은 장부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다시 적힐 뿐이다.

우루과이의 불참은 이 대회의 격도 속에서부터 깎아먹었다. 지난 세계 챔피언은 오지 않았고, 4년 전 결승에 올랐던 아르헨티나도 이번에는 최정예와는 거리가 먼 선수단을 보냈다. 남미의 가장 강한 두 팀 가운데 하나는 통째로 빠졌고, 하나는 전력이 크게 약해져 있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정성껏 꾸며 세계 앞에 내놓으려 한 1934년 선수권대회에는, 정작 직전의 그 ‘세계’를 제패한 팀이 없었다. 누가 세계 최강인지 가리겠다는 대회가, 바로 지난 대회에서 모두가 최강으로 인정한 팀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주최 측이 아무리 성대하게 무대를 꾸며도 이 빈자리만은 채울 수 없었다.

후대의 일부 설명은 우루과이 내부 사정도 거론한다. 재정, 일정, 축구협회 안의 불만이다. 하지만 증거가 흩어져 있고, 주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드는 것들도 아니다. 가장 확실한 줄기는 여전히 하나다. 1930년 유럽의 불참에 되돌려준 보이콧이었다. ‘세계’라는 이름의 선수권대회는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세계의 커다란 한 조각을 비워두었다. 세 번째 대회에서 비어 있던 부분과 두 번째 대회에서 비어 있던 부분은, 청산하지 않은 바로 그 장부에서 나왔다. 빚을 받을 쪽과 갚을 쪽만 자리를 바꾸었을 뿐이다. 토대를 놓던 순간의 가장 큰 잔여항, ‘세계’라는 이름을 달고도 온 세계를 담지 못한 그 구멍은 4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벌어져 있었다.

3. 피렌체의 전투와 ‘조작’ 논쟁

이탈리아의 우승 여정에서 가장 짙게 얼룩진 대목은 스페인과의 8강전이었다.

경기는 피렌체에서 열렸다. 첫 경기는 1 대 1, 이튿날 재경기에서는 이탈리아가 1 대 0으로 이겨 다음 라운드로 갔다. 경기가 워낙 거칠어 훗날 ‘피렌체의 전투’라고 불렸다. 첫 경기에서 스페인 골키퍼 사모라가 다쳤고, 재경기에는 첫 경기 선발 가운데 무려 일곱 명이 나오지 못했다. 경기 하나를 치르고 나니 팀 절반이 얻어맞아 뛸 수 없게 된 셈이었다. 당시 스페인 신문과 이후의 기억은 한결같이 주장했다. 이탈리아의 동점골에 앞서 사모라를 상대로 한 반칙이 있었으며, 스페인의 다른 득점 하나도 논란의 판정으로 취소되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준결승도 곱씹어볼 만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강팀이었다. ‘기적의 팀’, 분더팀(Wunderteam)의 기세가 한창이었고, 이 준결승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열두 번 만나 겨우 한 번 이겼다. 준결승 당일 경기장은 진흙탕이었다. 이탈리아는 과이타의 골로 1 대 0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를 맡은 스웨덴 심판 에클린드는 뒤이어 결승에도 배정되었다.

이 경기들을 둘러싼 가장 유명한 전설은, 에클린드가 경기 전에 무솔리니를 만났으며 심지어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수많은 후대의 서술에 거듭 등장했다. 하지만 오늘까지 회의록 한 건, 일기 한 권, 공문서 한 장으로도 확증되지 않았다. 1934년 대회에 정치적 영향이 있었다고 보는 저자들조차 이 대목에서는 대개 소문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 입에서 입으로 거듭 전해진 이야기에 가깝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에클린드 한 사람이 준결승과 결승을 잇달아 맡았다는 점, 그리고 1934년 개최국이 실제로 안방에 유리한 판정 기준과 정치적 환경의 덕을 보았다는 점이다.

유리한 환경이라는 말도 심판 한 명이나 식사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토너먼트 방식 자체가 우연의 힘을 키웠다. 한 경기로 승부가 갈리니 조금 거칠게 뛰거나 판정이 조금 기울어져도 결과는 그대로 굳었다. 이를 바로잡을 2차전이 없었다. 거기에 빈틈없이 들어찬 홈 관중, 한목소리의 함성, 누구나 알지만 입 밖에 내지 않는 정치적 압력까지 있었다. 원정팀이 그 잔디를 밟는 순간 상대해야 할 것은 이탈리아 선수 열한 명만이 아니었다. 이런 구조적 이득은 실제로 존재했다. 무슨 뒷거래가 하나 입증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1934년의 핵심은 이런 구조적 이득에 있다. 증거가 확인되지 않는 저녁 식사에 있지 않다.

