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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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세계 축구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 제01편 / 총 22편

토대 놓기

첫날부터 그대로 멈추려 했던 구축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을 출발점으로, 규칙과 직업주의, 국제 조직이 세계 축구의 첫 구조를 어떻게 만들고 곧바로 흔들었는지 살핀다.

Han Qin (秦汉)·2026
이 글의 목차

1. 토대를 놓는 일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1930년 7월 30일, 몬테비데오의 센테나리오 경기장.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4 대 2로 꺾고 첫 월드컵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관중이 10만 명이었다는 말은 나중에 널리 퍼졌다. 공식 기록은 6만 8,000여 명이다. 어느 숫자가 맞든, 그날의 군중과 그 뒤 밤새 이어진 열광은 실제로 있었다. 우루과이는 다음 날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라플라타강 건너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패배 뒤 소요가 일어났다.

후대의 이야기는 이날을 깔끔한 출발점으로 만들기 쉽다. 세계 축구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날은 반대 방향에서 바라볼 만하다.

토대를 놓는 일은 한 번도 무에서 유를 만드는 일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한 번의 부정이며, 한 번의 깎아내기다. 그렇게 깎아내어 남긴 것은 진리가 아니다. 퇴적물 한 덩이, 화석 한 조각이다. 그런데 그 화석이 완성된 첫날부터, 그것을 지키는 이들은 거기에 그대로 붙들어두려 한다. 이제 더는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이런 구축은 첫날부터 멈추려 하지만, 첫날부터 멈출 수 없다.

1930년이라는 이 ‘출발점’ 아래에는 적어도 네 가지가 깔려 있다. 어느 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고, 모두 더 이른 부정이 남긴 퇴적물이다. 첫째는 축구의 규칙이다. 1930년이 오기 전부터 수십 년 동안 다투어온 것이었다. 둘째는 프로 선수다. 1930년이 오기 전부터 어떤 이상이 거듭 배제하려 했지만 끝내 배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셋째는 국제 축구의 조직이다. 1930년 전에 이미 모습을 갖추었고, 모습을 갖춘 날부터 옛 질서에 고개를 숙였다. 넷째는 대회 자체다. 허공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현실에 떠밀려 생겨났다. 넷을 함께 놓고 보면, 이른바 토대 놓기란 이미 제 모습을 고정하려 하면서도 이미 그러지 못하던 구축을, 1930년이라는 한순간에 사람들이 시작으로 여긴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네 가지는 축구라는 구축의 서로 다른 몇 가지 면에 맞닿아 있다. 규칙이 한 면이고, 조직이 한 면이며, 프로화가 끌어들인 상업이 한 면이다. 경기장에서 어떻게 뛸 것인가라는 전술의 면도 1930년에는 변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모두 축구라는 같은 구축의 서로 다른 얼굴이다. 그리고 이 순간, 그 얼굴들은 서로를 움직이고 있었다. 규칙 하나가 바뀌면 전술의 모양이 바뀌고, 이상 하나가 무너지면 조직이 달라진다.

2. 성문화라는 깎아내기: 통일은 선언이 아니라 경쟁으로 이루어진다

현대 축구는 1863년 어느 하룻밤 사이에 태어나지 않았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에서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창립되었다. 목표는 명확한 규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 규칙이 나왔다고 곧바로 천하가 통일된 것은 아니다. 여러 해 동안 다른 규칙들, 특히 셰필드 계열의 규칙과 함께 쓰였다. 그보다 앞서서는 여러 방식을 절충한 케임브리지 규칙이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다시 말해 1863년은 출발점이 아니라, 오랫동안 선택지를 좁혀온 과정의 한 걸음이었다. 그 전에는 학교와 대학, 클럽과 지역마다 서로 다른 규칙집을 들고 경쟁했다. 추상적인 철학을 다툰 것이 아니었다. 경기의 아주 구체적인 작동 방식을 다투었다. 손을 써도 되는가.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차도 되는가. 오프사이드는 어떻게 판정하는가. 공이 터치라인을 벗어나면 손으로 던져 넣는가, 발로 차 넣는가. 골라인을 넘어가면 어떻게 경기를 다시 시작하는가. 규칙의 성문화는 무엇보다 이렇게 자잘하고 구체적인 곳에서 한 치씩 싸워 얻어낸 일이었다.

이 다툼에서 밀려난 것은 규칙 한 조항만이 아니었다. 축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상상 전체가 밀려났다. 새 축구협회 규칙이 정강이를 차는 행위를 금지하자, 럭비 스쿨의 전통에 가까웠던 블랙히스 클럽은 탈퇴했다. 기술적인 세부사항 하나에서 합의를 못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한 축구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몸으로 부딪치고, 공을 안고 달릴 수 있으며, 신체적 대결에 더 큰 무게를 두는 축구였다. 사실 최초의 축구협회 규칙도 어느 정도는 손의 사용을 허용했다. 결정적인 것은 그 뒤 조금씩 ‘드리블하고 차는’ 계통과 ‘들고 달리는’ 계통을 갈라놓은 일이었다. 그 경계선 양쪽에서 서로 다른 두 종목이 자랐다. 하나는 축구가 되었고, 하나는 럭비가 되었다. 갈라지기 전에는 둘 다 아직 잘리지 않은 한 덩어리였다.

