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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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5 / 25

제15편: 수나라, 당나라의 진나라

서기 581년, 양견은 북주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세웠다. 589년에는 진(陳)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618년, 수 양제가 강도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수나라는 멸망했다.

서기 581년, 양견은 북주 정제에게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세웠다. 589년에는 진(陳)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618년, 수 양제가 강도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되면서 수나라는 멸망했다.

통일에서 멸망까지 29년. 건국에서 멸망까지 37년.

이 수명은 진(秦)나라와 거의 같다. 진나라는 통일한 기원전 221년부터 멸망한 기원전 207년까지 15년을 버텼고, 건국을 진왕 정(政)이 즉위한 때부터 센다면 멸망까지 약 40년이었다. 섬뜩할 만큼 닮은 우연이다.

더 섬뜩한 것은 구조가 닮았다는 사실이다. 두 왕조는 모두 오랜 분열을 끝내고 대통일을 이루었다. 통일 뒤에는 대단히 정교한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모두 두 번째 황제 때 지나친 확장으로 무너졌고, 바로 뒤를 이은 장수 왕조인 한나라와 당나라에 제도 전체를 거의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제도 공급자였다. 수나라는 당나라의 제도 공급자였다. 공급자는 단명하고, 사용자는 오래 살았다.

이 패턴은 깊이 파볼 만하다.

1. 양견, 정밀한 구축의 설계자

양견은 관롱 집단의 핵심 인물이었다. 아버지 양충은 서위와 북주의 12대장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국공(隨國公)에 봉해졌다. 아내 독고가라는 독고신의 딸이었다. 독고신은 관롱 집단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그의 세 딸은 각각 북주 명제에게, 양견에게, 그리고 이연의 아버지 이병에게 시집갔다. 명제의 아내는 맏딸, 양견의 아내는 일곱째 딸, 이병의 아내는 넷째 딸이었다.

한 장인의 딸들 가운데 둘은 서로 다른 두 왕조 황제의 어머니가 되고 하나는 또 다른 왕조 황제의 아내가 된 셈이다. 관롱 집단의 혼인망이 얼마나 촘촘했는지 알 만하다.

양견이 북주를 찬탈한 과정은 형식상 사마씨가 위나라를 빼앗은 과정과 비슷하다. 외척이 섭정하다가 선양을 받았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뒤 양견이 한 일은 사마씨와 정반대였다. 사마씨는 호족과 손잡고 견제 장치를 없앴다. 양견은 어느 특정 사회 집단에도 기대지 않는, 고도로 중앙집권적이고 제도화된 통치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양견의 제도 설계는 정치, 행정, 법률, 경제, 군사 전반을 아울렀다. 중국 정치사에서 이만한 정밀도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상앙의 변법 정도다.

3성 6부제.

중앙 행정 기구는 세 성으로 나뉘었다. 중서성은 정령의 초안을 쓰고, 문하성은 이를 심사하며, 상서성은 집행했다. 상서성 아래에는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의 여섯 부를 두어 인사, 재정, 의례, 군사, 사법, 토목을 각각 맡겼다.

설계의 묘미는 권력의 분할에 있었다. 3.0 버전의 원형인 한나라에서는 승상 한 사람이 행정권을 틀어쥐었다.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곽광이나 왕망 같은 권신이 나오기 쉬웠다. 3성제는 승상의 권력을 셋으로 나눴다. 중서성의 결정권, 문하성의 심사권, 상서성의 집행권이다. 세 성이 서로 견제하므로 어느 한 기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문하성의 심사권이다. 중서성이 작성한 정령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문하성은 봉박할 수 있었다. 돌려보내 다시 쓰게 하는 것이다. 제도 안에 마련된 오류 수정 장치였다. 간언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신하 개인의 용기에 기대지 않고, 행정 절차 자체에 교정 기능을 심어놓았다. 문하성은 심사하는 것이 직무였으니, 심사하지 않는 쪽이 직무유기였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3성 6부제는 3.0 버전의 단일 지점 의존 구조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보수한 장치다. 3.0 버전의 치명적 약점은 전체 시스템이 황제 한 사람의 판단력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후한에서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권력을 잡은 것도 그 약점의 산물이었다. 3성제는 황제와 정책 집행 사이에 여러 지점을 거치는 의사 결정의 사슬을 끼워 넣었다. 최종 결정권자는 여전히 황제였지만, 그의 결정은 제도화된 처리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황제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집행 현장으로 튀어나갈 수는 없었다.

