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편: 몽골의 원 왕조, 끝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구축의 틀
앞서 살펴본 왕조들은 성공했든 실패했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왕조들은 성공했든 실패했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이다.
선양에 바탕을 둔 구축, 제사에 바탕을 둔 구축, 예악과 법가, 유가와 법가의 결합, 문벌과 문관에 바탕을 둔 구축. 하나하나가 “인간 사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내놓은 진지한 답이었다. 왕망의 복고처럼 틀린 답일 수도, 진나라의 순수한 법가 체제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답일 수도, 십육국의 군사 실력자 체제처럼 불완전한 답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답은 있었다. 구축의 틀을 설계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질서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원나라는 달랐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육지로 이어진 영토가 가장 넓었던 제국이다. 태평양에서 도나우강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뻗어 나간 정복 능력에는 견줄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정복 능력과 통치 능력 사이의 격차 또한 견줄 데가 없었다.
원나라(1271~1368)는 몽골 제국의 중국 지부로서 중국 본토를 97년 동안 통치했다. 그 97년 동안 중국 사회에 맞는, 내적으로 일관된 통치의 틀을 한 번도 세우지 못했다. 정복은 있었고 통치도 있었으며 제도의 파편들도 있었다. 그러나 구축은 없었다. “나는 어떤 질서를 세우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체계적으로 답한 적이 없었다.
중국의 황제 지배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1. 몽골 고유의 구축 방식: 초원 제국의 논리
원나라가 왜 중국에서 구축의 틀을 세우지 못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몽골인들 자신의 틀부터 알아야 한다.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골 제국에는 분명한 조직 원리가 있었다. 다만 그 원리는 초원에 맞춰 설계된 것이었다.
천호제.
칭기즈 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해체하고 재편해 95개의 천호로 묶었다. 천호 하나가 군사·행정·경제를 아우르는 단위였다. 천호장은 대칸이 임명했고 대칸에게 책임을 졌다. 천호 아래에는 백호와 십호가 있었다. 사회 전체를 군사적 피라미드로 조직한 것이다.
기능만 놓고 보면 진나라의 편호제민과 비슷했다. 부족이라는 낡은 혈연 조직을 허물고 중앙이 직접 통제하는 새로운 조직 단위를 세웠다는 점에서다. 차이는 진나라의 편호제민이 정적이었다면, 몽골의 천호제는 동적이었다는 데 있다. 진나라에서는 한곳에 묶여 자기 땅을 경작했다. 몽골에서는 언제든 동원되어 천호장을 따라 전쟁터로 나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천호제는 초원에서 잘 작동했다. 초원의 경제활동인 유목은 그 자체가 이동을 전제로 한다. 군사화된 사회 조직과 유동적인 경제 형태는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천호는 전쟁이 나면 모두 함께 출동하는 군사 단위이자, 평시에는 함께 가축을 기르는 경제 단위였고, 천호장이 내부 분쟁을 조정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행정 단위이기도 했다. 세 기능이 하나였으니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대칸의 권위.
몽골 대칸의 권위는 중국 황제의 권위와 뿌리가 달랐다. 중국 황제의 정당성은 천명론에서 나왔다. 천명과 덕행, 혈통을 결합한 이데올로기적 서사였다. 몽골 대칸의 정당성은 더 소박했다. ‘영원한 하늘’, 곧 장생천의 가호와 실제 전공에서 나왔다. 전쟁에서 이기면 하늘이 내 편이었다. 패하면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순전히 성과에 달린 정당성이었다. 정당성의 크기는 전과의 크기와 같았다. 전과가 좋으면 정당성도 높고, 전과가 나쁘면 정당성도 낮았다. 충격을 받아 줄 완충 장치도, 이데올로기라는 보호막도 없었다. 중국 황제는 패전하고도 천명론을 빌려 “하늘이 나를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분봉과 팽창.
칭기즈 칸은 제국을 네 아들, 주치·차가타이·우구데이·톨루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마다 울루스라는 영지를 하나씩 받았다. 대칸은 형제와 사촌들 가운데서 귀족회의인 쿠릴타이의 선거로 뽑았다. 적장자 상속제가 아니라 귀족 공화정에 가까운 선출제였다. 물론 실제 선거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후보가 주도하기 일쑤였다.
