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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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25편 · 08 / 25

제8편 초한과 전한 전기 — 전쟁 기계에서 ‘들쑤시지 않는 정치’로

진이 무너졌다. 무너지는 속도에 모두가 경악했다. 육국을 휩쓰는 데는 10년이 걸렸는데, 일개 평민들의 손에 망하는 데는 3년이면 충분했다. 당시 알려진 세계 전체를 덮고 있던 초대형 제국을 호미와 대나무 장대를 든 농민들이 뒤엎었다.

진이 무너졌다. 무너지는 속도에 모두가 경악했다. 육국을 휩쓰는 데는 10년이 걸렸는데, 일개 평민들의 손에 망하는 데는 3년이면 충분했다. 당시 알려진 세계 전체를 덮고 있던 초대형 제국을 호미와 대나무 장대를 든 농민들이 뒤엎었다.

그런데 뒤엎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낡은 구축 체계가 무너질 때마다 짧은 권력 공백이 생긴다. 그 틈에서 여러 구축 방안이 동시에 경쟁하다가, 마침내 하나가 이기면 새로운 체계가 들어선다. 우가 계에게 왕위를 넘겼을 때도, 상에서 주로 왕조가 바뀌었을 때도, 전국시대의 탈락 경쟁에서도 그랬다. 진이 무너진 뒤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 승부는 유난히 간명했다. 두 사람, 두 가지 구축 방식. 5년 만에 승패가 갈렸다.

1. 항우 — 마지막 귀족

항우는 초나라의 옛 귀족 항연의 손자였다. 이 출신이 그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그의 군사적 능력은 귀족적이었다. 개인의 무용으로는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는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그 시대에 가장 강한 전사였다. 전쟁을 하는 방식도 귀족적이었다. 몸소 앞장서서 자신의 용맹으로 전군을 고무했다. 거록 전투에서는 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혔고, 팽성 전투에서는 기병 3만으로 유방의 연합군 56만을 무너뜨렸다. 정치적 구상도 귀족적이었다. 진을 멸한 뒤 열여덟 제후를 봉하고 자신은 서초패왕이 되었다. 본질적으로 주나라의 봉건 구도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항우는 시대를 잘못 만난 사람이었다. 그의 본능과 훈련, 상상력은 모두 이미 사라진 세계, 귀족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 세계에서 전쟁은 영웅끼리의 겨루기였고, 권력은 개인의 용맹과 혈통에서 나왔으며, 질서는 영지를 나눠 주고 충성을 받는 것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이미 진이 부숴 놓았다. 백성을 호적에 편입해 국가가 직접 다스리면서 혈연 공동체가 해체되었고, 군공에 따라 작위를 주는 제도가 세습 귀족층을 무너뜨렸으며, 군현제가 봉건적 자치를 끝냈다. 항우가 되살리려던 세계를 떠받칠 사회적 기반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모래 위에 성을 쌓고 있었다.

항우가 열여덟 제후에게 땅을 나눠 준 지 1년도 안 되어 제후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충성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불충한 자들도 있었지만, 이유는 봉건제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진이 모조리 밀어 버렸다는 데 있었다. 안정된 세습 귀족의 관계망, 여러 대에 걸쳐 쌓인 영지에 대한 귀속 의식, 혈연과 혼인으로 엮인 동맹 체계가 사라졌다. 항우가 봉한 이들은 대부분 대대로 한 지역을 경영한 귀족이 아니라 전쟁 중에 떠오른 군사 실력자들이었다. 그들과 영지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없었다. 땅을 얻은 경위는 이랬다. 전쟁에서 이겼더니 항우가 땅 한 조각을 떼어 주었다. 이것은 봉건이 아니라 전리품 분배다. 전리품을 나눈다고 충성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항우의 분봉 구상이 실패한 것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기고도 구조 전체의 싸움에서는 졌다. 잘못된 구축 방식은 운용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올바른 방식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저 더 높은 에너지 수준에서 실패할 뿐이다.

