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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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 / 108 · 삶 뒤에 남는 작업

조설근, 정(情)

책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있어도 사람에게 마지막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빗속 영관에서 다리 위 만남까지 조설근의 정을 읽는다.

1. 끝나지 않은 책

우리는 흔히 『홍루몽』을 미완성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서로 다른 물음이 겹쳐 있다. 작가는 결말까지 썼는가. 마지막 수정까지 마쳤는가. 쓴 원고는 모두 전해졌는가. 하나의 답으로 다른 물음까지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조설근이 최종적으로 확정한 완전한 원고라고 인정할 수 있는 장편 전체가 없다. 초기 필사본에서 뒤의 120회 인쇄본에 이르는 길도 한 번도 끊기지 않은 물줄기는 아니다.

1791년, 정위원과 고악이 정리한 120회본이 간행되었다. 두 사람은 서문과 이듬해의 인언에서 원고를 모으고 맞추고 고친 과정을 설명했다. 그것은 편집자가 자신의 작업에 관해 남긴 진술이지, 뒤 40회의 모든 페이지에 저자를 확정해 주는 증명서는 아니다. 새로 쓴 부분, 편집한 부분, 옛 원고에서 온 부분이 각각 어디까지인가는 판본 연구에서 계속 다루는 문제다.

그런데 앞 80회만 읽어도, 우리는 이미 몇 마디 설명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난다.

제30회에서 한 소녀가 꽃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비녀로 땅에 같은 글자를 거듭 쓴다. 薔. 장미를 뜻하며,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가장(賈薔)의 이름에도 들어 있는 글자다. 소녀는 집안 극단의 배우 영관이다. 가씨 집안의 젊은 공자 보옥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근심이 저토록 마음을 끓이는지 헤아린다. 비가 온다. 그는 옷이 젖는다고 알려 준다. 그녀가 되묻고 나서야 자기 옷도 흠뻑 젖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위대한 업적은 아니다. 그 일로 집안이 구원되지도 않았고, 거대한 사명이 완수되지도 않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가 잠깐 자기의 젖은 옷을 잊었다.

대옥은 꽃을 묻는다. 청문은 부채를 찢는다. 상운은 취해 작약 꽃잎 위에서 잠든다. 원앙은 가사(賈赦)의 첩이 되라는 요구를 거절한다. 꽃을 묻는 사람은 ‘감상적이다’라는 말의 삽화가 아니며, 부채를 찢는 사람은 ‘제멋대로다’라는 판정의 각주가 아니다. 저마다 말이 있고 성미가 있고, 다른 사람으로 메울 수 없는 자리가 있다.

그러나 다정한 장면만 골라서는 안 된다. 같은 제30회에서 보옥은 자기 처소로 돌아온다. 문이 빨리 열리지 않자 화를 내고, 문을 열러 나온 습인을 발로 차 다치게 한다. 조금 전 낯선 소녀를 걱정하던 사람이 이제 곁의 사람을 해친다.

이 소설은 두 장면 사이를 잘라 그를 구해 주지 않는다.

인물들은 우리가 준비해 둔 설명 밖으로 자꾸 걸어 나온다. ‘정’이라는 좋은 말로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다정한 장면을 읽으면서도 그 발길질을 기억해야 한다.

책이 전해진 길에는 끊긴 곳이 있다.

한 사람을 두고 우리가 할 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미완성이다.

그런데 뒤 40회로 넘어가면 인물들이 결말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듯한 느낌이 든다. 보옥은 출가해야 하므로 출가한다. 대옥은 죽어야 하므로 죽는다. 보채는 결혼해야 하므로 결혼한다. 저자를 판정하는 증거가 아니라 내가 읽으며 느끼는 변화다. 결말이 사람을 끌고 가는 실이 더 잘 보인다.

그들이 목적일 자격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살아갈 수 있는 폭이 좁아진다.

이 글은 이번 악장의 마지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조설근까지. 마루에서 정까지.

2. 정방

지연재 계열의 비평에는 ‘정방(情榜)’이 언급된다. 인물들의 정을 평하는 일종의 명부다.

