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中文|繁體|日本語|Français|Deutsch|Español|한국어
← 착구 주기율·중국 제왕 시리즈
중국사·25편 · 20 / 25

제20편: 명 전기, 완전한 닫힘을 향한 가장 편집증적인 시도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가장 밑바닥 출신의 개국 황제다. 그와 나란히 놓을 사람은 없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가장 밑바닥 출신의 개국 황제다. 그와 나란히 놓을 사람은 없다.

유방은 정장, 말단 관리였다. 적어도 체제 안에는 있었다. 유수는 몰락한 황족이었다. 작위는 없어도 농토가 있었고 교육을 받았다. 이연은 관롱 귀족 집단에서도 최상층에 속했다. 조광윤은 금군의 장수였다. 주원장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부모는 굶어 죽었고, 자신은 거지 노릇을 하다가 승려가 되었다. 그 뒤 홍건군에 들어가 밑바닥에서부터 싸워 올라왔다.

이 출신이 그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기어 올라간 사람은 밑바닥의 고통을 몸으로 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추위가 무엇인지, 관리에게 짓눌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동시에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극에 달한다. 자신이 정상에 오른 데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작용했는지, 그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체험이 합쳐져 독특한 구축의 철학을 낳았다. 백성에게는 되도록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탐관오리에게 시달리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권력 체계 안의 사람들, 관리와 공신 귀족과 황족과 환관은 단 한 명도 믿지 않는다. 가장 촘촘한 제도를 설계해 모두를 통제한다.

주원장의 구축은 중국 제정사에서 가장 높은 밀도로 완전한 닫힘을 추구한 시도였다. 그는 제도로 황제부터 농민까지 모든 사람을 정해진 자리에 못 박아 놓으려 했다. 조금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1. 승상 폐지, 단일 지점에 대한 의존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다

홍무 13년인 1380년, 주원장은 호유용의 모반 사건을 명분으로 승상 제도를 폐지했다.

승상은 진나라에서 설치된 이래 1,600년 넘게 존속한 자리였다. 그 1,600년 동안 승상은 황제와 관료 체계 사이의 완충층이었다. 황제가 결정을 내리면 승상이 집행과 조정을 맡았다. 황제가 모든 정무를 일일이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 승상의 권력이 너무 커져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다는 단점도 있었다. 곽광, 왕망, 조조, 사마의가 그 예다. 모두 승상이나 그와 비슷한 자리에 있던 권신이었다.

3.5 버전에서는 삼성제로 승상의 권력을 분산했다. 하지만 중서령, 시중, 상서령이라는 삼성의 장관들 역시 승상급이었다. 누구든 세력이 커지면 권신이 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앞선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그 자리 자체를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이다. 권력을 나누거나 권한을 제한하는 수준이 아니라, 제도에서 아예 삭제했다. 이제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의 육부는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었다. 중간층은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섯 부서의 모든 일을 황제가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하루에 200건이 넘는 주청 문서를 읽고 재가했다. 그가 처리하는 정무는 전국의 온갖 사안에 걸쳐 있었다. 이전에 승상과 중서령과 상서령, 세 사람이 하던 일을 혼자서 한 셈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승상 폐지는 3.0 버전 이래의 단일 지점 구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조치였다. 이전 버전들에는 적어도 황제와 행정 체계 사이에 승상 또는 재상이라는 완충층이 하나 있었다. 승상을 없애자 그 완충층도 사라졌다. 황제 혼자 거대한 행정 기계 전체를 상대하게 되었다.

이 설계에는 한 가지 가정이 깔려 있었다. 황제에게 모든 일을 동시에 처리할 만한 능력과 기력이 충분하다는 가정이다. 주원장 자신은 해냈다. 그는 기력이 넘치고 업무 능력도 탁월한 사람이었다. 하루 열몇 시간씩 일하는 생활을 31년 동안 이어 갔다. 재위 기간은 1368년부터 1398년까지였다.

