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읽기
Non Dubito

SAE 웃음론 · 독립 특론

미처 보지 못한 것

빈소를 지키던 밤, 장남은 아버지가 마지막 반년 동안 동생의 결혼을 자주 물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미처 보지 못했다. 그 미완은 아버지의 것이고 아픔은 장남 자신의 아픔이다. 웃음은 판단이 직접 느껴지는 일이다. 15DD의 의심하지 않는 울음은 먼저 정을 거친다. 정 안에 판단이 있으며, 인정도 그 안에 있다.

Han Qin ·

용어 안내: 이 연작은 이 사이트에 고정해 둔 13–16DD 정의를 따릅니다. 한 번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일은 두 주체가 각각 행하는 15DD의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16DD는 모든 일에서 완전한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이 이루어지는 경우만 가리키며, 유한한 개인이 마주하는 이상적 한계입니다. 연결된 논문이 개별 순간의 상호 인정을 16DD로 기록한 곳은 이 에세이판에서 이 구분에 맞추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울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인정했다고 판정하지도 않습니다.

빈소를 지키던 밤

아버지는 이 년을 앓다가 가을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빈소를 지키던 밤 장남은 몇 번 울었다. 뒤에 그때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대강 말할 수 있었다. 한번은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었다. 또 한번은 조문객이 차례로 절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은 끝내 죽는구나 싶었다. 동생이 들어올 때도 울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반년에도 동생이 가정을 꾸릴 일을 자주 물었다. 미처 보지 못했다.

웃음론의 별도 논고 『판단력과 울음』이 만든 장면으로, 실존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무엇을 울었을까. 자기 상실일까, 아버지의 아픔이 옮겨 온 것일까, 다른 무엇일까. 그 밤의 울음이 같은 종류일 필요는 없으며, 논문의 대답도 그중 하나에만 성립한다.

앞의 논문들은 웃음을 보았다. 총론은 이웃한 두 반응을 이렇게 썼다. 울음과 두려움은 틀에 초점을 맞춘다. 울음은 틀을 잃어 없어진 것이고, 두려움은 위협받아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웃음은 여항에 향한다. 별도 논고는 이 문장에서 돌아서 울음을 보며, 15DD에 무게를 둔다.

다루는 것은 이런 울음이다. 상대가 어느 틀 안에서 상실을 겪었다. 나는 그 상실은 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목적으로 인정하며 나의 것으로 편입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파하되 아픔은 내 아픔이다. 울음은 그 정(情), 곧 그의 상실을 아파하는 감정을 거친 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순간으로 온다. 이를 의심하지 않는 울음이라 부른다. 아파서, 헤어질까 두려워서, 자기 상실 때문에 우는 것도 진짜 울음이다.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논의 밖일 뿐이다. 장남을 나로, 아버지를 그로 놓으면 묻는 것은 세 번째다.

이미 잃기 시작했다

두 말을 되돌리자. 틀은 작동하는 파악 방식으로, 기대, 정의, 예절, 상황 이해 등이다. 울음에서는 계획, 함께하는 생활, 믿음이 흔하다. 여항은 그 틀이 다 담지 못했으나 눈앞에 있는 점이다. 웃음은 여항에, 울음과 두려움은 틀에 향한다. 뒤의 둘은 시제로 나눈다.

두려움은 예측에 놓여 상실이 앞에 있다. 울음은 구조에 놓여 틀 안에서 이미 잃기 시작했다. 경계를 쓰려면 어느 틀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진단받은 날 울 때 이미 잃은 것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일 수 있다. 그러나 미래 때문에 우는 일을 모두 그렇게 바꾸면 반증할 길이 없다. 논문은 독립 표지를 둔다. 이후의 말과 행동이 은퇴하면 함께 하기로 했었는데 같은 이미 사라진 것에 향하는가, 얼마나 남았나 아플까 같은 앞으로 올지 모르는 것에 향하는가. 말은 틀릴 수 있는 단서로, 울었는지에서 역산하지 않는다. 여러 주의가 섞여 나뉘지 않으면 확인도 반증도 아니다.

분류는 지금 이미 시작되었다고 판단된 그 상실에 따른다. 사실인지 여부는 따로 본다. 실제로 잃었어야 한다고 정하면 오판의 울음을 입구에서 쫓아내기 때문이다. 가족이 위중하면 떠날까 두려워할 수도, 이미 잃은 건강과 계획과 예전 일상을 울 수도 있다. 두 몫을 따로 적고 매번 시제를 확인한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갑자기 보면 모두 놀라며 측은해한다고 했다. 아직 빠지지는 않았다. 주희는 '怵惕'을 놀라 움직이는 모습으로, '惻'과 '隱'을 각각 간절한 아픔과 깊은 고통으로 풀이한다. 뒤는 놀람이 아닌 상실 이전의 아픔으로 경계를 압박한다. 논문은 어느 칸에 억지로 넣지 않고 마지막의 여항으로 남겨 뒤의 논의에 맡긴다.

무엇을 잃는가. 예시는 공동생활의 지속 불가, 행동할 길의 실현 가능성 상실, 믿음의 근거 철회, 세 가지다. 틀이 눈앞에 있다는 것은 지금 기억하고 돌아볼 수 있다는 뜻이지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죽어도 그와 관련한 틀은 돌아볼 수 있고 애도는 거기에 향한다. 또 상대의 틀이 고장 났다고 하지 않고 그 안에서 그가 무언가 잃었다고 한다. 사람을 억누르는 구조가 원활하게 돌아가면서 사람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세 번째 글에서도 긴장하다 합격을 보는 순간을 다뤘다. 두 초점을 나눴는데 여기에 두 개를 더한다. 쓴웃음은 세 번째 글 4절에서, 기쁨의 눈물은 그 글 4.1을 이번 논고가 확장한 데서 온다. 네 경우 모두 본인의 14DD다. 이미 됨이라는 여항에 가면 득의로 웃고, 아까 안 될 뻔함에 멈추면 뒤늦은 두려움이다. 여러 해의 대가를 목적이 다 담지 못한 여항으로 보면 머리가 다 셌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같은 대가를 틀 안에서 자기가 잃은 것으로 보면 기뻐 운다.

