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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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2 / 25

제12편: 삼국 시대 — 한 무대에서 겨룬 네 가지 구축형

후한이 무너진 자리에 핵심적인 질문 하나가 남았다. 호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후한이 무너진 자리에 핵심적인 질문 하나가 남았다. 호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호족은 이제 사회 구석구석에 흩어진 자잘한 잔여항이 아니었다. 후한의 200년 동안 힘을 축적하고 제도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그들은 사회 구조 자체의 일부가 되었다. 토지와 인구, 인재가 진출하는 통로와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폐허 위에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답해야 했다. 이들을 어떻게 다룰 생각인가?

삼국 시대의 주요 세력 넷, 조조와 유비, 손권, 그리고 사마씨는 전혀 다른 네 가지 답을 내놓았다. 머릿속에서 도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 칼과 창을 맞대며 실행한 답이었다. 네 방식은 같은 시공간에서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 충돌했고, 서로를 시험했다. 그 덕분에 삼국 시대는 깎아내기·구축 주기율을 살펴볼 수 있는 천연 실험장이 되었다. 문제는 하나, 답안은 넷.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다.

1. 조조: 호족을 억누르다

조조는 환관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 조등은 환제 때 권세를 누린 환관이었고, 아버지 조숭은 돈을 바쳐 태위 자리를 샀다. 후한 말의 정치판에서 이런 출신은 엄청난 흠결이었다. 사족은 환관 집안을 더러운 존재로 여기며 멸시했다. 원소가 조조에게 퍼부은 “환관 집안의 추악한 잔재”라는 욕설에는 당시 사족이 조조를 바라보던 일반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다.

이런 출신 때문에 조조에게는 ‘사족과 협력하는’ 노선이 열려 있지 않았다. 그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족이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주류 호족의 인맥에서 배제된 그는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족에게 의존하지 않는 권력 체계를 만드는 길이었다.

오직 재능만 보고 등용한다는 유재시거(唯才是舉)는 조조의 가장 유명한 인사 정책이다. 그는 세 차례 구현령을 내리면서 한 가지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사람을 쓸 때는 재능만 본다. 출신도, 도덕성도, 가문도 보지 않는다. “반드시 청렴한 선비라야 쓸 수 있다면, 제나라 환공은 무엇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었겠는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 써야 한다면 제 환공이 어떻게 패업을 이룰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관중은 도덕성에 문제가 있었다. 젊은 시절 공자 규를 배신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능력이 있었으니 써야 했다.

이 정책이 겨냥한 것은 찰거제 아래에서 형성된 사족의 독점이었다. 찰거제의 기준은 ‘효렴’, 곧 도덕과 품행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누가 도덕과 품행이 훌륭한지 판정하는 권한은 사족의 손에 있었다. 사족끼리 서로 추천하고 서로 보증하면서 인재가 자기들 안에서만 도는 폐쇄 회로가 만들어졌다. 유재시거는 이 회로를 끊었다. 사족의 추천은 필요 없다. 재능만 있으면 된다.

둔전제는 조조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는 허현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둔전을 설치하고, 떠돌던 유민과 항복한 병사들을 군대식 농업 생산 조직에 편입했다. 둔전의 생산물은 호족의 장원 경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가에 귀속되었다. 호족이 장악한 경제 체계 바깥에 별도의 살림을 차리고, 나란히 돌아가는 경제 체계를 하나 더 만든 셈이었다.

또 교사(校事)를 설치해 조정의 신하들과 지방 세력을 감시했다. 교사는 비밀경찰과 비슷한 존재였다. 사람을 믿는 대신 감시로 통제를 유지하는 법가의 수단이었다.

이 조치들을 한데 놓고 보면 조조의 구축형은 분명해진다. 그는 운영체제 3.0에 담긴 ‘국가가 개인을 직접 상대한다’는 설계 의도를 되살리려 했다. 유재시거로 사족의 인재 독점을 우회하고, 둔전제로 사족의 경제 독점을 우회하고, 교사 제도로 사족의 정보 독점을 우회했다. 호족을 없애지는 않았다. 그건 불가능했다. 대신 호족 체계 옆에 병렬 체계를 세워, 국가가 호족에게 기대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억제 전략이다.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호족을 실권에서 밀어내는 방식이다.

