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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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22 / 25

제22편: 명 말·청 초, 절반만으로는 안 된다

1644년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아친 해였다.

1644년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아친 해였다.

음력 3월, 이자성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숭정제가 목을 매면서 명나라가 멸망했다. 음력 4월에는 오삼계가 청군을 이끌어 산해관 안으로 들였다. 이자성을 격파한 청군은 음력 5월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남명 정권들은 남쪽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었고, 이자성과 장헌충의 농민군은 각지를 떠돌며 흩어졌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차근차근 진격했다.

세 세력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맞부딪쳤다. 세 세력의 구조적 결함은 저마다 너무나 선명했다. 역사가 일부러 수업용 사례를 마련해 놓은 듯할 정도였다.

이자성에게는 깎아내는 능력이 있었지만 정복한 천하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만큼의 구축 능력은 부족했다. 남명에게는 구축의 틀이 있었지만 깎아낼 힘이 없었다. 청나라에게는 깎아낼 힘도, 구축하려는 의지도 있었다. 다만 근본적인 난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민족 정권을 어떻게 이미 2천 년 동안 작동해 온 한족 문명의 구조에 접붙일 것인가.

세 가지 문제는 하나의 교훈으로 모인다. 깎아내기와 구축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한다. 깎아내기만 있고 구축이 없으면 빼앗을 수는 있어도 눌러앉지 못한다. 구축만 있고 깎아내기가 없으면 자리를 잡을 수는 있어도 지켜내지 못한다. 둘 다 있더라도 이민족의 접목처럼 서로 맞물리지 않는 경우에는, 둘을 맞추는 데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1. 이자성: 깎아낼 줄은 알았지만 구축할 줄은 몰랐다

이자성은 산시성(陝西省) 미지(米脂) 출신으로, 원래 은천역(銀川驛)의 역졸이었다. 숭정제가 비용을 줄이려고 역참을 폐지하자 이자성은 일자리를 잃었다. 명 말기 재정 위기가 일으킨 연쇄 반응 가운데 하나였다. 실직에 기근까지 겹치자 그는 농민 반란군에 들어갔다.

실직한 역졸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황제를 자처하기까지, 이자성에게는 약 15년이 걸렸다. 그의 군사적 능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명군에게 패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상락산(商洛山)에서는 한때 기병 18기만 남았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고, 끝내 베이징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런 끈기는 대단한 개인적 의지와 군사적 재능 없이는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베이징에 들어선 바로 그 순간, 이자성의 문제가 드러났다.

그는 베이징에서 무엇을 했는가? ‘추장조향(追贓助餉)’,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해 군자금을 댄다는 것이었다. 명나라 관리들과 부유한 집안들을 대대적으로 협박하고 고문하여 금은을 내놓게 했다. 군기가 문란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재산 추징은 유종민을 비롯한 핵심 장수들이 주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업이었다. 이는 대순 정권이 조세 체계로 군대를 지속적으로 부양할 정규 재원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당장의 군비를 약탈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약탈은 재정이 아니다. 재정은 자원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도록 제도화한 방식이다. 사회와 정권 사이에 일종의 약속이 있다. 당신은 세금을 내고, 나는 치안과 공공 서비스를 제공한다. 약탈은 한 번으로 끝난다. 누군가의 돈을 모조리 빼앗으면 그에게는 더 내놓을 돈이 없다. 약탈로 정권을 오래 운영할 수는 없다.

이자성은 베이징에 42일 동안 머물렀다. 그 42일 동안 관서를 설치하고 지방관을 임명했으며,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행정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통치 체계로 굳어지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약탈을 대신할 지속 가능한 조세 체계를 정착시키지 못했고, 백성을 안심시키겠다는 고시를 실제 치안과 안정된 사회 질서로 이어지게 하지도 못했다.

