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넷째 글. 금본위제: 소수점 아래까지 정밀해도, 가장 중요한 곳에서는 보지 못한다
금본위제는 법으로 정한 금 함량을 통해 환율을 극도로 정밀하게 고정했다. 그러나 자동 조정이라는 장치는 임금 하락과 실업을 통과해야만 작동했고, 그 비용은 환율표에 나타나지 않았다.
1. 소수점 아래 일곱 자리
파운드와 달러 사이에는 한때 이런 환산율이 있었다. 1파운드는 4.8665635달러였다.
소수점 아래로 숫자 일곱 개가 늘어서 있다.
이 수는 어림잡아 얻은 수가 아니다. 정의해서 얻은 수다. 영국은 1파운드를 정해진 무게와 순도의 금으로 정의했고, 미국도 1달러를 정해진 무게와 순도의 금으로 정의했다. 두 정의를 나누면 저 수가 나온다. 이 수를 뒷받침할 거래는 단 한 건도 필요하지 않다. 어느 날의 시세가 달라진다고 따라 움직이지도 않는다. 두 법률을 곱해서 나온 결과다.
두 법률을 곱한다. 이 표현은 잠깐 손에 올려 무게를 가늠해볼 만하다. 이 환산율은 시장에 물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어느 상인에게도 묻지 않고, 어떤 거래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종이에 적힌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성립하며, 그 뒤로도 날마다 성립한다. 그날 누군가 실제로 파운드를 달러로 바꾸었는지는 상관없다. 구축이 줄곧 바라온 것이 바로 이런 수다. 구체적인 사건 하나에 기대지 않고도 제 힘으로 서 있는 수.
하나의 환산율이 여기까지 온 것은 인류의 장부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앞선 열세 편의 자는 여전히 구체적인 것들과 씨름했다. 점토판에 적힌 보리, 도시 안에서는 통하지만 도시 밖에서는 조각나는 은화, 관청이 인정해주어야 하는 종이 한 장, 이웃들이 모두 지켜볼 수 있어야 관리되는 공유지였다. 여기서 자는 처음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이 자기를 인정해줄 필요가 없어진다. 두 나라의 법률과 한 종류의 금속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고 고정환율이 선 하나인 것은 아니다. 폭을 가진 띠다.
금을 런던에서 뉴욕까지 보내려면 돈이 든다. 운임, 보험료, 포장비와 하역비, 운송하는 며칠 동안 자금이 묶이는 데 따른 이자,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 거기에 이 장사를 하는 사람이 가져가야 할 이윤도 한몫 들어간다. 이 비용들을 합하면 금평가의 양옆에 점 하나씩이 생긴다. 환율이 위쪽 점을 넘으면 민간 상인에게 이익을 낼 기회가 열린다. 금을 사서 배에 싣고, 건너편으로 보내 그 나라 돈으로 바꾸고, 차액을 챙긴다. 아래쪽 점 밑으로 내려가면 반대로 하면 된다.
이 띠의 너비를 무엇이 정하는지 눈여겨보자. 두 나라의 국력도 아니고, 어느 쪽 신용이 더 좋은지도 아니다. 배삯과 보험료, 금을 옮기는 며칠 동안의 이자다. 이 제도에서 가장 유연한 부분은 운송업의 원가표에서 눈금을 가져온다. 세상에서 가장 추상적인 자의 허용 오차를 화물선과 보험증서가 정하는 셈이다.
그러니 누구도 명령할 필요 없이 환율은 스스로 그 띠 안으로 돌아온다. 거의 완벽해 보이는 장치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대목은 환율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관리가 아니라, 그저 돈을 벌고 싶은 상인들이라는 데 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뒤에 나올 모든 이야기를 붙들어놓는 첫 번째 못이다.
상인이 기꺼이 이 차익거래에 나서는 까닭은 금속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쪽 당국은 정말로 법정 가격에 금을 팔아줄 것이고, 저쪽 당국도 정말로 법정 가격에 금을 받아줄 것이다. 게다가 배가 항구에 닿기 전에 어느 한 나라가 갑자기 외환통제를 선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금현송점은 장부 위의 숫자 두 개일 뿐이다.
이 말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갈 수 있다. 자동 조절 장치 전체에서 맨 처음 걸리는 고리는 금속이 아니라 기대다. 사람들이 정해진 값에 금을 내줄 것이라고 믿을 때에만 금속은 제 역할을 한다. 믿음이 사라지면 금속은 제자리에 있어도 장치는 이미 멈춘다. 여섯째 글에 나왔던 송나라 사람의 말이 여기서 장소를 바꾸어 다시 나타난다. 관청에 밑천이 없는데 백성이 무엇을 믿겠는가. 금본위제의 대답은 밑천을 넉넉히 갖추는 것이었다. 그런데 1931년의 일은 밑천을 넉넉히 갖추고도 믿음이 모자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폐를 금속 위에 올려놓으면 더는 누가 약속을 지켜주기를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내세운 제도였다. 그런데 그 제도의 가장 정교한 부분을 지탱한 것은 여전히 하나의 믿음이었다. 뒤이은 위기 때마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검증된다. 검증할 때마다 치르는 값도 비싸다.
