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편: 청 전·중기, 마지막 미세 조정
청의 선택적 접목은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에 들어온 뒤 한 세기 안에 자리를 잡았다. 강희제 치세 중반인 1680년대쯤이면 변발령에 대한 저항은 대체로 가라앉았고, 삼번의 난은 평정되었으며, 대만의 정씨 정권도 무너졌다. 만주족과 한족을 나란히 두고 운영하는 이원 체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청의 선택적 접목은 산해관을 넘어 중국 본토에 들어온 뒤 한 세기 안에 자리를 잡았다. 강희제 치세 중반인 1680년대쯤이면 변발령에 대한 저항은 대체로 가라앉았고, 삼번의 난은 평정되었으며, 대만의 정씨 정권도 무너졌다. 만주족과 한족을 나란히 두고 운영하는 이원 체제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시대, 1661년부터 1799년까지는 청의 황금기였다. 중국 황제 체제의 마지막 황금기이기도 했다. 그 뒤에는 다시 오지 않았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세 황제가 한 일은 체제의 형태를 새로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중앙집권, 과거제, 군현제라는 3.5 버전의 기본 틀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그들이 한 일은 이미 구축된 체제를 정교하게 조정하는 것이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같은 틀 안에서 매개변수를 바꾸고, 허점을 메우고, 성능을 끌어올렸다. 이 미세 조정은 황제 체제라는 틀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 뒤에 쇠퇴가 찾아온 것은 조정을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조정의 대상인 황제 체제의 틀 자체가 역사적 유효기간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강희제: 접목을 완성하다
강희제(재위 1661~1722)의 가장 큰 공적은 청이 중국 본토에 들어온 초기에 끝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한 데 있었다. 만주족 정권과 한족 사회의 접목을 임시 상태에서 안정된 상태로 바꿔 놓았다.
삼번의 난을 평정하다.
오삼계, 경정충, 상가희라는 세 한족 번왕은 남방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청에 복종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인 군사력과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강희제가 번의 폐지를 결정하자 오삼계와 경정충, 그리고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은 1673년부터 1681년까지 8년 동안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청군이 이겼다.
삼번의 난이 중요한 까닭은 군사적 승리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청이 한족 군벌에게 기대지 않고도 남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데 있었다. 청이 처음 산해관을 넘어왔을 때는 남방 정복에 오삼계 같은 한족 장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팔기군이 남방의 지형과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번의 난은 그 의존이 끝났음을 보여 주었다. 청은 이제 자기 힘으로 중국 전역을 다스릴 수 있었다.
대만을 정복하다.
1683년 청군이 대만을 정복하면서 정씨 정권은 멸망했다. 대만은 청의 영토에 편입되었고, 부가 설치되어 복건성의 관할에 들어갔다. 명의 정통을 잇는다고 자처하던 마지막 정권이 사라진 것이다.
남방을 순행하고 문화로 우호를 표시하다.
강희제는 여섯 차례 남순에 나섰다. 뒤에 건륭제도 이를 본떠 여섯 번 남순했지만, 규모와 호사스러움은 강희제를 훨씬 뛰어넘었다. 강희제의 목적은 남방을 중시한다는 것, 한족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었다. 그는 주원장의 무덤인 명효릉을 직접 참배하고, ‘치륭당송(治隆唐宋)’, 곧 다스림이 당과 송보다 융성했다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 겉으로는 명을 칭송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청이 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강희제는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 같은 대규모 문화 사업의 편찬도 주관했다. 이런 사업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만주족 황제도 중국 문화를 잘 안다는 것, 황제의 문화적 소양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편찬을 통해 지식을 정의하는 권한을 장악하는 일이었다. 어떤 지식을 싣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조정이 결정했다.