그런 시도는 왜 제대로 작동하는 통치 체계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이자성 개인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는 앞선 전쟁에서 상당한 정치적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시안에서 대순 정권을 세웠을 때는 제도를 만들려는 시도도 일부 있었다. 더 그럴듯한 이유는 따로 있다. 핵심 집단이 제국 전체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만큼 충분한 행정 경험과 조직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유종민, 우금성, 송헌책. 이자성의 핵심 집단에는 군사 지휘관과 책사, 떠돌이 술사들이 모여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도 받아들였지만, 이들을 새 정권의 안정적인 행정 조직으로 엮어내지는 못했다. 문제는 관리가 한 명도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중국의 정치 제도를 광대한 영토에서 지속적으로 운용할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우금성은 향시에 합격한 거인(擧人) 출신으로, 핵심 집단에서는 학식이 가장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행정가보다는 책사에 가까웠다.

유방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방 자신도 행정을 몰랐지만 그에게는 소하가 있었다. 진나라의 행정 체계를 손바닥 보듯 아는 사람이었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소하가 맨 먼저 한 일은 진나라의 호적, 지도, 법률 문서를 모으는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였다. 이자성의 핵심 집단에는 ‘소하’가 없었다. 베이징에 들어가 그들이 모은 것은 문서가 아니라 금은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이자성의 대순 정권은 역량이 깎아내기에 크게 치우친 조직이었다. 성을 함락하고 영토를 빼앗는 데는 강했지만, 제도를 만들려는 시도를 안정적인 행정과 통치의 능력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깎아내기와 구축은 전혀 다른 두 가지 기술이다. 깎아내기에는 군사적 능력, 폭력을 조직하는 능력, 추종자들을 고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구축에는 행정 설계, 제도 건설, 평시의 통치 능력이 필요하다.

깎아낼 줄만 알고 구축할 줄 모르는 정권은 천하를 얻어도 눌러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가? 이자성이 베이징에 들어갔다가 청군에 패해 철수하기까지 42일이었다. 베이징을 떠난 뒤 죽기까지는 1년 남짓이었다. 그는 1645년 후베이에서 살해되었다. 황제를 자처한 때부터 목숨을 잃을 때까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진나라의 15년이나 수나라의 37년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작동하는 체제가 있었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을지언정 말이다. 이자성은 초보적인 제도 마련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체제로 정착시키지 못한 채 사라졌다. 중국 역사에서 깎아내기에 걸맞은 구축 역량이 없었던 경우를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 남명: 구축의 틀은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숭정제가 목을 맨 뒤, 살아남은 명나라 황족과 관료들은 남쪽에서 잇달아 정권을 세웠다. 난징의 홍광 정권, 푸저우의 융무 정권, 광둥과 광시를 거쳐 윈난으로 옮겨간 영력 정권이 그것이다. 이 정권들을 통틀어 남명이라 부른다.

남명은 운영체제 3.5판의 소프트웨어 자원을 모두 갖고 있었다. 주씨 황실의 후손이라는 정통성, 남방에 대거 남아 있던 문관들로 이루어진 관료 조직, 유교적 언어와 대일통 서사라는 이념, 그리고 명나라가 다스린 276년 동안 쌓인 제도적 관성이라는 역사적 기억이었다.

그런데 남명의 소프트웨어가 돌아가야 할 플랫폼에는 하드웨어가 거의 없었다.

군사력은 흩어져 있었고, 서로를 지휘할 수도 없었다.

남명에는 일원화된 지휘를 받는 중앙군이 없었다. 군사력의 출처부터 제각각이었다. 각지에 남은 명군, 투항했다가 다시 명나라 편으로 돌아선 농민군, 지방 호족의 사병들이 뒤섞였다. 이자성의 잔여 세력 가운데 일부 장수들도 나중에 남명 진영에 합류했다. 이들은 서로 의심하고 발목을 잡았으며, 툭하면 서로를 공격했다. 청군에 맞서는 데보다 내부 싸움에 더 많은 힘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황위의 정통성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

명나라 황족은 여러 명이 살아남았다. 누가 황위를 이을 자격이 가장 큰가? 문관 집단마다 서로 다른 황족을 지지했다. 홍광 정권은 처음부터 ‘복왕을 세울 것인가, 노왕(潞王)을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로 심각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 분열에 정권 초기의 몇 달, 가장 결정적이었던 몇 달의 시간과 힘이 소모되었다.

