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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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8 / 25

제18편: 북송, 문관 구축의 정점과 한계

조광윤은 술 한 잔으로 장수들의 병권을 거두어, 무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문제를 단번에 끝냈다. 그 대가는 군사 역량의 체계적인 약화였다. 이 맞교환이 북송의 성격을 처음부터 끝까지 규정했다. 북송은 중국 역사에서 문치가 가장 융성하고 무공이 가장 약한 통일 왕조였다.

조광윤은 술 한 잔으로 장수들의 병권을 거두어, 무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문제를 단번에 끝냈다. 그 대가는 군사 역량의 체계적인 약화였다. 이 맞교환이 북송의 성격을 처음부터 끝까지 규정했다. 북송은 중국 역사에서 문치가 가장 융성하고 무공이 가장 약한 통일 왕조였다.

문치가 가장 융성했다는 말은 수사가 아니다. 제도 설계의 정밀함, 문관 체계의 성숙도, 문화적 창조의 풍성함에서 북송은 중국 제정사의 정점에 올랐다. 한층 정교해진 3성 6부제, 크게 늘어난 과거 선발 인원, 인쇄술이 이끈 지식의 민주화, 성리학의 탄생, 사(詞) 문학의 황금시대. 이 모든 일이 북송에서 일어났다.

무공이 가장 약했다는 말도 수사가 아니다. 북송은 건국 뒤 167년 동안 존속했지만(960~1127년), 끝내 연운 16주를 되찾지 못했다. 요나라나 서하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적도 없었고, 마침내 금나라(金)의 남침으로 멸망했다. 존속 기간 내내 전략적 방어 태세에 머문 통일 왕조는 중국 역사에서 북송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는 우연히 겹친 것이 아니다. 하나의 구축 형태를 선택하면서 생겨난 앞면과 뒷면이다.

1. 조광윤이 설계한 제도 전체

술자리에서 병권을 회수한 일은 출발점에 불과했다. 조광윤은 그 위에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제도 체계 전체를 세웠다. 설계의 치밀함이나 고려의 주도면밀함에서 양견에게 뒤지지 않았다.

‘권력의 분산과 상호 견제’가 모든 층위를 관통했다.

중앙에서는 재상의 권력을 쪼갰다. 추밀원이 군정권을 가져갔다. 재상은 군대를 관할할 수 없었다. 삼사사가 재정권을 가져갔다. 재상은 돈도 관할할 수 없었다. 재상에게 남은 것은 행정권뿐이었다. 한 재상이 쥐고 있던 권력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서로 예속되지 않는 세 기관에 맡겼다.

지방에서는 각 로(路), 즉 송나라의 성급 행정구역마다 네 명의 장관을 나란히 두었다. 전운사는 재정, 제점형옥사는 사법, 안무사는 군사, 제거상평사는 민정을 맡았다. 네 사람은 서로의 지휘를 받지 않고, 각자 중앙의 해당 부서에 책임을 졌다. 누구도 한 로의 권력을 통째로 독점할 수 없었다.

군사에서는 앞 편에서 자세히 설명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병사와 장수를 분리하고, 병력을 동원하는 권한과 병력을 지휘하는 권한을 나누고, 문관이 군대를 감독했다.

중국 정치사에서 권력 분산이 가장 철저했던 시기다. 조광윤의 설계 원칙은 아주 분명했다. 황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권력이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재상이든 장군이든 지방관이든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권력의 한 조각뿐이다. 그 조각들이 서로 감시하고, 서로 발목을 잡고, 서로를 제약하게 했다.

잔여항을 관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잔여항의 발생을 극단적으로 예방하는 전략이었다. 너무 많은 권력을 쥔 사람이라면 누구든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도 너무 많은 권력을 쥐지 못하게 하면 된다. 권력을 잘게 쪼개 여러 사람에게 나눠주고, 서로를 지켜보게 하는 것이다.

이 설계는 ‘권신의 찬탈’과 ‘무장의 반란’을 막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북송 167년 동안 권신이 황위를 찬탈하려는 위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무장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도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설계에는 거대한 부작용이 있었다. 효율이 극도로 낮았다.