뒤의 둘은 같은 대가의 다른 해석이다. 여항이면 쓴웃음이고 틀 속 상실이면 울음이다. 대가가 아니라 주의의 초점이 나눈다. 그 몇 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과,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이야 하는 말에 차이가 있곤 한다. 다만 틀릴 수 있는 단서이지 서로 배타적인 암호가 아니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다 놓칠 줄 몰랐다는 말에는 둘 다 있다. 이번 판단이 무엇이었는지 물어야 하며 안 나뉘면 세지 않는다. 기쁨의 눈물에 하마터면 잃을 뻔했다는 전제를 보탤 필요도 없다. 보태면 뒤늦은 두려움이 된다. 울음은 실제로 치러 돌아오지 않을 것에 향한다.

남의 기쁨에 울면 대가의 주인이 바뀐다.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다. 자리는 따로 살핀다. 그의 상실을 보고 인정하며 편입하지 않아야 15DD다. 쉽게 오지 않았다는 것과 상실은 다르다. 시간과 힘이 든 것, 그 때문에 원래 가능하던 것을 잃거나 놓은 것, 우는 사람이 바로 그것을 판단한 것은 별개다. 한 사람은 오랫동안 공부하던 시절을 돌아보며, 그것이 자신이 원하던 삶이었고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로 이번에 돌아오지 않는 몇 년, 놓친 아이의 어린 시절, 내려놓은 길 같은 상실을 본 경우로 한정한다. 그동안 힘들어 아이가 자랄 때 함께하지도 못했다는 말이 한 단서다.

공식도 넓히지 않는다. 그 상실은 그의 것이라는 그대로다. 쉽게 얻지 못한 것은 그의 것까지 들이면 기쁨이 판단 내용에 들어가 울음은 틀 속 상실에 향한다는 주장의 난간이 사라진다. 검증 가능하게 하자. 주의는 틀에 있는데 지금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 상실은 아무것도 없고, 당사자가 내적 울음을 보고한다면 주장을 좁혀야 한다. 낯선 이의 선의에 눈물 나 대가가 보이지 않는 경우, 플레스너가 든 숭고와 아름다움과 아이의 순수 앞의 눈물은 압력 사례다. 울었다고 전제를 보태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울며 여항에 향했다면 울음은 틀에 향한다는 더 넓은 주장에 압력이 된다. 사람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발견도 자동으로 웃음은 아니다.

중심이 여전히 나일 때

대상은 15DD의 의심하지 않는 울음뿐이다. 다른 층도 구조를 적되 중요하지 않다거나 판단이 없다고 하지 않고,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고 쓴다. 아픔, 배고픔, 생리적 눈물은 하한에서 간지럼 접촉 뒤 웃음과 같은 편이다. 분리불안 같은 예측의 울음은 경향이다. 남의 울음을 듣고 우는 신생아는 낮은 경계 자료일 뿐, 타인의 상실을 표상했다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울음과 자기목적의 울음은 내 상실이다. 자기연민, 불합격, 실직, 성공까지 실제로 잃은 것을 보고 흘리는 기쁨의 눈물 등이 있다. 힘들기만 했고 상실을 못 본다면 압력 사례다. 판단력과 관계가 약할 수는 있어도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상실이라는 다른 경로도 있다.

특히 나눠야 할 것은 그의 상실인데 중심은 나로 돌아오는 경우다. 정신분석 넷째 글은 이해한다는 13DD의 공감, 너를 위해 한다는 14DD의 투자, 독립한 목적임을 확인하는 15DD를 나눈다. 내려다보는 연민도 구분할 이 편에 있다. 모두 상실을 보고 정확히 이해할 수도 있지만 중심은 나여서 의심하지 않는 울음을 인증하기에 부족하다. 자기 울음인지 자기목적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작용에 따라 따로 적는다. 하나를 제외해 다른 층에 긍정적 인증을 주지는 않는다.

중심은 대명사로 정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목적으로 인정한다의 주어는 나다. 네가 나를 슬프게 한다의 주어는 너지만 독립성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다. 내용과 태도로 정한다. 이해와 의심하지 않음은 함께할 수 있고 이해가 필연적으로 편입은 아니지만, 이해만으로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칸트의 연민에서 한 선행이 모욕이라는 말은 상대가 내 선한 마음의 대상이 되는 내려다봄을 가리킨다. 투자 자체는 나쁜 말이 아니라 자기 목적이 타자의 복리에 향하는 것이다. 논문이 검토하는 것은 그의 상실로 내 계획을 완성하거나 제삼자에게 요구하는 경우다. 내 목적으로 타자 자신의 법을 대체할 때만 식민화라 부르며, 연민이면 곧 식민화라고 하지 않는다.

울음을 써서 하는 일도 따로 적는다. 보여 주거나 압박하거나 선한 마음을 드러내거나 용서를 구하는 행위다. 앞에서 판단으로 웃는 것과 웃음을 쓰는 일을 나눈 것과 같다. 진짜 울음이 일어나면서 남에게 요구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뒤의 일을 근거로 앞이 없었다고 하지 않는다. 타인의 상실을 자기 이미지의 재료로 삼는 것도 여기에 적는다. DD는 이번 작용이 지금 선 층이지 사람의 영구 등급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밤에 여러 층으로 울 수 있다.

그 상실은 그의 것이다

좁은 종류를 여섯 조건으로 정하되 모두 이미 일어난 내적 울음에 관한 말이다. 울지 않아도 똑같이 존중하는 사람은 정의에 없을 뿐, 인정이 없다고 하지 않는다. 첫째는 주의다. 이번 주의와 정은 상대가 틀 속에서 겪는 상실로 향하지, 그로 인한 내 손실에 향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도 잃을 수 있으며 두 몫을 나눈다. 둘째는 내용이다. 그 상실은 그의 것이라는 판단이며, 틀릴 수 있다.