이 체제의 설계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었다. 제국은 영원히 팽창한다는 것이었다. 팽창이 계속되면 새로 나눠 줄 영토도, 분배할 전리품도 끊임없이 생긴다. 분봉과 전리품은 귀족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였다. 팽창이 멎으면, 더 나눠 줄 땅도 재물도 없어지면, 충성의 체계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진나라의 구축 방식과 구조적으로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끊임없이 먹이를 줘야 하는 체제였다. 진나라는 전쟁으로 군공작제를 먹여 살렸고, 몽골은 정복으로 분봉 체제를 먹여 살렸다. 먹이가 끊기면 탈이 났다.
2. 중국 정복: 초원이 농경지를 만났을 때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데는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1211년부터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킨 1279년까지, 앞뒤로 거의 70년이었다. 몽골이 벌인 모든 정복 가운데 가장 오래 걸렸다. 각각 몇 년이면 끝났던 중앙아시아, 러시아, 페르시아 정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남송의 저항이 끈질겨서만은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끈질겼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초원의 군사적 우위인 기병의 기동력과 돌파력이 중국 남부의 하천과 수로가 얽힌 지역에서는 크게 줄어들었다는 데 있었다. 유라시아의 대초원을 파죽지세로 휩쓴 몽골 기병도 양쯔강 이남의 구릉과 논, 성곽 앞에서는 그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성전과 수전은 유목민의 장기가 아니었다.
정복을 마친 쿠빌라이 앞에는 근본적인 질문이 놓였다. 초원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중국의 농업 사회에는 초원과 전혀 다른 통치 방식이 필요했다. 정착 농민을 천호제로 관리할 수는 없었다. 농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토지의 분배, 세금의 징수, 수리시설의 유지, 상업의 관리였다. 이 일을 굴려 나가려면 성숙한 문관 체계가 있어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그런 체계가 없었다.
쿠빌라이도 몇 가지 시도를 했다. 1271년에는 『주역』의 “대재건원(大哉乾元)”, 곧 “크도다, 하늘의 근원이여”라는 구절에서 따온 ‘대원’을 국호로 삼았다.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대도, 오늘날의 베이징에는 중국의 방식을 본떠 중서성·추밀원·어사대라는 중앙 행정기관을 설치했다. 지방에서는 중국식 주·현 행정구역을 그대로 썼다. 과거제가 다시 시행된 것은 훗날 인종 때인 1315년이었다. 시행이 중단되는 때도 있었고, 몽골인과 색목인에게는 우대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는 겉면의 이식이었을 뿐, 속까지 어우러진 결합은 아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행정 체계의 껍데기를 씌웠지만, 그 안에서 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몽골의 논리였다.
3. 사등인제: 잔여항을 신분 등급으로 제도화하다
원나라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제도는 사등인제였다. 전국의 인구를 네 등급으로 나눴다. 몽골인,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여러 민족을 묶은 색목인, 옛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북방 한족과 다른 민족을 포함한 한인, 옛 남송의 지배를 받던 남방 한족을 가리키는 남인이었다.
네 등급은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았다. 몽골인은 범죄를 저질러도 형벌이 가벼웠고 관직에도 우선 임용되는 등 가장 많은 특권을 누렸다. 남인은 차별을 가장 많이 받았다. 관직 진출에 엄격한 제약을 받았고, 과거 합격 정원도 남방의 인구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적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사등인제는 잔여항을 처리하는 대단히 노골적인 방식이었다. 잔여항을 소화하려 하지도, 이데올로기로 부호화하려 하지도, 심지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곧바로 신분 등급이라는 제도에 박아 넣었다.
무슨 뜻일까?
3.0판과 3.5판 운영체제에서는 피지배자의 불만, 사회의 불평등, 권력의 비대칭 같은 잔여항을 여러 장치로 관리했다. 유가 이데올로기로 부호화해 불평등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과거제를 통해 위로 올라갈 희망을 주며 불만이 빠져나갈 길을 열었다. 법을 집행할 때는 불평등하더라도 적어도 조문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외관으로 가렸다. 이 관리 방식들의 공통점은 잔여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꺼렸다는 데 있다.
