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편: 청 후기 — 운영체제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만났을 때
1840년, 아편전쟁.
1840년, 아편전쟁.
깎아내기·구축의 순환 법칙으로 보면, 아편전쟁의 의미는 군사적 패배 자체에 있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군사적 패배가 차고 넘친다. 정강의 변 때 입은 군사적 손실은 아편전쟁 때보다 훨씬 컸다. 아편전쟁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운영체제 3.5 버전이 처음으로 자기 지식의 틀 안에 대응하는 항목이 없는 도전과 맞닥뜨렸다는 것이다.
그전 2천 년 동안 3.5 버전이 맞닥뜨린 도전은 모두 ‘같은 종류의 문제를 조금씩 바꾼 것’이었다. 무장의 반란, 농민 봉기, 이민족의 침입, 토지 겸병, 관리의 부패. 시스템에는 이런 문제를 다뤄 본 경험도, 도구도, 개념적 틀도 있었다. 무슨 문제인지 알고, 역사 속에서 비슷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안다. 그러니 선례를 참고해 대응할 수 있었다.
산업문명은 그 틀 바깥에 있었다. 그것이 가져온 것은 더 강력한 군사력만이 아니었다. 군사력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했다. 산업 생산, 자본주의 경제, 국민국가 체제, 국제법, 대의정치, 근대 과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이 통째로 밀려왔다. 하나같이 3.5 버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알지 못하는 상대를 만나면 가장 먼저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아는 틀로 상대를 설명하려 든다. 그렇게 청나라는 약 70년, 1840년부터 1911년까지의 시간을 들여 차츰 깨달았다. 자신이 아는 틀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발견은 세 층위를 거쳤다. 기물에서 제도로, 제도에서 문화로. 한 층 깊어질 때마다 발견은 더 고통스러워졌다. 자신의 정체성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1. 태평천국 — 3.5 버전의 내부 잔여항과 외부 충격이 한꺼번에 터지다
청나라가 외부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1851년 홍수전은 광시성 금전에서 봉기해 태평천국을 세웠다. 태평천국 운동은 14년간, 1851년부터 1864년까지 이어지며 중국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휩쓸었다. 사망자는 수천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내전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태평천국은 대단히 흥미롭다. 지금까지 다룬 여러 주제가 그 안에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형태를 띤 밑바닥의 저항.
홍수전의 태평천국은 배상제교를 조직의 토대로 삼았다. 기독교적 요소와 중국 민간신앙이 뒤섞인 종교였다. 후한의 태평도, 원말의 백련교, 청초의 백련교와 같은 패턴이다. 세속의 통로가 완전히 막히자 사회 밑바닥의 잔여항이 종교의 형태로 분출한 것이다.
그런데 태평천국에는 새로운 요소가 하나 있었다. 종교적 자원의 일부를 외부에서, 곧 기독교에서 가져왔다는 점이다. 물론 홍수전이 극단적으로 뒤틀어 놓은 기독교였지만 말이다. 3.5 버전은 외래 이데올로기를 자원 삼아 저항을 조직하는 내부 세력과 처음 마주했다. 3.5 버전의 이념 관리 도구, 즉 유교적 교화와 과거제를 통한 흡수, 천명론의 서사는 유교의 틀 안에 있는 이견에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같은 담론 체계 안에서 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깎아내기도 있고 구축도 있지만, 구축이 잘못되었다.
이자성과 달리 태평천국은 깎아내기만 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완결된 제도 설계를 갖추고 있었다.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남녀평등과 재산 공유를 내세운 천조전무제도, 천왕 아래 동왕·서왕·남왕·북왕·익왕을 두는 분봉식 정치제도, 남녀를 별도 진영에 수용하고 아편과 전족을 금지하는 사회제도가 있었다.