여기에는 조심스럽게 건너야 할 외줄이 있다. 손쉬운 설명 하나는 이탈리아가 전적으로 조작에 힘입어 우승했다는 것이다. 부정한 판정으로 개최국에 승리를 넘겨주었다는 이야기다. 듣기에는 속 시원하다. 그러나 그것도 또 하나의 단순화다. 반파시즘의 편에서 축구를 똑같이 순전한 정치로 환원한다. 정권이 내세운 ‘우리가 이겼으니 우리는 위대하다’와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은 정권의 승전을 원하고, 다른 한쪽은 정권의 음모를 원한다. 양쪽 모두 이 두 차례 월드컵을 깔끔하고 명료하며 흑백이 뚜렷한 정치 이야기로 만들기에 바쁘다.

하지만 진실은 어느 쪽에도 순순히 넘어가지 않는다. 1934년 이탈리아는 실제로 강한 팀이었다. 원숙한 선수 한 세대가 있었고, 포초 같은 현대적인 지도자가 있었으며, 정교한 경기 방식이 있었다. 동시에 이 팀은 개최국에 대단히 유리하고 정권이 강하게 에워싼 환경 안에 있었다. 둘 다 참이다. 조작 덕분일 뿐이라고 하면 그 팀의 실제 실력을 지워버린다. 오직 공정하게 이겼을 뿐이라고 하면 저울을 짓누르던 정권의 손을 지워버린다. 진지한 역사가들 가운데 1934년을 오직 조작으로 우승한 단선적인 이야기로 설명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든다. 기록 보관소에는 부정 심판을 확증해줄 판결문이 없다. 당시에 이미 제기된 거센 의혹과, 개최국에 명백히 기울어진 전반적 환경이 있을 뿐이다. 더 정확한 말은 이렇다. 진짜 강한 팀이 손을 타서 기울어진 환경 속에서 이겼다. 이 일에는 속 시원한 판결이 없다. 함께 헤아려야 할 두 사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삼켜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속 시원한 판결을 원하는 것은, 깔끔한 이야기 두 가지가 모두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전부 부정행위로 이겼다고 하면, 반파시즘 쪽은 순수한 악인 하나를 얻는다. 승리는 통째로 무효가 되고, 정의는 도덕적으로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 이탈리아가 공정하게 우승했다고 하면, 그 정권은 티 하나 없는 승전을 얻는다. 축구는 얌전히 국가의 강성함과 질서를 증명해준다. 두 이야기 모두 제게 필요한 것을 챙긴다. 치러야 할 값도 같다. 현실의 성가신 복잡함을 매끈하게 밀어버려야 한다. 그런데 축구는 좀처럼 매끈해지려 하지 않는다. 눈앞에 내미는 것은 정말 실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엄청난 이득도 본 팀이다. 정권의 때를 씻겨줄 수도, 그 팀을 통째로 지워버릴 수도 없는 난처함이다. 어느 쪽도 제 것으로 거두어갈 수 없는 이 난처함이야말로 가장 끈질긴 잔여항이다. 이 복잡함을 인정하는 것은 누구를 적당히 감싸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면을 함께 붙들고 있어야만, 저울을 짓누른 손이 무엇을 눌렀고 무엇은 끝내 누르지 못했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울을 짓누른 손은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그 팀이 실제로 해낸 축구까지 함께 부정하면 지나치다. 포섭은 포섭이고 축구는 축구다. 둘을 각자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 팀의 진짜 축구가 도대체 어디에서 훌륭했는지 밝혀야 한다.

