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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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7 / 25

제17편: 당 후기와 오대 — 깎아내기는 잦아지고, 구축의 질은 떨어진다

안사의 난은 운영체제 3.5판에 생긴 단층선이었다. 그 균열이 생긴 뒤에도 당은 150년을 더 버텼다(763~907년). 하지만 그 150년은 앞선 130년과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시스템이 설계 범위 안에서 작동했다. 그 뒤로는 부서진 시스템이 관성에 기대어 미끄러져 갔다.

안사의 난은 운영체제 3.5판에 생긴 단층선이었다. 그 균열이 생긴 뒤에도 당은 150년을 더 버텼다(763~907년). 하지만 그 150년은 앞선 130년과 전혀 다른 시간이었다. 그전까지는 시스템이 설계 범위 안에서 작동했다. 그 뒤로는 부서진 시스템이 관성에 기대어 미끄러져 갔다.

그 미끄러짐의 종착점이 오대십국이었다(907~960년/979년). 53년 동안 중원에서는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 다섯 왕조가 주마등처럼 바뀌었다. 왕조 하나의 평균 수명은 11년도 못 되었다. 남쪽과 그 밖의 지역에는 따로 할거하는 열 개의 정권이 있었다.

이 시기는 300년 전 십육국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군사 실력자 중심의 구축이 빠르게 갈아치워졌고, 깎아내기의 빈도는 극도로 높았지만 구축의 질은 극도로 낮았다. 새로 들어서는 정권은 번번이 더 짧게 살았다. 그렇다고 오대가 십육국의 단순한 복사판은 아니다. 오대에는 고유한 구조적 특징도, 독자적인 기여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기여는 이것이었다. 수백 년 동안 중국 정치를 괴롭힌 ‘무인의 비대화’라는 잔여항을 끝까지 몰아붙였고, 그 극한에서 해법이 태어났다.

1. 안사의 난 이후의 당 — 명목상의 통일, 실질적인 할거

안사의 난은 ‘평정’되었다. 안녹산과 사사명은 차례로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반란군은 항복했다. 그러나 평정하는 방식이 이후의 정치 지형을 결정했다. 조정에는 반란군을 뿌리 뽑을 힘이 없었다. 반란군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영토와 군대를 그대로 보유하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명목상 당에 귀순했을 뿐, 실제로는 각자 독립된 세력을 이루었다.

이것이 번진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당 제국은 사실상 40~50개쯤 되는 번진으로 갈라졌다. 번진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삭 번진이다. 주로 오늘날의 허베이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안사 반란군의 직접적인 후계자였다. 독립성이 가장 강했다. 절도사 자리를 세습하고, 세금을 중앙에 바치지 않았으며, 심지어 독자적인 군사·외교 정책까지 폈다. 중앙을 대하는 태도는 이랬다. 천자라는 이름은 인정해 주겠지만, 내 일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중원과 동남 지역의 번진이다.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자리 잡은 이들은 세금의 대부분을 중앙에 바쳤다. 중앙 재정도 주로 동남 지역에서 걷는 세금에 의존했다. 하삭 번진보다 중앙과 훨씬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이들 역시 상당한 자율권을 누렸다.

셋째는 변경의 번진이다. 이들은 계속 외적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중앙과의 관계는 국경 사정에 달려 있었다. 긴장이 높아지면 중앙의 지원이 필요해 관계가 가까워졌고, 긴장이 풀리면 독립하려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 구도에는 동진·십육국 시대와 다른 결정적인 점이 있었다. 동진과 십육국은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남북의 두 시스템 사이에는 명목상의 상하 관계조차 없었다. 당 후기는 달랐다. 실질적으로는 할거했지만 명목상으로는 통일되어 있었고, 모든 번진이 당의 천자를 최고 권위로 인정했다.

명목상의 통일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쓸모가 작지 않았다. 이름뿐이라도 통일이 유지된다는 것은 정당성을 부여하는 공통의 틀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번진의 절도사는 조정의 책봉을 받아야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책봉은 흔히 도장만 찍어 주는 요식행위였다. 번진이 스스로 후계자를 정한 다음 조정에 추인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도장은 도장이다. 도장이 없으면 역적이고, 도장이 있으면 조정이 임명한 관리다. 이 차이는 도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무게가 있었다.