권력을 나누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여러 기관이 조율해야 한다. 조율에는 시간이 든다. 공문이 오가고, 각자의 의견을 모으고, 이견을 중재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평시라면 낮은 효율을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급한 일도 별로 없다. 군사적 비상사태에서는 낮은 효율이 치명적이다. 적의 기병은 이쪽의 공문 처리 절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북송은 대외 전쟁에서 이 낮은 효율 때문에 거듭 손해를 보았다. 국경의 장수가 병력을 움직이려면 추밀원에 재가를 청해야 했다. 추밀원은 재상과 협의해야 했다. 재상은 황제의 뜻을 물어야 했다. 황제는 다른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면 적은 이미 싸움을 끝내고 철수한 뒤였다.

여기서 다시 삼국 편의 교훈으로 돌아온다. 효율과 회복탄력성, 여기서는 안전성으로 나타나는 그 속성 사이에는 맞교환이 존재한다. 북송은 극한의 안전성을 선택했다. 누구도 황권을 위협할 수 없었다. 그 대가는 극도로 낮은 효율이었다. 누구도 신속하게 실효성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2. 과거제의 전면적 확대, 구축의 사회적 기반을 다시 세우다

북송이 과거제를 발전시킨 방식은 혁명적이었다.

선발 규모의 확대.

당나라에서는 과거 한 차례에 진사를 20~30명 뽑았다. 북송에서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인종 이후에는 때로 500명을 넘었다. 과거는 비좁은 틈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 계층 이동의 통로로 바뀌었다. 극소수 천재만 건널 수 있는 외나무다리가 아니라, 중간 이상의 재능과 지성을 갖춘 많은 사람이 합격을 기대해볼 만한 큰 문이 된 것이다.

전시의 확립.

송 태조는 전시 제도를 확립했다. 중앙 시험인 성시를 통과한 수험생 전원을 마지막으로 황제가 전각에서 직접 평가하고 순위를 매겼다. 이로써 모든 진사는 ‘천자의 문생’이 되었다. 그들의 은인은 어느 시험관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었다. 당나라 과거에서는 시험관인 ‘좌주’와 합격자인 ‘문생’의 관계가 중요한 정치적 연결고리였다. 전시는 시험관과 수험생의 사적 관계를 끊고, 문관 계층 전체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을 특정 개인에서 황제로 옮겨놓았다.

호명제(糊名制)와 등록제(謄錄制).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고, 전담 인력이 답안을 다시 베껴 썼다. 채점자가 필적으로 수험생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야 채점관에게 넘겨 점수를 매기게 했다. 부정행위와 인맥을 통한 청탁을 막으려는 장치였다. 당시 세계 어디에도 이만큼 정교한 설계는 없었다. 시험 제도의 부패를 막는 일까지 제도화한 것이다.

과거 시험 내용의 표준화.

인종 때부터 과거의 출제 내용은 시와 부에서 책론으로 점차 옮겨갔다. 문학적 재능을 묻는 것이 아니라, 정치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과 해결책을 물었다. 과거가 선발하는 인재상이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에서 ‘현실의 문제를 분석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북송의 과거제 확대는 이전의 어떤 왕조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해냈다. 중앙집권에 진정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

3.0 버전과 3.5 버전의 최초 설계에서는 중앙집권의 사회적 기반이 흐릿했다. 황제는 무엇에 기대어 지방 세력과 맞설 것인가? 군대에 기댄다. 하지만 군대는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관료에 기댄다. 하지만 관료는 지방 세력에 포섭될 수 있다. 이념에 기댄다. 하지만 이념은 무르다. 단단한 실력을 이길 수 없다.

북송의 과거제는 중앙 권력과 이해관계가 제도적으로 묶인 사회 계층을 만들어냈다. 과거 출신 문관들이다. 이들의 모든 것은 과거제에서 나왔다. 진사 출신이라는 최고의 사회적 명예, 관리로서 받는 봉록, 중앙에서 임명한 관직이 주는 권력이 모두 그랬다. 중앙집권이 무너지면 이들은 모든 것을 잃는다. 따라서 중앙집권을 지킬 동기도 누구보다 강했다.