태평천국의 구축 설계에는 짙은 유토피아적 색채가 배어 있었다. 천조전무제도는 서류상으로는 3.5 버전의 어느 형태보다도 ‘선진적’이었다. 철저한 토지 공유와 남녀평등을 약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설계였고, 진지하게 시행된 적도 없었다. 태평천국이 지배한 지역, 주로 장강 중·하류 일대의 실제 통치 방식은 종이 위의 제도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지도부부터 자기 제도를 지키지 않았다. 홍수전의 후궁은 청나라 황제의 후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이 또한 ‘방향은 맞을지 몰라도 실행은 완전히 엉망’인 사례다. 왕망의 복고적 개혁과 똑같은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구축의 설계가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먼저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완벽한 청사진을 그려 놓고 현실을 거기에 욱여넣었다.
증국번과 상군 — 지방 민병조직의 제도화.
청의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군은 태평천국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백련교의 난 때 드러났던 군사적 쇠퇴가 태평천국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정은 지방 신사층이 직접 무장조직을 꾸려 태평군과 맞서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방 무장조직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것이 증국번의 상군이었다. 상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었다. 증국번 개인이 병사를 모집하고 훈련하고 지휘하는 사병 조직이었다. 군비도 증국번이 직접 마련했다. 일부는 조정의 지원금이었지만, 상당 부분은 관직·품계 취득 등을 위해 지방에서 낸 헌납금과 군비를 마련하려고 거둔 지방 상업세인 이금에서 나왔다. 병사들이 충성을 바친 대상은 조정이 아니라 증국번 개인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상군의 등장은 운영체제 3.5 버전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했다. 중앙의 폭력 독점이 깨진 것이다.
3.5 버전의 핵심 설계 중 하나는 중앙이 군사력을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진나라의 편호제민에서 송나라의 배주석병권, 명나라의 위소제, 청나라의 팔기·녹영 체제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제도를 설계한 이들은 중앙, 곧 황제만이 폭력을 합법적으로 소유하도록 보장하려 했다.
태평천국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 독점은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상군, 이홍장의 회군, 좌종당의 초군. 이 지방 군대들을 만든 사람들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진 지방 실력자로 올라섰다. 명목상으로는 조정에 복종했지만, 실제로는 조정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 이후 지방 군사세력이 할거한 과정, 당말 황소의 난 이후 군벌들이 득세한 과정과 구조가 완전히 같다. 역사는 다시 한번 그 패턴을 되풀이했다. 중앙의 군사력이 부족하다 →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방의 자체 무장을 허용한다 → 지방 무장세력이 비대해진다 → 중앙의 권위가 한층 더 약해진다.
다만 이번에는 새로운 요인이 하나 있었다. 지방 실력자들은 군벌이면서 동시에 개혁가이기도 했다.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이들은 전쟁을 치르면서 한 가지 물음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왜 서양인을 이기지 못하는가? 이 고민에서 양무운동이 태어났다.
2. 세 층위에 걸친 발견
청나라는 3.5 버전의 부족함을 깨닫는 데 약 70년을 썼다. 이 발견 과정은 세 층위로 나눌 수 있다. 매번 이전보다 더 깊이 들어갔고, 그만큼 더 아팠다.
첫 번째 층위, 기물 — “우리 무기가 남보다 못하다.”
아편전쟁과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이 남긴 직접적인 교훈은 단순했다. 서양인의 총포가 우리 것보다 강하다는 것이었다. 해법도 간단해 보였다. 서양의 총과 대포를 사고, 병기 공장을 세우고, 군함을 만들면 된다.
여기서 양무운동이 시작되었다. 대략 1861년부터 1895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에서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등은 각지에 강남제조국·금릉기기국·한양병공창 같은 병기 공장과 복주선정국·강남조선소 같은 조선소, 그리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아시아 최대의 근대 해군인 북양함대도 이 운동의 산물이었다.
