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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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경제
제17편 · 총 23편

열일곱째 글. 브레턴우즈와 1971년: 신용은 사실 줄곧 그곳에 있었다

브레턴우즈는 달러를 금에, 다른 통화를 달러에 묶었다. 1971년 금 태환 중단은 금속의 질서가 갑자기 신용으로 바뀐 순간이라기보다, 이미 신용과 협력으로 지탱되던 구조의 덮개가 벗겨진 순간이었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공통분모

1944년에 체결된 국제통화기금 협정에는 아주 단도직입적인 문장이 하나 있다. 각 회원국 통화의 평가는 공통분모인 금으로, 또는 1944년 7월 1일 당시 미국 달러의 금 무게와 순도로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통분모.

이 한마디에 이 일의 성격이 모두 담겨 있다. 마흔네 나라. 정치적 경계는 뚜렷하고 신용 사정은 천차만별이며,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서로 아직 정산하지 못한 셈도 수두룩했다. 이 구상이 하려는 일은 그 나라들의 통화를 하나의 자 위에 눌러 올리는 것이었다. 빚과 흑자, 환전과 준비자산을 모두 하나의 장부로 환산할 수 있도록.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려면, 무엇을 서로 통약하려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한 나라의 통화는 상품 한 점이 아니다. 그 뒤에는 그 나라가 세금을 거둘 능력, 중앙은행이 기꺼이 자제할지, 내년에 의회 구성원이 바뀔지, 전쟁을 치러 이길 수 있을지가 서 있다. 이들 사이에는 환산 관계가 없다. 그런데 공통분모라는 말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환산 관계를 주라는 것이다.

열넷째 글에서 같은 포부를 한 번 다루었다. 그때는 각 통화를 일정한 무게의 금으로 정의했다. 두 법률을 나누면 소수점 아래 일곱째 자리까지 정밀한 환산율이 나왔다. 그 체제는 1931년에서 1933년 사이에 무너졌다.

열한 해 뒤, 같은 일을 다시 했다. 이번에는 더 치밀하게 했다.

치밀해진 점은 이번에는 저절로 돌아가는 척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전후의 구상은 사람들이 지폐를 들고 창구에 가면 금으로 바꿀 수 있던 19세기의 고전적 금본위제를 되살리지 않았다. 일반 통화 보유자는 금으로 바꿀 수 없었다.

작지 않은 차이다. 그런데 교과서의 그 간단한 공식에는 좀처럼 적히지 않는다. 지난날 금본위제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지폐를 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점이었다. 못 믿겠으면 바꾸러 가면 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평생 한 번도 실제로 바꾸러 가지 않는다 해도, 제도의 설득력은 전부 그 한마디에서 나왔다. 전후의 구상에서는 그 말이 더는 개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태환은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정으로 바뀌었다.

금으로 바꾸어주겠다는 약속을 실제로 떠맡은 쪽은 미국 정부였다. 그 상대도 주로 달러를 보유한 외국의 공적 기관과 각국 중앙은행이었다. 동시에 협정은 경상거래의 지급을 가로막지 않는 한, 회원국이 자본 이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다시 말해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금속의 제약은 첫날부터 주권국가의 판단, 중앙은행의 협력, 외교적 협의, 정책적 재량에 둘러싸여 있었다.

1971년에 대체 무엇을 잘랐는지는 여기서 갈린다.

한 번도 다른 것이 섞인 적 없는 금속 사슬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신용과 협정과 정치가 오래전부터 몇 번이고 매듭을 지어놓은 끈을 잘랐다.

이 차이에 따라 전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달라진다. 사슬이 본래 순수한 금속이었다면, 1971년은 단절이다. 제약이 있던 데서 없는 데로 넘어간 것이다. 본래 매듭진 끈이었다면 1971년은 다른 일이 된다. 그 매듭들을 공개한 일이다.

앞선 열여섯 편에서 구축이 잔여항을 다루는 방법은 아홉 가지가 나왔다. 이제부터 쓸 것은 열 번째 방법이 아니다. 다른 일이다. 구축이 줄곧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일이다.

2. 장부를 쓰는 세계

회의는 1944년 7월 1일부터 22일까지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의 한 호텔에서 열렸다. 마흔네 나라에서 약 730명의 대표가 모였다. 의장은 미국 재무장관이었다. 영국 대표는 케인스였고, 미국 쪽의 주된 설계자는 재무부의 화이트였다.

겉으로는 다자간 회의였다. 밑바탕이 된 초안은 실제로 두 개뿐이었고, 두 안은 서로 겨루고 있었다.

케인스의 안은 국제청산동맹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목은 초국가적인 장부상의 화폐를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 화폐에 이름도 붙였다. 하지만 핵심은 이름이 아니다. 국제적 지급을 어떤 것으로 만들려 했느냐에 있다.

그 자신의 말로는 은행제도의 기본 원리를 국제적 차원으로 일반화하는 일이었다.

구체적인 방식은 이랬다. 각국 중앙은행이 이 동맹에 계좌를 하나씩 연다. 흑자국은 채권자가 되고 적자국은 채무자가 된다. 동맹은 장부에 적고 계좌에서 초과 인출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어느 나라가 잠시 금이나 달러가 모자란다는 이유만으로 당장 수입과 고용을 줄이도록 내몰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각국은 전쟁 전 3년간 수출입 총액의 약 4분의 3에 해당하는 할당액을 받고, 그 한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계좌를 초과 인출할 수 있었다.