더구나 새 규칙이 곧장 경쟁 상대를 몰아낸 것도 아니었다. 1863년 이후에도 셰필드 계열의 규칙은 중요했다. 그 지역 클럽들은 계속 자기네 규칙을 썼고, 축구협회의 규칙은 두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케임브리지 방식과 셰필드 방식 사이에는 공중볼 경합 뒤 공을 받아 잡는 방식이나 프리킥 같은 부분에서 실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른바 ‘통일’은 여러 해에 걸쳐 한쪽이 다른 쪽을 누르면서 이루어졌다. 표준 하나를 발표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규칙집 밑에는 더 오래된 층이 깔려 있었다. 성문화 이전에 이른바 축구는 한 가지 놀이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놀이였다. 학교마다, 마을마다, 사람들 무리마다 제 관습대로 했다. 인원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경기장도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손을 써도 되는지도, 이기는 기준도 제각각이었다. 모두가 따르는 심판은 없었다. 누구도 자기 방식만이 정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성문화가 처음 한 일은 저마다 제 식대로 하던 이 혼돈을 깎아내어 경계 하나를 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축구로 치고, 저것은 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이었다. 가장 깊이 들어간 칼날이었다. 본래 정해진 모양이 없던 한 덩어리를 잘라, 정해진 모양을 가진 구축으로 만들었다. 그 경계 밖으로 잘려나간 경기 방식들, 성문 규칙 안에 들어가지 못한 지역의 놀이 방식들은 이 구축의 첫 잔여항이 되었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는 축구라고 불리지 않을 뿐이었다.

축구라는 구축은 언제나 경쟁에서 이겨 세워졌다. 명령 한 줄을 공포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통일은 종이 한 장에 적은 표준이 아니라, 싸움에서 이긴 뒤에 남은 모습이다. 오늘날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는 어떤 형태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한 번의 부정이 남긴 화석이다. 그 부정에 밀려난 것들은 정말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다른 곳으로 물러났을 뿐이다.

규칙 자체도 결코 한자리에 고정되지 않았다. 오프사이드는 거듭된 절충을 통해 성문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예다. 1863년에는 가장 엄격한 판본을 썼다. 공을 보내는 동료보다 상대 골문에 가까이 있으면 오프사이드였다. 너무 가혹해서 공격을 거의 막아버리는 규칙이었다. 그래서 1866년에는 완화되었다. 자신과 상대 골문 사이에 상대 선수가 세 명 있으면 오프사이드가 아니게 되었다. 20세기 초까지도 규칙집에는 이 세 명짜리 규칙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 결정적인 개정이 왔다. 1925년, 세 명이 두 명으로 바뀌었다.

오프사이드가 끝내 확정되지 않는 규칙인 까닭은, 그것이 바로 공격과 수비 사이의 균형선을 정하기 때문이다. 선을 수비 쪽에 유리하게 그으면 경기는 답답해지고 골은 드물어진다. 공격 쪽에 유리하게 그으면 수비가 뚫려 경기는 긴장감을 잃는다. 어디가 알맞은 자리인지는 정해진 답이 없다. 선수와 감독은 어떤 판본의 규칙이든 빈틈을 파고들 궁리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한 판본이 앞선 불균형을 고치자마자, 새로운 경기 방식이 미처 막지 못한 곳에서 비집고 나와 균형을 다시 깨뜨린다. 그러면 다음 판본이 필요해진다. 이 선은 거듭 다시 그어질 수밖에 없다. 선을 그어 맞추려는 대상 자체가 어느 고정된 자리에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숫자 하나가 줄자 공격하는 쪽이 넘어야 할 상대도 한 명 줄었다. 곧바로 공격에 유리해졌고, 옛 포메이션을 지탱하던 수비의 기하학도 곧바로 흔들렸다. 이 변화는 옛 시대의 균형과 뒤이어 닥칠 전술의 격변을 잇는, 규칙상의 경첩이었다. 수호자들이 원한 것은 명확하고 안정적이며, 한 번 정하면 다시 손댈 필요가 없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규칙은 1863년부터 1925년까지 계속 바뀌었다. 어느 개정도 느닷없이 나오지 않았다. 앞선 규칙으로 덮을 수 없던 것이 매번 개정을 몰아붙였다. ‘명확하다’던 규칙은 거듭 스스로를 다시 불명확하게 만들었다. 구축은 닫히려 한다. 완성된 상태에 머물려 한다. 하지만 덮이지 않는 잔여항이 거듭 그것을 억지로 열어젖힌다. 규칙이라는 얼굴의 논리는 1863년에서 1925년 사이에 이미 모양을 갖추었다. 이후 축구의 역사에서는 갈수록 더 날카로운 형태로 되풀이될 뿐이다.

3. 아마추어의 이상: 본질을 자처한 화석

축구의 초기 국제 질서에서 가장 깊은 균열은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있었다.

