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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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09 / 25

제9편: 한 무제, 잔여항을 구축 속에 짜 넣다

기원전 141년, 열여섯 살 유철이 황위에 올랐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70년 동안 백성이 쉬며 살림을 회복한 끝에 쌓인 두툼한 밑천이었다. 국고에는 돈이 넘쳤다. “수도에 쌓인 돈이 엄청나게 많아 돈꿰미가 썩으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동전이 얼마나 많았던지 꿰어 놓은 끈이 썩어 버려 셀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곡식 창고도 가득했다. “태창에는 묵은 곡식 위로 또 묵은 곡식이…

기원전 141년, 열여섯 살 유철이 황위에 올랐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70년 동안 백성이 쉬며 살림을 회복한 끝에 쌓인 두툼한 밑천이었다. 국고에는 돈이 넘쳤다. “수도에 쌓인 돈이 엄청나게 많아 돈꿰미가 썩으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동전이 얼마나 많았던지 꿰어 놓은 끈이 썩어 버려 셀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곡식 창고도 가득했다. “태창에는 묵은 곡식 위로 또 묵은 곡식이 쌓여, 창고 밖까지 넘쳐 나와 드러난 채 썩어 먹을 수 없었다.” 창고에 다 넣지도 못해 바깥에 쌓아 두었다가 썩힐 만큼 곡식이 많았다. 인구는 수천만 명으로 회복되었고 사회 질서도 안정되어 있었다. 변경에는 흉노의 압박이 있었지만 나라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 편에서 말했듯, 문제(文帝)가 모아 놓은 밑천은 무제가 쓰게 될 밑천이었다. 이제 돈 쓸 사람이 등장했다.

그러나 무제는 돈만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궁전을 짓고, 미녀를 뽑고, 위세를 과시하는 데 돈이나 썼다면 그저 흔한 탕아 황제였을 것이다. 역사에는 그런 황제가 차고 넘친다. 무제가 한 일은 재산을 탕진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었다. 그는 한 제국의 운영체제를 새로 설계하려 했다.

문제와 경제(景帝) 시대의 운영체제는 황로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밀도는 낮게, 개입은 적게, 잔여항에는 숨 쉴 공간을 주는 방식이었다. 무제는 이를 밀도 높게, 깊이 개입하며, 잔여항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하려 했다. 그 핵심 도구가 유학이었다.

1. 유학만을 높이다: 사상을 고른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발명하다

건원 원년, 기원전 140년,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가를 물리치고 오직 유학만을 높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흔히 이 일을 사상의 선택으로 이해한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 여러 학파 가운데 무제가 유가를 골랐다는 것이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너무 얕다. 유학을 유일한 정통으로 세운 일의 진짜 의미는 어느 학파를 골랐느냐에 있지 않다. 이데올로기로 잔여항을 코드화한다는, 전혀 새로운 권력 기술을 발명했다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로 잔여항을 코드화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진의 해법은 폭력으로 잔여항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법이 복종을 명령하고,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 효과는 직접적이지만 비용이 너무 크다. 게다가 잔여항은 사라지지 않고 쌓이기만 한다. 한계까지 쌓이면 폭발한다.

황로의 해법은 잔여항에 공간을 내주는 것이었다. 간섭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효과는 온건하고 비용은 낮다. 그러나 잔여항은 통제되지 않는다. 오래 내버려 두면 자라나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 오초칠국의 난이 그 예다.

유학만을 높이는 해법은 제3의 길이었다. 잔여항을 하나의 가치 체계 안에 코드로 짜 넣어, 사람들이 스스로 제약을 받아들이게 한다. 진처럼 형법으로 복종을 강요할 필요도 없고, 황로처럼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둘 필요도 없다.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마음속에서부터 믿게 하면 된다. 군신과 부자의 윤리적 질서는 하늘과 땅의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에. 충성과 효도, 절개와 의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근본이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것은 곧 하늘의 도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연성 통제 2.0이다.

주공의 예악도 연성 통제였다. 이를 1.0이라 하자. 다만 예악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는 귀족층에 한정되었다. 서민은 예를 배우지 않았고 예도 그들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유학 독존의 야심은 연성 통제의 범위를 귀족에서 사회 전체로 넓히는 데 있었다. 황제부터 농민까지 모두가 유가 윤리의 틀 안에서 살아야 했다. 황제는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애로워야 하고, 아들은 효도해야 했다. 사회의 모든 역할에 일정한 행동 규범과 도덕적 기대가 부여되었다.

이 시스템의 절묘한 점은 위와 아래를 동시에 제약한다는 데 있다.