명목상의 통일에는 또 다른 뜻도 있었다. 3.0판 이래의 기본 합의, 곧 ‘천하는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번진의 할거는 일시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태이고, 통일은 정상적이며 마땅히 돌아가야 할 상태였다. 어느 번진도 공개적으로 ‘할거가 좋다. 우리는 각자 따로 살아야 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이 합의가 훗날 재통일을 위한 이념적 토대를 남겨 두었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당 후기 150년은 잔여항과 구축이 기묘하게 공존한 시기였다. 구축, 곧 대일통과 중앙집권은 이미 이름만 남았다. 그런데 구축의 언어인 천명론과 대일통의 이상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잔여항인 번진 할거와 지방 자치가 실제 권력의 공간을 차지했지만, 그 잔여항도 구축의 언어를 대놓고 부정하지는 못했다.

위선적인 균형이었다. 하지만 위선에도 기능은 있다. 완전한 분열을 막고 재통일의 가능성을 계속 남겨 두었다. 십육국처럼 명목상의 통일마저 버렸다면, 다시 통일하는 일은 몇 배나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2. 환관이 군권을 쥐다 — 3.5판의 마지막 패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중앙정부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던 유일한 군사력은 신책군이었다.

신책군은 원래 변경에 있던 군대였다. 안사의 난 도중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장안으로 옮겨 왔고, 이후 중앙 금군의 핵심이 되었다. 가장 규모가 컸을 때는 병력이 약 15만 명에 달했다.

그런데 신책군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지휘권이 병부나 추밀사 같은 정식 군사 관료의 손에 있지 않고 환관의 손에 있었다. 당 덕종 이후 신책군의 최고 지휘관인 ‘신책군중위’는 환관이 맡았다.

왜 환관에게 군대를 맡겼을까? 황제가 다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을 겪은 황제는 외조의 대신에게 군권을 넘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제2의 안녹산이 되면 어쩔 것인가? 황족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팔왕의 난이 남긴 교훈이 너무 뼈아팠다. 외척도 안 되었다. 후한의 교훈이 너무 뼈아팠다. 황제와 이해관계가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집단은 환관뿐이었다. 환관에게는 가문이 없고, 자식을 낳을 수도 없으니 후손에게 물려줄 세습 세력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들의 권력은 전적으로 황제의 신임에서 나왔다. 신임을 잃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절망 속에서 끝까지 밀어붙인 논리였다. 군권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집단 가운데 환관만은 황제에게서 독립된 권력 기반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환관에게 군권을 주는 것이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선택’이었다.

하지만 환관이 군대를 장악하자 심각한 결과가 뒤따랐다. 군권을 손에 넣은 환관에게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울 능력까지 생긴 것이다. 당 후기의 여러 황제가 환관의 손에 옹립되었다. 헌종은 환관에게 살해되었고, 목종·문종·무종·선종(宣宗)은 모두 환관이 세운 황제였다. 황제의 도구였던 환관이 황제의 주인이 되었다.

잔여항을 관리할 때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난관이다. 잔여항을 관리하려고 꺼낸 도구가 그 자체로 새로운 잔여항이 된다. 후한은 환관으로 외척을 견제하려 했지만, 환관은 외척과 똑같은 골칫거리가 되었다. 당 후기는 환관으로 군권을 통제하려 했지만, 환관은 황제를 통제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선택’도 오래 굴리다 보면 모두 ‘또 하나의 나쁜 선택’으로 퇴화한다. 권력을 부여받은 집단은 처음에 아무리 무해해 보여도 그 권력으로 자기 이익을 키우기 때문이다. 무해함은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출발점의 상태일 뿐이다. 출발점의 상태는 변한다. 그리고 변화의 방향은 언제나 권력의 자기 팽창이다.

