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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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경제
제11편 · 총 23편

열한째 글. 마르크스와 노동가치: 잔여항의 장부를 쓰는 사람, 제 장부의 셈도 맞추지 못하다

마르크스는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해 등가교환 안에서 생기는 잉여를 추적했다. 사회적 평균시간의 힘과 임금계약의 숨은 신용, 이론 안에 남은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함께 읽는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네 사람과 공장 4,000곳

1833년, 영국 의회가 공장법 하나를 통과시켰다. 아홉 살 미만의 아이는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고 정했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는 하루에 여덟 시간, 일주일에 마흔여덟 시간을 넘겨 일할 수 없었다. 열세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는 하루 열두 시간이 한도였다.

이 숫자들은 줄여놓은 숫자다. 줄이기 전에는 어땠는지 법조문이 따로 적을 필요는 없다. 읽는 사람이 스스로 셈할 수 있다.

아홉 살 미만의 아이를 공장에서 일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이 필요했다면, 아홉 살도 안 된 아이들이 실제로 공장에 있었다는 뜻이다. 아홉 살부터 열세 살까지의 아이를 하루 여덟 시간 넘게 일시키지 말라는 법이 필요했다면, 그전에는 그보다 오래 일했다는 뜻이다. 법조문은 언제나 자기가 막으려는 대목만 적는다. 막지 못하는 것과 이미 지나간 것은 법조문의 침묵 속에 남는다.

이 숫자들이 현장에서도 지켜지도록 의회는 공장 감독 제도도 함께 만들었다. 감독관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당시 감독해야 할 공장은 약 4,000곳이었다. 훗날 의회의 기록은 굳이 감출 것도 없는 사실 하나를 인정했다. 이 법을 피해 가는 일이 널리 벌어졌다는 것이다.

넷 대 4,000. 그 비율 자체가 이미 하나의 판결이다. 입법자들이 무엇을 단속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감독 체계는 설계할 때부터 제대로 단속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루의 길이는 숫자 하나로 적혔다. 그 숫자가 실제로 지켜질지는 보러 가는 사람이 있는지, 몇 명이나 가는지, 다 돌아볼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숫자는 종이를 떠나는 순간 다시 사람의 손으로 돌아간다.

앞선 글들에서도 여러 차례 보았던 일이다. 셋째 글에서 주화에 새긴 무게는 검인 자국을 확인하는 사람에게 기대야 했다. 다섯째 글에서 장부의 칸은 꼼꼼히 들여다보려는 사람에게, 여섯째 글에서 교자에 적힌 글자는 그것을 여전히 인정하는 관청에 기대야 했다. 규칙은 아무리 단단하게 써놓아도 제 발로 걸어 다니지 못한다.

11년 뒤인 1844년의 법은 여성 노동자와 열세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의 청소년 노동자가 일하는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줄였다. 초창기의 보건·안전 조항들도 몇 가지 넣었다. 기계에 안전 울타리를 설치하라는 규정이 그중 하나였다. 1847년의 10시간법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과 청소년의 법정 노동시간을 다시 열 시간으로 줄였다.

14년에 걸친 세 차례 입법은 같은 방향으로, 한 단계씩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것도 원칙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거듭된 다툼 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것이었다. 공장주는 더 줄이면 공장을 돌릴 수 없다고 했다. 의사는 아이들의 뼈가 곧게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성직자는 예배를 보러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문 앞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다투고 나서 종이에 남은 것은 정수 몇 개였다.

정수는 구축이 가장 좋아하는 모양이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 아직 자라는 몸, 사람이 기계 옆에 얼마나 오래 서 있으면 실수를 하기 시작하는가. 어느 것도 정수가 아니고, 정수여서도 안 된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감독하고 법정에서 누가 위반했는지 판결하려면 정수 하나가 있어야 한다. 여덟 시간과 열두 시간 사이 어디에 선을 긋든 이유는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선을 긋고 나면 양쪽은 합법과 불법이 된다. 구축이 실제로 손을 쓰려면, 정수를 쥐고 쓸 수밖에 없다.

입법 때마다 다툰 것은 같은 일이었다. 하루를 얼마나 길게 늘일 수 있는가. 다툼이 끝날 때마다 그 결과는 숫자 하나로 굳어져 법조문에 들어가야 했고, 확인할 사람의 손에 맡겨져야 했다.

런던에서 감독관들이 남긴 기록을 읽는 사람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읽으며, 자기가 쓰던 책에 긴 대목들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책은 1867년에 나왔다. 『자본론』 제1권이었다.