조조의 구축형이 지닌 장점은 대단히 높은 효율이었다. 뿌리와 가지가 얽히듯 복잡한 사족의 인맥을 거치지 않으니 국가 기구의 실행력이 크게 높아졌다. 조조가 북방에서 가장 강력한 정권을 세우고 황허 유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효율적인 행정 체계와 직접 관련이 있었다.

단점은 체계의 작동이 운영자 개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었다. 유재시거의 기준은 조조 자신이 정했고, 둔전제의 추진은 조조 개인의 권위에 기대었으며, 교사가 어디까지 개입할지도 조조 본인이 조절했다. 조조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조조가 죽은 뒤 후계자들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사족에게 기대지 않으면 사족도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 조비는 황제가 되기 위해 사족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조비 때 확립된 구품중정제가 바로 그 타협이었다. 이를 제안한 진군은 영천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구품중정제의 실질은 인재를 평가하는 권한을 지방의 유력 가문에 돌려주는 데 있었다. 조조가 유재시거로 빼앗아 온 인사권을 도로 내준 셈이었다.

조조가 평생 호족을 억누르며 세운 병렬 체계를 아들은 정령 하나로 넘겨주었다. 억제 전략의 잔여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잔여항을 눌렀을 뿐, 없애지는 못했다. 손을 놓는 순간 잔여항은 원래 자리로 튀어 오른다. 어쩌면 전보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눌려 있는 동안 반등할 힘을 더 크게 쌓았기 때문이다.

2. 유비: 호족을 비켜 가다

유비의 출신은 조조와 전혀 달랐다. 그는 중산정왕의 후손인 황족이었지만,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돗자리를 짜고 짚신을 팔며 사는 밑바닥 신세로 내려앉았다. 시작할 때 가진 자원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근거지도, 가문의 인맥도,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유비의 핵심 자원은 딱 하나였다. 황제의 숙부로 불릴 수 있는 혈통이었다. 이 혈통의 정치적 가치는 엄청났다. 유비는 이를 바탕으로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깃발을 내걸 수 있었다. 운영체제 3.0의 언어 안에서 이 깃발은 가장 높은 등급의 정당성을 지녔다.

유비의 구축형은 ‘정통성 구축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핵심 논리는 이렇다. 나는 한 왕실의 정통 계승자이며 천명은 내게 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군벌 한 명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다. 정통 질서를 되찾는 위대한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구축형이 호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비켜 가기였다.

유비의 핵심 집단인 관우, 장비, 제갈량, 조운의 출신 배경은 서로 달랐다. 제갈량은 관리를 배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들의 충성을 가문의 이해타산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유비 개인에 대한 신뢰와 그가 대표하는 정통성의 이상이 이들을 강하게 묶었다. 유비 정권의 권력 중심을 떠받친 것은 지방 호족의 인맥만이 아니라, 이런 믿음을 공유한 핵심 집단이기도 했다.

촉에 들어간 뒤 유비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촉에도 이엄, 법정, 황권처럼 그곳의 유력 세력을 이루는 호족들이 있었고, 이들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유비와 그 뒤를 이은 제갈량은 촉의 호족을 통치에 참여시키되, 핵심 결정권은 언제나 형주 집단의 손에 남겨 두었다. 형주 집단은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온 외래 세력이었다. 촉의 호족은 필요에 따라 활용하는 협력자였지, 진정으로 권력을 나누는 상대는 아니었다.

제갈량의 촉 통치 방식은 이 구축형을 한층 강화했다. 그는 엄격한 법 집행과 고도의 중앙집권으로 촉한을 운영했다. “상과 벌은 반드시 믿을 수 있게 집행한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사람은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고, 법을 어기거나 직무를 게을리한 사람은 가까운 사이라도 반드시 벌한다.” 실제 운영은 법가식이되, 정통성과 어진 정치를 내세우는 유가의 언어로 겉을 감싼 방식이었다. 제갈량의 통치 효율은 매우 높았다. 인구도 가장 적고 경제 기반도 가장 약한 촉한이 40년에 걸친 북벌과 대결을 버텨 냈다는 사실은 이 체계의 놀라운 실행력을 보여 준다.