2. 유방 — 처음으로 ‘상대의 수를 받아 주지 않은’ 사람

유방은 패현 사수정의 정장이었다. 말단 관리였다. 귀족의 피도, 군사 훈련도, 학문적 소양도 없었다. 중국사의 역대 개국 황제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밑바닥에서 출발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방에게는 항우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떤 낡은 구축 방식의 상상력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항우의 머릿속에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청사진이 있었다. 귀족의 청사진이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그것을 실현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유방의 머릿속에는 청사진이 없었다. 이론도 신념도, ‘천하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전제도 없었다. 생존 본능과 사람을 보는 눈이 있을 뿐이었다.

‘청사진이 없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결함이다. 방향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실전에서는 강점이다. 짐이 없다는 뜻이니까. 유방은 쓸 만한 방안을 두고 ‘내 이상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지 않았다. 구상이 얼마나 우아한지는 관심 밖이었다. 먹히느냐가 중요했다.

이 실용주의가 군사 영역에서 드러난 형태가 비대칭 전략이었다. 유방은 그것을 체계적으로 구사하는 데 능했다.

전국시대 편에서 살펴봤듯이, 진이 육국을 휩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모두가 똑같은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는 데 있다. 정면 결전, 주력끼리의 충돌. 아무도 경기장 자체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한 판에 거는 진의 구축 방식은 이런 승부에서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이겼다.

항우는 이 승부 방식을 물려받았다. 그의 전쟁 철학은 병력을 집중해 정면으로 맞붙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거록 전투는 그 철학이 도달한 정점이었다.

유방은 항우와 싸워 이길 수 없었다. 정면으로 맞붙을 때마다 수없이 졌다. 가장 처참했던 패배가 팽성 전투였다. 56만 대군이 기병 3만에게 무너졌고, 아버지와 아내까지 포로로 잡혔다. 유방도 ‘정면 결전으로 승패를 가린다’는 방식을 신봉했다면 팽성 이후에는 졌다고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유방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싸우는 법을 바꿨다. 너와 결전을 벌이지 않겠다. 결전이 네 장기라고? 그렇다면 결전을 벌일 기회 자체를 주지 않겠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랬다. 정면에서는 단단한 방어선으로 항우를 붙잡아 두었다. 형양에서 성고로 이어지는 전선에서 오래 대치하면서 먼저 공격하지도, 결전을 꾀하지도 않았다. 측면으로는 한신을 북쪽으로 우회시켜 항우의 동맹국과 속국을 하나씩 없앴다. 위, 조, 제를 차례로 멸해 항우가 물러서거나 병력을 끌어올 공간과 인적 자원을 빼앗았다. 후방에서는 팽월이 항우의 보급로를 끊임없이 교란해 식량 사정이 늘 빠듯하도록 만들었다. 외교에서는 항우 진영의 인물을 회유해 돌아서게 했다. 영포의 이탈은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완결된 소모 전략이었다. 핵심 논리는 간단했다. 네 구축 방식은 모든 것을 한 번에 거는 방식이다. 공격에는 강하지만 오래 버티는 데는 약하다. 나는 너와 공격력을 겨루지 않고 지속력을 겨루겠다. 너를 지쳐 쓰러뜨리지는 못해도 네가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이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쪽은 이미 지고 있는 것이다.

유방 자신은 이런 용어로 전략을 설명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옳은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이론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법서를 읽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한신의 일이었다. 더 바닥에 있는 능력에서 나왔다. 자기가 무엇을 못하는지 아는 능력이었다.

자기가 무엇을 못하는지 아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것보다 중요하다. 항우는 자신이 잘하는 일, 곧 전쟁은 알았다. 그러나 통치와 외교, 타협과 기다림은 자신이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다. 유방은 자기가 못하는 것을 알았다. 싸움은 항우만 못했고, 계책은 장량만 못했으며, 군대 운용은 한신만 못했고, 보급은 소하만 못했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에게 맡겼다. 자신은 단 한 가지 일만 했다. 그들을 한데 묶어 같은 목표를 향하게 하는 일이었다.

완전히 다른 지도력이다. 항우의 지도력은 영웅형이었다. 내가 가장 강하니 나를 따르라. 유방의 지도력은 조직형이었다. 내가 가장 강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강한 사람들이 나를 위해 일하게 만들 수 있다. 영웅형 지도력의 한계는 영웅 개인의 능력이다. 조직형 지도력의 한계는 조직이 결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능력을 합친 것이다.