문관 정치의 관성은 도리어 짐이 되었다.

남명의 문관들은 명 말기의 악습을 고스란히 이어갔다. 당쟁, 파벌에 갇힌 편견, 나라를 그르치는 공리공론이 그대로였다. 청군의 남하가 코앞의 위협으로 닥쳤는데도 홍광 조정이 많은 시간을 들여 논의한 것은 이런 문제였다. 숭정제의 시호는 어떻게 정할 것인가? 죽은 관리 가운데 누구를 추봉할 것인가? 명 말기에 적에게 투항한 관리 가운데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생사가 경각에 달린 순간에 이런 문제를 논하는 것은, 집에 불이 났는데 책장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

구축의 관점에서 남명의 비극은 여기에 있었다. 3.5판의 병폐는 전부 물려받았다. 당쟁, 문관들의 내부 소모, 불확실한 황위 계승, 분산된 군사력이 그것이다. 그런데 3.5판의 장점은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중앙집권이 주는 행정 효율도, 과거제가 공급하는 인재도, 하나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군사력도 없었다.

구축된 체제가 장점을 발휘하려면 전체가 온전하게 작동해야 한다. 체제가 부서져 파편만 남으면 그 파편은 장점을 제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짐이 된다. 조각들 사이의 연결부가 더는 맞물리지 않아, 서로 작용할 때마다 마찰과 소모만 일으키기 때문이다.

온전한 3.5판은 구축된 체제가 아예 없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러나 부서진 3.5판은 아무 체제도 없는 것보다 못할 수 있다. 당쟁, 정통성 논쟁, 제도의 관성에서 나오는 경직된 대응처럼, 부서진 체제가 일으키는 내부 소모가 그것이 제공하는 질서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남명의 이야기는 구축된 체제를 옮길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깊은 교훈을 준다. 체제는 메고 다닐 수 있는 배낭이 아니다. 특정한 토양에 뿌리내린 생태계다. 관리와 지식, 제도 조문 같은 부품은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체제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생태적 조건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중앙의 권위, 통일된 군사력, 안정적인 재정 기반, 사회가 복종해 온 관성이 그런 조건이다. 이것들이 사라지면 부품을 한데 쌓아놓아도 체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남명은 1644년부터 1662년까지 18년을 버텼다. 통일된 군사력도, 실효성 있는 중앙정부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영토도 없었다는 자원 조건을 생각하면, 18년은 뜻밖에 긴 시간이다. 그토록 오래 버틴 데에는 주로 두 가지 힘이 있었다. 하나는 정통성을 내세우는 말의 힘이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명나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했다. 다른 하나는 청나라가 진격하면서 저지른 실수였다. 변발령이 대규모 저항을 불러일으켜 남명에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뒷받침하지 않는 말의 힘은 끝내 효력을 잃는다. 말로 패배를 늦출 수는 있어도, 말로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오늘의 눈으로 돌아보면 남명에게는 시도하지 않은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유격전, 해외 진출, 적 후방 교란, 그리고 이자성의 잔여 세력이나 해외 세력까지 연대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묶어 비대칭적인 저항망을 만드는 길이다. 정성공은 사실 그 길의 언저리까지 갔다. 타이완에 근거지를 두고 해상무역을 운영하며 바다를 통해 청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의 군사적 직관이었지, 남명의 체계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남명은 왜 이 길로 가지 않았을까? 전국시대 편에서 진나라에 맞선 여섯 나라를 분석했을 때와 같다. 비대칭 전략이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전략적 상상력이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2천 년의 전략 전통은 모두 대륙을 향했다. 중원을 장악해야 정통성을 얻었고, 옛 수도를 되찾는 것이 전략 목표였으며, 전쟁은 정면으로 맞붙어 결판내는 일이었다. 이 전통에 흠뻑 젖어 있던 정권이 “중원을 포기하고 우선 바다로 나가 살아남자”라고 말하기는 인식의 차원에서 거의 불가능했다. 남명의 군사 행동은 언제나 같은 목표를 향했다. 북벌, 난징 수복, 베이징 수복이었다. 당시의 힘의 격차를 놓고 보면 거의 달성 불가능한 목표였지만, 목표를 바꿀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시대마다 열리는 기회의 창이라는 개념을 다시 보여준다. 청나라의 정복이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나라의 육국 통일 때처럼 상대가 여전히 낡은 대결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는 데 있다. 상대가 시간을 끌고, 힘을 소모시키고, 흩어지고, 정면충돌을 피하는 비대칭적 대결로 전환할 수 있었다면 정복에 드는 비용과 시간은 크게 늘어났을 것이고, 결과도 전혀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비대칭적 사고는 역사적 경험을 거쳐야 태어난다. 정면 대결에서 충분히 많이 패해 보아야 ‘정면으로 맞붙지 않는다’는 전략을 끌어낼 수 있다. 남명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쌓여 있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군사 교육은 온통 정면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지만 가르쳤다.