제19회 경진본의 협비에는 두 평어가 남아 있다. 보옥은 ‘정불정(情不情)’, 대옥은 ‘정정(情情)’. 그러나 모든 이름과 평어를 갖춘 원래의 정방이 우리 앞에 온전히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규모를 두고는 36명, 60명, 108명 등의 견해가 논의되어 왔다. 어느 숫자를 골랐다고 해서 조설근이 직접 확인한 총명부를 찾은 셈이 되지는 않는다.

정불정은 정으로 답할 수 없는 곳에도 마음을 건네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떨어진 꽃은 감사하지 못한다. 제비는 답례하지 않는다. 빗속에서 만난 낯선 사람도 꼭 같은 크기의 관심으로 갚아야 할 의무는 없다.

정정은 정을 지닌 이에게 깊이 응답하는 태도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대옥은 보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두 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를 짓고 농담을 한다. 남을 오해하기도 하고,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한다. 제45회에서 그녀는 남의 집에 의탁해 사는 어려움을 보채에게 털어놓는다. 보채는 그 말을 듣고 제비집을 보내겠다고 한다. 대옥이 다시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며 눈치를 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런 보채를 ‘차갑다’는 한마디에 담을 수는 없다. 그녀는 대옥이 꺼내기 어려워하는 말을 듣고 다음 부탁 앞에서 느낄 난처함까지 헤아린다.

규범에 익숙한 사람이 규범의 틈에서 다른 사람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 돌봄을 받는 사람도 돌보는 이를 새롭게 볼 수 있다. ‘차갑다’를 ‘따뜻하다’로 바꾸면 다 읽은 것이 아니다. 어느 쪽 두 글자도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보옥이라고 해서 정불정이라는 말로 검토를 면제받을 수는 없다.

제19회에서 그는 습인의 아름다운 친척도 자기 집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란다. 습인은 자신이 종으로 산다고 친척들까지 모두 종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그는 아직 배워야 한다.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이 남을 붙잡아 둘 권리는 아니라는 것을.

정은 사람을 가까이 가게도 하고, 더 세게 움켜쥐게도 한다.

정방이 쓸모가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을 칸에 못 박는 명부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 앞으로 돌아가 한 번 더 보게 해야 한다.

여기서는 백여덟 가지 정을 상상해 이 연작의 백여덟 삶과 마주 놓아 보려 한다. 찾아낸 원래 명부가 아니라 이 산문의 구상이다.

보옥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정이 끝없이 많아서만은 아니다. 남들이 더는 쓸모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는 아직 누군가를 본다.

대옥의 정에는 정확한 주소가 있다. 아무에게나 열리지 않고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열린다.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너에게. 그것은 좁음이 아니라 정확함이다.

사람을 목적으로 보는 법, 그렇게 보지 않는 법, 그러고 싶어도 못하는 법. 백여덟 가지 방식이다. 내게 정방은 사람 이름으로 쓴 『도덕형이상학 정초』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이름 옆의 한마디마저 넘쳐 나온다.

3. 그 사람

오히려 조설근 자신의 윤곽이 그가 쓴 많은 인물보다 흐릿하다.

할아버지 조인은 강녕직조를 맡아 남쪽을 순행하는 강희제를 네 차례 맞았다. 그 저택과 온 식구의 죽 한 끼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있을까. 그 사이를 건너는 기억을 우리가 모두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출생 연도에는 1715년설과 1724년설 등이 있다. 사망 연도도 흔히 1763년과 1764년 사이에서 논의된다. 그의 집안은 한때 강녕, 오늘날의 난징에서 황실에 직물을 공급하는 관직 및 사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뒤에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1728년 무렵의 몰락은 생애를 재구성할 때 중요한 시점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당시 그의 정확한 나이와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장면까지 채워 넣을 수는 없다.

소설은 족보를 한 장씩 복사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째서 어떤 집은 그토록 떠들썩했다가 갑자기 적막해지는가 하는 물음은 이 소설을 읽을 때 피할 수 없는 경험이다.

친구 돈성은 「조근포에게 주다」에서 잡초가 무성한 길과 온 식구가 죽으로 끼니를 잇고 술을 외상으로 얻는 형편을 적었다. 다른 시 「조설근을 그리며」에는 남은 술과 식은 음식을 내주면서도 은혜를 베푸는 체하는 얼굴을 보느니, 누런 잎이 있는 마을에서 책을 쓰는 편이 낫겠다는 말이 있다.

