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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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11 / 25

제11편: 후한 — 3.0 버전의 첫 완전한 주기

유수는 3.0 버전 운영체제를 재부팅했다. 틀은 그대로 두고 매개변수만 조금 조정했다. 시스템이 다시 가동됐다.

유수는 3.0 버전 운영체제를 재부팅했다. 틀은 그대로 두고 매개변수만 조금 조정했다. 시스템이 다시 가동됐다.

그렇게 후한(서기 25~220년)은 더없이 귀중한 관찰 사례가 되었다. 3.0 버전 운영체제가 구조의 교체 없이 처음으로 한 주기를 온전히 돌아간 사례였기 때문이다. 건국에서 붕괴까지 거의 200년. 이 200년을 따라가면, 변하지 않는 틀 안에서 잔여항이 어떻게 조금씩 쌓이는지 선명하게 보인다. 싹이 트고, 제도화되고, 통제를 벗어나고, 마침내 붕괴에 이르는 전 과정이 드러난다.

전한의 이야기는 구조를 발명하고 확립하는 과정이다. 후한의 이야기는 그 구조가 작동하고 늙어 가는 과정이다. 두 시대가 가르쳐 주는 것은 다르다. 전한은 기계를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 주고, 후한은 기계가 어떻게 늙어 죽는지 보여 준다.

1. 광무제의 매개변수 조정

유수는 틀을 바꾸지 않았지만 몇 가지 핵심 매개변수는 바꾸었다. 작아 보이는 조정들이 후한 200년의 진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첫째, 공신 집단의 정치권력을 약화했다.

유수도 유방처럼 공신들의 힘으로 천하를 얻었다. 하지만 유방이 공신들을 다룬 방식은 폭력적인 숙청이었다. 한신, 팽월, 영포가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유수의 방식은 훨씬 온건했다. 그는 공신들에게 봉읍과 전답, 재물 등 후한 경제적 보상을 주되 실질적인 정치권력과 군사 지휘권은 주지 않았다. “공신은 물러나게 하고 문관을 등용한다.” 일상적인 행정은 공신 집단 대신 문관 조직이 맡게 했다.

후대에 ‘운대 28장’으로 불린 이들의 운명이 이러했다. 부귀영화는 누리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는 멀어진다. 공신들이 병권을 쥐고 정치적 의사결정에도 참여하던 전한 초기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유수의 논리는 분명했다. 공신 집단은 천하를 얻기 위한 도구이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다. 천하를 얻으려면 군사적 능력이 필요하고, 다스리려면 행정적 능력이 필요하다. 그 두 능력이 같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신들이 계속 권력을 잡게 두는 것은 군사가들에게 행정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들의 장기도 아닐뿐더러, 그들이 보유한 군사력 자체가 중앙집권에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유수는 전한의 역사에서 확인한 잔여항 하나를 미리 막으려 했다. 공신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였다. 유방은 공신을 죽이는 폭력으로 이 잔여항을 해결했지만, 정치적 신용을 잃는 대가를 치렀다. 뒤에 오는 공신들은 한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기가 두려워졌다. 유수는 권력 대신 돈을 주는 경제적 매수로 문제를 해결했다.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작았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었다. 막대한 땅과 재산을 지녔으되 정치권력은 없는 지방 호족들이 생겨났다. 단기적으로는 중앙을 위협하지 않았지만, 길게 보면 경제력은 결국 정치적 영향력으로 바뀐다. 이들은 후한 중후기에 제국을 괴롭히게 될 ‘호족’의 한 뿌리가 되었다.

둘째, 상서대를 강화했다.

전한의 행정 중추는 승상부였다. 승상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황제 다음의 이인자였다. 무제 때부터 이미 상서와 시중 등 황제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내조’를 이용해, 승상을 정점으로 하는 정식 관료 조직인 ‘외조’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다만 아직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유수는 이 흐름을 제도로 굳혔다. 상서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실질적인 행정 의사결정권을 승상(훗날 사도로 개칭)에게서 상서대로 옮겼다. 상서대는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고 상서령은 사실상의 최고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승상과 사도는 이름만 남은 명예직이 되었다.

