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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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3 / 25

제13편: 서진과 동진·십육국, 3.0 버전의 첫 장기 중단

서기 280년,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천하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어렵게 이룬 통일이었다. 후한 말부터 헤아리면 분열이 거의 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말이다.

서기 280년,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천하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어렵게 이룬 통일이었다. 후한 말부터 헤아리면 분열이 거의 백 년이나 이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통일은 고작 11년을 버텼다.

서기 291년, 팔왕의 난이 터졌다. 뒤이어 16년간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진의 군사력과 행정 역량은 바닥까지 소진되었다. 304년에는 흉노족 유연이 산서에서 한나라를 세웠다. 훗날 전조로 이름을 바꾼 이 나라의 등장은 북방의 여러 민족이 대규모로 중원에 들어와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316년, 전조가 장안을 함락하고 진 민제를 사로잡으면서 서진은 멸망했다. 317년에는 낭야왕 사마예가 건강에서 진왕에 올라 동진이 시작되었고, 318년에는 황제를 칭했다.

316년부터 수나라가 진(陳)나라를 멸망시킨 589년까지, 남북의 분열은 거의 300년 동안 이어졌다.

깎아내기·구축의 주기 법칙에서 이 300년은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전까지 구축이 무너졌던 시기, 곧 하나라 말, 상나라 말, 서주 말, 진(秦)나라 말, 전한 말, 후한 말에는 모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재건이 이루어졌다. 같은 버전을 다시 가동하기도 했고, 유수가 3.0 버전을 재가동한 경우가 그렇다.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진나라는 1.0에서 2.0으로, 한 무제는 2.0에서 3.0으로 넘어갔다. 재건이 빨랐다는 것은 옛 시스템의 작동 기억이 남아 있었고, 사회의 조직 능력이 남아 있었으며, 복구할 조건도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300년의 분열은 전혀 달랐다. 300년이면 모든 작동 기억을 지워 버리기에 충분하다. 수와 당이 마침내 다시 통일을 이루었을 때, 그들 앞에 놓인 것은 곧바로 재가동할 수 있는 옛 시스템이 아니었다. 뿌리부터 다시 지어야 하는 폐허였다. 3.0 버전은 재가동된 것이 아니라 다시 쓰였다.

다시 쓰는 이야기는 뒤에 하자. 이번 글에서는 먼저 300년의 분열 자체를 살펴본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남북이 각각 어떤 길을 걸었는지, 그리고 그 길들이 훗날의 재건에 필요한 재료를 어떻게 쌓아 놓았는지 말이다.

1. 팔왕의 난: 견제가 사라진 시스템의 자멸

지난 글에서 사마씨 가문의 구축 형태를 분석했다. 사족이 함께 통치하고, 호족을 잔여항에서 기반으로 바꾸는 방식이었다. 이 구축 형태는 견제가 들어설 공간을 없애 버렸다. 권력을 쥔 이들이 모두 같은 계층 출신이어서, 중재자 노릇을 할 외부 세력이 없었다.

팔왕의 난은 바로 이 결함이 전면적으로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겉으로 보면 팔왕의 난은 사마씨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이었다. 진 무제 사마염은 황족들을 대거 번왕에 봉하고, 실질적인 병권과 지방 행정권을 주었다. 조위의 황족이 너무 약해서 사마씨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일을 교훈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교정’은 지나쳤다. 조위에서는 황족에게 병권이 없었기에 황실 밖의 신하인 사마씨가 제위를 빼앗아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서진이 내놓은 ‘해결책’은 황족에게 병권을 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황족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구조적으로 보면 팔왕의 난은 3.0 버전 운영체제의 더 깊은 곤경을 드러냈다. 이 시스템은 황족을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랐다.

황족에게 병권을 주면? 서로 싸운다. 팔왕의 난이다. 병권을 주지 않으면? 황실 밖의 신하가 제위를 빼앗는다. 사마씨의 위나라 찬탈이다. 조금 주되 너무 많이는 주지 않으면? ‘조금’과 ‘너무 많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떤 제도 설계로도 그 선을 정확하게 그을 수 없다. ‘얼마나 주어야 충분한가’는 결국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번왕에게 10만 군사를 주면 변경을 지킨다. 야심가에게 1만 군사를 주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번왕에 봉할 때는 누가 충신이고 누가 야심가인지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도박뿐이다.