이 생각의 뿌리는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1752년, 흄은 무역수지를 다룬 짧은 글에서 화폐와 상품, 노동, 산업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있으며, 남아도는 금과 은이 한곳에 영원히 쌓여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가 적은 한 문장은 그 뒤로 200년 넘게 인용되었다. 화폐는 언제나 백 갈래의 길을 따라 스스로 흘러 돌아온다는 말이었다.
스스로. 이 제도의 매력은 모두 그 말에서 나온다.
2. 조율되지 않은 결정
후대 사람들은 금본위제를 필연적으로 위를 향해 나아가는 선 하나로 설명하기 쉽다. 세계가 더 발달하고 거래가 더 복잡해지자,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가장 좋은 자를 골랐다는 이야기다.
사료는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진정한 국제적 전환은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 일어났다.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은 각 영방이 쓰던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옮겨갔다. 한 연구자는 이 개혁이 다른 나라들의 연쇄적인 조치를 불러왔고, 끝내 전 세계의 복본위제를 끝냈다고 정리했다. 곧이어 프랑스가 1873년 9월 은화의 자유주조를 중단했다. 라틴통화동맹의 다른 나라들도 차례로 뒤따랐고, 복본위제는 마지막 안정장치를 잃었다.
그러나 같은 연구자는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독일이 반드시 그 길을 가야 했던 것은 아니라고.
1860년대 독일에서는 프랑스가 이끄는 복본위 체제에 들어가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다. 훗날의 결과는 오히려 1870년대 초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조율하지 않고 내린 결정들이 겹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사를 연구한 사람 가운데는 아예 역사적 우연이 빚은 사고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우연한 사고라는 말은 경제사에서 무거운 판단이다.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모습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뒤의 모든 추론은 일이 이미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일어났다는 데서 출발한다. 세계의 몇 나라가 금을 쓰는가는 어느 경제법칙에서 도출된 답이 아니었다. 1871년 이후 몇 년 동안, 몇몇 나라가 차례로 내린 몇 차례의 결정에서 자라난 결과였다.
그 뒤의 확산은 연표로 적을 수 있다. 독일은 1871년, 덴마크는 1872년, 스웨덴은 1873년, 네덜란드는 1875년, 프랑스는 1878년이다. 미국은 법적으로는 1873년에서 1874년에 걸쳐 완결했지만, 실질적인 복귀는 1879년에야 이루어졌다. 일본은 1897년, 인도는 1898년에 파운드와 연동하는 금환본위제로 나아갔다.
이 연표는 다른 방식으로도 읽힌다. 연도 하나하나 뒤에는 그 나라의 정치 과정이 있다. 의회의 논쟁, 은광 소유주들의 반대, 채권자와 채무자가 저마다 두드리는 주판, 그리고 런던에서 믿을 만한 차입국으로 인정받고 싶은가 하는 문제가 있다. 날짜는 기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은 한 번도 기술적인 일이었던 적이 없다. 미국이 법적으로 마무리한 때부터 실제로 복귀할 때까지는 여섯 해가량의 간격이 있었다. 그 몇 해 동안 벌어진 일만으로도 책 한 권을 따로 쓸 수 있다.
1879년이 되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네 핵심국이 동시에 금본위제 안에 들어와 있었다. 훗날 사람들이 국제 금본위제라고 부르는 시기는 이때부터 1914년까지, 모두 36년이다.
36년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는 짧지 않지만, 제도의 역사에서는 길지도 않다. 그런데 그 뒤 두 세대가 금본위제에 품었던 상상은 거의 모두 이 36년 위에 세워졌다. 안정적이었다고 할 때 가리키는 것도 이 36년, 저절로 작동했다고 할 때 가리키는 것도 이 36년, 자연스러운 질서였다고 할 때 가리키는 것도 여전히 이 36년이다. 40년이 채 안 되는 경험이 어떤 것의 본성으로 받아들여졌다.
왜 이렇게 퍼져나갔는지에 관해서는 역사학계에 두 갈래 설명이 있다. 어느 쪽도 만만하지 않다.
한쪽은 네트워크 효과를 강조한다. 금본위제를 쓰는 나라들과 교역이 많을수록 그 체제에 들어가려는 힘도 강해진다는 것이다. 한 나라 금융체계의 성숙도도 가입 시기에 영향을 미친다. 이 설명에 따르면 확산은 조건에 맞추어 이루어진 논리적인 적응이었다.
다른 쪽은 우연을 강조한다. 독일과 프랑스의 선택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복본위제의 붕괴는 계산해서 얻은 답이 아니라 서로 부딪쳐서 난 결과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확산은 얼마든지 다른 쪽으로 향할 수 있었던 정책 조치들이 연이어 포개진 결과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두 설명을 나란히 놓으면 분명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나중에는 수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고 객관적이며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여겼던 자다. 그런데 그 자의 생일은 어느 나라가 어느 해에 한 입법으로 정확하게 짚을 수 있다. 그 입법은 당시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구축은 가장 성공했을 때,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36년은 길지 않다. 그래도 한 세대가 그것이 늘 거기 있었다고 믿기에는 충분했다.