3. 황소의 난 — 3.5판의 종말

875~884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황소는 소금 상인 출신이었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당 후기에도 과거제는 작동하고 있었지만 선발 인원은 극히 적었고, 문벌과 권세가의 자제들이 점점 더 자리를 독점했다. 과거제 자체도 늙어 가고 있었다. 낙방한 자의 분노에 소금 상인의 경제력과 조직망이 더해지면서, 황소는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황소의 난은 규모에서 안사의 난을 훨씬 넘어섰다. 반란군은 중국의 절반을 휩쓸었다. 산둥에서 광저우까지 싸워 내려간 뒤 다시 북상해 장안을 함락했다. 황소는 장안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했다.

하지만 황소 정권도 진승·오광과 마찬가지로 깎아내기는 있어도 구축은 없었다. 무너뜨릴 수는 있었지만 세울 수는 없었다. 장안에 머문 2년여 동안 황소는 제대로 작동하는 행정 체계를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그의 군대가 장안에서 한 짓은 후경이 건강(建康)에서 한 짓과 같았다. 도시를 접수한 것이 아니라 파괴했다.

황소는 끝내 번진 연합군에 패했다. 그런데 황소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당 중앙의 마지막 남은 권위까지 더 허물어졌다. 조정은 각지 번진이 병력을 내어 반란을 진압해 주는 데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번진들은 전쟁을 치르며 자기 세력을 한층 더 불렸다.

주온은 바로 그 과정에서 떠올랐다. 원래 황소의 부장이었던 그는 당에 투항한 뒤 선무절도사로 임명되었다. 항복한 반란군 장수에서 중원 최강의 번진 수장으로 올라선 그는, 마침내 907년 당 애제에게 선양을 강요하고 후량을 세웠다. 당은 멸망했다.

당이 어떻게 망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외적에게 진 것도 아니고, 농민 봉기에 전복된 것도 아니었다. 황소의 난은 이미 진압된 뒤였다. 당을 대체한 것은 당 자신의 번진이었다. 신하 하나가, 그것도 반란군에서 투항해 온 신하가 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했다. 외부의 충격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붕괴였다.

게다가 후한이 망할 때와 마찬가지로 병을 고치려던 약이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반란을 진압하려고 번진에 더 큰 권한을 주었는데, 그 권한이 거꾸로 당을 끝장내는 힘이 되었다.

4. 오대 — 군벌 중심 구축의 극한 시험

오대십국의 53년은 중국 정치사에서 구축의 질이 가장 낮았던 시기 가운데 하나다.

후량(907~923년)은 주온이 세웠다. 포악하고 의심이 많았던 주온은 말년에 친아들에게 살해되었다. 후당(923~936년)은 사타족 출신 이존욱이 후량을 무너뜨리고 세웠다. 그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형편없는 정치가였다. 연극 공연에 빠져 지내다 반란군에게 죽었다. 후진(936~947년)은 석경당이 연운십육주를 거란에 넘겨주고 군사 지원을 받아 세웠다. 이 거래의 후유증은 400년 동안 이어졌다. 연운십육주는 명대에 가서야 되찾았고, 그동안 북쪽 방어선에는 줄곧 거대한 구멍이 남아 있었다. 후한(947~951년)은 북방 왕조 가운데서도 가장 단명한 축에 들었다. 겨우 4년이었다. 후주(951~960년)는 곽위가 세웠다. 시영이 잠시 나라를 일으켜 세웠지만, 그다음에는 조광윤이 황포를 걸쳤다.

다섯 왕조가 교체되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같았다. 무장이 앞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다. 그러고는 다른 무장에게 무너진다. 왕조를 뒤엎는 데 복잡한 정치 공작은 필요 없었다.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걸어 들어가면 황제는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안 내놓겠다고 하면 죽이고 다른 사람을 앉히면 그만이었다.

군사 실력자 중심 구축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십육국 때와 마찬가지로 오대에서도 군사 실력자의 정권은 빠르게 갈아치워졌다. 오대의 왕조 하나가 존속한 기간은 평균 10년쯤이었다. 이 빠른 교체가 구축의 질을 높여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질은 떨어졌다. 새 왕조는 하나같이 앞선 왕조보다 더 조잡하고, 더 근시안적이고, 더 불안정했다.