하지만 비켜 가기 전략이 남긴 잔여항 역시 치명적이었다. 정통성 구축형이 돌아가려면 믿음이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했다.

유비가 살아 있을 때 그 믿음의 원천은 유비 자신이었다. 그의 혈통, 그가 살아온 삶, 그의 인격적 매력이었다. 제갈량이 살아 있을 때는 믿음의 원천이 제갈량에게로 옮겨 갔다.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친다”는 도덕적 모범이었다. 그런데 제갈량이 죽은 뒤에는?

믿음은 유전되지 않는다. 혈통은 물려줄 수 있고 능력은 가르칠 수 있지만, 어떤 장치도 믿음을 다음 세대에 자동으로 넘겨줄 수는 없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 비의, 강유는 저마다 능력이 달랐지만, 제갈량의 도덕적 감화력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믿음으로 움직이던 정통성 구축형은 점차 관성으로 굴러가는 체제로 퇴화했다. 그 퇴화의 끝에서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했고, 촉한은 멸망했다.

호족을 비켜 간 대가는 사회적 뿌리가 없는 구축형이었다. 정권은 믿음 위에 떠 있고, 그 믿음을 얼마나 공급할 수 있는지는 지도자 개인의 자질에 달려 있다. 지도자의 자질은 우연에 좌우되는 변수이지, 제도가 공급해 주는 자원이 아니다. 또 그 오래된 문제다. 세대마다 성인(聖人)이 나오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선양에 기초한 구축형이 이 문제로 죽었고, 정통성 구축형도 이 문제로 죽었다.

3. 손권: 호족과 협상하다

손권의 처지는 조조와도, 유비와도 달랐다. 조조처럼 호족에게 배척당한 외부인도 아니었고, 유비처럼 근거지 없는 떠돌이도 아니었다. 그는 외부에서 온 정복자의 후계자였다.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무력으로 강동을 차지했고, 그 앞에는 강력한 토착 호족들이 버티고 있었다.

손책의 방식은 강경했다. 그는 허공을 비롯해 복종하지 않는 강동의 명사들을 적잖이 죽이고, 폭력으로 토착 세력을 굴복시켰다. 하지만 손책 자신도 원한을 품은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폭력으로 눌러 복종시킨 대가였다.

손권은 방식을 바꾸었다. 협상이었다.

손권은 뒤를 잇자 강동의 유력 가문 출신을 대거 등용했다. 고씨의 고옹, 육씨의 육손, 주씨의 주환, 장씨의 장온이 그들이다. 단순히 관직을 맡기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 결정에 참여시켰다. 육손도 승상에 올랐고 고옹도 승상에 올랐다. 최고 행정직이었다.

그러나 손권은 끝까지 한 장의 패를 손에 쥐고 있었다. 군권을 토착 호족에게 전부 넘기지는 않았다. 손씨 일족과 손견·손책 시절부터 모여든 회수·사수 유역 출신의 옛 장수들이 핵심 군사력을 장악했다. 주유, 노숙, 여몽 같은 이들은 모두 장강 북쪽 출신으로, 강동 토박이가 아니었다. 정치에서는 토착 호족과 협력하고 군사에서는 외래 집단의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손권의 균형술이었다.

협상형 체제의 장점은 안정성이었다. 손씨의 오나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했다. 손책이 강을 건넌 196년부터 나라가 망한 280년까지 거의 85년이었다. 내부 혼란도 가장 적었다. 적어도 손권이 살아 있던 시기의 대부분은 그랬다. 안정의 이유는 협상이 양쪽 모두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손씨는 정권의 통제권을 얻었고, 토착 호족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경제적 이익의 보장을 얻었다. 양쪽이 저마다 얻는 것이 있었고, 저마다 양보하는 것도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작동하는 균형이었다.

협상형 체제의 잔여항은 바깥으로 뻗어 나갈 능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협상의 본질은 타협이다. 토착 호족에게 정치 참여권을 주면, 그들은 정책을 거부할 힘을 갖게 된다. 적어도 간접적으로 정책을 거부할 힘은 생긴다. 토착 호족은 강동을 지키는 일에는 열심이었다. 자기들의 땅이고 재산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벌에는 열의가 없었다. 쳐들어가서 이긴들 뭐가 달라지는가? 새로 정복한 땅은 우리 것이 아닌데.