프로화는 잉글랜드 북부의 압박이 끌어낸 결과였다. 북부 클럽들, 특히 FA컵을 계기로 활기를 얻은 클럽들이 이 종목을 남부의 아마추어 이상에서 끌어내어, 1885년 축구협회가 프로화를 인정하도록 몰아붙였다. 여기에는 더없이 선명한 계급의 문제가 있었다. 노동계급 선수들과 북부 클럽들이 요구한 것은 보수였다. 축구를 하려면 일을 빠져야 하고, 다칠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제 손으로 벌어먹는 사람이 한가한 신사들처럼 자기 시간을 거저 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축구협회가 아마추어의 이상을 지키는 방식은 바로 중상층과 상층의 영향력을 보호했다. 이른바 순수한 아마추어 축구는 한 번도 경기를 즐기는 취향에만 그친 적이 없다. 누가 뛸 자격이 있고 누가 결정권을 갖느냐에 관한 배치이기도 했다. 누가 축구를 할 수 있느냐를, 누가 돈을 받지 않고 뛰는 데 따르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묶어놓았다.

오늘 들으면 먼 이야기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축구 내부에서 가장 날카로운 사회적 단층이었다. 부두 노동자도 변호사도 이 운동을 사랑했다. 그러나 아마추어로 남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쪽은 변호사뿐이었다. 축구를 아마추어라고 정의하는 것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채 축구를 유한계급의 운동으로 정의하는 일이었다. 축구로 생계를 보태는 이들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자로 내몰거나, 아예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마추어와 프로의 다툼은 보수를 둘러싼 실무적인 논쟁에 불과한 적이 없다. 이 운동이 대체 누구의 것인지를 놓고 벌인 다툼이었다. 아마추어를 지킨다는 것은 축구를 누구 손에 맡겨야 하는가에 관한 한 가지 답을 지킨다는 뜻이었다.

아마추어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한 차례의 식민화였다. 조건이 있는 것을 조건이 없는 것인 양 내세웠다. ‘진정한 축구는 아마추어다’라는 말이 바로 그런 사칭이었다. 특정 계급과 특정 시대가 남긴, 특정한 조건 아래 성립한 놀이의 형태를 축구의 영원불변한 본질이라고 말했다. 화석 한 조각이면서 스스로를 법칙이라고 선언했다. 이 이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자신이 축구의 영혼을 지킨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키는 것은 어느 역사적 단계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식민화는 반드시 실패한다. 배제하려는 것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배제하려던 것은 프로 선수였다. 축구 때문에 하지 못한 일과 감수한 위험에 대해 보수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 요구 뒤에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 사람의 시간과 몸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마추어의 이상은 이것을 부인했다. 선수를 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어떤 신사적 취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부인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1885년에 프로화를 합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제당하던 존재는 이후 끈질기게 자라 현대 축구 전체의 주된 줄기가 되었고, 끝내 자신을 배제하려던 질서의 속을 도리어 비워냈다.

이 질서가 지키려던 것은 경기장 안의 스물두 명이 어떻게 뛰느냐보다 훨씬 넓었다. 경기장 주위의 사회적 배치 전체였다. 1925/26년 규칙집에는 영국에서 일요일 축구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여전히 명문으로 적혀 있었다. 여섯 명씩 뛰는 작은 경기까지 포함해 이른바 ‘비정규 경기’도 관할 기구의 동의 없이는 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거창한 이치를 말하는 조항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조항이 가장 실감 나게 보여준다. 초기 축구 당국은 경기 규칙을 적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축구를 둘러싼 사회 질서도 함께 유지했다. 어느 날 경기를 하는가. 어느 조직 아래에서 하는가. 어느 규모로 해야 경기로 인정되는가. 수호자들이 고정하려던 것은 어떻게 뛰느냐라는 동작만이 아니었다. 누가 뛰고, 언제 뛰고, 어떤 배치 아래에서 뛰느냐라는 일체의 조건이었다.

사회적 배치 전체를 지키려는 이 충동은 끝내 그것을 품은 이들 자신에게 해가 되어 돌아왔다. 아마추어 자격을 둘러싼 다툼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더는 타협할 수 없게 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더 순수한 아마추어 범주를 원했다. 국제축구연맹은 더 적은 선수와 나라가 배제되도록 정의를 느슨하게 하려 했다. 영국의 네 협회가 프로라는 것 자체에 추상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미 1885년에 프로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진짜 아마추어가 사실상의 프로와 맞붙는 일이었다. 다투고 또 다툰 것은 결국 ‘아마추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을 뜻하느냐였다. 일을 빠진 데 대한 수당을 받은 노동자는 아마추어인가. 명목상 급여를 받지는 않지만 클럽이 편한 일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은 어떤가. 선을 어디에 그어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갈라놓으려는 두 가지, 사랑과 생계가 축구를 하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애초에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다툼 때문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는 1928년 국제축구연맹을 탈퇴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돌아왔다. 아마추어의 순수함을 지키려던 쪽이 제 손으로 자신을 세계 축구의 조직 바깥에 옮겨놓았다. 보수적으로 닫히려는 충동은 그렇게 자신을 품은 사람에게 벌을 돌려주었다. 수호자들은 문을 완전히 닫으려 할수록, 먼저 자신을 문밖에 가두었다.

4. 수호자들은 고정을 원했고 새 조직마저 옛 질서에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고정하려는 충동은 규칙에만 있지 않았다. 조직에도 있었다. 더구나 ‘새로운’ 것이어야 할 국제기구마저 창립 첫날부터 옛 질서에 고개를 숙였다.