팔왕의 난이 이어진 16년 동안 서진의 정예 부대는 다 소모되었고, 행정 조직은 산산조각 났으며, 사회 질서는 더는 유지할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졌다. 내전에서 이기려고 각 세력은 북방에서 진나라 영역 안으로 이주해 와 있던 흉노족과 선비족 등의 기병을 대거 동원했다. 진나라에 충성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쥐여 주고는, 전쟁이 끝나면 얌전히 반납하고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리라 기대한 셈이다.

그들은 무기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 무기로 자기들 나라를 세웠다.

팔왕의 난이 끝내 낳은 결과는 이것이었다. 진나라가 제 손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북방 여러 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주인이 된 것은 외부 침입의 결과가 아니라 내부 붕괴의 산물이었다. 그들을 용병으로 불러들인 것은 진나라 자신이었다. 그러고는 그 용병들을 통제할 중앙의 권위마저 스스로 없애 버렸다. 시스템이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다.

2. 영가의 난과 의관남도: 3.0 버전의 물리적 분열

316년 장안이 함락된 뒤, 중원의 사족과 백성이 대거 남쪽으로 이주했다. 이것이 ‘의관남도’다. 의복과 관, 예악, 가문의 계보와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장강을 건너 남쪽에서 삶을 다시 일군 것이다.

의관남도의 규모는 엄청났다. 추산에 따르면 남하한 인구는 가장 많을 때 100만 명에 육박했을 수도 있다. 사료마다 수치 차이가 크지만, 수십만에서 100만 명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이 아니었다. 조직을 갖춘 가문과 공동체였다. 한 가문이 통째로 소작인과 사병을 거느리고 재산까지 챙겨 옮겨 갔다. 어떤 대가문은 자체 행정 조직까지 남쪽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교군’과 ‘교현’, 북방의 옛 지명을 붙인 새로운 행정 구역들이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의관남도는 3.0 버전 운영체제가 물리적으로 갈라진 사건이었다. 운영체제의 하드웨어인 관료 조직, 군대, 인구와 소프트웨어인 유교 이념, 사족의 연결망, 문화 전통이 두 쪽으로 나뉘었다. 하드웨어의 대부분은 북방에 남았다. 땅과 도시와 기반 시설은 짊어지고 갈 수 없으니까. 소프트웨어의 대부분은 사람들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갈라진 방식이 이후 남북이 걷게 될 전혀 다른 길을 결정했다.

남쪽은 3.0 버전의 소프트웨어를 물려받았다. 사족의 연결망, 유교적 담론, 예악 문화, 자신이 정통이기에 통치할 자격이 있다는 서사였다. 하지만 하드웨어 기반이 약했다. 당시 남쪽의 개발 수준은 북쪽보다 훨씬 낮았다. 경제 생산량도, 인구 밀도도, 교통망도 북쪽에 못 미쳤다.

북쪽에는 3.0 버전의 하드웨어 기반이 남아 있었다. 비옥한 황허 유역, 밀집된 인구, 잘 발달한 도시망과 농업 체계였다. 대신 소프트웨어가 심하게 망가졌다. 사족은 대거 남하했고, 행정 체계는 무너졌으며, 유교 이념을 전파하던 연결망도 끊어졌다.

이후의 300년은 남과 북이 저마다 불완전한 반쪽 시스템을 가지고 온전한 질서를 재건하려 한 과정이었다.

3. 동진: 문벌 공치형 구축

동진을 세운 힘은 사마씨 황족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이 무렵 사마씨는 독자적인 군사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라를 세운 것은 남하한 사족들의 지원이었다.

낭야 왕씨의 핵심 인물인 왕도와 왕돈이 사마예를 받들어 건강에서 즉위시켰다. 왕도는 내정을 맡고 왕돈은 군사를 장악했다. 동진 건국을 실제로 움직인 것은 황제가 아니라 왕씨 가문이었다. 당시 이런 말이 있었다.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한다.” 왕씨와 사마씨가 이 정권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이다.

과장이 아니다. 동진의 정치 구조를 정확히 묘사한 말이다.

동진의 구축 형태는 ‘문벌 공치형 구축’이라 부를 수 있다. 서진의 ‘사족 공치형 구축’과 같은 혈통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서진의 사족 공동 통치는 황권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 체계였다. 황제와 사족이 협력하되, 명목상 최고 권력자는 여전히 황제였다. 인재 선발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구품중정제에 따랐다.