양무운동의 구호는 ‘중학위체, 서학위용’, 곧 중국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쓰임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유학과 황제 체제, 전통적 가치관은 근본이고, 총포와 기선, 전신 같은 서양의 기술은 도구라는 뜻이다. 서양인의 도구를 쓸 수는 있지만, 자기 체제와 문화를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중체서용’은 3.5 버전의 틀을 그대로 둔 채 외부 부품을 들여와 시스템의 일부 기능만 강화하는 방식이었다. 낡은 컴퓨터에 새 그래픽카드를 꽂는 셈이다. 하드웨어는 업그레이드했지만 운영체제는 그대로다.
이게 통할까?
1895년 청일전쟁이 답을 내놓았다. 안 통한다.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에 전멸했고, 청나라는 주권을 빼앗기고 나라의 체면을 구기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30년 양무운동이 쌓아 올린 군사적 성과 전부가 한 차례 해전으로 영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충격은 아편전쟁보다 훨씬 컸다. 아편전쟁의 상대는 영국이었다.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였고, ‘오랑캐’라는 범주에 넣어 버릴 수도 있었다. 청일전쟁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문화적으로 같은 뿌리를 지녔고, 지리적으로는 지척에 있었으며,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이 얕잡아 보던 이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1868년에 시작된 메이지 유신을 거쳐 20여 년 만에 봉건국가에서 산업화된 근대국가로 변했다. 일본이 할 수 있었다면 중국은 왜 못했을까?
이 물음은 좀 더 파고들 만하다. 일본이 선택한 길은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비교 대상이다. 게다가 그 선택의 결과는 황제 체제가 끝난 뒤 중국의 모든 정치세력이 맞닥뜨릴 외부 압력을 직접 빚어 낸다.
일본이 받은 도전은 중국과 같았다. 산업문명이 동아시아의 농업사회를 덮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응 방식은 중국과 전혀 달랐다.
중국은 점진적으로, 한 층위씩 대응했다. 먼저 기물을 배우고, 양무운동만으로 부족해지자 제도를 배웠으며, 무술변법마저 막히자 신해혁명을 통해 문명 모델 전체를 배우려 했다. 앞선 층위에서 실패하고 나서야 다음 층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70년에 걸쳐 세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이전보다 더 아팠다.
일본의 대응은 한꺼번에,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메이지 유신은 기물·제도·문화의 세 층위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제도에서는 폐번치현, 군사에서는 징병령, 경제에서는 지세 개혁, 정치에서는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 지식에서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유럽·미국 시찰, 문화에서는 문명개화 운동이었다. 일본은 양파를 한 겹씩 벗기지 않았다. 통째로 삼켰다.
일본은 할 수 있었는데 중국은 왜 못했을까?
일본인이 더 똑똑하거나 더 개방적이어서가 아니다. 두 나라가 구축해 놓은 구조의 바탕이 달랐기 때문이다.
중국은 2천 년 동안 가동된 대일통 황제 체제였다. 운영체제 3.5 버전은 깊이 뿌리내려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 있었다. 이를 바꾸려면 2천 년의 제도적 관성을 이겨 내야 했다. 게다가 중국은 너무 컸다. 무슨 개혁이든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이해관계가 극도로 복잡한 사회 전체에 시행해야 했다. 저항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일본은 막부와 여러 번(藩)이 권력을 나눠 가진 봉건국가였다. 천황에게는 명분만 있고 실권은 없었다. 동주의 천자와 비슷했다. 실제 권력은 수백 명의 번주 손에 흩어져 있었다. 이 구조는 중국의 중앙집권보다 더 ‘원시적’이고 뒤처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외부 충격 앞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분권 구조에서는 일부 지역부터 실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쓰마·조슈·도사·히젠 같은 번들은 전국이 함께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개혁할 수 있었다. 성공하면 다른 번이 배우면 되고, 실패해도 해당 번만 실패할 뿐이었다. 나라 전체가 함께 무너지지는 않았다.