구축의 관점에서 강희제가 한 모든 일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접목을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입관 초기의 접목은 되돌릴 수 있었다. 만주족의 통치가 충분히 큰 위기를 맞으면 한족 사회가 다시 그것을 밀어낼 수도 있었다. 삼번의 난은 바로 그런 시도였다. 강희제는 삼번을 평정하고, 대만을 차지하고, 문화적 우호를 표시함으로써 접목을 ‘뽑아낼 수 있는 상태’에서 ‘이미 한 몸으로 자라난 상태’로 바꾸었다. 강희제 말년의 만주족·한족 이원 체제는 더 이상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임시방편이 아니었다. 사회가 묵시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묵시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원한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간의 반만주 정서는 줄곧 남아 있었다. 천지회 같은 비밀결사도 늘 ‘청을 타도하고 명을 되살리자’는 반청복명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원한은 주류 정치의 의제에서 지하의 암류로 밀려나 있었다. 더 이상 대규모의 공개 저항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접목은 끝났다.
2. 옹정제: 체제를 다듬는 기술의 대가
옹정제(재위 1722~1735)는 중국 황제 체제의 역사에서 가장 쉽게 과소평가되는 군주 가운데 하나다. 재위 기간은 겨우 13년. 강희제의 61년과 건륭제의 60년 사이에 끼어 있으니 존재감이 크지 않다. 하지만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청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제도 설계자였을지도 모른다.
옹정제는 기술의 대가였다. 거창한 전략이나 원대한 이상을 앞세우는 사람이라기보다, 제도의 세부에 놀랄 만큼 민감하고 끈기 있게 매달리는 조정자였다. 그가 손댄 일은 하나하나 놓고 보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구축된 체제가 아파하는 특정 지점을 정확히 짚었다.
비밀 주접(奏摺) 제도.
옹정제는 비밀 주접 제도를 대폭 확대했다. 수많은 중하급 관리가 중간 단계를 전혀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직접 비밀 상주문을 올릴 수 있게 했다.
이 제도의 기능은 그저 ‘남의 잘못을 몰래 일러바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핵심은 공식 행정 체계와 별개로 움직이는 정보 통로를 만드는 데 있었다.
공식 행정 체계에는 고질적인 약점이 있다. 정보가 여러 단계를 거쳐 위로 올라가는 동안 걸러지고, 뒤틀리고, 감춰진다는 것이다. 지방관은 자기의 직무 태만을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상관은 나쁜 소식을 더 윗선에 보고하지 않는다. 층위가 많아질수록 황제에게 도달하는 정보와 실제 상황 사이의 거리는 벌어진다.
비밀 주접 제도는 이 정보 여과망을 우회했다. 7품 현령도 직속 상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 황제에게 곧바로 알릴 수 있었다. 한 순무가 다른 순무의 행적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수도 있었다. 비밀 주접을 올릴 권한을 가진 사람은 모두 황제의 눈과 귀였다. 정작 그들끼리는 누가 그 권한을 가졌는지, 누가 무슨 글을 올렸는지 알지 못했다.
감시 효과는 강력했다. 관리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어떤 부하나 동료가 지금 황제에게 몰래 보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불확실성 자체가 족쇄였다. 누가 지켜보는지 모르니 함부로 굴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잔여항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비밀 주접 제도는 적은 비용으로 정보의 편향을 바로잡는 도구였다. 행정 체계의 구조는 바꾸지 않았다. 정보는 여전히 공식 경로로 올라갔다. 다만 그 구조 옆에 예비 통로 하나를 더 냈다. 공식 통로가 막혀 정보가 걸러지더라도 예비 통로는 열려 있었다. 두 경로로 들어오는 정보는 서로 대조할 수 있었다. 공식 보고에는 만사가 평온하다고 쓰였는데 비밀 주접에는 큰일이 났다고 쓰였다면, 황제는 공식 보고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군기처.
옹정제는 군기처를 설치했다. 군기처는 기존의 내각을 대신해 실질적인 최고 행정 중추가 되었다.