이것은 구축이 늘 하는 일이며, 앞에서도 본 적이 있다. 열째 글에서는 앞뒤로 20년에 걸쳐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않은 채 진행된 과정이 연도 하나와 이름 세 개로 눌러 담겼다. 여기서는 여러 나라가 차례로 내린 정책적 선택들이 금본위제라는 자연 상태로 눌러 담긴다. 구축은 바깥의 것들을 제 자 위에 눌러 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 내력도 납작하게 눌러, 시작점 없는 배경으로 만든다.
3. 규칙의 게임
책 속에서 금본위제가 돌아가는 방식은 아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하고 예금채무를 지려면 일정 비율의 금 준비금이 이를 받쳐주어야 한다. 국제수지가 적자면 금이 나가면서 결제되고, 흑자면 금이 들어오면서 결제된다. 통화당국이 금의 흐름이 미치는 영향을 적극적으로 상쇄하지 않는다면, 금의 유출은 그 나라의 통화와 신용을 줄인다. 그러면 물가가 내려가고 수출품이 싸져 적자가 저절로 줄어든다. 금이 들어오는 나라에서는 반대가 된다. 훗날 가격·정화 유출입 메커니즘이라고 불린 것이 이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왜 이 장치를 높이 샀는지를 정리한 연구자가 제시한 이유는 소박했다. 이 장치가 세계 전체의 물가를 장기적으로 안정시키고, 각국의 물가도 대체로 비슷하게 유지해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구상에는 실제로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장부의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느 군주가 자제해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어느 의회가 절제해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한 나라가 발행할 수 있는 돈에 저절로 상한이 생긴다. 그 상한은 땅속에서 캐낸 것이 정한다. 둘째 글의 끝없이 불어나던 빚과 여섯째 글의 갈수록 더 찍어내던 종이는 이 구상 안에서는 원리상 길이 막힌다.
문제는 실제로 돌려볼 때 생겼다.
고전적 금본위제를 돌아본 한 연구자는 학술회의의 서론에서 곧바로 이렇게 적었다. 고정환율 아래서 국제적 조정을 실제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 그 회의는 끝내 답하지 못했다고. 정화의 흐름인가, 구매력평가와 금리평가인가, 아니면 단기자본 이동인가. 이 연구자는 19세기 후반 이래 연구자들이 단기자본 이동의 조정 기능이 금속 자체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사실을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도 지적했다.
이어서 영란은행이 실제로 하던 일들을 나열했다. 그 목록은 자동기계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영란은행은 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데 기계적으로 맞추어 할인율만 올리고 내린 것이 아니었다. 금괴와 외국 금화의 매입·매도 가격을 조절했고, 훗날 금 조절 장치라고 불린 일련의 수법을 썼다. 대출의 종류에 따라 다른 금리를 받았으며, 국제 단기대출에서 자기 포지션을 늘리거나 줄였다. 공개시장조작으로 대외 방어를 위한 조치가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되도록 떼어놓으려 했다.
그 목록에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하나도 없다. 모두 판단이 필요하다. 언제 움직일지, 얼마나 움직일지, 무엇부터 손댈지, 시장에 드러나게 할지. 더구나 그 조치들의 목적은 흔히 장치를 돌리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장치가 돌아가며 국내에 가하는 충격을 누그러뜨리는 데 있었다. 자동으로 돌아간다는 그 기계 곁에는 늘 누군가가 서서 충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기계가 제 발밑의 땅을 짓이기지 못하도록.
규칙의 게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사람이 지켜보지 않아도 되는 기계가 아니었다.
이 사실은 구축의 성질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낸다. 제도가 저절로 돌아간다고 내세울수록, 막 뒤에서는 더 많은 손이 필요해진다. 그 손들은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 손잡이를 돌리는 모습이 보이는 순간 자동이라는 말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제도의 설득력은 모두 그 자동이라는 말에서 나온다.
이 절에서 잔여항이 처음 고개를 내민다. 드러나는 자리도 묘하다. 눌리는 것들 쪽이 아니라 누르는 쪽에 있다. 기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누군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판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런데 그 판단 자체를 적을 칸은 없다. 규칙의 게임이라는 이름에서 규칙은 적혀 있는 부분이고, 게임은 적혀 있지 않은 부분이다.
그 밑에는 더 단단한 문제가 있다. 손잡이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아이켄그린은 훗날 이 역사를 돌아보며 체제를 유지하는 협력이 주로 유럽의 몇몇 핵심국과 때때로 참여한 미국에 한정되었다고 지적했다. 주변부의 작은 나라들은 같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압력이 닥치면 더 쉽게 무너졌다.
자는 하나지만 견딜 힘은 다르다. 구축의 보편성에는 언제나 층이 나뉘어 있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들이댄다고 해서, 모두가 그 기준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선 글들에서도 이 말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곱째 글에서는 같은 통약 체계가 책임을 희석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했다. 열두째 글에서는 같은 임금의 자가 더 많이 일한 쪽에 더 낮은 값을 매겼다. 여기서는 세 번째 모습이다. 같은 규율 아래서 핵심국은 누군가 받쳐주고, 주변부 국가는 받쳐주지 않는다. 규칙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쓸 수 있다. 하지만 규칙 바깥을 둘러싼 지원 구조는 규칙 안에 적히는 법이 없다.