그는 이야깃거리로 곁들이려고 기록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입증하려는 한 가지에 그 숫자들이 필요했다. 하루를 얼마나 길게 늘일 수 있는지 정하는 것은 기술도 도덕도 아니다. 힘이다. 그리고 힘은 달라진다. 노동시간의 선이 놓일 자리는 세대마다 새로 다투어 얻어낸다. 다투고 나면 법조문에 적는다. 법조문은 다시 확인할 사람에게 맡긴다.

앞선 열 편에서 구축은 줄곧 장부를 썼고, 잔여항은 줄곧 넘쳐났다. 구축이 잔여항을 다루는 방법은 몇 번이나 달라졌다. 더 큰 구축을 빌려 제약을 풀기도 했고, 이름을 바꾸기도 했고, 묻지 않기도 했으며, 비용에 나누어 넣거나 경계를 안쪽으로 당기기도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잔여항을 위해 장부를 쓰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넘쳐난 그 몫에 이름을 붙였다. 어디서 생기는지 짚었고, 계산할 수 있는 양도 부여했다. 이런 방식으로 구축 대신 잔여항의 장부를 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없이 진지하게 썼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그의 계산식을 검산할 만큼 진지하게 썼다.

그러나 잔여항을 위해 쓰는 장부도 여전히 장부다.

2. 반 시간

『자본론』 제1권이 첫머리에서 한 일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을 같은 자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아마포, 외투, 금, 철, 빵이었다.

마르크스는 이 물건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까닭이 물리적 성질에 어떤 공통점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모두 같은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물건의 타고난 성질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달려 있다. 이 말은 그 자신이 분명히 정의했다. 정상적인 생산조건에서, 그때 그 사회의 평균적인 숙련도와 노동강도로 어떤 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핵심은 ‘사회 평균’이라는 네 글자에 있다. 그가 든 예는 그 네 글자의 무게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영국에서 동력 직기가 일정한 양의 실을 천으로 짜는 데 필요한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하자. 여전히 손으로 천을 짜는 직공은 전과 똑같은 시간을 들여도, 그의 한 시간이 이제 사회적 노동의 반 시간으로만 인정된다. 그가 짠 천의 가치도 그에 따라 절반으로 떨어진다.

이 직공은 게을러지지 않았다. 솜씨가 무뎌지지도, 동작 하나를 바꾸지도 않았다. 여전히 하루 열두 시간을, 같은 방에서, 허리를 굽힌 채 일한다. 달라진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기계 한 대다. 그의 바깥에 있는 자가 그의 한 시간을 반 시간으로 다시 매겼다. 그런데 그는 항변할 자리조차 없다. 그 자는 개인의 사정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 겹 더 눈에 잘 띄지 않는 뜻이 있다. 직공이 잃은 것은 남이 갚아야 할 돈이 아니다. 누가 품삯을 떼어먹은 것도, 계약을 어긴 것도 아니다. 잃은 것은 자기의 한 시간에 대해 사회가 인정해주는 몫이다. 그리고 그 몫은 애초부터 자기 손으로 간수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기술 하나와 두 손이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가진 것은 언제든 바깥에서 다시 매길 수 있는 비율 하나였다.

이쯤 되면 일이 아주 또렷해진다. 자는 일하는 사람의 손에 있지 않다. 사회 쪽에 있다. 그 자는 언제든 한 사람의 시간이 얼마만 한 값인지 다시 쓸 수 있다. 다시 쓰는 이유는 그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마르크스는 이어 이 자에도 마침내 통일된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화폐다. 가격은 가치의 화폐적 표현일 뿐이며,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독립적이고 동질적인 형태로 만든다. 그는 기묘한 표현도 썼다. 상품이 사회의 상형문자가 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먼저 가치형식으로 상품을 교환 가능한 기호들의 체계로 써놓는다. 그런 다음 되돌아와 그 기호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이 이론을 노동시간을 적은 물량 목록으로만 읽으면 절반 이상을 놓친다고 일깨우는 연구자들이 있다. 동시에 화폐에 관한 이론이며, 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셋째 글과 이어진다. 리디아의 주화는 자를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 자가 만들어졌다고 새로운 차이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전에는 놓을 곳이 없던 차이들이 제자리를 얻었을 뿐이다. 추상노동이라는 자도 같은 일을 한다. 다만 재는 대상이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똑같이 하루 열두 시간을 일해도 누구의 것은 열두 시간으로, 누구의 것은 여섯 시간으로 친다. 자가 생기기 전에는 이런 비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구축이 자 하나를 보탤 때마다 세상에 무엇이 더 생기는 것은 아니다. 또 한 무리의 것들이 서로 견줄 수 있는 자리에 놓일 뿐이다.

