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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지를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이다. 원문 페이지에서는 간체와 번체를 전환할 수 있으며, 설정과 시간 순서, 지나치게 강한 일부 표현을 소폭 교정했다.
샤를은 신을 죽이려 한다.
비유가 아니다. 하려는 일은 아주 구체적이다. 인류 전체의 의식을 하나로 융합해,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 아무것도 감출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는 이것을 라그나로크의 접속이라 불렀다. 수십 년 동안 준비했다.
첫 번째 계획: 거짓말이 없는 세계
먼저 이 계획이 어디서 자라났는지 보자.
샤를과 V.V.(브이츠)는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곳에서 자랐다. 궁정에서는 어머니가 남의 아이를 죽이고, 형제끼리 서로 독을 먹였다. 모든 말 뒤에는 또 다른 말이 숨어 있었다. 두 아이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맹세했다. 가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폭군의 계획이 아니다. 상처받은 두 아이의 계획이다.
마리안느도 이 계획에 참여했다. 마리안느가 내놓은 이유는 반박하기가 더 어려웠다. 거짓말이 없는 세상이어야 나나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어떻게 실현할지는 접어 두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계획이 무엇을 없애느냐다.
겉으로는 거짓말을 없앤다. 실제로 없애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모든 의식이 하나로 합쳐지면 속일 상대가 사라진다. 갈등이 멎는 까닭은 모두가 화해해서가 아니다. 갈등하던 양쪽이 더는 두 편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이 없는 세상에는 확실히 상처도 없다. 다른 어떤 것도 없다.
를르슈는 아카샤의 검 앞에서 이 계획을 거부한다. 50화 전체를 통틀어 그가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정면으로 밝힌 유일한 순간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내일이었다.
이 세계에는 계속 앞으로 흐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은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지키려는 것들에는 거짓말도, 가면도, 보기 좋지 않은 그 모든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은 같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감추고, 자신을 꾸미고,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아직 바깥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분 덕분에, 사람은 아직 지금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가면을 모조리 벗겨 버리면 사람은 굳어 버린다. 영원히. 샤를이 만들려는 것은 투명한 세상이 아니라 멈춰 버린 세상이다.
두 번째 계획: 영원한 공포
슈나이젤의 계획은 완전히 다르다. 훨씬 현실적이기도 하다.
다모클레스는 공중에 뜨는 요새다. 그 안에는 단 몇 초 만에 도시 하나를 지워 버릴 수 있는 무기, 프레이야가 가득 실려 있다. 계획은 이렇다. 요새를 세상 머리 위에 띄워 놓고, 먼저 싸움을 거는 자를 없애 버린다.
이 계획은 성공한다.
바로 그 점이 가장 괴롭다. 미치광이의 공상이 아니다. 국제관계론 교과서라면 어디서든 대응하는 항목을 찾을 수 있는 이론이다. 충분히 믿을 만한 파괴의 위협으로 평화를 얻는다. 인류는 실제로 그렇게 해 왔으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대가는 모두가 칼날 아래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공포는 실제로 전쟁을 멈출 수 있다. 모두에게서 거부할 여지를 없애는 방식으로 전쟁을 멈춘다.
첫 번째 글에서 기아스가 무엇을 빼앗는지 이야기했다. 슈나이젤의 계획도 같은 일을 한다. 초자연적인 힘도, 눈을 마주치는 일도 필요 없을 뿐이다. ‘싫다’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인류 전체를 집어넣고, 그 상황을 영구화한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슈나이젤이 정말 무서운 까닭은 계획에 있지 않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황위도 원하지 않는다. 돈을 탐하지 않고, 색을 밝히지도 않으며, 명예에도 관심이 없고, 사랑받을 필요도 없다. 세계 전체의 통제권을 나나리에게 넘겨줄 때도 태연하다. 물러나는 척하며 더 큰 것을 얻으려는 권모술수가 아니다. 누가 그 자리에 앉는지 정말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문제를 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폭군에게는 대개 욕망이 필요하다. 쾌락을 누리고 싶고, 숭배받고 싶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욕망은 오히려 남들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 준다. 사랑받고 싶은 지배자에게는 살아서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름을 남기려는 사람에게는 기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필요 자체가 그를 제한한다.
