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째 글. 공유지와 인클로저: 이름 없는 것들은 울타리 밖에 남았다
인클로저는 공유지를 사유재산으로 바꾸고 토지마다 한 명의 소유자를 적었다. 그러나 계약서 없이도 이어지던 방목·이삭줍기·연료 채취의 관습권은 새 장부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 글의 목차
1. 제집에서 겨울을 나는 가축
잉글랜드의 장원 법정에는 공유지에 풀어놓을 수 있는 가축 수를 제한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정해진 수를 배정하는 방법이었다. 집집마다 몇 마리까지 허용할지 정하거나, 가진 지분에 따라 몫을 계산했다. 땅 한 몫에는 소 몇 마리, 오두막 한 채에는 양 몇 마리 하는 식이었다. 숫자 하나면 되었다. 적어두고 그 수에 맞는지 세면 되었다.
둘째는 제집에서 겨울을 나는 가축만 허용하는 방법이었다. 공유지에 풀어놓을 수 있는 것은 겨울에 제집에서 먹여 살릴 수 있고, 제집 마당에서 눕고 일어날 수 있는 가축에 한정한다는 뜻이다.
둘째 방법은 숫자가 아니다. 몇 마리까지라는 상한을 정하는 대신, 그 집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상한을 연결한다. 꼴을 넉넉히 마련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집은 많이 풀어놓고, 적게 마련한 집은 적게 풀어놓는다. 작황이 좋으면 마을 전체의 상한이 저절로 올라간다. 흉년이면 저절로 줄어든다. 해마다 다시 모여 새 숫자를 정할 필요가 없다. 규칙이 스스로 셈을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규칙을 지키게 하는가. 이웃이 모두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집 마당에 꼴이 얼마나 쌓였는지, 어느 집 외양간에서 가축 몇 마리가 겨울을 나는지, 한마을에서는 숨길 수 없다. 이 규칙에는 장부가 필요 없다. 서로를 잘 알고 한곳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필요하다.
두 방법에는 저마다 치러야 할 값이 있다. 정해진 수를 배정하는 방식은 깔끔하고 옮겨 쓰기 쉽다. 다른 마을에서도 그대로 쓸 수 있고, 그곳에 처음 온 사람도 대장을 들고 확인할 수 있다. 제집에서 겨울을 나는 가축이라는 기준은 옮겨 쓸 수 없다. 모두가 서로를 아는 곳에서만 성립한다. 다른 곳에 가져다 놓으면 빈말이 된다. 앞의 것은 장부에 담을 수 있다. 뒤의 것은 담을 수 없다.
이 두 방법의 차이를 먼저 기억해두자. 그 뒤 300년 동안 벌어진 일은 한 방법이 다른 방법을 조금씩 밀어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공유지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땅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의 법과 관습에서 공유지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여러 권리가 겹쳐 이루어진 체계였다. 흔한 권리만 해도 여섯 가지였다. 공동 목초지에 소와 양을 풀어놓는 방목권. 가을이면 숲에 돼지를 몰고 가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를 먹이는 권리. 잔가지와 고사리, 가시금작화를 가져다 땔감이나 지붕 재료로 쓰는 권리. 뗏장이나 이탄을 잘라 연료로 쓰는 권리. 공동 수역에서 물고기를 잡는 권리. 모래와 돌, 점토와 광물을 채취하는 권리도 있었다.
마을 사람 모두에게 이 여섯 권리가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특정한 보유지, 특정한 오두막, 특정한 부동산 단위에 딸린 권리였다. 행사할 수 있는 사람도 자유보유자, 장원 법정 대장에 권리가 기록된 관습보유자, 이름이 분명한 몇몇 가구로 정해져 있었다. 지나가던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이 점은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뒤 200년 동안 가장 큰 오해가 여기서 생겼기 때문이다. 공유지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실제로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얼마나 쓸 수 있는지, 거의 모든 항목에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다만 그 방식은 종이에 적혀 있지 않았다. 마을의 기억에 적혀 있었다.
이 권리들을 관리한 것은 지역의 법정과 모임이었다. 장원 법정과 영지 법정, 산림 구역의 회의가 여러 층으로 있었다. 마을 규약을 만들고, 언제 방목할 수 있는지, 한 번에 몇 마리까지 풀 수 있는지 정했다. 병든 가축은 들이지 못하게 하고, 어기면 벌금을 얼마나 물릴지도 정했다.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거듭 강조하는 말이 있다. 누구나 뛰어들어 제멋대로 다투는 판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면적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두고는 역사학계에서도 견해차가 크다. 어떤 연구자는 1500년 무렵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공유지가 전체 토지의 절반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 곧바로 덧붙인다. 마을 구성원 누구나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라고. 다른 연구는 자선단체 소유 토지의 표본으로 전체를 추산해, 1600년 잉글랜드의 공유지가 전체 토지의 약 26~27퍼센트였다고 본다. 실제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할 부분은 4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두 숫자의 차이는 크다. 그래도 양쪽이 동의하는 한 가지는 있다. 역사 속 잉글랜드의 공유지는 끝도 경계도 없이 자원이 널린 황무지가 아니었다. 권리와 지역권 관계, 장원 법정과 지방 관습이 여러 겹으로 한계를 정해놓은 이용 체계였다.