충성을 제도적으로 생산한 것이다. 개인의 도덕적 자질, 즉 그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람인가에 기대지 않았다. 이해관계의 구조에 기댔다. 자신의 이익이 중앙과 묶여 있으니, 충성하지 않으면 자기 이익을 해치게 된다. 도덕 교화로 충성을 생산하려 했던 3.0 버전의 ‘유학만을 받든다’는 방식보다 더 믿을 만했다. 도덕은 약해질 수 있지만 이해관계는 그렇지 않다.

과거제에서 나온 문관 계층은 이후 중국 제정의 사회적 기둥이 되었다. 북송부터 청 말기, 1905년 과거제 폐지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이 기둥은 쓰러지지 않았다. 왕조는 거듭 바뀌었지만 문관 계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3.5 버전 운영체제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부품이었다.

3. 왕안석의 변법, 구축 내부 개혁의 전형

송 인종 재위 후반부터 송 신종 때까지 북송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시달렸다.

위기의 뿌리는 ‘삼용(三冗)’이었다. 넘쳐나는 관리, 넘쳐나는 병사, 넘쳐나는 지출이다.

용관, 즉 과잉 관료. 과거 선발 인원이 늘어난 데다 관리의 자제가 곧바로 관직을 얻을 수 있는 ‘은음’ 제도까지 더해져, 관리 수가 실제 필요를 훨씬 넘어설 만큼 불어났다. 거대한 관료 집단이 거대한 봉록을 소모했다.

용병, 즉 과잉 병력. 북송의 상비군은 규모가 엄청났지만 전투력은 낮았다. 금군(禁軍)과 상군(廂軍)을 합하면 최대 120만 명이 넘었다. 막대한 군비가 병사를 먹여 살리는 데 들어갔다. 그 돈으로 산 것은 전투력이 아니라 사회 안정이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해 입대한 사람이 많았고, 군대는 사실상 사회 구호 기관이 되었다.

용비, 즉 과잉 지출. 요나라와 서하에 평화의 대가로 지급하는 세폐, 제사 비용, 궁정 경비를 비롯한 각종 지출이 늘어났다.

‘삼용’의 본질은 구축을 가동하는 비용의 지속적인 증가였다. 과거제는 갈수록 더 많은 문관을 생산했다. 그것이 애초 설계된 기능이었다. 하지만 그 문관들 모두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봉급을 주어야 했다. 무장을 견제하는 제도 설계 때문에 군대는 비대하면서도 비효율적이었다. 싸우지 못하는 병사를 대량으로 먹여 살린 것은 ‘병사로 삼아 백성을 부양’하고, 유민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편이 전쟁보다 싸기는 해도, 그 돈 역시 꾸준히 나가는 지출이었다.

왕안석(1021~1086년)은 신종의 지지를 받아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1069~1085년). 이를 통틀어 ‘희녕변법’ 또는 ‘왕안석의 변법’이라고 부른다.

핵심 조치는 다음과 같았다.

청묘법.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여물지 않은 춘궁기에 정부가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수확 뒤에 돌려받았다. 고리대의 횡포를 누르고 농민의 부담을 덜면서 국가 수입도 늘리려는 조치였다.

면역법. 원래 백성은 가호의 등급에 따라 돌아가며 관청에 나가 요역을 져야 했다. 정부를 위해 공짜로 일한 것이다. 이를 면역전을 내는 방식으로 바꾸고, 정부는 그 돈으로 사람을 고용했다. 더 이상 강제로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부유한 집은 돈으로 복무를 대신할 수 있어 부담이 줄었다. 반면 화폐경제가 생활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단점도 있었다. 모든 농민에게 면역전을 낼 현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갑법. 10호를 1보, 50호를 1대보, 500호를 1도보로 묶었다. 보에 속한 농민을 민병으로 편성해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했다. 국가의 군비를 쓰지 않는 지방 무장 조직을 만들어 정규군 일부를 대신하려는 목적이었다.

