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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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경제
제16편 · 총 23편

열여섯째 글. 분배가 낳은 기근: 식량은 있는데, 누가 먹을지는 명부가 정한다

아일랜드·벵골·대약진운동기의 기근에서는 식량의 절대량만큼 가격, 징발, 배급 자격과 정치적 우선순위가 생사를 갈랐다. 누가 명단에 들어가고 누가 제외되는지가 굶주림의 지도를 만들었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식량이 있는 세계에서

1945년, 한 공식 조사위원회는 벵골에 관한 결론 부분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광역 캘커타 주민 가운데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농촌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주리며 고통받았다.

고발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그 기근을 조사할 책임을 맡은 기관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같은 조사에는 더 차가운 문장이 하나 있다. 1943년에 굶주림을 겪은 계층은 단 하나, 농촌의 빈곤한 계층뿐이었다. 부유한 사람들과 광역 캘커타의 산업 노동자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이 두 문장 사이에 놓인 것은 수사가 아니라 선 하나다. 이쪽에서는 먹을 것이 있고, 저쪽에서는 없다. 그 선을 그은 것은 지리도, 기후도, 수송 능력도 아니었다. 규정이 그은 선이었다.

흔히 따로 이야기하는 세 재난을 나란히 놓는 까닭은, 세 곳에서 똑같은 행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자유무역을 신봉하던 19세기의 한 제국에서 일어났다. 벵골 기근은 20세기 식민지의 전시경제에서 일어났다. 대약진 기근은 계획경제와 인민공사의 체제 안에서 일어났다. 세 제도는 전혀 달랐고, 서로 적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세 재난 어디에서도 식량이 물리적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격이라는 기계가 돌아갔고, 수매라는 기계가 돌아갔으며, 배급이라는 기계가 돌아갔다. 어떤 것은 아주 힘차게 돌아갔다. 일어난 일은 이렇다. 일부 사람들에게서 가격과 임금, 법정 배급이나 정치적 신분을 통해 그 기계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식량이 있는 세계에서 굶어 죽었다.

이 문장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기근 하면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천재지변을 떠올린다. 비가 내리지 않고, 벌레가 들끓고, 밭에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 모두가 함께 굶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세 재난은 그런 모양이 아니었다. 차라리 분배가 이루어지는 모양에 가까웠다. 같은 나라에 같은 식량이 놓여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평소처럼 먹고, 다른 사람들은 먹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규칙이 있었다.

앞선 열다섯 편에서 구축이 잔여항을 다루는 방법은 이미 여덟 가지가 나왔다. 더 큰 구축이 바깥에서 풀어주게 하기, 이름을 바꾸어 계속하기, 정확히 재되 묻지는 않기, 비용에 나누어 넣을 수 있는 금액으로 고쳐 적기, 학문의 경계를 한 칸 안으로 당기기, 장부 둘레를 도는 궤도를 내주기, 증빙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그리고 잔여항 자신의 선택으로 재분류하기였다.

여기서는 아홉 번째 방법이 나온다.

장부에 올리지 않는다. 재지 못한 것도, 재놓고 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셈에 들어갈 신분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잔여항은 가장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앞선 글들에서 잔여항은 측정되지 않은 것이었고, 정확하게 재놓고도 보지 않는 한 칸이었으며, 학문 바깥으로 밀려난 문제이자 관계 속에 자라나 기록할 수 없는 앎이었다. 그때까지는 모두 어떤 ‘것’이었다. 여기서 잔여항은 사람이다. 살아 있고, 지금 굶주리고 있으며, 이름을 하나씩 불러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구축은 그들을 작게 만들지도, 다른 무엇으로 고쳐 적지도 않았다. 그저 명부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앞선 열다섯 편을 지나오는 동안 지켜온 원칙이 있다. 구조를 분석하되 도덕적 판결은 내리지 않는다. 맞서는 해석들을 나란히 놓되 독자 대신 판정하지 않는다. 여덟째 글에서 한 번, 이 원칙을 더는 적용할 수 없다고 명시한 적이 있다. 여기가 두 번째다.

다만 적용하지 않을 범위는 분명히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칙을 내려놓는 일이 손쉬운 방편이 된다.

예외는 오직 한 곳이다. 분명히 식량이 있고, 분명히 다른 길이 있으며, 이미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보았는데도 기계는 그대로 돌아갔다. 이 사실은 어느 학술 논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말할 수 있다. 말을 누그러뜨릴 필요도 없다.

여전히 원칙을 지켜야 할 곳은 많다. 수출을 막았다면 식량이 충분했을까. 공급은 실제로 얼마나 줄었을까. 어느 인과의 사슬이 가장 굵었을까. 몇 명이 죽었을까.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을 따로 지목해야 할까.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들이다. 뒤에서 하나씩 펼쳐놓되, 여기서 결론을 대신 내리지는 않겠다.

두 태도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이름 붙이는 일이 성립하는 것은, 바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들에 기대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모든 논쟁이 끝나야 비로소 입 밖에 낼 수 있는 판단이라면, 그 판단은 영원히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논쟁은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가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다.