과거제의 확립.

양견은 9품 중정제를 폐지하고 시험으로 관리를 뽑기 시작했다. 양광은 이를 더 발전시켜 진사과를 설치했다.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집안도, 추천도 보지 않고 답안지만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문벌이 구축한 질서에 대한 궁극적인 부정이었다. 9품 중정제의 본질은 문벌이 문벌을 평가한다는 데 있었다. 중정관 자신이 대가문 출신이니 평가 기준도 자연히 가문 쪽으로 기울었다. 과거제의 본질은 시험으로 모두를 평가한다는 데 있다. 성이 무엇이든, 아버지가 누구든, 시험장에서 써낸 것이 앞날을 결정한다.

과거제가 중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0 버전 이래 쌓여 있던 몇 가지 핵심 잔여항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적어도 크게 완화했다.

문벌의 독점이 깨졌다. 재능과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료 조직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더는 대가문의 추천이 필요하지 않았다. 미천한 집안에서도 높은 자리에 오를 인물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인재 선발의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찰거제의 문제였던 특정인의 주관적 판단 대신, 비교적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평가 절차에 의존하게 되었다.

사회적 이동이 활기를 띠었다. 밑바닥의 영리한 사람들에게 올라갈 길이 생겼다. 그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층민이 저항에 나설 동기는 크게 줄었다.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과거를 보면 된다. 붙으면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이 된다. 길은 좁았지만,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누구에게나 주었기 때문이다.

과거제는 잔여항을 다루는 대단히 영리한 도구였다. 진나라처럼 잔여항을 억누르지도, 황로사상처럼 내버려두지도, 유학만을 높이던 방식처럼 이념으로 다시 부호화하지도 않았다. 구축된 질서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잔여항을 방출할 통로를 마련했다. 현실이 불만인가? 반란을 일으킬 것 없이 시험을 보라. 재능은 있는데 출구가 없는가? 문벌에 몸을 의탁할 것 없이 시험을 보라. 저항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었던 사회적 긴장 상당량을 시험이 흡수했다.

『개황률』.

양견은 새 법전 『개황률』의 편찬을 주도했다. 북조 이래 복잡하게 얽혀 있던 법 조문을 대폭 간소화하고 형벌도 가볍게 했다.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다섯 형벌만 남기고, 수많은 가혹한 형벌을 없앴다.

구축의 관점에서 『개황률』을 관통하는 설계 원리는 이렇다. 법은 누구나 이해할 만큼 간명해야 하고, 형벌은 지나친 원한을 낳지 않을 만큼 절제되어야 한다. 조문이 복잡하고 형벌이 가혹했던 진나라 법의 반대편이다. 간명하고 절제된 법을 만든 것은 양견이 마음씨가 고와서가 아니다. 그가, 혹은 그의 법률 고문들이 한 가지 이치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법의 목적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 공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공포는 단기적으로 저항을 억누를 수 있지만, 어느 수준 이상 쌓이면 분노로 바뀐다. 간명하고 적절한 법은 공포가 분노로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 그 수위를 조절한다.

균전제와 조용조제의 정비.

수나라는 북위의 균전제를 이어받고, 짝을 이루는 조세 제도인 조용조제를 더 정비했다. 조(租)는 곡물로 내는 세금, 용(庸)은 베나 비단으로 대신할 수 있는 노역, 조(調)는 베와 비단으로 내는 세금이었다. 기준이 뚜렷하고 계산이 간단했으며 부담도 적절했다.