진의 제도는 아래만 제약했다. 백성은 법에 복종해야 했지만, 위에 있는 황제 자신은 법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일방향 제약 시스템이었다. 일방향 제약의 문제는 제약받는 쪽에 견제 수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억압은 시스템이 폭발할 때까지 끝없이 강해질 수 있다.

유학은 이론상 쌍방향 제약이었다.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해야 하지만 군주도 신하와 백성을 어질게 대해야 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지만 아버지도 아들을 사랑해야 했다. 적어도 이론상 관계는 대칭이었다. “군주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써 군주를 섬긴다.” 예가 먼저이고 충이 그다음이다. 군주가 무례하다면, 곧 포악하고 방탕하며 어질지 못하다면, 신하에게도 충성을 유보할 이유가 생긴다.

현실에서 이 쌍방향 제약이 진정으로 대등했던 적은 없다. 황제의 권력은 어느 신하보다도 훨씬 컸고, ‘인’의 기준도 황제 자신이 해석했다. 신하에게는 어질지 못한 황제를 처벌할 실질적 수단이 없었다. 그래도 명목상의 쌍방향 제약이나마 진의 순수한 일방향 제약보다는 완충 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 어질지 못한 황제라면 적어도 여론의 압박, 사관의 기록, 유생의 간쟁은 감수해야 했다. 이런 압력이 작정하고 폭정을 휘두르는 황제를 막지는 못한다. 그러나 보통 수준의 황제가 ‘조금 지나친’ 상태에서 ‘완전히 미쳐 날뛰는’ 상태로 미끄러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조금이나마 더해진 제약이다. 완전한 제약은 아니어도, 조금 있는 편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2. 동중서, 잔여항을 코드화한 사람

유학 독존의 이론적 토대는 주로 동중서에게서 나왔다. 그의 공헌은 새로운 사상을 발명한 데 있지 않다. 핵심 재료는 모두 진 이전의 유가에서 가져왔다. 그 재료를 다시 코드화하여 정치권력과 접속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체계로 만든 것이 그의 공헌이었다.

동중서는 몇 가지 결정적인 일을 했다.

첫째, 천인감응이다.

동중서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한다고 보았다. 천자의 행동은 하늘의 현상에 영향을 준다. 천자에게 덕이 있으면 바람과 비가 때에 맞게 오고, 덕이 없으면 재앙과 괴이한 현상이 잦아진다. 지진, 일식, 홍수와 가뭄, 메뚜기 떼는 모두 하늘이 천자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이 이론의 정치적 기능은 대단히 중요했다. 황권을 제약할 초월적 권위, 곧 하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최고 권력자였다. 지상의 어떤 힘도 그에게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말할 수 있었다. 하늘은 재이로 불만을 드러냈고, 유생은 그 재이를 해석하여 비판을 전달했다.

천인감응은 교묘한 제도 설계였다. 황제가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큰 재이가 일어나면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는 조서, 곧 죄기조를 내려 과오를 돌아보아야 했고, 때로는 정책도 바꾸어야 했다. 강제적인 제도는 아니었다. 황제가 재이를 무시할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런 황제도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 제도는 되었다. 대부분의 황제는 대부분의 경우 이를 따랐다. 따르지 않을 때 치러야 하는 도덕적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천인감응은 본질적으로 상나라의 제사적 구축과 주나라의 천명론을 합쳐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상에서는 하늘과 인간이 왕을 통해 소통했고, 주에서는 천명이 덕을 따라 옮겨 갔다. 상의 하늘은 상의 왕하고만 이야기했다. 주의 하늘은 덕 있는 사람을 골랐다. 동중서의 하늘은 덕 없는 군주에게 경고를 보냈다. 세 버전 중 황권을 가장 강하게 제약한 것은 동중서의 버전이었다.

물론 이 제약의 실제 효력은 누가 재이를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 해석권은 유생에게 있었다. 유학을 독존한다는 것은 유가 학설에 공식 지위를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유생 집단에 정치적 기능을 주었다. 재이의 해석자이자 황권의 비판자가 된 것이다. 이 기능은 훗날 한대의 간의 제도와 2천 년 동안 이어진 ‘청의’, 곧 도덕적 공론의 전통으로 발전했다.

둘째, 삼강오상이다.

군주는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벼리가 되며,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 그리고 인·의·예·지·신이다.

삼강은 세 가지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방향을 정했다. 아래는 위에 복종한다. 오상은 누구나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기본적인 도덕적 품성을 정했다.

삼강은 질서의 도구였다. 복잡한 의례 체계였던 유가의 ‘예’를 세 개의 선명한 복종 사슬로 단순화했다. 수백 가지 예절 규정을 외울 필요가 없다. 군주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내라면 남편의 말을 들으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간단하고 명확하며 실행할 수 있다.