군기처의 특징은 극단적인 간소화였다. 군기대신에게는 독립된 관청이 없었다. 황궁의 작은 방 하나에서 일했다. 독자적인 부하 조직도 없었다. 다른 부서의 인력을 빌려 썼다. 법으로 정해진 직권도 없었다. 모든 권한은 황제가 그때그때 부여했다.
이 설계의 의도는 명백했다. 행정 중추가 권력의 중심으로 변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명의 내각이 변해 온 과정은 하나의 법칙을 보여 주었다. 제도화된 행정 중추는 어느 것이든 시간이 흐르면 자체적인 권력 기반을 쌓고, 결국 황제를 제약하는 세력으로 변한다. 군기처의 해법은 행정 중추 자체가 제도화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군기대신의 권한은 황제가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었다. 애초에 제도가 보장한 권한이 아니라 황제가 잠시 내준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군기처는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황제 개인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극도로 효율적이었다. 의사결정의 사슬은 ‘황제 → 군기대신 → 집행 기관’의 세 고리에 불과했다. 동시에 황제 개인에게 극도로 의존했다. 황제가 일을 놓으면 군기처도 멈췄다. 다만 옹정제와 건륭제는 둘 다 일중독자였으므로, 당분간은 이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지정은제.
인두세인 정세를 토지세에 합치는 개혁이었다. 그전에는 성인 남성이라면 땅이 있든 없든 한 사람 몫의 인두세를 내야 했다. 땅 없는 가난한 사람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낼 수 없으면 도망쳤다. 달아나 호적에서 사라진 사람에게서는 세금을 거둘 수 없으니, 그 부담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부담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도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악순환이었다.
지정은제는 인두세를 없애고 그 몫을 전부 토지세에 합쳤다. 땅이 있는 사람은 더 내고, 없는 사람은 내지 않았다. 이 한 번의 칼질이 앞의 악순환을 끊었다.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인두세 때문에 도망길로 내몰리지 않았다. 세제도 단순해졌다. 세목 하나가 줄어들면 행정 비용과 부패가 끼어들 여지도 한 겹 줄어든다. 그만큼 밑바닥 사람들의 생존 조건이 나아졌다.
구축의 관점에서 지정은제는 3.0 버전 이래 내려온 오래된 잔여항에 다시 내놓은 답이었다. 토지 겸병 → 빈민의 토지 상실 → 세금의 압박 → 유민 → 봉기. 이 사슬은 전한 때부터 작동하고 있었다. 균전제는 토지 매매를 제한해 사슬의 첫머리를 끊으려 했지만, 효과가 제한적이었고 끝내 무너졌다. 일조편법은 조세 절차를 단순하게 만들어 중간에서 생기는 부패를 줄이려 했다. 지정은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과세의 바탕을 ‘사람 수와 토지’에서 오로지 ‘토지’로 좁힌 것이다.
개혁은 매번 같은 사슬의 서로 다른 고리를 건드렸다. 어느 개혁도 토지 겸병을 뿌리 뽑지는 못했다. 토지 사유제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번 그 사슬에 걸린 압박을 어느 정도는 덜어 주었다.
개토귀류.
귀주·운남·광서 등 서남 지역에서 소수민족의 세습 수장인 토사를 중앙이 임명하는 유관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유관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교체할 수 있는 관리였다.
토사 제도는 이른바 ‘이이치이’, 오랑캐를 써서 오랑캐를 다스린다는 전략이었다. 중앙은 소수민족 수장의 세습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 대가로 명목상의 복종을 받았다. 봉건제와 비슷한 논리다. 너는 나를 대신해 이 땅을 다스려라. 네 지위는 대대로 물려주어도 좋다.
개토귀류는 소수민족 지역에 군현제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세습을 깨고 중앙이 직접 통제한다. 중앙집권이 제국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나간 것이다.