그 뒤 300년 동안 벌어진 일은 하나의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억과 관습, 이웃 관계 속에서 자란 이용 체계 전체를 다른 언어로 옮겨야 했다. 나눌 수 있고, 값을 매길 수 있고, 사고팔 수 있는 언어. 지도에 그릴 수 있고, 권리증서에 적을 수 있고, 법정에서 입증할 수 있는 언어였다. 옮길 수 있는 것은 새 장부에 들어갔다. 옮길 수 없는 것이 이제부터 따라가 볼 잔여항이다.
2. 소 한 마리
훗날 무엇을 잃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소 한 마리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보아야 한다.
우유 값만 묻는다면 소 한 마리의 가치는 알아낼 수 있다. 한 해에 젖이 얼마나 나오는지, 우유 한 말이 얼마에 팔리는지 찾아 곱하면 된다. 그러나 공유지 가장자리에 사는 집에서 그 소의 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소는 젖을 낸다. 우유에서 크림을 걷어내고 남은 것은 돼지에게 먹인다. 돼지가 자라면 겨울에 잡아먹을 수도 있고 팔 수도 있다. 소는 똥을 싼다. 똥은 집 옆 텃밭으로 간다. 텃밭에서 채소가 나고, 채소는 솥에 들어간다. 소를 돌보는 것은 그 집 아이다. 아이는 여름 내내 비탈에 서 있지만 품삯을 받지 않는다. 일한 것으로 치지도 않는다. 치즈를 만드는 것은 그 집 여성이다. 끼니를 차리는 것도 그 사람이다.
그러니 소 한 마리는 자산 하나가 아니다. 한 체계의 중심이다. 소를 빼내면 나머지도 함께 무너진다. 돼지에게는 먹일 것이 없고, 텃밭에는 거름이 없다. 아이는 시간이 남지만 그 시간으로 다른 것을 얻을 수 없다. 여성이 하던 몇 가지 일은 손쓸 대상을 잃는다.
중요한 것은 이 체계의 어느 부분도 따로 떼어놓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유만 팔아서는 얼마 되지 않는다. 쇠똥은 상품이 아니다. 아이가 소를 돌보던 여름은 어느 임금표에서도 영이다. 여성의 치즈 만드는 솜씨를 고용할 사람은 없다. 이것들은 이어져 있을 때만 무게를 갖는다. 서로를 이어주는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그 집이 날마다 살림을 꾸리는 방식이다.
공유지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에이커당 임대료를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만으로 셀 수 없다. 공유지가 내주는 것은 겨울의 땔감이고, 흉년에 모자라는 살림을 메울 몫이며, 한 집이 집 곁에 꾸려놓은 작은 체계가 숨 쉴 여지다.
이삭줍기에서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 수확이 끝나면 가난한 집 여성과 아이들이 수레 뒤를 따라가며 밭에 떨어진 밀 이삭을 주웠다. 이를 연구한 역사가들은 값을 추산한 적이 있다. 고정된 임금으로 사는 일부 가구에서는 한 해 주운 곡식이 33실링어치에 이르렀다. 연간 소득의 10.4퍼센트였다. 남성 없이 여성이 가장을 맡은 집이나 흉년에는 그 비율이 더 높았다.
10.4퍼센트라는 비율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용돈도, 보조금도 아니다. 한 집의 한 달 치 소득을 조금 넘는 몫이다. 게다가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나지 않는 때를 앞두고 생기는 몫이었다. 한 해 가장 절실한 수입이 어느 장부에도 이름이 없는 일에서 나왔다.
이삭줍기는 거의 온전히 여성의 영역이었다.
열두째 글에서 장부 아래 비어 있는 칸을 이야기했다. 여기서는 그 칸에 구체적인 밭이 생긴다. 수확 뒤 밭에 떨어진 밀 이삭은 통째로 팔 수 있는 부동산의 일부도 아니고, 저절로 누군가의 임금이 되지도 않는다. 돈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먼저 한 알 한 알 주워 와야 한다. 같은 사람들이 다시 빻고, 끓이고, 돼지에게 먹이고, 저장해야 한다. 그래야 먹고 태우며 겨울을 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 사이에 들어간 노동 전체는 어느 장부에도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눈여겨볼 일이 하나 있다. 이 시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유지 권리의 가치를 설명하려 할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시장의 비슷한 상품 가격으로 환산하는 것뿐이다. 우유는 우유 값으로, 땔감은 땔감 값으로, 주운 곡식은 곡식 값으로 친다. 그렇게 환산하는 사람들도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애초에 거래가 없었으므로, 비슷한 가격을 억지로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고.
환산한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문제를 드러낸다. 처음부터 시장 장부에 제대로 적혀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 나서서 대신 환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가치가 없었던 것도, 아무도 몰랐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름을 등록할 수 있는 보유자가 없었다.
이 시대의 잔여항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측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측정은 할 수 있다. 훗날 역사가들이 하나씩 재어보기도 했다. 정확하게 재었는데 아무도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보는 사람은 늘 많았다. 곤란은 다른 데 있다. 어느 한 사람의 명의로 돌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새 언어는 명의만 알아본다.
명의라는 말이 새 언어의 중심에 있다. 옛 언어에서는 하나의 것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소는 이 집 것이고, 풀은 공동의 것이며, 소를 돌보는 것은 아이고, 덕을 보는 것은 온 식구였다. 새 언어는 모든 것이 같은 순간에는 오직 하나의 이름에만 속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한 사람의 이름 아래 쓸 수 있는 것은 구축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쓸 수 없는 것은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놓아둘 자리가 없을 뿐이다.