오상은 도덕의 도구였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도덕 기준을 제시했다. 신분이 무엇이든 인·의·예·지·신을 갖추어야 했다. 이 기준은 위와 아래를 함께 제약했다. 황제도 어질어야 하고 농민도 신의를 지켜야 했다.

삼강과 오상을 합치면 사회 전체를 덮는 윤리의 격자가 된다. 세로축은 위계질서인 삼강이고, 가로축은 도덕 기준인 오상이다. 이 격자는 모든 사람에게 좌표를 부여한다. 당신은 어느 위계에 있으며 어떤 품덕을 갖추어야 하는가.

이 격자의 기능은 무엇일까? 진의 제도 아래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던 개인의 도덕적 감각을 정치 질서 안에 코드로 짜 넣는 것이다. 진의 제도는 행동만 관리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유학은 감각을 관리했다. 무엇이 옳다고 느껴야 하고 무엇이 그르다고 느껴야 하는가. 행동은 형법으로 관리하고, 감각은 교화로 관리한다. 형법이 닿는 끝은 공포이고, 교화가 닿는 끝은 내면화다. 공포는 위협이 사라지는 순간 없어지지만 내면화된 것은 평생 갈 수 있다.

셋째, 대일통 이론이다.

동중서는 대일통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춘추』가 말하는 대일통은 천지의 변함없는 법칙이자 고금에 통하는 올바른 이치다.” 통일은 어느 제왕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천지의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분열은 비정상이고 통일이 정상이다.

이렇게 이론화되자 대일통은 사실에서 가치로 바뀌었다. ‘진이 실제로 천하를 통일했다’에서 ‘통일되어 있어야 마땅하다’로 바뀐 것이다. 사실은 바꿀 수 있다. 다시 분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분열은 도덕적 잘못이 되었다. 그 뒤 2천 년 동안 분열 정권은 모두 ‘정통이 아니다’라는 도덕적 짐을 짊어졌고, 통일을 이룬 사람은 누구나 자동으로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도덕적 이득을 얻었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대일통 이론은 진이 남긴 정치적 유산, 곧 군현제와 중앙집권을 유가의 언어로 다시 포장한 것이다. 진의 대일통은 폭력의 산물이었다. 도덕의 포장 따위 없는 벌거벗은 폭력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워서 복종했고, 두려움이 사라지면 복종하지 않았다. 동중서는 대일통에 도덕의 옷을 입혔다.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천도이기에 복종한다. 어느 황제가 포악하다고 해서 천도가 효력을 잃지는 않는다. 황제가 나쁘더라도 대일통 자체는 여전히 옳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나라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 좋은 황제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잔여항을 구축 속에 짜 넣는다’는 말의 뜻이다. 분열하려는 충동, 곧 잔여항을 없앤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억압당하면 여전히 저항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충동의 정의가 바뀌었다. 저항은 더 이상 ‘통일의 전복’을 향하지 않고 ‘황제의 교체’를 향한다. 반란은 일으켜도 된다. 그러나 목적은 그 자리에 앉는 것이어야지, 그 자리를 없애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잔여항이 방출되는 방향이 코드화된 것이다. 수직 운동, 곧 왕조 교체는 가능하다. 수평 운동, 곧 분열과 독립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코드는 그 뒤 2천 년 동안 대체로 유효했다. 중국사에서는 수없이 왕조가 바뀌었지만, 매번 사람만 바꾸고 틀은 바꾸지 않았다. 삼국, 남북조, 오대십국 같은 분열기도 있었다. 그래도 분열은 언제나 과도적 상태로 여겨졌다. 분열된 정권은 모두 자신이 정통이라 주장했고 통일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분열은 좋은 것이니 우리는 그냥 각자 살자”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정권은 하나도 없었다. 우연이 아니다. 대일통 이론으로 코드를 짜 놓은 결과다.

3. 소금과 철의 전매, 국가와 사회의 경계는 어디인가

무제의 구축은 이데올로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경제도 깊숙이 재구축했다.

핵심 조치는 염철전매와 균수·평준이었다. 국가는 소금과 철, 술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했다. 각지에는 균수관을 두어 싼 곳에서 사서 비싼 곳에 팔게 했다. 물가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고 수입도 올리는 방식이었다.

직접적인 동기는 재정 수요였다. 북쪽의 흉노 공격, 남쪽의 백월 정벌, 각종 건설 사업에는 막대한 돈이 들었다. 문제와 경제가 쌓아 둔 밑천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조치들의 구조적 의미는 재정을 훨씬 넘어섰다.