그 자 밖으로 넘쳐나는 것은 같은 페이지에 벌써 적혀 있다. 계산에 들어가는 것은 그 한 시간 동안 한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깊이 닳았는가가 아니다. 어느 종류의 노동에 대해 사회가 인정하는, 평균적으로 비교 가능한 시간이다. 평균보다 느린 것, 빠른 것, 몸을 더 상하게 하는 것, 오랜 경험이 있어야 해낼 수 있는 것, 집에서 누군가 뒤를 받쳐주어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먼저 납작하게 눌러야 그 자 위에 올라간다. 눌렀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곳은 대개 장부 위가 아니다. 일을 마친 사람의 침묵 속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마흔 살에 벌써 펴지 못하게 된 허리로, 집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더 일해야 하는 몇 시간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대가가 있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무엇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라는 말 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 말은 정의상 평균을 세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 일에 붙인 이름은 상품 물신성이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그들 앞에서 물건과 물건 사이의 관계라는 환영 같은 형태를 취한다고 썼다.

사람들이 환각을 본다는 말로 읽히곤 한다. 그렇게 읽으면 가벼워진다. 그의 뜻은 훨씬 무겁다. 시장은 실제로 사회적 관계를 가격과 화폐, 상품의 형식 안에 써넣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배, 의존, 평균화, 경쟁이 정말로 겉에서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관계로 작동한다. 익명적인 교환은 거짓이 아니다. 사람의 관계를 물건의 문법으로 고쳐 썼을 뿐이다.

3. 무엇을 파는가

마르크스가 앞선 사람들의 노동가치론에 가한 가장 중요한 수정은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말을 되풀이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과 노동력을 갈라놓은 것이었다.

갈라놓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노동 자체라면, 모두가 등가교환의 규칙을 따르는 조건에서 자본가가 어떻게 계속 이윤을 얻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자본가가 값을 덜 주었다고 하면 사기이고 계약 위반이다. 개개인의 품행이 나쁜 것이지 제도의 문제는 아니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려던 것은 바로 사기가 없는데도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였다.

자기 논증에 엄격한 제한을 건 셈이다. 품삯을 떼어먹는 공장주를 쓰지 않는다. 저울에 장난치는 사람, 재료와 품을 속이는 사람, 폭력으로 사람을 내쫓는 일을 쓰지 않는다. 모두 실제로 있었으며,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에 기대어 논증하면 결론은 일부 사람이 나쁘다는 데서 끝난다. 그가 얻으려는 결론은 모두가 규칙을 꼬박꼬박 지켜도 결과는 여전히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품을 바꾸었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다. 일정한 시간 동안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상품의 값에는 두 측면이 있다. 가치는 그 능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생활필수품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사용가치는 실제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보다 더 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잉여가치는 이 둘 사이의 틈에서 생긴다.

그가 직접 든 예는 따라가기 어렵지 않다. 노동자 한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생활필수품의 가치가 3실링이고,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평균 여섯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노동자의 그날 노동력 가치는 3실링이다. 자본가는 3실링을 주고 그의 하루 노동력을 산다. 덜 준 것이 아니다. 한 푼도 덜 주지 않았다.

문제는 사들인 것이 여섯 시간이 아니라 그 능력을 하루 종일 사용할 권리라는 데 있다. 노동자는 여섯 시간을 일하면 자기 노동력의 가치인 3실링을 이미 다시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뒤로도 여섯 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 그 여섯 시간 동안 만들어낸 가치는 그의 몫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가가 등가교환의 규칙 안에서 해낸 묘기라고 불렀다. 눈여겨볼 것은 이 묘기가 이루어지는 형식이다. 계약은 깨지지 않았고, 법도 어기지 않았으며, 종이 위의 셈은 맞는다. 셈이 맞지 않는 곳은 종이 위가 아니다.

1865년, 그는 한 노동자 조직을 상대로 연설하면서 이 구별을 더 직설적으로 설명하고 경계 하나도 그었다. 노동자가 직접 파는 것은 자기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고 했다. 곧이어, 사람이 이 능력을 무기한 팔 수 있게 된다면 노예제는 즉시 되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단지 이론의 세부를 정리하는 말이 아니다. 여덟째 글에서는 그 선이 완전히 뚫렸다. 사람 하나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격의 평면에 눌려 들어가 보험증권에 적히고 톤수에 셈해졌다. 마르크스는 임금관계와 그 일 사이에 놓인 것이 기한이라고 짚었다. 일정한 시간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지배권을 파는 것이지, 자신을 통째로 영구히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임금관계를 그 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선의도, 도덕 수준도 아니다. 기한이다. 기한이 사라지면 경계도 곧바로 사라진다.