항우의 상한선은 항우였다. 유방의 상한선은 유방+장량+한신+소하+진평+조참+……였다.

해하 전투에서 항우는 포위되었다. 사면초가, 패왕별희, 오강에서 스스로 목을 그은 최후. 마지막 귀족은 가장 귀족다운 방식으로 퇴장했다. 항복하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남지 않고, 스스로 끝냈다. 그의 일생과 마찬가지로 그 결말은 미학적으로 완벽했고 구조적으로 틀렸다.

3. 군국제 — 타협이 곧 탄성이다

기원전 202년 황제가 된 유방 앞에 놓인 핵심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 천하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순수한 군현제? 진이 방금 해봤다. 15년 만에 망했다. 순수한 봉건제? 항우가 방금 해봤다. 1년도 못 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유방의 해법은 혼합제였다. 군현과 제후국을 함께 두는 군국제다. 관중과 일부 핵심 지역에는 군현제를 시행해 중앙이 직접 다스렸다. 나머지 지역은 황실과 성이 같은 왕들에게, 또는 다른 성을 지닌 공신왕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론적으로 우아한 방안은 아니었다. 서로 모순되는 두 논리가 하나의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군현제의 논리는 중앙집권이고, 제후국의 논리는 지방자치다. 하나는 중심으로 모으고 하나는 중심에서 멀어진다. 둘을 같은 체계에 넣으면 필연적으로 긴장이 생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유방의 방안이 지닌 장점이 있었다. 긴장이 곧 탄성이다. 긴장이 있는 체계는 충격 한 번에 뚝 부러지지 않는다. 진의 순수 군현제에는 그런 긴장이 없었다. 모든 힘이 중앙집권이라는 한 방향만 향했다. 중앙에 문제가 생기자 체계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유방의 혼합제에는 긴장이 있었다. 중앙과 지방 사이에 서로 밀고 당길 여지가 있었고, 바로 그 여지가 잔여항의 완충 지대가 되었다.

이성왕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었다. 한신, 팽월, 영포가 차례로 죽거나 폐위되었다. 이는 유방이 다른 성의 왕들을 믿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공신의 충성과 혈연의 충성은 다르다. 공신의 충성은 이해관계의 교환에 기대므로 이해관계가 바뀌면 충성도 달라진다. 혈연의 충성에는 적어도 심리적 제약이 한 겹 있다. 물론 그 제약도 든든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일어난 칠국의 난이 증명해 주었다.

이성왕들을 숙청한 뒤 유방은 원칙을 하나 세웠다.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 성이 유씨인 사람만 왕에 봉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봉건제의 적용 범위를 황족 내부로 한정했다. 혈연으로 봉건제 둘레에 원을 그은 셈이다. 원 안은 신뢰 구역이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원 밖은 군현제가 관할하는 통제 구역이었다.

잔여항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유방의 방안은 층위를 나누어 관리하는 방식이다. 진처럼 하나의 제도로 모든 잔여항을 없애려 하지 않았다. 잔여항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제도적 층위에 배분해 처리했다. 중앙집권은 통일된 법과 조세, 군사 같은 전국 차원의 잔여항을 맡았다. 제후국은 지역마다 다른 사정, 지방 유력자들의 자리 마련, 문화적 차이의 수용 같은 지방 차원의 잔여항을 맡았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제후국은 결국 너무 커질 것이었다. 칠국의 난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불완전해도 돌아가는 것’이 ‘완벽하지만 쉽게 부러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 유방은 흠이 없지만 건드리면 깨지는 방안 대신, 문제가 있어도 탄성이 있는 방안을 골랐다. 이 선택은 이론보다는 직감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그래도 한나라의 목숨을 구했다.

4. 황로의 무위 — ‘들쑤시지 않는 정치’의 철학

유방 이후 여후가 15년 동안 정권을 잡았고, 그 뒤를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이었다. 이른바 ‘문경지치’다. 이 시기 통치 철학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황로 사상이다.

황로 사상의 핵심은 ‘무위이치’, 억지로 일을 벌이지 않고 다스리는 데 있다. 들쑤시지 않는다. 간섭을 줄인다. 사회가 스스로 회복하게 둔다.

문제와 경제가 우연히 도가의 신봉자여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구조적 필연이었다.