케인스는 오랫동안 막대한 흑자를 쌓아온 나라에도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대목이 구상 전체의 심장이다. 그가 적은 목표는 세계무역에 수축을 부르는 압력 대신 팽창을 부르는 압력이 작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말이었다. 그전 수백 년 동안 국제수지 장부는 한쪽으로만 힘을 가했다. 빚진 쪽이 살림을 좀 더 졸라매라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그 장부에 반대 방향의 힘을 더하려 했다. 셈이 맞지 않을 때 모두를 함께 끌어내리는 길 하나만 남지 않도록.

추상적인 수사가 아니다. 그 말에는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기억이 무겁게 실려 있었다. 디플레이션, 실업, 무너진 소득, 그리고 열넷째 글에서 본, 국내 임금을 눌러 내려야만 평가를 지킬 수 있었던 영국의 기억이었다.

케인스가 내디딘 이 한 걸음의 성격을 분명히 보려면 아주 소박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제수지의 셈이 맞지 않을 때 누가 그것을 맞출 것인가.

전통적인 대답은 한쪽만 가리켰다. 적자국이 맞춘다. 금리를 올리고, 수요를 누르고, 수입을 제한한다. 자국의 물가와 임금이 내려가게 한다. 셈이 다시 맞을 때까지. 흑자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케인스가 바꾸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셈이 맞지 않는 것은 양쪽이 함께 만들어낸 상태이지, 한쪽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조정 의무를 적자국에 전부 떠맡기는 것은 산술적으로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한 나라에서 협상력이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대가를 전부 밀어넘기는 일이다.

화이트의 안은 달랐다. 세계 중앙은행보다는 한정된 재원을 모아놓은 공동 기금에 가까웠다.

그의 설계에서 기금은 국제통화를 무에서 만들어내지 않는다. 각국이 금과 자국 통화, 증권을 미리 납부해 재원을 모은다. 초안에는 최초 출자 약정 총액이 적어도 50억 달러여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각국 납부금 가운데 4분의 1은 현금, 4분의 1은 이자가 붙는 정부 증권으로 내고, 현금 부분의 적어도 절반은 금으로 내야 했다.

화이트가 원한 것은 통제할 수 있고 규모가 한정되어 있으며, 각국의 출자 약정에 기초한 안정 장치였다. 단기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장치였다. 세계의 준비자산을 만들어낼 권한을, 대규모 초과 인출을 허용하고 거꾸로 흑자국까지 제약할 수 있는 초국가적 청산동맹에 넘기려 하지 않았다.

최종 합의는 화이트 쪽에 더 가까웠다. 케인스의 파편들을 품은 채로.

영국은 그 장부상의 화폐를 포기했다. 청산동맹도 포기했고, 더 넉넉한 초과 인출 구상도 포기했다. 달러와 금을 중심에 놓는 구조를 받아들였다.

이 결과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음모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금은 미국 손에 있었으며, 달러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큰 빚을 지고 있었다. 구상이 받아들여지려면 돈을 내놓을 수 있는 쪽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케인스가 하려던 일에는 나름의 이치가 있었다. 다만 그 탁자에서 힘을 쓰는 것이 이치만은 아니었다.

남은 케인스의 흔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희소통화 조항이다. 어느 흑자국의 통화가 오랫동안 부족하면, 기금은 그 통화를 배급하고 다른 나라들에 제한적인 수입 규제를 허용할 수 있었다.

이 조항은 뒤에 실제로 쓰인 적이 거의 없다.

중요한 점은 쓰였느냐도 아니다. 회의장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은 이견 하나를 기록해놓았다는 데 있다. 세계적 불균형을 조정하는 부담을 대체 누가 질 것인가.

조문에 들어갔으나 거의 쓰이지 않는 조항은 묘한 존재다. 구축이 자신의 글 안에 남겨놓은 자리다. 여기에도 본래 길 하나가 있었다고 표시해둔 자리.

아홉째 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구축은 한 세대가 무엇을 읽을지 정할 수 있지만 영원히 정할 수는 없다. 지워진 것과 지운 사람이 같은 표지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층 더 철저하다. 아예 지우지도 않았다. 정식 조문 한가운데 인쇄되어 있고 누구나 펼쳐볼 수 있다. 다만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뿐이다. 쓰이지 않는 조항과 존재하지 않는 조항은 실제 효과로 보면 거의 같다. 기록으로 보면 완전히 다르다.

3. 층위

회의의 결과는 금본위제로의 복귀가 아니었다. 세워진 것은 층위가 있는 구조였다.

맨 위에는 금이 있다. 가운데에는 달러가 있다. 온스당 35달러라는 공식 가격으로 금에 연결된다. 그 아래에는 각국 통화가 있다. 달러에 대해 고정되어 있되 조정할 수 있는 평가를 정하고, 시장 환율은 그 평가의 위아래 약 1퍼센트라는 좁은 폭 안에 붙들어둔다.