이 경제 제도의 장점은 투명성이다. 농민은 각자 얼마를 내야 하는지 알았고, 중간 단계를 거칠 때마다 부담이 불어나는 일도 막을 수 있었다. 투명성은 부패가 끼어들 틈과 백성의 원망을 함께 줄였다. 세금이 적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왜 그만큼을 내는지는 알았다. 이유도 모른 채 뜯기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양견의 제도 설계를 한데 모으면 대단히 정밀한 3.5 버전 운영체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치에는 3성 6부, 권력을 나누고 견제하는 행정 체계가 있다. 인사에는 과거제, 열린 인재 선발 통로가 있다. 법률에는 『개황률』, 간명하고 절제된 법 체계가 있다. 경제에는 균전제와 조용조제, 투명한 토지·조세 제도가 있다. 군사에는 부병제, 병사와 농민을 하나로 묶은 동원 체계가 있다.

모든 차원에서 3.0 버전보다 뚜렷이 나아졌다. 3성 6부는 승상제보다 권력을 더 나눴다. 과거는 찰거보다 개방적이었다. 『개황률』은 진나라 법보다 인도적이었다. 균전제는 자유로운 토지 시장보다 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데 유리했다. 부병제는 징병제보다 효율적이었다.

양견은 평생을 들여 이 업그레이드를 완성했다. 재위 24년, 581년부터 604년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검소하게 살며 수많은 나랏일을 직접 처리했다. 국고는 “천하의 비축만으로 50~60년을 버틸 수 있다”고 할 만큼 가득 찼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등장했다.

2. 양광, 구축의 속도가 사회의 흡수 속도를 앞지르다

수 양제 양광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악마화된 황제 가운데 하나다. 전통적인 서술은 그를 허영에 들뜨고 사치와 욕망에 빠져 방탕을 일삼는, 그저 한낱 폭군으로 그린다. 이 초상을 그린 것은 그를 무너뜨린 당나라였다. 제2편에서 살펴본 ‘말대의 암군’ 서사가 틀에 맞춰 되풀이되는 효과를 감안하면, 이 초상의 신빙성은 크게 깎아 보아야 한다.

도덕적 서사를 걷어내고 구조를 보면, 양광의 문제는 무능이나 방탕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큰 재능과 원대한 구상을 지닌 정치가였다. 그의 문제는 진시황과 같았다. 구축을 밀어붙이는 속도가 사회가 잔여항을 흡수하는 속도를 넘어섰다.

대운하.

양광은 대운하를 파서 남북의 수계를 연결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후세에 길이 공적이 남을 기반 시설 공사였다. 대운하는 이후 천 년 넘게 제 몫을 하며 중국 남북의 경제를 통합하는 대동맥이 되었다. 당나라가 관중을 근거지로 전국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상당 부분 대운하를 통해 남방의 곡물을 북방으로 실어 나른 덕분이었다.

그러나 대운하를 건설하는 데 치른 인적 대가는 경악할 만했다. 끌려온 인부가 수백만에 달했다. 공사 기간도 극단적으로 줄였다.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해야 할 공사를 양광은 몇 년 안에 끝내려 했다. 공기를 줄이면 노동 강도가 올라가고, 노동 강도가 올라가면 수많은 인부가 죽고 가정이 무너진다.

세 차례의 고구려 원정.

612년, 613년, 614년에 양광은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요동에 자리했던 고구려를 상대로 세 차례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첫 원정에는 113만 대군을 보냈다. 공표된 숫자라 실제로는 조금 적었을 수 있으나 백만 단위의 규모였다는 점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인부는 군인 수의 두 배에 달했다. 세 원정 모두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첫 원정에서는 요동에서 진격이 막혔고, 압록강을 건넌 선봉군은 평양에서 물러나다 살수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613년에는 국내 반란 때문에 군대를 거두었고, 614년에는 고구려가 항복의 뜻을 밝히자 철군했다. 그러나 정복은 이루지 못했다.