셋째는 그를 목적으로 인정하는 태도이지 명제가 아니다. 도덕률 첫 글은 인정은 인지가 아니라 실천적 자세이며, 구체적 타자를 목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수단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한다. 동의와도 다르다. 잘못된 길을 고른 친구에게 반대하면서도 그의 삶과 상실로 인정하며 울 수 있다. 다만 잘못된 선택을 동정하는 것은 15DD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반대하면서 운다는 사실로 층을 정하지 않는다.

넷째는 편입하지 않기다. 내 느낌으로 실제 상대의 느낌을 정하지 않고, 그의 상실이 내 선함과 목적에 봉사하라고 하지 않는다. 자리를 선점하지 않고 자료가 내 이해를 고치게 한다. 죽은 이와 허구의 인물에게도 적용하며 언제나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다섯째는 단서와 감염의 구분이다. 울음소리와 표정으로 상실을 알 수 있고 단서는 틀릴 수 있으나, 감염만인 반응으로는 이 울음이 되지 않는다. 여섯째는 수정이다. 사실 판단은 틀릴 수 있어 13DD의 반성적 부정으로 효력을 거둘 수 있으나 울음이 일어났음은 거둘 수 없다. 인정은 태도이므로 효력 철회의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층을 정하는 것은 셋째와 넷째다. 배타성은 정의가 맡지 울음 안에서 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망의 웃음과 같다. 다른 네 조건은 입구다. 첫째는 자기 울음, 다섯째는 감염을 막으며, 둘째와 여섯째는 12DD의 경향을 막고 오류와 수정의 규율을 세운다. 여섯 조건은 여섯 장의 층위 증명서가 아니다. 항목이 각각 성립해도 제삼자가 이번 울음을 인증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판단'은 내용과 태도를 함께 가리키며, 15DD 표지는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공식인 그 상실은 그의 것이라는 말은 내용이다. 아픔은 내 아픔이라는 간단한 표현은 정(情)의 측면을 적은 말이다. 어느 하나만으로 층은 정해지지 않는다. 그가 잃었음은 13DD의 공감도 말하고, 내 아픔임은 13DD의 자기연민도 말한다. 둘을 합치면 편입하지 않는 두 방향이다. 그의 상실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내 아픔을 그의 것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둘째 글의 이 판단은 내 것처럼, 여기서는 상실은 그에게, 아픔은 나에게 속한다. 무엇이 누구의 것인가를 말한다.

울음은 기다린다

세 고리로 나눈다. 판단의 내용은 그 상실이 그의 것이라는 점, 태도는 그를 목적으로 인정하고 편입하지 않음이다. 태도는 명제를 판단하는 일과 같지 않고, 인정은 태도층의 작용이다. 다음은 정이다. 그의 상실 때문에 아프지 않을 수 없는 부분으로, 그 틀 속 상실을 향하지 그의 감각을 느끼거나 얼마나 느끼는지 재는 일이 아니다. 아픔은 내 아픔이다. 울음은 정 뒤의 피할 수 없는 순간이다. 정(情)의 일부가 아니라 자체로 느껴지는 순간인 점은 웃음과 같고, 정을 먼저 거쳐야 하는 점은 다르다. 외적 울음은 표현이므로 없어도 된다.

정에는 판단의 성분이 있다. 향하는 것은 판단된 상실이고, 모습은 태도로 정해져 그의 것으로 남긴 상실을 아파한다. 그래서 판단은 정에서 벌써 느껴지고 인정도 그 안에 있다. 그렇다고 정이 곧 판단인 것은 아니다. 세 고리는 말로 추론을 마치며 순서대로 넘기는 세 단계도 아니다. 판단을 먼저 끝낸 다음 정에 넘기는 것도 아니고, 정이 멎은 뒤에야 울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경험의 세 가지와 의존 관계를 말한다. 그 판단 없이는 이 정이 없고, 정 없이는 이 울음이 없다.

아름다움과 웃음, 울음을 놓아 보자. 아름다움은 보고 나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정은 감정에 근거하지 않으며 감정은 따라와도 안 와도 된다. 웃음은 판단이 직접 느껴지는 한 사건의 두 면으로 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쓴웃음의 씁쓸함처럼 정이 먼저나 뒤에 올 수 있다. 울음도 느껴지는 순간이지만 먼저 정을 거치고, 그 정에 판단 성분이 있다. 모두 피할 수 없고 판단력과 관계되지만 같은 관계는 아니다. 아름다움과 웃음의 대상 차이는 앞에서 논했다. 울음과의 차이는 이 논고가 새로 세운 것으로 이 좁은 울음의 정에만 쓰며, 상류의 두 논문을 바꾸지 않는다.

웃음은 빠르고 울음에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대략의 관찰이 있다. 구조와 맞지만 고리 개수로 도출하지는 못한다. 구분은 기다림이다. 웃음은 씁쓸함이 먼저 와 있어도 정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울음은 정이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에 이를 때를 기다린다. 빈소에서 아픔은 계속 있었지만 동생이 들어올 때 그 순간이 왔다. 이 기다림이 과정이며 길이는 다를 수 있다. 세 고리가 차례로 시간을 나눠 차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플레스너도 이 대비에서 시작한다. 이 논고가 영어 번역본을 읽은 바로는, 웃음은 계기에 직접 따르지만 울음은 계기와 발작 사이에 자기 자신을 향한 반성적 행위를 넣는다. 울음의 자동 과정은 어느 정도 서서히 올라온다. 열림·직접성·분출은 웃음에, 닫힘·매개·점진은 울음에 속한다. 감정도 필요조건일 뿐 충분하지 않다. 고통과 기쁨, 사랑과 절망이 온 진실과 힘으로 차지해도 눈물은 안 날 수 있다. 이 논고 역시 두 피할 수 없음을 인과법칙의 예측으로 보지 않아, 상실을 보면 반드시 운다고 보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같은 방향이다.