또한 일본의 봉건제에서 천황의 권위는 명목상의 것이었다. 동주의 천자처럼 정통성은 있지만 실권은 없었다. 메이지 유신의 ‘왕정복고’는 실권을 천황에게 돌려주었다. 형식으로는 옛 제도를 되살리는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천황의 정통성을 이용해 완전히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천황은 개혁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가 되었다. 그의 권위는 전통에서 나왔지만, 그 이름으로 추진하는 의제는 근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이런 조건이 없었다. 중국의 황제는 정통성도 실권도 모두 갖고 있었다. 더구나 그 실권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3.5 버전의 핵심이었다. 황제를 도구로 삼아 황제 제도를 뒤엎을 수는 없다. 개혁을 추진하려고 손에 든 도구 자체가 바로 개혁으로 바꿔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성공에는 깊은 곳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그 대가는 청일전쟁 때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시리즈의 맺음편이 다룰 시기에 이르면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메이지 유신이 만든 구조는 ‘국가주의적 구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라 전체를 하나의 근대적 동원 기계로 개조한 것이다. ‘부국강병’ 네 글자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수단이고,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개인은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는 군사력에 봉사한다. 천황이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천황을 위해, 실제로는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이 구조는 진나라와 놀라울 만큼 닮았다. 전면적 동원, 전쟁 능력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 집단에 복종하는 개인. 차이가 있다면 진나라는 법가의 강압적 통제를 썼고, 일본은 천황 숭배라는 부드러운 통제에 근대 국가기구의 강압적 통제를 결합했다는 점이다. 그 부드러운 통제는 신도와 무사도를 근대적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두 방식을 함께 쓰니 효율은 더 높았다.
진나라의 구축 모델은 전국시대의 토너먼트에서 승리했다. 상대가 모두 같은 방식의 게임을 하고 있었고, 누구도 비대칭 전략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구축 모델 역시 동아시아의 근대화 경쟁에서 승리했다. 청일전쟁에서는 중국을,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를 꺾었다.
하지만 전국시대 편의 교훈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겼다고 해서 그 모델의 타당성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한곳에 건 진나라의 구축 모델에는 그것이 통하는 시대적 기회가 있었고, 그 창이 닫히자 단번에 부러졌다. 일본의 국가주의적 구축에도 같은 기회의 창이 있었다. 열강이 경쟁하는 환경에서는 전면적 동원 체제가 단기적인 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시스템을 먹여 살리려면 끝없이 팽창해야 하고, 내부의 이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군사적으로 한번 패하면 전체가 무너지는 그 취약성은 진나라의 취약성과 구조적으로 완전히 같았다.
그 취약성의 청구서가 만기를 맞은 해는 1945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의 일본은 아직 기회의 창 안에 있었다. 국가주의적 구축은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듯 보였고, 그 팽창 압력은 황제 체제가 끝난 뒤 중국의 모든 정치세력이 반드시 대응해야 하는 외부 환경을 이루었다. 제정 이후의 구축 모델 경쟁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지 않았다. 일본의 군사적 압력이라는 거대한 외부 제약 아래서 벌어졌다. 그 제약은 각 세력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깊이 규정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생각을 두 번째 층위로 밀어 넣었다.
두 번째 층위, 제도 — “우리 체제가 남보다 못하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엄복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지식인은 양무운동이 건드리지 않았던 결론에 도달했다. 서양인의 기물만 배워서는 부족하다. 그들의 제도까지 배워야 한다.
일본이 중국을 이긴 것은 총포가 더 좋아서가 아니었다. 중국의 북양함대는 장비에서 일본에 뒤지지 않았다. 일본에는 더 효율적으로 조직된 국가 체계가 있었다. 입헌정체, 근대 관료제, 전 국민 교육, 근대적 경제제도. 이 제도들 덕분에 일본은 자원을 동원하고 생산을 조직하고 군대를 지휘하는 일을 더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었다.
1898년 광서제는 강유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술변법을 시작했다. 백여 일에 걸쳐 과거제 개편, 신식 학교 설립, 불필요한 관직 폐지 같은 일련의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파의 구상에는 의회 설치 요구도 들어 있었다.