국제축구연맹, FIFA는 1904년 5월 21일 파리에서 창립되었다. 창립에 참여한 것은 일곱 협회 또는 그 대리자였다.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를 대표했다. 런던의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창립자 명단에 없었다. 이 부재는 지극히 중요했다. 영국은 여전히 이 운동의 상징적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상지가 참여하지 않은 국제기구는 처음부터 빈자리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창립자들이 직접 남긴 말에는 이 심정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벨기에 축구계의 지도자 드 라블레 남작은 첫해의 FIFA가 서류 위에만 존재했다고 말했다. 축구에 관한 한 영국의 동의와 협력 없이는 제대로 된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창립자는 회장 자리마저 잉글랜드축구협회에 돌아가야 한다고 썼다. 이 말들이 기록하는 것은 영국이 영원히 전능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창립자들 자신의 마음가짐이다. 새 국제기구는 옛 수호자들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맞추어줌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 새로운 것은 옛것을 뒤엎으려 하지 않았다. 옛것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토대를 놓던 시기의 축구는 가장 미래지향적인 부분까지도 뼛속 깊이 공손했고,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기묘한 출발이었다. 세계의 축구를 관리하려고 만든 기구가, 창립 첫해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실제 결정권은 그 기구에 들어오지도 않은 옛 권위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 기구는 제 청사진을 들고 옛 질서를 대체하러 오지 않았다. 겸손한 초대장을 들고 와, 옛 수호자에게 부디 얼굴을 비추어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태생적인 이 공손함 때문에, 세계 축구의 ‘새로움’은 오랫동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옛것’에 먼저 보고해야 하는 새로움이었다.

옛 질서에 대한 이 양보는 제도에 고정되었다. 그 잔해는 오늘도 볼 수 있다. 축구 경기 규칙을 맡는 국제축구평의회, IFAB는 1886년 영국의 네 협회가 세웠다. 당시에는 그들이 규칙을 만드는 권한을 독점했고, FIFA는 1913년에야 합류했다. 그리고 최초의 배치를 간직한 오늘의 구조에서도 영국의 네 협회는 각각 한 표, FIFA는 네 표를 갖는다. 규칙 하나를 고치려면 4분의 3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 표결 구조는 살아 있는 잔해다. 영국이 스스로를 축구의 창시자인 동시에 수호자로 여기던 시대에서 왔다. 한 세기가 지나 전 세계 수십억 명이 지켜보는 운동이 되었어도, 규칙 하나를 바꾸려면 여전히 네 발상지가 지키는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화석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제도 안에 모셔져, 진작 잃었어야 할 영향력을 계속 행사한다.

토대를 놓던 시기의 축구는 규칙에서 조직, 투표권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보호받으며 제 모습을 유지하려던 구축이었다. 수호자들은 자신이 쥐고 있는 형태가 축구 본래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었다. 지킬 가치가 있으니 더는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축구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닫히려는 충동이다. ‘내가 경기를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정복의 충동이 아니라, ‘이것이 진짜니 건드리지 마라’는 보수의 충동이다. 이후 축구의 역사에서 이처럼 보수적으로 닫히려는 충동은 얼굴을 바꾸어 거듭 돌아온다. 때로는 아마추어를 지키고, 때로는 어떤 ‘올바른’ 경기 방식을 지키며, 때로는 상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지킨다. 그리고 매번 같은 벽에 부딪친다. 지키려는 그 형태 자체가 앞선 부정이 남긴 화석일 뿐이며, 제 잔여항을 틀 안에 가둘 수 없다는 벽이다.

5. 세계는 멈추지 않았다: 남미의 부상과 떠밀려 태어난 열린 대회

벽에 부딪치는 일은 세계 자체가 변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 월드컵이 아무것도 없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아니었다. 1908년부터 1928년까지의 올림픽 축구는 이미 많은 나라에 당대 최고 수준의 국제선수권대회 구실을 했다. 특히 올림픽이라는 더 큰 틀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맡았지만, 축구 종목 자체는 FIFA가 조직하거나 감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월드컵의 탄생은 동시에 참인 두 사실의 교차점에 놓인다. 1930년 대회는 독립적으로 열린 최초의 FIFA 월드컵이었다. 그렇다고 축구에 사실상의 국제선수권대회가 처음 생긴 순간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FIFA가 실은 오래전부터 축구 세계 전체를 위해 4년마다 선수권대회를 열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남의 이름으로, 남의 규칙에 묶여 열고 있었다. 경기장이 있었고, 팀이 있었고, 관중이 있었다. 딱 하나가 없었다. 최고의 프로 선수들을 초대할 권한이었다. 아마추어 규정이 더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고 나면, 제 공을 거두어 들고 나가 따로 판을 벌이는 일은 거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고 바로 올림픽 축구의 경기장에서 세계가 바뀌었다. 1908년과 1912년 두 대회에서는 똑같은 세 나라가 똑같은 순서로 시상대에 올랐다.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였다. 옛 중심은 아직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1920년에는 벨기에, 스페인, 네덜란드였다. 그 대회 결승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경기 도중 철수했다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러고 나서 1924년, 우루과이가 우승했고 스위스와 스웨덴이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1928년에는 우루과이가 정상 자리를 지켰다. 첫 결승을 비긴 뒤 재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었고, 이탈리아가 3위에 올랐다. 불과 몇 년 사이 시상대의 가장 높은 자리가 북서유럽에서 남미로 옮겨갔다.