그러므로 남명의 실패는 체제 구조만의 실패가 아니었다. 전략적 상상력의 실패이기도 했다. 구축의 틀은 있으되 힘은 없는 구조적 열세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구조적 열세가 반드시 패배를 뜻하지는 않는다. 불리한 쪽이 유리한 쪽의 강점을 무력화하는 대결 방식을 찾아낸다면 결과는 바뀔 수 있다. 남명은 그것을 찾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해진 운명은 아니었다.

3. 청군이 산해관을 넘다: 이민족 접목의 세 번째 시도

만주족의 청나라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온 사건은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 정권이 중원의 지배자가 된 세 번째 대규모 실험이었다.

첫 번째는 북위의 선비족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 효문제는 전면적인 한화를 선택했고, 육진의 난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두 번째는 몽골의 원나라였다. 이 역시 앞서 살펴보았다.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 97년을 그럭저럭 버티다가 무너졌다.

청나라가 맞닥뜨린 근본 문제도 같았다. 소수민족이 세운 정복 정권이 어떻게 한족을 주축으로 하는 거대한 농경사회를 다스릴 것인가?

청나라의 답은 앞선 두 번보다 정교했다. 북위처럼 전면적으로 한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과 군사적 우위를 잃는다. 몽골의 원나라처럼 융합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면 통치를 지속할 수 없다. 청나라가 택한 것은 중간 길이었다. ‘선택적 접목’이라고 부를 만한 길이다.

무엇을 접붙였는가?

통치 체계에는 한족의 제도를 접붙였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행정 틀을 거의 통째로 물려받았다. 육부, 도찰원, 대리시, 내각(뒤에는 군기처), 과거제, 지방의 성·부·주·현 체계가 그것이다. 명나라 관료제의 모든 부품을 청나라의 체계로 그대로 옮겨 심었다. 이는 처음부터 통치 체계를 설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미 200년 넘게 가동한 성숙한 체계를 가져다 쓰면 되었다.

대단히 영리한 선택이었다. 몽골의 원나라는 한족식 통치 체계의 도입을 거부했거나 겉으로만 사용한 탓에 통치에 실패했다. 청나라는 그 체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원나라의 잘못을 피했다.

무엇은 접붙이지 않았는가?

권력의 핵심은 접붙이지 않았다. 청나라는 만주의 권력 핵심인 팔기제를 유지했다. 팔기는 만주의 군사·사회 조직이었다. 팔기의 명부에 편입된 만주인, 몽골인, 그리고 소수의 한족으로 이루어진 기인(旗人)이 청나라 지배의 중심을 이뤘다. 군사와 정치의 요직은 기인들이 장악했다. 과거제는 한족에게도 열어 한족 지식인의 참여를 보장했지만, 최고 의사결정 집단은 줄곧 만주 귀족이 주도했다.