염철전매는 경제활동 가운데 이익이 가장 많이 나는 부분을 민간에서 국가로 가져왔다. 국가의 사회 통제가 정치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뻗어 간 것이다. 진의 통제는 주로 행정과 군사에 집중되었다. 백성을 호적에 편입해 국가가 직접 다스리는 편호제민, 그리고 연좌제였다. 무제는 여기에 경제 통제를 더했다. 통제의 차원이 하나 늘었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민간 상공업도 잔여항이다.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부를 낳고, 그 부는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권력을 낳는다. 문제와 경제 시대에는 민간 상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여 촉 땅의 탁씨나 완 땅의 공씨 같은 거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왕과 같은 즐거움을 누릴” 만큼 부유했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중앙집권에 잠재적 위협이었다.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기에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도, 국가의 통제를 온전히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제는 염철전매로 이 잔여항을 부분적으로 흡수했다. 민간 상공업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가장 돈이 되는 업종은 국가가 가져갔다. 민간의 부호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경제적 활력은 국가가 허용한 범위에 묶였다.

그러나 염철전매 자체가 새로운 잔여항을 낳았다. 관영 경제의 효율 문제였다. 관료에게는 이윤을 추구할 동기가 없었고, 관리는 느슨했으며, 제품의 질은 낮고 가격은 부풀려졌다. 소제 때 열린 염철회의에서 현량과 문학으로 천거된 인사들은 소금과 철의 관영을 맹렬히 비판했다. 관에서 만든 철제품은 질이 나빠 농민의 농기구가 며칠 못 가 망가지고, 관에서 파는 소금은 비싸서 가난한 사람이 먹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환관(桓寬)의 『염철론』에 기록되어 있다.

이 논쟁의 본질은 ‘소금과 철을 관영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국가와 사회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법가의 답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 진이 이 답을 실행했다.

도가의 답은 경계를 최대한 멀리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가의 간섭은 적을수록 좋다. 문제와 경제의 정치는 이 답을 부분적으로 실행했다.

유가의 답은 좀 모호했다. 원칙상 유가는 나라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데 반대했다. “나라는 이익을 이익으로 삼지 않고 의를 이익으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 운영에서는 국가에도 재정 수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유가가 긋는 경계는 ‘의’였다. 의에 맞는 국가 개입은 받아들일 수 있고, 의에 어긋나는 개입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문제는 그 ‘의’를 해석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염철전매는 2천 년 동안 끝나지 않은 논쟁의 문을 열었다. 국가는 경제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모든 왕조가 이 문제를 두고 흔들렸다. 염철전매나 차와 말의 전매로 조일 때도 있었고, 일부 왕조가 몇몇 전매권을 풀어 주듯 느슨하게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균형점은 끝내 찾지 못했다.

똑똑한 사람이 없어서 균형점을 못 찾은 것이 아니다. 잔여항 보존 때문이다.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면 관영 부문의 비효율이라는 잔여항이 생기고, 경제를 풀어 주면 민간 자본의 비대화라는 잔여항이 생긴다. 한쪽이 줄면 다른 쪽이 커진다. 하나를 누르면 다른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4. 북으로 흉노를 치다: 구축을 바깥으로 투사하다

무제는 54년간 재위했다. 그동안 대외전쟁이 거의 끊이지 않았다. 가장 큰 상대는 흉노였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무제의 대흉노 전쟁에는 흔히 놓치는 구조적 기능이 하나 있다. 진의 제도가 남긴 전쟁 기계에 새로운 소모의 출구를 찾아 준 것이다.

지난 편에서 살펴보았듯 진의 구축 형태는 끊임없이 먹이를 주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군공작제는 승진 기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전쟁을 필요로 했고, 전면 동원 체제는 계속 돌아가기 위해 외부의 목표를 필요로 했다. 진은 통일 뒤 외부 목표를 잃었다. 시스템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백성의 힘을 소모하며 스스로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끝내 무너졌다.