젖은 소의 것이고 소는 이 집의 것이다. 그런데 그 솥과 아이의 여름, 여성의 손에 들린 일, 흉년에 목숨을 건져주던 얼마 안 되는 여지는 누구의 명의로 등록하는가.
3. 이제부터 누구도 땅에 울타리를 치지 못한다
땅에 울타리를 쳐 배타적인 보유지로 바꾸는 인클로저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벌어진 사건이 아니다.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하며 길게 이어진 선이다. 그 선의 처음 구간은 나중과 반대 방향을 향했다.
1489년부터 왕권과 의회는 여러 차례 법을 만들어 인클로저를 억제했다. 이유는 경제학에 있지 않았다. 정치에 있었다. 인클로저가 마을의 인구를 줄이고 사회 불안을 일으켜 질서를 흔든다고 보았다. 16세기 전반의 초기 인클로저 상당수는 영주가 직영지와 임차 기간이 보장되지 않은 소작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기에 추진되었다.
이 대목을 잘 보아야 한다.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놓기 때문이다. 후대에는 인클로저를 진보 쪽에, 그것에 대한 반대를 수구 쪽에 놓고 이 역사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처음 100년 동안 반대쪽에 선 것은 왕권과 의회였다. 사람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면 그 뒤에는 사달이 난다는 이유였다. 한 연구자는 어느 한 주의 사례를 토대로, 1485년부터 1550년 사이 기록에 남은 인클로저의 약 70퍼센트가 귀족과 지방 지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 소작인들에게 안정된 토지 보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1549년 노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끈 사람의 이름은 케트였다. 반란에 나선 사람들은 황야에 진을 치고 스물아홉 조항의 청원서를 썼다.
첫 조항에는 이제부터 누구도 땅에 울타리를 치지 못하게 해달라고 적었다. 열한째 조항은 자유보유자와 관습보유자가 모든 공유지의 수익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열넷째 조항은 관습보유지의 지대를 헨리 7세 초기 수준으로 돌려달라는 요구였다.
현대적인 의미의 평등 강령은 아니었다. 하려는 일은 구체적이었다. 경제 재편의 속도를 늦추고, 소작의 부담을 줄이고, 공유지에서 얻던 몫을 되찾고, 지방 통치의 몇몇 권한을 영주의 손에서 빼내려 했다.
그 청원과 함께 전해지는 호소도 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말이었다. 선조들이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살림에 보태라고 남겨준 공동 목초지를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효율을 따지는 논증이 한마디도 없다. 선조가 남긴 것을 말하고, 자식에 대한 책임을 말하고, 문밖에 가로막혀 선 느낌을 말한다.
셋 다 단위가 없다. 선조가 남긴 것은 얼마짜리인가. 자식에 대한 책임은 얼마짜리인가. 문밖으로 밀려난 느낌은 얼마짜리인가. 어느 것도 숫자로 답할 수 없다. 새 언어 안에서 청원이 들리려면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 해마다 수입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집집마다 가축 몇 마리를 잃는지, 실링으로 치면 몇 실링인지 써야 한다. 케트와 그 사람들은 그렇게 쓰지 않았다. 선조와 자식을 썼다.
1607년에는 중부의 여러 주에서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역사학에서는 대개 잉글랜드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조직적인 농민 행동이라 부른다. 이번에는 인클로저를 더욱 분명하게 겨냥했다. 당시 왕실 포고문을 살핀 한 연구자는 놓치기 쉬운 점을 지적했다. 인클로저를 둘러싼 논쟁을 무지한 대중의 근대화 반대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왕권 자체도 일부 인클로저를 부유한 자들이 왕의 법과 사회적 의무를 깔보는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도대체 누가 법을 어기고 누가 질서를 깨뜨리는지부터 논쟁거리였다. 훗날의 시선으로 쉽게 편을 나누어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톰슨은 18세기 잉글랜드의 민중을 연구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경제라는 말을 제시했다. 많은 소요는 굶주림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뒤에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판단이 있었다. 시장과 제분소, 빵집과 곡물 분배에서 어떤 행위가 정당하고 어떤 행위가 정당하지 않은지를 가리는 판단이었다. 그는 주의도 덧붙였다. 폭동이라는 말은 너무 작아서, 그런 행동의 바탕에 놓인 규범적 판단을 다 담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을 인클로저에 되돌려 놓으면 흔히 낮게 평가하는 점이 하나 보인다. 공유지 권리는 살림에 보태는 경제적 몫이면서,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질서이기도 했다. 인클로저에 반대한 까닭은 몇 실링을 덜 받게 되어서만이 아니다. 인클로저가 새로 선언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무엇이 당연히 어느 한 보유자의 것이 되는지, 무엇이 더는 이웃들이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남은 몫이 아닌지를 다시 정했다.
300년 동안 같은 의회가 처음에는 인클로저를 금지하는 법을, 나중에는 추진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은 많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인클로저를 처음부터 진보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4. 여름의 세 일요일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의회의 입법으로 추진하는 인클로저가 주류가 되었다. 1604년부터 1914년까지 의회가 통과시킨 인클로저 법안은 5,200건이 넘었다. 대상 면적은 잉글랜드 전체의 5분의 1을 조금 웃도는 약 680만 에이커였다. 역대 법안과 결정문을 모은 다른 데이터베이스에서는 5,383건으로 집계한다. 두 숫자가 조금 다른 것은 집계 기준이 달라서다. 일의 규모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5분의 1이라는 비율을 가늠해보자. 한 나라의 5분의 1이 300년 동안 법안 하나하나를 거치며 한 권리 상태에서 다른 권리 상태로 바뀌었다. 법안마다 초안을 쓴 사람이 있었고, 회의와 공고, 청문과 판정, 서류철이 있었다. 혼란이 벌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공정이 진행되었다.
