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편: 명 중·후기 — 구축의 경직과 자기 분열
주원장은 중국 황제 체제의 역사에서 가장 밀도 높은 구축을 설계했다. 그가 죽은 지 백 년도 되지 않아, 사회 자체의 움직임이 그 구축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았다. 해금은 밀수에 무너졌고, 위소는 도망치는 군인들 때문에 속이 비었으며, 이갑제는 인구 이동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뼈대는 남았지만 그 위의 살과 피는 이미 한 차례 바뀌었다.
주원장은 중국 황제 체제의 역사에서 가장 밀도 높은 구축을 설계했다. 그가 죽은 지 백 년도 되지 않아, 사회 자체의 움직임이 그 구축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았다. 해금은 밀수에 무너졌고, 위소는 도망치는 군인들 때문에 속이 비었으며, 이갑제는 인구 이동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뼈대는 남았지만 그 위의 살과 피는 이미 한 차례 바뀌었다.
그렇다고 명이 쇠퇴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명 중기, 대략 선덕 연간부터 만력 초기까지의 1426~1582년은 중국 황제 체제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주원장의 편집증적인 구축이 느슨해지자, 사회는 그 뼈대의 틈새에서 그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들을 키워 냈다. 번성하는 상업, 활발한 사상, 자율적인 지역사회, 강력한 문관 정치가 그것이었다. 구축은 굳어 가는데 사회는 자라고 있었다. 구축과 사회 사이의 긴장은 점점 커졌고, 마침내 명 말기에 찢어지는 형태로 터져 나왔다.
이것은 사람이 필요 없을 만큼 굳어 버린 구축의 이야기이자, 구축 없이도 살아 움직일 만큼 활력을 얻은 사회의 이야기다. 양쪽 모두 앞으로 나아갔지만, 나아가는 방향은 달랐다.
1. 내각 — 비서에서 사실상의 승상으로
앞 편에서 이야기했듯, 승상을 폐지한 지 오십 년도 되지 않아 내각 수보가 사실상 승상의 기능을 다시 맡았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락제 주체 때 내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림원 학사 몇 명을 ‘내각’으로 뽑아들여 황제의 문서 초안 작성과 상주문 정리를 돕게 했을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행정권이 없었고,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황제의 사적인 자문역에 지나지 않았으며, 관직도 품계도 낮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묘한 권력 이동이 일어났다. 날마다 수백 건의 상주문을 받는 황제가 그것을 모두 직접 처리할 수는 없었다. 내각대학사들이 황제를 대신해 답변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표의(票擬)’였다. 황제는 표의를 읽고 괜찮다 싶으면 붉은 붓으로 ‘윤허한다’고 적었다. 이것이 ‘비홍(批紅)’이었다. 황제가 비홍마저 귀찮아할 경우, 그 권한은 사례감(司禮監)의 환관들 손으로 넘어갔다. 후대의 많은 황제가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정교한 삼각 구조가 만들어졌다. 내각이 표의를 통해 방안을 제시하고, 사례감이 비홍을 통해 황제의 최종 결정권을 대행하며, 황제는 배후에서 최종 심판을 맡았다. 물론 황제가 관여할 마음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삼각 구조는 승상 폐지 이후 체계가 스스로 복구한 결과였다. 주원장은 완충층을 없앴지만 체계는 새로운 완충층을 스스로 길러 냈다. 새 완충층의 이름은 승상이 아니라 내각 수보였다. 승상이라는 이름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완충층에는 법으로 정해진 권력이 없었다. 주원장의 조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상의 권력은 있었다. 황제가 그 없이는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과 실상이 다시 갈라졌다. 명목상 승상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있었다. 명목상 황제가 모든 정무를 직접 재결했지만, 실제로는 내각이 결정하고 환관이 도장을 찍었다. 명목상 주원장이 설계한 제도였지만, 정작 주원장이 보았다면 화가 나서 효릉을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명실의 분리에는 장점이 하나 있었다. 체계에 탄력성을 부여한 것이다. 공식 제도인 조제(祖制)는 바꿀 수 없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도를 바꾸는 것은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반면 비공식적인 권력 배치는 언제든 조정할 수 있었다. 내각 수보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는 제도상의 규정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황제와의 관계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공식 제도를 바꾸지 않고도 실제 필요에 맞추어 권력 배분을 조정할 수 있었다.