요나라의 이원적 구축 구상을 더 큰 규모로 다시 활용한 것이다. 한 체계로는 피정복자를 다스린다. 한족식 행정 체계로 한족 사회를 관리하는 것이다. 다른 체계로는 정복자의 핵심 권력을 유지한다. 팔기제로 만주 귀족의 결속과 군사적 역량을 지탱하는 것이다.

두 체계 사이의 틈은 무엇으로 메웠는가?

청나라의 독창성은 여기에 있다. 두 체계를 단순히 나란히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일련의 장치를 만들어냈다.

만한 이원제. 중앙의 각 부에 만주인과 한족 장관을 한 명씩 두어, 만주인 상서와 한족 상서가 나란히 자리하게 했다. 지방에도 비슷한 장치를 마련했다. 두 체계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 것이다.

이번원(理藩院). 몽골, 티베트, 신장 같은 비한족 지역을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이는 요나라의 이원적 구축을 한 단계 더 확장한 것이었다. 만주와 한족이라는 두 축에 그치지 않고, 만주·한족·몽골·티베트·위구르를 아우르는 다원적 체계였다.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제도로 다스렸다.

황제의 복수 정체성. 청나라 황제는 한족에게는 천자이고, 만주인에게는 대칸이며, 몽골인에게는 보그다 칸이고, 티베트인에게는 문수보살의 화신이었다.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정통성을 동시에 떠맡아, 서로 다른 피지배 집단을 서로 다른 얼굴로 대했다. 당 태종의 ‘천가한’ 구상을 엄청나게 확장한 셈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청나라의 선택적 접목은 중국 제정사에서 가장 성숙한 이민족 통치 방안이었다. 앞선 두 번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북위는 전면적 한화로 군사적 우위를 잃어 육진의 난을 맞았고, 몽골의 원나라는 융합을 거부해 통치 능력을 잃은 채 97년을 그럭저럭 넘겼다. 청나라의 해법은 한화와 자기 정체성 유지 사이에서 움직이는 균형을 찾는 것이었다. 한족 사회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만큼은 한화하되, 만주인의 핵심 결속과 군사적 능력을 잃을 정도로는 한화하지 않았다.

이 균형은 산해관을 넘어온 때부터 태평천국 전쟁 이전까지 거의 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200년이 영원은 아니지만, 중국 제정사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긴 시간이다.

4. 변발령: 접목의 대가

청나라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온 뒤 시행한 가장 논쟁적인 정책은 변발령이었다. 모든 한족 남성에게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뒤의 머리카락은 땋아, 만주식 머리 모양을 따르라고 명했다. “머리를 보전하려면 머리카락을 버려라.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를 잃는다.”

변발령은 극렬한 저항을 불렀다. 강음(江陰)의 81일 항전, 가정(嘉定)에서 벌어진 세 차례 학살은 모두 변발령과 직접 연결된 유혈 사건이었다. 이미 청의 지배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려던 지역들이 변발령 때문에 다시 저항에 나섰다.

구축의 관점에서 변발령은 실수가 아니었다. 대가가 지극히 컸지만, 선택적 접목 전략에 필요한 부품이었다.

변발령은 무슨 기능을 했는가? 일상의 모든 순간에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를 표시했다. 매일 거울 속 자기 변발을 볼 때마다 ‘나는 정복당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만주인은 그 변발을 보고 상대가 이미 복종했다는 것을 안다.

이는 효문제가 호복을 금지한 것과 논리적으로 대칭을 이룬다. 효문제가 선비족에게 한족의 옷을 입힌 목적은 비한족과 한족 사이의 겉모습 차이를 없애는 데 있었다. 모두 똑같이 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청나라가 한족에게 만주식 머리를 강요한 목적은 차이를 지우는 데 있지 않았다. 변발령 이후에도 만주인과 한족의 머리 모양은 완전히 같지 않았다. 목적은 사람 하나하나의 몸에 복종의 표식을 새기는 데 있었다.