이 조정이 구조적으로 뜻하는 바는 황제 개인의 통제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상서대는 황제의 개인 비서실이었다. 권력은 제도적 위임이 아니라 황제의 신임에서 나왔다. 황제는 제도화된 승상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상서를 교체하는 것만으로 언제든 정책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이 강화에는 전제가 하나 있었다. 황제 본인에게 상서대를 이끌 충분한 능력과 정력이 있어야 했다. 광무제나 명제처럼 총명하고 유능한 황제라면 시스템은 잘 돌아갔다. 그런데 황제가 어리거나 무능하다면? 상서대의 권력은 황제 주변의 다른 사람들, 곧 태후와 외척과 환관에게 넘어갔다.

황권을 강화하려던 유수의 설계가 바로 그 황권이 훗날 외척과 환관의 손으로 넘어갈 길을 닦아 놓은 셈이다. 도구는 중립적이다. 잘 드는 칼은 영웅이 채소를 써는 데 쓸 수도 있고, 도둑이 자물쇠를 따는 데 쓸 수도 있다.

2. 호족 — 잔여항의 제도화

후한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현상은 호족의 부상이었다.

호족은 후한이 발명한 존재가 아니다. 전한에도 대지주, 거상, 명문가가 있었다. 다만 전한에서 호족은 억압의 대상이었다. 무제 때의 가혹한 관리, 곧 혹리들은 이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했다. 지방 세력을 약화하려고 유력자들을 관중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도 통상적인 정책이었다.

후한은 달랐다. 유수 자신이 남양의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황족의 후예이기는 했지만, 그의 세대에 이르면 이미 지방의 부유한 집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핵심 지지자들 역시 상당수가 지방 호족이었다. 남양계와 하북계 호족은 그가 천하를 얻는 데 기반이 된 세력이었다. 천하를 얻자마자 돌아서서 자기 기반을 억누르기는 어렵다.

그 결과 후한 조정은 호족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다. 전한의 억압에서 묵인과 용인으로, 때로는 협력으로 옮겨 갔다.

후한 200년 동안 호족은 경제적 집단에서 정치적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첫 단계는 광무제에서 장제까지, 대략 25~88년이다. 호족은 주로 경제적 세력이었다. 넓은 토지와 수많은 전객, 즉 호족에게 종속된 농민들, 그리고 장원을 지키는 사람들과 가병 같은 사병을 거느렸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에서 독립해 있었지만, 정치에서는 아직 체계적인 영향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두 번째 단계는 화제에서 환제까지, 대략 88~167년이다. 호족은 관료 체계에 조직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통로는 찰거제였다. 찰거제는 지방관에게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재인 ‘효렴’을 추천하도록 했고, 추천권은 지방관의 손에 있었다. 지방관 자신도 호족 출신인 경우가 많았으니 자연히 자기 집안 사람부터 추천했다. 몇 세대가 지나자 특정 대가문에서는 대대로 고관이 나왔다. ‘4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집안’, ‘여러 대에 걸쳐 공경을 지낸 집안’이 이들의 간판이 되었다.

4대에 걸쳐 다섯 명의 삼공을 배출한 여남 원씨, 4대에 걸쳐 태위를 배출한 홍농 양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가문들은 매 세대 개인의 재능만으로 각자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인맥을 동원해 찰거의 통로를 체계적으로 독점했다.

세 번째 단계는 환제에서 한나라 말기까지, 대략 167~220년이다. 호족은 관료 조직에 침투하는 수준을 넘어 사실상 지방 사회를 장악했다. 그들의 장원은 농업과 수공업을 갖춘 자급자족 경제체였다. 집안 자제와 문객을 길러 내는 사학까지 있었다. 전객과 가병은 사실상의 사설 군대를 이루었다. 지방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중앙이 파견한 관리들을 훨씬 넘어섰다.