탄력성은 이름과 실상을 갈라놓음으로써 얻어졌다. 공식 제도는 뻣뻣한 뼈대 같아서 휘어지지 않았다. 비공식적 배치는 그 뼈대에 붙은 근육과 인대처럼, 뼈대 자체로는 낼 수 없는 유연성을 제공했다. 뼈대가 굳어 있을수록 근육과 인대가 더 많이 보완해 주어야 했다. 명의 공식 제도는 모든 왕조 가운데 가장 경직되어 있었다. 조제를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공식적 배치도 모든 왕조 가운데 가장 발달했다.
의도와는 어긋났지만 결과적으로 들어맞은 제도 진화였다. 설계자는 경직된 체계를 원했는데, 그 체계가 스스로 유연한 보완 장치를 길러 냈다. 설계자가 살아 있었다면 반대했겠지만, 그 보완 장치들은 체계가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체계는 설계자의 유언과 자신의 생존 필요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다.
2. 장거정 — 구축 내부 개혁의 마지막 정점
장거정(1525~1582)은 명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가였다. 어쩌면 중국 황제 체제의 역사에서 체계적인 개혁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던 마지막 문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만력 초기인 1572~1582년, 내각 수보로서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고성법(考成法).
관료들에게 엄격한 목표별 실적 평가를 적용했다. 모든 정무에 완료 기한을 정하고, 각급에서 그 이행을 추적했다. 기한 안에 끝내지 못하면 강등하거나 파면했다. 백 년 넘게 느슨해져 있던 관료 체계의 태엽을 다시 감은 셈이었다.
고성법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행정 효율이 크게 높아지고, 밀린 정무가 처리되었으며, 일을 미루고 책임을 떠넘기는 풍조가 억제되었다. 장거정이 고성법을 시행한 십 년 동안 명의 행정 효율은 왕조 전체를 통틀어 최고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일조편법.
갖가지 명목의 세금과 요역을 하나로 합치고, 은을 냥 단위로 계산해 통일적으로 거두었다. 조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그전까지 농민들은 곡식도 내고 포목도 내며, 온갖 명목의 부역까지 해야 했다. 항목은 많고 기준은 어지러워 관료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여지가 컸다. 일조편법은 이 모든 항목을 은으로 내는 하나의 납부액으로 합쳤다. 단순하고 투명해지면서 부패가 끼어들 틈도 줄었다.
일조편법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은이 사실상 기본 화폐로 자리 잡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명은 공식 제도상으로는 줄곧 동전과 지폐인 대명보초를 사용했다. 하지만 보초는 진작에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고, 민간의 실제 거래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은을 쓰고 있었다. 은으로 세액을 계산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저절로 형성된 화폐 질서를 제도가 뒤늦게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 역시 ‘사회가 제도보다 앞서간’ 사례였다. 사회는 이미 은을 쓰는데 제도는 여전히 동전과 지폐를 쓰는 척하고 있었다. 장거정이 한 일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제도가 사회의 현실을 따라잡게 하는 일이었다.
토지 재측량.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고, 숨겨 둔 토지를 찾아냈다. 주원장 때 편찬한 전국 토지 대장인 『어린도책』은 이백 년이 지나면서 현실과 심하게 어긋나 있었다. 수많은 토지가 은닉되거나 겸병되거나 허위로 신고되었다. 과세의 바탕이 되는 자료가 정확하지 않으니 세금을 공평하게 거둘 수 있을 리 없었다.
재측량 결과 새로 등록된 토지 면적이 크게 늘었다. 숨어 있던 토지가 드러난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세 수입도 늘었고, 재정 상태는 눈에 띄게 나아졌다.