하지만 이 가정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다. 주원장은 하루에 문서 200건을 재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의 답이다. 뒤를 이은 명의 황제들은 승상 폐지로 쏟아진 업무를 감당하기 위해 갖가지 우회로를 만들어야 했다. 내각제는 그렇게 등장했다.

처음에 내각은 황제를 도와 답변 초안을 작성하는 비서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그 초안 작성이 이른바 표의(票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각대학사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다. 명 중기 이후의 내각 수보는 사실상 승상이었다. 승상이라는 명분과 법으로 정해진 권한이 없었을 뿐이다.

주원장이 막대한 대가를 치러 없앤 것이 그가 죽은 지 50년도 안 되어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형식은 ‘승상’에서 ‘내각 수보’로 바뀌었다. 기능은 그대로였다. 황제와 행정 체계 사이에는 여전히 완충층이 필요했다.

이는 구축의 기본 법칙을 더없이 선명하게 보여 준다. 제도의 이름은 없앨 수 있어도 그 제도가 응답하던 필요까지 없앨 수는 없다. 그 필요는 실제로 존재한다. 한 사람이 제국의 모든 일을 관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필요에 응답하지 않으면 필요가 스스로 출구를 찾아낸다. 내각제는 그렇게 필요가 제힘으로 찾아낸 출구였다.

황제의 의지로 제도를 지울 수는 있다. 필요는 지울 수 없다. 필요가 제도보다 더 근본적이다.

2. 위소제, 또 하나의 병농일치

주원장은 군사 주둔 조직인 위소(衛所)를 전국에 설치했다. 하나의 위는 5,600명을 거느렸고, 그 아래에 천호소와 백호소를 두었다. 위소의 병사는 대대로 군역을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군호, 곧 군역을 지는 가구에 속하면 아들도 군호였다. 다른 생업으로 바꿀 수 없었다. 군호는 토지를 받아 평소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나면 싸웠다.

언뜻 보면 당의 부병제와 닮았다. 둘 다 병농일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부병제의 병사는 보통 농민이었다. 병역은 의무였지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은 아니었다. 위소제의 병사는 군호 신분을 세습했고, 군적은 종신이며 탈퇴도 불가능했다. 군호 집안에서 태어나면 평생 군인이다. 그 후손 역시 평생 군인이다.

설계의 의도는 분명했다. 주원장은 군대가 독자적인 사회 세력, 스스로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집단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군호 세습제는 군인을 ‘직업 선택’에서 ‘신분 계층’으로 끌어내렸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해서 병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군호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병사가 될 운명인 것이다. 선택권은 없다. 선택권이 없으면 자율성도 없다. 자율성이 없으면 반란도 일어나지 않는다.

위소제의 또 다른 목표는 군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병사 백만을 기르되 백성의 쌀 한 톨도 쓰지 않는다.” 군대가 직접 농사를 지어 스스로 먹고살게 하는 것, 그래서 중앙 재정에서 돈을 내려보낼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 주원장의 이상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위소제는 모든 사람을 정해진 자리에 못 박으려는 주원장의 전체 설계 중 한 부분이었다. 군호는 농사짓고 싸운다. 민호는 농사짓고 세금을 낸다. 장호는 수공업에 종사한다. 사람마다 신분과 의무가 정해져 있어 그 경계를 넘을 수도, 바꿀 수도 없다. 사회 전체를 기능별로 여러 칸으로 나누고, 각 사람을 그중 한 칸에 집어넣어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모든 백성을 호적에 편입해 직접 지배한 진의 편호제민과 정신이 같다. 국가가 사람 하나하나를 기능 단위로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차이라면 진은 ‘농사’와 ‘전쟁’이라는 두 기능만 구분했고 군공을 통해 그 사이를 옮길 수 있었지만, 주원장은 군호·민호·장호 등 여러 기능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각 기능은 세습되었고 다른 기능으로 옮겨 갈 수 없었다.