한나라 말기 중앙의 권위가 무너지자, 지방에서 사람들을 조직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세력이 바로 이 호족들이었다. 조조, 원소, 유비, 손권. 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들은 원소의 여남 원씨처럼 자신이 호족 출신이거나, 호족의 지지를 얻어야 자기 정권을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잔여항 보존의 관점에서 보면 호족이 변화해 온 과정은 교과서적인 사례다.

3.0 버전 운영체제, 곧 군현제와 편호제민, 토지 사유제를 결합한 체제의 설계 목표는 국가가 개별 가정을 직접 상대하게 하는 것이었다. 중간에 완충층을 두지 않는 것이다. 진의 편호제민은 백성을 국가의 호적에 편입해 종족(宗族) 조직을 흩어 놓았고, 국가와 개인 사이에 어떤 중간 조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설계 목표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다. 사람은 본래 무리를 이루기 때문이다. 혈연으로, 지연으로, 경제적·문화적 관계로 모인다. 낡은 중간층인 종족 조직을 해체해도, 새로운 중간층은 다른 토대 위에서 다시 자란다. 호족은 토지 겸병과 찰거제의 이중 작용 속에서 새로 자라난 중간층이었다.

국가가 중간층을 제거할 때마다 중간층은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자라났다. 제거하는 방식은 달랐을 수 있다. 진은 편호제민을, 무제는 혹리를, 유수는 공신의 퇴진을 이용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중간층은 모양을 바꾸어 다시 나타났다. 종족 조직을 흩어 놓자 호족이 자라났다. 호족을 억누르자 이번에는 문벌 사족이 자라났다. 조조가 허(許) 지역에서 둔전을 시행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치는 것이었다. 뒤이어 위진남북조의 구품중정제는 호족의 정치적 독점을 제도로 굳혀 놓았다.

중간층은 구축의 영원한 잔여항이다. 없앨 수 없다. 그 뿌리가 특정한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성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리를 이룬다. 무리는 위계를 낳는다. 위계는 중간층을 낳는다. 종족에서 호족으로, 문벌로, 향신으로, 또 그다음으로 중간층의 형태는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중간층이라는 현상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3. 외척과 환관 — 구축 안의 두 잔여항이 서로를 소모하다

후한 중후기의 정치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권력을 잡았다.

교대의 작동 방식은 이러했다.

1단계.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 후한은 화제 이후 거의 모든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화제는 열 살, 상제는 생후 백일, 안제는 열세 살, 순제는 열한 살, 충제는 두 살, 질제는 여덟 살, 환제는 열다섯 살, 영제는 열두 살이었다.

2단계. 태후가 조정에 나서 정사를 맡고, 태후의 친정 사람들인 외척이 실권을 장악한다.

3단계. 황제가 자라면서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나 조정의 위아래는 이미 외척의 사람들이 차지했다. 황제는 정식 관료 조직에서 자기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황제와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며 황제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환관이다.

4단계. 황제가 환관과 손잡고 정변을 일으켜 외척을 제거한다. 환관은 그 공으로 권세를 얻고 조정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한다.

5단계. 새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다. 앞선 황제가 대개 단명하기 때문이다. 새 태후가 정사를 맡고 새 외척이 권력을 잡는다. 환관은 숙청된다.

6단계. 1단계로 돌아간다.

이 순환은 후한 중후기에 거듭되었다. 온전한 주기만 적어도 네댓 번이었다. 외척이 제거될 때마다 환관이 일어섰고, 환관이 숙청될 때마다 외척이 돌아왔다. 두 집단은 시소의 양 끝처럼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가며 끝없이 자리를 바꾸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외척도 환관도 모두 3.0 버전 운영체제가 구조적으로 만들어 낸 산물이다.

외척이 등장하는 뿌리는 이렇다. 3.0 버전에는 황제 개인과 독립된 권력 이양 장치가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황제가 죽거나 너무 어리면 권력은 누구에게 가는가? 명확한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태후의 섭정은 비공식적인 관행이지 정식 제도가 아니었다. 외척의 집권은 태후 섭정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었다. 태후는 누구를 믿겠는가? 자기 집안 사람들을 믿는다.

