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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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6 / 25

제16편: 당 전기, 3.5 버전의 황금 상태와 숨은 전제

서기 626년, 훗날 태종이 되는 진왕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다.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붙여 황위에 올랐다.

서기 626년, 훗날 태종이 되는 진왕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켰다.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몰아붙여 황위에 올랐다.

도덕적으로 떳떳한 출발은 아니었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퇴위를 강요한 일은 어떤 윤리 체계로 보아도 큰 감점 요인이다. 그러나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현무문의 변은 3.5 버전 운영체제가 앓던 고질병 하나를 정확히 드러냈다. 바로 계승 규칙의 취약성이었다.

주공이 적장자 계승제를 고안한 이래, 그 제도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하나 있었다. 적장자가 다른 형제들보다 못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태자 이건성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에서 이세민이 세운 공과 얻은 명성은 형을 훨씬 능가했다. 군사 집단 전체가 이세민을 따랐다. ‘확실성’, 즉 적장자가 계승한다는 원칙과 ‘능력’, 즉 가장 유능한 사람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3.5 버전도 이전의 모든 버전처럼 제도화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판결은 폭력이 내렸다.

이세민은 이 도덕적 빚을 갚는 데 평생을 썼다. 참회로 갚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이었다. 대신 통치의 성과로 자신의 찬탈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정관의 치가 바로 그 증명서였다.

1. 정관, 3.5 버전이 최고 성능을 내다

정관의 치(627~649년)는 후세에 이상적인 황금시대로 곧잘 그려졌다. 이상화의 필터를 걷어내면, 정관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나 완벽했느냐에 있지 않다. 3.5 버전 운영체제가 설계 의도에 가장 가까운 상태로 작동한 사례라는 데 있다.

이전 버전들의 ‘황금 상태’에도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운영자가 구축의 설계 의도를 이해하고, 그 의도와 거의 일치하게 시스템을 운용하며, 잔여항은 낮은 수준으로 억제된다. 문경의 치는 3.0 버전의 황금 상태였다. 정관은 3.5 버전의 황금 상태였다.

정관의 황금 상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드러난다.

첫째, 3성 6부제가 설계 의도대로 작동했다.

3성제의 설계 의도는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게 하는 것이었다. 중서성이 기초하고, 문하성이 심사하고, 상서성이 집행한다. 태종은 이 절차를 실제로 돌아가게 했다. 문하성은 조칙을 돌려보내 재고를 요구하는 봉박권을 정말로 행사했다. 위징을 비롯한 간언하는 신하들은 황제의 결정을 여러 차례 되돌려 보냈다. 태종이 늘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한번은 조회에서 물러난 뒤 화가 나서 “내 언젠가는 저 촌늙은이를 죽이고 말겠다”고 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받아들였다.

태종이 간언을 받아들인 까닭을 전부 도량이 넓어서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제왕보다 비판을 잘 견뎠다.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무문의 변으로 얻은 자기 황위의 출처가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폭군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증명 방법이었다. 보라, 나는 나를 타이르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 나는 좋은 황제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결과는 같았다. 정관 시기의 3성제는 설계대로 작동했다. 황제의 결정은 제도화된 심사 절차를 거쳤고, 더는 그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집행 단계로 튀어나가지 않았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질 확률과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둘째, 과거제가 꾸준히 발전했다.

태종은 과거로 선발하는 인원의 규모를 늘리고 과거제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요점을 잘 보여준다. 새로 급제한 진사들이 줄지어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태종이 기뻐하며 말했다는 것이다.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구나.” 천하의 인재가 모두 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지극히 솔직한 말이다. 과거는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일 뿐 아니라 사회의 엘리트를 체제 안으로 흡수하는 장치였다. 천하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두 시험을 준비하고, 합격하면 체제 안에 들어가 조정을 위해 일한다. 그들의 지적 능력이 시스템을 뒤엎는 쪽이 아니라 유지하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가 없었다면 이 똑똑한 사람들의 재능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지방 호족의 참모 집단으로, 반란을 기획하는 모임으로, 중앙이 통제하지 못하는 온갖 조직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과거는 그 가능성을 전부 끊어버렸다.

셋째, 대외 팽창을 절제했다.

태종은 군사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토욕혼을 격파하고, 고창을 정벌했다. 그래도 팽창에서는 비교적 절제했다. 그의 팽창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진시황이나 수 양제처럼 ‘모든 방향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전면적 팽창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 알았다.