2. 시장을 가장 적게 흔드는 방식으로

1845년 가을, 감자 역병이 처음으로 아일랜드를 크게 덮쳤다. 1846년에는 병이 더 심해졌다. 같은 해 필 정부가 하던 제한적인 개입이 끝났고, 새로 집권한 휘그당 정부는 더욱 단호하게 시장에 맡기는 쪽으로 돌아섰다.

재난의 물질적 출발점이 병해였음은 물론이다. 기근 전에는 인구의 약 3분의 1이 주식인 감자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1846년과 1847년에 이르면, 누가 살아남는지를 결정한 것은 더는 감자가 얼마나 썩었느냐만이 아니었다. 다른 먹거리가 어떻게 계속 상품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지, 값이 어떻게 매겨지는지, 누구에게 현금이 있는지, 누가 구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가 생사를 갈랐다.

재무부에서 구호를 담당한 관리는 트레벨리언이었다. 그는 훗날 이 위기에 관한 책을 썼다. 정부가 처음 미국에서 옥수수를 사들일 때 세운 목표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적었다. 민간 무역과 시장 가격을 가능한 한 적게 흔들면서 그 빈자리를 메운다는 것이었다. 그 자신의 표현이었다.

후대의 비판자가 그의 뜻을 대신 요약한 말이 아니다. 스스로 적은 말이다. 기록해둘 만한 원칙이라고 여겨 적은 말이기도 하다.

이 문장의 무게를 알려면, 무엇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았는지 보아야 한다. 한쪽에는 수백만 명이 먹을 양식이 있다. 다른 쪽에는 민간 무역과 시장 가격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같은 저울에 올렸다는 것은 둘을 서로 환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양보할 수도 있고, 어느 쪽을 조금 더 챙기고 어느 쪽을 조금 덜 챙길지 흥정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일단 환산할 수 있게 되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상할 것이 없어진다.

1846년 12월, 스키버린의 참상이 런던에 전해졌다. 바로 그때 트레벨리언은 정부가 해외에 곡물을 주문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상인들과 경쟁하게 되어 그들의 계산을 모조리 흐트러뜨린다는 이유였다. 이런 말도 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처럼 많은 인구를 외국에 의지해 먹여 살린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이 두 말 뒤의 작동 방식은 아주 구체적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직접 먹을 것을 주어 살려서는 안 된다. 우선 돈을 내고 식량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국가가 직접 식량을 사러 나서면 상인들을 시장에서 밀어내게 된다.

이 추론은 자기 논리 안에서는 완결되어 있다. 뒷받침할 이유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정부가 큰손으로 나서면 민간 상인들은 선뜻 물건을 들여오지 못한다. 상인들이 들여오지 않으면 이듬해 공급은 더 막막해진다. 당장은 사람을 살리지만 길게 보면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 당시 사람들은 이 논증을 진지하게 믿었다. 오늘날에도 그와 비슷한 논증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 논증의 성립 여부에 있지 않다. 이 논증을 가져와 답한 질문이 무엇이었느냐에 있다. 지금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가, 바로 그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구호는 될 수 있는 한 임금의 문제로 고쳐 쓰였다.

1846년부터 1847년까지 대규모 공공사업이 수십만 명을 도로와 돌담, 제방과 다리의 건설 현장으로 몰아넣었다. 1847년 3월에는 공사장에서 임금을 받는 사람이 70만 명을 넘었다. 가족까지 합하면 300만 명 이상이 이 체계에 기대어 살았다.

장부로 보면 상당한 규모의 동원이었다.

문제는 임금을 주었느냐에 있지 않았다. 한 집이 먹을 양식에 맞추어 준 것이 아니라 현금으로 주었다는 데 있었다. 임금 수준은 식량 가격에 연동되어 있지 않았다. 지급마저 자주 늦어졌다.

트레벨리언 자신이 그 결과를 책에 적었다. 그 임금은 아일랜드 농업 노동자가 예전에 받던 것보다 높았지만, 당시의 식량 가격으로는 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다고 인정했다. 공공사업 현장 주변에서는 구호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날마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도 적었다.

이 문장이 이 절의 중심이다. 무게가 실리는 까닭은 무엇인가를 폭로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폭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미 화폐와 임금이라는 공통의 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수치는 모두 있었다. 공사장도, 인원도, 품삯도 명부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 자로는 사람들이 살아남기에 부족하다는 사실 역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일을 책임진 사람이 직접 적어두었다.

그리하여 아주 특이한 실패가 나타났다. 보지 못한 것도, 계산을 틀린 것도, 소식이 너무 늦게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보았고, 셈을 마쳤고, 기록까지 했다. 그래도 일은 전과 똑같이 처리되었다. 여기서 구축이 맞닥뜨린 것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바꾸려 하지 않는 문제다.

1846년 10월, 트레벨리언은 한 귀족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아일랜드 사회의 악폐를 고치는 처방은 모든 것을 아는 섭리가 직접 내리친 일격을 통해 이미 이 사회에 내려졌다고.

이 말에 형용사를 보탤 필요는 없다. 이 말이 한 일을 보기만 하면 된다.

진행 중인 죽음의 과정을, 성취되어가는 목적 하나로 다시 서술했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목적을 붙이는 순간, 그 일은 막아야 할 것에서 완수해야 할 것으로 바뀐다.