세습되고 바꿀 수 없는 신분의 대가는 체제의 경직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위소제는 빠르게 퇴화했다. 군호는 도망쳤다. 농사를 지어 봐야 돈이 되지 않고 군역은 너무 고됐기 때문이다. 군관은 군대의 농토를 빼앗았다. 상층부의 부패였다. 군대의 전투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명 중기에 이르러 위소군은 사실상 전투 능력을 잃었고, 조정은 실제 군사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 모병, 곧 돈을 주고 싸울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에 의존해야 했다.

균전제에서 부병제로 이어졌던 붕괴의 연쇄와 같다. 토지 제도가 무너지고, 군사 제도가 무너지고, 군사력이 제도의 손에서 개인의 손으로 넘어간다. 위소군은 더는 싸우지 못했다.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척계광 같은 장수가 직접 모집하고 훈련한 사병 집단이었다.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균전제의 붕괴가 안녹산을 낳았다면, 위소제의 붕괴 역시 논리상 비슷한 문제를 낳아야 했다. 실제로 그랬다. 다만 드러난 모습이 달랐을 뿐이다. 명 말 이자성과 장헌충의 봉기군에는 붕괴한 위소 체계에서 밀려나 일자리를 잃은 군인이 대거 들어 있었다.

3. 해금, 잔여항의 입구를 물리적으로 막다

주원장은 엄격한 해금 정책을 내렸다. “널빤지 한 조각도 바다에 띄우지 못한다.” 민간의 해외 무역을 금지한 것이다.

직접적인 이유는 연안의 왜구, 곧 일본 해적 문제와 장사성·방국진 잔여 세력의 해상 활동이었다. 하지만 해금의 더 깊은 논리는 주원장의 전체적인 구축 설계와 일치했다.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줄인다는 것이다.

해외 무역은 부를 가져오지만 통제 불가능성도 가져온다. 상인이 바다에서 돈을 벌면 조정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독립성을 얻는다. 경제적 독립성은 정치적 독립성으로 바뀔 수 있다. 연안 지역은 인구 이동이 잦아 호적 제도로 붙들어 두기 어렵다. 외부의 상품과 사상과 정보는 조정이 공들여 유지하는 사회 질서를 흔들 수 있다.

해금은 이런 잔여항을 물리적으로 틀어막는 조치였다.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입구 자체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바다에 나가지 못하게 하면 해외 무역도 없을 것이다. 해외 무역이 없으면 해상 상인 계층도 없을 것이다. 해상 상인 계층이 없으면 경제적 독립성도 없을 것이다. 인과의 사슬을 출발점에서 끊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잔여항은 물이다. 앞문을 틀어막으면 뒷문으로 스며 나온다. 해금이 실제로 낳은 결과는 이랬다. 합법적인 해외 무역은 사라졌고, 불법 밀무역은 번성했다. 연안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밀수와 해적질이 하나로 얽히면서 오히려 더 큰 안보 위협이 생겨났다. 명 중기의 ‘왜구 문제’는 상당 부분 실제 일본 해적이 아니라 해금에 떠밀려 해적이 된 중국 연안 주민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왕직이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중국 상인이었다. 해금에 떠밀려 해적이 되었고, 그러고는 조정에 의해 왜구로 몰려 토벌되었다. 해금이 없애려던 문제를 해금 자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해금은 또 하나의 사례를 보여 준다. 잔여항이 빠져나갈 통로 하나를 막으면 잔여항은 다른 통로를 찾는다. 후한이 세속적 저항의 통로를 막자 저항이 종교화되어 황건 봉기로 나타났던 것과 논리가 완전히 같다.

4. 이갑제와 『대고』, 통제의 극한

주원장은 향촌의 가구를 묶어 관리하는 이갑제(里甲制)를 시행했다. 110호를 하나의 리로 묶고 이장 한 명을 두었다. 이장은 세금 납부를 독촉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분쟁을 조정했다. 이갑 위에는 곡물을 거두어 수도까지 운송하는 양장도 있었다. 기층 사회 전체가 촘촘한 통제망으로 조직되었다.