우루과이의 올림픽 2연패는 대수롭지 않은 전주곡이 아니었다. 스물두 팀이 참가한 1924년 대회는 당시까지 열린 축구 대회 가운데 가장 국제적이었다고 여겨진다. 우루과이의 승리는 유럽이 더는 최고 수준의 축구를 독점하지 못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남미의 한 팀이 유럽 사람들의 올림픽에서, 당대 최고의 축구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유럽과 영국이 흔들릴 수 없는 중심이라는 수호자들의 축구 세계는, 유럽 땅에 온 남미의 한 팀 앞에서 사람들 보는 가운데 허상이 드러났다.

1924년 대회는 진정한 만남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 남미 축구와 유럽 축구는 대체로 각자의 물에서 자라고 있었다. 우루과이가 가져온 것은 드리블과 짧은 패스의 호흡을 중시하는 유연하고 기민한 축구였다. 힘과 긴 공에 의존해 밀어붙이던 당시 유럽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유럽의 관중과 선수들은 그런 축구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다. 한 종목의 규칙은 한 벌뿐인 듯 보여도, 서로 다른 땅에서는 전혀 다른 몸이 자란다. 이후 축구의 역사에서 나라와 나라가 겨룬 것의 상당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단순한 승패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축구 문화와 이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서로 다른 이해가 같은 잔디 위에서 부딪쳤다. 1924년 우루과이가 유럽에 가져간 것은 우승 하나만이 아니었다. 축구를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더 잘할 수도 있다는 증명이었다. 수호자들이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보던 방식은 실은 수많은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옛 배치가 더는 유지되지 못하게 만든 것은 바로 아마추어라는 족쇄였다. 아마추어 자격 제한은 최고의 선수들 가운데 너무 많은 이를 올림픽 문밖에 세웠다. FIFA도 자기 종목의 최고 대회를 더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관할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마침내 1928년 5월 26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FIFA 총회가 월드컵 창설을 의결했다. 아마추어와 프로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선수에게 열린 대회였다.

월드컵이 태어난 것은 누군가 개방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다. 배제당한 존재인 프로 선수와, 과소평가당한 존재인 유럽 밖 세계가 함께 그 탄생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아마추어의 이상으로는 프로의 현실을 덮을 수 없었고, 옛 대회로는 이미 부상한 남미를 덮을 수 없었다. 잔여항이 임계점까지 쌓여 새로운 부정을 강제했다. 월드컵은 그 산물이었다.

누가 미리 청사진을 그려놓고 그대로 지은 것이 아니었다. 모순이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눌린 끝에, 껍질을 깨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수호자들은 축구를 아마추어의 모습에, 유럽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모습에 고정하려 했다. 하지만 그 형태로는 제 잔여항을 틀 안에 가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열린 대회가 떠밀려 나왔다. 개방을 믿어서 그것을 만들려던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도 그랬다. 여기서 개방은 이상이 아니다. 닫힘의 실패가 남긴 틈이다.

6. 배제된 이들: 토대를 놓던 순간의 잔여항

대회 개최지는 1929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18차 FIFA 총회에서 정해졌다. 여섯 나라가 관심을 보였고, 스물세 나라가 개최국을 고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모였다. 이탈리아는 우루과이가 이미 더 강한 지지를 확보했음을 알고 물러났다. 몬테비데오가 선택받은 데에는 우루과이가 직전 올림픽 우승국이라는 이유도, 1930년이 헌법 제정 100주년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나라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에 월드컵을 묶는 것은 작은 나라에 좀처럼 오지 않는 영광이었다.

우루과이의 유치안에는 강력한 물적 뒷받침이 있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1929년 7월 21일 착공했다. 계획한 수용 인원은 8만 명이었다. 개최국은 경기장과 대회를 곧바로 100주년 축전에 묶었다. 그리고 유치안에서 가장 실속 있는 대목은 우루과이가 개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고 여비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남미의 작은 나라가 더 큰 유럽의 유치 경쟁국들을 누를 수 있었던 핵심이 여기에 있었다. 세계 축구의 이야기에 돈이 처음 또렷하게 들어오는 장면이다. 물론 마지막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왜 유럽에서는 끝내 네 팀만 왔을까.