3. 배 4천 척

기근 동안에도 아일랜드가 식량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사실을 둘러싼 논쟁은 100년 넘게 이어졌다. 그 논쟁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한번 볼 만하다.

이 시기를 전문으로 연구한 한 여성 역사가는 논의가 오랫동안 너무 좁은 질문 하나에 갇혀 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곡물이 순수출되었는가, 순수입되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질문을 그렇게 세우는 순간, 다른 먹거리도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려진다.

그가 항구 기록을 토대로 제시한 수치는 이렇다. 1847년 한 해에만 배 4천 척 가까이가 아일랜드에서 식량을 싣고 브리스틀, 글래스고, 리버풀, 런던 등 영국의 주요 항구로 갔다. 1846년부터 1850년까지 살아 있는 채 수출된 가축은 300만 마리를 넘었다. 1847년 한 해 영국으로 보낸 송아지만 9,992마리였다. 그해 첫 아홉 달 동안에도 버터, 생선, 달걀, 위스키와 곡물로 만든 주정이 대량으로 계속 수출되었다.

그가 하려는 말은 그것들을 전부 붙잡아두었으면 틀림없이 모두를 살릴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기근 동안에도 아일랜드는 상업적 농업 생산지이자 식품 수출지로서 제 기능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구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논쟁이 어느 층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정하기 때문이다. 수출을 막아 모두를 살릴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그 ‘아니다’가 다른 질문들까지 한꺼번에 닫아버린다. 기근 동안에도 이곳이 평소처럼 수출지의 기능을 수행했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 항구 기록도 있다.

붙잡아두었다면 충분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역사학계의 견해가 오래도록 갈려왔다. 지금도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이 역사가는 1846년부터 1847년까지 내보낸 양이면 200만 명을 열여섯 달 동안 먹일 수 있었다고 본다. 다른 갈래의 연구는 밖으로 나가는 곡물을 전부 붙잡아두었더라도 감자 생산의 붕괴가 남긴 거대한 구멍을 메울 수 없었다고 본다. 게다가 1847년 이후 곡물의 순이동 방향은 이미 아일랜드로 들어오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근래의 역사학 연구를 종합한 글은 이를 상당히 정확하게 정리했다. 오늘날 주류의 견해는 뒤쪽에 더 가깝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을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두 문장은 따로 기억해야 한다. 양이 충분했는지는 논쟁 중이다. 자유방임의 신조가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앞섰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구호 쪽에는 또 하나 따로 꺼내놓을 규정이 있다.

당시의 ‘4분의 1에이커 조항’에 따르면, 4분의 1에이커 이상의 땅을 보유한 사람은 땅을 포기하지 않고는 구호를 받기 어려웠다.

쉬운 말로 하면 이렇다. 소농이던 자신을 먼저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구호 체계에 들어갈 자격이 생긴다.

이 조항은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꿰매 붙였다. 땅은 신분이고, 구호는 돈과 식량이다. 뒤의 것을 받으려면 앞의 것을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올겨울을 살아 넘기려면 내년 봄에 농사지을 가능성부터 버려야 했다. 부주의가 아니었다. 조항은 또렷이 쓰여 있었고, 의도도 숨기지 않았다. 구호가 소규모 토지 보유를 계속 유지시켜주는 보조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열셋째 글에서 인클로저를 이야기했다. 그곳에서는 땅을 한 조각씩 떼어갔다. 여기서는 스스로 내놓게 했다. 굶주리고 있다는 이유로.

익명의 화폐와 가격이 사람의 지위에 따라 갈리는 질서를 실제로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둘은 포개져 돌아갔다. 먼저 신분으로 분류하고, 그다음 현금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정했다.

다른 길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47년 봄과 여름, 공공사업이 중단된 뒤 임시 무료급식 제도가 세워졌다. 가장 많을 때는 날마다 약 300만 명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사망자 수도 그에 따라 줄어든 듯하다.

하지만 이 제도는 설계된 첫날부터 단기적이고 예외적인 것이었다. 언제든 거둘 수 있었다. 나중에 실제로 거두었다.

시장과 토지 소유의 논리를 통째로 비켜가, 식량을 곧바로 사람의 입에 넣어준 것은 흔히 민간의 자선과 관계망이었다.

퀘이커교도들은 코크를 비롯한 여러 곳에 큰 솥을 걸고 날마다 수프를 끓였다. 영국구호협회는 수많은 어린이에게 오랫동안 무료로 양식을 제공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1846년 말부터 1848년까지 여러 지역에서 민간의 관계망은 국가보다 빨리 재난을 알아차렸고, 더 빨리 무료급식소를 열었다. 시장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먹을 것을 곧바로 목숨을 구할 비상 수단으로 삼는 데에도 더 적극적이었다.

가격이라는 기계가 고장 나거나, 일부러 어떤 간섭도 받지 않도록 유지될 때, 사람들을 정말로 다시 셈에 넣은 것은 흔히 이름 없는 연결이 아니었다. 이름을 걸고 신용과 평판에 기대어 이어진 연결이었다.

4. 오직 한 계층만 굶주렸다

1942년, 벵골에는 몇 가지 충격이 잇달아 겹쳐 덮쳤다.