동시에 주원장은 『대고(大誥)』를 편찬했다. 탐관오리가 처벌받은 사례를 잔뜩 모아 놓은 ‘반부패 교재’였다. 그는 전국의 모든 가구에 이 책을 한 권씩 갖추라고 명령했다. 갖추지 않으면 죄가 되었다. 백성이 수도로 직접 와서 고발하는 것도 장려했다. 지방 관리가 백성을 억압하면 백성이 그 관리를 묶어서 수도로 압송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들은 주원장의 구축 철학에 담긴 또 다른 면을 드러낸다. 그는 관료 체계를 믿지 않았다. 관료가 부패한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시절 관리의 부패를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대응은 관료 체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래 걸렸다. 대신 그 바깥에 나란히 돌아가는 감시 체계를 만들었다. 백성에게 관리를 직접 감시하게 하고, 혹형으로 관리에게 공포를 심고, 비밀경찰인 금의위가 모든 사람을 몰래 감시하게 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주원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라를 다스리려고 거대한 관료 체계를 만든 다음, 그 관료 체계를 감시하려고 또 다른 체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감시 체계 역시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금의위의 감시자들도 관리다. 그렇다면 감시 체계도 부패할 수 있다. 이제 감시 체계를 감시할 또 다른 체계가 필요해진다……

이는 무한 퇴행이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주원장의 답은 “내가 한다”였다. 그는 모든 감시 사슬의 꼭대기에 혼자 서서 최종 판정을 직접 내렸다. 다시 승상 폐지의 논리로 돌아온다. 모든 것이 황제 한 사람의 판단력과 기력에 달려 있다.

주원장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의 개인 능력에 기대 이 체계가 간신히 돌아갔다. 그가 죽고 나자 유지 비용이 드러났다. 감시를 감시하고, 그 감시를 또 감시하는 데 드는 기력은 어떤 후계자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훌쩍 넘었다. 뒤를 이은 명의 황제들은 주원장이 설계한 통제 장치를 차례로 포기했다. 이갑제는 느슨해졌고, 해금은 이름만 남았으며, 『대고』는 아무도 읽지 않았다. 백성이 관리를 묶어 수도로 데려가는 제도는 애초에 제대로 돌아간 적조차 없었다.

살아남은 것은 금의위와 나중에 생긴 동창뿐이었다. 비밀경찰만큼은 황제가 포기하려 하지 않는 유일한 감시 도구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이 있다. 주원장이 설계한 모든 통제 장치 가운데 가장 폭력적인 것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갑제와 『대고』, 백성의 감시 같은 비교적 온건한 장치는 운영 비용이 너무 높아서 저절로 사라졌다. 비밀경찰 정치라는 폭력적 장치는 운영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존속했다. 첩자 한 무리를 먹여 살리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제도의 자연선택은 비싼 장치를 도태시키고 싼 장치를 남겼다. 그런데 싼 장치가 가장 폭력적인 경우가 많다. 폭력이야말로 가장 값싼 통제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자연선택을 설계한 것은 아니다. 제도가 오랫동안 작동하는 동안 저절로 이루어진 진화다. 진화의 방향은 ‘더 좋게’가 아니라 ‘더 싸게’다. 그리고 더 싼 통제는 대개 더 거친 통제다.

5. 정난의 변, 황족 자체가 잔여항이다

주원장은 생각할 수 있는 위협을 모두 고려했다. 공신은 모조리 죽였다. 남옥 사건과 호유용 사건에 수만 명이 연루되었다. 환관을 막으려고는 “내신(內臣)은 정사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철비를 세웠다. 권신을 막으려고 승상을 없앴다. 지방의 할거에는 위소제와 성 단위의 권력 분할로 대응했다. 경제적 독립성에는 해금과 이갑제를, 민간의 저항에는 편호제민과 비밀경찰의 감시를 배치했다.

그가 끝내 마땅한 처리 방법을 찾지 못한 상대는 단 하나였다. 자신의 아들들이었다.