왜 교체가 빠를수록 질은 더 나빠졌을까? 한 번 갈아치울 때마다 구축의 기반 시설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구축의 기반 시설이란 관료 조직에 쌓인 경험, 법의 연속성, 사회에 축적된 신뢰, 경제 질서의 안정성을 말한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 기반이 닳아 없어졌다. 새 왕조의 창업자는 옛 왕조의 관료를 숙청했고, 법 집행은 끊겼다.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적 신뢰가 무너졌고, 전쟁과 약탈로 경제 질서가 파괴되었다.

교체가 느리면, 이를테면 100년에 한 번 왕조가 바뀐다면 기반 시설을 복구할 시간이 있다. 교체가 빨라 10년마다 왕조가 바뀌면 복구하기도 전에 다시 부서진다. 오대의 모든 정권은 앞 정권의 폐허 위에 집을 지었다. 몇 년 짓고 나면 다시 다음 정권이 들어설 폐허가 되었다. 그 누적 효과는 분명했다. 기반은 갈수록 얇아졌고, 그 위에 버티고 설 수 있는 구축의 질도 갈수록 낮아졌다.

악순환이었다. 구축의 질이 낮다 → 정권이 단명한다 → 교체가 빨라진다 → 기반 시설이 거듭 파괴된다 → 구축의 질이 더 낮아진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누군가 두 가지 일을 해내야 했다. 중원의 권력을 잡고 새 왕조를 여는 일은 오대의 창업자들도 이미 해냈다. 송에 남은 과제는 첫째,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는 것, 둘째, 통일한 뒤 ‘무장이 황제를 뒤엎는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길을 찾는 것이었다. 둘 가운데 두 번째가 훨씬 더 어려웠다.

오대의 53년은 그런 사람을 기다린 시간이었다. 53년을 기다린 끝에 조광윤이 왔다.

5. 오대가 남긴 긍정적인 유산 — 문관 의식의 싹

오대가 온통 폐허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혼란이라는 표면 아래에서 중요한 사상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대의 지식인들은 군벌 정치의 추악함을 남김없이 목격했다.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정권, 넘지 못할 선이 없는 폭력, 사람 목숨을 풀잎처럼 여기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강렬한 합의에 이르렀다. 무인이 권력을 잡는 것이 모든 재앙과 혼란의 뿌리라는 합의였다.

추상적인 이론을 밀고 가다 나온 결론이 아니었다. 오대를 살아 낸 독서인에게는 저마다 몸으로 겪은 공포와 혐오가 있었다. 무인 독재의 폐해를 이해하려고 『자치통감』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날마다 그것을 겪고 있었다.

여기서 강력한 정치적 주장이 나왔다. 문관이 무장을 통제해야 한다. 그 반대여서는 안 된다. 문인은 나라를 다스리고 무인은 국경을 지켜야 한다. 정치적 결정권은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은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오대의 문관 의식은 아직 정서와 합의의 수준에 머물렀다. 제도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왕조인 북송이 제도를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조광윤의 배주석병권, 곧 술 한 잔으로 군권을 거두어들인 일과 북송의 ‘숭문억무’ 정책은 조광윤 혼자 떠올린 기발한 착상이 아니었다. 지식인 계층 전체가 오대의 폐허 속에서 길러 낸 집단적 의지를 제도로 표현한 것이었다. 오대의 혼란은 그 의지를 만들어 낸 촉매였다. 오대의 고통이 없었다면 북송의 문치도 없었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오대의 기여는 무언가를 세웠다는 데 있지 않다. 오대는 아무것도 세우지 못했다. 그 기여는 군사 실력자 중심 구축의 신뢰성을 완전히 소진시켰다는 데 있다. 오대 이전까지만 해도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한 정치적 선택지였다. 유방도 이세민도 결국 무력으로 일어선 사람들이 아닌가. 오대 이후 지식인 계층에게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영구히 경계해야 할 위험이 되었다.

어떤 구축 형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바닥나려면 실패가 충분히 거듭되어야 한다. 군사 실력자 중심의 구축은 십육국부터 오대까지 수십 번 실패했다. 수십 번이면 충분했다.

6. 시영 — 한 걸음을 남겨 둔 개혁가

오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에는 따로 들여다볼 만한 인물이 있었다. 후주 세종 시영이다.