진 말기부터 한 초기까지 전쟁이 해마다 이어지면서 사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인구는 급감했다. 진 말기에 약 2천만이던 인구가 한 초기에는 1천5백만에도 못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경제도 황폐했다. “천자조차 같은 빛깔의 말 네 필을 갖추지 못했고, 장수와 재상 가운데는 소달구지를 타는 이도 있었다.” 황제의 수레를 끌 말 네 필의 털빛조차 맞추지 못했고, 승상은 소달구지에 올라야 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신뢰도 무너졌다.

이런 조건에서는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정책 자체가 위험했다. 적극적인 통치란 세금을 걷고, 부역을 부과하고, 법을 집행한다는 뜻이다. 모두 사회를 쥐어짜는 일이다. 이미 한계까지 짜인 사회는 더 짜낼 수 없다. 진의 대규모 공사와 오랜 전쟁이 이미 그 한계까지 몰아붙여 놓았다.

황로의 무위는 궁극의 정치적 이상이 아니라 상처를 입은 뒤의 회복 전략이었다. 큰 수술을 막 끝낸 환자에게 가장 좋은 처방은 한 번 더 수술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쉬게 하는 것이다. 상처가 스스로 아물게 둔다. 몸이 스스로 회복하게 둔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일을 더 만들지 않는 것이다.

구축의 관점에서 황로의 무위는 역설적인 구축 전략이다. 핵심 주장이 ‘구축하지 말라’이기 때문이다. 새 법을 만들지 않는다. 소하가 정한 규범을 조참이 그대로 따랐다는 ‘소규조수’처럼, 조참은 소하의 법을 한 조항도 고치지 않았다. 새 정책을 밀어붙이지 않고, 대공사를 벌이지 않고, 큰 전쟁을 치르지 않는다.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해 백성과 함께 쉰다.

이 지점에서 도가의 ‘무위’ 철학과 흥미로운 공명이 일어난다. 도가의 무위는 철학 차원의 주장이다. 가장 좋은 질서는 간섭하지 않는 질서라는 것이다. 한 초기의 무위는 실천 차원의 판단이다. 지금 가장 좋은 전략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는 이론에서, 다른 하나는 정세에서 출발했지만 도착점은 같다. 덜 하라.

한 겹 더 들어가 보면, 황로의 무위는 진의 구축 방식에 대한 구조적 반작용이었다. 진은 구축의 밀도가 극도로 높았다. 법이 구석구석을 관리하고 국가가 모든 가정에 스며들어, 규율 밖에 놓인 행동이 없었다. 한 초기 황로 정치의 특징은 그 밀도를 의도적으로 낮췄다는 데 있다. 법을 간소하게 하고 집행을 너그럽게 하여, 사회에 넓은 회색 지대와 자치 공간을 남겨 두었다.

이렇게 밀도를 낮추는 데에는 중요한 인식이 깔려 있다. 잔여항에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잔여항의 공간을 0으로 압축하면 체계가 뚝 부러진다는 사실을 진의 실패가 증명했다. 한 초기의 대응은 그 공간을 다시 여는 것이었다. 잔여항을 없애지 않는다. 구축 체계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공간을 내준다. 잔여항은 그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며, 폭발할 만큼 쌓이지 않는다.

중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자각적으로, 또는 반쯤 자각적으로 시행된 잔여항 관리 전략이었다. 구축을 강화해 잔여항을 억누르는 대신 구축을 느슨하게 하여 잔여항이 빠져나갈 길을 냈다. 길을 내주는 쪽이 억압보다 훨씬 오래갈 수 있다. 억압의 비용은 갈수록 커진다. 잔여항은 누를수록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출구를 내주는 비용은 갈수록 줄어든다. 출구가 생기면 잔여항이 쌓이지 않기 때문이다.

5. 문제 — 스스로 선택한 절제

한 문제 유항은 중국 정치사에서 가장 저평가된 제왕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공적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문경지치의 물질적 토대는 주로 그의 재위 중에 마련되었다. 다만 그 공적에 극적인 맛이 없었다. 그가 한 일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할 권한이 있는 수많은 일을 스스로 하지 않기로 택하는 것이었다.