후대에는 의회가 법안 한 장을 내리면 지주가 곧바로 울타리를 치고 땅을 가져가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다. 실제 절차는 훨씬 복잡했다. 바로 그 복잡함 때문에, 원래 모호하던 일을 문서로 남기고 측정할 수 있으며 다툴 수도 있는 대상으로 바꾸는 데 유난히 능했다.
먼저 지역에서 협의했다. 이어 변호사를 불러 법안 초안을 쓰게 했다. 공개 회의를 열었다. 여름철 세 번의 연이은 일요일에 법안을 교회 문에 붙였다. 동시에 동의서를 제출했다. 교구 안의 토지 소유자 전원을 명단에 올리고, 각자가 가진 땅의 가치를 적고, 인클로저에 대한 입장을 적었다. 찬성인지, 반대인지, 중립인지 밝혔다.
18세기에는 동의의 문턱을 하나로 정한 법정 기준이 없었다. 보통 땅의 가치를 기준으로 4분의 3이나 5분의 4의 동의가 필요했다고 한다. 1836년 이후에야 3분의 2라고 법에 명시되었다.
땅의 가치를 기준으로. 이 말 앞에서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동의는 머릿수로 세지 않았다. 땅의 값으로 셌다. 1,000에이커를 가진 사람과 오두막 한 채를 가진 사람은 그 표에서 똑같은 한 표씩을 갖지 않았다. 땅은 한 뼘도 없이 대대로 그 공유지에 소를 풀고 고사리를 베어온 사람은 분모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구축이 장부를 쓸 때 가장 힘을 덜 들이는 장치가 여기에 있다. 누구를 반박할 필요도, 누구의 의견은 셈에 넣지 않겠다고 선언할 필요도 없다. 단위 하나를 고르면 된다. 공교롭게도 그 단위는 바로 재편하려는 것 자체다. 그 물건이 자기 명의로 많이 잡혀 있는 사람일수록 재편 여부를 정할 때 목소리가 크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뒤에야 진짜 번역이 시작된다.
법은 위원을 지정했다. 보통 세 명이었다. 여기에 측량사 한 명을 두었다. 측량사가 먼저 땅을 재고 지도를 그렸다. 위원들은 이어서 회의를 거듭 열며 각자의 주장을 들었다. 그때 요구하는 것은 한 문장이었다. 당신이 정확히 어떤 권리를 가졌는지 입증하시오.
그 한 문장에 재편 전체가 걸려 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우리 집은 늘 이 땅에서 고사리를 베었고, 이 비탈에서 이탄을 캤고, 가을이면 저 숲에 돼지를 몰고 갔다고. 전부 사실이다. 마을의 누구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늘 그래왔다는 말을 법적으로 버틸 수 있는 자격으로 옮길 수 있는지는 다른 것에 달려 있다. 문서가 있는가. 이웃을 증인으로 불러올 수 있는가. 그 권리가 개방경지의 보유지에 딸려 있는가, 아니면 오두막 한 채에만 딸려 있는가. 당신은 자유보유자인가, 관습보유자인가, 그저 늘 써온 사람인가.
모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지는 않다.
여기서 구축이 쓰는 방법은 앞선 열두 편에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당신에게 권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부정하지도, 이름을 바꾸지도, 값을 누르지도, 경계를 안쪽으로 당기지도 않는다. 한마디만 한다. 증거를 내놓으시오.
그런데 이 권리는 바로 증거가 필요 없다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기억에, 이웃에, 해마다 되풀이한 일에 기대어 있었다. 모두가 보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적어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증거를 내놓으라는 요구 자체가 이미 그 권리를 기각한 셈이었다.
앞선 열두 편에서는 구축이 잔여항을 다루는 방법이 여섯 가지 나왔다. 더 큰 구축이 기존의 구축을 바깥에서 느슨하게 하는 방법. 이름을 바꾸어 계속하는 방법. 정확하게 재면서도 묻지 않는 방법. 비용에 나누어 넣을 수 있는 숫자로 고쳐 쓰는 방법. 학문의 경계를 한 칸 안으로 당기는 방법. 그리고 장부 주위를 도는 궤도를 내주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일곱째가 나온다. 가장 손을 쓰지 않는 듯한 방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입증하라고만 요구한다.
위원들은 마지막에 결정을 내렸다. 새로 배정한 땅과 도로, 배수와 울타리, 맞바꾼 필지, 십일조의 환산, 교회 소유지를 법적 효력을 갖는 하나의 문서에 함께 적었다. 그 결정문도 교회 문에 붙이고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절차만 놓고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었다.
5. 바턴
교구 하나를 구체적으로 보면 이 일이 더 선명해진다.
험버강 남쪽 기슭에 바턴이라는 곳이 있다. 인클로저 이전에는 꽤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곳이었다. 개방경지와 풀밭, 습지가 있었고, 소와 말의 목장이라고 불리는 공동 방목지가 있었으며, 공동으로 쓰는 고지대도 있었다. 교구 주민의 공유지 권리에는 수확 뒤 큰 밭에 가축을 풀어놓는 일, 풀밭과 숲을 쓰는 일, 고사리와 가시금작화를 베어 땔감으로 쓰는 일, 점토와 돌과 모래를 가져오는 일, 뗏장을 잘라 연료로 쓰는 일이 들어 있었다.