4. 포초의 메토도: 축구 자체의 실질

그 팀이 실제로 해낸 축구야말로 정권의 설명이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포초의 경기 방식을 메토도(metodo)라고 불렀다. 보통 2-3-2-3으로 표기하며, 경기장에 놓으면 W 두 개가 포개진 모양이었다. 첫 월드컵에서 여전히 널리 쓰이던 2-3-5 피라미드와 달리, 두 인사이드 포워드를 센터하프 부근까지 끌어내려 중원을 단단히 장악했다. 중원은 경기의 중심축이다. 그곳을 쥔 쪽이 공이 어디로 가고 경기가 얼마나 빨라질지 결정한다. 반면 다섯 명을 앞에 한꺼번에 밀어넣은 피라미드에서는 중원이 비기 일쑤였다. 메토도가 인원을 중원으로 돌린 것은 바로 그 빈틈을 메우려는 일이었다. 채프먼의 WM과도 달랐다. WM은 중앙의 핵심 선수를 완전히 뒤로 내려, 상대 센터포워드를 밀착 마크하는 수비수로 만들었다. 오직 수비에 전념하게 했다. 메토도는 이 선수를 한 가지 용도에 묶어두지 않았다. 뒤로 내려와 수비도 하고, 앞으로 나가 공격을 짜며 공을 배급하게 했다. 훗날 말하는 ‘플레이메이커’의 선구에 더 가까웠다. 오프사이드 규칙이 바뀌면서 공격은 강해지고 수비는 약해진 똑같은 상황에, 영국은 WM으로, 이탈리아는 메토도로 답했다. 서로 다른 두 길이었고, 저마다 얻는 것과 버리는 것이 있었다. 메토도는 발기술이 좋고, 땅볼 위주의 짧은 패스와 경기 속도 조절을 중시하는 팀에 특히 잘 맞았다. 당시 이탈리아가 바로 그런 팀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실마리가 있다. 이 몇 년 동안 축구 전술은 관중석의 정치와는 별 상관 없이, 제 논리를 따라 나아갔다. 1925년 오프사이드 개정은 공격과 수비가 새 균형을 찾도록 몰아붙였다. 영국이 찾아낸 WM과 이탈리아가 찾아낸 메토도는 같은 난제가 낳은 서로 다른 답이었다. 이 진화는 제 갈 길을 갔다. 어느 나라가 대회를 연다고 방향을 바꾸지 않았고, 관중석에 지도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고 없던 골 하나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정권은 우승팀 머리 위에 제 깃발을 꽂을 수 있어도 전술판 안에는 꽂을 수 없다. 중원을 어떻게 쥘지, 수비를 어떻게 메울지, 후방의 공을 어떻게 전방으로 돌려 보낼지를 궁리하는 일에는 그 나름의 내력과 앞길이 있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정치는 닿을 수도, 그 계보에 이어 붙을 수도 없었다. 승리 자체는 누군가 한 손으로 높이 들어 깃발처럼 흔들 수 있다. 하지만 그 팀을 승리에 걸맞게 만든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 조금씩 벼려낸 것이었다.

포초의 솜씨도 포메이션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술의 혁신자였을 뿐 아니라 선수들의 심리 상태와 대회 전 합숙 훈련을 대단히 중시했다. 팀을 한데 모아 오랫동안 준비시켰고, 선수마다 상태와 성미를 살폈다. 다시 말해 1930년대 이탈리아의 성공은 국가의 명령 한 줄로 쥐어짠 결과가 아니었다. 상당히 현대적인 대표팀 운영과 원숙한 선수 한 세대 위에 세워졌다. 이런 것들은 여러 해 쌓인 경험과 전문적인 안목으로 조금씩 모아야 한다. 명령이 아무리 엄해도 없던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포섭의 한계가 있다. 정권은 시상대에 서서 그 승리를 파시즘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기 방식을 만들어내지도, 이 세대의 선수들을 길러내지도, 포초 대신 중원 장악법을 궁리하지도 못한다. 승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말 한마디로 바꿔 쓸 수 있다. 승리 자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바꿔 쓸 수 없다. 축구의 실질, 그 전술과 기술, 그 세대가 들인 고된 노력은 정권의 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단단히 남아 있다. 정권은 트로피에 제 이름을 찍을 수 있다. 선수의 발에는 찍을 수 없다. 나중에 갈수록 많은 이가 인정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파시즘의 포장을 모두 벗겨내도 이 팀은 여전히 진짜 강팀이었다. 두 번의 우승은 정권의 이야기를 빌려야만 그럴듯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5. 오리운디: 민족이라는 구축의 빈틈

정권의 설명에 난 가장 큰 구멍은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이 ‘이탈리아 대표팀’의 선수 명단 안에 있었다.