참는다

감수는 9DD와 10DD에 있고, 정과 울음은 이를 거쳐 느껴지며 느끼는 것은 상층이다. 방법론 아홉째의 정리 2는 하층이 상층을 구성하고 상층은 하층에 접근하나, 하층은 상층을 감지하지 않고 상층은 하층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어도 같은 방향이다. 상층의 거부는 안 받겠다는 것이지 보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13DD는 피할 수 없음을 동반하지 않는 9DD·10DD의 감수를 받지 않거나 밖에 내보내지 않을 수 있다. 감수 자체는 일어난다. 그러나 14DD·15DD의 피할 수 없음은 13DD 위에 있어 제어하지 못한다. 제어된다면 그 이름도 맞지 않는다. 늦출 수는 있어도 없앨 수 없어 느껴지며, 13DD는 겉의 표현만 억누른다.

이것이 참아서 드러내지 않는 칸이다. 안의 순간은 남고 표현이 안 나온다. 총론도 참을 수 있는 것은 표정뿐이라 했다. 다만 늦출 수 있으나 취소 못 한다는 것은 저자의 견해로, 정리 2의 결론은 아니다. 울음보다 넓은 견해다. 목적이 있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13DD가 미뤄도 끝내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고는 울음에만 쓴다.

내외 네 칸은 이 좁은 울음에만 만든다. 안에도 밖에도 있으면 소리나 눈물로 판단과 표현이 다 있다. 안에만 있으면 참아 드러내지 않는다. 밖에만 있으면 표현만 기록한다. 다른 진짜 울음, 웃다 난 눈물이나 선의에 감동한 별개의 판단, 혹은 내적 감 없는 표현일 수 있다. 둘 다 없으면 다른 내적 경험은 따로 쓴다. 외적 울음의 유무만으로 감과 태도, 사실 판단의 성립을 정하지 않는다. 의례의 울음, 직업적 곡, 연기는 상황과 역할과 용도다. 슬픔이 있으면서 의례에 따라 표현할 수도 있다. 감수·표현·용도·층을 따로 적고 대신 판단하지 않는다. 양파 눈물은 하한에만 있고 이 표에 넣지 않는다.

넷째 글은 플레스너에서 몸이 어떤 응답 능력을 맡고 판단을 배제하는지 미결로 남겼다. 이번에는 원서의 영어 번역을 읽어 답한다. 실패하는 응답은 행위와 말, 자세와 표정 동작이다. 사람은 심신 통일체로는 항복하지만 인간으로서는 항복하지 않는다. 몸의 통제를 잃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인간으로서 주도권을 놓지 않는 이해를 보여 준다. 울음에서는 자기 내적 행위를 통해 몸의 이름 없는 답에 자신도 넣는다. 그러니 겉몸만 다룬 것으로 읽을 수 없다. 그는 그 이해를 판단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이쪽 판단도 추론의 결론이 아니므로 꼭 충돌하지 않는다. 표현의 답이 실패했다고 내적 이해가 배제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갈리는 곳은 정 뒤다. 플레스너는 힘을 풀어 자신을 내주는 내적 행위가 더 들어가 울음을 이끌고 구성한다고 본다. 반은 자발적이고 반은 어쩔 수 없으며, 느슨해지는 기세를 잡을 때도 못 잡을 때도 있다. 이 논고는 정이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닿은 것을 울음이라 한다. 층별로 이을 수는 있다. 잡고 안 울었다면 아직 피할 수 없는 기세는 아니어서 13DD가 받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안의 일이지 표정만이 아니다. 또는 그 순간은 이미 있고 밖으로만 안 나간 것일 수 있다. 잡지 못하는 것은 14DD·15DD의 피할 수 없음이며 이 글은 그중 15DD의 한 종류다. 경험 단위와 개념 경계는 일대일이 아니어서 하나의 독법일 뿐, 같다고도 더 정확하다고도 하지 않는다.

동생이 들어왔을 때

처음 두 울음은 일단 옆에 둔다. 첫째 말은 미래에 올지 모르는 것에 향해 두려움의 편이며, 함께한 날들이 없다는 자기 상실도 담는다. 두 몫을 나누어 두려움은 따로, 상실은 내게서 잃은 것의 줄에 쓴다. 둘째는 인간의 운명이다. 아버지의 유한한 생일 수도, 거기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미래 자기 죽음이라면 시제를 먼저 본다. 두 말만으로 의심하지 않는 울음이라 인증하기에는 부족하다.

셋째의 내용은 그 미처 보지 못함은 아버지의 것이라는 판단이다. 작은아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고, 그 소망은 그의 삶을 이루는 한 틀이었다. 미처 못 본 것도 그다. 내용은 틀릴 수 있으며 지금 이루어진 상실이지 미래의 예측이 아니다. 죽은 뒤의 자리도 판정하지 않는다. 그가 잃었다는 삼인칭 기술이지 지금도 받아 안는지는 삶의 의미를 다루는 연작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 연작 넷째도 죽음 뒤 그 자리가 물러나는지는 결론하지 않는다고 쓴다. 이 울음은 그 판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태도도 보자. 장남은 그 미완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근거 없이 선점하거나, 꼭 한스럽게 갔을 거라 단정하지 않는다. 둘 다 실제 느낌을 대신 규정하기 때문이다. 동생에게 아버지 소원을 이루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아버지의 상실을 제삼자에 요구할 재료로 삼아 내 목적이 중심에 온다. 조문객에게 효자를 보이려고 우는 것도 아니다. 그런 행위가 있어도 별도 용법이지 이 울음 안의 일은 아니다. 소망과 일생을 아버지의 것으로 인정하고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답하지 못하므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일은 자료로 이해를 고치는 데 놓인다. 몇 달 뒤 입원 전 일기를 읽고 아버지가 이 일을 이미 많이 놓았음을 알았다. 판단을 바꿔야 한다. 미처 보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이지만 그 밤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 더 강한 자료라면 무게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 상실의 귀속을 거둘 수도 있다. 고치는 것은 판단의 효력이며, 그 밤의 울음은 이미 일어나 거둘 수 없다.

느껴진 부분은 이렇다. 판단이 정을 거쳐 와, 장남은 아버지가 보고 싶던 것을 못 본 일을 아파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은 새로 생긴 자신의 것이지 아버지 고통의 복제물이 아니다. 마지막 며칠 아버지는 대개 잠들어 있었으며, 느꼈는지와 무관하게 상실은 그의 것이다. 내가 그 침대에 누웠으면 어떨지 상상할 필요도 없다. 아픔은 밤 내내 있다가 동생이 들어올 때 피할 수 없는 순간에 닿았고, 그 울음이 되었다. 소리 없이 고개만 숙였다. 밖에서 울었는지는 그 순간의 증거도 반증도 아니다.