이를 ‘유럽의 보이콧’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칠다. 여러 이유가 섞여 있었고, 정치와 상징에 앞서 이동과 운영의 문제가 있었다. 유럽 팀들은 왕복 항해와 대회 참가를 합쳐 약 두 달 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다. 프로리그가 있는 나라에서는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클럽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선수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보낸다는 것은 한 시즌의 절반 가까이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 사무총장 프레더릭 월이 몬테비데오에 팀을 보내기를 거절한 편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여기에 영국의 각 협회가 아마추어 논쟁 때문에 이미 1928년 FIFA를 탈퇴한 사정까지 겹쳤다. 앙금도 있었고 가기 싫어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이유는 항해, 비용, 클럽의 차출 거부, 그리고 아마추어 자격을 둘러싼 영국 협회들과 FIFA의 결별이었다. 이 배제는 우선 구조적인 것이었고, 상징적인 것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보이콧’이라는 설명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배제가 실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배제는 분명히 있었다. 유럽에서 참가한 네 팀은 벨기에, 프랑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였다. 영국은 각 협회가 1928년 FIFA를 탈퇴한 까닭에 불참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헝가리는 대회를 유치하려 했으면서도 정작 가지 않은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나라들이다. ‘세계’라는 이름의 선수권대회에 세계의 대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 빈자리가 토대를 놓던 순간의 가장 큰 잔여항이었다.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벌어져, 뒤이은 수십 차례의 월드컵이 천천히 채워가기를 기다렸다.

이 잔여항에는 양면이 있다. 어떤 악역이 일부러 벌인 보이콧도 아니고, 아무 책임 없는 우연도 아니다. 오만과 고립으로만 설명하면, 실제로 가로놓였던 항해와 아마추어를 둘러싼 제도적 결별을 놓친다. 순전히 이동과 운영의 문제라고 설명하면, 스스로를 중심에 놓고 그곳까지 갈 가치가 없다는 듯 굴던 영국의 태도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놓친다. 완전히 긍정할 수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다. 바로 그래서 덮을 수 없는 잔여항이다. 어느 쪽이든 시원하게 판결을 내려버리면, 오만하다고 하든 무고하다고 하든, 그 안에서 정말 덮이지 않는 것까지 덩달아 매끈하게 지워버리게 된다.

7. 대회 자체와 1930년이라는 ‘중간의 순간’

첫 월드컵에는 초청받은 열세 팀이 참가했다. 예선은 없었다. 유럽에서 네 팀, 남미에서 일곱 팀, 북미에서 두 팀이 왔다. 대회는 조별리그 뒤 준결승과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예선도, 출전권 다툼도 없었다. 열세 팀은 곧바로 초청을 받았다. 이 사실은 당시 축구의 영역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보여준다. 훗날 월드컵에서는 백 팀이 넘는 참가국을 여러 단계에 걸쳐 걸러내고, 출전권은 대륙들이 다투는 희소한 몫이 된다. 1930년에는 초대장을 보낸 뒤 누가 오겠다고 하는지 보면 되었다. 올 수 있는 팀은 그만큼뿐이었다. 대서양을 건널 뜻이 있는 팀들을 모아놓고 대회를 시작했다. 그 순간의 ‘세계’는 훨씬 작고 훨씬 느슨했다. 사람들을 문밖에서 솎아내야 할 만큼 커지기는 한참 전이었다. ‘세계’라는 말에 걸맞으려면 먼저 제 몸집부터 불려야 했다.

센테나리오 경기장은 대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기념비가 되어 있었다. ‘헌정의 탑’이 솟은 그곳은 100주년 축전의 상징적 중심이었다. 공기를 너무 촉박하게 잡은 탓에, 초반의 몇 경기는 다른 경기장에서 치르며 이곳이 온전히 준비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대회를 위해 서둘러 짓던 기념비가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대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준결승에서 똑같이 6 대 1로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두 경기 모두 큰 점수 차로 끝났다. 라플라타강 양편의 두 팀은 당시 나머지 모두를 멀찌감치 앞서 있었다. 상대는 각각 유고슬라비아와 미국이었다. 곧 4강 가운데 세 팀은 아메리카에서 왔고, 유럽 팀은 하나뿐이었다. 많은 이가 ‘유럽이 빠진 대회’로 기억하는 이 대회에서, 진짜 힘은 당시 대서양 반대편에 있었다. 토대를 놓던 순간 배제된 것이 유럽의 대부분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쪽은 바로 옛 질서가 과소평가한 신세계였다.

결승은 1930년 7월 30일 열렸다. 기록에 따르면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아흔일곱 번째 맞대결이기도 했다. 두 팀은 그 전부터 오랜 숙적이었다. 월드컵 결승은 그 묵은 대결에 가장 큰 무대를 하나 더해주었을 뿐이다. 우루과이는 12분 도라도의 골로 앞서갔다. 하지만 전반이 끝날 때에는 페우셀레와 스타빌레가 한 골씩 넣은 아르헨티나가 2 대 1로 앞서 있었다. 후반에 우루과이가 승부를 뒤집었다. 57분 세아, 68분 이리아르테가 차례로 골을 넣었고, 89분 카스트로가 4 대 2 승리를 굳혔다.

당시 우루과이 신문들은 스타빌레의 전반 득점에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어야 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 불만은 오늘까지 남아 있다. 수없이 다시 이야기된 이런 ‘출발점’에도 결과 속에는 판정의 우연이 박혀 있다. 어쩌면 인정되지 말았어야 하는데 인정된 골 하나가 박혀 있다. 승패는 어떤 필연만으로 결정된 적이 없다. 그 안에는 언제나 이렇게 깨끗이 셈할 수 없는 것이 남는다. 1930년, 오프사이드라는 항의 속에서도 골로 인정된 그 장면은 그런 것이 가장 이르게 모습을 드러낸 한 사례일 뿐이었다.