바턴의 인클로저는 1797년에 시작되었다.
십일조도 함께 정리했다. 이 제도에서 십일조는 원래 농업 생산량의 약 10퍼센트였다. 거둘 권리가 있는 사람은 대개 앞으로의 징수권을 포기하는 대신 더 넓은 땅을 배정받았다. 해마다 일정 몫을 거둘 권리를 한 번에 넘겨받는 땅으로 환산한 것이다.
환산은 깔끔했고 양쪽 모두에게 말이 되었다. 수확의 몫을 걷으려면 해마다 걷어야 한다. 거둘 양은 작황에 따라 달라지고, 누군가는 살펴야 하고 다투어야 한다. 땅 한 조각으로 바꾸면 모두 확정된다. 더 걷을 필요도, 다툴 필요도 없다. 지도에 그려 넣으면 끝이다. 구축이 가장 좋아하는 거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계속 유지해야 하는 관계를 한 번에 결산할 수 있는 자산으로 바꾸는 거래다.
인클로저가 끝나자 공유지는 사라졌다. 띄엄띄엄 놓인 길쭉한 경작지들은 크고 한데 모인 보유지로 다시 나뉘었다. 새로운 도로망도 함께 생겼다.
새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중이다. 주요 권리자 세 집이 교구 전체의 63퍼센트를 쥐게 되었다.
한편 공유지 권리에 관한 주장의 12~15퍼센트는 위원들에게 기각되었다. 가시금작화를 베거나 뗏장을 잘라 쓰는 권리는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보상도 없었다.
기각과 무보상은 나누어 보아야 한다. 기각은 위원들이 그 권리가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무보상은 성립하지 않는 권리이니 대가를 치르고 사들일 것도 없다는 뜻이다. 두 문장을 합치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 인클로저 뒤에는 그 일들이 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법적 문서에서는 무엇 하나 빼앗긴 적이 없다.
이 교구를 옛 언어에서 새 언어로 옮기는 데 각종 절차와 작업 비용만 약 1만 3,000파운드가 들었다.
번역은 공짜가 아니었다. 그 돈이 이를 보여준다. 땅을 재는 데 돈이 들고, 지도를 그리는 데 돈이 들고, 변호사를 쓰는 데 돈이 든다. 위원들의 보수도 필요하다. 회의를 열고, 공고를 붙이고, 낭독하고, 경계석을 세우고, 길을 닦고, 배수로를 파는 일마다 돈이 든다. 교구 하나를 새 모습으로 바꾸는 비용은 누군가 먼저 대야 할 만큼 컸다. 그 돈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재편 뒤 가장 큰 몫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마을이 제힘만으로 인클로저를 막기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막으려면 돈을 내 변호사를 구하고, 증인을 찾고, 런던까지 다녀와야 했다. 공유지에 가장 크게 기대어 살던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구축이 어느 곳에 들어올 때는 새 규칙만 가져오지 않는다. 돈을 낼 수 있는 순서대로 세운 줄도 함께 가져온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랭커셔의 한 교구에서는 두 장원 영주 가문의 소유권 주장이 인정되었다. 더 많은 주민이 누리던 이용권은 훨씬 위태로웠다. 거의 800에이커에 이르는 땅 가운데 거의 600에이커가 그 두 집에 돌아갔다.
공유지 이용자들을 연구한 한 역사가는 날카롭게 요약했다. 인클로저에서 비교적 안전한 것은 좁은 의미의 법적 권리뿐이었다. 주민이라는 지위와 관습에 따라 누리던 권리들은 훨씬 취약했다.
1911년에는 여러 곳에서 벌어진 결과를 단단한 한 문장으로 정리한 사람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땔감을 얻던 곳을 잃었고, 아무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 눈에 띄는 부패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절차는 공개적이고 법적으로는 신중하면서, 나누어주는 몫은 극도로 비대칭인 과정일 수 있었다.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인클로저는 완전히 합법이면서도 여전히 불공정할 수 있었다.
이 방향의 말이 나오는 것은 벌써 세 번째다. 여덟째 글에서는 사람 전체를 가격의 평면에 눌러 넣으면서도 법적 형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했다. 열한째 글에서는 노동자가 임금을 전부 받아갔다. 계약을 깨지도,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종이 위의 셈은 맞았다.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에는 누군가 인용할 수 있는 판단의 문장으로 써놓았다.
합법과 공정이 공식적으로 갈라졌다. 갈라놓고 나니 한 가지가 보인다. 절차가 완비될수록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놓이는지가 결과를 더 크게 결정한다. 그런데 입증책임을 어디에 놓을지는 절차 안에서 다투는 문제가 아니었다. 절차가 시작되기 전의 전제였다.
6. 재산은 배타적으로 누리는 것을 뜻한다
1788년 이삭줍기를 둘러싼 소송 하나가 보통법 법정에 이르렀다. 훗날 대이삭줍기 사건으로 불리게 된 재판이다.
러프버러 경은 판결문에 썼다. 이삭을 주울 권리라는 것은 재산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다. 재산이란 배타적으로 누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같은 대목에는 농부가 그 땅의 유일한 경작자이며, 이삭을 줍는 사람에게는 공동 노동이나 공동의 이익이라는 근거가 없다는 말도 적었다.
그 판결문의 무게는 결론이 아니라 그것이 해낸 일에 있다.