파시즘이 축구로 증명하려던 것은 이탈리아 민족의 강성함과 순수한 단일성이었다. 그런데 1934년 우승팀에는 애초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선수가 여럿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무리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다. 이탈리아 혈통을 지녔고 남미에서 돌아와 이탈리아 유니폼을 입은 이런 선수들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오리운디(oriundi)라고 불렀다.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엔리케 과이타, 아틸리오 데마리아가 그들이었다. 민족의 순수한 단일성을 증명하러 나선 팀의 등뼈가, 바다를 건너 돌아온 남미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려면 경계가 흐릿한 이민의 역사부터 보아야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수백만 이탈리아인이 생계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같은 남미 국가로 몰려들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아이를 낳았다. 그 후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와 골목에서 축구를 배웠고, 남미 축구의 일부로 자랐다. 그 아이들 가운데 천재가 나타나자 이탈리아는 혈통을 근거로 다시 자기 사람이라 주장하며 데려와 푸른 유니폼을 입혔다. 이들은 이탈리아인인가, 아르헨티나인인가. 답은 어느 선에 서서 보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선 자체가 수백만 명의 이주에 이리저리 당겨진 것이었다. 한 번도 명확했던 적이 없었다. 더구나 남미에서 자란 이 선수들이 가져온 것은 두 발만이 아니었다. 기술과 드리블을 중시하는 남미의 경기 방식도 가져왔다. 포초의 메토도가 그토록 공들인 땅볼 위주의 짧은 패스와 발기술에는 오리운디의 남미식 바탕이 크게 기여했다. 민족의 강성함을 증명하는 데 쓰인 이탈리아의 경기 방식조차 뼛속에는 바다 건너의 내력이 섞여 있었다. 파시즘이 원한 것은 경계가 뚜렷한 순수 민족이었다. 하지만 그 발밑을 떠받친 것은 바로 경계를 뒤섞어놓은 이민사의 산물이었다. 영광을 안겨준 축구조차 순수하지 않았다.

몬티는 특히 남달랐다. 그는 1930년 첫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대표해 결승에 나섰다.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에 진 그 결승에서, 몬티는 아르헨티나 쪽에 서 있었다. 4년 뒤에는 이탈리아 쪽에 섰다. 1934년 결승에 나섰고, 이번에는 이겼다. 오늘까지 서로 다른 두 나라를 대표해 월드컵 결승에서 뛴 선수는 그가 유일하다. 한 사람, 두 국기, 두 결승전. 그 사이에는 겨우 4년이 있었다. 정권은 축구를 들고 나와 우리가 순수하고 단단한 하나의 민족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가장 의지하는 선수 가운데 하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를 위해 결승에서 뛰었다. ‘순수’라는 두 글자의 허상을 이보다 더 통렬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당시 사람들부터 이미 이 문제로 다투었다. 후세가 만들어낸 논쟁이 아니다. 1934년 신문과 잡지에는 선수들을 이탈리아인으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는 클럽과 행정가들을 비꼬는 글이 실렸다. 선수들의 실제 민족적 배경을 일부러 감추기까지 한다는 조롱이었다. 이들이 과연 이탈리아인인가를 두고 1934년 현장에서부터 시끄러웠다는 말이다. 이런 비판에 맞서 포초가 했다는 변론 하나가 널리 전한다. 요지는 이렇다. 자격을 갖춘 이들이 이탈리아를 위해 군 복무를 해야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면, 이탈리아를 위해 축구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변론 자체가 오히려 속을 드러냈다. 한 가지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탈리아인이라는 정체성은 태어날 때부터 명백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논증하고 쟁취해야 했다. ‘이탈리아를 위해 죽을 뜻이 있다’는 말로 그 정체성을 뒷받침해야 했다. 여기서 민족은 하나의 구축이라는 본모습을 드러낸다. 단단한 한 덩어리, 경계가 뚜렷한 실체가 아니다. 혈통과 자격, 이주, 그리고 누구를 위해 뛰었는지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음매마다 흔들릴 수 있다. 오리운디는 이 구축이 덮지 못하는 잔여항이다. 남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혈통을 지닌 선수들이 대거 이 팀에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순수한 민족국가를 자연스럽고 아무 이견 없이 대표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정반대다. 파시즘이 축구로 민족의 순수한 단일성을 증명하려 할수록, 제 손으로 경기장에 내보낸 팀이 그 단일성의 허상을 벗겨냈다. 우승컵을 받들어 민족의 이름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그 컵을 받든 손들 가운데 여럿은 바다 건너에서 왔다.

