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남북조 — 두 갈래 길이 만나는 곳
지난 편의 결론은 이랬다. 의관남도, 곧 북방 사족의 남하는 3.0 운영체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물리적으로 갈라놓았다. 남쪽은 소프트웨어인 이념, 사족의 인적 관계망, 정통성 서사를 물려받았고, 북쪽에는 하드웨어인 토지, 인구, 도시가 남았다. 이후 300년 동안 양쪽은 각각 반쪽짜리 시스템을 쥐고 온전한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다.
지난 편의 결론은 이랬다. 의관남도, 곧 북방 사족의 남하는 3.0 운영체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물리적으로 갈라놓았다. 남쪽은 소프트웨어인 이념, 사족의 인적 관계망, 정통성 서사를 물려받았고, 북쪽에는 하드웨어인 토지, 인구, 도시가 남았다. 이후 300년 동안 양쪽은 각각 반쪽짜리 시스템을 쥐고 온전한 질서를 다시 세우려 했다.
남북조 시대(420~589)는 이 두 병행 실험의 후반부다. 십육국의 숨 가쁜 정권 교체가 끝나고, 북쪽에는 마침내 비교적 오래가는 통일 정권인 북위(386~534)가 등장했다. 남쪽 역시 동진의 문벌 공동 통치에서 송·제·양·진, 네 왕조가 잇따른 남조 시대(420~589)로 넘어갔다.
북쪽에서는 민족을 융합하고 남쪽에서는 문벌 질서가 대를 바꾸어 이어지니, 두 길은 갈수록 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끝내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관롱집단이다. 그 교차점에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자라났다.
1. 북위 —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다
439년, 북위 태무제 탁발도가 북방을 통일했다. 선비족 탁발부는 초원의 유목 정권에서 중국 북방의 유일한 지배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통일이 가져온 것은 안정이 아니라 거대한 통치 난제였다. 한족 농민이 인구의 대부분인 이 광대한 제국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탁발부의 전통적인 통치 방식은 부족제였다. 혈연과 군사 조직을 바탕으로, 수장과 부족민의 관계는 절반쯤 계약이고 절반쯤 강제였다. 초원에서는 이 시스템이 잘 돌아갔다. 유목이라는 경제활동은 비교적 단순해서 복잡한 행정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하 유역의 농경 사회에 가져다 놓으면 부족제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농업에는 세밀한 토지 관리, 수리시설 건설, 조세 징수, 인구 등록이 필요하다. 모두 성숙한 관료 조직이 있어야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초기 북위가 택한 대응은 ‘호한분치(胡漢分治)’였다. 선비족과 그 밖의 호족(胡族)은 부족제로 다스리고, 한족 인구는 한족식 행정으로 관리했다. 두 시스템을 나란히 돌린 것이다.
이는 여러 정복 왕조가 초기에 택한 방식과 같았다. 후대 요나라의 남북면관제도 비슷한 발상이다. 장점은 실용성이었다. 억지로 하나로 만들지 않고 각자 따로 다스리면 된다. 단점은 이원 구조를 제도로 굳힌다는 데 있었다. 선비족과 한족은 법률상으로도, 사회적 지위에서도, 정치적 권리에서도 평등하지 않았다. 단기적으로는 정복자의 군사적 우위로 이런 불평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는 없다. 불평등은 원한을 낳고, 원한이 어느 선을 넘도록 쌓이면 결국 폭발하기 때문이다.
북위의 초기 황제들은 호한분치라는 틀 안에서 갖가지 조정과 타협을 시도했다. 본격적인 대수술은 효문제 때에 이르러서야 시작된다.
2. 효문제의 개혁 — 또 한 사람의 자각적인 체제 설계자
탁발굉, 곧 효문제(재위 471~499)는 중국 정치사에서 주공, 상앙과 진시황, 동중서와 한 무제를 잇는 또 한 사람의 자각적인 체제 설계자였다.
개혁의 방향은 더없이 분명했다. 전면적인 한화(漢化)였다.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다.
평성,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반경이 은으로 도읍을 옮겼을 때와 같은 논리였다. 물리적 공간을 재배치해 기존의 이해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평성은 선비족 구귀족의 근거지였다. 그곳에 이들의 뿌리와 인맥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반면 낙양은 한족 문화의 중심지였다. 낙양 천도는 선비 귀족을 안락한 터전에서 뿌리째 뽑아 한족 문화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 던져 넣는 일이었다.