한 초기 70년의 황로 무위 정치는 이 전쟁 기계의 전원을 잠시 껐다. 그러나 기계를 해체하지는 않았다. 군현제의 행정 틀도 남아 있었고, 경졸·정졸·수졸로 이루어진 세 갈래 복무 체계인 징병제도 남아 있었다. 국가가 개별 가구를 직접 상대하는 편호제민 구조도 그대로였다. 기계는 공회전하고 있었을 뿐, 언제라도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무제는 그 기계를 돌렸다. 북으로는 흉노를 치고, 남으로는 백월을 정벌하고, 동으로는 고조선을 평정하고, 서로는 서역으로 길을 냈다. 이 군사행동들은 문제와 경제 시대에 축적된 사회적 잉여를 빠르게 군사력으로 바꾸어 외부로 투사했다. 시스템의 관점에서는 진시황이 장성을 쌓고 백월을 정벌한 것과 같은 일이었다. 내부에서 남아도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내보내, 시스템이 자기 안을 먹어 치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차이는 무제에게 시황제보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는 점이다. 유학이 제공한 정당성의 포장이었다. 시황제의 대공사는 벌거벗은 폭력적 징발이었다. 무제의 대외전쟁은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강토를 넓힌다’, ‘화하 문명을 선양한다’는 말로 포장되었다. 이런 언어는 전쟁의 정당성을 높이고 사회가 감내할 의지를 키웠다. 똑같이 백성의 힘을 소모해도 옷을 입었느냐 벗었느냐의 차이는 엄청났다.

그러나 흉노 전쟁의 소모는 끝내 사회의 감당 능력을 넘어섰다. 무제 말년에는 “천하가 피폐해지고 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인구는 전성기의 약 5천만 명에서 어쩌면 3천만 명도 안 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국고는 바닥났고 사회 갈등은 격화되었으며 곳곳에서 유민과 도적이 나타났다.

무제는 생애 마지막 몇 해에 중국의 황제가 거의 해 본 적 없는 일을 했다. 자신이 틀렸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정화 4년, 기원전 89년, 그는 유명한 윤대조를 내렸다. 죄기조라고도 불리는 이 조서에서 대외전쟁을 멈추고 휴양과 회복으로 방향을 돌리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힘쓸 일은 가혹함과 폭정을 금하고,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는 일을 막으며, 근본인 농업에 힘쓰는 것이다.” 당장 해야 할 일은 가혹한 정치를 그만두고 자의적인 징세를 멈추며, 다시 농업에 힘을 쏟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윤대조의 중요성은 구체적인 정책 내용에 있지 않다. 방향만 보면 문제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재능과 식견이 뛰어나고 권력이 무한한 제왕이라도 사회를 무한정 소모할 수는 없다. 잔여항은 되받아친다. 사회의 감내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으면 진처럼 무너지거나, 무제처럼 방향을 되돌려야 한다.

무제는 붕괴 대신 되돌림을 택했다. 그와 진시황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다. 시황제는 죽을 때까지 강도를 높였고, 이미 되돌릴 수 없어진 시스템을 이세황제에게 남겼다. 무제는 생의 끝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은 그 덕분에 100년 넘게 더 존속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개인의 기질도 작용했을 수 있다. 말년에 아들을 잃은 고통이 무제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유학이 무제에게 자기 성찰의 도구를 주었다는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천인감응과 죄기조의 전통이다. 이 도구는 정당성을 잃지 않고도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틀을 주었다. 시황제에게는 그런 도구가 없었다. 법가 체계에는 ‘황제가 잘못을 인정한다’는 선택지가 없다. 황제는 언제나 옳다. 법을 정하는 사람이 황제이고, 황제는 법이 인격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면 법을 부정하게 되고, 법을 부정하면 시스템 전체를 부정하게 된다.

유학은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틀을 황제에게 주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내 행동이지 내 자리가 아니다. 이 자리는 여전히 천명이 내게 준 것이다. 행동을 고치고도 계속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천명이 다른 이에게 옮겨 간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경고했을 뿐이다. 나는 그 경고를 받아들여 진로를 바꾼다.

이 틀은 겉으로 보면 황권을 제약했다. 황제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황권을 보호하기도 했다. 잘못을 인정한 뒤에도 황제의 정당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제약과 보호는 동전의 양면이다. 유학 독존이 황권에 해 준 일은 권력을 줄이거나 키우는 것이 아니라 탄력 장치를 달아 주는 것이었다. 부드러워야 할 때는 부드러워지고, 강해야 할 때는 강해질 수 있게 했다. 진처럼 죽을 때까지 뻣뻣하기만 하다가 끝나지 않도록.

5. 유가와 법가의 합류, 진짜 운영체제

후대에는 한나라를 두고 흔히 ‘외유내법’ 혹은 ‘유표법리’라고 한다. 겉은 유가이고 속은 법가라는 뜻이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충분히 정확하지는 않다. 더 정확한 표현은 유법합류다.

무제 이후 한의 정치는 유가를 겉감으로, 법가를 안감으로 삼았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둘을 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 순수한 유가도 순수한 법가도 아닌 혼합 운영체제였다.