환관이 등장하는 뿌리는 이렇다. 3.0 버전은 권력을 황제 개인에게 고도로 집중했고, 상서대의 설계는 이를 더욱 강화했다. 황제가 외척이 장악한 관료 조직인 외조에 맞서려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자원은 내정(內廷)이었다. 그 내정을 이루는 핵심 인력이 환관이었다.

두 잔여항이 서로를 소모하는 과정은 지극히 해로웠다. 권력이 바뀔 때마다 처형, 가산 몰수, 유배 같은 정치적 숙청이 뒤따랐다. 제거되는 것은 외척이나 환관 개인만이 아니었다. 관료 조직 안에서 이들과 손잡거나 이들에게 의탁한 수많은 사람도 함께 사라졌다. 몇 차례 숙청을 거치며 유능하고 경험 많은 관료들이 거듭 걸러져 나갔다. 남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 범재이거나 줄 서기에 능한 기회주의자였다.

시스템이 스스로를 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내부의 권력투쟁이 일어날 때마다 관료 조직 전체의 질이 떨어졌다. 시스템은 몇 번이고 빨아 댄 옷과 같았다. 빨 때마다 한 겹씩 얇아졌다. 마지막에는 천이 다 닳아 더는 입을 수 없었다.

한층 더 들어가 보면, 외척과 환관의 교대는 3.0 버전 운영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을 드러낸다. 최고 권력을 맡는 노드가 단 하나뿐이었다. 전체 시스템의 작동이 황제 한 사람의 능력과 의지에 달려 있었다. 황제가 현명하면 시스템은 잘 돌아갔다. 황제가 어리고 나약하면 그 노드를 차지하려는 여러 세력이 즉시 시스템을 찢어 놓았다.

단일 노드에 의존하는 시스템에는 여분의 장치가 없다. 노드 하나가 고장 나면 네트워크 전체가 고장 난다. 현대의 분산 시스템 설계는 핵심 노드에 백업을 마련하도록 요구하지만, 중국의 황제 체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황제는 유일하고 복제할 수 없으며 대체할 수도 없었다. 그 유일한 자리를 두 살짜리 아기가 차지하면, 시스템은 태후와 외척과 환관이라는 비공식 권력 배치에 기대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공식 권력 배치는 규칙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참여자들 사이의 힘겨루기가 전부를 결정한다.

그 힘겨루기의 결과가 바로 외척과 환관의 시소였다.

4. 당고의 화 — 유지·보수 담당자가 도전자로 바뀔 때

서기 166년과 169년, 후한에서는 두 차례 ‘당고의 화’가 일어났다.

사건은 이렇게 진행됐다. 태학생과 지방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유생 집단이 환관의 권력 독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인물을 평가하고, 시정의 잘잘못을 논했다. 역사에서 ‘청의’ 또는 ‘당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환관 집단은 반격에 나섰다. 이들이 “당을 지어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다”고 고발하고, 환제와 영제를 설득해 당인을 체포하고 관직 진출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당사자뿐 아니라 친족, 제자, 친구까지 연루되었다. 두 차례 당고로 수백 명이 연루되었고, 그 여파는 수천 명에게 미쳤다.

당고의 화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분명하다. 수많은 뛰어난 인재가 관료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더 살펴볼 만한 것은 구조적 의미다. 유생 계층이 구축을 유지하는 사람들에서 구축에 도전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

3.0 버전 운영체제의 설계를 되짚어 보자. 유학만을 높이 받드는 독존유술의 목적은 유교 이념으로 잔여항을 인코딩하는 데 있었다. 사회가 자발적으로 질서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설계에서 유생 집단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념을 생산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경전을 배우고 해석하며, 경전의 기준으로 정치를 평가하고 다음 세대를 교육한다. 그들은 3.0 버전의 ‘소프트웨어 유지·보수팀’이었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 이 역할은 안정성의 원천이었다. 유생들은 천인감응의 틀 안에서 재이, 곧 재난과 이변을 근거로 황제의 특정 행동을 비판했지만 시스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비판은 건설적이었다. 시스템이 올바른 매개변수에서 벗어났음을 지적하고 원래대로 조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비판은 실제로 시스템의 자기 복구를 도왔다.