천도 과정은 극적이었다. 효문제는 남쪽 정벌을 명분으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다가 낙양에 이르러 더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기가 새 수도라는 것이다. 동행한 선비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평성을 떠나기도, 자기 영지와 부족민을 두고 오기도 싫었다. 효문제는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었다. 남쪽에서 전쟁을 치를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자신을 따라 출정하든가, 낙양 천도를 받아들이든가. 두 가지 해악 가운데 덜한 쪽을 고르느라 귀족들은 마지못해 천도에 동의했다.
정치적 책략으로 포장한 강제 이주였다. 효문제는 처음부터 천도를 선언하면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힐 줄 알았다. 그래서 남정이라는 ‘더 나쁜 선택지’를 만들어, 천도가 받아들일 만한 타협으로 보이게 했다.
호족의 복식과 언어를 금하고 한족식 성씨로 바꾸다.
낙양에 도착한 뒤 효문제는 선비족에게 한족의 옷을 입으라고 명했다. 조정에서는 선비어를 금하고 한어만 쓰게 했다. 선비족 성씨도 한족 성씨로 바꾸었다. 탁발씨는 원씨로, 독고씨는 유씨로, 보륙고씨는 육씨로, 하뢰씨는 하씨로 바뀌는 식이었다.
겉모습만 손보는 개혁이 아니었다. 옷과 언어는 한 민족의 문화를 가장 바깥에서 드러내는 표지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일상의 세세한 구석마다 선비족과 한족의 차이를 지운다는 뜻이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성씨를 쓰면 겉으로는 한족과 다를 게 없어진다. 겉모습이 같아지면 마음도 그쪽으로 움직인다.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말을 오래 쓰다 보면, 어느새 한족의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균전제를 시행하다.
북위는 485년에 균전제를 시행했다. 국가가 인구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고, 성인 남자는 일정 면적의 밭을 무(畝) 단위로 받았다가 죽으면 국가에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정전제를 되살린 것이 아니었다. 그건 왕망이 시도했다가 재앙적으로 실패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설계였다. 토지의 최종 소유권은 국가에 있다고 인정하되, 농민 개개인에게 사용권을 주었다. 목적은 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나누어 받은 땅을 사고팔 수 없었다. 그러니 대지주도 토지를 한없이 불릴 수 없게 된다.
균전제가 지닌 구조적 의미는 대단히 컸다. 3.0 운영체제에 덧댄 중요한 패치였다. 3.0의 핵심 잔여항 가운데 하나가 토지 겸병이었다. 전한 말과 후한 말의 사회 위기는 모두 토지 겸병과 관련이 있었다. 상앙의 토지 사유화라는 3.0의 원래 설계는 토지의 자유로운 매매를 허용했다. 매매가 겸병을 낳고, 겸병이 유민을 낳고, 유민이 봉기를 낳았다. 균전제는 토지 매매를 제한함으로써 이 연쇄의 출발점에 차단 장치를 걸려 했다.
균전제는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로 이어져 발전했고, 두 왕조 경제 제도의 토대가 되었다. 북위가 후세에 남긴 개별 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산일지도 모른다.
삼장제를 시행하다.
지방 행정에서는 다섯 가구를 묶어 인(鄰), 다섯 인을 묶어 리(里), 다섯 리를 묶어 당(黨)으로 삼았다. 각각 인장·이장·당장을 두어 주민을 다스렸는데, 이들을 통틀어 삼장이라 했다. 말단 행정체계를 다시 세운 것이다. 북방에서는 오랜 전란을 거치며 진·한의 편호제민, 곧 가구를 호적에 올려 백성을 직접 지배하던 체제가 무너졌고, 국가는 개별 가정과의 직접적인 접점을 잃었다. 삼장제는 그 접점을 복구했다.
호족과 한족 사이의 혼인을 장려하다.
효문제 자신부터 한족 사족과 혼인 관계를 맺는 데 앞장섰다. 자기 아우들과 선비 귀족들에게 한족 명문가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고, 탁발 황족의 딸들도 한족 사족에게 시집보냈다. 목적은 호족과 한족이라는 두 엘리트층을 혈연으로 융합하는 데 있었다. 몇 세대가 지나면 ‘누가 선비족이고 누가 한족인가’라는 질문 자체에 답할 수 없게 된다.