결국 순수한 하나의 민족에서 저절로 자라난 팀은 한 번도 없었다. 국가대표팀은 언제나 누가 우리 편인가를 정하는 규칙으로 둘러쳐진다. 그 규칙에는 늘 가장자리가 있고, 다툴 여지가 있다. 혈통은 몇 대까지 따질 것인가. 태어난 곳은 셈에 넣는가. 자란 곳은 어떤가. 누구를 위해 뛰고 싶은지도 따질 것인가. 모두 사람이 정한 선이다. 이쪽으로 그을 수도 있고, 저쪽으로 다시 그을 수도 있다. 평소에는 그 선들이 국기 밑에 가려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으니 국가대표팀이 본래부터 그 민족의 화신인 줄로 여긴다. 오리운디는 평소 가려져 있던 이 사실을 월드컵 결승 무대 한가운데 끌어다 놓았다. 민족의 순수성에 어긋난 예외가 아니다. 민족이라는 구축의 본모습이 들통난 것이다. 기어코 축구로 순수성을 증명하려 한 정권이, 오히려 제 손으로 그 위를 덮은 국기를 걷어냈다. 모두가 보게 했다. 이른바 순수 민족의 밑바닥에 놓인 것은, 이리저리 옮겨 그을 수 있는 수많은 선이었다.

6. 1938년: 전쟁 전야의 그림자와 더 노골적인 상징

4년 뒤인 1938년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1934년보다 훨씬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개최권은 FIFA가 1936년 베를린에서 결정했다. 프랑스가 아르헨티나와 독일을 제쳤다. 월드컵을 두 번 연속 유럽에서 열기로 하자 남미가 거세게 반발했다. 남미는 줄곧 유럽과 아메리카가 번갈아 개최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불만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불참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우루과이는 벌써 두 대회 연속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8년 전 준우승국 아르헨티나까지 함께 빠졌다. 스페인은 내전 때문에 참가할 수 없었다. 한쪽에서는 개최권을 두고 다툰 남미가 화가 나서 오지 않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스페인이 제 나라의 내전 때문에 오지 못했다. 공을 차기도 전에 경기장 밖의 정치가 경기장 안에 설 사람들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세계’라는 이름의 대회에서 누가 잔디 위에 설 수 있는지는 갈수록 축구 실력보다, 담장 밖에서 벌어지는 축구와 무관한 원한과 포화에 달리게 되었다. 이미 대전 전야의 그림자에 분명히 잠긴 월드컵이었다. 그런데 진짜 짙은 그림자는 아직 뒤에 있었다.

가장 큰 지정학적 충격은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안슐루스(Anschluss)에서 왔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집어삼켰다. 오스트리아는 곧 월드컵에서 철수했고, 최정상급 선수들은 독일팀에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대회 강팀 가운데 하나였다. ‘기적의 팀’은 전성기에서 내려왔어도 저력이 남아 있었다. 이 팀이 빠지자 대진 전체가 달라졌고, 스웨덴은 싸우지 않고 다음 라운드로 갔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선수 일부를 받아들이고도 스위스와의 재경기에서 탈락했다. 후대의 서술은 흔히 강제로 짜 맞춘 팀의 호흡 문제와,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 분위기에서 패인을 찾았다. 본래 맞수였던 두 팀을 억지로 뭉친 결과는 더 강한 팀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속내를 품은 모래알 같은 조직이었다. 정권은 지도 위에서 나라 하나를 삼킬 수 있어도, 경기장에서는 두 팀을 진짜 한 팀으로 만들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소멸은 가장 노골적인 포섭이었다. 승리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손을 뻗어 온전한 팀 하나를 월드컵에서 지워버리고, 선수들을 새 국적에 따라 다시 배분했다. 국경선 하나가 강제로 지워지자, 한때 유럽 전체를 매혹한 팀이 뿌리째 뽑혀 정치의 분쇄기 안으로 끌려갔다. 경기장 둘레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 경기장 안의 사람을 영토와 함께 넘겨줄 수 있는 재산처럼 다루었다. 하지만 팀 이름 하나를 지울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축구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까지 지울 수는 없다. 다시는 온전히 모일 수 없게 된 기적의 팀은, 삭제된 뒤에도 남는 잔여항이었다. 기억 속에 차지한 그 자리는 지도 위의 병합으로는 손댈 수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 대표팀과 파시스트 상징의 관계는 전보다 더 대놓고 드러났다. 가장 충실하게 기록된 장면은 프랑스와의 8강전이다. 이탈리아는 평소의 푸른 유니폼도, 통상적인 흰색 원정 유니폼도 입지 않았다. 파시즘의 색인 검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고, 킥오프 전에 파시스트식 경례를 했다. 대회 내내 매 경기 그랬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그만큼 고루 갖추어져 있지 않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전의 검은 유니폼과 경례다. 기록이 충분하다. 이것을 모든 경기로 넓혀 말하려면 더 조심해야 한다.

