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론 · 들어가며
그 쉰일곱 표는 어디로 갔을까
결의문에는 모두가 지지한다고 적혀 있지만, 기록에는 반대 쉰일곱 표가 남아 있다. 국가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까지 대신 정할 수는 없다.
결의문은 말끔했다. “인민은 집정원의 입장을 한마음으로 지지한다.” 그런데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표결 기록이 나온다. 찬성 238표, 반대 57표, 불참 5명.
가상의 나라가 만든 문서다. 이 나라를 목적연합도시국, 줄여서 UCSE라고 부르자. 서쪽의 목적민주공화국이 최후통첩을 보내, 30일 안에 서탄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연합도시국의 대외 집정관이 회답 문서에 서명했고,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집정원 회의가 승인했다. 통상 집정관은 기권했다. 회답에는 “UCSE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적혔다. 그날 밤 수석집정관은 텔레비전에 나와 인민 전체의 의지가 하나라고 말했다. 이튿날 의회는 그 말을 결의문에 넣었다.
작은 일이 아니다. 국경에서 전쟁이 날 수도 있다. 삼백 명이 각자 편지 한 통씩 보내서 대응할 수는 없다. 국가에는 협상할 사람과 서명할 사람, 대외적으로 효력을 갖는 결정이 분명히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결정했다’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로 가려면 한 걸음을 더 건너야 한다. 그 쉰일곱 표는 바로 그 걸음을 건너지 못한 자리에 남아 있다.
반대 57표가 결의를 무효로 만든 것은 아니다. 권한과 절차에 맞게 통과된 결의는 유효할 수 있고, 반대한 사람도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유효하다는 것과 모두가 같은 뜻이라는 것은 다르다. 반대한 쉰일곱 사람과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들, 불참한 다섯 사람이 마지막 줄에 도장이 찍혔다고 해서 찬성자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들의 의문도 표결이 끝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국가가 결정했다’, ‘국가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대개는 편하게 줄여 쓰는 표현이다. 문제는 그 표현을 실제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 생긴다. 국토 위에 거대한 사람 하나가 서 있고, 그에게 마음 하나와 의지 하나가 있어서,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구체적인 사람과 결정을 따져 묻는 말이, 그 거대한 존재를 모독하는 소리로 들리기 쉬워진다.
문서를 서명란까지 넘겨 보면 그 거대한 사람은 사라진다. 회답에 서명한 이는 대외 집정관이고, 승인한 곳은 아홉 명이 참여한 회의다. 연설한 이는 수석집정관이며, 표를 던진 이들은 의원들이다. 이름도 직위도 표수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들이다.
포스터 한 장이 그녀를 대신해 답할 수는 없다
비상사태가 선포된 뒤, 도시마다 “우리가 바로 UCSE다”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서탄의 한 주민은 라디오에서 자기 형제 둘이 국경을 가르는 강 건너에 산다고 말했다. 포스터에 적힌 ‘우리’가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연합도시국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강 건너편을 지지하는 것도 아닐 수 있다. 다만 당신들이 말하는 그 반듯하게 정리된 ‘우리’ 안에는 내 생활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지도 위에서는 선명한 색 하나로 갈리는 국경이, 그녀의 집에서는 두 형제가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일자리나 결혼, 지나온 시간,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함께 살려면 공동의 장치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각자의 내면까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은 누가 결정하고 결정이 어떻게 효력을 갖는지 정할 수 있다. 표현하고 관계를 맺고 떠날 여지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자기 나라로 받아들이는 일까지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첫 문장이 ‘우리 인민’이라고 해도, 그 말을 쓰고 승인한 사람들은 그때의 구체적인 사람들이다. 나중에 태어난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 문서에 다시 서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회답 때문에 감당해야 할 결과가 생겼는데, 국가에는 자기 마음이 없으니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연합도시국은 조약을 맺고, 소송의 상대가 되고, 배상이나 시정의 책임을 질 수 있다. 질문은 그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 어느 기관에 권한이 있었고, 어느 직위에서 서명했으며, 누가 찬성했고 누가 이의를 냈는가. 국가의 책임과 구체적인 직위, 구체적인 사람이 감당할 몫은 각각 밝혀야 한다. 서로를 가리는 데 써서는 안 되고, 제도 전체의 잘못을 손쉽게 한 사람에게 떠넘겨서도 안 된다.
어떤 이름에 책임을 물을 수 있으려면, 그 이름 뒤에 반드시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라는 주소를 남기는 것은 사람들이 찾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 주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숨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질문할 수 있는 사람도 자국 여권을 가진 사람만은 아니다. 어떤 행위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미치고, 떠나는 것으로도 그 영향을 피할 수 없다면, 그 행위에 관한 질문이 닿을 곳이 필요하다. 문 앞에서 받아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자국의 봉쇄 때문에 영향을 받는 이웃 나라의 환자도 구성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답하지 않아도 되는 상대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저절로 국적을 얻는 것도 아니고, 자국이 그 사람의 생활 전체를 관리할 권한을 얻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결과부터 국경 너머로 보내 놓고 질문만 국경 밖에 세워 둘 수는 없다는 뜻이다.