장거정의 개혁은 방향도 방법도 옳았다. 그가 재임한 십 년 동안 국고는 풍족했고, 변경은 안정되었으며, 행정은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개혁이 계속되었다면 명은 더 오래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거정의 개혁에는 치명적인 구조적 약점이 하나 있었다. 모든 추진력이 장거정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만력제가 어렸고 태후가 그를 신임했다.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대신 행사한 셈이었다. 둘째, 반대파를 누를 만한 정치적 수완이 있었다. 셋째, 남에게 원한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성법으로 태만한 관료들의 원한을 샀고, 일조편법으로 옛 조세 제도에서 이익을 챙기던 지방 세력의 원한을 샀으며, 토지 재측량으로 땅을 숨겨 둔 토호들의 원한을 샀다.
이 세 조건은 모두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었다. 만력제는 성장한 뒤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치적 수완은 그 자신의 능력이어서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남에게 원한을 사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역시 그 자신의 성격이어서 복제할 수 없었다.
1582년 장거정이 죽었다. 만력제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장거정을 청산했다. 가산을 몰수하고 관직을 사후에 박탈했으며, 하마터면 관을 열고 시신에 매질까지 할 뻔했다. 개혁 가운데 일부는 남았다. 일조편법은 실제 효과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혁의 정신과 동력은 장거정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왕안석 변법의 결말과 똑같았다. 개혁자가 죽거나 실각하면 개혁도 멈췄다. 개혁의 추진력이 제도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개혁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는 장치, 곧 제도화된 개혁 기제는 중국의 황제 체제 안에서 끝내 발명되지 않았다.
왜 없었을까? 황제가 모든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황제 체제의 핵심 논리였기 때문이다. 개혁은 황제의 지지를 받아야 추진할 수 있었다. 황제를 우회해서 개혁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황제의 지지는 우연에 달려 있었다. 황제 개인의 판단과 성격, 취향에 좌우되었다. 황제에게 개혁을 지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개혁은 언제나 우발적이고, 개인에게 의존하며, 제도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운영체제 3.0/3.5 버전의 천장 가운데 하나다. 체계는 스스로 복구할 수 있었다. 내각의 출현이 그 예다. 정해진 매개변수의 범위 안에서 조정할 수도 있었다. 장거정의 개혁이 그 예다. 그러나 스스로 업그레이드할 수는 없었다. 업그레이드하려면 틀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 권한은 황제에게 있었고, 황제에게는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안겨 주는 틀을 바꿀 동기가 없었다.
체계의 최대 수혜자가 그 체계의 개혁을 가로막는 병목이 된다. 이 역설은 권력이 집중된 모든 체제에 존재한다.
3. 만력제의 정무 방기 — 사람이 필요 없어진 구축
만력제는 48년간 재위했다(1572~1620). 그 가운데 약 삼십 년 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이렇다. 대신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무를 논의하는 공식 회의인 조회를 열지 않았고, 대신들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상주문 대부분을 검토하고 재가하지 않았고, 빈자리를 채울 관료를 임명하지 않았다. 만력 후기에는 조정의 중요한 직책 상당수가 오랫동안 공석이었다. 육부와 성 단위의 고위 관료 자리가 대거 비었는데도 채울 사람이 없었다. 황제가 임명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삼십 년 동안 출근하지 않았는데도 제국은 놀랍게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 사실 자체가 대단히 강력한 증거다.
무엇을 증명하는가?
첫째, 구축은 운전자 없이도 움직일 만큼 굳어 있었다.
내각과 육부, 지방 관료로 이루어진 명의 행정 체계는 이백 년 동안 돌아가면서 자기만의 관성을 갖추었다. 일상적인 정무 대부분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자동으로 처리되어 황제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세금은 일조편법의 틀에 따라 걷혔고, 관료들은 평가 제도에 따라 움직였으며, 법은 『대명률』에 따라 집행되었다. 체계는 프로그램이 입력된 기계처럼 미리 정해진 궤도를 따라 움직였다.