‘고정되어 있되 조정할 수 있다’는 말 안에 제도 전체의 어려움이 숨어 있다. 완전히 고정하면 빠져나갈 길이 없다. 버티지 못하는 나라는 제 국내 경제를 누를 수밖에 없다. 언제든 조정할 수 있다면 고정한다는 말은 의미를 잃는다. 내일 값이 얼마일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중간을 택했다. 평소에는 고정하고, 근본적 불균형이 생기면 다시 논의한다. 그런데 무엇이 근본적인지는 누가 판정하는가. 협정에는 그대로 대입해 계산할 만한 기준이 없었다.

회원국은 기금에 가입할 때 할당액을 배정받았다. 얼마를 출자해야 하는지와 기금의 재원을 얼마까지 쓸 수 있는지가 모두 이 할당액에 달렸다. 최종 승인된 기금의 총할당액은 약 88억 달러였다. 일반적인 원칙은 4분의 1을 금으로, 4분의 3을 자국 통화로 내는 것이었다.

작동 원리를 그린 도표는 아름답다. 적자국은 우선 자신의 준비자산과 국내 정책으로 조정한다. 그래도 단기적인 어려움이 남으면 기금에서 외화를 인출한다. 불균형이 근본적인 것이라면 평가 조정을 신청한다.

공통의 척도를 추구하는 이 구상 안에, 각국이 정책을 펼칠 여지도 일부러 남겨두었다. 협정 제6조는 회원국이 국제 자본 이동을 조절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통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1930년대에서 얻은 교훈이다. 전체 설계에서 가장 정직한 대목이기도 하다. 한 나라가 세 가지를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다고 인정한 셈이다. 고정환율, 자유로운 자본 유출입, 스스로 결정하는 국내 정책. 셋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 1930년대에 버린 것은 국내 정책이었다. 그 대가는 열넷째 글에서 이미 헤아려보았다. 이번에 버리기로 한 것은 자본의 자유로운 유출입이었다.

무엇을 포기하는지 당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자본에 자물쇠를 채운다는 것은 돈을 국외로 보내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고, 허가를 신청해야 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돈을 덜 벌고, 어떤 사업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모두 실제 대가였다. 대신 얻는 것은 이랬다. 정부가 올해 고용을 지키기 위해 돈을 조금 더 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러고도 이튿날 아침 자국 통화가 공격받는 상황을 맞지 않아도 된다. 어느 쪽이 더 값진지는 그때도 다투었고, 그 뒤에도 계속 다투었다.

그러니 이것은 처음부터 순수한 시장 질서가 아니었다. 국가와 중앙은행이 세심하게 관리하는 시장 질서였다. 무역을 위해 환율은 충분히 안정되어야 했다. 가격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자본 이동에는 자물쇠를 채울 수 있었다. 정부가 당장 통화위기를 일으키지 않고도 고용과 성장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 설계에는 흔히 지나치는 비대칭도 하나 있었다.

전후의 지폐가 어느 것이나 금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공적 기관을 상대로 금 태환을 실제로 약속한 곳은 주로 미국 재무부였다. 각국 통화로 익명적인 결제를 하려면 결국 달러를 거쳐야 했다. 달러는 또 한 나라를 거쳐 금에 닿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은 세계의 공적 금 보유량 대부분을 쥐고 있었다. 유럽과 일본에는 수입과 재건, 청산과 부채 상환을 위한 달러가 절실했다. 그래서 처음 몇 해 동안은 공통의 척도와 미국에 대한 신뢰가 거의 완전히 겹쳤다.

바로 그렇게 겹쳤기에, 뒤에 많은 사람이 이 체제의 기초를 순수한 금속으로 잘못 알았다.

처음부터 금속과 신용의 혼합물이었다. 다만 처음 몇 해 동안에는 둘의 비율을 굳이 가려볼 이유가 없었다.

서로 다른 두 가지가 같은 시기에 같은 답을 내놓으면, 사람은 둘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을 가리려면 서로 다른 답을 내놓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날이 오면 대개 다시 배치하기에는 이미 늦다.

4. 금의 수수께끼

진짜 어려움은 체제가 성공적으로 돌아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유럽은 1958년 경상거래의 태환성을 회복했고, 일본은 1964년에 태환성을 갖추었다. 이때에야 브레턴우즈 체제가 온전히 작동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무렵, 한 경제학자의 경고가 귀를 거스르기 시작했다.

그는 1959년 의회에서 증언했고 1960년에는 책을 냈다. 논리는 간단했다. 미국이 국외로 달러를 내보내지 않으면 세계는 준비자산 부족으로 디플레이션과 무역 위축을 겪게 된다. 계속 내보내면 언젠가는 외국의 공적 기관이 가진 달러 채권이 미국의 금 보유량을 넘어선다. 그러면 시장은 35달러라는 금값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하고, 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어느 길로 가도 문제가 기다린다.

이 딜레마의 모양은 기억해둘 만하다. 화폐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를 두 가지 용도로 동시에 쓰면 이런 구조에 빠지게 된다. 달러는 세계의 유동성이면서 미국의 부채여야 한다. 앞의 용도에서는 많을수록 좋고, 뒤의 용도에서는 적을수록 좋다. 구축이 스스로에게 두 역할을 맡겼는데 둘이 요구하는 방향이 반대라면, 성공할수록 실패에 가까워진다.