이 경계는 성립한다. 동시에 몹시 얇다. 두 일을 갈라놓는 것은 시간이라는 변수 하나인데, 시간은 길게 조정할 수 있다. 하루 열여섯 시간, 일주일에 이레, 갚아도 끝이 없는 빚, 벗어날 수 없는 계약, 떠날 수 없는 거처. 한 칸씩 더 길게 조정할 때마다 경계는 그만큼 더 얇아진다. 그 말은 노예제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일과 지금 눈앞의 일 사이에 놓인 것이 조정 가능한 양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바로 그래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처음부터 온전한 한 사람과 딱 맞아떨어질 수 없다. 계약으로 넘기는 것은 어떤 능력의 사용권이다. 그러나 그 능력을 지닌 것은 지치고, 병들고, 아이를 낳고, 거부하고, 파업하고, 죽는 사람이다.

마르크스가 아주 차갑게 쓴 문장이 있다. 노동력의 사용가치, 곧 노동 자체는 기름 장수에게 팔아넘긴 기름의 사용가치가 그렇듯 더는 판매자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계약으로 넘긴 것은 사용가치다. 아픔과 피로, 늙음과 모욕은 모두 그 사용가치가 실제로 소모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값을 매기는 일은 더 잘게 들어간다. 시간급은 하루를 시간으로 쪼갠다. 성과급은 노동을 생산한 개수로 정산한다. 마르크스는 뒤에 아예 성과급은 시간급의 전환형태일 뿐이며, 시간급 자체도 노동력의 가치나 가격이 전환된 형태라고 했다. 무엇을 이루려는지는 분명하다. 사람의 일할 능력을 기름, 목화, 석탄, 기계처럼 값을 매기고 정산하고 비교하고 감독할 수 있는 항목으로 만드는 것이다.

4. 역사적·도덕적 요소

여기까지 오면 반드시 답해야 할 것이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정하는가.

체계의 논리를 따르면 답은 이래야 한다. 그 능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어떤 생활필수품이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한다. 그 생활필수품들의 가치를 모두 더하면 노동력의 가치가 된다. 이 책의 앞선 논증은 줄곧 그렇게 걸어왔다. 상품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노동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생활필수품이라는 바구니에 무엇을 담을지는 한 사회가 사람이 살아가려면 적어도 무엇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빵은 몇 개를 넣을 것인가. 고기는 얼마나 자주 먹을 것인가. 집에는 창문이 있어야 하는가. 아이들은 학교에 가야 하는가. 병이 나면 누워 쉴 여지가 있는가. 어느 것도 생산조건에서 도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얻어낸 결과다. 나라마다 다투어 얻은 것이 다르고, 같은 나라에서도 시대가 달라지면 달라진다.

그래서 그는 노동력의 가치를 논하는 장에 이상한 문장 하나를 썼다. 이 가치에는 노동자의 체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리적 최소한의 물품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역사적·도덕적 요소도 들어 있다고 했다.

역사적·도덕적 요소는 체계 안에서 도출할 수 없는 항이다. 어느 정도라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할 것인지는 생물학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관습과 투쟁, 사회적 기준, 교육 수준, 집에서 몇 사람이나 무보수로 뒤를 받치는지, 그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어떤 삶이라야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지가 뒤섞여 있다. 하나하나 모두 변한다. 계산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다투어 정하는 것들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도출해낼 수 있는 척하지도 않았다. 정의 안에 써넣고, 거기 있음을 인정한 다음, 계속 나아갔다.

이 행동은 감추는 일과 구별해야 한다. 그는 그 항을 각주에 밀어 넣지 않았다. 전문적인 이름을 씌워 논리로 도출한 것처럼 보이게 하지도 않았다. 역사와 도덕이라는 두 말을 썼다. 과학으로 만들려는 책 안에 놓이면 눈에 거슬릴 말들이다. 거슬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썼다.