동진의 문벌 공동 통치는 권력을 훨씬 철저하게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황실도 여러 대가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심지어 가장 강한 가문도 아니었다. 권력은 황족과 몇몇 최상위 문벌 사이를 차례로 옮겨 다녔다. 왕도 다음에는 유량과 유빙, 그다음에는 환온과 환충, 이어서 사안과 사현이었다. 시기마다 한 대가문이 조정을 주도하고 황제가 거기에 맞춰 주었다.

이 구축 형태가 작동하는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군사권과 정치권력이 분리되어 있었다.

동진의 핵심 군사력은 장강 상류인 형주에 있었다. 형주의 병권을 장악한 쪽이 중앙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차지했다.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건강을 곧장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건강의 중앙 조정이 쥐고 있던 것은 행정권과 문화적 정통성이었다.

보통은 한 대가문이 형주의 병권을, 다른 대가문이 중앙의 행정권을 장악했다. 전자에 왕돈, 환온, 환현이 있었고 후자에 왕도, 사안이 있었다. 두 쪽 사이에는 팽팽한 균형이 형성되었다. 군대를 가진 쪽이 제위를 빼앗을 마음을 먹으면(실제로 환온이 그랬다), 조정을 장악한 쪽은 정통성과 다른 대가문들과의 동맹을 동원해 견제했다.

둘째, 북벌은 정치적 도구였다.

동진의 100년 동안 조적, 유량, 은호, 환온, 유유 등이 여러 차례 북벌에 나섰다. 하지만 북벌의 동기와 성과는 저마다 달랐다.

조적의 북벌은 아마 가장 진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중원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지원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조정의 핵심을 차지한 남하 사족들에게는 북벌에 대한 진짜 열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남쪽에서 이미 북쪽에 있을 때보다 더 나은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북쪽에서는 수많은 사족 가운데 하나였지만, 남쪽에서는 ‘교성(僑姓)’이었다. 강을 건너온 상류층으로, 남쪽 토착 사족보다 지위가 높았다. 북벌에 성공한다는 것은 북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이미 토지와 사회적 기반을 잃어버린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차라리 남쪽에 남아 남들 위에 군림하는 편이 나았다.

환온이 북벌에 나선 동기는 더 복잡했다. 그의 군사 행동에는 실제 전략적 목표가 있었지만, 강력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북벌로 전공과 명성을 쌓아 최종적인 제위 찬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북벌을 마친 뒤 환온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내가 유곤이나 도간에 견줄 만한가?” 부하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만족하지 못한 그가 다시 물었다. “왕돈과는 견줄 만한가?” 이 질문에 깔린 속뜻은 이미 북벌이 아니었다. 왕돈은 바로 제위를 빼앗을 뻔했던 그 사람이었다.

동진의 정치 생태에서 북벌은 군사 문제가 아니라 문벌 간 힘겨루기의 도구였다. 군대를 쥔 쪽은 북벌로 권세를 키웠고, 정치를 쥔 쪽은 북벌을 방해하거나 제약해서 상대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결과는 분명했다. 북벌은 한 번도 동진 전체의 국가적 전략 목표가 되지 못했다. 매번 어느 문벌의 사적 사업이었지, 국가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다.

셋째, 남쪽의 토착 호족은 구조적으로 배제되었다.

강을 건너온 북방 사족인 교성과 남쪽 토착 사족인 오성(吳姓)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교성은 스스로 오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다. 중원 문화의 정통성과 북방 명문의 계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였다. 오성은 남쪽에서 실제 토지와 인구를 쥐고 있었지만, 정치적 서열에서는 교성 아래로 눌려 있었다.

이 배치가 하는 일은 명확했다. 문화적 서열로 경제력을 눌렀다. 오성에게는 돈도 땅도 사람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오성을 권력의 핵심부에 들이면 교성의 우월한 지위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배치는 오래 남는 잔여항도 낳았다. 남쪽 토착 세력의 정치적 요구가 해소되지 못한 채 쌓였다. 동진 중후기에 이르러 묵은 요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손은과 노순의 봉기에는 남쪽 토착 세력이 교성의 지배에 저항한 측면이 있었다. 마침내 동진을 무너뜨린 유유 역시 북부병, 곧 남하한 유민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장수였다. 그의 부상은 새로운 힘의 등장을 뜻했다. 교성 문벌도, 남쪽 토착 호족도 아닌 신흥 군사 세력이었다. 문벌 체제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무인 계층이었다.