이것은 더는 서재 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날짜가 하나하나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60년 8월, 미국이 아직 갚지 않은 대외 달러 부채 총액은 이미 미국의 금 보유량을 넘어섰다. 1965년 12월에는 외국의 공적 기관이 보유한 미국의 달러 부채만으로도 미국의 금 보유량을 넘어섰다. 1966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벌어진 사실이었다.

미국의 통화용 금 보유액은 1947년 1월 약 206억 달러에서 1970년 12월 약 111억 달러로 줄었다.

공통의 자가 곧바로 부러진 것은 아니다. 다만 부분지급준비 방식으로 돌아가는 국제은행을 점점 더 닮아갔다. 장부에 적힌 태환 약속이 금고 속 금속보다 많아진 것이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부분지급준비 자체가 결함인 것은 아니다. 은행은 모두 그렇게 돌아간다. 바로 그렇게 돌아가기 때문에 예금이 대출로 바뀌고 돈이 움직일 수 있다. 필요한 조건은 하나뿐이다. 모두가 같은 날 내놓으라고 찾아오지 않아야 한다. 1960년 이후 체제 전체의 처지가 그랬다. 셈을 이어갈 수 없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다만 그날부터는 하루하루가 모두 함께 찾아오지 않는다는 데 달려 있었다.

각국은 금 태환 요구가 몰려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리지 않았다. 보완책이 하나씩 덧대어졌다.

1961년 11월, 서방의 중앙은행 여덟 곳이 런던 금 풀을 만들었다. 런던 시장에서 금을 공동으로 사고팔아 온스당 35달러라는 금값을 지키려 했다. 처음 금 매각 한도는 2억 7,000만 달러였고, 그 뒤로 계속 늘어났다.

같은 시기 미국의 중앙은행은 1962년부터 통화스와프 협정을 대대적으로 늘렸다. 일시적인 스와프와 단기 신용공여로, 당장은 달러를 금으로 바꾸고 싶지 않은 외국 중앙은행들의 포지션을 받쳐주었다. 1971년 금 태환 창구가 닫히기 전까지 스와프 한도는 처음의 9억 달러에서 112억 달러로 늘어났다.

두 장치가 말해주는 것은 같다. 겉으로는 익명의 규칙이 체제를 움직이는 듯했다. 실제로는 중앙은행들이 서로 서주는 보증,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양해, 그때그때의 불 끄기에 점점 더 기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따로 떼어 살펴볼 만한 현상이 하나 있다.

훗날 연구자들은 전후 각국 중앙은행이 일부 설계자들의 예상처럼 금을 차츰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히려 금 준비자산을 꾸준히 다시 쌓고 지켜두었다.

장부로 따지면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금은 이자를 주지 않고, 보유하면 기회비용이 든다. 달러는 미국에 예치하면 이자가 붙는다. 그래도 금은 다른 나라의 신용보다 뒤탈이 덜한 비상용 자산으로 여겨졌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브레턴우즈의 금 수수께끼라고 부른다.

명목상으로는 달러가 금을 대신해 주된 국제 준비자산 노릇을 하는 체제였다. 실제로는 각국의 공적 기관들이 마지막 보험까지 달러에 온전히 맡기려 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잔여항이 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고개를 내민다.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 자리에서다. 밀려난 쪽에 있지 않다. 구축의 내부자들이 가진 대차대조표 안에 있다.

그 중앙은행들은 날마다 달러로 결제하고, 날마다 평가에 맞추어 환율을 제시하며, 날마다 공개적으로 이 체제를 지지했다. 그러면서 금고 안에는 만일의 경우에 쓸 것을 남겨두었다. 언젠가 이 공통의 자가 더는 통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입으로는 이 자를 인정하면서 손에는 다른 패를 쥐고 있었다. 여섯째 글에서 잔여항의 한 모습은 또 하나의 자라고 했다. 시장이 남몰래 간직하는 자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구축이 신용을 잃으면 떠오른다. 이번에 다른 점은 또 하나의 자를 간직한 사람들이 바로 날마다 지금의 자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5. 두 개의 가격

프랑스는 이 의심을 공개석상으로 가져왔다.

1965년 2월 4일, 드골은 기자회견에서 세계 통화제도가 차츰 금을 기초로 하는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금융의 책임을 지는 나라라면 국제수지에서 생긴 빚을 종이 채무증서가 아니라 금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 재무장관은 달러의 중심적 지위가 미국에 주는 이익을 한마디로 불렀다. 과도한 특권. 국제 결제에서 미국은 자신이 발행한 부채를 쓸 수 있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 결제에 쓸 국제 준비자산을 실제 상품과 서비스, 또는 우량자산을 내주어야 얻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프랑스의 입장이 반드시 순수한 원칙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지정학과 국가의 위상에 대한 계산도 들어 있었다. 그래도 이 체제에서 가장 민감한 지점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익명의 국제통화는 실은 특정한 한 나라의 신용증서라는 점이다.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보이던 균열이 막을 수 없는 균열로 변했다.

1967년 11월 18일, 영국은 파운드의 달러 평가를 2.80달러에서 2.40달러로 바꾸었다. 약 14퍼센트의 평가절하였다. 그 뒤 달러와 금에 가해지는 압력이 빠르게 커졌다.

1968년 3월, 런던 금 풀이 무너졌다.