버마가 함락되면서 쌀의 유입이 끊겼다. 10월에는 벵골 남서부에 사이클론과 해일, 홍수, 벼 도열병이 닥쳤다. 주 사이의 무역 장벽도 높아졌다. 동시에 식민 당국은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이른바 거부 정책을 시행했다. 해안과 내륙 수로의 선박을 통제하거나 파괴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쌀의 비축량도 제한했다.

조사위원회는 나중에 이 정책을 시행한 지역에서 큰 배들이 대거 징발되거나 파괴되었다고 기록했다. 선박 통제가 1943년 여름 이전까지 줄곧 식량 이동을 가로막았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시장이 완전히 사라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전시의 국가가 기존 운송망을 허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에 계속 분배를 맡기려 한 것이다.

이 조합은 따로 들여다볼 만하다. 국가가 손댄 것은 수송이고, 배이고, 징발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실물이었다. 손대지 않은 것은 가격과 분배였다. 그것들은 시장에 남겨두었다. 같은 권력이 한쪽에서는 직접 결정했고, 다른 쪽에서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입하기로 고른 쪽이 하필이면 식량을 사람의 입까지 보내는 구간이었다.

1943년 3월, 당국은 통제를 푸는 쪽으로 돌아섰다. 5월 자유무역이 재개된 뒤 캘커타 시장은 다시 주 전체의 가격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다. 그해 중반에는 쌀값이 1942년 초의 다섯 배에서 여섯 배로 뛰었다.

위원회의 분석 가운데 핵심을 짚는 대목이 있다.

캘커타에 들어온 많은 쌀은 여전히 민간 상인들의 손에 있었다. 그들은 쌀을 쌓아두고 값이 오르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정부의 통제가 없는 상태에서 캘커타의 구매력은 벵골 전체의 가격 움직임을 정했다. 번창하는 도시였고, 구매력도 컸다. 군수산업, 철도, 군과 행정기관, 그리고 우선 계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보조금이나 우선 공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캘커타는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쌀값을 치를 수 있었다.

가격이라는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유난히 힘차게 돌아갔다.

다만 그 기계가 섬긴 것은 국가와 전쟁이 이미 우선권을 주어놓은 구매자들이었다.

여기서 ‘우선’은 행정 용어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구체적인 명단을 가리킨다. 어느 업종과 어느 기관, 어느 사람들이 보조금으로 낮춘 가격에, 또는 먼저 식량을 받을 수 있는지 적힌 명단이다. 누군가 그 명단을 썼고, 쓸 때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였다. 전쟁을 치러야 하고, 공장을 돌려야 하며, 철도를 움직여야 하고, 도시가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가 모두 성립한다. 그런데 그 명단이 성립하는 순간, 명단 밖의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신분이 생겼다. 명단에 없는 사람이라는 신분이었다.

‘명단에 없다’는 말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하나의 신분이다. 실제 효력을 가진 신분이다. 얼마에 식량을 살지, 살 수는 있을지,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할지를 정한다. 그런 명단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명단은 이미 그 사람 대신 그가 올겨울을 어떻게 날지 정하고 있다.

그렇게 첫머리에 인용한 두 문장이 나왔다. 같은 주 안에서 식량은 모두에게 고르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신분과 직업, 공간과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다시 층층이 나뉘어 있었다.

당국의 시장 정책은 줄곧 흔들렸다. 먼저 가격을 제한했다가 암시장을 묵인했다. 한때 매입을 통제하려다가 1943년 3월에 다시 포기했다. 캘커타에서 배급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1944년 1월 31일에 이르러서였다. 사망이 가장 극심하게 몰린 시기는 이미 1943년 하반기에 지나간 뒤였다.

두 시점을 나란히 놓아보자. 배급은 1944년 1월 31일에 시작되었고, 사망의 정점은 1943년 하반기에 있었다. 약 반년의 간격이다. 훗날 효과가 입증된 방법이 반년 늦게 도착했다. 그 반년은 다른 일에 발목이 잡혀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다. 가격을 제한했다가 풀었다가 다시 제한하는 오락가락 속에서 소진되었다.

위원회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랬다. 정부가 더 일찍 캘커타의 식량 공급을 맡아 배급을 시행했다면, 가격 상승이 그런 식으로 주 전체를 휩쓸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아프게 찌르는 말도 남겼다. 당시 식량이 충분하다고 선전한 것은 몹시 현명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그렇다,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현명했을 것이다.

이 한마디는 앞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하나 보탠다.

측정과 통계와 공표는 중립적이지 않다. 당국이 무엇을 공개적으로 말하느냐는 사재기와 공포, 가격의 향방에 직접 영향을 준다. 구축이 내놓는 발표는 하나의 투입물이다. 자기가 서술하는 일 속으로 들어가 그 일 자체를 바꾼다.

5. 누구의 이름을 지목할 것인가

벵골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두 갈래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대신 결론을 내려주기보다 그대로 펼쳐놓는 편이 더 쓸모 있다.

첫째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이다.

공식 전문을 보면, 1944년 4월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보에서 지난해 벵골의 극심한 기근으로 적어도 70만 명이 죽었다고 직접 인정했다. 인도의 식량 문제에 대한 지원도 계속 요청했다.