그전까지 이삭줍기는 무엇으로 유지되었는가. 관습과 자선의 전통, 마을의 용인, 모두가 묵묵히 받아들이는 도덕적 기대에 기대어 있었다. 밭에 남겨진 몫이었다. 누가 정식으로 내준 적도, 정식으로 거두어들인 적도 없었다. 그저 해마다 사람들이 와서 주워 갔다.
어떤 것이 그런 식으로 오래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아무도 누구 것이냐고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으면 답이 있어야 한다. 답이 있으면 누군가는 집행해야 한다. 묻기 전까지는, 묻지 않는 것이 모두가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 다섯째 글에서 장부가 닫히는 일과 묻지 않는 일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그때는 장부를 쓰는 쪽이 스스로 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군가 법정에 물어달라고 청했다. 청을 받은 법정은 답을 내놓아야 했다.
판결문은 남아 있던 그 잔여항을 배타적 재산의 안쪽으로 다시 합쳐 넣었다. 가난한 사람은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수확 뒤에 남은 것도 이 땅에서 자란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말했다.
배타성은 재산의 전제다. 무엇이 재산이 되려면 먼저 한 사람이 독점해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손대면 침해가 되어야 한다.
공유지에 얽힌 권리들의 성격은 그와 정반대였다. 같은 땅에서 같은 철에 한 사람은 소를 치고, 한 사람은 고사리를 베고, 한 사람은 돼지를 숲으로 몰고 가고, 한 사람은 도랑 곁에서 흙을 팠다. 여러 사람이 제게 필요한 것을 가져가면서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이런 공존은 재산의 한 형태가 아니다. 그 판결문대로라면 재산의 반대편이다.
여기서 물음이 깔끔하게 바뀌었다. 원래 물음은 이 땅에서 수확하고 남은 것을 누가 가져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복잡한 관습의 묶음이었다. 주인은 팔 수 있는 것을 가져가고, 가난한 사람은 떨어진 것을 줍는다. 시간에 따라 차례가 있고, 신분에 따라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이 갈린다. 새 물음은 이 땅이 누구의 재산이냐는 것이었다. 답은 사람 이름 하나였다. 앞의 답을 유지하려면 온 마을의 기억이 필요하다. 뒤의 답은 종이 한 장에 쓰면 된다.
결과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코벳은 자신이 싫어하던 곡물 단작 지대를 말을 타고 지나며 아주 직설적으로 적었다. 생울타리도, 도랑도, 공유지도 없다.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땔나무 한 토막도 없고, 돼지 한 마리나 소 한 마리를 풀 먹일 곳도 없다고 했다.
자료에서도 같은 일이 보인다. 한 연구자는 노샘프턴셔에서 인클로저 뒤 소규모 토지 소유자의 수가 21퍼센트 줄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최근 전국 자료를 이용한 연구에서는 의회 인클로저가 오두막 보유자의 비중이 크게 줄어드는 현상과 함께 나타났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사라진 것은 혜택 몇 가지가 아니었다. 한 부류의 삶이 설 자리 전체였다. 작은 자기 땅과 자급자족, 집에서 하는 부업과 밖에 나가 하는 품팔이 사이에 있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 선 사람은 소 한 마리와 닭 몇 마리, 텃밭 한 조각과 겨울 땔감, 농번기에 품을 팔아 번 얼마간의 돈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하나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합치면 살 수 있었다.
그 자리는 불완전한 것 여럿을 이어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어느 하나만 떼어놓으면 사람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다. 구축이 가장 다루기 어려워하는 것이 이런 종류다. 중심 항목도, 하나의 이름도 없다. 뜯어놓으면 하나하나가 말할 가치도 없을 만큼 작다. 합치면 한 사람의 생계 전부다. 인클로저가 그 자리를 겨냥해 따로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를 이루던 조각들을 하나씩 다른 사람에게 넘겼을 뿐이다.
잔여항이 이렇게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누구도 그 자리에 반대한 적이 없다. 어느 법령에도 이제부터 이런 집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지 않다. 구축은 부품을 뜯어낸다. 하나씩 따로 처리할 때는 모두 말이 된다. 이 비탈에는 주인이 있고, 저 숲에도 주인이 있고, 수확이 끝난 밭에도 주인이 있다. 말이 되는 그 처리들을 모두 합쳐놓으면, 그 자리가 사라진다.
그 자리가 사라진 뒤 한 사람의 손에 남아 남에게 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열한째 글에서 이야기한 일의 전제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7. 3퍼센트
개량을 주장하는 쪽의 말도 그대로 놓아보아야 한다. 대충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영국 의회가 직접 정리한 역사 개요에는 지금도 이렇게 쓰여 있다. 18세기 후반부터 인클로저가 농업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는 데에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1986년 한 연구자는 1795년부터 1801년까지의 곡물 단위면적당 수확량과 총생산량 자료로 개방경지와 인클로저 토지를 체계적으로 비교했다. 물음도 분명히 제시했다. 발목을 잡았는가, 생산성을 높였는가. 1808년 아서 영은 인클로저에 관한 전국 단위의 개괄 보고서에서 단언했다. 농부가 울타리를 친 땅을 경작할 때 수익이 더 높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최근의 실증 연구는 1만 5,000개 교구의 자료를 확보해, 의회 인클로저가 실제로 더 높은 단위면적당 수확량과 관련이 있었다고 추정했다. 구체적인 숫자로 내려오면 이렇다. 1830년에는 인클로저를 거친 교구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약 3퍼센트 더 높았다.