몇 울음을 나누는 것은 이후의 말과 태도이지 강도가 아니다. 이제 형제만 남았다고 하면 자기에게 없어진 것을 말한다. 사람은 다 그 길을 간다고 하면 아버지에 관한지 자신으로 돌아가는지 더 본다. 동생의 결혼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는데라고 하면 아버지의 상실로 간다. 말은 주의의 몫만 나눈다. 이 울음인지 알려면 느낌을 대신 정했는지, 동생에게 요구했는지, 일기로 판단을 고쳤는지 태도도 봐야 한다. 그것으로 장남이라는 사람의 층을 인증하지 않는다. 같은 밤에 여러 몫이 있을 수 있다.

똑같이 느낄 필요는 없다

잠들어 있던 아버지의 자리에 자신을 넣을 필요가 없는 데는 일반적 근거도 있다. 넷째 글은 타인의 안의 순간을 내가 대신 겪을 수 없으나 보고를 듣고 이해를 고칠 수 있고, 여기서 의심하지 않음은 내 예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음이라고 했다. 총론도 본인만 겪을 수 있고 남이 대신 받아 안지 못하며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겪어 본 적 없는 상실 같은 당신의 아픔을 이해 못 해도, 그 상실이 당신 것이라 판단해 인정하고 아파하며 울 수 있다. 실제 아파하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겪는지라는 사실 내용에 넣을 수 있지만, 정은 그 아픔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다. 양쪽을 지킨다. 그의 경험을 대신 맡지 않고 내 아픔도 그의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 잠든 사람, 모르고 있는 사람, 소설 인물에게도 가능하다. 그가 지금 느껴 내가 복제할 아픔을 먼저 증명할 필요 없이 구조적 상실이 그의 것으로 있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제 상태를 모르는 광인과 죽은 이를 동정하는 일을 쓴다. 둘 다 나라면 어떨지 상상하며, 죽은 이에게는 살아 있는 영혼을 생명 없는 몸에 넣는, 스스로 말한 상상의 환영이다. 이 논고에서는 상실이 구조적이므로 느꼈는지와 무관하게 그의 것이고 나를 넣지 않아도 된다. 스미스가 눈앞의 정념보다 그것을 일으킨 상황에서 동정이 온다고 한 대목은, 이해에 닿는 자료와 판단 내용을 비교할 때 쓴다. 직접 감염을 모두 배제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단서는 감염과 다르다는 조항과 가장 가깝다. 상상으로 바꿔 놓는 일도 상대 원경험의 복제는 아니다.

그 순간 그에게 자격이 있는지 먼저 묻고 답한 것도 아니다. 의심하지 않음은 추론의 결론도, 의문이 없었다는 뜻도 아니다. 예측이 아니며 의문과 질문은 남는다고 총론은 말했다. 지금 있든 나중에 오든 의문이 풀리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반대 의견을 차단해야 유지된다면 억지 폐쇄라는 정신분석의 방어선을 따른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칸트는 적어도 세 문제에서 비교된다. 첫째는 미적 지위다. 『판단력 비판』 §29 뒤 총주에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격정에는 고귀함이 없지만 심성의 아름다움에는 넣을 수 있다고 한다. 부드러운 감동이 격정으로 오르면 무가치해지고 그 성향이 Empfindelei다. 소설과 눈물 나는 극은 마음을 약하게 하여 엄격한 의무의 감수성을 잃게 한다. 도덕 이념의 슬픔은 강건한 감정이고, 동감에서 오는 사랑스러운 슬픔은 부드럽게 하는 쪽이며 전자만 숭고하다. 따라서 모든 울음을 무가치하다고 한 것은 아니다. 동정의 슬픔에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은 남기되 숭고와 고귀함은 주지 않는다.

둘째는 의무다. 『덕론』 §34는 인간애를 실천이성에 선 자유로운 참여와, 온기나 전염병처럼 퍼지는 부자유한 동감으로 나누고 전자만 의무를 말할 수 있다고 한다. §35는 동감 자체가 의무는 아니어도 타인의 운명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의무라 한다. 자연적 동정의 감수를 길러 도덕 원칙에 따른 참여의 수단으로 쓰는 일은 적어도 간접 의무다. 그래서 빈자, 병실, 채무자 감옥을 피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찾아가야 한다. 셋째는 발생이다. §34는 구하지도 못하면서 고통에 감염되면 둘이 고통받으며, 세상 고통을 늘릴 의무는 없다고 한다. 스토아 현자도 예로 든다. 구하기 위해 친구를 바라지만 못 구하면 나와 무슨 상관인가라며 함께 아픔을 거절한다.

세 점은 같다. 감염적 동감은 여기 대상이 아니고, 내려다보는 연민은 이 울음이 아니며, 울음을 의무로 세우지 않는다. 차이는 두 곳이다. 근거에서 칸트의 슬픔은 외부에서 오는 동감과 보편에서 오는 도덕 이념에 뿌리를 둔다. 이 울음은 이 구체적 타자를 목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오며 동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피할 수 없음은 판단 자체에서 온다는 말이다. 구체 대 보편의 대립은 아니다. 구체 판단도 보편적 이유를 쓸 수 있다. 다음은 판단과의 관계다. 칸트에서 슬픔은 강건한지 부드럽게 하는지, 아름다운 쪽인지 고귀함이 없는지 판단될 대상이다. 이쪽에서는 안의 울음이 판단이 정을 거쳐 느껴지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것은 실천이성에서 타인의 운명에 참여하는 『덕론』의 자유로운 참여다. 세 양상이 다르다. 해야 함과 하지 않을 수 없음부터 보자. 참여는 법칙의 의무로 실패할 수 있어 의지로 길러 쓰지만, 이 울음은 동의를 안 기다리고 해야 할 과업도 아니다. 모두에게 하는 요구와 겹침도 다르다. 칸트의 법은 모든 이성적 존재에 성립해 남에게 너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SAE의 각자 피할 수 없음은 겹쳐도 동일하지 않으며, 교집합으로 외부 요구나 판정을 못 한다. 각자 행하는 가르기가 한곳에 여럿 놓여도 규범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은 수단과 인정이다. 칸트는 동정을 참여 수단으로 길러 쓰지만, 여기서는 감수가 인정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용도를 성립 근거로 삼지 않는다. 나중에 이유 있는 별도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괜찮다. 역할과 취사의 비교이지 서로 배타적인 심리 상태 세 쌍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느끼는 것, 자유로운 참여, 그런 감정을 기르는 일은 한 사람에게 공존할 수 있다.