금 풀이 해체된 뒤 일곱 나라 중앙은행은 금 시장을 두 층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공적 기관끼리는 여전히 고정된 공식 가격으로 금을 거래하고, 민간 시장에서는 가격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한다. 각국 중앙은행은 더는 통화용 금을 민간 시장에 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달 18일, 미국은 연방준비은행권 발행액의 25퍼센트를 금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법적 요건을 공식 폐지했다.

이 한 걸음 앞에서는 잠시 멈추어 똑똑히 볼 필요가 있다.

금값과 환율, 준비자산과 지급을 모두 같은 자에 묶으려던 제도가 처음으로 당국 자신의 손에 의해 두 가격의 세계로 갈라졌다.

공식 가격은 여전히 규칙의 언어였다. 협정에 적혀 있고, 중앙은행 사이의 청산에 쓰이며, 모든 공식 장부가 그에 따라 작성되었다. 민간 시장의 가격은 다른 판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훨씬 더 불안한 판단이었다.

여기서 여섯째 글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그때 교자를 쓰던 사람들이 남몰래 다른 자를 간직한 것은 관청의 종이 한 장을 전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이중 시장은 민간이 몰래 남겨둔 것이 아니다. 당국이 제 손으로 그어 만든 것이다. 두 번째 가격의 존재를 당국 스스로 인정하고, 그 가격이 움직일 합법적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구축은 다른 자가 있음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자가 설 터까지 떼어주었다.

두 가격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임시변통이 아니다. 구축이 처음으로 공개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정한 수와 시장이 기꺼이 내놓는 수가 이제 같은 것이 아니라고.

열째 글에서 구축이 힘을 가장 덜 들이는 방법은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을 문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한 일도 모양이 같고, 더 노골적이다. 어떤 부류의 문제를 밖으로 내보낸 것이 아니다. 같은 물건의 또 다른 가격을 내보냈다. 문밖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두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한 것이다.

이 방법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문밖의 수를 문 안으로 가져와 쓸 수 없어야 한다. 그래서 금을 팔지 않겠다는 그 약속이 필요했다. 두 세계 사이에는 반드시 빗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익거래가 하루 안에 공식 가격을 무너뜨릴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기금은 새로운 국제 준비자산을 내놓았다. 특별인출권이다.

공식 설명은 분명하다. 1969년에 만들어진 보충적 국제 준비자산으로, 회원국의 공적 준비자산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 1월 1일 첫 30억 단위가 배분되었고,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총 93억 단위가 배분되었다.

상징성이 큰 개혁이다. 금은 모자라고 달러는 너무 많으면서 너무 취약해졌을 때, 체제는 더 추상적이고 더 제도화된 국제 준비자산 단위를 다시 만들려 했다.

가치를 하나의 척도로 만들려는 충동이 또 한 번 드러난다. 동시에 금만으로도, 달러만으로도 그 자를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 단위가 놓인 처지도 눈여겨볼 만하다. 금속의 몸이 없고, 뒤에 특정한 한 나라가 서 있지도 않다. 여러 나라가 함께 장부에 적어 만들어낸 수다. 더 추상적이고 더 순수하다. 그런데 끝내 주된 국제통화로 자라나지는 못했다. 어떤 것이 자가 될 수 있는지는 아무래도 얼마나 명확히 정의했느냐만으로 정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1960년대 후반에는 또 하나가 빠르게 통제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국 정부가 자본 유출을 제한하려 하자 다국적 기업과 은행들은 갈수록 더 많이 통제를 우회했다. 달러를 미국 밖의 은행 체계로 옮겨 운용했다. 1969년 무렵에는 독일 중앙은행이 이미 이 역외 달러 시장을 자국의 신용 공급 억제 능력을 약화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었다.

자본 이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협정 조항은 종이 위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자본은 벌써 종이 밖의 자리를 찾아낸 뒤였다.

공식 회계표에서 측정할 수 있는 준비자산과 적자는 점점 더 많은 금융의 사슬에 둘러싸였다. 장부 밖에서, 역외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관계에 더 깊이 기대어 이어지는 사슬이었다.

전형적인 넘침이다. 구축이 규칙 하나를 세우면, 그 규칙이 붙잡는 것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거래들이다. 자금은 규칙이 정의하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 누가 일부러 법을 어기려 해서가 아니다. 그쪽에는 제약이 없으니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더 세게 통제할수록 밖으로 나갈 유인은 커진다. 열두째 글에서 경계는 조직 형태 사이에 그어진다고 했다. 장소를 바꾸어 같은 일이 다시 나타난다. 같은 달러라도 뉴욕에 예치하면 통제를 받고 런던에 예치하면 받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같은 달러다.

6. 일시 중단을 지시했습니다

1971년이 되자 위기의 성격이 달라졌다.

문제는 더 이상 미국이 온스당 35달러의 금값을 지킬 수 있느냐뿐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과 호흡을 맞추어 이 연극을 계속할 뜻이 있느냐가 되었다.

1971년 4월 말, 독일 중앙은행과 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이미 기금 총재와 마르크를 변동환율로 돌릴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었다. 5월 6일, 독일 경제장관은 마르크를 잠정적으로 변동환율에 맡기라고 지시했다.