전조를 줄이거나 면제했다. 한 초기 전조는 수확의 15분의 1이었는데 문제는 이를 30분의 1로 낮췄다. 어떤 해에는 아예 걷지 않았다. 살림이 넉넉한 정부가 자선을 베푼 것이 아니었다. 한 초기의 국고는 조금도 넉넉하지 않았다. 의식적인 정책 선택이었다. 국고가 빠듯해지더라도 민간의 기력을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육형을 폐지했다. 문제는 진의 법에 있던 경형, 의형, 월형 같은 형벌을 없애라고 명했다.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 코를 베는 형벌, 발을 자르는 형벌이었다. 대신 매를 때리는 태형이나 그 밖의 가벼운 처벌로 바꾸었다. 중국 법제사의 중대한 전환이었다. 진의 엄벌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인도적인 방향으로 옮겨 간 것이다.

궁전을 짓지 않았다. 23년 동안 황제로 있으면서 궁전을 거의 새로 짓지 않았다. 한 번은 경치를 내려다보는 높은 누대를 세우려 했다. 장인들이 비용으로 백금(百金)이 든다고 하자 문제가 말했다. “백금이면 중간 살림의 집 열 가구가 가진 전 재산이다.” 그러고는 계획을 취소했다.

검소한 장례를 당부했다. 문제는 장례를 간소하게 하고, 부장품에는 금은을 쓰지 말고 질그릇만 쓰라고 했다. 마지막 조서에서도 말했다. “호화로운 장례로 가산을 탕진하고 긴 상례로 산 사람을 해치는 것을 나는 결코 좋게 보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의 살림과 삶까지 망치지는 말라는 것이다.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데 모으면 지극히 드문 제왕의 초상이 드러난다. 자기 권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사람의 초상이다.

핵심은 ‘스스로’다. 외부에서 제약한 것이 아니었다. 재상도, 의회도, 어떤 제도적 힘도 문제를 억제하고 있지 않았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했고 모반을 꾀한 제북왕과 회남왕을 제거했다. 자신이 절제를 선택한 것이다.

깎아내기와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자기 절제는 구축 체계의 운용자가 구축의 밀도를 능동적으로 조절한 행위다. 그는 밀도를 높일 권한이 있었다. 세금을 더 걷고, 궁전을 짓고, 군대를 늘리고, 대공사를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밀도가 너무 높은 구축 체계는 뚝 부러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진의 교훈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밀도를 낮은 수준에 유지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문제의 자기 절제는 개인적 품성의 산물이지 제도의 산물이 아니었다. 한나라 황제에게 반드시 자제하라고 요구하는 제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문제가 자신을 절제했다고 해서 후계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구조적으로는 선양 체계의 약점과 같다. 체계가 돌아가려면 운용자가 계속 자신을 억제해야 한다. 절제는 개인의 품성이지 제도가 공급해 주는 것이 아니다. 매 세대 문제 같은 제왕이 나오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문제 다음은 경제였다. 경제는 그럭저럭 선을 지켰다. 경제 다음은 무제였다. 무제는 절제하지 않았다. 정력이 넘치고 야심에 찬, 무언가를 해내려는 ‘유위’의 사람이었다. 황로의 무위는 그의 손에서 끝났다.

무제가 문제보다 못해서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오히려 무제가 더 뛰어났을 수 있다. 변화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문제와 경제, 두 세대에 걸친 휴양과 회복이 막대한 사회적 잉여를 쌓아 놓았다. 국고가 찼고, 인구가 회복되었고, 경제가 번성했다. 무언가를 해내려는 황제에게 이 잉여는 마음껏 써 버릴 수 있는 자원이었다. 문제가 모은 살림을 무제가 쓰는 것이다.

이 또한 잔여항 보존이다. 황로의 무위가 쌓아 올린 물질적 여유가 그 자체로 잔여항이 되었다. 권력자에게 자신을 써 달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절약해서 모은 부는 다음 세대가 탕진할 밑천이 된다. 절제가 기른 평화는 다음 세대가 팽창할 출발점이 된다. 문제의 유산에는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는 정책이라는 제도적 관성도, 가득 찬 국고라는 물질적 유혹도 들어 있었다. 어느 쪽을 물려받을지는 다음 운용자의 성격에 달려 있었다.