그의 책임을 보는 역사학계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 갈래의 연구는 런던의 전시 우선순위, 선박 수송력의 배분, 금융과 가격 정책, 제국 안의 인종 서열을 더 강조한다. 다른 갈래는 자연재해, 행정 혼란, 런던의 결정, 시장 실패를 모두 같은 용의선상에 놓고 보자고 주장한다. 전시 수매와 흉작도 그만큼 중요하며,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그를 주된 원인으로 따로 지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자체가 바로 논쟁의 일부다. 여기서는 판정하지 않는다.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회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따로 지목해야 하는가와, 이 일에 책임질 사람이 있는가는 다른 질문이다. 앞의 질문에는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뒤의 질문에는 답이 있다. 위원회 자신이 더 일찍 배급했다면 가격 상승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그 문장 안에 이미 책임의 주체가 들어 있다.

둘째는 이론의 논쟁이다. 뒤에서 다룰 모든 내용의 방법론적 배경이기도 하다.

1981년 아마르티아 센은 훗날 거듭 쓰이게 된 판단을 내놓았다. 기근은 식량 가용량이 보통이거나 심지어 넉넉할 때에도 흔히 일어난다. 핵심은 총량이 아니라, 법과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느냐에 있다. 센은 이 능력을 획득권이라 불렀다. 특히 교환을 통한 획득권을 중시했다. 손에 쥔 노동력과 토지, 가축, 화폐와 물품으로 주어진 가격과 규칙 아래서 얼마나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농촌 품팔이 노동자의 임금이 쌀값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획득권의 붕괴다.

반론은 빠르고 거셌다.

1986년 한 비판자는 이 이론이 잘못된 진단과 잘못된 처방을 낳는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썼다. 특히 벵골 분석은 믿을 수 없고 부정확한 통계에 기대고 있으며, 센 자신이 쓴 자료마저 그의 논지와 모순된다고 했다. 같은 해 센은 상대의 글이 개념의 혼동, 경험적 사실에 대한 잘못된 서술, 체계적인 왜곡으로 가득하다고 반격했다. 이 공방만 놓고 보면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다. 나중에도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

다른 연구자는 1942년의 흉작이 심각하게 과소평가되었다며, 여전히 공급이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센은 위원회가 수정한 자료에 따르면 1943년의 1인당 가용 공급량은 1941년보다 적지 않았다고 맞섰다. 기근을 실제로 설명하는 것은 전쟁 수요와 가격 폭등, 불평등한 구매력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자는 양 끝 사이에 섰다. 흉작과 전시 수매, 행정 혼란과 시장 실패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1993년에는 한 연구자가 유용한 구별을 제시했다. 획득권이라는 접근법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이를 식량 가용량 감소에 대한 정면 부정으로 읽는다. 다른 하나는 가용량 감소가 물론 기근을 낳을 수 있지만, 흔히 가격과 고용, 임금과 교환조건을 악화시키는 경로를 거쳐 작용한다고 읽는다. 뒤의 해석에 따르면 획득권은 총량이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이론보다, 분석을 짜는 틀에 가깝다.

비판은 공급 쪽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기근을 연구한 학자들은 두 가지를 지적했다. 사람들은 기근 때 생계의 밑천이 되는 자산을 팔기보다 차라리 덜 먹거나 굶기도 한다. 이렇게 스스로 먹는 양을 줄이는 선택은 단순한 함수에 담기 어렵다. 또 많은 기근에서 주된 사인은 굶주림 자체가 아니라 질병의 유행이었다. 훗날 이런 문제 제기는 네 가지로 정리되었다. 스스로 굶주림을 감수하는 일, 질병이 사망을 주도한다는 사실, 권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 법적 규칙 밖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비공식적 이전이었다.

함께 놓고 보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리가 가능하다. 그 틀은 왜 식량을 살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강하다. 왜 결국 죽음에 이르는지까지 남김없이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40년째 끝나지 않은 이 논쟁 자체의 모양도 한번 볼 만하다.

한쪽은 총량을 묻고, 다른 쪽은 분배를 묻는다. 그런데 양쪽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은 정작 논쟁의 초점이 아니다. 참여자 가운데 누구도 세상에 식량이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구조적으로 그것을 얻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양쪽 모두 그럴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거기서 더 파고드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바로 양쪽이 함께 인정하는 그 층위에 이 글은 발을 딛으려 한다. 학술 논쟁에는 특징이 하나 있다. 늘 의견이 갈리는 쪽으로 향한다. 그래야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그쪽으로 가다 보면, 합의한 층위는 도리어 아무도 다시 말하지 않게 된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된다. 하지만 명부 밖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줄곧 중요했던 것은 바로 그 층위였다.

6. 더 많이 생산한 곳에서 더 많이 죽었다

1958년, 대약진과 인민공사화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공동식당, 부풀린 생산량 수치, 중앙에 집중된 수매, 도시와 농촌 사이의 편향된 분배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이 기근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은, 스스로 이미 시장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내세운 체제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가격과 계산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습을 바꾸어 사회에 더 깊이 박혀들었다. 계획 지표, 수매 비율, 도시의 배급 식량, 수출 과제, 행정 목표가 되었다.

한 연구진이 생산과 수매, 인구를 다시 추정해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1959년 농촌의 평균 식량 가용량은 높은 사망률을 피하는 데 필요한 최저량의 세 배에 여전히 가까웠다.