고정평가 체제에서 주요 흑자국이 더는 지키지 않겠다고 나서면, 그것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편 자본 이동의 규모가 갑자기 커졌다. 미국의 순자본 유출은 1970년 129억 달러에서 1971년 296억 달러로 늘었다. 그중 110억 달러가 3분기에 빠져나갔다.

공적 금 보유량이 충분한지를 따지기 전에도, 유동성이 주는 충격만으로 이미 고정평가와 공적 기관에 대한 금 태환이라는 약속은 몹시 위태로워졌다는 뜻이다.

1971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닉슨은 캠프 데이비드에 핵심 경제 참모들을 불러 협의했다. 재무장관, 중앙은행 의장, 국제통화 업무를 맡은 관리들이 참석했다. 그 주말에 확정할 것은 새로운 경제정책 일체였다.

시장이 자연스럽게 진화한 한순간이 아니다. 선거와 무역, 인플레이션과 국제 협상의 여러 계산이 뒤섞인, 고도로 정치적인 주말의 결정이었다.

8월 15일 밤, 닉슨은 전국 텔레비전 연설에서 발표했다. 재무장관에게 달러를 금이나 다른 준비자산으로 바꾸어주는 일을 일시 중단하도록 지시했다고.

‘일시’라는 말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그때 그 말이 반드시 둘러대는 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 시행할 국내 조치들은 실제로 임시 조치로 설계되었다. 90일이라는 동결 기간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대외적인 조치도 당시에는 우선 멈추고 나서 뒤이을 협상에서 더 유리한 자리를 얻으려는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처음부터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구축은 문을 닫으면서도 흔히 진심으로, 그저 살짝 열어두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닉슨은 이 결정을 국내 정책 일체와 한데 묶었다. 90일간 임금과 물가 동결, 10퍼센트의 수입 추가관세, 지출 삭감, 세제 조정이었다. 위기는 국제 통화 투기꾼들에 맞선 방어전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두 문장이다.

그날의 진짜 무게는 그 두 문장에 있다. 당시에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청중은 물가가 동결될지, 수입품 값이 오를지, 내일 자기 임금은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 실질적인 문제들 사이에서 화폐의 정의가 바뀌었다.

첫째 문장. 한 나라 통화의 힘은 그 나라 경제의 힘에 기초한다.

둘째 문장. 그는 외국을 향해 미국은 앞으로도 미래를 바라보는, 믿을 만한 무역 상대국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두 문장을 함께 읽으면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인다.

화폐의 기초를 설명하는 말이 공개적으로 바뀌었다.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데서 경제력과 한 나라를 믿을 수 있다는 데로.

금속에 가려져 있던 부분, 곧 특정한 나라에 대한 신뢰, 그 나라가 정책의 규율을 지키는지에 대한 판단, 그 신용에 거는 내기는 더 이상 화폐 뒤에 숨지 않았다. 대통령 자신이 그것을 화폐의 정면에 놓인 기초라고 선언했다.

열다섯째 글에서 말했듯, 자를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한 번 실행에 옮기고 나면 거둘 수 없다. 1934년에는 금값을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바꾸었다. 이번에는 수를 바꾼 것이 아니다. 그 수가 뜻하던 약속을 거두고, 같은 종이 한 장을 떠받칠 설명을 사람들 앞에서 다른 것으로 갈아 끼웠다.

연설에는 흔히 빠뜨리는 대목이 또 있다. 빠뜨려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닉슨은 은퇴자, 주부, 임금을 받아 사는 노동자를 인플레이션의 피해자로 꼽았다. 임금 동결과 관세는 고용과 구매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포장했다.

그 설명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한 가지는 드러난다. 국제통화제도는 추상적인 체스판이 아니다.

고정환율을 지키지 못하면 그 대가는 임금과 수입품 가격, 고용과 예산에 떨어진다. 어떤 평가를 지키기 위해 적자국은 흔히 금리를 올리고, 수요를 누르고, 수입을 제한해야 한다. 마지막에 감당하는 것은 실제 일자리와 소득의 상실이다.

2절에서 케인스가 왜 조정 압력을 모두 적자국에 떠넘기는 데 그토록 완강히 반대했는지, 여기서 가장 또렷해진다. 스물일곱 해가 지나, 물리쳤던 문제가 돌아왔다. 그것도 그 문제를 물리친 나라 자신의 대통령 연설 속으로 돌아왔다.

당시 버려진 구상이 하려던 것은 흑자국도 조정 의무의 일부를 지게 하는 일이었다. 스물일곱 해 뒤 미국 자신이 조정을 요구받는 쪽이 되었다. 미국이 내놓은 방법은 창구를 닫고 10퍼센트의 수입 추가관세를 매겨 압력을 다른 나라들에 되미는 것이었다. 케인스의 방법을 쓴 것이 아니다. 제 방법을 썼다. 그래도 해결하려는 문제는 바로 케인스가 그때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던 그 문제였다.

7. 필연인가, 선택인가

1971년을 두고 연구자들이 내놓은 설명은 대체로 서로 겨루는 세 갈래로 나뉜다. 취향의 차이가 아니다. 문제 자체를 두고 갈린다.

첫째 갈래는 구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본다.