첫 시는 궁핍을 남긴다. 둘째 시의 ‘덕색(德色)’은 남은 음식을 먹는 조설근의 미덕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다. 조금 내준 것으로 생색내는 사람의 표정이다. 친구는 그런 집의 문을 계속 두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제1회는 조설근이 십 년 동안 읽고 다섯 차례 더하고 덜었다고 말한다. 그 문장은 돌, 도인, 필사와 제목의 변천이 여러 겹으로 얽힌 서술 안에 있다. 날짜별로 대조할 수 있는 근무시간표가 아니다.

그럼에도 고친다는 행위는 남는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 다시 본다.

보채를 쓸 때 보옥이 그녀를 어떻게 보는지만 써서는 안 된다. 습인을 쓸 때 그녀가 보옥을 어떻게 돌보는지만 써서는 안 된다. 한 집안의 몰락을 쓸 때도 모든 사람을 ‘몰락’이라는 한 단어의 증인으로만 세울 수는 없다.

가난이 그 선택들을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고통은 저절로 좋은 소설을 만들지 않으며, 좋은 소설이 나왔다고 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 되지도 않는다.

그는 잃어 가는 중에도 이 일을 했다.

4. 구조는 끝내 닫히지 않는다

그는 왜 끝까지 쓰지 못했을까.

아니, 왜 우리에게 그의 책 전체가 도착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것, 수정을 끝내지 못한 것, 다 쓴 원고를 잃은 것은 다르다. 지금의 단절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하지는 않는다. 조정이나 어느 문인 집단이 원고를 빼앗았다는 증거도 아니다.

하지만 고증서를 덮어도 다른 질문은 남는다.

사람이 목적인 소설은 끝날 수 있을까.

마지막 페이지는 쓸 수 있다. 그런데 그 페이지로 앞에서 살던 사람까지 닫아 버릴 수 있을까. 보옥은 떠나고, 대옥은 죽고, 정원은 흩어진다. 끝. 그러고는 돌아보며 말한다. 그 웃음은 울음을, 그 만남은 이별을 준비한 것이었다고.

백여덟 사람이 미리 마련된 결론에 도착하려고 그토록 오래 살았다면, 그들은 그 결론의 수단이 된다.

그러나 수단이 아니다. 목적이다.

꽃 사이에 잠든 상운은 집안 몰락의 복선을 수행하는 중이 아니다. 부채를 찢는 청문도 미래의 죽음을 더 슬프게 만들려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의 웃음과 성미가 이미 그 자체로 살고 있다.

소설은 끝날 수 있다. 결말이 사람을 다 써 버릴 수는 없다.

구조는 닫히지 않는다고 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끝’을 쓸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한 글자로 사람의 의미를 전부 가져갈 수 없다는 뜻이다.

결말이 가문의 재건만 보여 준다면 그 대가를 치른 사람을 떠올린다. 흰 벌판만 남긴다면 그 전에 그들이 어떻게 웃었는지 떠올린다.

구조는 깨졌다. 그래도 사람은 남는다. 사람은 구조를 위해 살지 않는다. 사람은 목적이다.

조설근의 잃어버린 원고를 찾아냈다는 말이 아니다. 읽다 보니 더 묻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게 된 자리다.

80회 끝에서 멈췄다가 다시 그들에게 돌아간다. 대옥은 다음에 무슨 말을 할까. 보채는 무엇을 말하지 않았을까. 원앙은 거절한 뒤 어떻게 살고 싶을까.

남는 것이 있다. 정은 살아 있다. 이백 년이 넘도록 독자들은 그다음 날들을 쓴다. 각자의 정이 다르므로 쓰는 이야기도 다르다.

백여덟 가지 정. 백여덟 가지 뒷이야기.

구조는 끝내 닫히지 않는다.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책 하나가 이 명제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설근이 쓴 사람들은 나를 거듭 그 앞에 데려다 놓는다.

5. 1750년대와 1785년

두 사람. 두 대륙.

동쪽에서 조설근이 『홍루몽』을 고친다. 대략 1750년대에서 1760년대. 식구들은 죽을 먹는다. 그는 다시 원고로 돌아간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칸트가 『도덕형이상학 정초』를 쓴다. 1785년에 출간된다. 규칙적인 생활로 알려진 사람이다.