주원장은 스무 명이 넘는 아들을 황실의 번왕으로 봉해 각지를 지키게 했다. 이유는 사마염과 같았다. 앞선 원 왕조에서 황족에게 힘이 없어 외부인이 권력을 빼앗은 일을 교훈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번왕들에게 병권을 주었다. 연왕 주체나 영왕 주권처럼 수만 명의 정예병을 거느린 번왕도 있었다.

그 자신도 알아보았지만 풀 수는 없었던 모순이다. 황족에게 병권을 주지 않으면 외부인이 황위를 빼앗을 수 있다. 조광윤이 후주를 찬탈한 일이 그 예다. 병권을 주면 황족끼리 싸울 수 있다. 팔왕의 난이 그 예다. 주원장은 양쪽 다 두려웠다. 결국 주는 쪽을 택했다. ‘남’보다는 ‘집안사람’이 믿을 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안사람’이 믿을 만한 것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뿐이었다. 주원장이 죽고 손자인 건문제 주윤문이 즉위하자 곧바로 번왕의 세력을 줄이는 삭번에 착수했다. 판단의 방향은 옳았다. 번왕은 분명 위협이었다. 다만 방법이 너무 성급했다. 짧은 기간에 여러 왕을 잇달아 폐위했고, 이것이 연왕 주체의 반란을 직접 촉발했다.

정난의 변(1399~1402년)은 중국 역사에서 번왕이 중앙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례다. 주체는 베이징에서 난징까지 싸워 내려왔다. 건문제는 궁중에서 사라졌다. 죽었는지 달아났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주체는 황위에 올라 영락제가 되었다.

정난의 변은 주원장이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하나를 입증했다. 황족 자체가 잔여항이라는 사실이다.

주원장의 구축 설계는 핵심적인 가정 하나에 기대고 있었다. 모든 위협은 바깥에서 온다는 가정이다. 황실 밖의 신하, 무장, 상인, 농민이 위협이고 황족은 안전하다. 가족은 가족을 해치지 않는다. 하지만 정난의 변이 입증한 것은 정반대였다. 가족도 가족을 해칠 뿐 아니라, 남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 가족에게는 남에게 없는 자원, 혈연에서 나오는 정통성과 번왕의 병권이 있기 때문이다.

서진 팔왕의 난과 논리가 똑같다. 두 왕조의 창업자는 모두 이전 왕조에서 ‘황족이 너무 약했다’는 교훈을 얻어 황족을 강화했다. 그러자 황족이 너무 강해져 내전을 일으켰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다 반드시 반대편으로 지나치게 기울고, 그 지나침을 또 바로잡아야 한다. 무한 반복이다.

황족의 병권은 3.0 버전 이래 한 번도 해결하지 못한 구조적 난제였다.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준다면 얼마나 줄 것인가? 이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수치를 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찬탈을 막으려면 황족이 필요하지만, 황족 자신도 찬탈할 수 있다. 위협 하나로 다른 위협을 상쇄할 수는 있어도 두 위협을 동시에 없앨 수는 없다.

집권한 주체는 정난의 변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는 번왕들의 병권을 체계적으로 약화했다. 그 뒤 명의 번왕은 순전히 기생하는 계층이 되었다. 봉토도 있고 봉록도 있고 존귀한 칭호도 있었지만, 병권도 행정권도 없었고 어떤 직업에도 종사할 수 없었다. 그저 부양받는 존재였다. 동물원에 있는 희귀 동물처럼, 살아 있지만 자유롭지 않고 쓸모도 없었다.

그 결과 새로운 잔여항이 생겨났다. 황족을 부양하는 재정 부담이었다. 명의 번왕 수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주원장에게는 아들이 스물여섯 있었고, 그 아들들은 저마다 또 한 무리의 아들을 두었다. 명 말에는 황족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을 수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조정이 먹여 살려야 했다. 황족에게 지급하는 봉록은 명 재정에 거대한 짐이 되었다.