세 차례 고구려 원정이 낳은 병력 손실과 군수 물자의 소모는 재앙적이었다. 백만 단위의 군대와 인부를 멀고 보급이 어렵고 공격자에게 지형까지 극도로 불리한 전장에 쏟아부었다. 이기더라도 얻을 것은 멀리 떨어진, 경제적 가치가 제한적인 땅 한 조각뿐이었다. 투입과 보상이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

강남 순행.

양광은 여러 차례 용주를 타고 강남을 순행했다. 용주 행렬은 수백 리나 이어졌고, 지나는 곳마다 사람과 물자를 징발해 엄청난 비용을 썼다. 전통적인 서술은 이를 단순한 향락으로 묘사한다. 실제로 순행에는 정치적 기능도 있었다. 남방에 대한 통치권을 과시하고, 지방 사정을 살피며, 남방의 호족을 달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기가 무엇이든 그 비용을 길목의 백성이 떠안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운하와 세 차례 고구려 원정, 강남 순행을 한데 놓으면 익숙한 패턴이 보인다. 진시황과 똑같은 패턴이다.

대운하는 장성과 치도 건설에 해당한다. 기반 시설에 대한 초대형 투자다. 세 차례 고구려 원정은 북쪽 흉노와 남쪽 백월을 공격한 일에 해당한다. 대외 군사 팽창이다. 강남 순행은 시황제의 천하 순행에 해당한다. 권력을 물질적 규모로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실패하는 방식까지 비슷했다. 진시황의 대공사와 대외 전쟁은 사회가 버틸 힘을 바닥냈고, 진승과 오광이 봉기했다. 양광의 대공사와 대외 전쟁도 똑같이 사회의 버틸 힘을 소진시켰다. 613년 양현감의 반란이 첫 신호였고, 뒤이어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다만 양광과 진시황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 차이가 수나라와 진나라가 남긴 서로 다른 역사적 유산을 결정했다.

진시황의 제도 설계와 과도한 확장은 한 행동의 두 얼굴이었다. 문자·수레바퀴 간격·도량형의 통일과 장성 건설·백월 정벌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회는 어떤 것이 좋은 제도 구축이고 어떤 것이 나쁜 폭력적 징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가 망한 뒤 사람들은 그 제도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실제로는 대부분을 한나라가 이어받았지만, 그 과정에는 70년의 완충기가 필요했다.

양광의 과도한 확장과 양견의 제도 설계는 분리해서 볼 수 있었다. 양견이 24년에 걸쳐 마련한 3성 6부, 과거, 『개황률』, 균전제의 체계는 양광의 폭정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았다. 무너진 것은 사회가 버틸 힘이지 제도의 틀이 아니었다. 제도의 틀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는 수나라가 망한 뒤의 계승자가 한나라 초처럼 70년 동안 천천히 길을 더듬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수나라의 제도를 통째로 이어받고 추진 속도만 조절하면 되었다. 양광의 미친 듯한 가속에서 정상 속도로 되돌리면 그만이었다.

당나라가 바로 그렇게 했다.

3. 수나라의 멸망, 속도가 사람을 죽인다

양광의 사업은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대운하는 필요한 기반 시설이었다. 고구려 원정에는 지정학적 고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북쪽 국경의 잠재적 위협이었다. 순행에는 정치적 기능이 있었다. 과거를 발전시키고 법률을 정비하는 제도 개혁도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을 동시에 밀어붙이자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방향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였다. 방향은 옳았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사회가 변화를 흡수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변화 하나하나는 잔여항을 낳는다. 손해를 본 사람들의 불만, 새 제도와 옛 제도가 맞물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 자원 재분배가 불러오는 충돌이다. 변화가 충분히 느려서 한 변화의 잔여항을 소화한 뒤 다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시스템은 안정을 유지한다. 반대로 여러 변화의 잔여항이 한꺼번에 밀려들 만큼 속도가 빠르면 시스템에는 과부하가 걸린다.