6. 칠국의 난 — 군국제의 잔여항 결산

문제와 경제 시대에 이르러 군국제의 잔여항이 마침내 발작을 일으켰다.

기원전 154년, 오왕 유비(劉濞)가 여섯 제후왕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명분은 중앙의 삭번 정책, 곧 조조(晁錯)가 내놓은 「삭번책」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칠국의 난은 작은 반란이 아니었다. 오·초 연합군은 병력이 수십만이라고 내세웠다. 그러나 주아부가 3개월 만에 진압했다.

칠국의 난에서 중요한 것은 전투의 경과가 아니다. 반란군의 군사 조직과 지휘는 모두 서툴렀다. 중요한 것은 이 반란이 드러낸 구조적 문제다.

유방이 군국제를 구상할 때의 논리는 이랬다. 성이 같은 왕이 다른 왕보다 믿을 만하다. 피가 이어져 있으니까. 그러나 유방에서 문제를 거쳐 경제에 이르는 세 번째 대에는 제후왕과 천자 사이의 혈연이 이미 옅어져 있었다. 오왕 유비는 유방의 조카였지만 경제의 대에 오면 몇 촌이나 떨어진 먼 친척이었다. 먼 친척에게 가까운 혈족만큼의 충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유비가 한 조정에 품은 원한은 유씨 황실에 대한 소속감보다 훨씬 컸다. 경제가 아직 태자였을 때 유비의 태자를 실수로 때려죽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공의 봉건제가 부딪힌 문제와 정확히 같다. 혈연은 옅어진다. 주공의 봉건제는 예악으로 그 희석을 보완했다. 유방의 군국제는 무엇으로 보완했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유방은 군국제에 걸맞은 문화적 통합 장치를 설계하지 않았다. 군현제 위에 봉건제를 거칠게 접붙이고, 혈연 그 자체가 충성을 유지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약 900년 전 주공이 마주했던 문제가 새로운 제도의 껍질 안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제도를 갈아입혔다고 잔여항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혈연의 희석은 혈연에 기대는 모든 제도가 공유하는 잔여항이다. 봉건제를 쓰든 군국제를 쓰든 그것은 거기 있다.

칠국의 난이 진압되자 중앙은 제후왕의 권력을 체계적으로 약화하기 시작했다. 경제는 제후국의 행정 자율성을 줄이고, 왕이 관리를 임명할 권한을 회수했다. 무제 때 나온 추은령은 아예 솥 밑의 장작을 빼는 수였다. 제후왕의 봉토를 적장자에게만 물려주지 말고 모든 아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도록 정했다.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제후국이 저절로 더 작은 나라들로 쪼개진다는 뜻이다. 몇 대가 지나면 큰 제후국도 군현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땅덩어리가 되었다.

추은령의 절묘함은 누구와도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 데 있었다. 제후의 권력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널리 베푸는’ 일이라고 했다. 왕의 다른 아들들에게도 땅을 준다니, 얼마나 인자한가. 땅을 나눠 받은 서자는 모두 추은령의 수혜자이자 지지자가 되었다. 몫이 쪼개진 적장자는 이론상 손해를 보지만 ‘아버지가 동생들에게도 땅을 좀 나눠 주는 일’을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효도와 우애를 반대하는 일이었다. 도덕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추은령은 중국 정치사에서 가장 우아한 제도 설계 중 하나다. 수혜자를 이용해 반대자를 없앴다. 잔여항의 피해자를 잔여항의 관리자로 만들었다. 폭력으로 문제를 풀지 않았다. 삭번을 하려면 전쟁을 해야 했다. 대신 이익을 재분배해 풀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작은 파이 조각을 나눠 주었다. 제후왕의 세력이 영구히 약해진 것이 그 대가였다. 중앙이 칠국의 난 같은 전쟁을 다시 치르지 않아도 된 것이 그 이익이었다.

추은령 이후 군국제는 이름만 남았다. 제후왕은 여전히 있었지만 식읍의 수입과 허울뿐인 칭호만 누릴 뿐, 실질적인 행정권과 군사권은 없었다. 군현제가 사실상 유일한 지방 통치 방식이 되었다.