균수법과 시역법. 국가가 상업 유통에 참여했다. 정부 기관이 가격이 낮을 때 사들이고 높을 때 내다 팔아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가 수입을 늘렸다.

왕안석의 변법은 전형적인 구축 내부 개혁이었다. 3.5 버전의 기본 틀, 즉 중앙집권과 과거제와 문관 체계는 그대로 두었다. 그 틀 안에서 재정 수입을 거두는 방식, 요역 제도, 군사 조직 방식이라는 변수들을 조정했다.

개혁의 방향은 대체로 옳았다. ‘삼용’은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왕안석의 조치에는 하나하나 합리적인 논리적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개혁은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신종이 죽은 뒤 대부분 폐지되었다.

저항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문관 계층 내부였다.

참으로 역설적인 구조다. 북송은 문관을 중심으로 통치 체계를 세웠다. 그 체계의 장점은 안정과 상호 견제였다. 그런데 체계 안에서 개혁이 필요해지자, 견제 자체가 개혁의 장애물이 되었다. 어느 개혁이든 일부 문관의 이해관계를 건드렸다. 면역법은 부유한 집안 출신 관료의 이익을, 균수법은 상인과 연결된 관료의 이익을 건드렸다. 그리고 견제 장치는 그들에게 개혁에 반대하고 개혁을 가로막을 통로를 보장해주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왕안석의 반대자들이 모두 자기 이익만 지키려는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사마광, 소식, 구양수. 반대파에는 진지하고 재능이 있으며 공익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개혁이 자신의 이익을 건드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왕안석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정부가 경제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사회 질서가 흔들린다고 보았다. 청묘법이 집행 과정에서 강제 할당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걱정했고, 실제로 그 우려는 근거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갑법이 농민의 부담을 늘릴 것이라고 보았고, 그 역시 사실로 드러났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왕안석 변법의 실패는 문관 구축에 내재한 근본적인 역설을 드러낸다.

성숙한 문관 체계를 세웠다고 해보자. 그 체계는 높은 수준에서 정책을 논의하고, 방안을 토론하고, 결정을 심사할 수 있다. 그 심사 능력과 토론 능력은 진짜다. 문관들은 실제로 영리하며, 실제로 개혁안의 허점과 위험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심사 능력과 토론 능력이 개혁의 통과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떤 개혁안에든 허점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방안은 없다. 충분히 영리한 반대자는 언제든 그 허점과 위험을 찾아 개혁안을 공격할 수 있다. 문관이 영리할수록, 토론을 잘할수록, 비판적 사고에 능할수록 개혁은 더 추진하기 어려워진다.

체계가 스스로를 고치는 능력과 스스로를 부정하는 능력은 하나의 능력이 지닌 양면이다. 제도화된 비판 장치는 잘못된 정책을 막을 수 있다. 좋은 면이다. 올바른 정책도 막을 수 있다. 나쁜 면이다. 좋은 면만 갖고 나쁜 면은 버릴 수 없다.

왕안석이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황권의 강제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는 길이었다. 그는 신종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반대파를 억눌렀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더 큰 잔여항을 만들어냈다. 당쟁이었다.

변법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정책상의 이견에서 이념의 대립으로, 이념의 대립에서 전면적인 인사 숙청으로 바뀌었다. 한쪽이 집권하면 다른 쪽 사람을 모조리 쫓아냈다. 반대쪽이 집권하면 앞선 쪽의 정책을 전부 폐지하고, 그 사람들도 모조리 쫓아냈다. 이것이 되풀이되면서 문관 집단은 내부에 긴장이 있어도 작동하던 하나의 전체에서, 서로를 증오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당쟁은 북송 후기 정치의 핵심적 특징이었다. 문관 체계가 가진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써야 할 에너지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쓰였다. 북송 말기, 휘종 때에 이르면 당쟁은 문관 체계에 대한 공적 신뢰와 협업 능력을 거의 다 고갈시켰다.