옹정제는 개토귀류를 빠르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무장 저항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그는 군사력으로 단호하게 눌렀다. 옹정제 말년이면 서남 지역 대부분에서 개토귀류가 마무리되어 있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개토귀류는 3.0 버전의 ‘편호제민’, 백성을 호적에 올려 국가가 직접 다스린다는 발상이 2천 년 뒤에도 이어진 것이었다. 국가의 통제력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한족 밀집 지역에서 소수민족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토사·제후·호족 같은 중간층은 차츰 제거되고, 국가는 개인과 직접 마주 섰다. 진에서 청까지 황제 체제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 것은 이 확장의 논리였다.
3. 건륭제: 정점이 곧 전환점이다
건륭제는 1735년부터 1796년까지 제위에 있었고, 이후 1799년까지 태상황으로 남았다. 재위 60년, 실질적인 집권 63년. 중국 역사에서 실제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황제였다.
건륭제 시대의 청은 황제 체제의 여러 지표에서 역대 최고치에 올랐다. 영토는 약 1,300만 제곱킬로미터로 가장 넓었다. 인구도 가장 많아 건륭제 말년에는 3억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 자체가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경제 총량은 당시 세계 최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군사력은 제국의 변경을 지켜 냈다. 이른바 ‘십전무공’, 열 번의 완벽한 무공이라는 자랑에는 물론 부풀린 대목도 있었다.
그러나 정점은 곧 전환점이었다.
인구 폭발.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중국 인구는 약 1억 명에서 3억 명으로 늘었다. 원인은 여럿이었다. 세 황제의 치세 동안 사회가 안정되었고, 지정은제가 하층민의 부담을 줄였다. 인두세가 사라지자 농민들은 아이를 더 낳을 엄두를 냈다.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옥수수·고구마·감자 덕분에 농사짓기 불리한 땅에서도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선까지 인구 증가는 좋은 일이다. 노동력이 늘고 경제가 커진다. 그러나 토지와 자원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는 순간, 인구 증가는 거대한 잔여항이 된다.
건륭제 말년에는 1인당 경지 면적이 위험한 수준까지 줄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산지·늪지·사막 변두리 같은 한계지로 밀려났다. 이런 땅은 생산성이 낮고 생태적으로 취약해서, 재해와 흉년이 한 번 닥치면 곡식 한 톨 거두지 못했다. 전통적인 구휼 장치도 힘에 부쳤다. 정부의 곡물 비축인 상평창과 민간의 곡물 비축인 의창으로는 급격히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인구 압력은 독특한 잔여항이다. 제도 설계의 어느 결함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정은제 같은 ‘좋은’ 정책이 인구 증가를 더 빠르게 했다. 제도의 성공이 문제를 낳은 것이다. 정책 덕분에 백성의 살림이 안정되면 사람들은 아이를 더 낳는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자라면 더 많은 땅과 자원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자원이 늘어나는 속도는 인구가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성공은 스스로 자기 몫의 잔여항을 만들어 낸다.
관료 행정의 부패.
건륭제 치세 중후반의 관료 체계는 부패가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화신(和珅)이다. 그는 건륭제 말년 20여 년 동안 권력을 휘둘렀고, 개인적으로 쌓은 재산이 청의 몇 년 치 재정 수입과 맞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신만의 일이 아니었다. 관료 체계 전체가 구조적으로 썩어 있었다.
부패의 뿌리는 몇몇 사람의 못된 품성이 아니었다. 물론 품성이 못된 사람도 있었다. 근원은 제도 설계의 구조적 결함에 있었다. 청은 명의 저임금제를 이어받았기에 관리의 공식 봉록은 아주 적었다. 그런데 실제 권한은 막대했다. 관할 지역의 세금과 사법, 행정을 모두 쥐고 있었다. 낮은 보수에 큰 권력이 더해지면 제도 자체가 부패를 부추긴다. 합법적으로 벌 수 있는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불법으로 벌 기회는 엄청나게 열어 놓는다면, 통계적으로 사람은 후자를 택하기 쉽다.