이 개혁들을 한데 놓고 보면 효문제의 설계 의도는 아주 선명하다. 그는 북방의 하드웨어에 개량한 3.0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있었다.
균전제와 삼장제는 국가가 사회를 직접 통제하는 기능, 곧 편호제민의 기능을 복구했다. 천도와 한화는 호족과 한족의 이원 구조를 없애 모든 이가 같은 문화 코드를 실행하게 했다. 통혼은 두 지배집단을 하나로 합쳐 엘리트층을 융합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효문제가 한 일은 주공의 작업과 구조적으로 닮았다. 둘 다 혼란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의식적인 제도 설계로 오래갈 질서를 세우려 했다. 다만 효문제 앞에 놓인 과제는 주공의 것보다 더 어려웠다. 주공이 설계한 시스템은 문화적으로 비교적 동질적인 사회를 위한 것이었다. 주나라 사람들과 그들에게 정복당한 상나라 사람들의 문화적 차이는 선비족과 한족 사이의 차이만큼 크지 않았다. 효문제의 시스템은 문화가 극도로 다른 두 집단을 하나의 틀 안에서 공존시켜야 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한쪽인 선비족을 다른 쪽인 한족에 맞추는 것이었다. 대등한 융합이 아니라 일방향의 동화였다.
3. 육진의 난 — 개혁이 밀어낸 잔여항의 반격
효문제 개혁의 비용은 누가 부담했을까?
수혜자는 분명했다. 낙양의 선비 귀족과 한족 사족이었다. 이들은 새 수도에서 혼인하고 교류하며 서로를 인정했고, 새로운 혼합 엘리트층을 이루었다. 그 후손들은 훗날 수·당 제국의 핵심 지배집단이 된다.
손해를 본 이들도 분명했다. 북방 변경에 남은 선비족 군인들이었다.
북위는 북쪽 국경에 옥야·회삭·무천·무명·유현·회황이라는 여섯 군진을 두었다. 수많은 선비족 군인이 주둔하며 북방 초원의 유목 정권인 유연을 막았다. 천도 이전에 이들의 지위는 높았다. 제국의 방패이자 탁발부의 군사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었다. 평성 시대에는 후한 대우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제국의 무게중심이 남쪽으로 내려갔고, 정치문화의 주류는 한화가 되었다. 낙양의 새 엘리트가 보기에 변경의 군인들은 여전히 선비어를 쓰고 호족의 옷을 입으며 초원의 풍습을 고수하는, 뒤처지고 거칠고 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곤두박질쳤다. 제국의 등뼈가 제국의 버림받은 자식이 된 것이다.
동시에 육진의 물질적 처우도 나빠졌다. 조정의 자원은 갈수록 낙양과 중원의 건설에 집중되었고, 변경 군진의 군사비는 줄어들었다. 군인들의 출세길도 막혔다. 한화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체제에서 한족 문화를 모르는 변경 군인이 중앙 관료 조직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523년, 육진의 난이 일어났다.
직접적인 원인은 기근이었다. 북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육진의 군인과 주민들에게 식량이 끊겼다. 그러나 더 깊은 원인은 효문제 개혁이 만들어 낸 구조적 배제였다. 한화 개혁의 수혜자는 낙양에, 비용을 떠안는 사람은 변경 군진에 몰려 있었다. 둘 사이에는 이익을 나눌 장치가 없었다. 개혁은 새로운 엘리트층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옛 엘리트층 하나를 체계적으로 내버렸다.
잔여항이 반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효문제의 개혁은 선비족을 한화시켜 호한 이원 구조를 없애려 했다. 하지만 한화는 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낙양의 선비 귀족은 한화했다. 그럴 여건도 동기도 있었다. 변경의 선비 군인은 한화하지 않았다. 여건도 동기도 없었다. 개혁은 호족 대 한족이라는 낡은 이원 구조를 없애면서, 한화한 신귀족 대 한화하지 않은 변경민이라는 새로운 이원 구조를 만들어 냈다.
옛 잔여항인 호한 대립은 흡수되고, 새로운 잔여항인 중심과 주변의 대립이 풀려 나왔다. 잔여항은 보존된다. 효문제는 모순을 없앤 것이 아니라 민족의 차원에서 지리의 차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옮겼다고 해결한 것은 아니다. 지리적 차원에서 한계까지 쌓인 모순은 육진의 난으로 폭발했다.