이탈리아는 결국 결승에서 헝가리를 4 대 2로 꺾었다. 콜라우시와 피올라가 두 골씩 넣었다. 피올라는 그 세대 최고의 센터포워드 가운데 하나였다. 1938년 이탈리아는 1934년 팀과 비교하면 얼굴이 절반 넘게 바뀌었다. 오리운디는 줄고 국내 출신 선수는 늘었지만, 여전히 이겼다. 몇몇 선수의 우연한 등장에만 기대는 강함이 아니었다. 그 밑에는 꾸준히 성과를 만들어내는 체계가 있었다.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팀이었다. 포초는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오늘까지 아무도 따라잡지 못한 기록이다. 그는 여전히 월드컵에서 두 번 우승한 유일한 감독이다. 이 성취 자체에는 파시즘의 설명이 보태질 필요가 없다. 4년 사이 두 번이나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힘은 축구에서 나온다. 정권은 팀의 온몸에 상징을 찍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징은 팀이 왜 이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상징은 정권의 것이지만, 공은 여전히 그 사람들이 찼다.

겹겹의 상징 아래로, 전쟁은 이미 문턱까지 밀려와 있었다. 정권의 축구 포섭은 1938년에 가장 노골적인 모습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토록 포섭하려 한 세계는 곧 그 정권이 제 손으로 붙인 불에 타 잿더미가 될 참이었다. 1년 남짓 뒤, 유럽에서는 더는 월드컵을 치를 수 없었다.

7. 포섭되기를 거부한 사람들: 신델라와 레오니다스

모든 상징과 트로피 아래에는 언제나, 어떤 정치의 틀에도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은 마티아스 신델라다. 1930년대 초 오스트리아 대표팀은 유럽에서 ‘기적의 팀’으로 불렸다. 한때 대륙에서 가장 정교하고, 보는 이를 가장 즐겁게 하는 팀이었다. 신델라는 그 영혼이었다. 몸은 가늘었고, 축구는 가볍고 유려했다. 공을 몰면 물 위를 미끄러지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를 ‘종이 인간’이라고 불렀다. 힘과 긴 공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경기가 지배하던 시대, 그는 다른 축구를 대표했다. 몸집보다 머리와 발끝으로 하는 축구였다. 잔디 위에만 속하고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야 할 사람이, 시대의 가장 난폭한 손에 붙들려 운명 한가운데로 끌려들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친 독일팀을 따라 1938년 월드컵에 가지 않았다. 후대의 주류 해석은 그가 나치 국가대표팀을 위해 뛰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세부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갈린다. 공개적으로 정치적 저항을 한 것인지, 나이와 부상, 은퇴를 이유로 내세워 거절한 것인지, 자료마다 다르다. 하지만 1938년 독일팀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의문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빈 축구의 모든 자부심을 대표하던 사람이, 제 나라가 지워진 뒤에는 병합한 자의 유니폼을 입지 않기로 했다.

그의 죽음은 이 역사에서 가장 절제해 써야 할 대목이다. 1939년 1월 23일, 그와 여자친구 카밀라 카스타뇰라가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공식 사인은 가스나 배기관 문제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그 뒤로 세 가지 설명이 끊이지 않았다. 사고, 중독에 의한 자살, 게슈타포의 살해. 하지만 세 설명의 증거가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사고설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전부터 배기관 고장을 호소한 이웃들의 말이다. 자살설은 주로 후대의 문학적 추모와 심리적인 해석에서 나온다. 정치적 살인설은 대개 그의 반나치적 태도, 나치 경찰이 그에게 보인 관심, 지나치게 빠른 사건 종결 같은 배경에서 추론된다. 오늘까지도 가장 절제된 서술은 이 정도여야 한다. 공식 결론은 사고로 인한 중독이다. 자살과 타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개된 증거만으로는 어느 대안적 설명도 확정된 결론으로 올려놓을 수 없다.