옹정제의 ‘양렴은’은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였다. 공식 봉록 외에 청렴을 지키라는 뜻으로 별도의 돈을 지급했다. 하지만 양렴은으로도 관리의 실제 지출, 곧 교제 비용과 막료의 인건비, 교통비 등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더구나 그 양렴은마저 윗사람이 중간에서 떼어 가기도 했다.
부패는 황제 체제의 만성병이었다. 한 번도 완치된 적이 없었다. 개국 초기나 강력한 황제가 다스리는 시기처럼 특정한 때에만 낮은 수준으로 억눌렸을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억제력이 약해지고 부패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재발 자체는 특정 인물이 누구냐에 달린 일이 아니었다. 옹정제가 부패를 누를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 부지런하고 철권을 휘두르는 개인이었기 때문이다. 건륭제가 말년에 고삐를 늦추자 부패는 돌아왔다. 늙어서, 자만해서, 화신이 비위를 잘 맞춰 줘서 고삐를 늦춘 것이다.
문화 통제의 강화, 문자의 옥.
문자의 옥은 건륭제 때 청 역사상 절정에 이르렀다. 수많은 지식인이 자기가 쓴 글의 몇몇 글자나 구절이 ‘반만주’ 또는 ‘불경’으로 해석되었다는 이유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건륭제가 편찬을 주관한 《사고전서》 역시 고전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한편, ‘문제 있다’고 여긴 문헌을 대거 없애거나 고쳐 썼다.
구축의 관점에서 문자의 옥과 분서갱유는 기능상 같은 부류다. 다른 담론을 없애고 기존에 구축된 체제만이 유일한 질서로 남게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진시황의 분서는 거친 물리적 제거, 곧 금지된 책을 불태우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건륭제의 문자의 옥은 정교한 사상 통제였다. 책을 금지하고 없애는 데 더해 그 안의 몇 글자와 구절을 고치거나, 그 글자와 구절을 이유로 글쓴이를 죽였다.
정교한 억압은 거친 억압보다 효과적이고, 더 음험하다. 거칠게 누르면 공개적인 반항을 부른다. 분서가 천하 유생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정교하게 누르면 침묵이 생긴다. 저항의 침묵이 아니라 자기 검열의 침묵이다. 어느 글자, 어느 구절이 화를 부를지 모르니 아무것도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상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것이었다.
사상이 얼어붙으면 황제 체제의 단기적 안정에는 도움이 된다. 조정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적응력에는 치명적이다. 새로운 도전에 맞설 새로운 생각을 내놓을 사람이 없어진다. 19세기의 도전, 산업 문명과 서구 열강, 전혀 새로운 기술과 사상이 들이닥쳤을 때 청은 자기 지식인 계층이 이미 독립적으로 사고할 능력과 습관을 잃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여러 세대의 자기 검열이 그들의 문화적 유전자에서 비판적 사고를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문자의 옥이 남긴 잔여항의 청구서는 곧바로 날아오지 않았다. 반세기 뒤에야 만기가 돌아왔다. 전례 없는 위기에 맞서려면 사상의 혁신이 가장 절실한 순간, 청은 자신의 사상 창고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건륭제 시대의 문자의 옥이 그 창고를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녹이는 데는 시간이 든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4. 백련교의 난: 3.5 버전의 노인병이 도지다
건륭제 말년에서 가경제 초기로 이어지는 1796~1804년, 사천·호북·섬서 세 성에서 백련교의 난이 일어났다.