4. 무형 항목
금본위제를 유지하려면 한 나라는 적어도 자기 대외 장부가 대략 어떤 모습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전쟁 전 영국이 더 많은 통계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장부에 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형무역의 적자를 무형 항목의 흑자가 오랫동안 덮어주었다. 메우고도 남아서 해외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었다. 전쟁 전 영국의 연간 대외투자는 국민소득의 약 4%, 한 해 저축의 약 30%에 해당했다.
무형 항목이란 해운, 금융서비스, 이자 수입, 수수료, 해외투자 수익을 말한다. 모두 결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면화를 실은 배 한 척이나 철도 레일 한 무더기처럼 부두에서 수량을 세어 끝낼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무형이라는 말은 정확하다.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말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정반대로, 당시 영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던 거대한 사업 영역을 가리킨다. 한 나라가 가장 강한 곳이 동시에 가장 세기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장부가 온전하다고 믿는 일에는 경계심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장부에 늘 여유가 있던 시절에는 굳이 셈을 끝낼 동기가 없었다. 세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영란은행은 스스로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 글을 썼다. 공통의 척도라는 신화에 거의 반어적인 각주를 단 글이었다.
그 글에 따르면, 영국이 1925년 금본위제를 복원하기 전까지 당시 구할 수 있던 국제수지 통계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영국의 대외 사정을 말할 때 쓰인 표현은 더없이 막연했다. 1926년에는 통계위원회가 국제수지를 장부에 적는 원칙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쓸 수 있는 자료는 여전히 매우 적었다. 케인스는 1927년, 그 무형 항목들은 말 그대로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1927년이라는 때를 기억해두자. 영국이 금본위제로 돌아온 지 이미 2년, 그 결정의 값을 치른 지도 이미 2년이었다. 그런데 그 결정을 받쳐야 할 대외 장부는 통계상으로 여전히 흐릿했다. 결정은 정밀한 숫자 하나를 따라 내려졌다. 그 숫자가 재야 할 현실은 당시 누구도 분명하게 측정하지 못했다.
그 뒤로는 더 나빠진다. 1930년에서 1931년 사이 매크밀런위원회는 영국의 순단기 대외부채를 추계했다. 훗날 그 추계는 실제보다 현저히 낮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31년 9월에 이르러 영란은행 내부 메모 한 건은 인정했다. 자본 이동이 너무나 커서, 아무리 거친 수치로라도 윤곽을 제시할 수 없다고.
이 문장과 첫 절의 소수점 아래 일곱 자리를 나란히 놓아보자.
평가는 소수점 아래 일곱째 자리까지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 나라의 단기 외채가 얼마나 되는지, 내일은 얼마나 더 빠져나갈지에 대해서는 가장 거친 윤곽조차 내놓지 못한다.
이 역사 속에서 잔여항이 취한 모습이다. 앞선 글들의 모습과도 다르다.
앞의 잔여항 가운데는 재지 못한 것도 있었고, 정확히 재고도 보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학문의 문밖으로 밀어낸 것도, 증빙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여기서의 잔여항은 또 다르다. 자는 더없이 정밀한데, 재야 할 대상은 알 수가 없다.
이 둘은 흔히 한데 섞여 이야기되지만 전혀 다른 문제다. 정밀함은 자 쪽의 일이다. 눈금을 얼마나 촘촘하게 나누었는가, 몇째 자리까지 읽어서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있느냐는 대상 쪽의 일이다. 그것이 지금 얼마나 큰가, 내일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인가. 자의 눈금은 머리카락만큼 가늘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로 재려는 것은 애초에 가만히 서 있으려 하지 않을 수 있다. 구축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여기 있다. 자기 쪽의 정밀함을 맞은편 대상이 분명히 보인다는 뜻으로 착각한다.
1931년 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금에 정의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금은 더없이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었다. 문제는 실제 포지션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내일도 다른 사람들이 계속 자금을 빼갈지였다. 이 두 가지에는 소수 자릿수도, 단위도 없었다.
금본위제가 세계를 측정 가능한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한 일은 따로 있었다. 본래 같은 단위로 담기 어려운 것들을 통계로 만들고, 대차대조표에 넣고, 환율로 표현하라고 나라들을 하나씩 몰아붙였다. 그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닥쳤을 때, 숫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작업 자체가 쓸모없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국제수지를 적는 원칙, 통계위원회, 뒤에 갖추어진 대외계정 체계 전체는 이 제도가 몰아붙여서 생겨났으며, 지금도 쓰인다. 구축이 몰아붙여 만들어낸 것들은 흔히 구축 자체보다 오래 산다. 다만 그때 닥친 급한 일에는 미처 닿지 못했다. 셈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셈해야 했던 사건은 이미 지나가 있었다.
5. 400트로이온스
1925년 4월 28일, 처칠은 예산 연설에서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를 발표했다.