또 하나 있다. 그 자리에 대체 몇 명이 있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공식 기록의 결승 관중은 6만 8,000여 명이다. 하지만 후대에 널리 퍼진 이야기는 흔히 9만 명, 심지어 9만 3,000명이라고 한다. 대회 전체의 총관중 수는 더욱 계산하기 어렵다. 같은 날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치른 두 경기에 같은 관중이 기록된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경기마다 적힌 숫자를 단순히 더하면 같은 사람을 여러 번 셈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대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 곧 몇 사람이 그 토대 놓기의 순간을 직접 보았느냐에도 끝내 계산되지 않는 꼬리가 남는다. 출발점이라고 거듭 칭송받는 순간에, 그 인원수 자체가 닫히지 않은 잔여항이다. 기록의 소홀함이 아니라 토대를 놓는 일의 본성이다. 그것은 한 번도 경계가 또렷하고 내부가 하나로 통일된 전체였던 적이 없다. 하나하나 세어 밝히려 할수록,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전술에서 1930년은 중간의 순간이었다. 지배적인 언어는 여전히 2-3-5 피라미드 포메이션이었다. 19세기 말부터 물려받은 기본적인 포지션의 문법이었다. 수비수 둘과 미드필더 셋을 두고, 공격수 다섯이 한 줄로 올라섰다. 1930년의 선발 명단에서도 그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열한 명은 모두 수비수, 미드필더, 다섯 공격수라는 고전적 배치에 따랐다. 훗날 완전히 재편되는 현대적 구조가 아니었다. 공격 성향이 아주 강한 배치였다. 공격수 다섯은 사람을 앞쪽에 몰아놓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옛 오프사이드 규칙이 균형을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포메이션을 떠받치는 규칙의 토대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1925년 오프사이드의 기준이 되는 수비 측 선수 수를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인 개정은 곧바로 공격 쪽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옛 피라미드가 의존하던 수비의 기하학도 곧바로 흔들었다. 후대의 전술사는 이 개정을 WM 포메이션이 발전한 직접적인 자극으로 본다. 채프먼이 1925년 아스널로 옮긴 시점은 마침 오프사이드 규칙이 바뀐 때와 겹친다. 이 개정은 공격진과 센터하프의 재편을 촉진했다. 센터하프를 두 수비수 사이로 내려 수비를 보강하는 변화였다. WM의 공을 전부 채프먼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후대의 이야기는 여러 클럽과 여러 나라에 걸친 더 넓은 과정을 흔히 한 천재의 이야기로 줄여버린다. 조너선 윌슨의 『Inverting the Pyramid』를 대표로 하는 현대의 축구 전술사 개설서들은 지금의 표준 서사를 널리 알렸다. 1925년의 오프사이드 개정을, 세계적으로 통용되던 피라미드에서 WM 같은 새로운 수비 구조로 넘어가는 큰 경첩으로 보는 서사다. 규칙집에 직접 적힌 것과 뒤에 나온 전술적 해석은 결국 별개의 것이다. 다만 큰 방향은 분명하다. 규칙이 움직이면 경기 방식도 재배열을 강요받는다.

WM이라는 이름은 경기장에 선 선수들이 이루는 모양에서 나왔다. 원래 중원에 있던 센터하프를 두 수비수 사이로 내려, 상대 센터포워드를 전담해 막게 한다. 뒤쪽 다섯 명을 이으면 W처럼 보이고, 앞쪽 다섯 명을 이으면 M처럼 보인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옛 피라미드는 공격을 기본값으로 삼은 배치였지만, WM은 처음으로 ‘어떻게 상대를 막을 것인가’를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만큼 중요한 문제로 놓았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포메이션 안에 전용 자리 하나를 냈다. 축구사 최초의 대대적인 수비 혁명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때 일어난 까닭은 1925년의 오프사이드 개정이 공격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수비는 다시 조직되지 않으면 받아낼 수 없었다. 규칙이라는 얼굴이 움직이자 전술이라는 얼굴도 바뀌어야 했다. 두 얼굴은 따로 자기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구축의 몸에서 서로를 당기는 근육이다.

그러므로 1930년의 축구는 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피라미드는 여전히 기본 운영체제였다. 하지만 제 잔여항을 덮지 못하는 옛 체계는 1925년 개정에 떠밀려 이미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토대를 놓던 순간 자체가 얼어붙은 출발점이 아니었다. 변화를 강요받는 도중의 한순간이었다. 이후 축구 전술은 WM에서 카테나치오로, 토털 풋볼로, 티키타카로, 전방 압박으로 옮겨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같은 동작의 되풀이였다. 경기를 장악한 듯 보이는 체계가 자신이 덮을 수 없는 잔여항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음 체계를 불러냈다. 1930년은 이 동작을 처음으로 세계의 눈앞에 펼쳐 보인 때였을 뿐이다.