왕안석의 변법이 남긴 교훈은 개혁의 시기에 관한 깊은 역설이다. 개혁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개혁을 추진하기 가장 어려운 때다. 체계가 잘 돌아갈 때는 개혁이 절박하지 않다. 왜 바꾸는가? 잘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체계에 문제가 생겨 개혁이 필요해지면, 체계 내부의 온갖 견제 장치가 개혁을 막는다. 애초에 그 장치들은 경솔하게 바꾸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4. 여러 정권의 공존, 같은 시대의 서로 다른 구축 형태

북송 시대의 동아시아는 하나의 제국이 주도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여러 정권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북송, 요, 서하, 대리, 그리고 나중에 등장한 금이 같은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구축 형태를 동시에 가동하고 있었다.

이처럼 뚜렷하게 서로 다른 구축 형태가 공존한 것은 전국시대 이후 처음이었다. 삼국, 십육국, 남북조 시대에도 여러 정권이 공존했지만, 그 시기의 정권들은 대체로 같은 구축 형태를 조금씩 바꿔 쓰고 있었다. 송·요·서하·금의 차이는 근본적이었다. 단순히 변수를 다르게 조정한 정도가 아니라, 밑바탕의 논리가 달랐다.

요나라, 거란의 이원적 구축.

요나라의 제도 설계는 대단히 독특했다. 남면관 체계는 한족을 관리하면서 한족식 관료제, 곧 3성 6부와 주현제를 썼다. 북면관 체계는 거란과 다른 유목 집단을 관리하면서 거란 전통의 부족 제도를 썼다. 한 나라에 두 제도가 있었고, 각자 맡은 사람들을 다스렸다.

이 이원적 구축은 실제 난제에 대한 실용적인 응답이었다.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다른 두 집단을 어떻게 하나의 제도로 동시에 다스릴 것인가? 농경 생활을 하는 한족에게는 토지 분배, 조세 징수, 문관에 의한 행정이 필요했다. 유목 생활을 하는 거란에게는 목초지 구획, 부족 조직, 군사 동원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 수요를 하나의 제도로 충족할 수는 없었다.

요나라의 해법은 억지로 하나로 통일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집단 사람이냐에 따라 그에 맞는 제도로 다스렸다. 북위 효문제의 전면적 한화 전략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이었다. 효문제의 전략은 모두를 한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쪽 방향으로의 동화다. 요나라의 전략은 각 집단이 자기 모습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원적 공존이다.

이원적 구축의 장점은 안정이었다. 두 집단 모두 자기에게 맞는 통치 방식을 얻었으므로 불만이 적었다. 요나라는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된 정권 중 하나였다. 약 210년을 존속해 북송보다도 오래갔다.

이원적 구축의 잔여항은 통합의 어려움이었다. 두 체계를 조율하는 일은 끝나지 않는 과제였다. 누구의 권한이 더 큰가? 자원은 어떻게 배분하는가? 충돌은 어떻게 중재하는가? 게다가 이원적 구축은 본래 현상 유지로 기울기 쉽다. 전면적 개혁을 밀어붙일 수 없다. 한 체계에서 효과가 나는 개혁이 다른 체계에서도 효과가 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서하, 당항의 혼합형 구축.

서하의 구축 형태는 한족식 제도와 당항족 전통을 섞은 것이었다. 겉은 한족식이었다. 관료 체계, 법률 체계, 문자 체계가 그랬다. 서하 문자는 한자를 참고해 만들었다. 밑바탕은 당항족의 것이었다. 부족 조직, 군사 귀족, 유목 경제가 버티고 있었다.

서하의 혼합형 구축은 요나라의 이원적 구축만큼 경계가 선명하지 않았다. 두 체계가 나란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를 한데 휘저어놓은 혼합물이었다. 섞으면 경계가 흐려진다. 경계가 흐리면 유연해지지만,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서하의 규모는 아주 작았다. 인구가 약 200만~300만 명으로 송이나 요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런데도 거의 200년을 버텼다(1038~1227년). 제도가 앞섰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서주랑과 닝샤 평원이 천연의 종심 방어 공간을 제공한다는 지리적 이점, 그리고 송과 요 사이에서, 나중에는 송과 금 사이에서 양쪽을 오가는 유연한 외교 덕분이었다.