청나라는 왜 이 표식이 필요했을까? 선택적 접목 전략 자체의 모순 때문이다. 제도 차원에서 한족의 체계를 쓰면, 한족은 “우리 것을 가져다 우리를 다스릴 뿐인데, 당신들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변발령은 문화와 심리의 차원에 방어선을 치는 기능을 했다. 행정 체계에서 한족을 등용하더라도 한족은 여전히 몸에 피정복자의 표식을 달고 있다. 이 방어선은 한족이 ‘제도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뜻으로 잘못 읽지 못하게 했다.

대가는 막대했다. 변발령 때문에 일어난 저항은 청나라의 통일을 늦추고 정복 과정에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며, 한족 사회에 깊은 원한을 남겼다. 하지만 청의 통치자들 눈에는 감수할 수 있는 대가였다. 변발을 강요하지 않아 한족이 겉모습의 독자성을 유지하게 두는 대안은, 장기적으로 더 큰 위험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변발령은 ‘단기적 대가를 치르고 장기적 안전을 얻는’ 결정의 전형이다. 당장의 대가는 격렬한 저항과 수많은 죽음이었다. 장기적 이익은 정복이 끝난 뒤에는 피정복자들이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이미 복종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몇 세대가 지나자 변발은 굴욕의 상징에서 일상의 습관으로, 끝내 정체성의 일부로까지 바뀌었다. 청 말기 혁명가들이 변발을 자르라고 요구하자, 오히려 자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잔여항, 곧 피정복자의 저항 의식을 시간이 소화한 것이다. 다만 소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처음 몇십 년이 가장 고통스럽다.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어온 때부터 강희제 재위 중기까지 약 반세기가 지나서야 이 소화 과정을 대체로 마쳤다.

5. 세 세력의 충돌이 남긴 구조적 교훈

1644년의 세 세력 충돌로 돌아가 보면,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계에 관한 몇 가지 깊은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깎아내기와 구축이 짝을 이루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자성은 깎아내는 능력에 걸맞은 구축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천하를 빼앗고도 안정적으로 다스릴 능력을 갖추지 못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남명은 구축만 있고 깎아내기가 없어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스릴 틀은 있어도 군사력이 없으니 지켜내지 못했다. 청나라가 마지막에 이긴 까닭은 세 세력 가운데 유일하게 둘을 모두 갖췄기 때문이다. 팔기군의 전투력이라는 깎아내기 능력, 한족 제도를 선택적으로 접목하는 구축의 의지와 능력이 함께 있었다.

청나라가 ‘가장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 특정한 경쟁 환경에서는 깎아내기와 구축이 더 잘 맞물린 쪽이 구조적 우위를 지녔다는 뜻이다. 우위가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삼계의 선택, 이자성이 베이징에서 내린 구체적인 결정, 남명 내부에서 벌어진 어느 한 권력 다툼의 향방 같은 우연적 요소도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다만 구조적 우위란, 여러 가능한 전개 가운데 대다수에서 두 능력이 더 잘 맞물린 쪽의 승리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둘째, 구축된 체제는 새로 발명하는 것보다 접붙이는 편이 더 실용적이다.

청나라는 새로운 통치 제도를 발명하지 않았다. 과거제, 육부, 성·부·주·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명나라에서 그대로 복제했다. 청나라의 ‘혁신’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한 데 있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체계를 다른 권력 구조에 성공적으로 접붙인 데 있었다.

접목은 발명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새로운 체계를 발명하려면 수십 년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진나라는 상앙에서 시황제까지 100년이 넘게 걸렸고, 한나라는 고조에서 무제까지 70년이 걸렸다. 이미 있는 체계를 접붙일 때는 연결부의 문제만 풀면 된다. 자신의 권력 구조와 한족식 행정 체계를 어떻게 맞물리게 할 것인가. 청나라는 만한 이원제, 이번원, 황제의 복수 정체성 같은 장치로 그 연결부의 문제를 해결했다.