한 사람은 궁핍 속에서 사람을 쓴다. 다른 사람은 책상에서 원칙을 쓴다. 하나는 종이 위에 사람들을 살게 하고,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묻는다.

칸트는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조설근의 책에는 정불정이 있다.

둘을 나란히 놓는다. 감정을 의무라고 부르거나 소설을 철학 논문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여기서 같은 질문을 만난다.

사람은 타인에게 주는 쓸모만으로 남아도 되는가.

한 사람은 독일어 개념으로, 다른 사람은 중국어 인물로 쓴다. 형이상학과 소설이다.

주고받은 편지도, 서로의 책을 읽은 기록도 없다. 누구도 상대의 책상으로 가서 당신의 책을 다른 방식으로 썼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읽는 나는 두 사람이 만난 것처럼 느낀다.

사람이 목적이라는 것은 누군가 수여하는 자격이 아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곳에서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칸트는 개념의 형태를 찾는다. 조설근의 사람들은 얼굴과 목소리와 성미를 준다.

두 책이 같은 책이라고 하는 것보다 그 만남이 더 마음에 남는다.

6. 대관원

대관원은 땅에서 저절로 솟아난 자유가 아니다.

황제의 비가 된 원춘의 친정 방문을 위해 조성된 뒤, 보옥과 자매들이 살며 시를 짓고 책을 읽는 곳이 되었다. 담 안의 시간은 담 밖과 담 안 모두의 수입, 노동, 시중과 위계로 유지된다.

꽃 아래서 누군가 잠들어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식사를 언제 가져가야 하는지 살핀다.

그러므로 대관원은 이미 실현된 목적의 왕국이 아니다. 주인과 하녀의 구분은 계속 존재하며, 어른들의 명령도 정원 문 앞에서 효력을 잃지 않는다. 가장 사랑스러운 모임조차 떠나고 싶은 사람을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는 바람 속에 붙잡아 넣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모임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자유롭지 못한 삶 속에서도 사람은 쓸모에 완전히 점령되지 않은 한때를 보낼 수 있다. 시 모임이 위계를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가 집안의 명성을 높이는 데만 쓰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의 병문안도 정해진 인사를 치르는 일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정원이 소중한 까닭은 그런 순간들에 있다. 정원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도 늘 그 곁에 있다.

수색 뒤 청문은 쫓겨난다. 영춘은 결혼으로 자신이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또 다른 처지에 들어간다. 제80회에는 이미 친정에 돌아와 남편의 학대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뒤의 죽음 장면을 빌려 와야만 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쫓겨난 사람이 목적이었다가 물건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원래 받아야 할 인정과 보호가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정원에 만가를 바치는 데서 멈출 수 없다. 열쇠를 가진 이는 누구인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는 누구인가. 더는 사랑받지 않으면 머물 자격마저 잃는 이는 누구인가.

정이 있는 곳에도 자신을 제한하는 원칙이 필요하다.

잔 다르크는 가면을 태우고, 와일드는 위선을 파고든다. 조설근은 다른 일을 한다. 정원을 짓는다. 사람들이 그 안에서 80회 동안 살게 하고, 동시에 무엇이 그들을 흩어 놓는지 보여 준다.

정원이 흩어진 뒤 우는 것은 줄거리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목적인데 희생해도 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운다.

7. 그와 모든 사람

조설근에게 오면 앞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루를 깔고, 패러데이는 들어 올리고, 맥스웰은 그 위에 방정식을 쓴다. 여기서는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잔은 타오르고, 와일드는 그 말을 하고, 라마누잔은 꿈에서 수학을 하고, 오펜하이머는 재를 진다. 여기서는 자기 삶을 건다.

톨스토이는 처방하고, 디킨스는 따뜻한 집을 짓고, 처칠은 목소리를, 루스벨트는 제도를 찾는다. 여기서는 사회를 향한다.

조설근은 누구를 향하는가.

사람이다. 한 사람씩. 보옥, 대옥, 청문, 원앙. 백여덟 사람의 행렬에서 저마다 목적이다.

마루를 깔거나 들어 올리지 않는다. 처방전을 쓰지도 않는다. 사람을 보고, 본 것을 쓴다.

정방은 더는 보지 않아도 되게 하는 이론이 아니다. 백여덟 번 바라보는 일이다.