양견은 이를 이해했다. 그는 재위 24년 동안 제도 개혁을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3성 6부의 정비와 법률 개혁, 관리 선발 방식의 개혁을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면서 사회가 새로운 제도를 소화할 시간을 남겨두었다.

양광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했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모든 대업을 끝내고 싶었다. 그의 시간관은 제도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의 시간이었다. 제도는 기다릴 수 있고 성과는 다음 세대에 남길 수 있다는 생각보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결과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자기 임기 안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이 조급함은 진시황과 판박이였다. 시황제도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이 완성되기를 바랐다. 장성을 쌓고, 치도를 닦고, 아방궁을 짓고, 백월을 정벌하고, 문자를 통일하고, 수레바퀴 간격을 맞추는 일을 모두 함께 밀어붙였다. 두 사람이 마주한 유혹은 같았다. 내게 능력이 있고 자원도 있다. 양광에게는 양견이 모아준 살림 밑천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답은 이렇다. 할 능력이 당신에게 있다고 해서 사회에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견딜 능력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능력과 사회의 감당 능력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바로 그 틈에 잔여항이 쌓인다. 더 많이, 더 빨리 할수록 잔여항도 더 많이, 더 빨리 쌓인다. 임계점에 이르면 시스템이 무너진다.

수 양제가 통치한 14년, 604년부터 618년까지 사회는 “천하의 비축만으로 50~60년을 버틸 수 있다”던 풍요에서 전면적인 붕괴로 급전직하했다. 그 속도는 진나라가 통일에서 멸망까지 간 15년과 거의 맞먹었다.

양광이 양견보다 형편없이 못나서가 아니다. 여러 면에서 양광은 오히려 양견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대담했다. 구축을 추진하는 속도와 사회가 흡수하는 속도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추진자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의 탄성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탄성은 객관적인 상수다. 추진자가 더 재능 있다고 해서 커지지 않는다.

당신은 천재일 수 있다. 하지만 수레를 밀 때 차축이 견디는 힘은 당신이 천재라는 이유로 늘어나지 않는다. 미는 힘이 한계를 넘으면 차축은 부러진다. 차축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차축을 몰랐던 것이다.

4. 수나라에서 당나라로, 당은 왜 곧바로 계승할 수 있었나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는 과도기는 대단히 짧았다. 이연은 617년 태원에서 거병했고 618년 당나라를 세웠다. 624년 전국을 대체로 통일하기까지 건국 뒤 불과 6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진나라 말기의 봉기에서 한나라의 통일까지는 약 7년이 걸렸다. 거기에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사상의 무위 정치와 문경지치를 거치며 제도를 모색하는 데 다시 70년을 썼다. 당나라에는 그 70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나라의 제도적 틀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위한 이연은 무엇을 했을까? 수나라의 제도를 거의 통째로 가져왔다. 3성 6부는 그대로 썼다. 과거제는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균전제와 조용조제도 그대로 썼다. 부병제도 그대로 썼다. 『개황률』의 정신과 틀도 이어받았다. 조금 손질한 것이 『무덕률』이 되었고, 나중에는 한층 정교한 『정관률』과 『영휘률』이 되었다.

물론 당나라에도 제도적 혁신은 있었다.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그 바탕은 수나라였다. 수나라가 제도를 공급하지 않았다면 당나라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제국을 세우기는 불가능했다.

공급자는 단명하고 사용자는 오래 사는 이 패턴은 왜 거듭 나타날까?