무술변법은 불과 103일 만에 서태후가 일으킨 정변으로 끝났다. 담사동 등 여섯 명이 처형되었고, 광서제는 유폐되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권력투쟁이었다. 서태후가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 깊은 원인은 구조에 있었다. 제도 개혁은 3.5 버전의 핵심, 곧 중앙집권 체제 자체를 건드렸다. 의회를 세운다면 황제는 선출된 대표들과 의사결정권을 나눠야 한다. 과거제를 바꾼다는 것은 약 1,300년 동안 이어진 관료 양성 방식을 바꾼다는 뜻이었다. 불필요한 관직을 없앤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밥그릇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개혁 조치 하나하나에 강력한 반대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공통된 후원자가 있었다. 서태후였다. 그녀는 구체제 전체의 기득권 집단을 대변했다.
다시 명나라 장거정의 개혁이 부딪혔던 딜레마다. 기존 구축 안에서 개혁하려면 권력을 쥔 사람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권력자 자신이 개혁으로 손대야 할 대상의 일부다. 자기 권력을 약화하는 개혁을 지지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무술변법의 실패는 한 가지를 입증했다. 3.5 버전의 틀 안에서 제도 차원의 개혁을 평화적으로 추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개혁은 매 단계마다 현재의 권력 보유자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개혁의 목표는 하필 그 권력의 배분을 바꾸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층위, 담론 — “우리 문명의 모델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뒤 일부 지식인은 더 급진적인 결론으로 나아갔다. 기물과 제도만 바꿀 일이 아니었다. 황제 체제, 유학, 가족 중심의 사회, 천조의식을 포함한 문명 모델 전체를 철저히 부정하고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쑨원의 혁명론은 이 생각을 정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고쳐 쓰지 말고 뒤엎자. 3.5 버전에 더는 패치를 붙이지 말고 완전히 새로운 운영체제로 갈아타자. 공화제, 민주주의, 입헌정치. 이것들은 3.5 버전의 패치가 아니라 전혀 다른 구축 모델이었다.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되었다. 3.5 버전의 핵심 부품 하나가 공식적으로 제거된 것이다. 과거제는 수나라에서 청말까지 1,300년 동안 작동한, 제정 중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제도였다. 그 폐지는 3.5 버전의 사회적 토대인 과거 출신 문관 계층을 밑동부터 흔들었다.
과거제 폐지의 파장은 극히 깊고 멀리 퍼졌다. 그전까지 지식인에게는 분명한 상승 경로가 있었다. 공부하고, 시험 보고, 관리가 되는 길이었다. 이 통로는 사회에서 가장 영리한 사람들을 체제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과거제가 폐지되자 그 길이 끊겼다. 신식 학교에서 길러 낸 지식인에게는 과거라는 출구가 없었다. 구체제는 그들을 원하지 않았고, 새 체제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되었다. 교육도 받았고 이상도 능력도 있지만, 갈 곳은 없었다.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지식인은 혁명에 가장 좋은 연료다. 신해혁명을 조직하고 참여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이 집단에서 나왔다. 유학생, 신식 학교 졸업생, 과거제 폐지로 전통적인 출구를 잃은 독서인들이었다.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푸이의 퇴위. 황제 체제가 끝났다.
기물·제도·담론이라는 세 층위의 발견은 운영체제 3.5 버전의 세 층위에 대응한다. 기물 차원의 학습인 양무운동은 시스템 자체를 건드리지 않으므로 가장 쉽지만 효과도 가장 제한적이다. 제도 차원의 개혁인 무술변법은 시스템의 구조를 건드리므로 저항이 가장 크고, 평화적인 틀 안에서 완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담론 차원의 혁명인 신해혁명은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므로 가장 철저하지만, 동시에 가장 통제하기 어렵다.