유방의 과도적 방안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진의 순수 군현제가 실패한 뒤에는 완충 장치가 되어 주었고, 사회가 회복된 뒤에는 조금씩 조여지다가 마침내 군현제의 궤도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폭력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돌아왔다. 사회는 과도기를 거치면서 군현제의 논리에 적응했다. 더 이상 진 때처럼 격렬하게 반발하지 않았다.

진이 풀지 못한 문제를 시간이 풀었다. 한의 군현제가 진의 군현제보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한은 사회에 적응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진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시간 대신 힘을 썼다. 힘으로 과정은 압축할 수 있어도 인식까지 압축할 수는 없다. 인식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7. 가의와 조조 — 두 개혁가의 운명

문제와 경제 시대의 정책 논쟁에서 가의와 조조는 서로 다른 두 개혁 노선을 대표했다.

가의는 이론형 정치가였다. 그는 「치안책」에서 한 초기의 구조적 문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비대해지는 제후왕의 세력, 흉노의 위협, 사치스러워지는 사회 풍조. 그리고 문제가 터지기 전에 막을 수 있는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가의의 생각은 터지기 전에 미리 손을 쓰자는 것이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불씨를 안고 와 쌓인 장작 아래에 놓고 그 위에 누워 자면서,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고 안전하다 여긴다.” 불을 안은 채 장작더미 위에 누워서는 아직 타지 않는다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가의의 방안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전면적으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가의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문제는 당시 사회가 아직 대대적인 개혁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황로 전략은 ‘기다림’이었다. 사회가 개혁을 견딜 만큼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이자는 것이다. 가의는 기다리지 못했다. 서른세 살에 근심 속에서 죽었다.

조조는 행동형 정치가였다. 기다리지 않았다. 경제가 즉위하자마자 「삭번책」을 밀어붙여 제후왕의 봉토를 직접 줄였다. 방향은 전적으로 옳았다. 제후왕의 힘은 정말 줄여야 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밀어붙이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삭번은 칠국의 난을 곧바로 촉발했다. 반란 초기에 당황한 경제는 조조를 요참형에 처해 허리를 잘라 죽였다. 명목은 ‘제후들의 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를 죽여도 반란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처음부터 조조 한 사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의의 교훈은 이렇다. 진단이 정확해도 처방이 너무 이르면 헛일이 된다. 문제를 제대로 짚었지만 때가 맞지 않는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당신은 울울하게 생을 마친다.

조조의 교훈은 이렇다. 방향이 옳아도 추진이 너무 급하면 재앙이 된다. 길은 맞게 들었지만 너무 빨리 걷는다. 막으려던 위기를 오히려 터뜨리고, 자신이 그 희생물이 된다.

구축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운명은 개혁이 안고 있는 시간의 역설을 보여 준다. 너무 일찍 개혁하면 사회가 준비되지 않아 개혁가가 무시당한다. 너무 늦게 개혁하면 문제가 이미 터져 개혁가가 위기에 휩쓸린다. 너무 빨리 개혁하면 반발을 불러 개혁가가 그 반발에 짓뭉개진다. 너무 느리게 개혁하면 문제가 쌓여 돌이킬 수 없게 되고 개혁은 빈말이 된다.

이 역설에는 어디에나 통하는 해법이 없다. 유일하게 해법에 가까운 것은 추은령의 전략이다. 개혁의 수혜자를 개혁의 추진자로 만들고, 이익이 재분배되는 과정이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혁가가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억지로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 다만 이 전략에는 대단히 뛰어난 제도 설계 능력과 절묘한 시기가 필요하다. 모든 개혁가가 추은령을 제안한 주보언만큼 운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한 무제처럼 실행할 능력도 결심도 갖춘 운용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8. 맺음말 — 구축의 연착륙

초한 쟁패에서 문경지치에 이르는 시기의 핵심은 어느 영웅의 부상이나 어느 제도의 창설이 아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구축 체계인 진의 제도가 무너진 뒤, 사회가 완성된 청사진도 없이 시행착오와 타협을 거치며 어떻게 새 균형을 찾아갔는가. 그것이 이 시대의 중심 이야기다.

이 과정을 구축의 연착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진은 경착륙이었다. 완전하고 정밀하며 밀도 높은 구축 체계를 사회 전체 위에 한꺼번에 강제로 눌러씌웠다. 사회에는 적응할 시간도, 완충할 공간도, 충격을 흡수할 탄성도 없었다. 결과는 갑작스러운 파단이었다.