하지만 곧바로 단서를 붙였다. 금화를 다시 발행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으며, 당시의 재정 형편에서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치라고 말했다. 대중에게는 계속 지폐를 쓰고, 지난 10년 동안 익힌 지폐 사용 습관을 바꾸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말에는 좀처럼 눈길을 받지 않는 세부가 있다. 처칠이 하던 일은 기술적인 조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금본위제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은행으로 달려가 금을 달라고 하지 말고, 마음 놓고 계속 종이를 쓰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제도는 발표한 바로 그날부터 이미 한 가지를 전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정말로 모두 바꾸러 오면, 이 장치는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돌아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실제로 허용된 교환의 형태는 이러했다. 영란은행은 본점에서 고정된 가격으로 금괴를 판다. 단, 한 번에 파는 양은 400트로이온스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며칠 뒤 「1925년 금본위법」은 이 조치를 법에 담았다. 조문의 뜻은 분명했다. 영란은행에는 더 이상 지폐를 법정 금화로 바꾸어줄 의무가 없다. 은행이 해야 할 일은 요청을 하고 법정통화로 값을 내는 사람에게 순금 함량 약 400트로이온스의 금괴를 파는 것이었다.
400트로이온스. 12킬로그램을 조금 넘는 무게다.
아무렇게나 정한 양이 아니었다. 지폐를 가진 사람 대다수를 교환의 문밖에 세워둘 만큼 크면서도, 은행들 사이의 거액 결제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작았다. 문턱을 이곳에 놓자 교환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권리에서 기관만 쓸 수 있는 권리로 바뀌었다.
평범한 사람이 5파운드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영란은행에 들어가도 바꾸어 받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환 가능성은 법률상으로는 온전히 살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극소수에게만 열려 있었다.
여기서 아주 말끔한 분리가 생긴다. 법조문으로 보면 파운드는 여전히 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완전히 참인 말이며, 바로 그 말이 제도 전체의 신용을 받쳐주었다. 실제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쪽은 은행, 대형 상사, 다른 나라 중앙은행뿐이었다. 신용은 어떤 권리 위에 세워졌지만, 그 돈을 가진 사람 대다수에게는 그 권리가 실제로 성립하지 않았다. 속임수는 아니다. 조문은 분명하게 적혀 있었고 문턱도 공개되어 있었다. 다만 다시 한번 보여줄 뿐이다. 같은 규칙도 서로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것이 된다는 사실을.
처칠은 영국이 이미 1억 5,300만 파운드의 금 준비금을 쌓아두었다고도 발표했다. 필요하면 주저 없이 그 준비금을 쓰고 은행 할인율도 함께 활용해, 새로 복원한 제도를 지키겠다고 했다.
이 절에서 중요한 것은 처칠이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다. 그 조치 자체가 향한 방향이다.
셋째 글에서 리디아 사람들이 한 일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자에 몸을 입혀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했다. 주화였다. 그 뒤 2,000년 넘게 자와 그 자를 쓰는 사람 사이에는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연결이 있었다. 돈은 만져볼 수 있었고, 무게는 손에 들어 가늠할 수 있었으며, 순도는 의심해볼 수 있었다.
1925년의 한 걸음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금은 일상의 유통에서 한층 더 빠져나가, 거액 결제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제도의 뒷받침이 되었다. 금본위제를 되살리는 행위가 바로 사람들의 손에서 금을 거두어들이는 행위였다. 그로써 제도가 더 구체적인 것이 되지는 않았다. 더 추상적으로, 더 집중된 형태로, 더 기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익명성은 극단까지 밀려갔다. 그렇게 극단으로 가고 나니, 평범한 사람에게서는 더 멀어졌다.
이 선을 따라 지금까지 온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맨 처음 장부는 신전의 위계가 받쳐주어야 했다. 그 뒤의 돈은 주화 표면의 검인이 받쳐주어야 했고, 나중에 나온 교자는 관청이 인정해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한 걸음씩 비인격적인 쪽으로 나아갔지만, 그때마다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자리도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금본위제에 이르러 그 자리는 한 종류의 금속과 몇몇 중앙은행으로 옮겨갔다. 평범한 사람은 손을 댈 수도 없는 곳이었다. 멀리 갈수록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줄었다.
이것도 잔여항이 향하는 한 갈래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더 적은 사람만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어떤 것을 아직 누군가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다툴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확인하는 데 필요한 입장료가 400트로이온스가 되는 순간, 그것은 대다수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일상에서 시야 밖에 있다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별하기 어려운 두 가지다.
6. 근본적 조정
케인스의 반대는 곧바로 나왔다. 1925년 7월 22일부터 24일까지 한 석간신문에 글 세 편을 잇달아 실었고, 뒤이어 내용을 늘려 소책자 한 권으로 냈다. 제목은 『처칠 씨의 경제적 결과』였다.
그의 셈법은 더없이 간단했다.
전쟁 뒤 파운드의 대외 가치는 전쟁 전 금평가보다 약 10% 낮았다. 이제 그것을 전쟁 전 평가로 끌어올리려면, 앞으로 영국이 외국에 무엇을 팔든 외국 구매자가 10%를 더 내거나 영국 쪽이 10%를 덜 받아야 한다. 경쟁력을 잃지 않으려면 길은 하나였다. 석탄, 철강, 해운처럼 파운드로 값을 매기는 것들의 가격을 약 10% 내려야 했다.