문벌 공치형 구축을 끝낸 것은 또 다른 문벌이 아니었다. 문벌 시스템이 소화할 수 없는 새로운 잔여항, 군인이었다.

4. 십육국: 군사 실력자형 구축의 빠른 교체

북쪽의 이야기는 남쪽과 완전히 다르다.

304년 유연이 한나라를 세운 때부터 439년 북위가 북방을 통일할 때까지, 135년 동안 북쪽에는 20개가 넘는 정권이 잇따라 등장했다. 역사서는 그중 비교적 중요한 나라들을 십육국으로 묶었다.

이 나라들을 세운 이들의 민족적 배경은 매우 복잡했다. 흉노족은 전조와 북량, 갈족은 후조, 선비족은 전연·후연·남연·서진(西秦)·남량, 저족은 전진·후량, 강족은 후진을 세웠다. 한족도 있었으니 전량·서량·북연·염위가 그들 나라였다.

그런데 창건자가 어느 민족이든 이 정권들의 구축 형태는 놀랍도록 비슷했다. 군사 실력자형 구축이었다. 군사적 능력이 있는 사람, 대개 부족장이나 장수가 무력으로 땅을 차지하고 정권을 세운 뒤 왕이나 황제를 자처했다. 정권의 안정은 전적으로 그 실력자 개인의 능력과 직속 군대의 충성도에 달려 있었다. 실력자가 죽으면 정권은 갈라졌다. 후계자가 다른 군사 지도자들을 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또 다른 실력자에게 멸망했다.

3.0 버전 운영체제의 하드웨어, 곧 토지·인구·도시는 남아 있지만 소프트웨어인 이념·관료 조직·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서사가 사라졌을 때의 기본 상태가 이것이다. 사회를 조직할 이념이 없으면 폭력이 유일한 조직 원리가 된다. 지방을 다스릴 관료 조직이 없으면 군사 점령이 유일한 관리 방식이 된다. “왜 네가 다스려야 하는가?”에 답할 정당성의 서사가 없으면, 유일한 대답은 “내가 싸움을 잘하니까”다.

군사 실력자형 구축은 교체 속도가 극도로 빠르다는 특징이 있다. 135년 동안 20개가 넘는 정권이 잇따라, 또 때로는 동시에 존재하며 빠르게 교체되었다. 이 나라들을 세운 이들이 유독 무능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상당한 군사적 재능을 지닌 사람도 많았다. 석륵은 노예에서 황제가 되었고, 부견은 한때 북방 전체를 통일했다. 문제는 군사 실력자형 구축이 구조적으로 장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군사 실력자형 구축이 오래갈 수 없는 이유는 진(秦)나라의 문제와 닮았지만,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다. ‘천하를 빼앗는 일’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 전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천하를 빼앗으려면 군사 지도자 개인의 능력과 직속 무력의 충성이 필요하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행정 체계와 사회적 합의, 제도화된 권력 승계가 필요하다. 군사 실력자는 대체로 앞의 일에는 능하고 뒤의 일에는 서툴다. 게다가 앞의 성공이 뒤의 건설을 가로막는다. 개인의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왜 수고롭게 관료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가? 휘하의 군사 지도자들이 폭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익숙한데, 어떻게 그들에게 제도에 따른 권력 배분을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석륵은 흥미로운 사례다. 갈족 출신인 그는 젊어서 노예로 팔렸다가 전쟁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 후조를 세웠다. 재위 중에는 한화를 추진하려 했고, 학교를 세우고 유학자를 기용해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2년도 되기 전에 조카 석호가 정변으로 권력을 빼앗았다. 석호는 철저한 폭력 통치자였다. 그의 정권을 떠받친 것은 공포와 수탈이었다. 석호가 죽자 후조는 불과 몇 년 만에 완전히 무너졌다.

석륵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바는 이렇다. 군사 실력자 자신에게 제도를 세울 의지와 능력이 있어도, 그가 세운 것은 그보다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그 제도가 정상적인 사회의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것이 아니라, 폭력을 기반으로 한 권력 구조 위에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접붙인 제도에는 자기 뿌리가 없다. 접붙인 사람이 죽는 순간 시들어 버린다.