이 기계에서 황제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최종 의사 결정자였다. 정해진 절차로 자동 처리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을 맡았다. 예외가 많지 않다면 황제가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체계는 관성으로 계속 돌아갈 수 있었다. 만력 중기의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경우가 그랬다.
둘째, 구축은 어떤 변화에도 대응할 수 없을 만큼 굳어 있기도 했다.
만력제가 정무를 방기하는 동안 명은 중대한 정책 조정을 하나도 할 수 없었다. 요동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이 일어서고 있었다. 요동 방어를 강화해야 했지만 그러려면 황제가 예산과 인사 임명을 승인해야 했고, 황제는 승인하지 않았다. 조정의 당쟁은 격해지고 있었다. 황제가 나서서 중재해야 했지만, 황제는 관여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사회적 갈등이 쌓여 갔다. 정책을 조정해 풀어 주어야 했지만, 황제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관성은 기계가 평탄한 길을 계속 달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길에 건주여진의 부상이라는 굽이가 나타나거나, 격화된 당쟁이라는 장애물이 나타나면 관성으로는 방향을 틀 수도 제동을 걸 수도 없다. 그 조작을 해 줄 운전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운전자가 없었다. 후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만력제의 정무 방기는 한 명제를 완벽하게 실험으로 입증했다. 지나치게 경직된 구축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자동으로 작동하지만, 비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스스로 조정할 수 없다. 자동 작동과 자기 조정은 완전히 다른 능력이다. 전자에는 관성만 있으면 되지만, 후자에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구축은 관성을 제공할 수 있어도 판단력을 제공할 수는 없다. 판단력은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사람이 필요 없어지면 구축은 아주 견고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활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화에 대응하려고 사람의 판단력이 필요해진 순간, 구축은 이미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직의 대가는 평소가 아니라 위기 때 치른다. 평소에는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을 듯하던 것이 위기 앞에서는 건드리기만 해도 산산이 깨진다. 단단함과 잘 깨짐은 같은 재질을 달리 묘사한 말이기 때문이다.
셋째, 만력제의 정무 방기는 황제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 하나를 드러냈다. 체계의 정상 작동이 통제할 수 없는 확률변수 하나, 곧 황제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황제가 일하려고 하면 체계에는 대응 능력이 생긴다. 정관의 치가 그랬다. 황제가 일하기 싫어하면 체계는 대응 능력을 잃는다. 만력제의 정무 방기가 그랬다. 황제에게 억지로 일을 시킬 수는 없다. 그는 최고 권력자라 누구도 그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 일하지 않는 황제를 갈아치울 수도 없다. 황제 체제의 틀 안에는 황제를 파면할 합법적인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는 후한의 어린 황제 문제와 같은 종류다. 체계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체계의 운명을 좌우한다. 후한에서는 황제의 나이가 변수였다. 어린 황제는 친정할 능력이 없었다. 명에서는 황제의 의지가 변수였다. 황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두 경우의 결과는 같았다. 최고 의사 결정자로부터의 입력을 잃은 체계는 관성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관성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버텼다.
4. 동림당쟁 — 구축 내부의 자기 분열
만력 후기부터 천계·숭정 연간에 이르기까지 당쟁이 명의 정치를 지배했다.
동림당은 무석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모인 문관 집단이었다. 정직과 청렴을 내세우고, 환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며,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자고 요구했다. 고헌성, 고반룡, 양련, 좌광두 등이 대표 인물이었다.
제·초·절당은 동림당에 맞서던 다른 관료 파벌들이었다. 나중에는 위충현이 이들을 엄당으로 통합했다. 이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입장에서는 동림당과 대립했다.
두 진영의 다툼은 정책상의 이견에서 시작되었다. 광세 문제, 요동 방어 문제, 태자 책립 문제가 쟁점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순수한 파벌 싸움으로 변했다. 더 이상 ‘당신의 방안이 옳은가’를 논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은 어느 편인가’를 가르는 일이 되었다.