셋째, 이민족 정권의 접목에는 고유한 잔여항이 있다. 정체성 사이의 긴장이다.

당신은 만주인인가, 중국인인가? 청나라가 존속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 질문은 억눌려 있었다. 팔기제가 만주인의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했고, 한족식 행정 체계가 한족 사회를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했다. 둘은 황제의 복수 정체성 아래에서 공존했다.

그러나 이 공존은 취약했다. 청 말기에 서구 열강이라는 외부 압력과 태평천국이라는 내부 위기가 동시에 들이닥치자, 정체성 사이의 긴장이 표면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주인과 한족 사이에 권력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공공연한 정치 의제가 되었다. ‘만주족 배척’은 혁명파의 핵심 구호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선택적 접목의 이음매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접목은 융합이 아니다. 접목은 두 개를 연결하되 여전히 두 개로 남겨두는 것이다. 융합은 두 개가 하나의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북위 효문제가 추구한 것은 한화라는 융합이었고, 그 대가는 육진의 난이었다. 청나라가 추구한 것은 두 체계를 병행하는 접목이었고, 그 대가는 이음매가 갈라질 위험이 늘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대가 없는 선택은 없다. 융합의 대가는 내부 분열이다. 개혁에서 밀려난 집단이 반격한다. 접목의 대가는 오래 지속되는 정체성의 긴장이다. 두 체계 사이의 균열은 압력을 받으면 끝내 드러난다.

넷째, 정복은 이전의 왕조 교체에는 없던 새로운 차원, 민족 문제를 가져왔다.

이전의 왕조 교체, 즉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고, 당나라가 수나라를 대신하고, 송나라가 오대를 대신한 일은 모두 한족 내부의 권력 교체였다. 운영체제를 바꾸는 데 민족 정체성의 문제는 끼어들지 않았다. 황제의 성은 바뀌어도 사회의 민족 구성은 그대로였다.

원나라와 청나라의 건국은 달랐다. 황제의 성만 바뀐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 집단이 지배층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모든 왕조가 마주하는 토지 겸병, 관료 부패, 재정 위기라는 잔여항에 더해, 이민족 왕조는 민족 관계라는 별도의 잔여항까지 떠안았다. 한족 왕조의 구조에는 없던 잔여항이었으므로, 한족 왕조의 통치 경험을 직접적인 참고 자료로 삼을 수도 없었다.

몽골의 원나라는 이 잔여항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사람을 네 등급으로 나누는 제도로 억지로 눌러두었지만, 97년 뒤 폭발했다. 청나라는 선택적 접목과 시간에 의한 소화로 훨씬 잘 다뤘다. 그래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청 말기의 만주족 배척 운동은 이 잔여항이 250년 뒤에도 다시 활성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민족 문제는 유난히 오래 남는 잔여항이다. 경제 문제나 행정 문제보다 소화하기 어렵다. 정체성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인간이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개혁으로 경제 문제를 풀고, 제도 설계로 행정 문제를 풀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정책을 쓰더라도 한 사람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내리는 답을 바꾸기는 대단히 어렵다.

6. 다음 이야기

명 말·청 초에 벌어진 세 세력의 충돌은 중국 제정사에서 마지막 대일통 정권을 탄생시켰다. 청나라는 1644년부터 1912년까지 268년 동안 중국을 다스리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청나라로 들어간다. 청 전·중기의 만한 이원적 구축 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통치는 어떤 특징을 보였는지 살펴본다. 옹정제는 구축의 기술적 대가였다. 밀봉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밀절 제도, 군기처, 인두세를 토지세에 합친 지정은제, 세습 토사 대신 중앙이 임명한 관리를 보내는 개토귀류까지, 모두 구축된 체제를 정밀하게 조정하는 작업이었다. 건륭제 재위 후반은 체제가 커진 규모 자체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시작하는 기점이다. 그다음은 청 후기다. 태평천국, 양무운동, 무술변법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2천 년 동안 지속된 운영체제가 처음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와 마주한다. 산업문명이었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