마르크스 자신의 장부에서 잔여항이 놓인 자리가 여기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보았고, 이름을 붙였고, 그곳에 놓아두었다. 방정식 안에는 합쳐 넣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그와 맞선 사람도 같은 문제를 두고 모양은 같고 방향은 정반대인 행동을 했다. 열째 글에서 보았듯, 멩거는 사람이 판단을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치의 정의에 써넣고는 지나갔다. 뒤의 사람들이 그 틈을 다루는 방법은 대개 판단이 옳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삶에 대한 사람들의 집단적 판단을 노동력 가치의 정의에 써넣고는 역시 지나갔다. 뒤의 사람들이 그 항을 다루는 방법은 대개 고정된 바구니 하나를 주는 것이었다. 서로 반대 방향에서 출발한 두 체계가 저마다 가장 중요한 기초에, 도출할 수도 없고 빼낼 수도 없는 항 하나를 남겼다.

그래서 존엄은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가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울 수 없는 역사적·도덕적 잔여분으로, 뒷문을 통해 이론 안에 다시 밀려 들어왔다.

뒷문으로 들어온 것에는 특징이 하나 있다. 들어올 수는 있어도 자리를 받지 못한다. 정의 안에는 있지만 도출 과정에는 없다. 결과에 영향을 주지만 계산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계산을 더 진행하려는 곳에서는 언제나 이미 주어진 상수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하필 책 전체에서 가장 일정하지 않은 것이 그 항이다. 구축은 여기까지 나아와 자기 힘으로 도출할 수 없는 것과 마주쳤다. 처리법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이름을 붙인 뒤 고정해두는 것이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부주의도 승리도 아니다. 어느 쪽의 득점으로 세어도 맞지 않는다. 그 항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주 현실적이다. 임금은 한 사람의 생리만을 상대하지 않는다. 어떤 삶이라야 삶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상대한다. 뒤의 일은 관습과 투쟁과 시대만이 정할 수 있다. 정하고 나면 다음 세대가 또 한 번 정한다.

그래서 임금이라는 숫자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성질이 다르다. 겉으로는 가격 하나다. 목화의 가격, 석탄의 가격, 기계의 가격과 같은 표에 나란히 적힌다. 그러나 그 밑에는 다른 무엇이 눌려 있다. 한 사회가 지금 이 순간 인정하려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다. 가격표의 나머지 숫자에는 이 한 겹이 없다. 목화가 좀 더 잘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한들 목화 값이 오르지는 않는다.

그 항 안에서 언급되기는 했으나 끝내 별도의 칸을 얻지 못한 것도 눈여겨볼 수 있다.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 번도 장부에 오르지 않는 일들이다. 이 책에도 등장한다. 노동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재생산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5. 어디서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외상을 준다

임금관계는 모든 교환 가운데 가장 익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계약이 있고, 노동시간표가 있고, 정산일이 있고, 단가가 있다. 양쪽은 서로 알 필요도, 친분이 있을 필요도, 서로 믿을 필요도 없다. 여섯째 글에서 보았던, 누군가 기꺼이 인정해주어야만 효력이 생기는 증서는 여기서는 전혀 필요 없어 보인다.

계약의 장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게 해준다. 상대의 내력을 캐묻지 않아도 되고, 중간에서 보증해줄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되며, 친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작할 필요도 없다. 진정한 해방이었다. 출신 때문에 문밖에 막혀 있던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랬다. 열째 글에서, 시장 전체에 같은 비율을 적용한다는 말이 무너뜨린 것은 문벌에 따라 값을 부르던 방식이라고 했다. 임금계약도 같은 일을 한다. 한 사람을 그의 내력에서 떼어내, 얼마나 일을 할 수 있는지만 남긴다.

마르크스는 임금 지급을 논하면서 이 인상을 무너뜨렸다.

그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력이 이미 제 구실을 한 뒤에야 대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노동자는 먼저 일하고 월말이나 주말에 돈을 받는다. 실제로는 노동자가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자본가에게 먼저 외상으로 내주는 셈이다. 그는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썼다. 어디서나 자본가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것은 노동자라고.

이 한 문장이 임금관계를 뒤집어 보여준다. 겉으로는 현금 거래에 가장 가깝고, 표준계약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었으며, 사람됨이나 친분이 가장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일하고 나중에 돈을 받는 틈이 언제나 그 안에 있다. 그 틈에는 지연과 체불, 자본가의 파산, 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있다. 가장 비인격적인 관계 안에, 상대가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어야만 하는 시간이 묻혀 있다.

그 시간 동안의 위험은 대칭적이지 않다. 자본가가 외상으로 받은 것은 이미 끝난 일이다. 그 일은 벌써 상품이 되어 창고에 놓여 있다. 노동자가 외상으로 내준 것은 이미 써버린 힘이다. 힘은 쓰고 나면 없어지며, 되찾을 수 없다. 공장이 망하면 상품은 청산할 수 있다. 노동자가 며칠 동안 쓴 힘은 청산 목록에 없다. 그러니 서로 기다리는 시간일 뿐만이 아니다. 한쪽만 제 것을 걸고 있는 시간이다.