시영의 재위 기간은 겨우 5년이었다(954~959년). 그러나 그 5년 동안 그는 구축의 형태를 바꾸려는 분명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군벌 정권을 제도화된 제국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잇달아 개혁을 추진했다. 군기를 바로잡고 노약한 병사를 도태시키는 한편 정예를 선발해, 오대의 평균 수준을 훨씬 웃도는 중앙 금군을 만들었다. 불교를 억압하고 사원 토지를 거두어 국가가 통제하는 토지와 인구를 늘렸다. 『대주형통』으로 법을 정비하고, 수리 시설을 건설하며 황무지를 개간해 농업을 일으켰다. 도량형도 통일했다.

시영은 천하 통일을 위한 전략도 세웠다. 남쪽을 먼저, 북쪽을 나중에 치고, 약한 상대부터 쓰러뜨린 뒤 강한 상대를 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남쪽에서 잇달아 승리해 남당의 장강 이북 지역을 빼앗았다. 이어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몸소 거란 정벌에 나섰다. 북벌이 막 성과를 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병으로 쓰러졌다. 서른아홉 살에 죽었다.

시영이 10년만 더 살았다면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구축 형태를 세우는 일도 그가 완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광윤이 한 일, 곧 통일과 배주석병권, 문관에 의한 통치는 상당 부분 시영 노선의 연장이었다. 조광윤 자신이 시영이 직접 발탁한 장수였다. 그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전전도점검 휘하의 금군도 시영이 정비해 놓은 군대였다.

시영의 이야기는 ‘일을 다 마치기 전에 죽은 개혁가’의 또 다른 사례다. 상앙이나 왕맹처럼 그의 사상은 육신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개혁의 성과를 누리지 못했지만, 뒤를 이은 조광윤은 그 제도적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아 발전시켰다.

개혁의 열매는 좀처럼 나무를 심은 사람의 차지가 되지 않는다. 중국 정치사는 이 법칙을 거듭 보여 준다. 시영이 나무를 심고 조광윤이 열매를 땄다. 양견이 나무를 심고 이세민이 열매를 땄다. 상앙이 나무를 심고 진시황이 열매를 땄다. 나무를 심는 데 필요한 자질인 선견지명, 결단력,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열매를 따는 데 필요한 자질인 인내, 타협, 운영 능력과 거의 겹치지 않는다. 나무를 심을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열매가 익는 날을 보지 못한다. 열매를 딸 줄 아는 사람은 대개 나무를 심으러 나서지 않는다.

7. 조광윤 — 술 한 잔으로 군권을 거두다

960년 음력 정월, 후주의 전전도점검 조광윤은 ‘거란의 침입을 막는다’며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거란의 침입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진교역에 이르자 부하들이 그의 몸에 황포를 걸쳐 주고 황제로 추대했다. 조광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뒤 군대를 돌려 개봉으로 돌아왔다. 후주의 어린 황제 시종훈은 선양했다. 북송이 세워졌다.

전형적인 오대식 찬탈의 대본이었다. 무장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도중에 황제로 추대된다. 수도로 돌아와 황제에게 자리를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형식만 놓고 보면 조광윤이 한 일은 주온·이존욱·석경당·곽위가 한 일과 완전히 같았다.

하지만 그다음에 조광윤이 한 일은 모든 선배와 달랐다.

건륭(建隆) 2년인 961년, 조광윤은 핵심 장수 몇 사람을 불러 술을 마셨다. 석수신과 고회덕 등, 황포를 걸치던 날 함께했던 형제 같은 사람들이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조광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된 것은 그대들이 받들어 준 덕분이오. 그런데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어느 날 그대들의 부하가 그대들에게도 황포를 걸쳐 준다면, 그때는 어찌하겠소?”

이 한마디의 파괴력은 핵폭탄급이었다. 오대를 움직인 핵심 논리를 벌거벗긴 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나를 황제로 세울 수 있다면, 그대들의 부하도 그대들을 황제로 세울 수 있다. 황포를 걸치는 일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끝없이 반복할 수 있는 방식이다. 장수가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 한, 이 장면은 계속 재연된다.