사람의 등급도 매기지 않는다. 어떤 일이나 많은 일에서 15DD에 서지 않아도 남을 해치지 않으면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해치지 않음은 권리 쪽 경계이지 15DD의 피할 수 없음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이 울음이 칸트 분류의 어느 편이며 도덕 이념이나 숭고로 읽힐지 대신 판정하지도, 거기 들어가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자에게 질문은 남는다. 그가 거절한 것은 정에 해당하는 공동의 고통이지, 친구를 자기 것으로 편입한 것은 아니다. 구하려 친구를 원하니 인정은 온전할 수 있다. 정이 동의 없이 온다면 무엇을 거절했나. 이 논고는 그 정(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르는 일을 거절한 것으로 읽는다. 애초 그 순간이 없었다면 여기 범위 밖이다.

더해진 한 사람의 고통

칸트의 물음은 남는다. 못 구하면서 한 사람 더 아프면 고통이 늘어난다. 먼저 인정한다. 이 비통한 울음에서 정은 내게 새로 생긴 고통이며, 감과 정이라는 이름을 나눠 숫자에서 지우지 않는다. 그의 상실을 아파하는 내 고통이지 복제는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답이 안 된다. 칸트도 원피해자와 뒤에 함께 아픈 이를 나눴기 때문이다. §34의 늘리는 의무를 세우지 않고, §35의 양성과 수단을 이번 경험의 근거로도 삼지 않는다. 더 맡는 것은 고통이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경험을 줄여야 할 한 항목으로 축소하지 않는 일이다.

줄여야 할 악으로 적지 않는다. 그 고통과 뒤의 울음이 인정의 느껴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의 상실을 그의 미완의 상실로 남겨, 무슨 상관이냐며 정을 거절하거나 인간은 다 죽는다는 말에 넣어 버리지 않는다. 더 질문할 가능성이 함께 있다. 이를 여는 것은 인정이다. 편입하지 않으면 자료로 나를 고치며, 의심하지 않아도 질문과 의문은 남는다. 나에게는 더 할 일과 내 책임을 묻고, 그에 관해서는 잃은 것과 남은 것과 그의 시선을 묻는다. 질문은 고통의 용도도 아니고 양에 비례하지도 않는다. 내 고통이 늘어도 경험에는 고통받는 사람 수로 다 설명 못 할 판단과 자세가 있다. 못 구했다고 설명이 끝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줄여야 할 칸에 넣지 않는다는 것은, 그 판단이 정을 거쳐 느껴질 때의 정에 인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는 쪽과 이 논고의 기록 방식이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여기에 반하지 않는다. 고통을 추구하라거나 많을수록 좋다거나 우는 사람이 더 좋다고 하지 않는다.

난간을 세우자. 의무가 아니다. 남에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고 결과로 감수를 떠맡기면 안 된다. 다만 말해 보도록 초대하거나 느낌을 묻는 일은 별개다. 일부러 추구할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정이지 고통이 아니다. 일부러 마음의 약화를 구하면 Empfindelei의 한 형태고 눈물을 다른 것과 바꾸면 울음을 쓰는 일이다.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운다고 높아지지도, 안 운다고 인정이 없지도 않다. 총론의 안 웃었다고 못 본 게 아니라는 말과 같다. 또 증거도 아니다. 인정이 있을 때 느껴진 모습이지 역으로 입증하지 않는다. 13DD의 공감 울음도 안에서는 같게 느껴질 수 있다. 평가 금지는 안 울면 불인정이라는 말을 막고, 증거 금지는 울면 인정이라는 말을 막는다.

양으로도 세지 않는다. 강도로 층을, 고통량으로 공적을 매기지 않는다. 위로받아 아픔이 줄어도 인정이 줄었다는 뜻은 아니며, 여전히 기억하고 물을 수 있어 같은 통증을 지킬 필요가 없다. 상실도 미화하지 않는다. 울음을 만들었다고 그의 상실이 좋아지지 않는다. 취할 점이 있다면 인정 쪽이지, 아니라면 그의 상실이 내 다감함의 재료가 된다. 구호를 대신하거나 구호로 상쇄되지도 않는다. 도울 수 있으면 돕고, 도왔다고 울음이 무효가 되지 않는다. 따로 적는다.

대가가 뚜렷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의 상실을 내가 만들었을 때다. 그의 것이라 인정하려면 내 몫도 인정하며, 15DD는 그 대가 때문에 철회하지 않는다. 여기서 철회는 그의 상실로 보지 않으며 인정하고 편입하지 않는 태도를 거두는 것이다. 새 자료로 어떤 상실의 귀속을 철회하는 일은 사실 수정이지 자기방어적 후퇴가 아니다. 13DD의 자기보호가 여기서 자주 물러나는지, 말이 그의 상실에서 자기 변호로 옮기는지는 검증을 기다리는 개괄이다. 죄책감과 후회는 내게 향한 별도의 정으로 나눠 적고, 울어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울음을 쓰는 일이다.