육진의 난이 남긴 결과는 북위의 분열이었다. 난 자체는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를 진압한 군사 세력, 특히 이주영과 그 후계자들은 중앙을 능가하는 힘을 손에 넣었다. 북위는 534년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 동위의 배후에는 육진 군인 출신인 고환이, 서위의 배후에는 마찬가지로 육진 군인 계통에서 나온 우문태가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효문제는 선비족을 한족으로 만들려 했는데, 그 개혁이 버린 선비 군인들이 개혁자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 군인들의 후손이 북제와 북주라는 새 왕조를 세웠고, 결국 그 왕조들에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나왔다.
효문제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균전제, 삼장제, 한화라는 개혁의 내용은 모두 뒤이은 정권들이 물려받았다. 다만 그 내용을 실어 나르던 북위 정권 자체가 개혁이 만들어 낸 잔여항에 파괴되었다. 개혁의 내용은 살아남았고 개혁자는 죽었다. 개혁자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운명이다. 당신의 사상이 당신의 몸보다 오래 산다.
4. 남조의 네 왕조 — 문벌 체제가 서서히 소진되다
남쪽의 이야기는 북쪽만큼 격렬하지 않다. 하지만 그 구조는 똑같이 또렷하다.
420년 동진이 멸망한 뒤, 남쪽에는 송·제·양·진 네 왕조가 차례로 들어섰다. 왕조가 바뀌는 방식은 놀라울 만큼 같았다. 무인의 찬탈이었다.
유유가 동진의 제위를 빼앗아 송나라를 세웠다. 소도성은 송나라를 찬탈해 제나라를, 소연은 제나라를 찬탈해 양나라를, 진패선은 양나라를 찬탈해 진나라를 세웠다.
매번 무장이 문약한 황제를 밀어냈다. 새 왕조의 창업자는 모두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유유는 북부병의 하급 장교였고, 소도성은 미천한 가문 출신 장수였으며, 진패선의 출신은 그보다도 낮았다. 이 반복 자체가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문벌 체제라는 구축물이 소진되고 있었다.
문벌 체제의 핵심은 명문 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한다는 데 있었다. 황제는 동진의 경우처럼 문벌 출신이거나, 아니면 문벌에 발목이 잡혔다. 문벌은 구품중정제로 인재 선발을 통제하고, 고위 관직을 독점했다. 명예로운 ‘청관(淸官)’은 사족에게만 주고 ‘탁관(濁官)’은 한인(寒人), 곧 낮은 가문 출신에게 맡겼다. 사족과 서인은 서로 혼인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는 식으로 사회적 경계도 지켰다. 그렇게 특권적 지위를 유지했다.
동진에서 100년 동안 돌아간 이 시스템은 남조에 이르러 노후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무너지는 식의 노후화가 아니었다. 천천히 피가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첫째, 문벌의 군사적 역량이 쇠퇴했다.
동진 때만 해도 군사적 역량을 갖춘 대족이 있었다. 환온의 환씨와 사안의 사씨는 군대를 이끌고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남조 시대의 문벌 자제들은 갈수록 문관이 되고, 시를 짓고, 청담을 나누는 쪽으로 기울었다. 전선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군사권은 차츰 문벌 체제 밖의 한인, 출신은 낮아도 군사적 재능은 있는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이는 구조적인 권력 이동이었다. 문벌은 전쟁이 너무 힘들고 위험하며 사족의 생활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의 수단을 포기하고 한인에게 넘겨주었다. 당장은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인이 대신 싸우는 동안 자신은 후방에 앉아 편하게 살면 된다. 하지만 길게 보면 폭력을 쥔 자가 마지막 정치적 결정권을 갖는다. 칼을 쥔 자가 천하를 갖는다. 문벌은 칼을 넘겼고, 그 칼을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둘째, 문벌의 문화 자본은 불어났지만 정치 자본은 줄었다.
남조는 중국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 가운데 하나였다. 사령운의 산수시, 유협의 『문심조룡』, 소통의 『문선』, 서예의 눈부신 발전까지 모두 문벌 사족의 손에서 나왔다. 이들의 문화적 창조력은 쇠퇴하는 정치권력과 대비되어 더욱 찬란해 보였다.