십육국의 빠른 교체에는 긍정적인 부산물도 있었다. 북방의 민족 융합을 가속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구가 대규모로 이동하고 재편되었다. 135년 동안 북방의 여러 민족은 혼전 속에서 거듭 뒤섞였다. 흉노족이 선비족 정권에서 관리가 되고, 한족이 갈족 정권의 참모가 되었으며, 저족의 지도자가 유교 경전으로 자제들을 가르쳤다. 전쟁이라는 믹서 속에서 문화의 경계가 차츰 흐려졌다.

이 융합은 평화롭지도, 자발적이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격렬하고 강제적이며 피로 가득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실제였다.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439년이 되면, 북방 사회는 더 이상 순수한 한족 사회도 순수한 호족(胡族) 사회도 아니었다. 하나의 혼합체였다. 새로 생겨나 아직 형태가 굳지 않은 채,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던 문명의 모습이었다.

5. 전진: 성공에 가장 가까이 갔던 실패

십육국 시대의 20여 정권 가운데 전진은 따로 분석할 만하다.

부견은 저족 출신으로 전진의 세 번째 황제였다. 왕맹의 보좌를 받아 그는 십육국 군주 가운데 거의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비교적 안정적인 행정 체계를 세운 것이다.

왕맹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한족이었지만 탁월한 정치적 재능을 지녔다. 부견과 왕맹의 관계는 유비와 제갈량에 비견된다. 한 사람은 군사력과 정치적 결단을 제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통치 능력과 제도 건설을 제공했다.

왕맹이 전진에서 펼친 통치는 3.0 버전의 설정값에 가까웠다. 호족(胡族)이든 한족이든 가리지 않고 지방의 유력자들을 누르고, 법치를 시행했다. 출신 대신 능력으로 인재를 뽑았고, 농업과 교육을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 아래 전진의 관중 지역에는 질서와 번영이 돌아왔다.

370년대에 이르면 전진은 동진을 제외한 북방 전체를 통일했다. 부견은 서진 멸망 이후 북방을 통일한 최초이자 유일한 십육국 군주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동진을 치러 남쪽으로 진군한 것이다. 383년, 비수 대전에서 전진은 참패했다.

비수 대전의 군사적 경과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이 패배는 전진의 구축 형태에 있던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냈다. 전진은 여러 민족의 군사 동맹이었지, 공동의 정체성을 가진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

부견이 북방을 통일한 수단은 군사 정복이었다. 정복당한 여러 민족의 정권, 곧 선비족의 전연, 저족의 구지, 그 밖의 각종 지방 세력은 전진 체계에 편입되었지만 충성도는 극히 낮았다. 부견을 따른 것은 싸워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지, 그에게 동질감이나 공감대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부견이 비수에서 큰 군사적 패배를 당하자, 정복당했던 이들은 즉시 돌아섰다. 비수 대전 이후 전진의 붕괴 속도는 진(秦)나라만큼이나 빨랐다. 2년도 안 되어 사분오열되었다.

왕맹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진(晉)나라는 비록 오월의 외진 곳에 있으나 정통을 이어 온 나라입니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것은 나라의 보배입니다. 신이 죽은 뒤에는 진나라를 도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선비와 강의 오랑캐는 우리의 원수이니, 끝내 사람들에게 화근이 될 것입니다. 마땅히 점차 제거해야 합니다.”

왕맹은 두 가지를 보았다. 첫째, 동진은 비록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정통의 명분이 있었으므로, 공격할 때 치러야 할 정치적 비용이 매우 컸다. 둘째, 정복한 선비족과 강족 등이 진짜 잠재적 위험이었다. 명목상 귀순했을 뿐, 실제로는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먼저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마땅히 점차 제거”한 다음에 외부로의 확장을 생각해야 했다.

부견은 듣지 않았다. 남정을 택했다. 그 결과는 왕맹의 판단 하나하나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전진이 남긴 교훈은 조조의 구축 형태와도 통한다. 억누르는 전략의 효력은 전적으로 그것을 운용하는 개인에게 달려 있다. 왕맹이 살아 있을 때 전진의 내정은 원활했고, 정복한 민족들도 효과적으로 억제되었다. 왕맹이 죽은 375년 이후, 부견에게는 내정을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없어졌다. 그 자신의 관심마저 남정으로 분산되었다. 내부의 잔여항이 쌓이기 시작했다. 비수의 패배는 방아쇠일 뿐이었다. 진짜 붕괴 원인은 왕맹이 죽은 뒤 8년 동안 쌓인 내부 잔여항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는 데 있었다.