제도를 혁신하는 능력과 제도를 운영하는 능력은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정치적 기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도 혁신에는 강경함과 급진성, 남을 적으로 돌려도 겁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기존의 이익 구도를 깨고, 새 규칙을 세우고, 반대자를 눌러야 한다. 혁신 단계에서는 꼭 필요한 기질이다. 그러나 혁신이 끝난 뒤의 운영 단계에서는 치명적이다. 운영에 필요한 것은 타협, 인내, 경청, 그리고 갈등을 누그러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양광은 모두 극단까지 간 혁신가였다. 체계적인 제도 변화를 강제로 밀어붙일 능력이 있었다. 다만 언제 혁신 모드에서 운영 모드로 전환해야 하는지 몰랐다. 줄곧 가속 페달만 밟았고, 브레이크라는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유방과 이연·이세민은 반대로 뛰어난 운영자였다. 새 제도를 발명하기보다는 앞사람이 발명한 제도를 운영했다. 손을 대더라도 조금 조정하는 정도였다. 운영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배짱이 아니라 인내와 정도를 아는 감각이다. 언제 압력을 높이고 언제 낮출지, 언제 밀고 나가고 언제 기다릴지 아는 것. 사회가 버틸 수 있는 선이 어디인지 알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왕조에는 혁신과 운영의 두 단계가 필요하다. 가장 좋은 경우는 한 왕조가 내부에서 이 전환을 마치는 것이다. 양견이 혁신하고, 그 뒤를 이은 누군가가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식이다. 그러나 양광처럼 그 전환 전에 혁신을 밀어붙이던 사람이 시스템을 무너뜨리면, 운영을 넘겨받을 왕조를 새로 들일 수밖에 없다.

진나라가 혁신하고 한나라가 운영했다. 수나라가 혁신하고 당나라가 운영했다. 공급자가 대가를 전부 치렀고, 사용자가 이익을 전부 거두었다.

5. 양견과 양광, 같은 시스템을 쓰는 두 가지 방식

양견과 양광 부자의 대비는 구축이 세대를 거치며 쇠퇴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다만 여기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보통 세대 간 쇠퇴는 능력의 쇠퇴다. 첫 세대는 천재이고 다음 세대는 범재다. 태강은 우임금만 못했고, 진 이세황제는 시황제만 못했다. 모두 능력이 떨어진 경우다.

양광은 범재가 아니었다. 개인 능력은 양견 못지않았을 수 있다. 대운하 구상에서 드러나듯 세기를 내다보는 전략적 시야가 있었다. 군사적 능력도 있었다. 진(陳)을 멸망시킨 전쟁에서 스무 살의 그는 실질적인 전선 총사령관이었다. 문학적 재능도 있어 시도 제법 썼다. 정치적 수완도 있었다. 양견 앞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위장해 끝내 태자 자리를 차지했다.

양광에게서 쇠퇴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판단력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힘이었다.

양견은 멈출 때를 알았다. 평생 나라의 살림 밑천을 모아두었던 것은 돈을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은 쓸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위 24년 동안 대공사를 벌이고 큰 전쟁을 치를 능력과 자원이 충분했지만 거의 그러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가 새로운 제도의 틀에 완전히 적응하기를, 국가의 역량이 대규모 투입을 감당할 만큼 쌓이기를 기다렸다.

양광은 멈출 때를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양견이 쌓아둔 밑천이 있었고 자신의 야심도 있었다. 그에게는 기다림의 가치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늙기를? 죽기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데 왜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능력이 아니라 인내의 쇠퇴다. 인내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정치적 자질이지만, 어쩌면 모든 정치적 자질 가운데 가장 중요할 수 있다. 정치의 본질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옳은 일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옳은 일도 때를 잘못 잡으면 그릇된 일이 된다. 대운하를 100년에 걸쳐 천천히 파면 위업이고, 5년 안에 서둘러 파면 폭정이다. 차이는 시간뿐이다.

여기서 세대 간 쇠퇴에 새로운 차원이 생긴다. 다음 세대가 더 못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가 똑같이 뛰어나되 더 조급할 수도 있다. 조급함의 원인은 세대 간 쇠퇴의 또 다른 면에 있다. 둘째 세대는 창업의 고생을 겪지 않았다. 양견이 겪은 북주 말기의 험악한 정치와 건국 초기의 물자 부족을 겪지 않았기에, 지금의 밑천이 어떻게 모였고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더뎠는지 모른다. 가득 찬 국고라는 결과만 보이고, 24년 동안 절제한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과정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결과를 아낄 줄 모른다. 결과를 아끼지 않는 사람은 24년 동안 모은 밑천을 14년 만에 탕진한다.