가장 먼저 나왔고 영향도 가장 컸던 설명은 앞의 경제학자가 제시한 딜레마다. 준비통화를 발행하는 나라는 세계에 유동성을 끊임없이 공급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대외 부채가 금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신뢰의 위기로 이어진다. 뒤이은 한 갈래의 연구는 체제의 두 가지 결함에 붕괴의 원인을 더 많이 돌렸다. 한편으로 준비자산의 증가가 달러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다른 한편으로 중심국인 미국은 1965년 이후 인플레이션을 더 부추기는 재정·통화정책의 조합으로 돌아섰고, 낮은 인플레이션과 금값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이 설명에 따르면 금 태환 창구가 닫힌 데에는 구체적인 방아쇠가 있었지만, 큰 방향은 이미 제도의 모순과 미국의 정책 규율 이탈로 정해져 있었다.

둘째 갈래는 반드시 일어날 일은 아니었으며, 체제는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본다.

이미 1966년에 몇몇 연구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체제가 반드시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미국은 세계의 금융중개자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단기적이고 유동성이 높은 달러 부채를 발행하는 한편 장기 대외자산을 보유한다. 미국이 물가를 안정시키기만 하면 원칙적으로 이 과정은 지속할 수 있고, 금 없는 달러본위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훗날 이 논쟁을 돌아본 문헌은 이들의 견해를 분명히 적었다. 미국 당국이 명목 기준점에 필요한 물가 안정을 유지했다면 체제는 무기한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쪽은 위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정하는 것은 다른 명제다. 달러 부채가 금보다 많아졌다고 해서 즉시 지속 불가능해졌다는 결론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설명이 어디까지 말하는지 정확히 짚어야 한다. 부채가 금보다 많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태환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꾸러 오는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한꺼번에 오는지는 그 약속을 믿느냐에 달려 있다. 믿느냐는 주로 약속한 쪽 자신이 규율을 지켰느냐에 달려 있다. 결정적인 변수는 금고 안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뜻이다.

셋째 갈래는 정치적 선택과 역사의 우연을 더 강조한다.

어떤 연구자들은 1960년대 말의 결과를 오래전에 정해진 결말처럼 쓰는 데 반대한다. 누가 조정 부담을 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상호 비난과 이견이 평가 체제를 죽였다고 본다. 이 흐름을 정리한 다른 문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971년 미국 국내의 무역적자 우려, 일본과 유럽의 수출 경쟁력에 대한 걱정, 의회의 압력, 이듬해 선거에 대한 계산을 강조한다. 그 때문에 환율 문제는 통화의 기술적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시장 진입과 국내 정치의 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외교사의 길로 접근하는 설명도 있다. 통화 갈등을 냉전의 동맹 정치 안에 놓고 보는 것이다. 달러, 금, 기지, 군사비, 원조, 동맹국의 분담은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설명에서도 1971년의 구조적 배경은 물론 있다. 그러나 금 태환 창구를 어느 날, 어떤 방식으로, 어떤 부가 조치들과 함께 닫았는지가 순전히 기술적으로 추론해 얻는 유일한 결과일 수는 없다.

여기서는 판정하지 않는다. 세 갈래 설명이 중요한 까닭은 통화 질서 자체를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를 금을 진짜 기초로 삼고 달러를 전달 장치로 쓰는 객관적인 제도로 보면, 1971년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던 물리적 파열에 가깝다.

금속을 상징으로 삼되 중앙은행의 협력과 미국의 신용에 대한 신뢰가 떠받치는 정치·금융의 혼합체로 보면, 1971년은 신용의 배합을 바꾼 일에 더 가깝다. 금이 하룻밤에 증발하지도 않았고, 달러가 하룻밤에 국제적 역할을 잃지도 않았다. 실제로 바뀐 것은 둘 사이의 비중, 그리고 마지막 결제가 대체 무엇에 기대는지를 세계가 공개적으로 인정한 방식이었다.

두 이해 방식은 같은 사실들을 모두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다만 두 방식에 대응하는 세계는 다르다. 한 세계에서는 구축도 결국 자신이 다스리지 못하는 어떤 것에 제약을 받는다. 다른 세계에서는 줄곧 사람이 구축을 떠받쳐왔으며, 금속은 그 받침의 한 방법일 뿐이다.

8. 가림막이 잘리다

금 태환 창구가 닫힌 이튿날 세계가 일제히 자유변동환율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 각국은 우선 이 체제를 살리려 했다.

1971년 12월 17일부터 18일까지 10개국 그룹은 워싱턴에서 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금의 공식 달러 가격을 35달러에서 38달러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약 8.5퍼센트의 평가절하였다. 다른 주요 국가들도 그에 맞추어 자국 통화를 재평가하고 환율 변동의 허용 폭을 넓혔다.

문제는 이 조정으로 금 태환이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누가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할지, 달러를 계속 보유하는 위험은 누가 질지도 풀리지 않았다. 훗날의 공식 역사서가 이 시도에 내린 평은 짧았다. 너무 적었고, 너무 늦었다.

체제가 더 버틴 시간은 짧았다. 1973년 3월 무렵 유럽은 다시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었고, 그 뒤 고정환율 체제는 사실상 폐기되었다. 1973년 2월부터 3월 사이 주요 공업국은 대체로 변동환율로 돌아섰다.