하지만 문화 자본이 곧바로 정치권력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시를 써도 칼은 막지 못한다. 여기에 문벌 체제의 근본적인 역설이 있다. 사족과 한인을 가르는 핵심이 문화적 교양인 만큼, 문벌은 문화적 구별로 사회의 위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교양이 높아질수록 전쟁, 재정 관리, 일상적인 정무 처리처럼 ‘거친’ 일을 꺼리게 된다. 하필 그 ‘거친’ 일들이야말로 권력을 지탱하는 토대다.
문벌이 문화를 정교하게 다듬어 간 과정은 일종의 자기 거세였다. 문화로 자신이 한인보다 우월함을 증명한 다음, ‘한인보다 우월하다’는 이유로 한인이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실제 일을 도맡은 한인이 실질적 권력을 얻는다. 결국 자신은 그 실질적 권력에 밀려난다. 문화적 우월감은 문벌의 관을 꾸민 가장 정교한 장식품이었다.
셋째, 찬탈이 거듭될 때마다 황권은 강해졌다.
무인의 찬탈은 매번 흥미로운 효과를 낳았다. 새 황제는 옛 황제보다 문벌에 덜 의존했다. 문벌의 지지가 아니라 자기 군사력으로 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문벌에 진 신세가 없었다. 문벌을 건너뛰고 자기가 믿는 사람을 직접 쓸 수 있었다. 대개는 함께 천하를 차지한 한인 출신 장수와 참모들이었다.
남조의 네 왕조를 거치며 황권은 차츰 강해지고, 문벌은 차츰 주변으로 밀려났다. 송나라 유유 때부터 이미 한인을 대거 등용했다. 낮은 신분 출신의 관리를 보내 지방의 번왕과 관료를 감시하는 전첨제가 그 예다. 양나라 소연 때에 이르면 문벌은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누렸지만, 실제 정치적 의사결정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크게 줄어 있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무인의 찬탈이라는 폭력으로 권력 배분을 초기화했고, 초기화할 때마다 문벌의 몫은 작아졌다. 문벌은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었다. 막으려면 군사력이 필요했는데, 이미 잃어버린 것이 바로 군사력이었다.
넷째, 후경의 난으로 문벌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졌다.
548년, 북방의 반란 장수 후경이 장강을 건넜다. 이듬해인 549년 건강이 함락되었고, 양 무제 소연은 대성에 갇혀 굶어 죽었다. 후경은 건강과 그 주변에서 대규모 살육과 파괴를 자행했다.
후경의 난을 군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방에서 이탈해 넘어온 장수 하나가 수천 명을 이끌고 남조 최강의 양나라를 산산조각 냈다. 이 불균형 자체가 병세를 알려 주는 진단 정보다. 겉으로는 번영을 누리던 제국이 어떻게 수천 명에게 무너질 수 있었을까?
답은 이렇다. 문벌은 정치를 독점하면서 군사는 포기했다. 남조의 군사력은 여러 지방 세력의 손에 흩어져 있었고, 중앙인 건강에는 믿고 의지할 만한 군대가 거의 없었다. 평소에는 서로 평화롭게 지냈지만, 일이 터지자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신속하게 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후경의 난은 남방 문벌에 파괴적인 타격을 가했다. 건강 부근의 왕씨·사씨·유씨(庾氏)·환씨 같은 백 년 명문들이 전란 속에서 대거 살해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동진을 따라 강을 건넌 중원의 명문가가 백여 가문이었다.’ 의관남도 때 이주해 온 그 백여 대족이 후경의 난에서 거의 뿌리째 뽑혔다.
문벌 체제의 물적 기반과 인적 기반은 후경의 난으로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뒤이은 진나라(557~589)에서 문벌은 더 이상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이 아니었다. 진패선이 세운 진나라는 군인 정권이었다. 권력의 기반은 문벌이 아니라 군대에 있었다.
문벌 체제는 동진이 들어선 317년부터 후경의 난이 일어난 548년까지 약 230년 동안 작동했다. 어느 특정한 적에게 패배해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군사 역량의 상실, 정치 자본의 축소, 문화적 세련됨이 부른 자기 주변화로 서서히 피를 잃었다. 마침내 후경이라는 외부 충격이 살짝 밀자 그대로 쓰러졌다.