그 절제는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다. 태종은 호전적인 사람이었고 정복자의 기질을 지녔다. 절제는 수나라 멸망의 교훈을 깊이 이해한 데서 나왔다. 그는 신하들에게 거듭 말했다.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다.”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한 정권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무너지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가 들여다본 거울은 주로 수나라였다. 양광이 잘못한 일을 그는 의식적으로 피했다. 양광이 대운하를 팠다면, 그는 대규모 공사를 벌이지 않았다. 양광이 고구려를 세 차례 침공했다면, 그는 한 차례만 공격하고 전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물러났다. 몹시 분해했지만 그래도 물러났다. 양광이 순행으로 백성을 괴롭혔다면, 그는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했다.

태종이 이룬 정관의 치는 상당 부분 ‘수 양제 반대로 하기 목록’을 실행한 결과였다. 양광이 한 일은 나는 하지 않는다. 부정적 경험에서 길어 올린 정치적 지혜였다. 무엇이 옳은지 알아서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그른지 알아서 그것을 피한 것이다.

넷째, 천가한이라는 새로운 정당성 서사가 등장했다.

태종은 동돌궐을 멸망시킨 뒤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북방 초원 민족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는 중원의 황제일 뿐 아니라 초원의 최고 통치자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천가한은 정당성 서사의 중대한 혁신이었다. 이전의 3.0·3.5 버전 운영체제에는 중원의 한족 사회를 향한 정당성 서사만 있었다. 천명론, 유교의 언어, 대일통의 이상이 그것이었다. 천가한은 그 위에 초원의 유목 사회를 향한 정당성 서사를 한 겹 더 얹었다. 당 황제는 두 시스템의 최상위 지점을 동시에 차지했다. 중원에서는 천자였고, 초원에서는 가한이었다.

이는 관롱 집단에 섞여 있던 여러 민족의 유전자가 자연스럽게 뻗어 나간 결과였다. 자신부터 호한(胡漢) 혼혈인 지배 엘리트는 순수 한족 지배 엘리트보다 초원 민족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다. 이세민 자신에게도 선비족의 피가 흘렀다. 어머니 두씨와 할머니 독고씨 모두 선비족 혈통이었다. 그의 문화적 기질에도 초원의 요소가 있었다. 말을 타고 활 쏘는 데 능했고 용맹을 높이 샀으며, 순수 한족 문인들처럼 호인들을 배척하지 않았다.

천가한 체제는 훗날 중원 왕조들이 북방 민족과의 관계를 다룰 때 참고할 틀을 제공했다. 정복과 억압 대신 공동의 군주와 공존을 내세우는 방식이었다. 초원을 군현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초원의 수장들이 당신을 공동의 군주로 인정하게 하면 된다. 공동 군주의 지위를 떠받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양쪽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성의 틀이다. 물론 폭력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2. 측천무후, 구축의 논리로 구축의 가정을 공격하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정통으로 인정되는 여성 황제다.

전통적 서사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현명한 통치자였다는 사람도 있고, 음란하고 잔혹한 여자였다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도 그녀의 진정한 의미에는 닿지 못한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측천무후가 중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그녀는 3.5 버전 운영체제 자체의 논리로, 그 시스템이 한 번도 검증한 적 없는 숨은 가정을 공격했다. 운영자는 반드시 남성이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3.5 버전의 모든 설계, 곧 3성 6부제·과거제·균전제·부병제는 논리적으로 운영자가 남성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서령은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거나 ‘과거 응시자는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고 규정한 제도 조항은 없다. 실제로는 남자만 과거에 응시했지만, 그것은 사회적 관행이지 제도에 명시된 조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스템 전체의 작동에는 깊이 깔린 가정이 있었다. 황제는 남성이라는 것이다. 천명론에서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다. ‘아들’, 곧 남성이다. 삼강은 임금이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의 벼리가 되며, 남편이 아내의 벼리가 된다고 말한다. 주도하는 쪽은 모두 남성의 역할이다. 종법제는 부계 혈통을 따라 권력을 전한다. 정당성 서사 전체가 남성의 문법으로 쓰여 있었다.