따라서 손씨 정권의 전략적 한계는 협상 자체에 묶여 있었다. 지킬 수는 있어도 공격할 수는 없다. 동맹 상대와 방어에 대해서는 뜻이 맞지만, 공격에 대해서는 뜻이 맞지 않는다. 제갈각의 북벌이든 손준의 북벌이든, 밖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시도는 번번이 후방의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더 깊이 들어가면 협상형 체제에는 또 하나의 잔여항이 있었다. 후계 문제였다. 손권 말년의 ‘이궁의 변’, 곧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가 후계 자리를 놓고 벌인 다툼은 황족끼리의 싸움에 그치지 않았다. 강동 호족 전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의 문제로 번졌다. 호족마다 지지하는 황자가 달라 궁중의 다툼은 호족 파벌 사이의 전면 대결이 되었다. 결국 손권은 태자를 폐하고 노왕을 죽였다. 양쪽 모두 상처를 입었고, 수많은 조정 신하가 휘말렸다.

왜 손씨의 오나라에서는 후계 문제가 유독 치명적이었을까? 협상형 체제의 균형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균형은 협상 당사자들 사이의 암묵적 이해와 타협할 의지에 달려 있었다. 손권이 있을 때는 그의 권위와 수완이 그 이해를 지탱했다. 그가 죽자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한 후계자 아래에서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권력이 한 번 승계될 때마다 협상도 새로 해야 했다. 그리고 재협상의 결과는 갈수록 손씨에게 불리해졌다. 군사적 역량과 외부 위협이 만들어 내는 결속력이라는 손씨의 패는 약해지는 반면, 경제력과 인재의 인맥, 지방 기반이라는 토착 호족의 패는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의 힘이 비슷하면 협상은 지속될 수 있다. 하지만 한쪽은 계속 강해지고 다른 쪽은 계속 약해지면, 협상은 일방적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로 바뀐다. 오나라 후반의 정치가 바로 그 상태였다. 황제는 갈수록 약해지고 호족은 갈수록 강해졌다. 마침내 협상이라는 형식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4. 사마씨: 호족을 끌어안다

사마씨의 노선은 앞의 세 가지와 모두 달랐다. 조조는 호족을 억눌렀고, 유비는 호족을 비켜 갔으며, 손권은 호족과 협상했다. 사마씨는 네 번째 길을 골랐다. 자신이 호족이 되는 길이었다.

이는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 자기 정체성에 가까웠다. 사마의는 하내군 온현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집안 대대로 벼슬을 했다. 그가 출세한 경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족의 인맥 안에 있었다. 가문의 명망으로 관직에 들어갔고, 혼인 관계로 동맹을 맺었으며, 동료의 추천으로 승진했다. 그는 호족을 이용하려는 외부인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호족의 일원이었다.

사마의가 조씨의 위나라에서 권력을 빼앗은 과정, 곧 249년 고평릉의 변은 사족 인맥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정변을 일으킨 그가 빠르게 상황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군사력 덕분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명목상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사족 계층 전체의 지지, 적어도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상은 조위의 종실과 외척 세력을 대표했고, 사마의는 사족 계층의 집단적 이익을 대표했다. 대다수 사족에게 사마의와 조상 중 누구를 택할지는 망설일 문제가 아니었다.

사마씨가 세운 서진의 구축형은 ‘사족 공동통치 구축형’이라 부를 수 있다. 핵심 약속은 황제와 사족이 함께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명목상의 최고 권위와 무력의 뒷받침을 제공하고, 사족은 행정 능력과 사회 통제력을 제공한다. 양쪽은 각자 필요한 것을 얻는다.