석수신 등은 혼비백산했다. 조광윤의 말은 그들에게 모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였다. 황제가 암시하면 그것은 곧 혐의가 된다. 이튿날 그들은 앞다투어 군권을 거두어 달라고 청했다. 조광윤은 ‘은혜롭게 허락’했고, 대신 후한 경제적 대우를 베풀었다. 막대한 토지와 금은, 저택을 내주었다.

이것이 배주석병권이다. 술 한 잔으로 군권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배주석병권은 중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축 형태의 전환 가운데 하나다. 장수 몇 명을 바꾸는 평범한 인사 조정이 아니었다. 체계적인 제도 설계였다. 후한 말부터 거의 800년 동안 중국 정치를 괴롭힌 ‘무장의 비대화’라는 잔여항을 제도로 영구히 해결하는 설계였다.

배주석병권 이후 조광윤은 무장을 견제하는 제도를 빈틈없이 짜 맞췄다.

병사와 장수를 분리한다.

장수는 특정 군대를 고정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다. 군대는 주둔지를 정기적으로 옮겼다. 이것이 경수법이다. 장수도 정기적으로 교체했다. 올해는 이 부대를 지휘하고, 내년에는 저 부대를 지휘한다. 장수와 병사 사이에 개인적인 충성 관계가 생길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충분히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안녹산 방식의 뿌리를 직접 잘라 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곳에서 같은 군대를 십수 년 동안 지휘했기 때문이다. 군대가 이미 그의 사병이 되어 있었다. 병사와 장수를 분리하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추밀원이 군권을 장악한다.

군사적 결정권은 장수에게 있지 않고 추밀원에 있었다. 추밀원은 문관이, 아니면 적어도 황제가 직접 통제하는 사람이 이끄는 중앙기구였다. 추밀원은 병력을 이동시킬 권한이 있지만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다. 장수는 병력을 지휘할 권한이 있지만 제 마음대로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동원과 지휘를 분리한 것이다.

문관이 군무를 관장한다.

경략사나 안무사 같은 지방의 최고 군사 책임자는 무장이 아니라 문관이 맡았다. 무장은 문관의 지휘 아래 움직였다. ‘문관이 무장을 통제한다’는 원칙을 제도로 옮긴 것이다.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는 사회 풍조를 만든다.

과거제는 한층 더 발달하고 확대되었다. 북송의 과거 선발 규모는 당을 훨씬 넘어섰다. 당에서는 한 해에 진사 20~30명을 뽑았지만, 북송에서는 수백 명을 뽑았다. 수많은 독서인이 과거를 통해 관료 조직에 들어가 거대한 문관 계층을 이루었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무장보다 높았다. ‘조정을 가득 채운 붉고 자줏빛 관복의 귀인들이 모두 책 읽은 사람들’이었다.

문관의 사회적 지위가 무장을 압도한 것은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사회 풍조도 그랬다. ‘좋은 쇠로는 못을 만들지 않고, 좋은 사내는 군인이 되지 않는다’는 속담이 송대부터 널리 퍼졌다. 당에서 군에 들어가는 것은 존중받는 신분 상승의 길이었다. 군공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도 많았다. 송에서 군에 들어가는 것은 남보다 한 등급 낮은 선택이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이 정도였다.

조광윤은 완결된 제도 체계로 ‘무장의 비대화’라는 잔여항이 나올 길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북송을 기점으로 중국의 정치 구도는 한·당의 ‘문무를 함께 중시하는 체제’에서 ‘문이 주도하고 무가 따르는 체제’로 되돌릴 수 없이 전환되었다. 이후 송·원·명·청으로 이어진 천 년 동안 안녹산식 무장 반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잔여항을 성공적으로 없앤 사례였다. 하지만 잔여항 보존은 우리에게 말한다. 잔여항 하나를 없애면 반드시 새로운 잔여항이 생긴다.

8. 대가 — 군사 능력의 영구적인 약화

배주석병권은 무장이 비대해지는 잔여항을 없앴다. 그 대신 생겨난 새 잔여항은 군사 능력이 체계적으로 약해지는 것이었다.