둘째, 기근이 이어진 그 몇 해 동안 사망률은 뜻밖에도 1인당 식량 생산량과 양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둘째 항목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더 많이 생산하는 곳이 더 안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이 죽는 경우가 흔했다는 뜻이다.

원인은 수매량을 정하는 셈법에 있었다. 정해놓은 목표와 과거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과제를 내려보냈다. 많이 생산하는 곳일수록 기준이 높았고, 거두어가는 비율도 높았다. 연구진은 이 수매 방식으로 기근의 전체 사망 가운데 32~43퍼센트를 설명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것은 구축에 관해 더 넓게 적용할 수 있는 작동 방식이다.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다. 과거의 실적에 따라 과제를 배정하는 구축은 잘한 쪽을 벌한다. 보통은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내고, 더 높은 목표를 떠맡는 식으로 벌을 받는다. 여기서는 벌의 형태가 죽음이었다.

한 겹 더 괴로운 추론도 있다. 수매 기준이 지난날의 생산량에서 나온다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한 곳일수록 기준은 높아지고 더 많이 빼앗긴다. 당시 허위 보고는 널리 퍼져 있었고, 장려되었으며, 때로는 요구되기까지 했다. 부풀린 수치가 먼저 장부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장부에서 나와, 실제로 실려 나가는 식량이 되었다. 장부의 숫자와 밭의 곡식은 본래 다른 것인데, 수매는 앞의 것을 뒤의 것이 있다는 증빙으로 삼았다.

제도와 신분이 묶이는 방식도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중국의 이 기근을 두 설명이 함께 적용되는 사례로 다룬 연구가 있다. 도시의 배급 체계는 도시 주민에게 법으로 보장된 식량 획득권을 부여했다. 농촌은 국가 수매가 끝난 뒤에야 남은 식량을 받았다. 훗날 도시와 농촌의 분리를 다룬 연구는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도시 주민에게는 최소한의 양식이 보장되었지만, 농촌 주민에게는 수매 뒤 남은 것에 대한 권리만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례에서 사람을 배제한 것은 가격이 아니었다. 법정 신분과 행정이 정한 식량 배분 순서였다.

수출도 비켜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줄기다. 한 연구자는 현 단위 자료를 이용해 추정했다. 1957년부터 1959년 사이 중국의 식량 수출은 190만 톤에서 410만 톤으로 늘었다. 대약진 시기 전체의 수출량은 약 960만 톤이었다. 이 연구자는 수출 충격이 초과 사망의 약 15퍼센트를 설명한다고 보았다. 또 수출을 위한 수매가 이루어지고 나면, 국내 도시의 소비를 위해 수매한 식량보다 재해 지역으로 돌려보내기가 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미 국경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아일랜드의 일과 서늘하게 맞울린다. 기근 중에 식량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한 번도 단순한 수송 문제였던 적이 없다. 우선순위를 작동 방식 자체에 새겨넣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기근을 설명하는 학계의 견해가 하나만 남았다는 뜻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다른 설명은 인민공사의 공동식당이 소비의 효율을 망가뜨렸다고 본다. 재산권의 구분이 사라지고 식량이 무상으로 제공되면서, 극심한 부족이 오기 전에 낭비와 과잉 소비가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본래 간신히 버틸 수 있었을 공급이 그 때문에 재난으로 치달았다고 한다. 모든 책임을 단 하나의 인과관계로 곧장 최고 지도부에 돌리는 데 반대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들은 쓰촨 같은 곳에서는 지방마다 다른 집행 방식과 날씨, 성들 사이의 막대한 차이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망자 수에 관한 연구자들의 추정은 1,650만 명에서 4,500만 명까지 벌어져 있다. 이 범위 자체를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중 어느 숫자 하나를 고르지 않겠다.

하지만 당시의 발언을 보면, 최고 지도부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기록물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이미 1958년 늦가을에 대약진의 극단적인 관행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농민에게 지나치게 일을 시키고 먹을 것과 잘 곳을 충분히 주지 않아, 전염병과 아사를 낳는 행태였다. 1959년 7월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생산량을 부풀리는 풍조와 극단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편지를 비공개로 올렸다. 회의 뒤에는 오히려 반우파의 압력이 더 거세졌다. 같은 회의의 연설에서 마오쩌둥은 일부 간부들이 생산대의 살찐 돼지와 배추를 가져간 일은 잘못이라고도 인정했다. 그런 행위를 등가교환 원칙의 위반이라고 설명했다.

이 자료들이 함께 말해주는 것은 아주 구체적이다. 지도부는 식량이 위로 뽑혀 올라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일선 식당에서 끼니를 잇기 어렵다는 것도, 간부들이 생산대의 재물을 가로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눈에 들어온 이상 징후를 제때 제도적 조치로 바꾸어 피해를 멈추지 못했다.

1961년에 기근을 끝낸 방법은 아주 단순했다. 중앙이 농촌으로 대규모 식량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약 3천만 톤의 비축분을 풀었고, 중국을 식량 순수출국에서 순수입국으로 바꾸었다.

기계는 멈출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거꾸로 돌릴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는 실제로 거꾸로 돌았다.