구품중정제는 이 구축형을 제도로 옮긴 것이었다. 이론상 구품중정제는 인재 선발 제도다. 중정관이 지역의 인재를 평가해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 조정에 추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정관 자신이 유력 가문 출신이었고, 평가에서도 ‘집안 내력’을 먼저 보았다. 개인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보다 그 집안의 몇 대가 무슨 벼슬을 했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그 결과가 “상위 등급에는 한미한 집안이 없고, 하위 등급에는 사족이 없다”는 말이었다. 가장 높은 품계의 자리는 전부 유력 가문이 독점했다. 출신이 낮은 사람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밑바닥에 머물러야 했다. 호족의 정치적 독점을 철저하게 제도화한 체계였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끌어안기 전략은 앞의 세 전략이 하지 않은 일을 하나 해냈다. 잔여항을 토대로 바꾸었다.

조조는 호족을 잔여항으로 보고 억눌렀다. 유비는 잔여항으로 보고 비켜 갔다. 손권은 협력 상대로 삼아 협상하되 여전히 거리를 두었다. 사마씨는 더 이상 호족을 잔여항으로 보지 않았다. 호족이야말로 체계의 토대라고 선언했다. 당신들은 마지못해 용인되는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한 존재다. 시스템의 버그가 아니라 기능이다.

이 전략은 단기적으로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호족과 중앙 사이의 구조적 긴장을 단숨에 없앴다. 둘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긴장이 없으면 내부에서 힘을 소모할 일도 없다. 서진 초기의 정치는 꽤 화목해 보였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모두 같은 계층 출신이었고, 같은 가치관을 가졌으며, 같은 이익을 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이 없다는 말은 견제와 균형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끌어안기 전략의 치명적인 잔여항이었다.

5. 끌어안기 전략이 먼 훗날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이유

긴장은 불편하다. 그러나 긴장은 쓸모가 있다.

조조의 억제 전략에는 긴장이 있었다. 그와 사족은 줄곧 대립했다. 대립에는 힘이 들지만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체계의 어느 부분이 잘 돌아가는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압력은 어디에 쌓이는지가 드러난다. 대립은 피드백 장치다.

손권의 협상 전략에도 긴장이 있었다. 그와 강동 호족 사이의 흥정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이 흥정 자체가 상황에 맞추어 조정하는 장치였다. 양쪽은 형세가 바뀔 때마다 권력과 자원을 끊임없이 다시 배분했다. 협상은 조절 장치다.

사마씨의 끌어안기 전략에는 긴장이 없었다. 황족과 사족은 한 몸이었고, 이익은 일치했으며, 가치관은 공유되었다. 이는 체계 안에 피드백도, 조절도, 문제를 지적하거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을 힘도 없다는 뜻이었다.

체계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자, 곧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재앙적인 결과가 곧바로 드러났다.

팔왕의 난(291~306년)은 서진 황족 내부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겉으로는 사마씨 집안의 여덟 제후왕이 서로 싸운 사건이지만, 본질은 황족 내부의 권력 배분이 잘못된 데 있었다. 무제 사마염은 종실을 대거 왕으로 봉하고 강력한 군권과 자치권을 주었다. 조위의 종실이 약해 사마씨에게 권력을 찬탈당했다는 교훈을 얻고, 종실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제후왕들은 중앙 권력을 놓고 서로 다툴 만큼 강해졌다.

그러나 팔왕의 난이 그토록 참혹하고, 16년이나 이어지고, 서진의 국력을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뜨린 근본 원인은 제후왕이 너무 강했다는 데 있지 않았다. 황족과 사족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할 세력이 하나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운영체제 3.0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도 황제와 외척, 환관, 유생은 서로 다투었다. 후한에서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권세를 잡았다. 그래도 다투는 세력들이 서로 다른 사회 계층에서 나왔고 각기 다른 권력 기반을 가졌기에 어느 정도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균형은 거칠었고, 치르는 대가도 컸다.

서진의 사족 공동통치는 이 다원적 견제를 없애 버렸다. 권력을 쥔 사람은 모두 같은 계층이었다. 그 계층이 내부에서 갈라졌을 때, 싸움이 얼마나 격해질 수 있는지 바깥에서 제한할 힘이 없었다. 모두 선수인데 심판은 없었다.

심판 없는 경기는 무엇이 되는가?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팔왕의 난은 그렇게 제동장치 없는 권력 내전이 되었고, 참가자들이 모두 소진된 뒤에야 멈추었다.