노동자는 한편으로 시간마다 정산되는 능력 하나로 셈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 시간의 모든 불확실성을 떠안아야 한다. 계약서에 적힌 것은 능력이다. 그 안에 걸린 것은 사람이다. 종이 위에서는 하나처럼 적히지만, 현실에서는 한 번도 같은 것이었던 적이 없다.

여섯째 글에서 교자를 다룰 때, 돈에서 금속을 벗겨내면 무게 전체가 인격에 실린다고 했다. 여기서는 방향이 반대다. 임금관계는 거래에서 인격을 몰아내려고 애쓴다. 시간 수, 생산한 개수, 단가, 정산일로 바꾸려 한다. 하지만 다 몰아내지는 못한다. 신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산일 이전의 그 틈으로 물러갔다. 계약서에 쓰지 않은 자리로 물러갔다.

두 매개는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실은 줄곧 이어져 있었다. 첫째 글의 장부 없는 시대에는 주고받은 인정의 빚을 양쪽 모두의 기억이 떠받쳐야 했다. 둘째 글의 점토판에 적힌 빚은 신전의 위계가 떠받쳤다. 여기서 임금을 떠받치는 것은 계약서 한 장과 아직 문을 열고 있는 공장이다. 형식은 갈수록 차가워진다. 인격의 흔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차가워진다. 그래도 차가운 그 끝에는 언제나 누군가 신의를 지켜야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이어져 있다. 구축은 그 길을 점점 짧게 만들 수 있다. 없앨 수는 없다.

더구나 그 틈을 메우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몸이다. 그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하고, 몸이 계속 버텨주어야 임금 지급일까지 기다릴 수 있다. 그 틈에 넣어둘 다른 담보는 없다. 시간마다 정산되는 능력 하나로 환원되는 동시에, 계속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내놓아 그 계약을 떠받쳐야 한다.

이 절의 양 끝을 함께 놓아보자. 임금관계는 모든 교환 가운데 순수한 가격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한편, 한 사람이 계속 그 자리에 살아 있어야 하는 데 가장 깊이 기대는 관계이기도 하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았다. 두 가지를 동시에 끝까지 밀고 갔다.

6. 소외는 어디로 갔는가

1844년, 스물여섯 살의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노트 한 묶음을 썼다. 그중 한 대목은 훗날 유난히 자주 인용되었다. 노동자는 노동 밖에 있을 때에만 자기 자신에게 속한다고 느끼며, 노동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자기 바깥에 있다는 말이다. 일하지 않을 때에야 제집에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같은 노트에는 임금관계에 더 가까이 닿는 문장도 있다.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기 생존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몫뿐이라고 했다. 그 몫이 그에게 주는 자리는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 노동자의 자리라고 했다. 뒤에서는 더 단호하게 썼다. 자본이 더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그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없고 노동자로서의 존재만 있다고.

이 노트는 흔히 네 겹의 분리로 요약된다. 사람이 자기 생산물에서, 노동이라는 활동에서, 자신의 유적 존재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더 많이 생산할수록 자신은 더 가난해진다. 생산물은 낯선 힘이 되어 거꾸로 그를 지배한다. 노동은 자유로운 활동에서 생계의 수단으로 떨어진다. 생산물과 활동이 모두 소외되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고쳐진다.

이 노트가 쓰인 때는 1844년 4월부터 8월까지였다. 처음 출판된 해는 1932년이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을 쓰고 세상을 떠났다. 엥겔스는 제2권과 제3권을 정리한 뒤 세상을 떠났다.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세워진 정당들이 여러 나라에서 큰 정당이 되었고, 한 나라에서는 그의 이름을 걸고 제도 전체를 바꾸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그 노트는 여전히 상자 안에 있었다.

셈해보면 88년이 걸렸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거의 50년 동안, 사람들이 읽은 마르크스는 이런 말을 한 적 없는 마르크스였다는 뜻이다. 1932년 이후, 소외와 유적 존재를 입에 달고 있던 젊은 마르크스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하나의 질문이 처음으로 체계적인 문제가 되었다. 초기와 성숙기 사이는 단절인가, 연속인가.