금나라, 여진의 맹안모극 구축.

금나라는 건국 뒤 핵심 지역에 맹안모극제를 시행했다. 사회 자체를 군사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이었다. 맹안은 천호, 모극은 백호 단위로, 군사 단위이자 행정 단위였다. 여진인은 이 조직에 편입되어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출정했다.

구조적으로는 부병제와 비슷하다. 병사와 농민이 하나다. 다만 맹안모극제에는 부병제에 없는 특징이 있었다. 민족을 기준으로 나누었다. 여진인은 맹안모극에 들어갔지만 한족은 들어가지 않았다. 한족은 주현제로 다스렸다. 다시 요나라의 이원적 구축과 같은 발상으로 돌아간 셈이지만, 요보다 불평등했다. 여진인은 맹안모극제 안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고, 한족은 지배받는 2등 시민이었다.

금나라는 후기에 북위 효문제처럼 한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진전은 제한적이었다. 맹안모극제가 여진 귀족에게 주는 특권이 너무 컸고, 그들은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특권 계층이 개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같다. 개혁이란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내놓는 일이다. 누가 제 특권을 선뜻 내놓으려 하겠는가?

네 가지 구축 형태의 공존은 한 가지를 증명한다. 같은 시기, 같은 지리적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여러 정치적 구축 형태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전국시대의 일곱 나라에도 서로 다른 구축 형태가 있었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눈여겨볼 것은 오랜 공존이다. 요와 송은 100년 넘게 공존했고, 송과 금도 100년 넘게 공존했다.

장기간의 공존이 뜻하는 것은 어느 한 구축 형태도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송의 문관 구축은 경제가 발달했지만 군사력이 약했다. 요의 이원적 구축은 안정적이었지만 팽창하지 못했다. 금의 맹안모극 구축은 군사력이 강했지만 통치가 거칠었다. 서하의 혼합형 구축은 유연했지만 취약했다. 어느 구축 형태든 강한 분야와 약한 분야가 따로 있었다.

이것은 ‘최적의 구축 형태는 없다’는 주장에 또 하나의 근거를 보탠다. 무엇이 최적인지는 어떤 기준으로 재느냐에 달려 있다. 경제 발전을 기준으로 삼으면 송이 가장 낫다. 군사력을 기준으로 삼으면 금이 가장 낫다. 안정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요가 가장 낫다. 작은 몸집으로 큰 상대를 감당하며 살아남는 능력을 기준으로 삼으면 서하가 가장 낫다.

모든 기준에서 가장 뛰어난 구축 형태는 없다. 이것이 구축 형태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잔여항 보존이다. 어느 한 차원에서 얻은 우위는 반드시 다른 차원에서의 열세를 대가로 삼는다. 송나라가 보여준 문치의 극치는 극도로 약한 무공을 대가로 했다. 초기 금나라가 보여준 군사력의 극치는 거친 통치를 대가로 했다. 모든 차원에서 동시에 최고일 수는 없다.

5. 정강의 변, 문관 구축이 맞은 최후의 결산

1127년, 금군이 개봉을 함락했다. 송 휘종과 송 흠종을 사로잡고, 종실과 후비와 대신 수천 명까지 끌고 북쪽으로 갔다. 이것이 정강의 변이다. 북송은 멸망했다.

정강의 변의 직접적 원인은 군사적인 것이었다. 금군의 전투력은 송군을 훨씬 능가했다. 여진 기병이 송나라 보병을 압도한 방식은 진나라(秦) 군대가 여섯 나라의 군대를 압도한 방식과 비슷했다. 게다가 북송의 군사 지휘 체계는 극도로 비효율적이었다. 첫 번째 절에서 분석한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 제도는 전쟁이 터지자 재앙적인 책임 떠넘기기로 변했다.

하지만 정강의 변의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조광윤이 160여 년 전에 선택한 구축 형태가 마침내 결산을 맞은 것이다.