3퍼센트.
이 숫자는 여기 놓아둔다. 평가는 덧붙이지 않겠다.
다만 무엇을 센 숫자인지에 관해 한마디 보탠다. 3퍼센트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차이다. 총생산량의 차이도, 국민소득의 차이도 아니다. 어떤 한 집의 삶에 생긴 차이는 더더욱 아니다. 정확하게 제기한 물음에 정확하게 답하는 정밀한 숫자다. 그 물음이 당시 사람들이 다투던 물음과 같은지는 별개의 일이다.
이 해석을 수정하려는 쪽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갈래도 여럿이다.
한 갈래의 연구는 개방경지에서 땅을 길쭉하게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여기저기 흩어놓는 방식을 어리석거나 뒤떨어졌다고 쉽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오래 주장해왔다. 일종의 보험이었다는 것이다. 땅은 토질도, 비탈이 향한 방향도, 물 빠짐도 서로 다른 곳에 흩어져 있었다. 우박이 이 밭을 망쳐도 저 밭은 남았다. 이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영악해지기를 거부하는 농부가 아니라 신중한 농부였다. 뒤에 이 구체적인 작동 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연구자들도 있었지만, 개방경지가 오래 유지된 까닭이 위험에 대처하는 일과 깊이 관련된다는 점은 인정했다.
다른 갈래는 더 멀리 나아가며, 말도 더 차갑다. 공동으로 쓰는 경작지가 오래 남은 것은 사람들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었다고 한다. 1750년 이전에는 대체로 인클로저를 해봐야 수지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훗날 전해진 막대한 이익의 이야기는 대부분 18세기 농업 개량론자들의 상상이었다고 본다.
또 다른 갈래는 개량이라는 이야기 자체를 다시 평가한다. 개방경지 체제의 소규모 자영농들이 이미 생산성 향상의 상당 부분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산업혁명기의 농업 성장에 18세기 인클로저와 대농장이 기여한 몫은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 일은 주로 지주를 부유하게 했고, 소비자와 노동자, 농민에게는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평한 사람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인 믿음에 도전하는 연구라고. 이 설명을 따르면 인클로저는 더 이상 생산성 혁명을 이끈 주동력이 아니다. 소득 재분배를 가속하는 장치에 더 가깝다.
세 번째 관점은 사회사와 노동사에서 나온다. 이쪽이 묻는 것은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아니다. 공유지 권리가 한 집의 살림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 잃은 뒤에는 무엇으로 살았는지 묻는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점이 있다.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연구자들도 인클로저 이전의 농업 노동자들이 공유지에서 실제로 소를 풀어놓고 땔감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익이 늘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아무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결론이 저절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가장 최근의 그 연구는 두 면을 하나의 결과 안에 넣었다.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올랐고, 토지 불평등도 커졌다. 대지주는 그전까지 앞길을 막던 사람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효율 개선의 이익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다.
논쟁을 끝낸 것은 아니다. 오래된 논쟁을 더 수량화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었다.
이것이 구축이 여기서 한 두 번째 일이다. 첫 번째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다. 먼저 땅과 권리, 관습을 나누고 값을 매길 수 있는 재산권으로 옮겼다. 200년 뒤에는 그 번역을 둘러싼 논쟁마저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백분율과 불평등 계수로 다시 옮겼다.
실제 견해차는 적어도 세 층에 걸쳐 있다. 첫째, 인클로저 이전의 개방경지와 공유지는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가. 둘째, 실제로 이익이 늘었다 해도 그 규모가 전통적인 농업혁명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큼 컸는가. 셋째, 이익이 늘었다면 누가 가져갔고 누가 대가를 치렀는가.
앞의 두 층은 같은 표 위에서 다툴 수 있다. 공통의 단위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에는 그런 단위가 없다.
그러니 학문적 진전이 가장 빠른 것도 줄곧 앞의 두 층이었다.
학자들이 편을 들어서가 아니다. 세 번째 층에서 답해야 하는 것은 누가 가져가고 누가 감당했느냐다. 답하려면 전혀 다른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한쪽에는 단위면적당 수확량과 임대가치, 해마다 비교할 수 있는 생산량이 있다. 다른 쪽에는 어느 집이 겨울에 땔감을 구할 수 있는지, 어느 여성이 수확 뒤에도 밀 이삭을 주울 수 있는지가 있다. 앞의 것에는 단위가 있다. 뒤의 것에는 없다. 단위가 없으면 같은 표에 들어갈 수 없고, 같은 표에 들어갈 수 없으면 다투어도 결론을 낼 수 없다. 그래서 줄곧 논쟁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구축은 땅을 장부 하나로 만들었다. 훗날에는 그 장부에 관한 논쟁도 다시 장부 하나로 만들었다. 잔여항이 들어갈 칸은 어느 장부에도 없다.
8. 한눈에 읽히는 계산서
1968년 하딘은 과학 잡지에 짧은 글을 썼다. 하려는 말을 사고실험 하나로 압축했다.
누구에게나 열린 목초지를 생각해보자. 합리적인 목동이 자기 가축 떼에 소 한 마리를 더하면 이익은 거의 전부 그에게 돌아온다. 대략 플러스 1이다. 지나친 방목이 낳는 손해는 모두가 나누어 지므로, 그에게 돌아오는 몫은 아주 작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소 한 마리를 더하는 편이 이익이다. 끝까지 더하다 보면 목초지는 무너진다. 그가 내놓은 결론은 이렇다. 공유지에서의 자유는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
이 논증의 힘은 극도로 명료하다는 데 있다. 개인의 이익과 공동의 손실을 하나의 틀에 넣는다. 거의 한눈에 읽히는 계산서다.