측천무후는 한 가지 일을 했다. 문법을 고치지 않은 채, 그 문법 안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여성이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이론을 발명하지 않았다. “남성의 지배는 잘못됐고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당시의 담론 환경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녀가 한 일은 기존 언어의 틀 안에서 한 걸음씩 최고 권력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황후가 되어 후궁 정치의 주도권을 얻었다. 다음에는 고종과 함께 ‘이성(二聖)’, 곧 두 성인(聖人)으로 불리며 조정에 나아가 사실상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그다음에는 고종이 죽은 뒤 태후의 신분으로 섭정했다. 마지막에는 직접 황제를 칭했다. 국호를 ‘주’로 바꾸고 자신을 ‘성신황제’라 불렀다.

매 단계는 기존의 틀 안에서 조금씩 조정한 것이지, 틀 자체를 뒤엎은 것이 아니었다. 태후의 섭정은 한나라 때 이미 여후·두태후·등태후라는 선례가 있었다. 황후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당 초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장손황후도 더 은밀한 방식이기는 했지만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측천무후는 매번 앞선 사람들보다 조금 더 멀리 밀고 나갔을 뿐이다. 그러다 마침내 ‘태후’와 ‘황제’ 사이의 선을 넘어섰다.

그 선을 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시스템이 무너졌는가? 아니다. 3성 6부는 평소처럼 돌아갔다. 과거도 평소처럼 치러졌다. 오히려 측천무후는 과거로 뽑는 인원을 크게 늘리고 전시(殿試) 제도를 도입했다. 균전제도 그대로 시행됐고, 법도 그대로 집행됐다. 운영자의 성별이 바뀌었다고 행정기구가 멈춰 서는 일은 전혀 없었다.

바로 이것이 핵심적인 발견이다. 3.5 버전 운영체제는 운영자의 성별에 의존하지 않았다. 설계 자체는 성별과 무관했다. 설계자들이 그 점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측천무후는 뜻하지 않게 스트레스 테스트를 한 셈이다. ‘운영자는 남성이다’라는 숨은 가정을 빼버려도 시스템이 돌아가는가? 답은 이랬다. 돌아간다. 꽤 잘 돌아간다.

측천무후가 황제로 재위한 시기는 690~705년이다. 실제로 권력을 잡은 683년부터 계산하면 통치 기간은 더 길어진다. 그동안 당 제국은 붕괴하지도 분열하지도 않았고 중대한 외부 위협에 부딪히지도 않았다. 그녀의 통치 수준은 적어도 당나라의 평균보다 낮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을 적극 등용해 관롱 집단의 잔존 세력에 한층 더 타격을 가했고, 과거제는 그녀의 손에서 뚜렷하게 발전했다.

물론 측천무후의 통치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내준신과 주흥 같은 혹리들을 앞세운 정치는 수많은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만년에 장역지와 장창종을 총애한 일은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이 문제들이 그녀가 여성이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남성 황제가 혹리 정치를 벌인 사례는 한 무제가 있고, 간신을 총애한 사례는 거의 모든 왕조에 널려 있다.

측천무후가 드러낸 구축의 숨은 전제는 그녀가 퇴위하자 다시 덮였다. 그 뒤 천 년이 넘는 제정의 역사에서 두 번째 여성 황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3.5 버전 운영체제는 ‘운영자는 남성’이라는 기본 설정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이 검증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 의미는 구축의 일부 ‘기본 가정’이 사실은 기본이 아님을 증명했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역사의 관성이지 논리의 필연이 아니었다. ‘하늘의 이치’라고 여겨지던 가정을 어겼는데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 사실 자체가 그 ‘하늘의 이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이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측천무후 자신이 하나의 잔여항이었다. 시스템 설계자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은 이상값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잔여항이 위협만은 아니며, 때로는 검증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잔여항이 나타나면서 시스템은 자신이 모르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3.5 버전은 사실 성별에 대한 가정이 필요 없다는 것을 몰랐다. 측천무후가 알게 해주었다. 알고 나서는 잊기로 했다. 하지만 알았다가 잊는 것과 한 번도 몰랐던 것은 다르다.

3.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구축의 토대가 소리 없이 바뀌다

정관의 황금 상태는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부병제였다.

부병제의 핵심 논리는 병농일치였다. 병사는 평소에는 농민으로서 균전제로 분배받은 땅을 경작하고, 전쟁이 나면 무기와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 출정했다. 국가는 거대한 직업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 군사비 지출이 매우 적었다. 병사들은 자기 땅을 가지고 있었기에 국가에 소속감을 느꼈고 충성도도 비교적 높았다.