샬럿을 읽으면 내가 보이느냐는 물음이 들린다. 제인 에어는 자신을 봐 달라고 한다. 반 고흐도 그토록 원했지만 살아 있을 때의 응답은 사후보다 훨씬 적었다. 여기서 조설근은 시선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 사람씩 바라본다. 각자의 정에 한마디를 찾다가, 쓰는 동안 한마디로는 부족함을 안다.

8. 1763년 또는 1764년

그가 떠난 해조차 논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갑술본 제1회의 한 미비는 임오년 섣달그믐에 책이 끝나지 않은 채 설근이 눈물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적는다. 우선 이것은 비평자의 애도이지 조설근의 유언이 아니다. 임오년의 마지막 날은 서력으로 1763년에 들어간다. 다른 널리 쓰이는 생애 재구성은 사망을 1764년에 놓는다. 둘을 섞어 겉으로만 정밀한 날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가 마지막으로 붓을 내려놓을 때 마음속에 다음 문장이 있었는지 모른다.

모르므로 그 문장을 거기서 멈춘다.

안타까움은 안타까움으로 남아도 된다.

그럼에도 남은 책 안에서는 여러 삶이 계속 일어난다. 누군가 그 비 오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영관의 비녀가 다시 땅 위를 움직인다. 보채의 병문안을 읽을 때마다 대옥에게는 자기 생각을 바꿀 기회가 한 번 더 생긴다.

앞선 글에서 캐서린이 남긴 편지도 이미 정해진 듯한 이야기를 다시 열었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는 모든 이야기를 남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

지금의 우리는 이어 쓸 수 있고 논쟁할 수 있으며 다른 결말을 제시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자신의 필적을 남겨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상상이지 방금 되찾은 조설근의 원고가 아니라고.

원고가 없다는 것이 아무 제약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원고가 있다는 것도 더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죽음과 원고의 흩어짐은 다정한 연출이 아니다. 조설근은 ‘나머지는 너희가 써라’라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페이지 끝에서는 누군가 돌아보는 듯하다. 이 사람들이 우리 삶에 들어왔다. 종이가 끝났다고 그들을 마음에 두는 일까지 끝낼 수는 없다.

잃어버린 것이 독자의 손에 와서는 초대가 되기도 한다.

보옥의, 대옥의, 청문의 다음 날을 생각해 보라. 독자마다 정이 다르므로 그려 보는 날들도 다르다.

이백 년이 넘었다. 아직 쓴다. 아직도.

9. 정

이 악장의 다리에 다시 불을 밝히자. 여기부터는 문학적 상상이다.

이번 악장의 마지막 사람이 온다.

여기의 누구와도 다르다. 잔은 불을, 와일드는 말을, 샬럿은 펜을, 오펜하이머는 재를 가져왔다. 반 고흐는 물감투성이다.

조설근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두 손이 비었다.

가져온 것은 뒤에 있다. 백여덟 가지 정이 따라온다.

정마다 한 사람의 모습이 있다.

맨 앞의 보옥은 빈손으로 모두를 본다. 정불정. 대옥은 주운 꽃을 들었다. 정정. 보채는 차분한 얼굴로 단단히 걷는다. 얼굴에 쓰이지 않은 마음도 있다. 상운은 크게 웃는다. 탐춘은 서두르고, 석춘은 걸으며 그린다. 영춘은 상처를 감추려고 고개를 숙인다. 묘옥은 멀리서 본다. 청문이 찢은 것은 부채일지 모른다. 습인은 보옥 가까이, 자견은 대옥에게 더 가까이 간다. 원앙은 혼자 걷는다. 평아는 모두의 물건을 정리한다.

백여덟 가지 정이 천천히 다리에 오른다.

빈터의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씩 말을 걸고 싶다. 어떤 덕을 나타내는지 묻기 전에, 이름이 무엇인지. 백여덟 개의 구체적인 삶이다.

플라톤은 도면에서 고개를 든다. 분류해 그리려 하지만 사람마다 칸을 넘는다.

흄은 백개먼을 멈춘다. 다른 한 사람에게 온 삶을 건 대옥. 인과를 생각하지만 풀리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고개 숙인 영춘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 고통을 알아본다.