한 초기는 연착륙이었다. 완성된 청사진이 없었다. 유방에게는 이론이 없었다. 한 번에 완성하는 방안도 없었다. 군국제는 타협이었다. 높은 밀도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황로의 무위는 일부러 밀도를 낮췄다. 바로 그런 것들이 없었기에 사회에는 적응할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 문제와 경제의 통치를 포함해 한 초기 약 70년의 회복기를 거치며 사회는 진 제도의 충격을 서서히 소화했고, 군현제의 논리에 서서히 적응했으며, 전쟁과 폭정에 파괴된 인구와 경제를 서서히 회복했다.

무제 시대에 이르면 사회는 더 적극적으로 일을 벌이는 구축 체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무제가 문제보다 더 현명해서가 아니었다. 문제의 절제도 한몫한 한 초기 약 70년의 회복이 무제가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잔여항의 관점에서 한 초기 70년 동안 한 일은 잔여항이 스스로 풀려나갈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이었다. 진이 만들어 낸 잔여항, 곧 사회의 분노와 경제의 파탄, 문화적 억압과 지방의 원심력은 어느 한 정책이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서서히 희석했다. 자극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서둘러 처리하려 들지 않는다. 비교적 느슨한 환경에서 천천히 빠져나가게 둔다.

잔여항을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효율적으로 하려면 잔여항을 정확히 찾아내어 그 지점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한 초기에는 그런 정밀한 처리를 할 능력이 없었다. 기본적인 행정 능력조차 간신히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우직하고 가장 안전한 방법을 썼다.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림은 터무니없이 저평가된 정치적 지혜다. 중국의 정치 문화는 ‘유위’를 찬양하고 ‘무위’를 낮춰 본다. 사람들은 한 무제의 영토 확장과 유학의 독존, 소금과 철의 전매는 기억하면서 문제와 경제가 ‘아무것도 안 한 일’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아무것도 안 함’이 없었다면 무제의 ‘대단한 업적’도 불가능했다. 돈을 쓰려면 먼저 누군가가 모아 놓아야 한다. 돌격하려면 먼저 누군가가 상처를 돌봐야 한다.

이 이치는 이후 모든 왕조의 초기에 되풀이된다. 당 초기 정관의 치에는 황로의 그림자가 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개인적인 스타일이 문제와 완전히 달랐지만 본질적으로는 그 역시 ‘밑천을 모으는’ 중이었다. 청 초기 강희제의 초반 정책도 먼저 안정시키고 나중에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구축의 연착륙은 왕조가 오래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경착륙한 왕조, 진과 수는 짧게 끝났다. 연착륙한 왕조, 한·당·명·청은 오래갔다.

그러나 연착륙으로 쌓은 자원은 다음 세대의 강압적 팽창에 쓰인다. 문제가 모은 살림을 무제가 써 버렸다. 정관 시기에 모은 국력을 현종이 탕진했다. 강희제가 닦은 기반을 건륭제가 소모했다. 절약은 탕진을 위한 것이 되고, 절제는 방종을 위한 것이 된다. 제왕들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축적 자체가 탕진의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다. 자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곧 탕진하라는 초대장이다.

다시 잔여항 보존이다. 절제로 쌓은 물질적 여유가 새로운 잔여항이 된다. 다음 운용자에게 자신을 소모하라고 유혹하는 힘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 모아 둔 살림이 바로 다음 세대가 거덜 낼 살림이다. 돈을 모으는 일과 돈을 날리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두 행동이 아니다. 같은 순환의 두 단계다.

다음 편은 한 무제다. 70년 동안 쌓인 힘을 웅대한 재능과 포부를 가진 한 사람이 풀어놓는다. 유학의 독존, 추은령, 소금과 철의 전매, 북쪽 흉노 원정. 중국사에서 처음으로 잔여항을 구축 체계 내부에 부호화해 넣으려 한 체계적인 시도였다. 안에 넣은 뒤에도 잔여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존재하는 형식이 달라졌다. 그때부터 잔여항은 유가의 옷을 입는다.

한국어 독자의 맥락과 호흡에 맞춰 독립적으로 다시 쓴 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