후한의 붕괴와 판박이다.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자연사한 것이다. 내부 잔여항이 오랫동안 쌓여 구축물의 속을 비워 놓았고, 끝내 그리 크지 않은 외부의 흔들림이 전면 붕괴를 일으켰다.
5. 관롱집단 — 두 갈래 길의 교차점
북쪽에서는 육진의 난 이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다.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이어졌다.
동위와 북제는 고환 가문이 장악했다. 고환의 권력 기반은 육진의 선비 군인과 하북의 한족 호강이었다. 북제의 정치문화는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선비족 색채가 여전히 짙었고, 한화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서위와 북주는 우문태 가문이 장악했다. 우문태의 처지는 더 어려웠다. 근거지인 관중은 고환이 차지한 하북·하남보다 땅도 훨씬 좁고, 인구도 훨씬 적고, 경제력도 훨씬 약했다. 열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과감한 제도 혁신이 필요했다.
우문태가 한 일 가운데 몇 가지가 결정적이었다.
부병제.
병농일치라는 새로운 군사제도였다. 평소에는 농민이고 전시에는 군인이었다. 직업 군인도 용병도 아니었다. 땅을 가진 농민이 필요할 때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갔다. 이 제도는 군사력의 저변을 소수의 직업 군인에서 농민 전체로 넓혀 동원 능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부병제에는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는 기능도 있었다. 선비 군인과 한족 농민이 같은 군사 조직에서 복무하고, 전장에서 전우애를 쌓았다. 평시에는 양쪽 집안이 혼인으로 이어졌다. 군대가 민족 융합의 용광로가 되었다.
관롱집단.
우문태는 자신을 따르는 선비 귀족과 관중의 한족 대족을 촘촘한 정치·군사 동맹으로 묶었다. 후대에 ‘관롱집단’이라 부르게 된 집단이다. 역사학자 진인각이 제시한 개념이다.
관롱집단에는 우문씨·독고씨·장손씨처럼 선비 혈통의 군사 귀족, 이씨·양씨·두씨처럼 한족 혈통의 지방 호강, 그리고 호족과 한족의 피가 섞인 수많은 가문이 참여했다. 혼인, 공동 복무, 이익 공유를 통해 민족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엘리트 관계망을 이루었다.
이 관계망은 순수한 선비족 집단도, 순수한 한족 집단도 아니었다. 혼합체였다. 구성원의 혈통도 섞였고 문화도 섞였다. 언어도 섞여 많은 이가 선비어와 한어를 함께 썼다. 가치관 역시 군사적 용맹과 문화적 교양을 모두 중시하는 혼합형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관롱집단은 남북의 두 길이 만나 낳은 산물이었다.
북방의 군사 전통인 육진 선비 전사의 정신과, 북위 효문제 개혁이 남긴 행정 경험을 물려받았다. 유학 경전, 행정제도의 설계, 정당성을 말하는 담론처럼 남방의 문화 자원도 흡수했다. 다만 그것을 남조에서 직접 수입한 것은 아니었다. 북방에 남아 있던 한족 문화 전통을 통해 간접적으로 얻었다.
관롱집단은 새로운 품종이었다. 순수한 한족 엘리트의 체제였던 3.0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개인의 무력에만 기대지 않고 제도화된 조직 구조를 갖추었으니 십육국의 군사 강자 체제를 이어받은 것도 아니었다. 들어오는 기준이 순전히 혈통과 문화가 아니라 능력과 공헌이었으니 문벌 체제의 변형도 아니었다. 300년의 남북 분열이 뒤섞어 빚어낸 새로운 정치적 종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관롱집단의 핵심 구성원이었다. 아버지 양충은 서위·북주의 열두 대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나라를 세운 이연 역시 관롱집단 출신이었다. 어머니가 독고신의 딸이었는데, 독고신은 관롱집단을 처음 만든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관롱집단은 왕조가 아니라 배양접시였다. 그 안에서 중국 제국사상 가장 찬란한 두 왕조, 수와 당이 자라났다.
6. 300년 분열의 총결산
304년부터 589년까지, 분열은 285년간 이어졌다. 이제 장부를 한 번 결산해 볼 때다.
하드웨어의 변화.