정복자의 유니폼을 입지 않은 사람. 그리고 오늘까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죽음. 그 죽음을 어느 한 판본에 억지로 맞추는 일은, 그것이 용감한 정치적 순교이든 다른 무엇이든, 결국 또 한 번의 포섭이다. 포섭되기를 거부한 사람을 다시 깔끔한 이야기 안으로 거두어들이려는 일이다. 가장 정직한 태도는 설명되지 않는 그 자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가 경기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담긴 침묵의 무게를 지우지 않으면서, 그 죽음에 없는 확실성을 만들어 붙이지도 않는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브라질의 레오니다스, 1938년 월드컵에서 가장 눈부신 개인이자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린 선수다. 브라질은 첫 경기에서 폴란드와 6 대 5의 명승부를 벌였다. 레오니다스가 세 골, 폴란드의 빌리모프스키가 네 골을 넣었다.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비 속에서 골을 주고받으며 월드컵 역사에서도 손꼽힐 광란의 스코어를 남겼다. 레오니다스는 결국 일곱 골로 이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검은 다이아몬드’라는 이름도 이 대회에서 세계 곳곳에 퍼졌다. 유럽의 파시스트들이 경기장을 국가의 열병장처럼 꾸밀 때, 지구 반대편의 흑인 브라질 공격수는 날렵한 발끝으로 다른 축구의 매력을 유럽 관중의 눈앞에 처음 펼쳐 보이고 있었다. 축구라는 구축에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는지는 1938년 이 대회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한 정권의 전시대 위에 놓일 수 있었고, 바로 그 대회에서 누구도 포섭할 수 없는 한 개인을 통해 순수한 광채를 뿜을 수도 있었다.

그를 둘러싼 전설들은 하나씩 풀어 보아야 한다. 하나는 그가 바이시클 킥을 발명했다는 이야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흔히 이 기술의 발명자로 여겨지거나 적어도 처음으로 이 동작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인물로 꼽힌다. 유럽의 월드컵 관중을 그 킥에 매료시킨 첫 스타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미의 더 이른 선례들이 배제된 것은 아니기에, 절대적인 최초 발명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하나는 진흙탕에서 맨발로 골을 넣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믿을 만하다. 폴란드전에서 그의 축구화 한 짝이 진흙 속에서 벗겨지거나 망가졌고, 골을 넣을 때 심판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 내내 맨발로 뛰었다며 그날 전체를 맨발의 전설로 만든 이야기는, 분명 극적으로 부풀려진 판본이다.

논란은 또 있다. 브라질이 이탈리아에 진 준결승에서, 레오니다스는 왜 선발로 나오지 않았을까.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브라질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서 그를 결승에 쓰려고 아껴두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함께 전해진 다른 설명도 있다. 앞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치른 두 차례 격전에서 이미 다쳤고, 코칭스태프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준결승 선발로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로지 상대를 얕보았기 때문에 출전을 아꼈다는 주장은, 이견 없는 정설이 아니다.

레오니다스와 신델라. 한 사람은 갈수록 두꺼워지는 전설에 싸였고, 한 사람은 죽음의 수수께끼에 둘러싸였다. 하지만 둘에게는 같은 것이 있었다. 정권과 신화가 이 두 차례 월드컵을 깔끔한 이야기로 만들려 할 때마다, 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야기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부분이 있었다. 진흙 속에서 벗겨진 축구화 한 짝, 너무 서둘러 종결된 사건 하나. 어느 설명에도 다 거두어 넣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은 이야기보다 크다. 포섭이 끝내 맞추지 못하는 셈이다.

8. 승리는 포섭해도 축구는 포섭할 수 없다

한 정권이 진지하게 축구를 국가 안으로 거두어들이려 한 적이 있었다. 1934년 대회를 도구로 삼고, 승리를 파시즘의 영광이라고 불렀다. 축구를 제 상징으로 빈틈없이 덮어 그 의미를 하나에 못 박으려 했다. 국가의 강성함과 정권의 질서. 한동안은 정말로 축구를 도구로 만들었다. 전 세계에 내보내는 국가 광고 한 편으로 꾸몄다.

하지만 축구의 의미를 닫아걸지는 못했다. 오리운디는 정권이 증명하려던 순수 민족의 허상을 벗겨냈다. 우승팀 안에는 얼마 전 다른 나라를 위해 결승에 나섰던 사람이 서 있었다. 포초의 경기 방식과 그 세대 선수들의 솜씨는 정권이 만들어낼 수도, 거두어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승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바꿔 써도 승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바꿔 쓸 수 없었다. 조작과 협박의 의혹에 대해서는 누구도 깔끔한 판결을 확정하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진짜 강팀이었고, 손을 타서 기울어진 환경의 덕도 분명히 보았다. 둘 다 참이었다. 신델라의 거부와 설명되지 않는 죽음, 레오니다스의 진흙 속 축구화도 있었다. 어떤 틀에도 가둘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내 그 정권은 포섭하려던 세계와 함께, 제 손으로 일으킨 전쟁의 불길에 타버렸다.