팔왕의 난은 북방 여러 민족의 대규모 남하로 직결되었다. 16년의 내전으로 서진의 군사력과 행정 능력이 바닥나자, 흉노족·선비족·갈족·저족·강족이 그 틈을 타 중원을 차지했다. 이후 동진과 십육국에서 남북조로 이어진 약 300년의 남북 분열은, 사마씨의 끌어안기 전략에 뒤늦게 날아온 청구서였다.

잔여항을 끌어안은 대가는 끌어안는 순간에 결산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결산된다. 잔여항을 토대로 바꾸면 눈앞의 모순을 없앤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체계 내부의 조절 장치를 없애 버린다. 조절 장치가 없는 체계는 충격을 받으면 회복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안쪽에 휘어지며 힘을 받아 낼 여지가 없어서, 힘이 가해지는 순간 그대로 산산조각 난다.

조조의 억제는 긴장을 남겼지만 회복력도 남겼다. 사마씨의 끌어안기는 긴장을 없앴지만 회복력도 없앴다. 회복력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야말로 그렇지 않을 때를 대비해 회복력을 비축해야 할 때다. 필요한 순간에 가서 찾으려 하면 이미 늦다.

6. 삼국 시대가 주기율에 보탠 것

깎아내기·구축 주기율에서 삼국 시대는 매우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새로운 구축형이 태어난 시대는 아니었다. 그건 진·한 시대였다. 기존 구축형이 안정적으로 돌아간 시대도 아니었다. 그건 문경지치였다. 삼국 시대는 기존 구축형이 무너진 뒤 여러 가지 수리 방안을 동시에 시험한 시대였다.

그 시험은 오래 남을 몇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잔여항을 다루는 기본 자세는 네 가지다. 억제, 비켜 가기, 협상, 끌어안기.

이 네 가지 자세가 삼국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후 2천 년의 정치에서도 통치자가 호족, 군벌, 이민족, 지식인, 상인 계층 같은 구조적 잔여항을 마주할 때마다 내린 선택은 이 네 가지 중 하나이거나 그 조합이었다.

어느 자세든 저마다 대가가 따른다. 억누르면 손을 놓는 순간 되튄다. 비켜 가면 구축형에 사회적 뿌리가 없다. 협상하면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타협에 묶인다. 끌어안으면 내부 조절 능력을 잃는다.

그중 어느 하나가 ‘올바른’ 자세인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은 당장 마주한 잔여항의 성격, 손에 쥔 자원, 허용된 시간에 달려 있다. 조조의 억제는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죽은 뒤에는 받아 이어 갈 수 없었다. 손권의 협상은 강동을 지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밖으로 치고 나가지 못했다. 유비의 비켜 가기는 창업기에 대단히 효과적이었지만, 창업자가 죽자 믿음의 공급이 끊겼다. 사마씨의 끌어안기는 권력을 빼앗고 통일을 이루는 단계에서 대단히 효과적이었지만, 통일 뒤의 체제에는 회복력이 없었다.

둘째, 견제와 균형은 효율의 적이 아니라 회복력의 원천이다.

이것이 삼국 시대가 남긴 가장 깊은 교훈이다. 조조의 체제는 가장 효율적이었다. 유재시거에 둔전, 중앙집권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사마씨의 체제는 가장 비효율적이었다. 사족이 함께 다스리면 행정 효율은 필연적으로 떨어진다. 사족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서로 발목을 잡으니, 결정 속도는 독재 체제에 한참 못 미친다. 그런데 결국 효율이 낮은 쪽이 높은 쪽을 집어삼켰다.