전진은 십육국에서 성공에 가장 가까이 갔던 정권이자, 실패하는 방식에서 가장 큰 교훈을 남긴 정권이었다. 여러 민족과 여러 세력이 뒤섞인 환경에서 군사 정복은 형식상의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문화적 통합과 제도 건설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통일은 건드리기만 해도 깨진다. 전진은 이것을 증명했다. 통일이 얼마나 단단한가는 군사력의 크기가 아니라 사회가 공유하는 정체성의 깊이에 달려 있다.

6. 남북의 비교: 나란히 진행된 두 실험

동진과 십육국을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구조적 대비가 드러난다.

남쪽의 문제는 소프트웨어는 있는데 하드웨어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진은 3.0 버전의 이념적 자원을 모두 물려받았다. 유교적 담론, 정통의 명분, 사족의 연결망, 예악의 문화 전통이었다. 하지만 이 소프트웨어를 실질적 통제력으로 바꿔 줄 하드웨어 기반이 부족했다. 군사력이 모자라 북부병 같은 반독립적 무장 집단에 의존했다. 경제 개발에도 한계가 있었다. 남쪽의 대규모 개발이 빨라지는 것은 남조에 가서였다. 행정 역량도 약해서, 중앙의 지방 통제력은 전한이나 후한에 한참 못 미쳤다.

그 결과 동진에는 문화도 논리도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왜 자신이 정통인지는 변호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세력을 넓히지는 못했다. 북벌이 번번이 실패했다. 현상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현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북쪽의 문제는 하드웨어는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다는 것이었다.

십육국의 각 정권은 중국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황허 유역, 가장 밀집된 인구, 가장 발달한 도시망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 하드웨어 자원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소프트웨어가 없었다. 여러 민족의 문화 전통은 서로 호환되지 않았으므로 공동의 이념이 없었다. 군사 점령이 곧 행정 관리는 아니었으므로 성숙한 관료 체계도 없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치 정당성의 서사도 없었다. “내가 싸움을 잘하니까”는 지속 가능한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었다.

그 결과 십육국에는 힘은 있었지만 방향이 없었다. 싸우고 확장할 수는 있어도 안정되게 오래갈 수는 없었다. 한 정권이 다른 정권을 멸망시키고는, 자신도 얼마 버티지 못한 채 세 번째 정권에 멸망했다. 하드웨어는 거듭 포맷되고 재설치되었지만,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운영체제는 끝내 없었다.

남북의 이런 대비는 구축에 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진실을 보여 준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서로 맞아야 한다.

동진처럼 소프트웨어만 있다면, 자신이 왜 옳은지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옳음’을 현실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 옳음은 추상적이고, 허공에 떠 있으며, 무력하다.

십육국처럼 하드웨어만 있다면, 힘으로 많은 일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 힘은 맹목적이고, 소모적이며, 자멸적이다.

둘 다 불완전했다. 둘 다 상대에게 있는 것을 찾고 있었다. 남쪽에는 자신의 정통성을 현실로 실현할 힘이 필요했다. 북쪽에는 자신의 힘을 안정시킬 제도가 필요했다. 최종적인 해법은 북쪽에서 나왔다. 북위 효문제의 한화 개혁은 본질적으로 북쪽의 하드웨어에 개량된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음 글에서 다룰 이야기다.

7. 300년의 분열이 주기 법칙에 남긴 의미

300년의 분열은 깎아내기·구축의 주기 법칙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이 시기는 그전까지 없었던 몇 가지 경험을 제공한다.

첫째, 구축은 오랫동안 중단될 수 있지만 구축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30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동안 남과 북은 저마다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런데 수와 당이 마침내 재통일을 이루고 세운 제도적 틀에서는 여전히 3.0 버전의 밑바탕 논리를 알아볼 수 있다. 과거제는 남조에서 구품중정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나왔다. 3성 6부제는 북조의 행정 경험에서, 부병제는 북방에서 호족과 한족이 융합하며 형성한 군사 전통에서 나왔다. 군현제는 그대로였다. 중앙집권도 그대로였다. 유가와 법가를 합친다는 기본 발상도 그대로였다.