문제는 거꾸로 돌리기 시작한 때가 너무 늦었다는 데 있다. 그 앞의 3년 동안 기계는 이미 수많은 사람을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에서 지워버린 뒤였다.

7. 관계가 사람을 살린다

세 사례를 함께 읽으면 두 번째 공통점이 드러난다. 첫 번째보다 덜 이야기되는 공통점이다.

겉보기에 철저히 익명인 분배 방식도 결국에는 구체적인 사람과 관계를 통한 통로에 기대어 고쳐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수선은 한 번도 평등하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는 퀘이커교도와 영국구호협회, 지방 위원회와 믿을 만한 증언을 잇는 관계망이 국가의 우선순위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 방법은 단순했다. 땅이 있는지 묻지 않고, 돈을 낼 수 있는지 묻지 않았다. 솥을 걸고 수프를 끓여, 오는 사람에게 주었다.

이들이 묻지 않은 것들은 바로 당국의 방식에서 가장 꼼꼼하게 따지던 항목들이었다. 땅이 있느냐가 구호를 받을 수 있느냐를 정했고, 돈을 낼 수 있느냐가 식량을 살 수 있느냐를 정했다. 그 둘을 함께 내려놓자 사람을 살리는 효율은 곧바로 높아졌다. 자선이 제도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자선이 닿는 범위는 훨씬 좁고, 안정적이지도 않다. 나누어줄 것이 떨어지면 끝이다. 여기서 분명히 보이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 두 질문을 한 까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것을 위해서였다.

벵골에서 우선 계층이라는 신분은 추상적인 시장 참여 자격이 아니라 정치화된 관계였다. 보조금과 우선 공급을 받은 것은 군수산업, 철도, 군과 행정기관이었다. 누구를 우선으로 칠지는 사람이 결정했다. 가격이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격이 모든 것을 정하는 듯 보이는 곳에서도 가격 뒤에는 여전히 명단이 있다. 시장은 구매력에 따라 분배한다. 그런데 그 구매력은 보조금과 우선 공급을 통해 분배된다. 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익명의 작동 방식 아래에는 언제나 이름을 가진 사람의 결정이 있다.

중국의 사례는 가장 곱씹어볼 만하다. 연구에 따르면 그 고장 출신의 지방 관료는 다른 곳에서 온 관료보다 수매에 여지를 남겨두고 구호에 더 많이 투입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결과 관할 지역의 사망률이 뚜렷하게 낮아졌다.

세 곳에서 나타난 형태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화폐와 가격, 수매와 계획은 관계를 없애지 못했다. 관계는 이 체계들이 가장 차가워졌을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 말에는 나머지 절반이 있다. 그 절반도 반드시 함께 써야 한다.

관계에 기대어 살아남는 것은 불평등한 생존이다.

아는 누군가가 있거나, 마침 그 고장 출신 관료가 다스리는 곳에 살거나, 아니면 수프를 끓이는 솥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모두 우연한 조건이다. 모두 그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가와는 무관하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 한 사람이 오직 그런 것들에 기대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모두를 똑같이 대한다고 내세우는 체계는 이미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계가 모습을 드러낼 때, 제도가 빈틈을 메우는 것이 아니다. 제도는 이미 사라져 있다.

앞선 열다섯 편을 지나온 선이 여기서 하나로 이어진다. 익명의 자와 구체적인 사람 사이의 신뢰는 한쪽이 다른 쪽을 대체한 적이 없다. 줄곧 얽혀 있었다. 가장 차가웠던 그 몇 해 동안에는 뒤의 것만 제 몫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닿는 범위는 아주 좁았다. 손이 닿는 사람들만 겨우 구할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야 한다. 구체적인 사람에게 기대는 쪽은 예비 방안이 아니었다. 늘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에는 익명의 쪽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재난의 해에 일어난 것은 그것이 새로 가동된 일이 아니다. 위를 덮고 있던 층이 무너져, 가려졌던 것이 드러난 일이다. 드러난 뒤에는 사람을 살린다. 사람을 고르기도 한다. 언제나 자신이 아는 사람들만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 글에서 이야기한 더 오래된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읽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도 사람을 골랐다. 고르는 규칙이 달랐을 뿐이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하나다. 가장 차가웠던 그 몇 해 동안 사람을 다시 셈에 넣은 것은 흔히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내세우는 자가 아니었다. 몇몇 구체적인 사람이 다른 몇몇 구체적인 사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반드시 적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모든 자료 가운데 가장 단단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세 사례 모두에서 다른 길은 눈앞에 있었다.

1847년 아일랜드의 무료급식망은 가장 많을 때 날마다 300만 명을 먹였다. 벵골 조사위원회는 사후에 분명히 적었다. 더 일찍 캘커타의 공급을 통제하고 배급을 시행했다면 가격 상승이 주 전체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중국에서는 1961년 비축분을 돌려보내고 수입으로 전환하자 기근이 끝났다.

세 곳의 다른 길은 후대 사람들이 상상해낸 것이 아니다. 당시에 이미 있었다. 어떤 것은 실제로 한동안 쓰이다가 거두어졌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해서는 안 될 말은 이것이다. 당시의 조건에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기계를 멈출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도덕적으로 이름 붙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전제다. 멈출 수 없는 기계가 사람을 짓이기고 지나가면 재난이다. 멈출 수 있는데도 멈추지 않은 기계가 사람을 짓이기고 지나가면, 그것은 다른 것이다.