6. 수나라의 유산, 3.5 버전의 정식 출시

수나라는 불과 37년 동안 존재했지만, 중국 정치사에서 가장 풍부한 제도적 유산을 남긴 왕조 가운데 하나다.

한 무제와 동중서가 세운 유가·법가 결합 체계인 3.0 버전을 운영체제의 초기 버전으로 비유한다면, 수나라는 3.5 버전의 개발자였다. 3.0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업그레이드를 이루었다.

행정 체계는 승상 한 사람의 독점에서 3성의 권력 분할로 바뀌었다. 권신이 권력을 찬탈할 위험은 줄고 의사 결정의 제도화 수준은 높아졌다.

인재 선발은 찰거와 9품 중정에서 과거로 바뀌었다. 문벌의 독점을 깨고 비교적 공평한 사회 이동의 통로를 만들었다.

법률은 복잡하고 가혹한 체계에서 간명하고 절제된 체계로 바뀌었다. 사회에 원한이 쌓이는 속도가 느려졌다.

토지 제도는 완전한 자유 시장에서 국가가 제한적으로 조정하는 균전제로 바뀌었다. 토지 겸병의 속도가 늦춰졌다.

군사 제도는 순수한 징병에서 병사와 농민을 결합한 부병으로 바뀌었다. 상비군을 유지하는 재정 부담이 줄었다.

이 업그레이드를 모두 수나라 혼자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균전제는 북위에서, 부병제는 서위와 북주에서, 과거의 원형은 남조에서 왔다. 다만 수나라는 그것들을 하나의 완결된,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통합했다. 통합 자체가 거대한 공헌이다. 부품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부품을 조립해 작동하는 기계로 만든 것은 수나라였다.

당나라는 이 기계를 거의 그대로 인수했다. 그리고 이 기계 위에서 300년 가까이 나라를 운영했다.

수나라가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이것이다. 제도의 수명은 그것을 만든 정권의 수명보다 훨씬 길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제도는 어느 한 왕조의 것이 아니라 문명의 것이다. 왕조는 망해도 제도는 살아남는다. 양견도 양광도 죽었지만, 3성 6부는 천 년 넘게 살았다.

잔여항 보존의 관점에서 수나라의 이야기가 주는 가장 깊은 교훈은 하나다. 잔여항이 쌓이는 속도는 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 일을 밀어붙이는 속도를 사회가 소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옳은 일도 너무 빨리 추진하면 그릇된 일 못지않은 잔여항을 낳는다. 대운하는 옳았고, 세 차례 고구려 원정의 전략적 고려에도 이유가 있었다. 과거제는 선진적이었고 균전제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옳은 일을 한꺼번에 최고 속도로 추진하면, 제국 하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잔여항이 생긴다.

옳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옳다는 것은 방향에 문제가 없다는 뜻일 뿐이다. 방향이 맞아도 속도가 지나치면 수레는 뒤집힌다. 사회의 감당 능력은 당신의 방향이 옳은지에 관심이 없다. 오직 당신이 가하는 압력이 한계를 넘었는지만 따진다. 넘으면 부러진다. 당신이 아무리 옳더라도.

다음 편은 당나라 전기, 태종에서 현종까지다. 정관 시대는 구축의 황금 상태, 3.5 버전이 정점에서 가동된 시기였다. 그러나 부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은 안사의 난의 씨앗을 심었다. 측천무후는 구축된 질서를 파괴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질서의 논리로 그 질서의 성별 가정을 공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숨겨져 있던 전제 하나를 드러냈다. 3.5 버전은 운영자가 남성이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그 가정은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직접 검증하기 전까지는.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