이 혼합 시스템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법가는 행정의 골격을 제공했다. 군현제, 관료 선발, 형법 체계, 호적 제도, 조세 제도다. 관료 선발은 한의 찰거에서 후대 왕조의 과거에 이르기까지 형식상 점점 더 유가적으로 바뀌었지만, 관료제 자체는 법가의 유산이었다. 이것들은 시스템의 딱딱한 부분이며, 시스템이 돌아가게 하는 물질적 토대였다.

유가는 정당성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제공했다. 천명, 인정, 덕치, 강상 윤리다. 이것들은 시스템의 부드러운 부분이며, 사회가 그 시스템을 받아들이게 하는 문화적 토대였다.

법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맡고 유가는 ‘왜 해야 하는가’를 맡았다. 법가는 작동의 문제에, 유가는 의미의 문제에 답했다. 의미 없는 작동은 폭정이다. 진이 그랬다. 작동 없는 의미는 공허한 말잔치다. 순수한 유가가 그랬다. 둘이 합쳐져야 돌아가는 시스템이 된다.

잔여항 보존의 관점에서 보면 유법합류는 고도의 잔여항 관리 전략이다. 순수 법가 시스템의 잔여항은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무시된다’는 것이었다. 진에서는 이 잔여항이 폭력적 반발로 터져 나왔다. 순수 유가 시스템의 잔여항은 ‘질서를 강제로 집행할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동주에서는 이 잔여항이 예악의 붕괴로 터져 나왔다. 유법합류의 전략은 유가로 법가의 잔여항을 관리하고, 법가로 유가의 잔여항을 관리하는 것이다. 차가운 법률에는 온정의 옷을 입히고, 힘없는 윤리에는 강제력이라는 뒷배를 붙인다.

두 잔여항이 서로를 견제한다. 잔여항을 없앤 것이 아니라 두 잔여항이 방출되는 방향을 서로 상쇄시킨 것이다.

이 전략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유법합류라는 정치 운영체제는 무제 때 자리 잡은 뒤 여러 변형을 거치며 2천 년 동안 돌아갔다. 후대의 왕조들은 모두 이 토대 위에서 설정값을 조정했다. 송처럼 유가 쪽으로 기울기도 했고, 명 초기처럼 법가 쪽으로 기울기도 했으며, 당 태종 때처럼 양쪽 모두 강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한 왕조 가운데 순수 법가나 순수 유가로 돌아가려 한 왕조는 없었다. 순수 법가는 너무 잘 부러진다. 진이 보여 주었다. 순수 유가는 너무 무르다. 동주가 보여 주었다. 혼합만이 지속 가능한 선택지였다.

이는 중국 정치의 근본적인 발견이었다. 중요성은 주공이 예를 만든 일에 뒤지지 않는다. 주공은 개인의 자질을 제도로 대체하는 길을 발견했다. 실천이 온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무제 시대에는 무르기만 하거나 강하기만 한 체제 대신 부드러움과 강함을 결합하는 길을 발견했다. 두 발견이 겹쳐져 이후 중국 정치의 기본 틀을 정했다.

6. 혹리(酷吏)와 순리(循吏), 시스템의 두 얼굴

한의 관료제에는 성격이 판이한 두 부류의 관리가 있었다.

혹리로는 장탕, 두주, 의종, 왕온서가 있었다. 이들은 엄격한 법과 가혹한 형벌로 이름을 떨쳤다. 법을 집행할 때 사사로운 정이 없었다. 달리 말하면 잔혹하고 무정했다. 호족을 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무제의 집권 정책을 밀어붙이는 철권이 되었다. 장탕이 법률 개정을 주도하면서 조문은 갈수록 촘촘해지고 형벌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무제 이후의 한나라에서 순리로 이름난 인물로는 황패, 공수, 소신신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덕으로 다스리고 교화하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했으며, 수리시설을 정비하고 형벌과 옥사를 줄였다. 황패는 영천태수로 재임하면서 혼란스럽던 고장을 전국의 모범 군으로 만들었다.

혹리와 순리는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았다. 같은 시스템의 두 얼굴이었다. 이 시스템에는 둘 다 필요했다. 호족과 정적에게는 법가의 얼굴인 혹리를 내세우고, 일반 백성에게는 유가의 얼굴인 순리를 내세웠다. 시스템은 상대에 따라 얼굴을 달리했다. 위선이 아니라 기능의 분화였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보면 혹리가 처리한 것은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이익집단’이라는 잔여항이었다. 호족, 제후왕의 잔존 세력, 협조하지 않는 옛 귀족들이다. 순리가 처리한 것은 ‘강도 높은 국가 동원으로 생겨난 사회의 피로’라는 잔여항이었다. 민간의 불만, 피폐해진 경제, 빠져나가는 인구였다.