왜 그랬을까? 조조의 고효율 체제는 단 하나의 지점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의 판단력이 전체를 움직였다. 조조가 살아 있을 때는 정밀한 기계 같았지만, 그가 죽자 엔진을 잃은 기계가 되었다. 사마씨의 저효율 체제는 분산형이었다. 권력이 사족 계층 전체에 흩어져 있었다. 평상시에는 반응이 굼뜨고 효율도 낮지만, 충격을 당했을 때 살아남는 힘은 더 강했다. 연결망의 한 지점을 파괴해도 다른 지점들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효율과 회복력 사이에는 서로 내주어야 하는 몫이 있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면 반드시 회복력을 희생한다. 효율에는 집중이 필요하고, 집중은 중복된 여유분을 없애기 때문이다. 극한의 회복력을 추구하면 반드시 효율을 희생한다. 회복력에는 분산이 필요하고, 분산은 조율 능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체계는 효율이 가장 높은 체계도, 회복력이 가장 강한 체계도 아니다. 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은 체계다. 균형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환경에 달려 있다. 전쟁 중에는 힘을 모아 싸워야 하니 효율 쪽으로 기울어야 하고, 평화로울 때는 장기적인 안정을 지켜야 하니 회복력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이 균형점을 저절로 옮길 수 있는 체계는 드물다.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은 집중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집중은 권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회복력을 중시하는 사람은 집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집중은 남의 통제를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셋째, 구축형 사이의 경쟁에서 이긴 쪽이 반드시 가장 좋은 구축형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마씨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자신의 구축형이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 구축형에는 견제도 회복력도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고, 통일 뒤 약 30년 만에 그 결함이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위 내부의 권력 투쟁이 기회를 주었고, 촉한과 동오가 각자의 구축형에 묶여 밖으로 진출하지 못하거나 믿음의 공급을 잃은 것이 시간을 벌어 주었다. 전국적인 연결망을 이룬 사족 계층의 동원 능력은 자원을 제공했다.

여기서 다시 전국 시대 편의 교훈으로 돌아온다. 이겼다는 것은 옳음이 입증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진나라의 승리가 진나라의 구축형이 최선임을 입증하지 않았듯, 사마씨의 승리도 사족 공동통치가 가장 좋은 제도임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저 그 특정한 경쟁 환경과 시대적 조건에서 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통일 뒤 정복보다 통치가 필요해지면서 환경이 바뀌자,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체제라는 사실이 빠르게 드러났다.

넷째, 난세를 끝낸 사람이 반드시 마지막에 이익을 얻는 사람은 아니다.

조조는 북방을 통일해 천하 통일의 토대를 놓았지만, 이익을 얻은 것은 조씨가 아니었다. 사마씨는 통일을 완성했지만, 이익을 얻은 것은 사마씨가 아니었다. 서진은 얼마 못 가 무너졌다. 마지막에 이익을 얻은 쪽은 남북조 시대를 살아남은 사족 문벌들, 그리고 훗날 북방의 민족 융합 속에서 떠오른 새로운 세력이었다.

정치의 열매를 나무 심은 사람이 따는 일은 드물다. 깎아내는 사람이 반드시 구축하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조조는 깎아내기의 손꼽히는 명수였지만, 그가 구축한 질서는 손자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사마씨는 조위의 벽을 깎아 허물었지만, 새로 지은 집에는 회복력이 없었다. 결국 폐허 위에 자리를 잡는 것은 대개 난세에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권력이 바뀌는 동안에도 유연함을 잃지 않은 세력이다.

7. 다음 이야기

삼국은 진나라로 귀결되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뒤 진시황의 진나라보다도 빠르게 무너졌다. 진시황의 진나라조차 어쨌든 15년은 버텼다. 서진은 통일한 280년부터 팔왕의 난이 전면적으로 터진 291년까지 불과 11년이었다.

무너진 뒤에는 300년의 분열이 찾아왔다. 동진과 십육국, 그리고 남북조였다. 운영체제 3.0이 처음으로 전면적이고 장기적이며, 재시작조차 할 수 없는 중단을 겪었다.

유수가 왕망 이후 운영체제 3.0을 다시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은 15년의 중단으로는 사회가 작동하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300년의 분열이면 모든 것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남쪽에서는 문벌 정치가, 북쪽에서는 북방 민족과 한족의 융합이 각각 3.0의 작동 범위 바깥으로 나아갔다. 수·당이 마침내 다시 통일했을 때 세운 것은 3.0의 또 한 번의 재시작이 아니었다. 대대적인 개조를 거친 새 버전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서진, 동진과 십육국을 살펴본다. 사족 공동통치 구축형의 붕괴 이후 남과 북은 전혀 다른 두 길로 나아갔다. 동진의 문벌 구축형과 십육국의 군사 실력자 구축형. 같은 시공간에서 나란히 진행된 두 실험이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