뒤에 일어날 태평천국과 비교하면 봉기의 규모가 특별히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적 의미는 지극히 중요했다. 청의 ‘태평성대’라는 표면 아래 쌓여 온 여러 잔여항이 임계점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개 분출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백련교의 난에 참여한 이들은 주로 유민과 가난한 농민이었다. 인구 압력과 토지 겸병, 관료 부패의 피해자들이었다. 봉기는 종교의 형태를 띠었다. 세속의 통로가 완전히 막힌 뒤 밑바닥의 잔여항이 종교를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후한의 태평도, 원 말기의 백련교, 명 말기의 문향교와 같은 패턴이 또 한 번 되풀이되었다.
봉기는 진압되었다. 그러나 진압 방식은 구축된 체제의 노인병을 드러냈다. 청의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전투력은 낮았고, 사기는 무너졌으며, 부패는 심각했다. 실제로 힘을 쓴 쪽은 지방 단련이었다. 지방 신사층이 스스로 조직한 민병대였다.
지방 단련의 등장은 중앙의 군사력이 더 이상 내부 위기를 홀로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지방 사회가 스스로 조직하는 힘에 기대야 했다. 구조상으로 후한 말기의 상황과 완전히 같았다. 중앙군이 싸우지 못하자 지방의 유력자들이 자기 손으로 무장 세력을 꾸려 위기에 맞선 것이다.
백련교의 난은 청 후반부 역사의 예고편이었다. 인구 압력, 관료 부패, 군사력 쇠퇴, 지방 세력의 부상, 종교의 옷을 입은 하층민의 저항까지, 이후의 모든 주제가 거기에 예고되어 있었다. 반세기 뒤 태평천국 운동에서는 이 주제들이 전면적으로 펼쳐진다.
5. 건륭제 말년, 세계 속 중국의 위치: 결정적인 기회의 창
잠깐만 중국에서 눈을 돌려 보자. 바로 그 시각,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776년, 건륭 41년. 북아메리카의 열세 식민지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에게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받았다. 여기에는 생명권, 자유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된다.”
1787년, 건륭 52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가 《미합중국 헌법》을 채택했다. 삼권분립, 연방제, 정기적인 선거, 평화로운 권력 이양.
같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한쪽에서는 건륭제가 황제 중심의 집권 체제를 극한까지 조정하고 있었다. 비밀 주접, 군기처, 문자의 옥.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황제 없는 체계를 설계하고 있었다. 권력을 나누고,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새로 맡겼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게 했다.
두 답안이 풀고 있는 문제는 같았다. 인간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건륭제의 답안은 3.5 버전을 끝까지 최적화한 것이었다. 2천 년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었다. 핵심 논리는 이렇다. 가장 뛰어난 운영자, 곧 성군을 찾아라. 그에게 최대한의 권력을 주어라. 모든 결정을 그에게 맡겨라. 체계의 한계는 곧 운영자의 한계다.
필라델피아의 답안은 전혀 다른 길로 갔다. 핵심은 최고의 운영자를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운영자는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고 전제한 뒤, 그 잘못의 대가를 최소화하는 제도를 설계하는 데 있었다. 권력을 나누는 삼권분립은 권력이 한곳에 모인 채 악인의 손에 들어가면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필요했다. 선거를 통해 권력의 담당자를 정기적으로 다시 정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운영자도 오래 머물면 부패하기 때문이었다. 권리장전으로 권력을 명문화해 제한하는 것은 누가 권력을 쥐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두 체제 형태의 근본적인 차이는 잔여항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3.5 버전은 잔여항을 없애려 했다. 권력을 집중시켜 모든 불확실성과 이견, 불복종을 억눌렀다. 이상적인 상태는 잔여항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질서였다.
필라델피아의 구상은 잔여항을 수용하려 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이해관계는 반드시 충돌하므로, 잔여항을 없앨 수 없다고 전제했다. 그래서 그것을 제거하려 들지 않았다. 선거와 표현의 자유, 사법부의 독립 같은 절차를 설계해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잔여항이 분출하게 했다. 이상적인 상태는 잔여항의 부재가 아니라 그 분출이 제도화된 상태였다.