이 제도가 돌아가려면 한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균전제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병사는 농사지을 땅이 있어야 자급자족할 수 있다.

그런데 균전제의 실효성은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원인은 3.0 버전이 마주했던 문제와 같았다. 토지 겸병이었다. 균전제는 이론상 토지 매매를 금지하거나 적어도 제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호족과 관리들이 온갖 수단으로 농민의 땅을 계속 잠식했다. 속여 빼앗고, 힘으로 점거하고, 고리대 빚을 독촉해 넘겨받았다. 당 중기에 이르면 균전제는 이름만 남았다. 수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소작농이 되거나 도망쳤다.

균전제의 붕괴는 곧바로 부병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땅 없는 농민은 부병이 될 수 없다. 땅도 없이 떠도는 사람에게 무기와 식량을 알아서 챙겨 전쟁에 나가라고? 제 몸 하나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부병제가 무너지자 조정은 모병제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돈을 주고 직업군인을 고용하는 것이다. 모병제는 병력 충원 문제를 해결했다. 돈을 내면 됐다. 하지만 새로운 잔여항을 만들어냈다. 직업군인의 충성은 더는 국가를 향하지 않고, 자기에게 급료를 주는 사람을 향했다.

부병제에서 병사의 충성을 떠받치는 것은 땅과 삶의 터전이었다. 국가가 땅을 주었기에 국가를 위해 싸웠고, 지키는 것은 자기 집이었다. 모병제에서 충성의 토대는 급료였다.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 싸웠다. 중앙 조정이 돈을 주면 조정에 충성하고, 지방 절도사가 돈을 주면 절도사에게 충성했다.

이 전환은 소리 없이 진행됐다. 언제 바뀌었다고 딱 잘라 말할 시점도 없고, ‘오늘부터 부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꾼다’고 선포한 명령도 없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졌다. 부병은 점점 줄고 모병은 점점 늘었다. 천보 연간인 742~756년에 이르면 부병제는 사실상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전환은 제국 전체의 권력 기반을 바꿔놓았다.

부병제 아래에서 군사 권력의 기반은 토지제도, 곧 균전제였다. 중앙이 토지 분배를 통제하면 군대도 통제할 수 있었다. 모병제 아래에서는 재정이 군사 권력의 기반이 됐다. 병사를 모을 돈이 있는 사람이 군대를 가졌다. 지방 절도사가 지방의 세금을 장악해 독립적인 재정권을 얻자, 독립적인 군사 권력도 손에 넣었다.

안사의 난의 씨앗은 바로 이 토대의 전환 속에서 뿌려졌다.

4. 개원의 성세, 번영이 가려버린 구조 변화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 연간(713~741년)은 당나라 국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인구는 5천만 명을 넘었고, 더 많았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경제는 번영하고 문화는 찬란했으며, 장안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번영 아래에는 몇 가지 뿌리 깊은 구조 변화가 가려져 있었다.

첫째, 균전제는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앞에서 이미 다룬 문제다. 개원·천보 연간에 이르면 토지 겸병은 대단히 심각했다. 조정은 명목상 균전제의 틀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땅이 권세가와 사원에 집중돼 있었다. 땅 없는 농민이 늘어났으나 호적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도망쳐 호적 체계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조정이 실제로 파악하고 통제하는 인구는 호적에 적힌 수보다 훨씬 적었다.

이는 조정의 조세 기반이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부에 등록된 납세 인구도 줄었고, 실제로 세금을 짊어진 인구는 그보다 더 적었다. 그런데 조정의 지출은 늘었다. 군사 팽창에도, 궁정의 씀씀이에도, 불어나는 관료기구에도 더 많은 돈이 들었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면서 재정 압박이 쌓였다.

둘째, 절도사 제도가 변화했다.

당 초에는 변경의 군사 지휘권이 여러 도독부에 분산돼 있었다. 현종 시대에는 토번·돌궐·거란·해족 등 여러 방향에서 오는 위협으로 변경 정세가 갈수록 복잡해졌다. 이에 대응하려고 조정은 열 명의 절도사를 두고, 각 절도사에게 한 방면의 군사력을 맡겼다.

절도사는 처음에 군사 지휘권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효율을 높이려는 조정은 차츰 더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중앙에서 돈을 내려보낼 필요 없이 현지에서 세금을 거둬 군대를 부양하는 재정권, 관할 지역의 민정을 다스리는 행정권, 휘하 장교를 직접 임명하는 인사권이었다.