두 잔여항에는 서로 다른 처리 방식이 필요하다. 혹리로 사회의 피로를 다스리려 하면, 더 심한 억압이 피로를 분노로 바꾼다. 순리로 호족을 다스리려 하면, 온건한 교화가 호족을 더욱 거리낌 없이 날뛰게 한다. 도구는 문제에 맞아야 한다.

그러나 기능의 분화에는 위험이 숨어 있다. 혹리와 순리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호족을 다룰 때 혹리였던 관리는 백성을 다룰 때도 혹리의 습관을 버리지 못할 수 있다. 폭력은 중독성이 있고 가혹한 형벌은 번져 나가기 때문이다. 장탕은 호족을 공격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결국 수많은 억울한 옥사를 만들었고 무고한 사람까지 휘말리게 했다. 도구가 사용자를 물어뜯은 것이다.

후대 왕조도 이 문제와 거듭 마주쳤다. 명의 금의위와 동창은 애초 권세가를 감시하려고 설치했지만, 끝내 온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억압 기관의 기능 범위는 늘 넓어지는 쪽으로 기운다. 범위를 넓히면 기관 자체의 권력과 자원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미 폭력의 도구를 손에 쥔 기관을 제한하려 들 유인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것이 법가의 도구에 내재한 잔여항이다. 폭력은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모른다. 시스템에 칼을 쥐여 주고 누구를 베라고 지시했다고 하자. 지목한 사람을 다 벤 뒤에도 그 칼은 저절로 내려놓아지지 않는다. 시스템은 새로 벨 사람을 찾는다. 칼 그 자체가 쓰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7. 무고의 화, 권력이 이르는 마지막 고독

무제 말년인 기원전 91년, 무고(巫蠱)의 화가 일어났다.

사건의 경위는 극도로 복잡하지만 핵심 구조는 간단하다. 무제는 누군가 주술로 자신을 저주한다고 의심했다. 혹리 강충은 이를 틈타 대대적인 정치 숙청을 벌였다. 태자 유거는 모함을 받고 자신을 지키려고 군사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후 위자부도 자살했다.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은 수만 명이었다.

무고의 화는 보통 무제가 늙어 판단이 흐려진 탓, 그리고 혹리가 이를 이용한 탓으로 돌려진다. 하지만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사건은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권력이 극도로 집중되면 끝내 신뢰가 극도로 희소해진다는 것이다.

무제는 54년간 재위했다. 그는 제후왕을 공격하고 공신 집단을 숙청했다. 승상은 자주 바뀌었고, 그중 여럿이 처형당하거나 자살했다. 혹리로 관료 체계를 통제하고 염철전매로 경제의 생명줄을 통제했다. 권력은 한 사람의 손에 고도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권력 집중에는 부작용이 있다.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갈수록 알 수 없게 된다. 자신을 위협할 만한 사람은 모두 쳐냈다. 그런데 자신을 지지해 줄 만한 사람도 모두 쳐냈다. 고압적인 환경에서는 ‘위협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있음’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유능한 신하는 당신을 도울 능력도 있고 당신을 위협할 능력도 있다.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끝내 구분할 수 없게 되면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무고의 화는 이 신뢰 붕괴가 극단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무제는 자신의 태자조차 믿지 못했다. 태자가 무기를 들고 자신을 지키려 한 행동을 반란으로 읽었다. 부자 사이의 의심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번졌다.

이것이 고밀도 구축의 궁극적 잔여항이다. 운영자의 인지 붕괴다. 모든 것을 통제한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요구 자체에 짓눌렸다. 그의 정보 통로는 혹리가 장악했다. 모든 사람을 대신 감시해 주리라 믿고 맡겼기 때문이다. 판단력은 공포에 휘었다. 권력이 클수록 그것을 잃을 두려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권력관계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부자 관계마저 정치적 수싸움이 되었다.