앞선 층위가 실패한 뒤에야 다음 층위로 떠밀려 갔다. 양무운동이 성공했다면, 청일전쟁에서 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제도를 의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술변법이 성공했다면,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무도 혁명까지 나아가지 않았을지 모른다. 뒤의 층위가 더 깊다고 해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앞의 층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더 깊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신해혁명 — 3.5 버전, 형식상의 종말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몇 주 사이 남부의 여러 성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이 수립되었고, 2월 12일 푸이의 퇴위 조서가 공포되었다.
황제 체제는 중국에서 2,132년 동안 존속했다. 진시황이 황제를 칭한 기원전 221년부터 1912년까지다.
신해혁명은 군사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그리 ‘장렬한’ 과정은 아니었다. 우창 봉기에는 우연적인 요소마저 있었다. 원래 계획이 새어 나가 어쩔 수 없이 행동을 앞당긴 것이다. 각 성의 ‘독립’도 진정한 혁명 행동보다는 지방 실력자의 기회주의적 줄서기인 경우가 많았다. 남북 간 화의의 결과는 타협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청 황제를 압박해 퇴위시키고, 쑨원은 대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넘겼다.
하지만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그 실제 과정을 훨씬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의 형식, 황제 체제를 끝냈다. 이후 황제 체제를 되살리려는 사람은 누구나 정통성의 근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역사가 이미 부정한 것을 왜 다시 가져와야 하는지,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위안스카이가 1915~1916년에 시도한 제정 복귀가 이를 입증했다. 83일이었다. 1917년 장쉰의 복벽은 더 짧았다. 12일이었다. 형식이 되돌아오려 할 때마다 수명은 더 짧아졌다. 상전이는 이미 형식의 층위에서 완결되어 있었다. 이제는 형식으로조차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형식이 끝났다고 논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앞편에서도 말했듯이 3.5 버전의 황제 체제라는 형식은 1912년에 멈췄다. 그렇다면 그 밑바닥의 논리도 멈췄을까? 권력 집중, 한 지점에 몰린 의사결정,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통제, 이견의 억압도 함께 끝났을까?
이 물음은 신해혁명 이후 십수 년 동안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황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나니 무엇으로 대체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중화민국은 세워졌다. 하지만 ‘민국’은 빈 껍데기였다. 그 안에 어떤 제도를 채워야 할까? 공화제? 어떤 공화제? 미국식 대통령제? 프랑스식 의원내각제? 아니면 다른 무엇?
1917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6년 만에 북쪽에서 뜻밖의 답이 날아왔다.
러시아 10월혁명이었다. 볼셰비키는 차르 체제 뒤에 들어선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정권을 세웠다. 이 사건이 중국에 준 충격은 청일전쟁 못지않았다. 다만 충격이 가해진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청일전쟁이 던진 충격은 ‘우리 기물과 제도가 남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10월혁명이 던진 충격은 ‘서양의 길만이 유일한 길인가’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중국 지식인이 논한 개혁안에는 모두 하나의 전제가 숨어 있었다. 양무운동은 영국의 기물을 배우고, 무술변법은 일본의 제도를 배우고, 신해혁명은 미국의 공화제를 배우려 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전제였다. 강해지려면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 차이는 얼마나 배울 것인가에 있을 뿐이었다. 기물만 배우면 최소한, 제도를 배우면 조금 더, 문명 모델 전체를 배우면 전부였다.
10월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내놓았다. 서양의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서양에 반대하는 길을 갈 수도 있다. 자본주의도 의회민주주의도 받아들이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획경제, 레닌주의 정당이라는 전혀 새로운 구축 모델로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길은 자신이 서양보다 더 선진적이라고 주장했다. 서양의 대체재가 아니라 서양을 넘어선 존재라고 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10월혁명이 가져온 것은 새로운 구축 방안만이 아니라 새로운 구축 논리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양의 구축, 황제 체제의 구축, 공화제의 구축은 모두 하나의 문명 전통 내부에서 이루어진 반복적 개량이었다. 반면 10월혁명이 가져온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구축은 독일 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러시아 혁명의 실천이라는 전혀 다른 지적 전통에서 왔다. 계급, 잉여가치, 역사유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그 개념의 틀에 대응하는 것은 중국의 지식 체계 안에 전혀 없었다.