사등인제는 이런 관리를 아예 포기했다. “너는 애초에 한 등급 아래의 인간이다”라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이데올로기의 포장도, 상승 통로가 주는 위안도, 법적 평등이라는 가리개도 없었다. 잔여항이 제도 안에 맨몸 그대로 명시되어 있었다.
몽골인들은 왜 이런 방식을 택했을까?
유별나게 잔혹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몽골의 정복이 대단히 잔혹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유는 잔여항을 더 정교하게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잔여항을 정교하게 관리하려면 온전한 이데올로기 체계가 필요하다. 유가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 낸 바로 그것이다. 성숙한 문관 체계, 곧 과거제가 수백 년 동안 길러 쌓아 둔 인재층도 필요하다. 지배받는 사회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야 한다. 몽골의 중국 통치는 100년도 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갖추기에는 턱없이 짧았다.
그래서 가장 단순하고 거친 방법을 썼다. 민족적 출신으로 선을 그은 것이다. 몽골인이면 특권이 있고, 몽골인이 아니면 특권이 없다. 간단명료했다. 집행하기 위해 복잡한 제도를 설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단순하고 거친 방식에는 대가가 따랐다. 몽골인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저항자가 되었다. 3.0판의 잔여항 관리는 피지배자 중 적어도 일부에게는 “불공평하지만 받아들일 만은 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사등인제는 모든 피지배자에게 “이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차이는 저항할 능력이 있느냐에 있었지, 저항하고 싶으냐에 있지 않았다.
잔여항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눌러 놓은 것이다. 누르는 힘만큼 되튀어 오르는 힘도 커진다. 원나라 말기의 대봉기가 이를 입증했다.
4. 원나라의 통치: 설계가 아닌 짜깁기
원나라의 통치 방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짜깁기였다.
설계를 거친 체제가 아니라, 출처도 제각각인 제도의 파편들을 임시로 이어 붙인 혼합물이었다.
행정의 경우, 중서성의 틀은 중국식이었지만 작동 원리는 몽골식이었다. 대칸 개인의 뜻이 모든 제도적 절차 위에 있었다. 행성제는 원나라의 중요한 혁신이었다. 행성, 즉 행중서성은 훗날 명·청 시대 성 단위 행정구역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행성 장관의 임명과 권한에는 명확한 제도적 규정이 없었다. 그때그때 중앙과 지방이 벌이는 힘겨루기에 따라 달라졌다.
경제에서는 교초라는 지폐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세계사에서 가장 이른 대규모 지폐 체계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발행 규모에 걸맞은 통화 규율은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찍었고, 인플레이션은 고려하지 않았다. 결과는 끊임없는 화폐가치 하락과 경제적 신용의 붕괴였다. 원나라 말기에 이르면 지폐는 거의 휴지가 되었다.
법률 면에서는 통일된 법전이 없었다. 몽골인은 몽골의 관습법을, 한인은 일종의 간소화된 중국법을, 색목인은 저마다의 전통을 따랐다. 집단마다 다른 법을 적용했고, 집행 기준마저 지역과 사람에 따라 달랐다. 법의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종교에서는 이례적일 만큼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원나라 영토 안에는 불교와 도교, 이슬람교, 경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샤머니즘이 공존했다. 이 관용은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몽골인들이 실제로 종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실용주의였다. 그 많은 것을 다 관리할 수 없다면 차라리 풀어 두자는 것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원나라의 통치에는 중심을 잡아 주는 조직 원칙이 없었다.
3.0판에는 핵심 원칙이 있었다. 유가와 법가의 결합이었다. 유가의 이데올로기로 정당성을 확보하고 법가의 행정으로 통제력을 확보했다. 3.5판은 이 바탕 위에 3성 6부, 과거제, 균전제 같은 부품을 덧붙였다. 각 부품은 핵심 원칙에 부합하면서 서로 맞물렸고, 내적으로 일관된 체제를 이루었다.