구축의 기억은 어느 한곳에 저장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무수한 구석에 흩어져 있다. 가문의 가훈에, 마을의 풍속에, 지식인의 경전 해석에, 행정 관료의 업무 관행에 남는다. 저장 지점 하나는 얼마든지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저장 지점을 동시에 파괴할 수는 없다. 충분한 수의 지점이 살아남는다면, 시스템은 그 조각들로부터 다시 세워질 수 있다.

300년의 분열은 많은 저장 지점을 파괴했다. 그러나 전부 없애지는 못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둘째, 분열기는 구축 형태의 혁신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다.

전국 시대의 교훈과 같다. 여러 구축 형태가 공존하는 시대에 혁신도 가장 활발하다.

남쪽의 문벌 정치는 ‘약한 황제 + 강한 문벌’이라는 권력 분점 방식을 탐색했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실패 방식은 나중에 제도를 설계할 때 참고할 재료가 되었다. 문벌의 독점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북쪽의 다민족 융합은 ‘호족과 한족을 함께 다스리는’ 여러 방식을 시험했다. 유연의 ‘한화된 흉노’에서 석륵의 ‘호한 분리 통치’로, 다시 부견의 ‘민족 평등’을 거쳐 북위의 ‘전면적 한화’에 이르렀다. 각 방식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었고, 훗날 다민족 제국을 다스릴 경험이 그렇게 쌓였다.

이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대규모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이념적 자원이 생겼다. 유교 말고도 세상을 설명할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3.0 버전의 소프트웨어 층에는 중대한 보충이었다. 훗날 당나라에서 유교·불교·도교의 ‘삼교 병행’이 발전한 것도 이 기반 위에서였다.

셋째, 분열기에 잔여항이 나타나는 방식은 통일기와 다르다.

통일기의 잔여항은 주로 틀 안에서 쌓이다가 끝내 틀을 터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토지 겸병, 외척과 환관, 유민이 그 예다. 구심적인 움직임이다. 잔여항이 중심에 쌓인다.

분열기의 잔여항은 주로 여러 틀 사이에서 충돌하다가 새로운 틀을 탄생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쪽의 문벌형 구축과 북쪽의 군사 실력자형 구축에는 각자의 잔여항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잔여항이 분출하는 방향은 중심이 아니었다. 중심 자체가 없었으니까. 상대방을 향했다. 남쪽의 문화적 우위와 북쪽의 군사적 우위는 충돌 속에서 서로 스며들었다. 끝내 순수하게 남쪽 것도, 순수하게 북쪽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났다.

수와 당의 제도 설계는 남쪽에서 온 것도, 북쪽에서 온 것도 아니다. 남북이 부딪치는 접점에서 나왔다. 수·당 정권의 핵심 집단이었던 관롱 집단부터가 북방의 호한 융합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들은 북방의 군사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개조한 남방의 문화 전통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단순히 3.0 버전을 다시 켠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과 북의 불완전한 반쪽 시스템에서 저마다 필요한 것을 골라, 하나의 새 버전으로 조립한 사람들이었다.

넷째,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상전이는 300년의 분열 속에서도 되돌아가지 않았다.

300년의 전란은 극도로 잔혹했다. 북방의 살육, 남방의 문벌 억압, 여러 민족 사이의 폭력적 충돌은 모두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극단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사람은 목적이다’라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의 전래는 이 인식을 강화했다. 불교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는 중생의 평등이다. 모든 생명에는 불성이 있으며, 모두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이 주장은 유가의 ‘인’, 묵가의 ‘겸애’와 밑바탕에서 통한다. 유교가 제도로 표현된 형태인 관리 선발 제도와 관료 체계가 북방에서 무너졌을 때, 불교는 ‘사람은 목적이다’라는 명제를 전하는 기능을 어느 정도 이어받았다. 사찰은 난세의 피난처가 되었고, 승려는 호족과 한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 되었다.

상전이는 되돌릴 수 없다. 300년의 대혼란 속에서도 되돌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놀랍고, 또 가장 안도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음 글은 남북조다. 북위 효문제의 한화 개혁은 또 한 번의 의식적인 구축 형태 설계였다. 그 결과는 육진의 난, 개혁에서 배제된 잔여항의 반격이었다. 남조의 네 왕조인 송·제·양·진에서는 문벌형 구축이 점차 소진되어 갔다. 두 길은 마지막에 같은 곳에서 만난다. 관롱 집단이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