이 10%는 추정치가 아니다. 두 평가 사이의 차이를 계산한 값이다. 첫 절에 나온 소수점 아래 일곱 자리와 같은 셈법에서 나온다. 여기서 구축이 하는 일은 아주 깔끔하다. 한 나라의 모든 대외거래를 비율 하나로 환산한 뒤, 그 비율을 아래로 나누어 보낸다. 업종 하나하나, 기업 하나하나, 사람 하나하나에게 나누어졌을 때 그것이 각각 무엇이 되는지는 이 계산식이 답해야 할 질문에 속하지 않는다.
가격을 10% 내린다. 종이 위에서는 깔끔한 한마디다.
현실에서 실행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업종들에서 비용의 가장 큰 몫은 임금이었다. 가격을 누른다는 것은 임금을 누른다는 뜻이었다. 임금 삭감은 사람 한 명 한 명이 받아들여야 했다.
계산식에서 급여명세서까지 가려면 긴 길을 지나야 한다. 이사회가 열리고, 현장 감독이 말을 전하고, 계약서를 다시 쓰고, 파업을 하고, 일터로 돌아가고, 다시 파업을 한다. 이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그 계산식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계산식의 결론이 현실이 되려면 그 길을 끝까지 지나야 한다. 구축은 결과를 계산할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닿는 과정을 계산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바로 그 과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산다.
케인스는 가장 날카로운 말을 적었다. 이것은 일부러 실업을 악화시키는 정책이라고.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임금을 강제로 떨어뜨리기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했다. 누가 대가를 치르는지도 이름을 짚었다. 광부들은 경제라는 거대한 바퀴에 깔리는 사람들이었다. 재무부와 영란은행은 환율을 4.40달러에서 4.86달러로 되돌리려고 근본적 조정을 마련했다. 광부들은 그 근본적 조정이 사람의 몸에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사람의 몸에 내려앉은 모습. 이 짧은 구절에는 주석이 필요하지 않다. 비유가 아니다. 정책이 실행되는 방식을 정확하게 묘사한 말이다. 조정은 달리 내려앉을 곳이 없다.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에게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내려앉는지는 그 사람들이 속한 업종과 그들의 교섭력이 정한다.
그래서 여기서 잔여항에는 구체적인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을 지목한 것도 당시 사람들이었다. 케인스는 광부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광부들이 바로 그 조정 자체라고 말했다. 계산식에서는 백분율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이 두 존재 방식 사이에는 환산표가 없다.
수십 년 뒤 영란은행이 스스로 쓴 회고는 같은 일을 차분한 공문서의 언어로 옮겼다. 그렇다고 피해 가지는 않았다.
그 회고는 이렇게 말한다. 1925년 복귀 전에 정책결정자들은 국제수지 통계를 거의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에게 1913년의 대달러 평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파운드가 고평가된다면 전통적인 처방은 국내의 강제적 디플레이션과 국외의 인플레이션으로 가격과 비용을 다시 맞추는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영국의 실업률이 이미 높았다는 데 있었다. 임금을 실제로 끌어내리기 위해 정부가 추가적인 디플레이션까지 감수하려 하지는 않았다. 1926년 총파업은 명목임금을 낮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보여주었다. 그 결과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대외 균형을 지키는 일은 끝없는 문제가 되었다. 영국은 자본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오랫동안 미국보다 높은 금리를 유지해야 했다.
치른 대가에는 통계가 있다.
금본위제로 복귀한 뒤의 그 6년 동안, 영국에서 보험 적용 대상 노동자들의 실업률은 평균 12.9%였다. 8.5% 밑으로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31년 첫 아홉 달의 평균은 21%에 이르렀다.
400트로이온스와 21%.
두 수는 같은 제도에서 나왔다. 하지만 법에 적힌 것은 앞의 수뿐이었다. 뒤의 수는 그 법이 작동할 때 따라 생기는 양이었다. 해마다 발표되어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조문은 하나도 없었다.
영란은행이 법정 가격에 금괴를 내주는 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계속 디플레이션과 높은 실질금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7. 93억과 21억
금본위제와 대공황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는 아이켄그린의 『황금 족쇄』와 그가 다른 연구자 한 사람과 함께 쓴 일련의 논문에서 나왔다.
그 설명의 핵심은 이렇다. 금본위제는 경제정책을 근본적으로 제약했고, 불안정한 환경을 만드는 데도 크게 작용했다. 이들은 상대하기가 더 어려운 개념도 내놓았다. 금본위제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제도 하나에 그치지 않고 정치 엘리트와 중앙은행가들이 공유하는 판단 기준이었다는 뜻이다. 금을 지키는 것은 신용을 지키는 것이며, 태환을 포기하는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 개념은 전체 논의의 틀에서 중요하다. 앞선 열세 편에서 구축은 줄곧 바깥에 손을 댔다. 사물을 누르고, 이름을 바꾸고, 묻지 않고, 경계를 줄이고, 궤도를 정해주고, 증빙을 요구했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구축이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산다. 제도 자체는 실은 빠져나갈 틈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사람이 그 틈을 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구축이 존재하는 가장 견고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규칙은 고칠 수 있고, 중단할 수 있고, 투표로 뒤집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판단 기준은 누군가 따로 집행할 필요가 없다. 이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책임 있게 행동하는지를 재는 기준이 되어 있다. 거기까지 이르면 누구도 누구를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스스로 빠져나갈 틈을 용접해 막는다.