한쪽은 단절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1845년 이전의 마르크스는 아직 이데올로기의 층위에 머물렀고, 그 뒤에야 과학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다고 보았다. 소외라는 개념은 어떤 통일된 인간 본질을 미리 전제하므로, 아직 말끔히 걷어내지 못한 잔재에 속한다고 했다.

다른 한쪽은 연속성을 주장한다. 최근 이 흐름을 정리한 연구자들은 소외가 버려진 것이 아니라 고쳐 쓰였다고 본다. 윤리와 철학의 어휘가 상품 물신성, 추상노동, 임금형태,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소모처럼 더 차갑고 제도적인 분석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한 철학 백과사전도 해당 항목에서, 마르크스가 초기에만 소외를 논했다고 보는 견해는 이제 텍스트의 증거로 뒷받침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양쪽 모두 자료를 내놓을 수 있다. 어느 쪽도 약하지 않다. 연속성을 말하는 쪽은 문장마다 짝을 맞출 수 있다. 1844년에는 노동이 외부에 속하며 강요된 것이라고 했다. 『자본론』에서는 임금형태가 환상을 만든다고 했다. 실제로는 노동의 일부에만 대가가 지급되는데, 노동 전체가 대가를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1844년에는 노동자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더 가난해진다고 했다. 『자본론』에서는 이 말을,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들로 정해지지만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더 긴 노동일 동안 추가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분석으로 옮겼다. 1844년에는 소외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변형된다고 했다. 『자본론』에서는 그 변형을 사람의 관계가 물건의 관계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일이라고 썼다. 어휘는 달라졌다. 뼈대는 같은 것임을 알아볼 수 있다.

단절을 말하는 쪽도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후기의 글에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더는 논증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는다. 도출 과정이 기대는 것은 가치형식, 노동력 상품, 축적의 법칙이다. 인간이 마땅히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은지 대신 판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논쟁 자체를 사건 하나로 볼 만하다. 종이 한 묶음이 88년 동안 상자에 누워 있다가 나오자, 학문 하나가 뒤돌아 자기 저자를 다시 나누어야 했다. 어느 시기의 글을 인정할지, 어느 것은 아직 미숙했다고 할지 다시 정해야 했다. 한 세대의 읽을거리 목록에서는 뺄 수 있었다. 종이 자체는 없애지 못했다.

읽는 방식에 미친 영향은 분명하고 실제적이다. 1932년 이전에 형태를 갖춘 모든 해석은 아무리 치밀했더라도 자료가 다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그중 일부는 이미 제도가 되었고, 교과서에 들어갔으며, 조직으로 세워졌다. 해석이 먼저 오고 텍스트가 나중에 왔다. 이 순서가 한번 생기고 나면, 뒤늦게 온 텍스트는 더 이상 보충 자료가 아니다. 골칫거리가 된다.

7. 셈이 맞지 않는 그 칸

마르크스 자신의 장부에도 셈이 맞지 않는 곳이 있다. 한 군데만이 아니다. 적어도 세 갈래 논쟁이 있는데, 흔히 한데 뒤섞인다.

첫째는 가치와 가격을 둘러싼 논쟁이다. 『자본론』 제3권 제9장의 제목부터 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상품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환을 내건다. 이 장에서 마르크스는 개별 부문의 상품이 반드시 자기 가치대로 팔릴 필요는 없다고 인정한다. 일부는 가치보다 높게 팔리고, 다른 일부는 그에 상응하는 비율만큼 낮게 팔린다. 바로 이런 어긋남이 있어야 평균이윤율이 형성된다. 어긋남은 예외가 아니다. 보통의 상태다.

이 권은 그가 죽은 뒤 정리된 책이다. 엥겔스가 1863년부터 1883년까지의 원고를 바탕으로 정리했고, 1894년에야 출판되었다. 그래서 논쟁에는 처음부터 텍스트 역사의 그림자가 한 겹 드리워져 있었다. 어느 대목은 마르크스가 확정한 것이고, 어느 대목은 편집자가 갈래를 잡아준 것인지 누구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가장 먼저 거센 포문을 연 사람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뵘바베르크였다. 1890년대에 그는 제3권의 평균이윤과 생산가격에 관한 설명이 제1권의 가치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20세기의 표준적인 비판은 대개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한 학자가 제기한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가 산출은 생산가격으로 전환하면서 투입까지 일관되게 생산가격으로 전환하지는 않았으므로, 동시에 결정되는 조건에서 연립방정식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훗날 이 해석은 거의 입문 교과서의 정설처럼 되었다.