위가 없다고 해서 아래의 목소리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정부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주정부에, 그 위에 다시 가 보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올라갈 곳이 없어진다. 국내의 최고 규칙 위에 다른 국내 규칙이 없고, 마지막 심급 뒤에 더 높은 심급이 없다. 국경 밖에도 양쪽이 함께 호소할 강력한 재판자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곳에 이르면 질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처럼 위쪽으로 계속 올려 보낼 수 없게 될 뿐이다.
연합도시국의 이웃은 하나가 아니다. 북쪽에는 목적민족연합이 있다. 세 나라에 공동의 법원이나 의회, 군대는 없지만 조약은 있고, 협의와 중재도 한다. 바깥으로 난 길이 가짜인 것은 아니다. 나중에 윈허강의 물 배분 다툼은 중재를 거쳤고, 두 나라가 모두 판정에 따랐다. 위에 세계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국가 사이의 약속이 모두 빈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판정이 연합도시국에 사람을 풀어 주거나 선거를 치르거나 제한을 중단하라고 한다면, 마지막에는 그 나라 안의 어떤 자리에서 실행해야 한다. 질문받는 기관만이 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으면, 아무리 타당한 답도 종이에 머물 수 있다. 그래서 물어야 할 것은 최고 자리에 더 높은 사람이 있느냐가 아니다. 이 기관이 고치려 하지 않을 때, 그 기관 스스로는 닫을 수 없는 길을 통해 실제로 고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길을 끝없이 위로 뻗을 필요는 없다. 의회는 행정부에 묻고, 법원은 법률과 명령을 심사할 수 있다. 규칙을 만드는 쪽은 심사 규칙을 바꾸고, 법에 따라 법관의 직무상 잘못을 추궁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이의를 신청하고, 투표할 수 있다. 다만 한 길 한 길을 다시 살펴야 한다. 정말 독립되어 있는가. 영향을 받는 사람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가. 이용한 뒤 보복당하지 않는가. ‘감독’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해서 이 일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을 앞으로 영원히 다시 심사하자는 말도 아니다. 사건에는 끝이 필요하고 선거에는 결과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일은 결정되었다’와 ‘이 자리는 앞으로 다시는 질문받지 않는다’는 다른 말이다. 앞의 말은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한다. 뒤의 말은 나중에 올 모든 사람을 대신해 문을 닫으려 한다.
국가는 누구를 지키기 위해 있는가
이 가상의 이야기에서 수석집정관은 더 무거운 말도 했다. “UCSE의 존망 앞에서는 중단할 수 없는 것이 없다.” 힘 있게 들리는 말이자, 그 자리에서 질문을 잠시 멈추게 만들기 쉬운 말이다.
그런데 국가는 왜 지킬 가치가 있을까. 사람에게 안전이 필요하고, 언제든 빼앗겨도 되는 것이 아닌 생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동의 장치에 맡긴 일을 매일 다시 주먹으로 다투지 않아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존속은 그런 생활 때문에 중요하다. 거꾸로 국가라는 이름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의 안전을 끝없이 뒤로 미루고 질문을 영원히 중단할 수 있다면, 도구를 사람보다 위에 올려놓은 셈이다.
위험이 오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닥쳐오는 공격은 실제 문제이고, 대피나 지휘, 병력 이동을 빨리 결정해야 할 수도 있다. 남겨 두려는 것은 똑같이 실제적인 다른 질문이다. 누가 누구를 위해 결정했고, 피해는 누구에게 갔으며, 그 사람은 어디에 물을 수 있는가. 다급하면 먼저 행동한 뒤 미리 정한 기한 안에 재심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급하다는 이유로 이 질문들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들거나, 답할 때를 무한정 뒤로 보낼 수는 없다.
이어지는 일곱 편은 이 자리들을 따라간다. 누가 최고 규칙을 바꿀 수 있는지, 법원이 판단한 뒤 누가 집행하는지, 한 사람이 떠날 수 있는지, 군대의 대외적 힘이 안의 사람들에게 향하지 않도록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웃 나라와 의견이 다를 때 어떻게 답하는지, 강을 건넌 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살핀다. 이야기 속 세 나라는 어느 쪽도 모범 답안이 아니다. 국호의 ‘목적’이라는 말이 그 결정에서 정말 사람을 앞세웠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포스터 앞에 있던 그 주민의 마음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정해 주지 않는다. 그 나라를 자기 나라로 받아들여도 되고, 비판해도 되고, 아직 생각을 정하지 못해도 된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결의문이 아직 다 처리하지 못한 자투리가 아니다.
우선 그 쉰일곱 표를 종이에 남겨 두자. 국가가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모두가 같은 생각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은 끝내 같은 일이 아니다.
원논문과 읽기 안내
기존 중국어 교양 산문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문장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썼다. 바탕이 된 연구는 SAE 국가론의 여덟 논문이며, 각 글에서 해당 논문으로 이어진다. 사례 속 국가·지명·사건은 원논문이 설정한 허구다. 이 글은 철학적 요구와 제안하는 제도, 개별 상황에서의 판단을 구별하며 현행법을 설명하거나 현실의 특정 국가를 판정하지 않는다. 기술적 논증을 모두 옮긴 것도, 모든 사례의 결론을 내렸다는 뜻도 아니다. 개념의 엄밀한 정의와 상세한 한정, 정치철학과의 대화는 논문에 남겨 두고, 여기서는 결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따라 질문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