나라들을 비교해서 얻은 몇 가지 사실이 이 설명을 단단히 받쳐준다.
첫째,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금본위제는 수명이 아주 짧았다. 고전적 시기에는 네 핵심국이 동시에 체제 안에 있는 상태가 36년 이어졌다. 전간기에 같은 상태가 유지된 기간은 고작 4년에서 6년이었다.
둘째, 체제의 기술적인 제약은 전쟁 전보다 더 빡빡했다. 두 연구자는 놀라운 수치를 제시했다. 1929년 41개국이 보유한 금 준비금은 모두 93억 7,800만 달러였다. 그 가운데 실제로 여유가 있어 일시적인 국제적 불균형에 대응할 수 있는 몫은 21억 7,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법정 준비율에 묶여 대차대조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93억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것은 21억뿐이었다.
이 대목은 따로 생각해볼 만하다. 준비금은 본래 어려울 때 꺼내 쓰려고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그것이 줄곧 그 자리에 놓여 있기를 요구했다. 모두가 그것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준비금의 기능은 쓰이는 데서 보이는 데로 바뀌었다. 정작 써야 할 날이 닥치면, 움직일 수 있는 몫은 가장 작은 조각뿐이었다.
이것은 앞에서 따라온 선 하나와 이어서 볼 수 있다. 구축은 자신에게 밑천이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그 밑천을 꺼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보여주려고 내놓은 것을 한번 쓰기 시작하면, 밑천이 모자란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준비금이 신용으로 여겨질수록 오히려 더 쓸 수 없게 된다. 끝내 어떤 것의 쓸모가 쓰지 않는 데 있게 된다.
셋째, 금본위제는 긴축을 국경 너머로 퍼뜨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28년에서 1929년에 걸쳐 주식시장 투기를 억누르려고 신용을 조였다. 국제 금본위제가 있었기에 다른 나라 중앙은행도 뒤따라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긴축 통화정책은 많은 나라의 경제를 침체로 밀어 넣었다. 한 연구자는 1930년대 초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국제 금본위제를 통해 전해진 통화 수축이었다는 것이다.
넷째, 먼저 나온 나라가 대체로 먼저 회복했다. 금본위제를 끝내 복원하지 않고 환율을 변동하도록 둔 스페인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겪은 물가와 생산의 하락을 피했다. 1931년 영국과 함께 금본위제에서 나온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그 안에 남아 있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빠르게 회복했다. 24개국을 대상으로 한 표본에서,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금본위제 밖에 있던 나라들의 산업생산 증가율은 그 안에 남은 나라들보다 평균 약 7%포인트 높았다. 영란은행이 쓴 역사 글도 영국의 본격적인 경제 회복은 1932년 초에야 나타났다고 인정한다. 그 전제는 바로 1931년 후반 금본위제를 중단함으로써, 마침내 금리 인하와 파운드 평가절하가 가능해졌다는 데 있었다.
다섯째, 두 나라가 금을 빨아들인 뒤 내놓지 않았다. 한 연구자는 프랑스를 금의 블랙홀이라고 불렀다. 세계 금 준비금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1927년 7%에서 1932년 27%로 올라갔다. 새로 들어온 금의 대부분은 준비율을 더 높이는 방식으로 묶어두었다. 이 연구자의 반사실적 모의실험에 따르면,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금 준비금과 물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가 평소처럼 작동했다면 세계 물가는 파국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조금 올랐을 것이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가 지나치게 보유한 금이 1929년에는 세계 금 보유량의 6%, 1930년부터 1932년에는 12%에 해당했다고도 추정했다. 1932년에 이르면 프랑스 한 나라만으로도 세계 금 보유량의 13%를 실제 유통에서 빼낸 셈이었다.
그사이 영국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았다. 한쪽에는 고평가된 파운드가 있었다. 다른 쪽에는 프랑스가 준비자산을 파운드와 달러 대신 금으로 보유하면서 생기는 압력이 있었다. 1931년 7월부터 9월까지 영국 당국은 파운드를 지탱하기 위해 약 2억 파운드에 이르는 금과 외국의 신용공여를 동원했다. 그래도 유출은 멎지 않았고, 9월에는 태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파운드는 곧 10월에 3.89달러, 12월에 3.37달러로 떨어졌다.
8. 건실한 살림의 보증 도장
다른 쪽의 설명도 제 모습 그대로 충분히 펼쳐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의 일곱 절은 모두 판결문이 되고 만다.
한 갈래의 연구는 고전적 금본위제를 건실한 살림의 보증 도장이라고 부른다. 논증은 이렇다. 1870년부터 1914년 사이 주변부 국가가 금본위제에 들어간다는 것은 런던 시장에 신호를 보내는 일이었다. 재정을 건실하게 꾸리고 있으며 약속을 지킬 뜻이 있다는 신호다. 그러면 돈을 더 쉽게, 더 싸게 빌릴 수 있었다. 이 이익을 수치로 계산한 연구도 있다. 1914년 이전에 금본위제를 지킨 나라는 차입금리의 스프레드를 약 40~60베이시스포인트 낮출 수 있었다.