하지만 시스템의 이탈이 매개변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면 어떨까? 환관이 관료 체계 전체를 조직적으로 부식시키고 황제도 일관되게 환관 편에 선다면, 유생의 비판은 건설적인 것에서 대항적인 것으로 바뀐다. 더는 “매개변수를 잘못 맞췄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운영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인물을 평가하고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는 행위의 핵심은 이것이다. 누가 권력을 잡을 자격이 있고 누가 없는지 우리 지식인들이 판단하겠다. 황제의 인사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환관 집단은 이 위협을 알아보았다. 당인에게 붙인 ‘당을 짓는다’는 딱지는 정치적 공격이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말도 아니었다. 당인들은 실제로 조직을 갖추고 가치를 공유하며 정치의 방향에 영향을 주려는 집단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집단이 성공하면 환관은 끝장이었다. 환관이 살아남으려면 당인을 없애야 했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당고의 화는 독존유술의 깊은 모순 하나를 드러낸다. 도덕적 비판을 천직으로 여기는 지식인 계층을 길러 놓고, 그들에게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다.

독존유술은 유생을 시스템의 소프트웨어 유지·보수팀으로 삼으려는 설계였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관리하는 사람은 반드시 버그를 발견한다. 버그를 찾으면 보고한다. 보고가 받아들여지면, 곧 황제가 간언을 수용하면 시스템은 고쳐지고 모두가 만족한다. 보고가 거부되면, 곧 황제와 환관이 손잡고 저항하면 유지·보수팀은 갈수록 좌절하고 과격해지며, 마침내 유지하는 사람에서 반대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정당성을 생산하고 정책을 비판해 줄 독립적인 지식인 집단을 원하면서, 듣기 싫을 때는 입을 다물라고 할 수는 없다. 독립적인 사고는 필요에 따라 틀고 잠글 수 있는 수도꼭지가 아니다. 한번 열었으면 보고 싶지 않은 물이 흘러나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당고의 화는 3.0 버전 운영체제의 자해였다. 시스템이 자기 소프트웨어 유지·보수팀을 도려냈다. 단기적으로는 환관 집단이 안전해졌다. 장기적으로는 시스템이 자기 복구 능력을 잃었다. 더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다. 문제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속 쌓였지만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침묵은 건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치료를 포기했다는 뜻이다.

당고의 화가 일어난 지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황건 봉기가 터졌다. 시스템의 소프트웨어 유지·보수팀을 도려낸 뒤, 하드웨어의 붕괴는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5. 황건 봉기 — 밑바닥의 잔여항이 종교의 형태로 분출하다

서기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전국에서 동시에 봉기했다. 신도들이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둘렀기에 황건 봉기라고 부른다. 구호는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 누런 하늘이 마땅히 서리라. 해는 갑자년에 이르렀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였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형태를 통해 조직된 대규모 농민 봉기였다.

왜 종교였을까?

그전의 농민 봉기, 진승과 오광, 녹림과 적미의 봉기는 모두 세속적이었다. 조직의 기반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지연이나 같은 부대에 속했다는 군사적 관계였다. 사람을 불러 모으는 구호도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한나라를 되살리자” 같은 정치적 구호였다.

황건 봉기는 달랐다. 태평도는 완결된 종교 조직이었다. 교리인 『태평경』이 있었고,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로 병을 고치는 의식이 있었다. 36방으로 나뉘어 방마다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을 거느리는 조직 체계도 있었다. 장각을 ‘대현양사’라 부르는 지도자 숭배도 있었다. 신도들은 전국 8주에 퍼져 있었으며, 그 범위는 오늘날의 허베이, 허난, 산둥, 후베이, 안후이, 장쑤에 걸쳤다.