토리노의 말

니체가 토리노에서 말을 끌어안고 뒤에 정신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Townsend의 검토(『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2017)에 따르면 유일한 원출처는 세 겹의 전언이다. 경비원이 집주인 Fino에게 전했고, 1900년 니체가 죽은 뒤 익명 기자가 Fino를 찾아가 들었다. 원판에는 목을 꽉 안은 모습만 있고 마부, 채찍질, 말의 고통, 눈물은 없다. 모두 후대의 추가다. 그러므로 말이 고통받았다는 층은 전설판에만 있다. 논고는 전해진다는 표시 아래 그 판의 구조만 취하고, 확실한 출처로 인증하거나 그때의 마음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술어를 나누자. 말이 목적 가치의 담지자라는 것은 가치론 첫 글 V14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문 없는 객체인 동물은 경험이 있고 돌봄의 한쪽일 수 있지만, 이 사실 자리를 채우는 목적 가치의 담지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아프다는 것은 전설판에서 성립하며 말을 돌보는 것도 틀리지 않다. 한 사실 자리를 못 채웠다고 우는 사람이 그에 해당하는 잘못된 단언을 했다는 뜻도 아니다. 연출한 채찍질이어서 판단한 해침이 없었다고 확인되면, 그 사실 판단의 효력을 거둔다. 감의 발생을 지우거나 관심을 자동으로 거두지 않는다. 반대로 연출이라는 사실만으로 배우나 동물이 아프지 않았다고 보장하지도 못한다.

말에게 인정하는 것은 그가 목적이라는 지위가 아니라 의식과 감지의 지위다. 주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고양이의 고통을 아파하고 말의 매질을 못 보는 데도 확장된다. 정의상 15DD의 태도는 아니어서 이 좁은 울음에는 넣지 않는다. 두 방향은 사람 아닌 선 자리로 말한다. 15DD에 서면 태도의 연장으로서 고통을 내 재료로 삼지 않고 실제 아팠는지도 자료로 고친다. 아직 그곳이 아니면 동물 동정이 가는 길의 한 정일 수 있다. 길에 있다는 말은 15DD를 연습할 수단이란 뜻도 의무란 뜻도 아니다. 전설의 니체 울음은 연장의 예로 읽을 수 있다.

고양이와 말이 고통받는 모습을 못 보는 이는 대개 사람의 고통도 못 본다는 저자의 관찰이 있다. 드문 반례가 있으며 증명은 아니다. 칸트의 『덕론』 §17도 동물 학대가 동감과 대인 도덕에 유익한 소질을 무디게 하므로 자기 의무에 어긋난다고 한다. 동감을 수단에 놓고 인간 도덕을 위해 지키는 것을 의무의 근거로 삼는다. 쇼펜하우어는 연습하려고만 동물을 동정하는 셈이라 비판하며, 동물 동정과 선한 성품이 밀접하고 인간에 대한 정의·인애와 같은 원천이라고 한다. 길이라는 방향에서는 이 논고도 칸트와 같지만 기술만 하고 수단이나 근거로 쓰지 않는다. 연장이라는 방향에서는 연습이 아니란 점에서 쇼펜하우어와 가깝다. 다만 그는 의지의 하나임에 뿌리를 두고, 이쪽은 주체성 인정의 확장이라 하며 그 형이상학은 빌리지 않는다.

소설 속 사람

소설 인물도 포함한다. 독자가 우는 상대는 작품 속 인물과 그의 상실이다. 작가는 흔히 인물에게 일인칭과 방향과 상실을 주고, 독자는 자기 울음 안에서 주체성을 투사한다. 작가의 일은 독자에게 단서와 자료일 뿐이다. 투사는 우는 사람 자신의 것이어야 하며, 일인칭 없는 평면적 인물에게도 할 수 있다. 작가가 주체라고 인물이 현실 담지자가 되지는 않는다. 허구로 확장하는 책임은 이 논고가 진다. 세 가지를 따로 기록한다. 첫째는 서사 속에 표상된 인물과 그의 상실이다. 둘째는 독자가 현실에서 실제로 내리는 “이것은 허구다”라는 판단이다. 셋째는 독자의 실제 태도이며, 이것은 여섯 조건을 충족하는지 살펴야 한다. 말과 달리 투사하는 것이 주체성이므로 좁은 울음에 들어갈 수 있다.

칸트의 눈물 나는 극과도 여기서 만난다. Empfindelei에는 위로받지 않으려는 참여의 고통과, 허구의 불행에 일부러 몰입해 참이라 여기는 두 예가 있다. 뒤의 경우와 달리 이 울음은 작품 속 상실에 향하며 실제라 믿을 필요가 없다. 일부러 사실처럼 여기며 약해지는 자신을 즐기면 Empfindelei이지 이 울음은 아니다. 앞의 경우도 고통을 계속 유지해 인정의 증거로 삼으려고 위로를 거절하면 채택하지 않는다. 위로와 아픔의 감소는 입장에 반하지 않는다. 감동한 자신을 즐긴다고 동시에 있는 인물 관심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므로 몫을 나눈다. 엄격한 의무에 무감각해지는 결과라는 칸트의 질문은 기록하되 답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돌아가는 길

주요 비교 대상은 쇼펜하우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권 §67의 영문 번역을 따라, 자기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반성에 재현된 고통을 울며, 울음은 자기 동정이자 원천으로 돌아온 동정이라고 전한다. 남을 위해 우는 길도 상상으로 그의 자리에 서거나, 그의 운명에서 인류 전체와 먼저 자기의 운명을 보는 두 가지다. 멀리 돌아도 언제나 자기를 운다는 것이다.

그의 사별 예도 오래 앓은 늙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다. 자기 손실을 울면 수치스러운 이기적 눈물이므로 처음에는 죽은 이의 운명을 운다. 그러나 죽음이 그에게 바라던 해방이어도 울기에, 주로 인류의 운명에 붙들리고 거기서 자기 운명을 본다. 혈연이 가까울수록, 특히 아버지면 더 그렇다. 빈소의 설정은 이 장면을 빌려 한 점을 바꿨다. 그쪽은 해방을 바라던 죽음에서 인류 운명으로 가지만, 이쪽은 해방으로 지워지지 않는 미처 못 봄을 판단한다. 여기서 갈린다.