이쪽 연구자들은 더 정교한 설명도 내놓았다. 예외 조항이 있는 규칙이라는 것이다. 고전적 금본위제는 융통성 없는 규율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평소에는 태환을 지키되 전쟁이나 큰 위기가 닥치면 중단할 수 있었다. 다만 시장은 그 나라가 나중에 원래의 평가로 돌아오리라고 기대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고전적 금본위제는 인간의 사정을 무시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재량권을 더 믿을 만한 틀 안으로 들여놓은 체제였다.
이쪽도 대개 전간기의 실패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게를 다른 곳에 둔다. 실패한 것은 대전 뒤에 재건한 금환본위제이지 고전적 금본위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더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재난은 중앙은행이 금본위제의 규칙을 어긴 탓이지, 제도라는 발상 자체의 탓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양쪽 모두 증거를 내놓을 수 있다. 여기서 판정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세 갈래의 질문이 바라보는 것은 같지 않다. 한쪽이 주로 묻는 것은 고전적 시기에 왜 상대적인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다. 다른 쪽이 주로 묻는 것은 전간기에 왜 한 차례의 침체를 대공황으로 키웠느냐다. 또 다른 사람들은 대가를 알면서도 왜 각국이 끝까지 버텼으며, 왜 어떤 나라는 한발 먼저 나왔느냐고 묻는다. 세 질문에는 저마다의 시기와 나라, 저마다의 증거가 있다. 이것들을 금본위제는 대체 좋은가 나쁜가라는 한마디로 뭉치면, 얻는 것은 답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것들을 한 번 더 납작하게 밀어버린 결과뿐이다.
여기서 방법에 관한 한 가지를 덧적을 수 있다. 논쟁이 매듭지어지려면 당사자들이 같은 명제를 놓고 다투고 있어야 한다. 경제사에서 여러 해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논쟁 가운데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면서 제목만 공유하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것이 많다. 제목이 같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같은 것을 다투고 있다는 뜻으로 오인되기 쉽다.
그런데 한 연구는 질문을 정치 쪽으로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그 결론은 천천히 읽어볼 만하다.
24개국의 패널 자료에서는 1인당 소득이 높고, 채권국으로서의 지위가 강하고, 초인플레이션을 겪은 나라일수록 금본위제에 오래 남을 가능성이 컸다. 반면 민주주의 제도, 실업, 은행위기는 그 존속 기간을 줄였다.
일상의 말로 바꾸면 이렇다. 한 나라가 금본위제 안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는 금을 얼마나 가졌느냐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얼마나 오래 감당하게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능한지는 그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이 그 부담을 되밀어낼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 말하지 않은 일이 하나 남았다. 이 장치 전체에서 가장 깊은 반어다.
금을 아끼려고 전간기에 재건한 것은 더 순수한 금의 체제가 아니었다. 더 추상적인 금환본위제였다. 많은 나라가 전쟁 뒤 금화 유통을 중단하고 금괴본위제로 옮겨갔다. 더 많은 나라는 아예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외환을 준비자산으로 삼았다. 그 외환은 실제로 주로 파운드와 달러였다. 유럽 각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은 전쟁 전 10년 동안 대략 2억 5,000만~4억 달러 사이에서 움직였다. 1924년 말에는 이미 8억 4,400만 달러로 늘었고, 1928년 말에는 25억 1,3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전간기의 네 핵심국 가운데 금화본위제를 유지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금괴본위제였고, 그 밖의 대다수 나라는 금환본위제였다.
다시 말해 금에 기초한다고 내세운 이 세계는,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금으로 바꾸어주겠다고 약속한 종이 위에 갈수록 더 깊이 앉아 있었다.
여섯째 글에서 교자를 이야기했다. 돈에서 금속을 벗겨내는 것은 그 무게를 모두 인격 위에 얹는 일이었다. 금본위제가 하려던 일은 정확히 반대였다. 무게를 인격에서 금속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런데 끝까지 가서 만들어낸 것은 새로운 신뢰의 층이었다. 그 층은 자신이 대신한 것들보다 더 멀리 있었고, 더 집중되어 있었으며, 확인할 수 있는 사람도 더 적었다. 신뢰에 기대는 일을 완전히 벗어나려던 노력은, 신뢰를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의 신용, 시장에서의 평판, 중앙은행들의 협력, 사회의 순응에 기대는 그 선은 한 번도 뽑혀나간 적이 없다. 1870년대의 제도 전환, 1914년의 전쟁 재정, 1925년의 고평가된 수준으로의 복귀, 1931년의 자본 도피, 1933년 무렵의 세계적인 은행 공황. 실제 압력이 가해지는 시험이 닥칠 때마다 그 선은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의 두 수로 돌아가보자.
소수점 아래 일곱째 자리와, 가장 거친 윤곽조차 내놓을 수 없다는 말. 같은 제도에서 나온 둘 사이의 간격은 10년도 되지 않았다.
실은 모순이 아니다. 자는 극도로 정밀하게 만들 수 있다. 너무 정밀해서, 정밀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측정되었다고 믿게 할 만큼. 하지만 그 자가 재는 것은 언제나 자기가 잴 수 있는 것들뿐이다. 재지 못하는 것들은 여전히 움직인다. 그리고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사납게 움직인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