북방의 경제 구도가 재편되었다. 자유로운 매매를 허용하던 토지 사유제를 균전제가 대체했다. 부병제는 새로운 군사 동원 방식을 세웠고, 삼장제는 말단 행정을 재건했다. 모두 3.0의 원판에는 없던 새 하드웨어였다.
남방에서는 경제 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의관남도로 유입된 인구와 기술이 장강 유역과 그보다 더 남쪽 지역의 개발을 밀어붙였다. 남조 후기에 이르면 남방의 경제 생산량은 이미 북방에 근접하거나 심지어 넘어섰다. 중국 경제의 무게중심이 남쪽으로 옮겨 가는 장기적 흐름은 이 300년 동안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뎠다.
소프트웨어의 변화.
유학은 여전히 주류 이념이었지만 더는 독점하지 못했다. 불교와 도교가 공인된 지위와 넓은 사회적 영향력을 얻었다. 세 가르침이 병존하는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3.0의 이념 계층이 ‘오직 유학만을 받든다’에서 ‘유학을 중심에 두고 불교와 도교로 보완한다’로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더 다원적이고 더 유연해졌다.
남방에서는 문벌제도가 쇠퇴했다. 실제로 운영되는 구품중정제는 군인, 한인, 전문 관료 같은 신흥 세력의 정치적 요구를 갈수록 감당하지 못했다. 시험을 중심에 둔 새로운 인재 선발 방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남조에는 이미 명경·수재 등의 과목별 시험이 원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거제의 씨앗이 여기에 뿌려졌다.
민족 구도의 변화.
북방의 민족 구도는 완전히 다시 짜였다. 흉노와 갈족은 대체로 한족 속에 녹아들었다. 가장 큰 규모로 합류한 집단은 선비족이었다. 북위의 한화 정책과 관롱집단의 혼합 실천을 거치며 선비 엘리트와 한족 엘리트가 하나로 융합했다. 저족과 강족도 대거 흡수되었다. 수·당이 통일을 이룰 때 북방의 ‘한인(漢人)’은 더 이상 전한·후한 때와 똑같은 의미의 한인이 아니었다. 혈통에는 북방 여러 민족의 요소가 대량으로 들어 있었고, 문화에는 초원 전통의 요소가 스며 있었다.
이 혼합은 누군가 한 사람이 설계한 것이 아니었다. 300년에 걸친 전쟁, 이주, 통혼, 공동생활이 자연스럽게 빚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깊고 멀리 미쳤다. 수·당 제국이 진·한 제국보다 더 팽창적이고 포용적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배 엘리트 자체가 여러 민족이 융합한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혼합체인 지배집단은 ‘우리 종족이 아닌 자’에 대한 거부감도 자연히 덜하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순환 법칙에 남긴 것.
300년의 분열은 한 가지를 증명했다. 3.0 운영체제는 오랫동안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집권, 군현제, 유가와 법가의 결합, 편호제민이라는 기본 논리는 그 중단 기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지역의 실천 속에 조각조각 살아남아, 다시 하나로 합쳐질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시 합치는 일은 단순한 재시작이 아니다. 300년의 중단은 너무 길어서 옛 시스템의 여러 부품이 이미 낡아 버렸다. 재통합에는 새로운 부품이 많이 필요하다. 균전제, 부병제, 삼교의 병존, 과거제의 원형, 호족과 한족이 융합한 엘리트 구조가 그것이다. 어떤 부품은 북방에서, 어떤 것은 남방에서, 또 어떤 것은 호족과 한족이 부딪치는 교차점에서 나왔다.
수·당의 제도는 3.0의 N번째 재시작이 아니라 대규모 업그레이드였다. 3.5라고 불러도 좋다. 업그레이드의 재료는 300년의 분열기에 나란히 진행된 두 실험의 성과 전부에서 왔다.
다음 편은 수나라다. 양견의 체제 설계는 극도로 정교했다. 반면 양광의 문제는 진시황의 문제와 구조가 같았다. 구축을 밀어붙이는 속도가 사회가 잔여항을 흡수하는 속도를 앞질렀다. 두 대 만에 멸망했고, 수명은 38년이었다. 그러나 수나라와 진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진나라가 죽은 뒤에는 3.0을 처음부터 더듬어 찾아야 했지만, 수나라가 죽은 뒤 당나라는 수나라의 제도 일체를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수나라는 당나라의 진나라였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