천계제 재위기(1620~1627)에는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잡고 동림당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양련과 좌광두 등은 참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숭정제가 즉위한 뒤 위충현을 청산했지만, 복권된 동림당 인사들은 다시 다른 파벌과 싸웠다. 당쟁은 명의 마지막 육십 년을 관통했고, 명이 멸망한 1644년까지 이어졌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동림당쟁은 문관 구축이 내부에서 스스로 찢어진 사건이었다. 구조상으로는 북송의 신법당과 구법당 사이의 당쟁과 완전히 같았다.
과거제는 거대한 문관 계층을 만들어 냈다. 이 계층은 모두 유학을 믿는다는 점에서 이념적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여러 파벌로 갈라질 수 있었다. 파벌 사이의 대립이 체계 전체의 이익에 대한 공감보다 커질 때, ‘상대를 쓰러뜨리기’가 ‘나라를 다스리기’보다 중요해질 때, 문관 계층은 체계의 기둥에서 체계의 소모품으로 바뀐다.
기둥이 소모품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문관 구축에 내재한 위험이다. 과거제는 체계에 충성하는 문관을 길러 낸다. 이것이 기둥의 기능이다. 하지만 이 문관들은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파벌을 이룬다. 정책에 대한 의견도 인사에 대한 선호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파벌끼리 싸우면 체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것이 소모의 기능이다. 기둥의 기능만 취하고 소모의 기능은 버릴 수 없다. 같은 사람들이 보이는 두 가지 행동 양식이기 때문이다.
동림당쟁은 북송의 당쟁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명의 제도적 환경이 훨씬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송에는 적어도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하며 당쟁을 통제하려는 신종이 있었다. 명 말기의 황제들은 관여하지 않거나(만력제), 관여할 능력이 없거나(천계제), 관여하고 싶어도 이미 늦어 버린 경우였다(숭정제). 제대로 중재할 사람이 없자 당쟁은 소모전이 되었다. 양쪽이 서로 상대의 인재와 자원을 없애다가, 끝내 체계에 남은 인재를 모두 소진했다.
숭정제가 즉위했을 때 마주한 조정은 수십 년의 당쟁에 시달려 이미 만신창이였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거나, 밀려났거나, 침묵하는 법을 배운 뒤였다. 동림당 인사들은 위충현에게 박해받아 죽었고, 동림당에 속하지 않은 유능한 신하들은 동림당에게 배척당했으며, 거듭된 숙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나서지 않는 법을 익혔다. 숭정제 자신은 정사에 부지런했고 검소했으며 개혁할 의지도 있었지만, 막상 쓸 사람이 없었다.
일하려는 황제와 인재 없는 조정의 조합은 엔진은 있는데 바퀴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엔진은 요란하게 울리는데 차는 제자리에서 헛돈다. 숭정제는 재위 17년 동안 모두 쉰 명을 내각대학사로 임명했다. 단순히 나누면 넉 달에 한 명꼴이다. 이는 임명 빈도를 뜻하지, 각 대학사의 평균 재임 기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빈도 자체가 문제를 말해 준다. 쓸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하에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당쟁이 인재 선발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이쪽 파벌이든 저쪽 파벌이든 어디엔가는 속해야 했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가장 유능했을 사람은, 두 진영 사이에 끼어 밀려났다.
체계에 인재가 가장 절실한 때가 바로 체계가 인재를 가장 길러 내지 못하는 때다. 이것이 당쟁의 궁극적인 아이러니다.
5. 명 말기 세 갈래의 붕괴 — 동시에 만기가 돌아온 잔여항
명은 한 가지 원인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 세 갈래가 동시에 무너진 결과였다.
첫 번째 갈래: 재정 붕괴.
만력 연간의 삼대 원정, 곧 조선·영하·파주(播州)의 전쟁은 장거정이 쌓아 둔 재정 흑자를 소진했다. 요동에서 후금에 맞서는 군사비는 계속 늘어났다. 소빙기로 해마다 재해와 흉년이 이어지면서 조세 수입은 줄었다. 세 가지가 겹치자 재정은 되돌릴 수 없는 적자에 빠졌다.