그 결승의 유명한 ‘두 개의 공’은 순전히 전설만은 아니다. 두 팀 모두 자기 공을 쓰겠다고 고집했고, 랑게누스 심판은 결국 전후반에 한 팀의 공씩 쓰게 했다. 실제로 있었던 것은 이 다툼과 하프타임의 공 교체다. 공을 바꾼 일이 우루과이 역전의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극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덧붙인 윤색이다. 그런데 최초의 월드컵 결승에서는 누구의 공을 쓸지조차 다투어야 했다. 다툼이 끝난 뒤에는 서로 절반씩 양보했다. 토대를 놓는 일은 처음부터 통일되고 닫힌 하나의 전체가 아니다. 소화되지 않은 온갖 이견을 잠시 한데 모아놓은 모습이다. 완성된 시작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힘겨루기 중인 잔여항들이 경기 하나에 간신히 묶여 있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의 파장은 라플라타강 양쪽에서 모두 거셌다. 우루과이는 결승 다음 날을 공휴일로 정했고, 축하는 밤을 새워 이어졌다. 쥘 리메의 축하 편지도 기록에 남았다. 편지는 1930년 몬테비데오를 우루과이의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우승에 분명하게 연결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패배 뒤 시민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이 대회는 그렇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의 오랜 적대 속에 깊이 박혔다. 환희든 소요든, 이런 반응은 대회 규정으로 설계할 수 있는 것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직자들은 대회의 틀을 하나 세웠다. 사람들이 그 안에 쏟아부은 것은 그 틀이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컸다.

8. 멈추려 하지만 멈출 수 없는 구축

세계 축구의 토대를 놓는 일은 한 번의 깎아내기였다. 이 부정은 다른 축구들을 배제함으로써 ‘축구’라는 구축을 세웠다. 그것은 화석 한 조각이지 진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화석이 완성된 첫날부터 수호자들은 그 모습을 고정하려 했다. 아마추어의 순수함을 지키고, 축구를 둘러싼 사회 질서를 지키며, 영국이 중심이라는 지위를 지키려 했다. 새로워야 할 국제기구마저 옛 수호자에게 고개를 숙였고, 옛 질서에 대한 양보를 제 제도 안에 적어 넣었다. 토대를 놓던 시기의 축구에는 규칙에서 조직에 이르기까지, 뒤를 돌아보며 현재의 모습을 모셔두려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 구축은 닫힐 수 없었다. 배제하려던 프로 선수를 배제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시간과 몸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유지하려던 유럽 중심의 구도도 지킬 수 없었다. 남미가 이미 올림픽 경기장에서 그 허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못 박으려던 규칙도 못 박을 수 없었다. 옛 규칙으로 덮을 수 없는 것들이 거듭 변화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바로 이 덮이지 않는 잔여항들이 월드컵 자체가 태어나도록 몰아붙였다. 열린 대회가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개방을 믿어서 그것을 만든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토대를 놓던 순간의 가장 큰 잔여항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라는 이름의 선수권대회에 세계의 대부분이 빠져 있었다. 수호자들이 문을 닫으려 할수록 문은 닫히지 않았다. 닫으려는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오히려 이 구축은 한 걸음 더 넓은 곳으로 밀려났다.

‘첫 월드컵’이라는 이름은 정확하지만, 사실 하나를 가리기도 한다. 1930년 대회는 분명 독립적으로 열린 최초의 FIFA 월드컵이었다. 하지만 축구 행정의 구상 안에서 1924년과 1928년의 올림픽 축구는 이미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이 모든 것을 위인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일도 믿을 만하지 않다. 쥘 리메가 중심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월드컵 창설에는 올림픽의 선례도, 아마추어를 둘러싼 국제올림픽위원회와의 힘겨루기도, 남미의 실력도, 개최국 경쟁에서의 외교적 조율도, 기꺼이 돈을 쓰겠다는 우루과이의 뜻도 필요했다. ‘한 위인이 세계 축구를 창시했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리메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제도와 지정학의 토대가 이미 거기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을 말끔한 한 점에 모아놓는 일은 거의 언제나 역사의 단순화다. 출발점으로 떠받들어지는 모든 순간의 뒤에는, 더 긴 부정의 사슬이 이어져 있다.

이 모든 구조 아래에는 더 조용한 것들도 있다. 축구 때문에 일을 빠지고 위험을 감수한 데 대한 보수를 요구하던 선수. 그가 바란 것은 어떤 취향의 소품이 아니라, 제 생계와 제 몸을 가진 사람으로 대우받는 일뿐이었다. 밤새 잠들지 않은 도시도 있다. 강 건너의 소요도, 한 경기의 승패를 더없이 무겁게 받아들인 군중도 있다. 이들은 모든 규칙과 조직, 대회 방식의 아래에 조용히 자리한다. 기록 안에 들어가는 일은 드물지만,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첫날부터 그대로 멈추려 했던 구축과, 첫날부터 멈출 수 없었던 그 운명에서. 이 이야기를 실제로 관통하는 것은 어느 한 팀도, 어느 한 위인도 아니다. 심지어 축구 자체만도 아니다. 그 법칙이다. 구축은 닫히려 하고, 잔여항은 사라지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축구는 이 법칙을 유난히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본일 뿐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토록 오랫동안, 이토록 깊이 몰입해 거듭 깎아내고 구축하게 하는 것은 달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1930년은 깔끔한 출발점이 아니다. 다리 위의 한순간이다.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 순환은 막 돌기 시작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중·영문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