두 층을 나누자. 동정에서는 개체화를 꿰뚫어, 현상의 물자체인 의지로 타자에게 자기 본질을 알아본다. tat twam asi의 큰 자기다. 상대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되 내 몸이 아니라 그에게서 느낀다고도 쓴다. 그의 피부 안에 내 신경이 없음을 알아도 동정은 분리를 넘는다. 울음에서는 그 동정이 결국 인류 운명을 거쳐 내 개체성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자기는 큰 자기가 아니라 개체의 자기다.

동정 층에서는 둘 다 상대를 보고 고통은 그에게 있다고 하므로 경험이 가깝다. 공통은 그 층까지다. 누가 행동이 복종할 법칙이 있다고 했느냐며 명령 윤리에 반대한 그도 남에게 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 SAE와 같은 방향이다. 다른 것은 강조다. 그는 내 것처럼 느껴 어느 정도 동일화하며 자기·비자기 경계가 잠시 무너진다고 한다. 이쪽은 아픔은 나, 상실은 그에게 남겨 같은 느낌을 복제하지 않으며, 서로 포함하지 않는 두 주체를 강조한다. 대립은 아니다. 큰 자기는 이기심이 아니며 그에게는 바로 그 큰 자기를 통해 사심 없음이 성립한다. 이 논고는 의지의 하나임을 빌리지 않을 뿐이다. 행동론 여섯째의 말대로 삶의 의미는 그 삶 밖에 있어, 일생이 가리키는 것이 자신일 필요가 없다. 타자는 여전히 타자다.

울음 층에서는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종류를 가리킨다. 남의 고통에서 반성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이해할 만한 발생 설명으로 받되, 빈도나 언제나를 승인하지 않는다. 자기가 이미 잃은 것으로 돌아오면 자기 상실의 줄에, 미래 자기 죽음이면 시제 확인에 놓으며 판단 없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 운명 표상이 한번 있었다고 이후나 동시에 남을 보는 일까지 취소할 수는 없다. 그밖에 주의와 태도가 계속 그의 상실에 있어 자기 회귀를 가정하지 않아도 되는 울음도 가리킨다.

증명의 무게도 맞추자. 회귀가 없었다고 증명했다는 게 아니라 반드시 회귀를 거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 밤 뒤의 말도 계속 아버지에 향했다면 회귀를 넣지 않아도 된다. 쇼펜하우어는 처음 죽은 이를 운다는 점은 인정하되 본질은 뒤의 귀환이라 할 것이다. 보고와 언행은 설명을 구별할 도움이지 참거짓을 판정하지 못한다. 채택 이유를 강화하거나 약화할 뿐, 보고가 없었다고 심리 과정이 없었다고 증명하지 못한다. 태도 표지는 13DD와 15DD를 나누는 것이지, 두 이론을 가르는 것이 아니다. 그 애도자도 세 태도 표지를 다 지니면서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무슨 보고에도 몰래 자기를 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쪽도 근거를 내야 한다. 플레스너도 그 답은 통상 설명보다 진실에 가깝지만 보편 원인으로 삼은 게 잘못이라며 언제나를 반박했다. 비극 갈등은 울음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고 거기서는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웃음이 먼저, 울음은 나중

같은 상실에 각자 판단해 울면 같은 일을 우는 두 사람이다. 서로 앎이 더해지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상태다. 그 순간 서로를 목적으로도 인정한다면 껴안고 우는 일을 각자 15DD 순간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포옹과 동시 눈물, 남의 상실을 아는 것은 단독으로 인정도 완전한 16DD도 증명하지 못한다. 후자는 모든 일을 관통하는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으로 유한한 개인의 이상적 한계다. 두 글은 구체적 만남을 독자가 분별하게 남기고, 공동 웃음이나 눈물로 관계의 도달을 선언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보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이고, 웃음은 판단이 직접 느껴짐이며, 울음은 정을 거친 그 순간이다. 판단력과 각기 다르게 연결된다. 웃음은 빠르고 울음은 기다린다는 관찰과도 맞는다. 아기의 까꿍에서 시작한 웃음론에는 추측 하나가 더 있다. 아이는 이야기를 듣고 울 수 있기 전에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것은 감염이 아니라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추측은 『판단력 연습과 게임』으로 넘긴다.

그 밤으로 돌아가자. 동생이 들어오자 장남은 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미처 못 본 것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으로 남는다. 아픔은 새로 더해진 자기 고통이고 인정이 거기에 있다. 뒤에도 물을 일이 함께 남는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원논문과 읽기 안내

현재 중국어 에세이에서 한국어 독자를 위해 독립적으로 썼습니다. 원논문은 Qin, Han(2026)의 『별도 논고: 판단력과 울음』이며 이 자료란의 논문·DOI로 연결합니다. 네 각론에 더해진 별도의 연구이지 다섯째 각론이 아닙니다. 기존 영어판도 독립 집필했고 간체·번체 중국어는 전문이며, 기술적 전문 번역은 아닙니다. 빈소는 허구의 예, 토리노의 말은 출처가 제한된 전설이며 역사 인물의 속마음을 보태지 않습니다. 플레스너는 이번 논고가 원서의 영어 번역을 읽은 범위를 넷째 글의 확인 전 비교와 나누어 밝힙니다. 여섯 조건을 제삼자 인증서로 쓰지 않고 울음의 세기나 고통량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선행 글의 인용은 검토할 말로 남기며 공동 눈물이나 포옹으로 완전한 16DD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연결된 원논문 자체를 개정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판본에 관하여

학술 원문: Qin, Han(2026), 『별도 논고: 판단력과 울음』(SAE 웃음론·별도 논고). self-as-an-end.net · DOI: 10.5281/zenodo.23446536.

용어 안내: 이 연작은 이 사이트의 고정된 13–16DD 정의를 따릅니다. 한 번의 구체적인 만남에서 서로가 목적임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두 주체 각자의 15DD 순간으로 이해합니다. 16DD는 모든 일에서 완전한 양방향의 의심하지 않음만 가리키며, 유한한 개인이 마주하는 이상적 한계입니다. 연결된 논문이 개별 순간의 상호 인정을 16DD로 적은 곳은 이 에세이판에서 이에 맞추어 조정합니다. 두 사람이 함께 웃거나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상호 인정이 일어났다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