이는 황제 체제가 끝난 뒤의 구축 경쟁이 단순히 ‘3.5 버전의 서로 다른 업그레이드 방안 사이의 경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 논리들 사이의 경쟁’이었다. 서양 자본주의의 길이 하나,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주의의 길이 또 하나 있었다. 그리고 중국 자체의 2천 년 황제 전통은, 형식이 폐지되었어도 밑바닥의 논리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세 가지 논리는 서로 충돌하고 스며들고 서로를 바꾸어 놓았다.
러시아가 중국에 끼친 영향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았다.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소련은 청나라 이래 중국 북방에서 가장 큰 영토 위협이었다. 17세기의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19세기의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중국 북부와 서북부의 광대한 영토를 잠식했다. 청나라가 받은 외부 압력은 바다의 서양 열강에서만 오는 한 방향의 압력이 아니었다. 두 방향이었다. 바다에는 영국·프랑스·일본이 있었고, 육지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10월혁명 뒤 이 북쪽 이웃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내밀었다.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얼굴이 소련의 ‘국제주의적’ 얼굴로 바뀌었다. 소련은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누리던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상당수를 유지했지만 말이다. 혁명 이론과 조직 경험을 수출했고, 중국의 혁명세력이 레닌주의식 정당을 만들도록 도왔다. 지정학적 압력은 영토 잠식에서 이념 침투로 바뀌었다. 뒤의 영향은 앞의 영향보다 더 깊고 오래갔을지도 모른다.
3.5 버전은 제거되었지만 새 운영체제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고를 수 있는 설치 패키지는 적어도 셋이었다. 미국·영국 모델의 서양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레닌 모델의 소비에트 러시아 사회주의, 그리고 중국의 전통과 근대화의 요구를 결합하려는, 아직 형태가 잡히지 않은 어떤 자생적 방안이었다. 이 ‘운영체제 공백기’는 1912년에 시작되었고, 맺음편에서 다룰 시기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신해혁명은 성공적인 깎아내기였다. 기존의 구축물을 허물었다. 하지만 옛 구축을 허무는 것과 새 구축을 완성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은 짝을 이루어야 한다. 명말 청초 세 세력의 충돌이 남긴 교훈이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맞닥뜨린 것은 바로 이 짝을 맞추는 문제였다. 황제 체제를 무너뜨린 혁명세력, 곧 깎아내기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받아들이고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새 제도, 곧 구축은 아직 없었다.
이어서 펼쳐질 이야기는 운영체제가 사라진 폐허 위에서 여러 구축 방안이 경쟁하는 이야기다.
4. 청나라가 순환 법칙에 남긴 마지막 기여
깎아내기·구축의 순환 법칙 안에서 청나라 268년의 위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운영체제 3.5 버전이 마지막으로 한 차례 온전히 가동된 시기이자, 그 운영체제가 역사적 유효기간의 끝과 맞닥뜨린 시기였다.
첫째, 선택적 접목은 이민족 통치의 최선의 해법이다. 다만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안에서 그렇다.
전면적인 한화의 대가로 육진의 난을 치른 북위, 융합을 거부한 채 97년을 어찌어찌 버티다 무너진 몽골의 원나라와 비교하면, 청나라의 선택적 접목은 가장 오래 유지되었다. 거의 200년 동안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최선의 해법이 대가 없는 해법은 아니다. 접목 부위의 이음새는 줄곧 남아 있었고, 청말에 안팎의 압력이 그 틈을 찢어 놓았다.
둘째, 조정의 한계는 틀 자체다.
옹정제의 정밀한 조정은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정으로 틀을 넘어설 수는 없다. 권력 집중, 황제 제도, 과거제에 기반한 문관 체계라는 틀의 핵심은 조정의 전제인 동시에 조정의 한계였다. 산업문명의 도전 앞에서 틀 자체가 문제가 되었을 때, 조정은 타이타닉호 갑판의 의자를 다시 배열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셋째, 운영체제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 기간은 시스템의 품질이 아니라 환경이 변하는 속도에 달려 있다.