두 번의 우승은 남았다. 축구의 것이지 정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그 우승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정권이 한때 그것을 어떻게 이용했는가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연구의 공통된 판단은 두 우승의 축구적 의미를 취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파시스트의 포섭이라는 그림자를 줄곧 짊어지고 있음을 짚는 것이다. 두 사실을 함께 말해야 한다. 축구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대단히 크다. 그 몸에 드리운 그림자도 씻어낼 수 없다. 정권이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린 트로피는, 아무리 제 실력으로 따냈더라도, 그것을 들어 올렸던 손의 지문을 다시 말끔히 지우기 어렵다.

그 안에는 더 일반적인 무엇이 숨어 있다. 파시즘의 영광이라는 설명과 순전한 부정행위라는 설명은 날카롭게 맞서는 듯하지만, 뼛속에는 같은 충동이 있다. 축구의 의미를 정치 안에 닫아걸려는 충동이다. 하나는 정권의 승전을 원하고, 하나는 정권의 음모를 원한다. 둘 다 깔끔하고 명료한 이야기를 원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느 쪽도 거두어갈 수 없는 잔여항이다. 진짜 강한 팀 하나가, 유리하면서도 정치에 둘러싸인 환경 안에서, 민족이라는 말로는 온전히 자기 사람이라 주장할 수 없는 선수들과 함께 서 있다. 승리는 포섭할 수 있어도 축구는 포섭할 수 없는 정권이 그 팀을 높이 들어 올린다. 두껍게 쌓인 전설들, 이기지 못하면 죽으라는 전보, 에클린드의 저녁 식사, 신델라의 죽음에 대한 단정, 맨발로 싸운 레오니다스. 대부분은 깔끔한 이야기를 갖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이 남긴 퇴적물이다. 하나씩 가까이 다가가 보면 모두 그다지 반듯하지 않은 것으로 풀어진다. 깔끔하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포섭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축구의 역사는 번번이 말끔히 닦이기를 거부한다.

이 두 차례 월드컵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만한 까닭은 다른 대회보다 더 어두워서가 아니다. 포섭이라는 일을 가장 노골적으로 밀어붙였고, 그만큼 포섭의 한계도 가장 또렷이 비추었기 때문이다. 정권은 한 나라의 거의 모든 힘을 동원했다. 대회를 열고, 여론을 띄우고, 상징을 찍고, 트로피를 건넸다. 거두어들일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거두어들였다. 그런데도 손에 넣은 것은 승리의 껍질뿐이었다. 승리의 속살은 아니었다. 그 팀의 발기술도, 그 민족의 다양함도, 그 사람들이 남거나 떠나는 일도 아니었다. 더 세게 힘을 줄수록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들을 도리어 제 손으로 더 환하게 비추었다. 이것이 포섭의 한계다. 그림자를 짊어진 두 번의 우승이 후세에 남긴, 지워지지 않는 무엇이다.

포섭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줄곧 상징과 트로피 아래 조용히 있었다. 정복자의 선수가 되려 하지 않은 사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전설에 둘러싸인 사람. 관중석에서 경기 하나를 어떤 정치보다 무겁게 받아들인 평범한 사람들. 정권의 이야기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늘 거기 있었다. 한 경기 또 한 경기를 뛰고, 보고, 기억했다. 정권의 깃발이 아무리 커도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자기 몫까지 덮을 수는 없었다.

축구는 이 포섭을 견뎌냈다. 씻기지 않는 흉터 하나를 지닌 채 계속 앞으로 갔다. 축구의 의미를 못 박으려던 정권이 먼저 역사의 뒤편으로 쓸려나갔다. 축구는 남았다. 그 정권에 포섭되었어도, 남김없이 거두어지지는 않았다. 축구를 고정하려는 충동은 훗날 또 다른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축구도 아마 이번처럼 포섭되고 이용되며 온갖 의미를 떠안을 것이다. 그래도 끝내 거두어들일 수 없는 틈 하나는 남길 것이다.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 순환은 여전히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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