술 한 잔으로 병권 회수 → 문관이 무장을 통제 → 군사 역량의 체계적 약화 → 외적을 막아내지 못함 → 외적에 의해 멸망.

인과의 사슬은 가슴이 아플 만큼 선명하다. 각 고리는 앞선 고리의 논리적 결과다. 게다가 각각은 그 나름의 층위에서 모두 ‘합리적’이었다. 술자리에서 병권을 거둔 것은 무장이 비대해진다는 실재하는 위협을 해결했다. 문관이 무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은 지식인 계층이 진심으로 공유한 생각이었다. 군사 역량의 약화는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가 낳은 필연적 부산물이었다. 어느 고리도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옳은’ 고리들을 모두 이으니 끝에 망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잔여항 보존이 드러내는 가장 잔혹한 얼굴이다. 선택은 하나하나 모두 옳았다. 하지만 옳은 선택의 대가가 쌓이고 쌓여, 끝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잘못을 저질러서 망한 것이 아니다. 옳은 선택을 할 때마다 떠안은 비용의 만기가 어느 날 한꺼번에 돌아온 것이다.

정강의 변 이후 조구는 남쪽에서 남송을 세웠다(1127~1279년). 남송은 북송의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문관 체계, 과거제,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가 그대로였다. 문제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약한 군사력, 내부 당쟁, 개혁의 어려움이 그대로였다.

남송은 152년을 더 버텼다. 북송의 167년을 합하면 조씨의 송 왕조는 모두 319년을 존속했다.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한나라의 407년 다음으로 길었다. 오직 정권의 존속 기간만 놓고 보면 문관 구축을 실패라고 할 수 없다. 멸망하는 방식을 ‘내부 붕괴’에서 ‘외부의 정복’으로 바꿨을 뿐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이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3.5 버전의 송나라식 변형은 앞선 모든 버전의 내부 잔여항, 곧 무장의 반란과 권신의 찬탈과 문벌의 독점을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군사적 경쟁에서의 열세라는 외부 잔여항은 해결할 수 없었다. 내부는 지극히 안정적이고 외부에는 지극히 취약한 구축 형태였다.

성 안은 더없이 아름답게 꾸몄다. 그런데 성벽은 종이로 만든 것이었다.

6. 송나라가 순환 법칙에 더한 것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에서 북송이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독특하다. 북송은 앞서 등장한 적 없는 몇 가지 깊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잔여항의 해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며, 그 대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청구될 수 있다.

술 한 잔으로 병권을 거두어 무장의 비대화를 해결했다. 대가는 군사력의 약화였다. 하지만 그 대가가 곧바로 청구된 것은 아니었다. 북송 초기, 태조와 태종 때에는 통일 전쟁의 여세가 남아 있어 어느 정도 군사 역량을 유지했다. 대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쌓였다.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라는 제도적 환경에서 군사 역량은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게 쇠퇴했다. 정강의 변에 이르렀을 때는 160여 년 동안 쌓인 쇠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늦게 청구되는 대가가 가장 위험하다. 선택하는 순간에는 대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청구 시점이 오지 않았을 뿐인데,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가가 보일 때쯤이면 선택을 고치기에는 너무 늦다. 160여 년 동안 쌓인 제도의 관성은 명령 하나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체계가 스스로를 고치는 능력과 스스로를 부정하는 능력은 같은 능력이다.

왕안석 변법의 실패가 이를 증명했다. 북송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성숙한 정책 토론 문화가 있었다. 그 토론 문화는 어떤 방안에서든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좋은 면이다. 어떤 방안이든 시행을 가로막을 수도 있었다. 나쁜 면이다. 좋은 면만 남겨둘 수는 없다.