밑바닥 사람들의 저항은 왜 종교의 형태를 취했을까?

3.0 버전 운영체제가 세속적인 저항의 통로를 모두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유교 이념은 정치 질서를 도덕으로 만들었다. 군신과 부자의 관계는 하늘과 땅의 당연한 이치이고, 저항은 불충과 불효가 되었다. 이 인코딩은 평상시에 세속적인 저항 의식을 효과적으로 억눌렀다. 기본적인 유학의 가르침을 받은 농민은 세속적인 정치 언어로 자기 저항을 정당화하기 어려웠다. 유학은 저항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그 인코딩을 우회하는 통로를 열었다.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 나는 군주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권위, 곧 하늘 또는 누런 하늘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명은 이미 옮겨 갔다. 옛 하늘인 창천, 곧 한나라는 죽었고 새 하늘인 황천, 곧 태평도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이것은 반란이 아니라 천명이 향하는 바다.

종교의 언어는 저항을 새로 인코딩했다. ‘불충하고 불효한 반란’을 ‘천명에 순응하는 혁명’으로 바꾸었다. 인코딩의 층위가 더 높았다. 천명은 군신 윤리보다 위에 있으므로, 천명의 변화로 군신 관계를 뒤엎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황건 봉기는 농민의 가난, 분노, 절망이라는 밑바닥의 잔여항이 세속적인 분출 통로를 완전히 봉쇄당한 뒤 찾아낸 대체 통로였다. 유교 이념은 세속의 길을 막았다. “조정이 나를 부당하게 대하므로 저항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종교는 세속을 넘어서는 길을 열었다. “천명이 바뀌었으므로 저항한다”는 말은 할 수 있었다.

이 양상은 그 뒤에도 거듭 나타났다. 후한에는 태평도와 오두미도가 있었다. 원 말에는 홍건군과 연결된 백련교와 미륵교가 있었고, 명 말에는 문향교가 있었다. 청대에는 백련교와 태평천국이 있었다. 밑바닥의 저항이 종교의 형태를 띨 때마다 같은 사실을 보여 준다. 공식 이념은 세속적인 저항의 통로를 막는 동시에, 저항을 더 통제하기 어려운 종교의 차원으로 밀어 넣었다. 1층 문을 막아 놓으면 사람은 2층 창문으로 뛰어나간다.

황건 봉기 자체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1년도 되지 않아 주력이 격파되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치명적이었다. 봉기를 진압하려고 조정은 지방 호족과 주·군의 장관들이 자체적으로 군대를 모집하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권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보낸 셈이었다. 한번 내려보낸 군사권은 다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동탁, 조조, 원소, 유표, 손견 같은 각지의 군벌이 이 권력 공백 속에서 일어섰다.

후한을 무너뜨린 것은 황건 봉기가 아니었다. 황건 봉기에 맞서려고 후한 스스로 풀어 놓은 군사력이 후한을 해체했다. 병을 고치는 약이 치명적인 독으로 바뀌었다.

6. 후한의 사인 — 완전한 부검 보고서

후한의 멸망은 어느 한 요인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잔여항이 동시에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였다. 완전한 부검 보고서를 써 볼 수 있다.

직접 사인: 군벌의 할거로 중앙의 권위가 무너졌다.

동탁이 수도에 들어온 189년 이후 중앙정부는 이름만 남았다. 그 뒤 조비가 한나라를 대신한 220년까지 30년은 기나긴 죽음의 과정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있었지만 이미 꼭두각시였다. 권력은 각지의 군벌에게 흩어졌다.

간접 사인 하나: 외척과 환관의 교대가 관료 조직의 질을 떨어뜨렸다.