천보 연간에 이르면 변경의 열 절도사는 사실상 지방 군벌로 변해 있었다. 독립적인 군대가 있었다. 모병제의 직업군인들은 직접 급료를 주는 절도사에게만 충성했다. 독립적인 재정도 있었다. 지방의 세금을 중앙에 올려보내지 않았다. 행정권도 독립돼 있었다. 중앙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정예병 수만 명을 거느린 절도사를 함부로 갈아치울 수는 없다. 그와 맞설 더 강한 군사력이 있어야 한다.

안녹산은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평로·범양·하동 세 방면의 절도사를 동시에 맡아 20만 명에 가까운 정예병을 거느렸다. 중앙 금군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셋째, 중앙의 군사력이 속부터 비어갔다.

부병제가 무너지자 중앙 금군도 쇠퇴했다. 장안 부근의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부병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충분히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변경의 군사력은 불어났다. 모병제로 사람을 모으기는 변경 쪽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치명적인 안팎의 역전이 일어났다. 제국 최강의 군대가 중앙이 아니라 변경에 있었다. 전한 초기와는 정반대의 구도였다. 전한 때는 관중의 군사력이 각 제후국을 압도해 중앙이 지방보다 강했다. 당 중기에는 변경이 중앙보다 강해졌다.

안팎의 힘이 뒤집혔다는 것은 변경 군사력에 변고가 생겼을 때, 반란을 일으키든 적에게 패하든, 중앙이 대응할 힘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안녹산이 군사를 일으킨 뒤 현종은 자기 손에 싸울 만한 군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안 근처의 금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전투력도 낮았다. 범양에서 남하하는 안녹산의 정예 기병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넷째, 이임보와 양국충 아래에서 행정 시스템이 부패했다.

현종은 재위 후반에 이임보를 무려 19년 동안(734~752년) 재상으로 썼다. 이임보는 행정 능력은 있었지만 권력을 극도로 독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밀어내고 말길을 막았다. ‘야무유현’, 재야에 남은 현자가 없다는 말이 그 논리였다. 천하의 인재는 이미 조정이 모두 거두어들였으니 더는 나서서 간언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3성 6부의 견제 장치를 개인 독재의 도구로 바꾸었다.

3성제를 설계한 목적은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였다. 그러나 재상이 세 성의 핵심 인사를 모두 조종할 만큼 정치적 수완을 갖추면 견제는 빈 껍데기가 된다. 이임보는 한 가지를 증명했다. 제도를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충분한 능력과 시간을 들여 그 제도를 무력화하는 운영자를 당해낼 수는 없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이 재상 자리를 이어받았다. 양국충에게는 이임보의 행정 능력이 없었다. 대신 같은 집안의 누이뻘인 양귀비를 통한 연줄이 있었다. 그의 등장은 행정 시스템이 ‘유능한 부패’에서 ‘무능한 부패’로 퇴행했음을 알렸다.

균전제의 붕괴, 절도사의 비대화, 중앙 군사력의 공동화, 행정 시스템의 부패. 이런 구조 변화는 개원 성세의 겉으로 드러난 번영 아래에서 동시에 쌓여갔다. 어느 한 사람의 실수가 빚은 결과가 아니었다. 3.5 버전 운영체제가 오래 작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잔여항이었다. 균전제의 붕괴는 토지 겸병의 내적 경향에서 나왔다. 절도사의 비대화는 변경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요구와 중앙집권 사이의 모순에서 나왔다. 중앙 군사력의 공동화는 부병제 붕괴의 연쇄 반응이었다. 행정의 부패는 오래 집권하는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권력의 타성에서 나왔다.

잔여항 하나하나를 따로 보면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쌓이고 서로를 강화했다. 균전제 붕괴 → 재정 압박 → 절도사의 군사비 자체 조달에 더 크게 의존 → 절도사의 독립성 강화 → 중앙의 약화. 이렇게 양의 피드백이 걸리는 악순환이 만들어졌다.

5. 안사의 난, 3.5 버전의 단층선

서기 755년 음력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안사의 난은 전쟁으로만 보면 8년간, 755년부터 763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당 제국에 미친 영향은 8년의 전쟁 자체를 훨씬 넘어섰다. 안사의 난은 3.5 버전 운영체제의 단층선이었다. 그 이전과 이후는 서로 다른 당나라였다.