여기서 가치 판단을 하지는 않겠다. 두 체제 형태는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태어났고, 저마다 다른 문제에 응답했다. 다만 기록해 둘 사실이 하나 있다. 2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필라델피아의 구상은 수많은 수정을 거치면서 여전히 작동한다. 3.5 버전의 황제 체제는 그 형식이 1912년에 끝났다. 그러나 그 밑바탕의 논리까지 정말 작동을 멈췄는가. 그 질문 자체가 하나의 잔여항이다. 형식은 폐지할 수 있어도 논리는 형식보다 오래간다. 이 문제는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글에서 다시 다루겠다.
건륭제의 중국으로 돌아오자. 그의 통치가 저물던 1790년대,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1793년 영국은 매카트니 사절단을 중국에 보내 무역 개방과 외교 관계 수립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천조의 대국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거절을 두고 거듭 물었다. 건륭제가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청이 18세기 말에 영국과 정식 외교·무역 관계를 맺었다면 어땠을까.
구축의 관점에서 건륭제의 거절은 한 개인의 판단 착오가 아니었다. 3.5 버전 운영체제의 논리에서 나온 결과였다.
3.5 버전의 천하관은 동심원 구조였다. 한가운데 중국이 있고, 그 둘레에 조선·베트남·류큐 같은 번속국이 있었다. 그 바깥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땅, 이른바 오랑캐의 세계였다. 모든 외교 관계는 이 동심원 안에서 처리되었다. 네가 조공을 바치러 오면 내가 상을 내린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위계 관계였다.
영국이 요구한 것은 대등한 외교 관계였다. 당신도 대사를 보내고 나도 대사를 보낸다. 당신의 사절과 나의 사절은 지위가 같다. 3.5 버전의 동심원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였다. 천조와 오랑캐가 어떻게 같은 지위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건륭제가 매카트니를 거절한 것은 개인적으로 고집이 세서가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고집이 세기는 했다. 그는 3.5 버전의 외교 논리를 충실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이 논리는 앞선 2천 년의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서 잘 작동해 왔다. 그동안의 모든 외부 세력, 흉노·돌궐·몽골·일본은 동심원 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은 그 틀 밖에 있었다. 조공 관계로 다룰 수 있는 ‘오랑캐’가 아니었다. 산업 문명이라는 전혀 새로운 문명의 형태였다. 그것이 던지는 도전은 3.5 버전 운영체제에 설정된 모든 매개변수의 범위를 넘어섰다.
3.5 버전이 자기 지식의 경계 밖에 있는 것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전의 도전들은 무장들의 반란이든 농민 봉기든, 문벌의 독점이든 이민족의 침입이든 모두 체계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체계에는 그런 도전을 다뤄 본 경험과 도구가 있었다. 산업 문명은 달랐다. 단지 더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실제로 더 강하기도 했지만, 핵심은 종류 자체가 다른 상대라는 데 있었다. 더 강한 상대를 이기려면 내가 더 강해지면 된다. 종류가 다른 상대를 마주하려면 나 자신이 다른 종류의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 뒤의 일은 앞의 일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어렵다.
건륭제 말년은 결정적인 기회의 창이었다. 청이 그때 산업 문명의 도전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시작했다면, 조정을 위한 수십 년의 여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 시점의 청은 산업 문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틀, 곧 근대 과학과 경제학, 국제법이 청의 지식 체계에는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지식의 틀 안에 대응물이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 창을 놓친 대가는 40여 년 뒤부터 청산되기 시작했다. 1840년, 아편전쟁이었다.
6. 청 전·중기가 주기 법칙에 보탠 것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에서 강희·옹정·건륭 시대의 자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조정이자 가장 정교한 조정이었다. 그 성취는 실재했다. 그러나 조정이 도달할 수 있는 천장도 분명했다.
첫째, 조정에는 상한선이 있다.