원나라에는 그런 핵심 원칙이 없었다. 어디서 무슨 문제가 생기든 손에 잡히는 도구로 그때그때 처리하는 식이었다. 몽골의 도구가 쓸 만하면 몽골 것을, 중국의 도구가 쓸 만하면 중국 것을, 색목인의 도구가 쓸 만하면 색목인의 것을 썼다. 통일된 논리도, 일관된 기준도, 장기적인 계획도 없었다.
이것은 구축이 아니다. 그럭저럭 때우기다.
때우기로도 통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있다. 97년의 지배는 때우기도 상당히 오래 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충분히 강한 군사력이 뒤를 받쳐 준다는 조건에서다. 원나라 통치의 진짜 토대는 그 어떤 제도 설계도 아닌 몽골 기병이었다.
그러나 때우기로는 스스로를 고칠 수 없다. 구축의 틀이 있는 체제는 문제가 생기면 틀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설정값을 조정해 대응할 수 있다. 때워 놓은 체제에는 조정할 설정값이 없다. 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폭력을 투입해 문제를 눌러 버릴 수밖에 없다. 폭력이 유일한 도구다.
5. 원나라는 왜 구축하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원나라는 중국을 거의 100년 동안 지배했는데, 왜 끝내 중국 사회를 위한 통치의 틀을 세우지 못했을까?
“몽골인들이 너무 뒤떨어져서”라는 답으로는 부족하다. 지나치게 거친 설명이다. 몽골인들은 군사 조직과 대륙 간 교역을 관리하는 데서 대단히 높은 제도 혁신 능력을 보여 주었다. 잠치라 불린 역참 체계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하나의 통신망으로 연결했고, 그 효율은 마르코 폴로를 감탄하게 했다. 몽골인들에게 제도 설계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 능력을 다른 곳에 썼던 것이다.
진짜 이유는 여러 겹으로 나뉠 수 있다.
첫째, 정복자의 사고방식.
몽골의 지배층은 줄곧 자신을 통치자보다 정복자로 여겼다. 정복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곳은 내가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다. 나는 세금을 거두고 누리려고 왔지, 무언가를 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이 사회를 위한 장기적인 통치 방안을 설계하겠다”는 동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둘째, 다원적 제국의 난제.
네 칸국을 포함한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중국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일 뿐이었다. 원나라의 통치자는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이라는, 문화적 배경이 판이한 네 집단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네 집단 모두를 위한 하나의 틀을 설계하는 일은 그 이전 어느 중국 왕조가 마주했던 과제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북위가 맞닥뜨린 이민족과 한인의 이원적 문제만 해도 충분히 어려웠다. 원나라가 상대해야 할 집단은 넷, 아니 그보다 더 많았다. 효문제는 한쪽으로 완전히 동화시키는 전면적 한화를 택했고, 요나라는 각자 따로 다스리는 이원적 구축을 택했다. 원나라가 택한 것은, 택하지 않는 것이었다. 몽골화할 것인지, 한화할 것인지, 새로운 융합을 만들어 낼 것인지 방향을 확정하지 않았다. 세 갈래 사이에서 97년 동안 망설였다.
셋째, 계승 위기가 제도 건설에 쓸 힘을 소모했다.
원나라의 황위 계승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쿠빌라이 이후의 황제 열 명 가운데 여러 명이 정변이나 궁중 음모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황제가 수시로 바뀌다 보니 체계적인 제도 개혁을 밀어붙일 만큼 긴 시간과 안정된 정치 환경을 누린 황제가 없었다.
쿠빌라이(재위 1260~1294)만이 구축할 능력과 시간을 함께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힘을 정복과 제국 내부의 권력투쟁에 쏟았다. 남송을 멸망시키는 데 거의 20년이 걸렸고, 안에서는 아리크 부케와 칸의 자리를 놓고 다퉜으며 카이두의 반란에도 맞서야 했다. 정복이 끝나고 권력이 안정되었을 때 그는 이미 늙어 있었다.
넷째,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초원의 논리와 농경의 논리가 양립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초원 제국의 핵심 논리는 유동성이었다. 사람도 가축도 군대도 권력의 중심도 움직였다. 농경 제국의 핵심 논리는 고정성이었다. 사람은 토지에 고정되고, 행정구역은 지도 위에 고정되며, 권력의 중심은 수도에 고정되었다.