슈나이젤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다. 자기 자신도 그 방정식 안에 없기 때문이다.
양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이 없다. 자기마저 최적화 과정에서 없애도 되는 변수로 취급한다. 언제든 자리를 넘기고, 언제든 퇴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자기 자신까지 계산에 넣는 사람이라면, 남을 계산에 넣는 일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장 철저한 도구화는 남을 너무 가볍게 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자신까지 똑같이 가볍게 보는 데서 나온다.
결말에서 를르슈는 그에게 기아스를 걸어, 평생 제로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명령한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무거운 응보처럼 보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애초에 자아가 없는 사람에게 남의 의지를 심어 주어 봐야 거의 벌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분명한 목적함수가 생겼다. 직접 찾아야 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오히려 전보다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세 번째 계획
를르슈의 계획은 마지막 글에서 다룬다. 여기서는 일단 함께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제로 레퀴엠. 한 사람을 온 세계가 함께 미워하는 대상으로 만든 다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인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전 세계의 화해를 얻는다.
이제 세 가지 계획이 모두 나왔다.
세 계획은 같은 모양이다
샤를은 개별 인간을 없애려 한다. 슈나이젤은 거부를 없애려 한다. 를르슈는 한 사람을 없애려 한다.
규모도 수단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나란히 놓고 옆에서 들여다보면, 모두 같은 동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먼저 다른 무언가로 바꿔 놓아야 계산을 시작할 수 있다.
샤를은 사람을 의식의 조각으로 바꾼다. 조각은 합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슈나이젤은 사람을 위협으로 제압할 대상으로 바꾼다. 대상은 위협으로 억누를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를르슈는 사람을 증오의 그릇으로 바꾼다. 그릇은 가득 채운 뒤 깨뜨릴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이 환산이 끝나고 나면, 세 계획은 각자의 논리 안에서 빈틈이 없다.
모든 잘못은 환산하는 그 단계에서 벌어진다. 세 계획 모두 그 단계를 너무도 빠르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그 자리에서 멈추어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작품을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 놓고 미워할 사람을 주지 않는다.
샤를은 상처받은 아이였다. 마리안느는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슈나이젤에게는 사심조차 없다. 를르슈는 여동생을 구하려 한다. 네 사람 모두 동기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될 만큼 깨끗하다.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정치를 상상하려면 악인이 필요하다. 탐욕스러운 누군가, 잔혹한 누군가, 권력 자체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 악인을 빼낸다고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보기가 더 어려워진다.
동기가 모두 깨끗해지면 동기를 캐묻는 것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계획 자체를 보아야 한다. 그 환산이 어느 단계에서 일어나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가 반대한 것과 그가 한 일
아카샤의 검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그 자리에서 를르슈가 한 말은 이 작품의 입장이다. 사람은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세계를 원하기에, 보기 좋지 않은 것들까지 지키려 한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할 가치가 있는 까닭은 지금 어떤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아직 굳어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끝났다면 작품의 입장은 명료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말을 마친 를르슈가 돌아서서 자기 계획을 실행했다는 데 있다.
그의 계획 역시 한 차례의 환산에서 출발했다.
다음 글
덧붙여 한 가지.
슈나이젤은 결국 다모클레스로 를르슈를 꺾지는 못했다. 그가 한 번 이겼을 때 사용한 것은 훨씬 값싼 무언가였다.
흑의 기사단에게 사실 하나를 알려 주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는 그 일을 다룬다. 그리고 왜 기사단의 배신이 이 작품에서 가장 오해받는 대목인지 이야기한다.
이 연작은 TV 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 R1·R2, 총 50화를 대상으로 한다. 총집편 극장판 3부작과 그 뒤의 극장판, 파생 작품은 다루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