키르케고르는 여러 번 뛰었다. 선택을 거부하지만 끝내 선택해야 하는 보옥이 익숙하다.

튜링은 사과를 보고 멀리 묘옥을 본다. 어울리지 못함. 다리에 오르지 않음. 이해한다.

난간의 체호프는 웃는다. 그의 소설에도 한마디로 담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조설근과 그 사이에는 번역이 필요 없다.

칸토어가 고개를 든다. 백여덟은 유한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사람마다 무한으로 열린다. 백여덟 개의 무한.

처방전을 든 톨스토이는 세계 하나를 쓴 동료를 알아본다. 하지만 조설근에게는 처방전이 없다. 사람만 있다.

셰익스피어는 없다. 다리 아래 물이다. 오는 이를 알아보고 물소리가 달라진다. 햄릿, 리어, 오셀로. 그도 많은 삶을 썼다. 운명을 마주한 외로운 햄릿의 모습이 물에서 떠오른다. 조설근 뒤의 사람들은 서로 얽혀 있다. 그들의 정은 운명보다 다른 한 사람을 향한다.

스피노자의 손에는 유리 가루가 있다. 정방을 보며 『에티카』의 기하학적 감정 배열을 떠올린다. 이 명부는 덜 가지런하다. 뜨겁고 차갑고, 울게 하고 웃게 한다. 살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천 년 동안 마루를 깔았다. 분류, 정의, 유와 종차. 사람들이 틈에서 나온다. 덮어 버릴 수 없다. 저마다 분류 밖에 남는 것이 있다.

패러데이가 마룻장을 들자 보옥이 나온다. 남들이 깔아 놓은 바닥 아래를 보는 사람임을 알아본다.

맥스웰은 펜을 든다. 네 방정식은 전기와 자기를 잇는다. 백여덟 가지 정을 하나로 묶는 방정식은 쓰지 않는다.

잔은 청문을 본다. 또 하나의 거센 불. 품은 사람 자신에게도 닿는 불이다.

와일드는 보옥에게 웃는다. 그도 세상 규칙대로만 살지 않는다. ‘그 말’을 한 적은 없지만 사는 방식이 그 말을 한다.

라마누잔은 틈에서 반쯤 나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도 놀라지 않는다. 열린 곳에는 별것이 다 있다.

오펜하이머는 재를 지고 간다. 조설근도 집과 정원의 무너진 뒤를 안다. 그것을 썼다. 책 속에서 재는 사람이 되었다.

샬럿과 대옥의 눈이 만난다. 봐 달라는 두 요구다. 내가 제인 에어에서 듣는 물음을 대옥은 온몸으로 묻는다.

에밀리는 다리 밖 황야에 남는다. 묘옥도 밖에 있다. 바람이 둘을 잇는다.

볼츠만은 글자가 새겨진 돌을 안고 있다. 백여덟 사람은 제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는 한 줄로 세우지 않는다. 방정식은 돌에 남고, 그는 북적임을 보며 웃는다.

반 고흐는 백여덟 색을 본다. 그리기 시작한다.

디킨스는 많은 사람을 쓴 동료를 알아본다. 올리버, 데이비드 코퍼필드, 어린 팀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선의를 얻어 주려 얼마나 서둘렀던가. 조설근은 먼저 청문의 말을 듣게 한다. 청문은 덕을 증명하지 않는다. 화가 났다. 살아 있다.

처칠은 연설문을 들고, 루스벨트는 앉아 있다. 슈뢰딩거 옆의 상자는 열렸고 고양이는 나왔다. 파인먼은 북을 친다. 호킹은 난다.

하이젠베르크가 다시 본다. 누군가 다음 말을 하자 앞선 판단이 벌써 부족하다. 이번에는 공식을 쓰지 않는다.

보어는 보내지 않은 편지를 든다. 서로 보태는 시선을 생각한다. 보옥과 대옥, 청문과 습인, 탐춘과 석춘. 한쪽에서만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다리가 가득 찼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과 소설에서 걸어 나온 백여덟 사람.

조설근은 그 가운데 빈손으로 말없이 본다. 소크라테스, 잔, 볼츠만, 반 고흐. 저마다 목적이다.

그리고 다리 저편으로 몸을 돌린다.

멀리 칸트가 서 있다.