이 두 논리의 모순은 “장점을 취해 단점을 보완한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사회를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달랐다. 동시에 움직이면서 고정되어 있을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주된 원리로 정하고, 그 원리 아래에서 다른 하나의 자리를 잡아 주어야 한다.
요나라는 이원적 공존을 택했다. 너는 움직이는 대로, 나는 정착한 대로 살면서 서로 간섭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현실적인 우회였다.
북위 효문제는 고정성, 즉 한화를 택했다. 유동성을 버리고 농경 문명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대가는 육진의 난이었다.
원나라는 선택하지 않았다. 정복자는 정착하지 않는다는 몽골 지배층의 유동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면서, 명목상으로는 고정적인 통치를 필요로 하는 농경 사회를 관리했다. 두 논리가 같은 정권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서로를 무력화했다. 결국 어느 쪽도 충분히 구현되지 못했다.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었다. 그럭저럭 때우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 대가는 위기가 닥쳤을 때 믿고 의지하며 대응할 체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6. 원나라 말기: 구축의 틀이 없는 체제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원나라의 붕괴 방식은 그 이전 모든 왕조와 달랐다.
그전까지의 붕괴는 이런 모양이었다. 구축된 질서가 얼마간 작동하다 보면 잔여항이 임계점까지 쌓이고, 마침내 구축의 틀을 안에서부터 터뜨린다. 이 모형에는 작동하고 있는 구축의 틀이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원나라에는 작동하는 구축의 틀이 없었다. 따라서 그 붕괴는 “구축의 틀이 터진 것”이 아니었다. “폭력으로 유지하던 강제적 질서가 폭력의 약화와 함께 저절로 해체된 것”이었다.
폭력이 약해진 이유는 여럿이었다. 몽골 기병의 전투력은 중원을 차지한 뒤 계속 퇴화했다. 평화로운 생활은 전사의 자질을 갉아먹었고, 정착은 기병의 기동성을 떨어뜨렸다. 지폐 체계의 붕괴와 조세의 혼란이 낳은 재정 위기는 중앙의 군대 부양 능력을 약화했다. 황위 다툼은 내부 결속을 소모했다. 황허강 범람 같은 자연재해는 사회적 갈등을 더욱 격화했다.
1351년, 홍건군의 봉기가 일어났다. 앞선 농민 봉기들과 마찬가지로 백련교와 미륵교라는 종교적 형식으로 조직되었다. 세속적인 통로가 막힌 뒤 사회 밑바닥의 잔여항이 종교의 형태로 분출한 사례가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의 봉기는 앞선 농민 봉기들과 결과가 달랐다. 진승·오광의 난, 황건의 난, 황소의 난은 진압되거나 다른 세력에게 자리를 열어 주는 데 그쳤다. 황건군과 황소의 군대는 진압되었고, 진승과 오광이 열어 놓은 권력의 공백은 결국 초한의 패권 다툼을 거쳐 다른 세력이 채웠다. 반면 원나라 말기의 봉기는 새 왕조의 창건자를 직접 낳았다. 주원장은 홍건군에서 일어나 마침내 명나라를 세웠다.
구축의 관점에서 원나라의 멸망은 중요한 명제를 확인해 준다. 폭력에만 기대는 통치는 지속될 수 없다. 폭력으로 정복할 수는 있어도 폭력으로 다스릴 수는 없다. 통치에는 구축이 필요하다. 피지배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지배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짜임이 있어야 한다. 진나라에는 적어도 법가의 구축이 있었다. 너무 뻣뻣해서 부러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원나라는 내적으로 일관된 구축의 틀 하나조차 세우지 못했다.
구축의 틀 없이 지배하려면 순수한 억압력에 기대야 한다. 억압력은 저량, 곧 쌓아 둔 양이다. 소모되기는 해도 스스로 보충되지는 않는다. 다 쓰면 끝이다. 원나라의 97년은 그 저량을 조금씩 소진한 과정이었다.
구축의 틀이 있는 통치는 제도와 동의가 결합한 힘에 기댄다. 이 결합은 유량, 곧 계속 흘러드는 양이다. 작동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보충할 수 있다. 과거제는 충성스러운 문관을 계속 길러 내고, 유가 이데올로기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지식인을 계속 길러 낸다. 이런 흐름은 오래 유지될 수 있다. 결국 잔여항이 쌓이면서 끊어진다고 해도 그렇다.