병사와 장수를 분리한다는 것은 장수가 자기 군대를 잘 모르고, 군대도 자기 장수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싸움을 앞두고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의 금기다. 북송은 그것을 일상적인 제도로 만들었다. 군대의 전투력과 결속력이 크게 떨어지는 결과가 뒤따랐다.

문관이 군무를 관장한다는 것은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군사적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었다. 문관에게 전략적 안목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개 전술 경험과 전황을 직감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전장에 나가 본 적 없는 진사에게 군대를 지휘하게 하는 것은 메스를 잡아 본 적 없는 의학박사에게 수술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이론상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막상 손을 대면 엉망진창이다.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는 풍조 속에서는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과거를 보러 갔고, 군인이 되려 하지 않았다. 군대로 모여든 것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다른 길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군대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졌다.

이 요인들이 겹쳐지자 가혹한 결과가 나왔다. 북송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비군을 거느렸다. 금군만 해도 가장 많을 때는 80만 명을 넘었다. 그런데 실제 전투력은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약했을지도 모른다. 양과 질이 반비례했다.

북송은 끝내 연운십육주를 되찾지 못했다. 석경당이 거란에 넘겨준 전략적 요충지였다. 연운십육주가 없으면 북쪽 방어선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거란 기병은 산과 강의 험준한 지형에 가로막히지 않고 그 틈을 통해 화북 평원으로 곧장 들이닥칠 수 있었다.

송과 요 사이의 군사적 균형은 결국 1005년 ‘전연의 맹’으로 굳어졌다. 북송이 해마다 요에 세폐로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고 평화를 얻는 방식이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돈을 주고 안전을 사는 합의였다. 북송으로서는 돈을 주고 평화를 사는 편이 전쟁보다 훨씬 쌌다. 요에 맞설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 세폐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요로서도 싸우지 않고 돈을 받는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순전히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전연의 맹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구축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를 뜻했다. 운영체제 3.5판은 송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뒤 군사적 팽창 능력을 영구히 잃었다. 한의 ‘우리 강대한 한을 침범한 자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반드시 베어 버린다’는 선언이나 당의 천가한 체제처럼, 강한 군사력에 기대어 취하던 외교적 자세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조광윤은 800년 묵은 문제인 무장의 비대화를 해결했다. 그 대가로 천 년을 갈 새 문제인 군사적 허약함을 만들어 냈다. 그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대의 상황에서 무장의 비대화는 군사적 허약함보다 더 급박한 위협이었다. 더 급한 문제부터 푸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잔여항 보존은 공짜 해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A를 없애면 B가 나온다. B는 A만큼 급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B는 아주, 아주 오랫동안 곁에 남는다.

북송은 결국 외적에게 멸망했다. 1127년 금이 북송을 무너뜨렸다. 남송도 결국 외적에게 멸망했다. 1279년 몽골이 남송을 무너뜨렸다. 군사적 허약함이라는 잔여항은 끝내 청산되었다.

그런데 청산 방식은 뜻밖이었다. 중원 왕조가 스스로 문제를 고친 것이 아니었다. 금과 몽골이라는 외부 세력이 정복을 통해 대신 ‘교정’해 주었다. 정복자들은 자기들의 군사 전통을 가져와 중원의 정치 체계에 녹여 넣었다. 그것이 송 이후 부족해진 군사 능력을 어느 정도 메워 주었다.

다시 한번 확인되는 법칙이다.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 잔여항은 역사가 대신 해결한다. 다만 역사가 대신 해결하는 방식은 대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던 방식이 아니다.

다음 편은 「북송 — 문관 중심 구축의 정점과 한계」다. 왕안석의 변법은 구축 내부 개혁의 고전적인 사례다. 다음 편에서는 송·요·금·서하 네 정권의 공존도 비교한다. 거란의 이원적 구축, 여진의 맹안모극 구축, 당항의 혼합적 구축, 그리고 남쪽 한편에 자리 잡고 버틴 남송의 문관 중심 구축을 함께 살펴본다. 같은 시대에도 서로 다른 문명은 완전히 다른 구축 형태를 가동할 수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