옹정제는 황제 체제 역사상 가장 정교한 조정자였다. 비밀 주접 제도, 군기처, 지정은제, 개토귀류. 어느 것이든 구축된 체제의 구체적인 아픈 곳을 정확히 짚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조정도 틀 자체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그 한계가 무엇인가. 권력의 집중이다. 모든 개혁이 황제 개인의 능력과 의지에 달려 있었다. 옹정제가 살아 있을 때 체계는 최적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가 죽자 매개변수들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건륭제 말년의 부패와 나태는 그 어긋남의 결과였다.
조정자는 체계를 국소적인 최적점까지 밀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국소 최적이 곧 전체의 최적은 아니다. 전체의 최적 상태에 이르려면 틀 자체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조정은 그 틀을 바꾸지 않는다.
둘째, 성공이 잔여항을 만든다.
지정은제로 하층민의 부담이 줄어듦 → 인구 폭발 → 1인당 자원 감소 → 새로운 사회 위기. 좋은 정책이 좋은 결과인 인구 증가를 낳고, 그 좋은 결과가 인구 과잉이라는 새 문제를 낳았다. 정책 차원에서 나타난 잔여항 보존이다.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그 해결책 자체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낸다.
셋째, 사상을 얼린 대가는 뒤늦게 청구된다.
문자의 옥은 사상을 얼렸다. 건륭제 시대에는 얼려 놓아도 대가가 없는 듯 보였다. 사회는 안정되었고 조정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다. 청구서는 반세기 뒤에 돌아왔다. 산업 문명의 도전에 맞설 사상의 혁신이 필요해졌을 때, 청의 지식인 계층은 이미 혁신할 능력과 습관을 잃은 뒤였다.
뒤늦게 만기가 돌아오는 대가가 가장 위험하다. 이 시리즈에서 거듭 등장하는 교훈이다. 조광윤이 술자리에서 장수들의 병권을 거둔 일, 건륭제의 문자의 옥, 주원장의 해금 정책. 어느 것이든 대가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선택하는 순간에는 아무 대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 뒤에야 청구서가 도착한다. 그때는 이미 선택을 고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뒤다.
넷째, 3.5 버전의 역사적 유효기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3.5 버전을 잘못 설계했기 때문은 아니다. 설계는 훌륭했다. 한 무제부터 건륭제까지 2천 년 동안 작동했다는 사실이 그 질긴 생명력을 증명한다. 하지만 어떤 체계에도 유효기간은 있다. 유효기간은 체계 자체의 품질이 아니라 환경이 변하는 속도에 달려 있다.
3.5 버전의 설계는 환경이 천천히 변한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농업 사회는 실제로 천천히 변했다. 기술의 진보는 세기 단위로, 인구의 변동은 세대 단위로, 사회 구조의 변화는 왕조 단위로 이루어졌다. 3.5 버전에는 이런 느린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환경이 변하는 속도를 열 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기술은 10년 단위로 진보하고, 경제 구조는 수십 년 사이에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3.5 버전의 적응 속도로는 환경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조정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조정 속도마저 틀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집권 체제의 의사결정 속도는 황제 한 사람의 반응 속도에 달려 있었다.
환경이 변하는 속도가 체계가 적응하는 속도를 앞지르면, 체계에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청은 건륭제 말년에 그 카운트다운에 들어섰다. 1840년, 그 종소리가 처음 울렸다.
다음 편은 청 후기, 태평천국과 양무운동, 무술변법이다. 2천 년 된 운영체제가 자기 지식의 경계 밖에 있는 상대를 만난다. 대응 방식은 세 가지다. 기술과 장비 차원의 학습인 양무운동, 제도 차원의 개혁인 무술변법, 담론 차원의 혁명인 신해혁명. 저마다 다른 층위에서 3.5 버전에 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 체제 자체의 종말에 이른다. 푸이가 퇴위하고, 2천 년 동안 구축된 황제 체제의 형식이 사라진다. 그래도 잔여항은 남는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