요동 방어와 반란 진압, 군사 훈련에 쓸 군비를 마련하려고 조정은 ‘요향’, ‘초향’, ‘연향’을 추가로 거두었다. 이른바 삼향가파(三餉加派)였다. 추가 세금은 이미 재해와 흉년으로 곤궁해진 농민들을 한층 더 짓눌렀다. 증세 → 농민 파산 → 유민 증가 → 봉기 → 진압을 위한 군비 증가 → 더 많은 증세.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갈래: 군사 붕괴.
위소제는 진작에 이름만 남아 있었다. 명 말기의 군사력은 주로 각지의 장수들이 스스로 모집한 사병에 의존했다. 척계광의 척가군, 이성량의 요동철기, 원숭환의 관녕군이 그런 군대였다. 이들의 전투력은 제도가 아니라 장수 개인의 능력, 그리고 장수와 병사 사이의 사적인 관계에 달려 있었다.
장수들과 조정 사이의 신뢰는 바닥이었다. 조정은 장수들이 군대를 거느린 채 자기 세력을 키운다고 의심했다. 숭정제는 원숭환을 죽였다. 장수들은 조정이 강을 건너고 나면 다리를 끊듯 자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의심했다. 이런 의심은 군사적 결정에서 거듭되는 망설임과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다.
세 번째 갈래: 사회 붕괴.
소빙기의 거듭된 재해와 흉년은 수많은 농민을 생존선 아래로 밀어냈다. 1630년대에는 가뭄과 메뚜기 떼, 역병이 북방의 여러 성에서 거의 동시에 덮쳤다. 여기에 삼향가파의 세금 부담까지 더해지자 농민 봉기는 작은 불씨에서 들불로 번졌다. 이자성과 장헌충의 봉기군은 수백 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불어났다.
1644년 이자성이 북경에 쳐들어갔다. 숭정제는 매산에서 목을 맸다. 명이 멸망했다.
세 갈래의 붕괴는 서로 독립된 일이 아니었다. 서로를 부추겼다. 재정 붕괴 → 군사력 부족 → 봉기 진압 불능 → 봉기 확대 → 세원 축소 → 더 심한 재정 붕괴. 재해와 흉년 → 유민 → 봉기 → 군사적 진압에 필요한 자원 증가 → 증세 → 더 많은 농민의 파산 → 더 많은 유민. 어느 한 갈래가 나빠질 때마다 다른 두 갈래도 더 빨리 나빠졌다. 세 악순환이 서로 맞물리면서 되돌릴 수 없는 붕괴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명 말기의 세 갈래 붕괴는 늦춰 두었던 대가의 만기가 돌아와 한꺼번에 청산된 사건이었다.
위소제의 붕괴. 이백여 년 전 주원장의 설계에 있던 결함이 이백 년 늦게 만기를 맞았다.
재정 체계의 경직. 은의 유입과 상업의 발전, 인구 증가로 경제 구조가 달라졌지만, 명의 조세 제도는 대응할 수 없었다. 조제를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쟁에 소진된 행정 능력. 수십 년의 내분이 체계의 인재와 협력 능력을 거의 남김없이 소모했다.
소빙기는 외부의 방아쇠였다. 붕괴의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미 임계점까지 쌓여 있던 내부의 잔여항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소빙기가 없었다면 명은 얼마간 더 버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간 더 버틴다’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잔여항이 그 정도까지 쌓인 이상 충분히 큰 외부 충격이라면 무엇이든 붕괴를 촉발했을 것이다. 마침 그 충격이 소빙기였을 뿐이다.
명의 멸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276년 동안 쌓인 잔여항의 최종 결산이었다. 청구서에 적힌 항목 하나하나는 구체적인 제도 설계상의 선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어떤 항목은 주원장에게로, 어떤 항목은 후대의 어느 정책 결정으로, 어떤 항목은 이루어지지 않은 어느 개혁으로 이어진다. 모두 ‘당시에는 합리적으로 보였던 선택’이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선택의 대가는 쌓인다. 276년 동안 쌓인 총액은 그 누구도 갚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6. 명이 주기 법칙에 더한 것
깎아내기와 구축의 주기 법칙에서 명의 276년이 차지하는 자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운영체제 3.5 버전을 최대 밀도로 가동한 극한 시험이었다.