무고의 화는 무제판 ‘반경의 딜레마’였다. 아니, 그보다 더 깊었다. 반경이 마주한 것은 귀족이 비대해진 외부의 문제였다. 무제가 마주한 것은 권력이 극한까지 집중된 뒤 운영자 자신에게 찾아온 심리적 붕괴였다. 내부의 문제였다. 어떤 제도 설계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문제는 운영자 자신에게 있었고, 그 운영자가 곧 제도의 최상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진시황도 비슷한 고독과 의심을 겪었을지 모른다. 말년에 곳곳을 순행하고 불로장생의 약을 찾은 행동에는 강한 불안과 집착이 묻어난다. 그러나 시황제에게는 유학의 자기 성찰 틀이 없었기에 그 의심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무제에게는 무고의 화 뒤 잠깐 정신이 맑아진 순간이 있었다. 윤대조는 그 순간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맑아진 정신은 너무 늦게 돌아왔다. 태자는 이미 죽었다. 위황후도 이미 죽었다. 수만 명이 이미 죽었다.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무제가 마주한 조정은 자신이 속을 파내 버린 조정이었다. 가장 유능한 사람들은 이미 죽임을 당했거나, 겁에 질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권력의 극단적 집중은 끝내 권력의 극단적 고독을 생산한다. 고독은 권력이 집중된 구축의 궁극적 잔여항이다. 권력의 꼭대기에 함께 서 줄 사람은 없다. 곁에 선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모든 위협을 없애면서 모든 동행도 없앴다.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이 잔여항은 이후 중국사에서 거듭 나타났다. 당 태종 말년의 의심과 시기, 명 태조의 대숙청, 옹정제의 비밀 상주문을 활용한 정치가 낳은 만연한 상호 의심이 그 예다. 강력한 제왕들의 말년은 저마다 이 잔여항의 다른 버전이었다.

8. 유산: 2천 년을 돌아간 운영체제

무제가 후대에 남긴 것은 개별 정책이 아니었다. 염철전매, 대외 팽창, 혹리 정치 등 그의 많은 정책은 사후에 조정되거나 폐지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운영체제의 틀이었다.

이 틀의 핵심 설정값은 다음과 같다.

정치에서는 군현제와 중앙집권. 진의 유산이지만, 한 초기 70년의 연착륙을 거치며 사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이데올로기에서는 유학 독존. 동중서의 설계로, 중앙집권에 도덕적 정당성과 탄력적인 제약 장치를 제공했다.

경제에서는 핵심 자원의 국가 통제와 일반 경제활동의 민간 경영. 염철전매가 정한 경계였다. 이후 2천 년 동안 이 경계에서 조정은 거듭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사회 통제에서는 유법합류. 교화·윤리·여론이라는 연성 통제와 법률·형벌·관료라는 경성 통제를 함께 쓴다.

이 운영체제는 완벽하지 않았다. 앞에서 여러 잔여항을 살펴보았다. 그래도 충분히 괜찮았다. 여기서 ‘충분히 괜찮다’는 말은 잔여항이 방출되는 속도보다 시스템이 스스로 복구하는 속도가 빨라 오랫동안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진의 시스템은 잔여항이 너무 빨리 방출되었다. 15년 만에 무너졌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조정할 수 없었으므로 자기 복구 능력은 0이었다. 그래서 지속될 수 없었다.

무제의 시스템은 잔여항이 비교적 천천히 방출되었다. 유학이 완충하고 배출의 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자기 복구 능력도 있었다. 천인감응과 죄기조가 잘못을 인정하고 조정할 틀을 제공했다. 그래서 오래 돌아갈 수 있었다.

오래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영원히 돌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잔여항은 여전히 쌓인다. 어느 수준까지 쌓이면 시스템은 여전히 무너진다. 전한 말 왕망이 한을 찬탈한 것도 이 축적의 결과였다. 그러나 붕괴 뒤 새 왕조는 같은 운영체제를 다시 가동한다. ‘충분히 괜찮다’고 검증된 유일한 방안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대안은 없었다.

주공에서 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 정치의 운영체제는 세 차례 큰 변화를 거쳤다.

1.0 버전, 주공: 봉건제+예악+종법제. 연성 통제가 중심이었다. 약 300년간 돌아갔다. 2.0 버전, 상앙·진시황: 군현제+법치+편호제민. 경성 통제가 중심이었다. 15년간 돌아갔다. 3.0 버전, 무제·동중서: 군현제+유법합류+중앙집권. 연성과 경성을 결합했다. 각종 패치와 버전 업데이트를 거치며 2천 년간 돌아갔다.

3.0이 2천 년간 돌아간 것은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 아니다. 해결하지 못했다. 잔여항 관리에서 이전에 없던 균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효과는 있지만 너무 취약한 1.0처럼 연성 통제에만 매달리지도 않았고, 효율적이지만 너무 격렬한 2.0처럼 경성 통제에만 매달리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서 동적 균형점을 찾았다. 그 균형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왕조마다, 황제의 대가 바뀔 때마다 미세하게 조정했다. 그러나 조정 범위는 언제나 같은 틀 안에 있었다.

틀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바뀌는 것은 설정값뿐이었다.

다음 편은 왕망이다. 코드화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사람. 그는 3.0을 고치려 한 것이 아니라 1.0으로 돌아가려 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한 한 사람, 그리고 시간이 그에게 내놓은 답을 살펴본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