반복되는 정치적 숙청은 유능한 사람들을 탈락시키고 관료 조직을 범재와 기회주의자로 채웠다. 황건 봉기처럼 시스템이 위기에 대응해야 할 때가 되자, 효과적으로 대처할 행정 능력이 이미 부족했다.

간접 사인 둘: 당고의 화가 시스템의 자기 복구 능력을 도려냈다.

유생 집단의 관직 진출이 막힌 뒤 시스템은 문제를 발견하고 보고할 능력을 잃었다. 문제는 계속 쌓였지만 처리되지 않았고,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간접 사인 셋: 호족의 부상이 중앙의 실질적인 지방 통제력을 껍데기로 만들었다.

호족의 장원 경제, 사병, 인재를 독점하는 인맥망은 지방 사회를 사실상 중앙에서 독립시켰다. 중앙의 권위가 무너졌을 때 지방에는 그것을 다시 끌어당길 구심력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갈가리 찢는 원심력이 작용했다.

근본 사인: 하나의 노드에 의존하는 3.0 버전 운영체제의 구조.

위의 모든 문제에는 공통된 뿌리가 있다. 전체 시스템의 작동이 황제 한 사람이라는 단일 노드에 달려 있었다. 어린 황제 → 외척 집권 → 환관의 반격 → 관료 조직의 열화 → 자기 복구 능력 상실 → 밑바닥의 저항 → 군사권의 지방 이양 → 군벌 할거 → 중앙 붕괴. 이 인과 사슬의 출발점은 ‘황제가 어리다’는, 시스템이 통제할 수 없는 우연한 사건이었다.

우연한 사건 하나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연쇄 붕괴가 시작되는 시스템은 좋은 시스템이 아니다. 그러나 3.0 버전에는 이 핵심 노드를 뒷받침할 여분의 장치가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섭정의 관행은 있었지만 섭정 제도는 없었다. 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모였으니 권력분립도 없었다. 혈통으로 계승하고 적장자를 우선하며 능력을 가리지 않았으니, 최고 권력자를 뽑는 독립적인 장치도 없었다.

이 근본적인 결함은 후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3.0 버전이 설치될 때마다 존재했다. 전한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한 말기에도 외척의 정치 개입은 핵심 요인이었다. 다만 전한 황제들은 평균 재위 기간이 더 길고 평균 즉위 연령도 더 높았기에, 후한처럼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지는 않았다. 후한의 불행은 어린 황제가 줄줄이 등장해 이 결함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어린 황제가 잇달아 나온 일이 전적으로 우연인 것도 아니다. 후한 후기의 외척과 환관은 모두 나이 어린 황위 계승자를 고르는 쪽으로 기울었다. 어린 황제가 통제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계승자 선정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외척과 환관의 권력 일부였다. 단일 노드 구조가 어린 황제의 위험을 낳는다는 시스템의 결함을, 그 결함을 이용하는 외척과 환관이 적극적으로 키웠다. 양의 되먹임이었다. 결함이 그 결함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람들이 다시 결함을 확대했다.

7. 후한이 주기 법칙에 남긴 것

후한의 200년은 3.0 버전 운영체제가 처음으로 완주한 한 주기였다. 여기에서 오래도록 유효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잔여항은 제도화된다.

호족이 변화해 온 과정이 보여 주듯 잔여항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자란다. 작은 것이 커지고, 느슨한 것이 촘촘해지고, 비공식적인 것이 공식적인 것으로 바뀐다. 시스템이 막 세워졌을 때 보이던 작은 잔여항, 이를테면 은퇴한 공신 몇 명의 장원이 100년 뒤에는 시스템을 삼키는 괴물이 될 수 있다. 지방 사회 전체를 장악한 호족의 인맥망으로 자라는 것이다.

잔여항의 제도화는 구축이 늙어 가는 핵심 기제다. 구축 자체의 설계가 나빠진 것이 아니다. 3.0 버전의 틀은 200년 동안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 틀 안에서 잔여항이 끊임없이 쌓이고 굳어져, 끝내 틀의 속을 비워 버린 것이다.