저량과 유량의 차이가 정권의 수명을 가른다. 원나라처럼 순수하게 저량에만 의존하는 통치는 쌓아 둔 것을 다 쓰면 끝난다. 구축의 틀이 있는 왕조들처럼 유량에 의존하는 통치는 더 오래 갈 수 있다. 계속 보충되는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7. 원나라가 남긴 유산
원나라는 구축의 틀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뜻하지 않게 몇 가지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첫째, 행성제.
원나라의 행성, 즉 행중서성은 그 뒤 600여 년 동안 중국 지방 행정구역의 토대가 되었다. 명·청의 성 제도는 원나라에서 직접 이어받은 것이다. 행성의 경계는 의도적으로 지리적 경계를 가로질렀다. 산악지대와 평야를 같은 성에 넣거나, 문화가 다른 지역들을 한데 묶는 식이었다. 후대에는 이를 지방의 할거를 막기 위한 설계로 해석했다. 어느 성도 지리와 문화 면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이는 단위가 되지 않도록 해, 떨어져 나가 독립할 가능성을 낮췄다는 것이다.
둘째, 민족 간 융합의 진전.
사등인제는 법으로 각 민족을 갈라놓았지만, 97년에 걸친 공존은 사회적 차원에서 융합을 진전시켰다. 많은 몽골인과 색목인이 중국에 정착해 다른 민족과 혼인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다.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이르면 적지 않은 몽골 가문이 한인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한화되어 있었다. 중국의 무슬림 집단인 회족도 상당 부분은 원나라의 색목인과 한족이 통혼하고 융합한 결과였다.
셋째, 실패로 남긴 교훈.
원나라는 군사적 정복만으로 제도 건설을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적어도 일부나마 받아들여질 통치 체계를 세우지 못한다면, 혹은 세우려 하지 않는다면, 정복은 일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주원장은 어느 성공한 왕조에서보다 원나라의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가 세운 명나라의 제도는 여러 면에서 원나라의 결함을 겨냥한 대응이었다. 원나라의 분산된 권력에 맞서 강력한 중앙집권을, 혼란스러운 법에 맞서 세밀한 법전을, 느슨한 인구 관리에 맞서 엄격한 호적제를 세웠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경험을 기억하며 몽골의 잔존 세력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넷째, ‘인간은 목적이다’라는 명제를 역으로 다시 입증한 사례.
사등인제는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극단적인 형태였다. 한 사람의 가치를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느 민족으로 태어났느냐로 정했다. 인간의 개별성을 철저히 부정한 것이다. 원나라의 멸망과 그 통치 내내 불안정했던 사회는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 체제는 지속될 수 없다. 군사력이 아무리 강하고 영토가 아무리 넓어도 피지배자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가 행동으로 자신이 사람임을 일깨워 줄 것이다.
홍건군에서 일어난 주원장은 북벌 격문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되찾자”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히 민족주의 감정을 표현한 말이 아니었다. 더 깊은 뜻은 이러했다. 우리는 열등한 인간 취급을 거부한다. 오직 태어난 곳 때문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등급, ‘남인’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사람이지 등급이 아니다.
이는 이 연작을 보이지 않게 떠받치는 중심축과 다시 맞닿는다. 상나라의 순장에서 사람을 곡식 생산과 적군 살해의 도구로 삼은 진나라를 거쳐 원나라의 사등인제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수단으로 삼은 극단적인 실천은 번번이 반발로 끝났다. 반발의 강도는 억압의 강도에 비례했다. 더 세게 누를수록 더 거세게 튀어 올랐다. 잔여항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목적이라는 사실은 어떤 구축의 틀로도 영원히 억눌러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은 명나라 전기다. 주원장의 구축은 중국사에서 가장 편집증적인 폐쇄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승상을 폐지하고 위소제·해금·이갑제를 시행해 모든 사람을 구축의 틀 안에 못 박으려 했다. 정난의 변은 황족 자체가 잔여항임을 입증했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