8. 명부 바깥

이제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다.

세 기근에는 식량이 있었다. 다른 길이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었고, 누군가 그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기계는 그대로 돌아갔다.

이 세 가지는 추론이 아니다. 기록이다.

아일랜드의 관리는 그 품삯으로 당시의 식량 가격을 감당하며 한 가족을 먹일 수 없었다고 직접 적었다. 공사장 주변에서 날마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도 적었다. 벵골의 공식 위원회는 광역 캘커타에서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농촌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주리며 고통받았다고 직접 적었다. 더 일찍 배급했다면 가격 상승이 주 전체를 휩쓰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도 적었다. 중국의 최고 지도부는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간부들이 생산대에서 무엇을 가져갔는지 회의에서 직접 말했다.

세 곳 모두에서 누군가 보았다. 세 곳 모두에서 누군가 적었다. 세 곳 모두에서 기계는 그대로 돌아갔다.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의 뜻은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아일랜드에서는 공공사업을 벌였고, 나중에는 무료급식소도 열었다. 벵골에서는 마침내 배급을 실시했다. 중국에서는 마침내 비축 식량을 돌려보냈다. 일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은 다른 것을 가리킨다. 그런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식량을 거두는 일은 그대로였고, 수출도 그대로였으며,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도 그대로였다. 바로 그 세 가지가 사람을 밖에 가로막아두던 것들이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사람을 막는 그 행위는 끝내 멈추지 않았다.

사람을 셈에 넣을 수도 뺄 수도 있는 단위로 다룬다. 빼고 나서도 평소처럼 식량을 거두고, 수출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공급한다. 이 일은 곧바로 말해야 한다. 완곡한 말을 붙일 필요도, 어떤 논쟁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논쟁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대신 끝내지도 않겠다. 앞의 여러 절에서 펼쳐놓은 쟁점들은 지금까지 어느 하나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들을 위의 문단과 함께 놓고 판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이름 붙이는 일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느 한 학파가 이긴 뒤에야 성립하는 판단은 버틸 수 없는 판단이다. 이름 붙이는 일이 성립하려면 양쪽 모두 부정하지 않는 층위에 서 있어야 한다.

틀로 돌아오면 마지막으로 짚을 것이 하나 남는다.

세 기근에서 사람을 배제한 기술적 형태는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시장 구매력에, 하나는 정치적 우선순위에, 하나는 법정 신분과 행정이 정한 식량 배분 순서에 기대었다. 하나는 자유무역 제국에서, 하나는 식민지 전시경제에서, 하나는 계획경제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효과는 완전히 같았다.

배제는 어느 특정 제도만의 병폐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을 정산할 수 있는 단위로 만드는 행위 자체에 딸려 나온다. 자를 세우면 그 자에는 값이 영인 칸이 생긴다. 그 영의 칸에 서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자를 세우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앞선 열다섯 편에서 이미 여러 번 말했듯이, 자는 많은 일을 해냈다. 다른 방법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하려는 말은 하나다. 자를 세운 사람에게는 영의 칸을 줄곧 지켜볼 의무가 있다. 그 칸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장부에서는 빈칸으로 나타난다. 빈칸은 장부에서 가장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글들에서 잔여항은 적어도 흔적을 남겼다. 셈이 풀리지 않는 묵은 거래 한 건, 어둠 속의 자 하나, 내놓지 못하는 증빙 하나가 있었다. 여기서는 흔적마저 남기지 않는다. 잔여항이 남기는 것은 빈자리다.

아홉 번째 방법은 이 아홉 가지 가운데 힘이 가장 덜 든다. 앞선 여덟 가지에는 모두 손이 가야 했다. 풀어야 하고, 이름을 바꾸어야 하고, 묻지 않아야 하고, 환산해야 하며, 경계를 좁히고, 궤도를 내주고, 증빙을 요구하고, 재분류해야 했다. 아홉 번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명부를 만들 때 이 사람을 넣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 뒤의 모든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

장부의 셈을 맞추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항목마다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항목을 셀지부터 정하는 것이다.

모든 장부에서 성립하는 말이다. 재난 구호의 장부에서는 특히 그렇다. 구호 장부는 한 번뿐이며, 몇 달 안에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 조금씩 보완할 여유가 없다. 일단 어떤 모습으로 짜이면 그 모습 그대로 집행된다. 집행의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

아일랜드의 구호 명부에는 4분의 1에이커의 땅을 가진 사람이 들어가지 못했다. 벵골의 우선 명단에는 농촌의 품팔이 노동자가 없었다. 중국의 식량 배분표에서 농촌은 수매 뒤 남은 것만 받았다. 세 명부를 짜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세 명부 바깥에는 모두 사람이 서 있었다.

명부 밖에 있다고 먹어야 할 필요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명부 밖에서 죽었다.

기근이 지나갈 때마다 명부는 다시 만들어진다. 칸 몇 개가 더해진다. 칸을 더하고 나면 명부는 더 완비되고, 더 넓게 포괄하며, 통계는 더 세밀해진다.

명부 바깥에는 여전히 사람이 서 있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