이것은 성숙한 제도 체계라면 모두 마주하는 딜레마다. 민주주의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의회의 토론 능력은 나쁜 법안도 막지만 좋은 법안도 막는다. 견제 장치는 독재를 막는 동시에 마비를 부를 수도 있다. 다만 좋은 민주주의 제도는 견제에 머물지 않는다. 견제가 영구적인 교착으로 굳어지지 않게 할 장치도 설계한다. 토론 시간의 제한, 의무적인 표결, 행정부의 긴급권, 정기 선거가 주는 압력으로 각 세력이 끝내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견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견제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솔한 결정을 막을 견제 장치도 필요하고, 영원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태를 막을 교착 해소 절차도 필요하다. 북송의 제도는 전자에는 정교했으나 후자에는 소홀했다. 제도를 정밀하게 설계할수록 그 제도가 변화를 거부하는 힘도 커진다. 교착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함께 설계하지 않았다면, 정밀함은 곧 마비다.

셋째, 절대적으로 최적인 구축 형태는 없다.

송·요·서하·금의 오랜 공존은 이 명제의 두 층위를 증명한다.

첫 번째 층위는 환경 조건이 다르면 유리한 구축 형태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경제 발전이 기준이면 송이 가장 낫다. 군사력이 기준이면 금이 가장 낫다. 안정성이 기준이면 요가 가장 낫다. 작은 몸집으로 큰 상대를 감당하며 살아남는 능력이 기준이면 서하가 가장 낫다. 한 차원의 우위는 반드시 다른 차원의 열세를 대가로 삼는다.

두 번째 층위는 더 근본적이다. 구축은 완전히 닫힐 수 없다. 모든 잔여항을 없앨 수 있는 구축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잔여항은 보존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잔여항을 해결하면, 그 해결책 자체의 틈새에서 새로운 잔여항이 자라난다. 따라서 어떤 구축 형태도 종착점이 아니며, 모두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구축은 언제나 발전해야 한다. 설계자가 충분히 영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잔여항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면 잔여항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구축에 새로운 응답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리즈가 첫 편부터 이야기해온 바다. 깎아내기는 멈추지 않고, 구축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실패했기 때문에 닫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잔여항 보존이라는 기본 법칙이 완결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잔여항이 보존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인간이 수단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의 욕구와 느낌과 창조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인간을 고정된 틀에 못 박아두려는 어떤 구축도 인간 자신의 발전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간다.

넷째, 문관 구축은 정권이 멸망하는 방식을 ‘내부 붕괴’에서 ‘외부의 정복’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미묘하지만 중요한 성취다. 앞선 왕조 대부분, 곧 진나라, 왕망의 신나라, 후한, 수나라, 당나라가 멸망한 주된 원인은 내부 붕괴였다. 농민 봉기, 군벌의 할거, 권신의 찬탈이었다. 북송이 멸망한 원인은 외부의 정복이었다. 내부 문제도 물론 있었다. 삼용과 당쟁이 그랬다. 그러나 정강의 변이 일어났을 때 북송의 내부 질서는 기본적으로 온전했다. 대규모 농민 봉기도, 군벌의 할거도, 권신의 찬탈도 없었다.

이는 문관 구축이 내부 잔여항을 없애는 데, 또는 크게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 대가는 멸망의 위험을 내부에서 외부로 옮긴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였다. 외적에게 패했다는 것은 적어도 내부 질서는 제대로 작동했다는 뜻이다. 스스로 제 몸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다. 구축은 완전히 닫힐 수 없다. 멸망의 위험을 내부에서 외부로 옮겼다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방향만 바뀌었다. 안에서 죽든 밖에서 죽든 죽음은 죽음이다. 게다가 외부의 손에 죽는 데에는 내부 붕괴에는 없는 위험이 하나 더 있다. 다른 민족에게 정복되면 몽골·원 통치에서처럼 구축 형태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3.0이나 3.5 버전을 재시작하듯 단순히 다시 가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다. 잔여항은 그 표현 형태 하나를 없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방비하지 않은 방향에서 다시 나타난다.

다음 편: 몽골·원, 유목 제국의 구축이 농경 문명과 마주하다. 네 등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제도는 잔여항을 신분 서열로 제도화한 것이다. 원나라가 무너진 방식은 독특했다. 구축이 내부에서 폭발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구축이 제대로 세워진 적이 없었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