그 이전의 당나라에서는 중앙집권이 제대로 작동했다. 균전제가 사회의 기본적인 공평성을 유지했고, 부병제가 지방에 의존하지 않는 군사력을 제공했다. 과거제는 사회 이동의 통로를 열어두었으며, 3성 6부제는 의사결정의 질을 보장했다.

그 이후의 당나라에서는 번진이 할거하면서 중앙의 권위가 이름만 남았다. 균전제는 완전히 무너져 양세법으로 대체됐고, 부병제는 사라져 모병제로 전면 전환됐다. 절도사는 사실상의 지방 군벌이 됐다. 조정은 환관이 장악한 신책군에 기대어 마지막 남은 군사적 존재감을 유지했다.

안사의 난은 3.5 버전의 설계 결함 하나를 드러냈다. ‘지방의 군사력이 중앙을 넘어서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3.5 버전의 모든 설계는 중앙이 가장 강하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다. 3성 6부는 중앙의 행정 체계였고, 과거로 선발한 인재는 중앙의 관료기구에 들어갔다. 균전제는 중앙이 땅을 나누어주는 제도였으며, 부병제는 중앙이 군대를 동원하는 제도였다. 설계 전체의 무게중심이 중앙에 있었다.

절도사의 군사력이 중앙을 넘어 그 가정이 깨지자, 시스템 전체는 스스로를 복구할 능력을 잃었다. 중앙에는 절도사의 권력을 강제로 회수할 만큼 충분한 군사력이 없었다. 번진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하는 타협으로 명목상의 통일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적으로 후한 말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중앙의 권위가 쇠퇴하고, 지방의 군사력이 솟아오르며, 명목상으로는 통일돼 있지만 실제로는 할거한다. 후한 버전은 황건적의 난에서 삼국으로 이어졌다. 당나라 버전은 안사의 난에서 오대십국으로 이어졌다. 대본은 같고 배우만 바뀌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후한의 붕괴는 한 점에 의존하는 구조의 문제였다. 황제가 어리고 약하니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권력을 잡았고, 그 교대가 관료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당나라의 붕괴는 토대가 바뀐 데서 생긴 문제였다. 균전제가 무너지자 부병제가 무너졌고, 부병제가 무너지자 모병제가 떠올랐으며, 모병제는 군사 권력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놓았다.

한 점에 의존하는 구조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다. 성인이 된 좋은 황제로 바꾸면 완화할 수 있다. 토대가 바뀌는 문제는 제도의 문제다. 사람 하나를 바꾼다고 풀리지 않는다. 제도 전체를 바꿔야 한다.

안사의 난 뒤에도 당나라는 150년을 더 버텼다. 이 150년은 3.5 버전이 계속 정상 작동한 시간이 아니었다. 3.5 버전이 파열된 뒤 관성으로 미끄러져 간 시간이었다. 시스템의 엔진은 이미 고장 나 있었다. 균전제도, 부병제도, 중앙집권도 모두 무너졌다. 그런데도 차는 관성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과거제는 여전히 돌아갔고, 유교 이데올로기도 여전히 효력이 있었으며, 대일통에 대한 공감대도 남아 있었다.

관성도 언젠가는 바닥난다. 당 멸망 뒤의 오대십국은 그 관성이 소진된 다음에 찾아온 혼란이었다.

6. 당 전기가 순환 법칙에 보태는 것

태종에서 현종까지는 대략 130년이다. 이 130년은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에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보탠다.

첫째, 황금 상태가 열리는 시간은 극히 짧다.

정관의 치는 천 년 넘게 회자됐지만, 정작 지속된 시간은 23년에 불과했다. 고종 전반기와 측천무후 시기의 대체적인 안정까지 합쳐도 3.5 버전의 황금 상태는 약 70~80년이었다. 거의 300년에 이르는 당의 역사에서 진정한 황금 상태는 4분의 1 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당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나라의 약 400년 역사에서 문경의 치도 약 40년에 불과했다. 3.0 버전의 황금 상태 역시 짧았다.

