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 | 日本語 | Français | Deutsch | Español | 한국어
← 경제 시리즈
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경제
제14편 · 총 23편

금본위제: 소수점 아래까지 정확했지만 정작 사람은 보지 못했다

금본위제는 법으로 정한 금 함량을 통해 환율을 극도로 정밀하게 고정했다. 그러나 자동 조정이라는 장치는 임금 하락과 실업을 통과해야만 작동했고, 그 비용은 환율표에 나타나지 않았다.

Han Qin (秦汉)

1파운드 4.8665635달러

고전적 금본위 아래에서 영국 파운드와 미국 달러의 환율은 1파운드당 4.8665635달러로 정의될 수 있었다. 두 나라가 각각 통화 한 단위를 일정한 무게와 순도의 금으로 정했기 때문에, 두 법적 정의를 나누면 소수점 일곱 자리의 비율이 나왔다.

이 숫자는 그날의 수요와 공급이 만든 가격이 아니었다. 법과 금 함량이 만든 자였다. 환율이 자연과학의 상수처럼 보였고, 국제거래는 같은 무게의 언어로 번역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질서는 필연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독일제국이 1871년 이후 은본위에서 금본위로 옮기고 프랑스가 1873년 은화의 자유주조를 중단하면서 선택이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몇십 년 뒤 사람들은 특정 시기의 정책 결정을 원래부터 있던 자연 상태로 기억했다.

자동 조정이라는 약속

교과서의 금본위는 간결하다. 적자국에서 금이 빠져나가면 통화와 신용이 줄고 물가가 내려가 수출 경쟁력이 회복된다. 흑자국에서는 반대 과정이 일어나고 국제수지는 다시 균형을 향한다. 흄이 말한 ‘스스로 돌아오는’ 흐름이 제도의 매력이었다.

하지만 금의 이동이 곧바로 통화와 물가를 움직인다는 가정은 현실에서 자주 중화됐다. 중앙은행은 금 유출입의 효과를 상쇄했고, 핵심국은 국제신용과 협력으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주변국은 같은 규칙 아래서 더 빠른 긴축과 높은 금리를 감당해야 했다.

규칙은 보편적이었으나 버틸 수 있는 힘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구(構)는 모든 국가에 같은 잣대를 대는 것을 공정함으로 제시했지만, 그 잣대 바깥의 신용망과 정치적 지원은 나라별로 달랐다.

보이지 않는 항목을 세기 시작하다

금본위를 유지하려면 한 나라가 외국과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알아야 했다. 상품무역은 항구에서 셀 수 있었지만 해운, 보험, 금융 서비스, 이자와 해외투자 수익 같은 무형 항목은 바로 측정하기 어려웠다.

전쟁 전 영국은 상품무역 적자를 이런 무형 수입으로 메우고도 국민소득의 약 4퍼센트를 해외에 투자했다. 장부가 넉넉할 때는 통계의 빈틈이 덜 드러났지만 위기가 오면 어느 항목이 얼마나 버틸지 아무도 즉시 답하지 못했다.

금본위는 세계를 완전히 측정 가능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대신 국제수지표와 통계위원회, 공통 회계 원칙을 발전시키도록 나라들을 압박했다. 제도를 위해 만든 측정 장치는 제도보다 오래 살아남았지만, 정작 급한 순간에는 숫자가 뒤늦게 도착했다.

1925년, 전쟁 전 가격으로 돌아가다

1925년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금본위 복귀를 발표했다. 다만 일반인이 금화를 다시 쓰는 체제는 아니었다. 금 교환은 최소 400트로이온스의 금괴 단위로 제한됐고, 정부는 시민에게 계속 지폐를 사용하라고 요청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전쟁 뒤 낮아진 파운드를 전쟁 전 평가로 올리면 영국의 수출가격과 국내 비용을 약 10퍼센트 낮춰야 한다고 비판했다. 가격을 낮추는 ‘기본 조정’은 결국 석탄·철강·해운의 임금과 일자리를 누르는 과정이었다.

환율표에는 4.8665635가 적혔지만 광산촌의 실업은 그 정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금을 정해진 가격에 내줄 수 있으면 제도는 정상으로 간주됐다. 그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누가 얼마 동안 일자리를 잃는지는 법적 기준이 아니었다.

황금 족쇄와 좋은 살림의 인증서

대공황기의 금본위는 통화정책을 제약하고 긴축을 퍼뜨린 ‘황금 족쇄’로 설명된다. 프랑스의 세계 금 보유 비중은 1927년 7퍼센트에서 1932년 27퍼센트로 뛰었고 금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영국은 1931년 여름 약 2억 파운드의 금과 외국 신용을 쓰고도 결국 태환을 중단했다.

반대편에는 금본위 가입이 재정규율과 상환 의지를 알리는 ‘좋은 살림의 인증서’였다는 연구가 있다. 1914년 이전 주변국의 차입금리를 약 40∼60bp 낮췄다는 추정도 있다. 안정된 환율과 싼 자금이라는 혜택은 실제였다.

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에서 금본위의 균열은 고정환율의 구를 흔든 착(鑿)이었다. 금본위는 신뢰를 만들었고 동시에 조정비용을 고용에 전가했다. 여항(餘項)은 소수점 아래 숫자의 오차가 아니라, 그 정확성을 위해 움직이지 못한 사람들의 시간이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