둘째, 구축은 자기 복구 장치를 스스로 도려낼 수 있다.

당고의 화가 보여 준 것은 이것이다. 구축에 자기 복구 능력, 곧 유생 집단의 비판 기능이 있어도, 구축 내부의 권력투쟁이 그 능력 자체를 없애 버릴 수 있다. 시스템은 자신의 의사를 죽일 수 있다.

맥이 빠지는 발견이다. 시스템에 자기 복구 장치를 설계해 넣더라도 언젠가 시스템이 스스로 그 장치를 꺼 버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시스템의 면역체계가 시스템 내부의 ‘자가면역질환’에 파괴될 수 있다.

셋째, 분출 통로 하나를 막으면 잔여항은 다른 통로를 찾는다.

황건 봉기가 보여 준 것은 이것이다. 이념으로 세속적인 저항의 통로를 막으면 저항은 종교의 옷을 입고 다른 차원에서 솟아 나온다. 잔여항은 물이다. 한 길을 막으면 다른 길을 찾는다. 모든 길을 막으면 땅속에서 스며 나온다.

넷째, 병을 고치는 약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황건 봉기에 맞서려고 지방에 넘긴 군사권은 끝내 중앙의 권위 자체를 파괴했다. 이 교훈은 뒤에도 거듭 나타났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뒤 당은 반란을 진압하려고 번진의 권한을 확대했지만, 그 결과 번진이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명이 몽골에 맞서려고 만든 변경군 체계는 결국 이자성 봉기군의 병력 공급원이 되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 힘 자체가 새로운 문제가 될 수 있다. 힘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달리 선택할 길이 없을 때도 있다. 다만 힘을 쓰는 사람은 힘이 한번 풀려나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 약을 쓰기 전에 부작용이 병보다 더 치명적인지 가늠해야 한다.

다섯째, 구축의 붕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후한은 어느 하루에 무너지지 않았다. 화제가 즉위한 88년부터 조비가 한나라를 대신한 220년까지, 130여 년에 걸쳐 서서히 해체되었다. 그 과정에는 회복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등수 태후가 정사를 바르게 이끌던 시기, 순제 초기의 짧은 안정기가 그랬다. 그러나 그 회복은 해체가 잠깐 멎은 것이지 흐름이 뒤집힌 것은 아니었다.

붕괴가 과정이라는 말은, 그 모든 단계마다 아직 시스템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속였던 것은 아니다. 그 단계의 시스템은 실제로 완전히 고장 난 상태가 아니었다. 다만 이미 쌓인 잔여항의 총량을 과소평가했다. 겉으로는 시스템이 여전히 돌아가는 듯해도, 밑바닥의 잔여항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쌓여 있었다.

언제 ‘아직 고칠 수 있다’에서 ‘이제 돌이킬 수 없다’로 넘어가는가? 그 당시에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임계점은 일이 끝난 뒤에야 또렷해진다. 이것이 구축이 늙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잔혹한 대목이다. 자신이 임계점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끝내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너무 늦어 버릴 때까지는.

다음 편은 삼국이다. 그 자체로 비교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례다. 후한의 붕괴가 남긴 핵심 잔여항은 호족이었다. 네 주역은 이 잔여항을 네 가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다. 조조는 억눌렀고, 유비는 우회했으며, 손권은 협상했고, 사마씨 가문은 끌어안았다. 네 가지 방식에는 네 가지 대가가 따랐다. 마지막에 이긴 것은 끌어안는 방안이었다. 사마씨는 호족을 잔여항에서 통치의 기반으로 바꾸고, 그 계급과 공동으로 다스리는 대가로 천하를 얻었다. 가장 영리해 보이지만 대가는 가장 컸다. 잔여항과 한 몸이 되면 더는 그것을 견제하고 균형을 잡을 여지가 없어진다. 그 대가는 서진의 팔왕의 난, 그리고 뒤이어 북방의 여러 민족이 중원에 들어와 지배하면서 벌어진 대분열 속에서 전액 치러졌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