조설근을 본다. 이번에는 움직임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선배로서 고개를 끄덕였고, 흄에게는 깨워 주어 고맙다고 했다. 스스로 먹기 힘든 처방전을 든 톨스토이 앞에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잔 앞에서는 침묵했다. 다른 이를 자라게 하려 치른 대가.

조설근에게는 마중을 나온다.

그동안 다리의 다른 끝처럼 기다렸다. 이번에는 한 걸음 내딛는다.

빈손에 든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 아무것도 없음에 평생의 질문이 있다. 사람은 목적이다.

칸트는 정언명령과 목적의 왕국으로 묻는다. 조설근은 백여덟 사람으로 쓴다. 정방이다.

한 사람은 쓸모만으로 남지 않는다.

1785년, 쾨니히스베르크, 『정초』. 대략 1750년대, 동쪽, 『석두기』.

몇십 년, 몇천 킬로미터. 오간 편지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 다른 길로 왔다.

누구도 상대의 길을 대신 걷지 않았다. 어느 책도 다른 책을 자기 안에 다 넣을 수 없다.

사람은 목적이다. 칸트는 개념의 형태를 찾고, 조설근은 사람의 형태를 준다.

칸트가 한 걸음 더 간다. 한 걸음만.

조설근도 천천히 간다. 백여덟 사람이 뒤따른다.

둘은 가까워진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사이에서 다리가 끊겼다.

무너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다 이어지지 않았다. 이 연작의 시작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마루와 칸트의 자리 사이에는 틈이 있었다. 모두 여기까지 왔다. 누구도 메우지 못했다.

이 우화에서 그 틈은 남는 것이며, 구조가 닫히지 않는 자리이며, 80회 다음에 열린 곳이다.

칸트는 안다. 조설근도 안다.

거기 무엇이 자라는가.

정.

두 사람 사이에, 마룻장 사이에, 80회 너머에 자란다. 잔의 불과 와일드의 말 다음에. 반 고흐의 물감이 떨어진 곳에. 샬럿이 부른 독자의 마음에. 호킹이 날아오른 몸 아래의 빈 곳에.

정은 다리가 아니다. 다리가 끝내 이어지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것이다.

한쪽에 조설근, 저편에 칸트. 조설근 뒤에는 백여덟 사람. 다리 위에는 여기까지 온 모두가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때 조설근이 독자 쪽으로 돌아선다.

당신을 본다.

보옥, 대옥, 청문, 원앙, 백여덟 사람 하나하나를 보던 바로 그 눈으로.

그 눈은 말한다. 당신도 목적이다.

틈은 남아 있다. 다리는 다 이어지지 않았다. 책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당신이.

읽기 안내와 출처

장면은 아래 전사본을 따른다. 19회는 정방 평어와 습인의 반문, 30회는 빗속 장면과 발길질, 45회는 보채의 병문안이며 정원과 혼인 관련 장도 참고했다. 남은 정방 언급은 완전한 명단이 아니다. ‘냉정’은 확인된 원래 평어로 취급하지 않는다.

정고본 서문은 편집자들의 설명이지 뒤 40회 저자를 확정하는 증거는 아니다. 생몰년과 원고 전승에는 논쟁이 남는다. 임오년 섣달그믐의 애도는 평자의 말이며 양력 1763년 초에 해당한다. 별도로 1764년 사망설도 있다. 시와 소설 첫 회는 일별 집필 기록이 아니다.

칸트의 목적 정식은 『도덕형이상학 정초』 4:429를 따른다.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설근과의 병독은 해석이며 영향이나 이론적 동일성의 증명이 아니다. 9절은 문학적 상상이지 잃어버린 원고의 복원이 아니다.

서문과 인언의 현대 전사 · 제30회 · 제31회 · 제62회 · 제46회 · 제19회 · 「『홍루몽』의 ‘큰 뜻은 정을 말함’에 관하여」 · 제45회 · EBSCO의 조설근 개요 · 「都云作者痴 试解其中味」 · 2014년 5월 6일 글 · 현대 온라인 전사 · 조설근기념관 소개 · 현대 전사 · 제5회 · T. K. Abbott의 공공영역 영어 번역 해당 대목 · 제23회 · 제77회 · 80회

중문·영문 원작을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에게 맞게 독립적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사료와 상세 주석은 중문·영문 원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