그러나 그가 가정한 목초지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가는 곳이다. 경계도, 남을 배제할 권리도, 지역의 규제도 없다. 오래 이어져온 공동체의 제재도, 장원 법정도 없다. 이용자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할 자격도 없다.
오스트롬과 그를 따르는 연구자들은 거듭 지적했다. 대상을 잘못 짚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동자원은 재산권이 정해지지 않은 채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자원이 아니다.
잉글랜드의 자료를 다시 가져와 대어보면 분명하다. 그곳에는 이용자의 경계와 자원의 경계가 있었다. 감시와 벌금이 있었고, 계절에 따른 규칙과 정해진 수가 있었다.
제집에서 겨울을 나는 가축이라는 기준도 있었다.
그 규칙은 하딘의 목초지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소를 더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규칙이 아니다. 공유지 이용량을 각 집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다시 연결하는 규칙이다. 모두가 서로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어 있다. 하딘의 계산서에는 소의 머릿수만 있다. 이웃의 눈을 적어 넣을 칸은 없다.
구축의 성격이 여기서 환히 드러난다. 누구나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계산서를 만들려면 항목이 적어야 하고, 가지런해야 하며, 모든 칸에 숫자를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실제 공유지가 수백 년 동안 유지되도록 해준 것들은 공교롭게도 어느 칸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명료한 계산서가 묘사하는 곳은 흔히 세상에 없는 곳이다.
그래도 계산서는 잘 쓰인다. 정확해서가 아니라 명료해서다. 구축의 진짜 힘은 흔히 여기에 있다. 입으로 쉽게 되풀이할 만큼 간단한 모형은 정확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묘사보다 훨씬 멀리 퍼진다. 결정의 근거로 가져다 쓰기도 더 쉽다.
오스트롬 역시 공유지가 본래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공을 보장할 고정된 규칙 하나를 찾는 일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대신 오래 유지된 제도들이 공유하는 설계 원리를 정리했다. 이용자와 자원의 경계가 분명할 것. 자원을 거두고 보충하는 규칙이 지역의 조건에 맞을 것.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규칙을 고치는 데 참여할 수 있을 것. 이용자들이 직접 감시할 것.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제재를 차츰 높일 것. 적은 비용으로 분쟁을 풀 수 있을 것. 지역이 규칙을 만들 권한을 정부가 최소한이나마 인정할 것. 그리고 여러 층으로 포개진 관리 체계를 갖출 것.
그는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도 이야기했다. 따로 눈여겨볼 만한 결과다. 기본 조건에서는 참가자들이 공동자원을 과도하게 쓰는 정도가 비협조적 게임 이론의 예측보다 더 심했다. 그런데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하자 공동의 이익이 뚜렷하게 늘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변수의 이름이 아니다. 인격적 접촉 그 자체다.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1968년의 그 계산서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 계산서에는 소만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나중에 한 번 더 갈라졌다. 어떤 연구자들은 하딘이 실제로 염두에 둔 것이 역사 속 공유지보다 자유로운 진입에 가까웠다고 지적했다. 반대 방향에서 오스트롬을 비판한 연구자들도 있다. 하딘에 대한 그의 반박은 특정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모가 작고 지역에 뿌리를 두며 외부 충격이 적은 공유지에서는 그의 사례들이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규모가 거대하고 여러 수준에 걸쳐 있으며 빠르게 변하고, 국가적·국제적 압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자원 체계에서는 하딘이 말한 곤경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여기서는 판정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의 일곱 절을 모두 잘못 읽게 된다. 공유지는 낙원이 아니었다. 잘 관리된 경우가 많았지만, 그 관리는 흔히 외부인을 배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삼았다. 권리도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자유보유자와 관습보유자, 오두막 보유자와 그저 관행적으로 쓰던 사람의 지위는 크게 달랐다. 공유지를 전원시로 그리는 일이나, 정리를 기다리는 황무지로 그리는 일이나 같은 게으름이다.
300년을 관통하는 일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 재편이 시작되면, 법적으로 더 단단히 정해진 권리가 서로 아는 사이에 기대어 유지되던 권리를 이긴다. 패한 쪽이 그 300년의 잔여항이다.
인클로저가 끝나면 교구의 장부는 아주 명료해진다. 땅마다 면적과 경계, 주인과 평가액이 있다. 도로가 어디로 가는지, 배수가 누구에게 속하는지도 정해져 있다. 십일조는 땅으로 바뀌었다. 처음 온 사람도 지도를 펼치면 30분 안에 이곳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지도에 없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어느 집 가축이 겨울에 어디서 눕고 일어나는지. 어느 집 아이가 여름이면 어느 비탈에서 가축을 지키는지. 누가 수확 뒤 수레를 따라 걷는지. 그 일들을 어느 해부터 그렇게 해왔는지.
그것들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이 아니다.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것들은 본래 증거가 필요 없다는 데 기대어 살아온 것들이다.
장부가 가장 말끔해지는 때는 모든 것을 셈에 넣었을 때가 아니다. 셈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입증할 수 없는 것으로 바꾸었을 때다. 그 일들은 엄연히 일어났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기억한다. 다만 기억은 증거로 쓸 수 없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