3.5 버전의 품질은 높았다. 2천 년의 가동이 가장 좋은 증거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었다. 산업혁명은 세상이 변하는 속도를 열 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3.5 버전의 적응 속도로는 따라갈 수 없었다. 3.5 버전의 잘못은 아니다. 그것은 세기 단위로 변하는 농업문명의 속도에 맞추어 설계되었지, 10년 단위로 변하는 산업문명의 속도에 맞추어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넷째, 기물·제도·담론이라는 세 층위의 발견은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는 모든 사회가 거치는 과정이다.
격차를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가장 바깥층에서 시작해 차츰 안으로 들어간다. 먼저 무기의 차이가 보인다. 무기는 눈에 보이니 이해하기 쉽다. 그다음에는 제도의 차이가 보인다. 제도는 추상적이니 이해하기가 더 어렵다. 마지막으로 문명 모델의 차이가 보인다.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일이니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층위를 하나 내려갈 때마다 발견은 더 아프다. 자신의 정체성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총을 바꾸는 것은 아프지 않다. 제도를 바꾸려니 아프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를 바꾸는 것, 그것이 가장 깊은 아픔이다.
다섯째, 그리고 가장 깊은 사실은 이것이다. 황제 체제가 끝난 것은 어느 황제가 형편없어서도, 어느 제도 설계에 결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상전이가 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 체제의 밑바닥에는 한 가지 가정이 있다. 다른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한 사람, 곧 황제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은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명제와 정면으로 모순된다. 모든 사람이 목적이라면 누구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부릴 권리는 없다. 황제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모순은 황제 체제의 2천 년 내내 존재했다. 다만 여러 완충 장치가 이를 관리했다. 유가의 인정(仁政) 담론, 과거제의 상승 통로, 천인감응의 견제 장치가 그런 것들이었다. 완충 장치는 모순의 날을 무디게 할 뿐, 모순을 없애지는 않는다.
산업문명의 도래는 이 모순이 날카로워지는 속도를 높였다. 산업문명은 경제의 차원에서 인간을 해방했다. 개인은 조정 대신 시장을 통해 자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지식의 차원에서도 인간을 해방했다. 인쇄술과 신식 교육 덕분에 지식은 더 이상 소수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정치의 차원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내놓았다. 대의제가 황제 없이도 사회가 돌아갈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경제적·지적·정치적 해방이 동시에 가속되면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상전이는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다. 황제 체제는 타도된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면 분명 타도라는 과정이 있었지만, 황제 체제를 도태시킨 것은 상전이였다. 그 밑바닥의 가정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자기 인식과 타협할 수 없는 충돌을 일으켰다.
잔여항은 소멸하지 않는다. 잔여항은 가속되고 있다. 가속의 방향은 주체의 해방이다.
다음 편은 이 시리즈를 맺는 글이다. 청말에서 민국 초기로, 황제 체제의 붕괴에서 군벌의 혼전으로, 통일을 향한 노력에서 항일전쟁 전야로 나아간다. 황제 체제가 끝난 뒤 여러 구축 방안이 폐허 위의 같은 무대에서 경쟁했다. 저마다 같은 물음에 답하려 했다. 2천 년 된 3.5 버전을 제거한 뒤 중국은 어떤 새 운영체제를 설치해야 하는가? 마지막에 닿을 물음은 이것이다. 2천 년 동안 되풀이된 깎아내기와 구축은 무엇을 입증했는가? 잔여항은 왜 소멸하지 않는가? 깎아내는 날이 덜 날카로워서도, 구축이 충분히 훌륭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인간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구축도 이 사실을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다. 구축은 닫히지 않는다. 인간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깎아내기는 멈추지 않는다. 잔여항이 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