황금 상태가 짧은 까닭은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능력과 절제력을 함께 갖춘 운영자가 있어야 한다. 제도는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부식되지 않았어야 한다. 사회는 막 혼란에서 회복돼 기대 수준이 낮아야 한다. 앞선 왕조의 실패가 아직 생생해 경계심도 높아야 한다. 이 조건들이 겹치는 시간은 아주 짧다. 그 시간이 지나면 운영자가 바뀐다. 더 못한 사람이 올 수도 있다. 제도는 낡기 시작하고, 사회의 기대는 높아지며, 앞선 왕조의 교훈은 잊힌다.

둘째, 구축의 표면보다 토대가 더 중요하다.

3.5 버전의 표면은 3성 6부제, 과거제, 법률이다. 눈에 보이는 제도 설계들이다. 토대는 균전제와 부병제다. 표면이 작동하도록 떠받치는 경제적·군사적 기반이다.

운영자는 표면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 좋은 황제는 3성제가 실제로 돌아가게 할 수 있고, 나쁜 황제는 그것을 껍데기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토대의 변화는 운영자의 통제 밖에 있다. 균전제의 붕괴는 어느 황제의 결정 하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토지 겸병의 장기적 추세에서 나왔다. 부병제도 명령 한 장으로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균전제 붕괴의 연쇄 반응으로 사라졌다.

운영자는 표면의 고장을 고칠 수 있다. 나쁜 재상을 갈아치우고,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줄 수 있다. 토대의 고장을 고치기는 훨씬 어렵다. 그 고장은 사회 구조의 오랜 변화에서 비롯되므로 누구 한 사람의 결정으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겸병된 땅을 농민에게 돌려줄 수는 없다. 전면적인 토지혁명을 일으킨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것은 더 큰 혼란을 부를 것이다.

안사의 난이 남긴 교훈은 이렇다. 표면은 멀쩡해도 토대가 변질된 시스템은 겉으로는 여전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충격을 견딜 능력을 잃은 상태다. 충격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셋째, 측천무후의 숨은 전제 검증은 구축 속 수많은 ‘기본 가정’이 실은 검증되지 않은 역사의 관성임을 보여준다.

3.5 버전의 기본값은 남성 운영자였다. 이 가정을 어겼는데도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기본 가정’ 가운데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것은 얼마나 더 있을까? 우리는 모른다. 다만 측천무후의 사례는 일깨워준다. 검증되지 않은 가정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으로 여기지 말라고. 그것은 법칙일 수도 있고, 그저 관성일 수도 있다.

넷째, 속도가 주는 교훈은 거듭 확인된다.

태종이 이룬 정관의 치와 양광의 폭정은 가장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람이 한 일 가운데는 방향이 같은 것이 많았다. 과거를 발전시키고, 법률을 정비하고, 대외적으로 팽창하고, 기반시설을 건설했다. 차이는 속도에 있었다. 태종은 느렸고 양광은 빨랐다. 태종은 살았고 양광은 죽었다.

앞선 글의 결론과 같다. 사회가 버틸 수 있는 한계는 당신의 방향이 옳은지에는 관심이 없다. 당신이 가하는 압력이 한계를 넘었는지만 따진다. 태종의 절제는 미덕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에 대한 존중이었다. 현종 말년의 방종은 악행이 아니라 물리적 한계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망각은 세대를 거치며 교훈의 힘이 약해지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태종은 수의 멸망을 기억했다. 수 말의 전란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가까스로 기억했고, 측천무후에게는 그 기억이 더 희미했다. 현종에 이르면 수의 멸망은 이미 백여 년 전의 이야기였다. 백여 년이면 어떤 교훈이든 잊히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교훈에는 대략 서너 세대의 유효기간이 있다. 그 기한을 넘기면 교훈은 전설이 된다. 전설에는 구속력이 없다.

다음 편은 당 후기와 오대, 안사의 난 이후 번진이 지배한 판도다. 오대십국은 ‘군벌의 구축’이 빠르게 교체되는 시대로, 멀리 십육국 시대와 호응한다. 깎아내기의 빈도는 높아지지만 구축의 질은 떨어진다. 새로 세워질 때마다 수명은 더 짧아진다. 이 흐름은 조광윤이 술 한 잔으로 장수들의 병권을 거두어들이는 배주석병권에 이르러서야 끝난다. 그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수백 년 동안 중국 정치를 괴롭혀온 ‘무인의 비대화’라는 잔여항을 단번에, 영구히 해결했다.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군사 능력의 영구적인 약화였다. 그 뒤로 중원의 왕조는 한·당 시대의 군사적 팽창 능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