그러니 두 날짜는 따로 기억해야 한다. 1971년 8월 15일에 끝난 것은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주는 공적 태환이었다. 1973년 봄에 끝난 것은 주요 공업국 사이에 남아 있던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의 틀이었다.

법적 뒷정리는 더 늦었다. 1976년의 협정 개정은 회원국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환율제도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기금의 역할은 회원국의 환율 정책을 감독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현행 협정 제4조 제2항은 분명히 적고 있다. 회원국은 기금의 목적에 부합하는 다른 환율제도를 스스로 선택해 채택할 수 있다. 이 개정은 1978년 4월 1일 발효되었다.

그제야 금을 공통분모로 삼아 환율을 고정하려던 전후 초기의 헌법적 기획이 법적으로도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처음의 물음에 답할 수 있다. 1971년에 대체 무엇을 잘랐는가.

가장 손쉬운 설명은 이렇다. 세계는 이때부터 법정화폐의 시대로 들어섰다. 금속에서 신용으로 나아갔다.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가려버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화폐를 공개적으로, 더 깊이 신용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익명적인 교환 수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달러는 계속 국제적인 가격 책정과 준비자산, 결제의 핵심 매개였다. 금 태환 창구가 닫힌 뒤 이어진 것이 바로 금 없는 달러본위제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달라진 것은 그 매개의 궁극적 기초가 더는 순수한 금속의 제약인 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기초는 갈수록 더 공개적으로 몇 가지 구체적인 일로 드러났다. 미국의 재정과 중앙은행이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가. 미국 정부는 여전히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가. 기금의 감독에는 구속력이 있는가. 주요 중앙은행들은 여전히 협력할 뜻이 있는가.

안쪽을 향하는, 인격과 관계에 기대는 그 힘, 곧 신뢰와 명예와 신용은 익명의 화폐를 대체하지 않았다.

그저 익명 화폐의 기초 안으로, 더 맨몸을 드러낸 채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1971년을 야만적인 금속에서 현대적 신용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진보의 역사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금은 국가의 대차대조표에서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중앙은행이 마지막 보험으로 계속 간직했다. 1971년을 기다려 시작한 일이 아니다. 1950년대부터 줄곧 하던 일이었다. 달러도 금으로 바꿀 수 없게 되었다고 국제적 중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금속을 벗어낸 뒤에도 국제금융을 계속 주도했다.

실제로 바뀐 것은 진자의 위치였다. 통일된 단위로 가격을 매기는 일, 표준화된 가격, 익명적인 결제는 모두 남아 있었다. 다만 그 장치들을 떠받치는 마지막 보증이 한 나라의 신용과 여러 기관의 평판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또렷해졌다.

잘려나간 그 끈은 애초에 인격적인 요소들을 없애주는 끈이 아니었다.

그 요소들을 가려주는 것이었다.

가리는 일과 속이는 일은 다르다. 이 점은 구별해야 한다. 설계자들이 무엇을 숨겨둔 것은 아니다. 그 가림막이 하는 일은 모두가 날마다 다른 나라를 믿을 수 있을지 판단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었다. 수 하나만 보면 되었다. 엄청나게 수고를 덜어주는 일이었고, 실제로 오랫동안 쓸모가 있었다. 그 편리함의 대가는 수가 더는 믿을 만하지 않게 되었을 때 드러난다. 모두가 동시에, 스무 해 넘게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을 다시 배워야 한다.

1971년은 그 가림막을 잘랐을 뿐이다.

자르고 나자 줄곧 작동하던 것들이 처음으로 정면에 놓였다. 어느 나라의 약속이 통하는가. 누가 누구의 뒤를 받쳐주는가. 어느 기관들이 아직 한밤중에 서로 전화를 걸 뜻이 있는가. 한 번도 작동을 멈춘 적 없는 것들이다. 다만 전에는 수 하나 뒤에 숨어 있었다. 그 수는 땅속에서 캐낸 것처럼 보였다.

4절에서 본 중앙은행들의 행동을 이제 좀 더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체제를 믿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날마다 쓰고 있었다. 다만 사람이 세운 자는 언젠가 사람이 내려놓을 날도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날이 오기 전에 금고 안에 다른 것이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그들이 옳았다는 것은 실제 일이 증명했다. 십여 년 앞서 이미 옳았다.

잔여항의 성격도 여기서 한 겹 더 드러난다. 앞선 글들에서 잔여항은 대개 눌리는 쪽에 있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증빙을 내놓지 못하거나, 아예 명부에도 없었다. 이번의 잔여항은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 손에 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하지 않기로 하고 조용히 금고 안에 다른 패를 남겨두었다. 잔여항이 늘 약자의 것일 필요는 없다. 누구든 이 자 밖에 따로 남겨둔 대비책이 잔여항이다. 하나를 더 남겨둘 여건이 있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 자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더 잘 안다.

그렇다고 자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초를 바꾸어 계속 재고 있다. 세계에는 여전히 공통의 가격 표시 단위가 있어야 한다. 여전히 누군가는 마지막 결제를 맡아야 하고, 여전히 아침마다 모든 것에 값을 매겨야 한다.

다만 1971년 8월의 그 밤부터, 그 값이 금속의 무게에서 자라났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값은 사람들이 계속 그 장부의 셈을 인정할 뜻이 있느냐에서 자라난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