이렇게 명 왕조는 정치적 위협으로서의 황족이라는 잔여항을 없애고, 재정 부담으로서의 황족이라는 잔여항을 만들어 냈다. 잔여항은 보존된다. 형태만 바뀐다.

6. 주원장이 구축한 체제에 대한 총평

주원장의 구축은 중국 제정사에서 완전한 닫힘을 향한 가장 편집증적인 시도였다. 여기서 ‘편집증적’이라는 말은 비하가 아니다. 한 가지 구축 철학을 정확히 묘사하는 말이다. 모든 잔여항을 가능한 한 없애고, 어떤 뜻밖의 사태에도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철학이다.

승상 폐지는 권신이라는 잔여항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위소제는 군대의 자율성이라는 잔여항을, 해금은 경제적 독립성이라는 잔여항을, 이갑제는 기층 사회가 통제를 벗어나는 잔여항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공신을 죽인 것은 개국공신이라는 잔여항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번왕 분봉과 삭번은 황족이라는 잔여항을 먼저 만들었다가 없애는 과정이었다. 금의위는 그 밖의 모든 잔여항을 감시하는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각 조치는 겨냥하는 잔여항이 분명했다. 각 조치는 자신이 겨냥한 범위 안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 조치들이 한데 모이자 구축의 밀도는 숨이 막힐 지경까지 높아졌다. 백성의 숨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원장은 백성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체제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숨통을 말하는 것이다. 관리는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서 벌벌 떨었고, 공신은 사건에 연루될까 저마다 목숨을 걱정했으며, 황족은 온갖 제한 속에서 갇혀 지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밀도는 지속될 수 없었다. 주원장이 죽자 그가 구축한 체제는 빠르게 느슨해졌다. 후계자들이 일부러 그의 설계를 해체하려 해서가 아니었다. 그 밀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력과 능력이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구축의 밀도에는 상한선이 있다. 그 상한선은 설계자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생리적·심리적 한계가 정한다. 한계를 넘는 밀도는 초인만이 유지할 수 있다. 초인이 죽으면 다시 보통의 밀도로 돌아간다.

주원장은 중국 제정사에서 개인의 의지로 잔여항 보존에 맞서려 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의 시도는 진시황보다 철저했다. 진은 강제적 통제만 썼지만 주원장은 강경한 수단과 유연한 수단을 함께 썼다. 왕망보다 정교했다. 왕망이 과거로 돌아가는 데 기대었다면 주원장의 설계는 전혀 새로웠다. 수양제보다 오래갔다. 주원장은 31년 동안 통치했고, 자신이 설계한 수많은 장치가 작동하면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볼 시간이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 역시 그보다 앞선 모든 이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결국 잔여항 보존에 의해 부정되었다. 구축은 완전히 닫힐 수 없다. 노력이 부족해서도,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잔여항 보존은 기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부품이 아니다. 정해진 자리에 못 박아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사람은 움직인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기 때문이다. 목적으로서의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더 나은 삶과 자유와 존엄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잔여항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주원장이 구축한 체제는 그가 죽은 뒤 100년도 지나기 전에 사회 자체의 움직임에 떠밀려 몰라보게 바뀌었다. 해금은 밀수에 무너졌고, 위소는 탈영으로 속이 비었으며, 이갑제는 인구 이동 탓에 껍데기만 남았다. 공신을 모조리 죽인 자리에는 환관과 문관의 다툼이 들어섰다. 구축의 뼈대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의 살과 피는 이미 한 차례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형체는 남고 정신은 흩어진다.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모든 구축이 맞는 공통된 운명이다.

다음 편에서는 명 중후기를 다룬다. 내각제의 진화 속에서 장거정은 구축 내부 개혁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동림당의 당쟁은 유생이 구축한 체제 내부의 자기 분열이었다. 만력제의 정무 태만은 역설적인 증명이 된다. 황제가 조회에 나오지 않는데도 구축된 체제는 놀랍게도 30년을 더 돌아갔다. 사람이 필요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어떤 변화에도 대응할 수 없을 만큼 굳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