첫째, 밀도에는 상한이 있다.
주원장은 구축의 밀도를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밀어 올렸다. 그가 입증한 것은 이것이다. 아무리 활력이 넘치는 운영자라도 한 사람이 유지할 수 있는 구축의 밀도에는 천장이 있다. 천장을 넘어선 부분은 그 운영자가 죽으면 저절로 느슨해져 천장 아래로 내려온다. 구축의 장기적인 밀도는 설계자의 뜻이 아니라 보통 운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상한에 달려 있다.
둘째, 제도의 이름은 지울 수 있어도 그 제도를 필요로 하는 수요는 지울 수 없다.
승상은 폐지되었지만, 내각 수보가 승상의 기능을 이어받았다. 제도란 실제 수요에 대한 응답임을 보여 준다. 어떤 제도의 이름을 금지할 수는 있어도, 그 제도가 응답하던 수요까지 금지할 수는 없다. 수요는 스스로 자신을 충족할 새로운 제도적 형태를 찾아낸다.
셋째, 경직된 구축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자동으로 작동하지만, 비정상적인 조건에서는 스스로 조정할 수 없다.
만력제의 정무 방기가 이를 입증했다. 삼십 년 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아도 제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은 구축의 관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삼십 년간 관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쌓인 문제들, 요동의 위기와 당쟁, 재정 악화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해결하려면 판단력이 필요한데 관성은 판단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구축 내부 개혁의 천장은 권력 집중 그 자체다.
장거정의 개혁은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개인뿐이며, 제도로는 추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개혁하려면 틀 안의 일부 매개변수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 변경 권한은 황제에게 있기 때문이다. 황제가 지지하면 바꿀 수 있고, 지지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 황제의 지지는 제도화할 수 없는 확률변수다.
그래서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 성공한 모든 개혁, 상앙 변법과 왕안석 변법, 장거정의 개혁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개혁을 지지하는 강력한 운영자가 힘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진 효공, 송 신종, 그리고 만력 초기의 태후와 장거정이 그 역할을 했다. 강력한 운영자가 사라지면 개혁도 멈추거나 되돌려졌다. 개혁의 운명은 개혁자 개인의 운명에 묶여 있었다.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다.
이것이 권력이 집중된 체제의 개혁 역설이다. 반대파를 우회해 개혁을 추진하려면 권력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권력 집중 자체가 개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의 일부다. 권력을 집중해 개혁을 추진하고, 개혁이 성공하면 권력은 더 강하게 집중된다. 하지만 집중이 강해질수록 다음 개혁은 권력을 쥔 개인의 의지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다음 권력자가 개혁을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된다.
이 역설은 이천 년 동안 한 번도 풀리지 않았다. 황제 체제의 틀 안에서는 풀 수 없는 역설이다. 풀려면 권력 집중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권력을 쥔 자의 동의가 필요하고, 권력을 쥔 자는 자기 권력을 약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도 차원에서 드러나는 잔여항 보존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권력 집중은 황제 체제의 토대이자 천장이다. 토대와 천장은 같은 판이다. 토대를 흔들지 않고 천장을 높일 수 없으며, 천장을 낮추지 않고 토대를 보강할 수도 없다.
다음 편: 명 말·청 초 — 이자성·장헌충, 남명의 여러 정권, 산해관을 넘어 진입한 만주족의 청군이 맞선다. 세 구축 형태가 충돌한다. 이자성의 문제는 깎아내기만 있고 구축이 없다는 데 있다. 남명의 문제는 구축은 있지만 힘이 없다는 데 있다. 청의 문제는 이민족의 구축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있다. 세 문제는 같은 답을 가리킨다. 절반만으로는 안 된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