반론은 적어도 세 갈래다. 한쪽은 상품 하나하나마다 노동가치와 화폐가격이 일대일로 대응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총이윤과 대가가 지급되지 않은 노동시간 사이의 비례관계만 유지되면 착취에 관한 논증은 여전히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쪽은 마르크스가 가치체계와 가격체계라는 두 개의 병행하는 체계를 다룬 적이 없다고 한다. 그가 한 것은 화폐로 미리 투입한 자본을 전제로 한 사회적 총자본의 분석이었으며, 이른바 전형문제의 상당 부분은 후대의 읽는 방식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또 한쪽은 가격과 가치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서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같은 시점에 동시에 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논리적 모순은 정태적 모형이 마르크스에게 덧씌운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여기서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 논쟁이 그토록 오래 결론 나지 않는 이유는 분명히 해둘 만하다. 계산식의 옳고 그름만 걸린 것이 아니다. 함께 말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마르크스가 동시에 말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잉여는 실제로 존재하며, 사고파는 수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잉여가 겉으로 분배되는 방식은 그 자신의 출처를 체계적으로 뒤틀어놓는다. 그가 구하려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반드시 가려질 수밖에 없는 양이다.

반드시 가려지는 양이라면, 장부 위에서는 그것에 대응하는 칸을 끝내 찾을 수 없다.

이 말은 거꾸로 할 수도 있다. 장부 위에서 대응하는 칸을 찾을 수 있는 양에는 이런 어려움이 없다. 전형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100년 넘게 얽혀온 것은, 마르크스가 다루려던 양이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직접 드러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상 보이지 않는 무엇을 계산하는 방법을 만들려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을 검증하는 길은 계산 결과가 눈에 보이는 가격과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는 한계주의와의 논쟁이다. 열째 글에서 1871년 무렵 세 사람이 한 일을 보았다. 양쪽을 나란히 놓으면 누가 맞고 틀리는가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보인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가 묻는 것은 상품교환으로 두루 조직된 사회에서 서로 전혀 다른 노동들이 왜 같은 사회적 자 위로 환원될 수 있는가, 또 왜 단순히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에서 이윤이 생길 수는 없는가다. 한계주의가 묻는 것은 희소성 아래에서 한 사람이 주관적인 만족을 한계에서 어떻게 견주는가, 그로부터 수요와 교환비율, 균형가격이 어떻게 생기는가다. 뒤의 독자들 가운데는 양쪽이 때로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는 것 같다고 아예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열째 글의 그 경계를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문밖으로 밀려난 것은 정의, 제도, 시간만이 아니다. 더 밑바닥에 있는 질문도 있다. 서로 견줄 수 있다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한계주의는 비교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서로 다른 것들을 이미 같은 축 위에 놓고 크기를 견줄 수 있다고 가정한 뒤, 어떻게 견줄지 연구한다. 마르크스는 바로 그 앞의 단계를 묻는다. 그 비교 가능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무엇이 그것을 유지하는가. 그 대가는 누구에게 떨어지는가.

셋째는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논쟁이며, 가장 안쪽에 있다. 가치는 생산에서 이미 존재하는 추상노동인가, 아니면 시장교환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만 성립하는가. 한쪽은 추상노동과 가치가 완성된 채 상품 속에 들어앉아 표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교환 속에서 실제로 사회적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물건의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회적 관계다. 다른 한쪽은 제1장이 말하는 것은 생산에서 이미 지출된 추상적 인간노동이라고 주장한다. 교환은 그것을 화폐가격으로 표현할 뿐, 애초에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겉으로는 가장 학술적인 논쟁 같지만, 결과는 가장 직접적이다. 물신성을 어떻게 읽을지가 여기서 갈리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는 노동의 내용을 덮어놓은 가림막인가. 아니면 가치는 본래 이런 사회적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막을 걷어낸 아래에는 더 참된 다른 양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8. 두 자루의 펜

아직 마지막 한 가지를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낸 잉여가 나중에는 어디에 이어 붙여졌는가.

가장 손쉽게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1859년의 그 서문이다. 셀 수 없이 인용된 문장이 있다. 어떤 사회구성체도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생산력이 발휘되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곧이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이 몇 개의 시대로 나열된다.

이 두 대목만 읽으면 강한 단계론을 읽어내기 쉽다. 사회구성체마다 자기의 역사적 과제가 있고, 생산력이 가득 차야 더 높은 형태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20세기의 한 연구 흐름은 바로 이 방향을 따라, 생산력이 발전하는 경향을 핵심에 놓고 역사유물론 전체를 재구성했다.

다른 쪽에서는 곧바로 문제를 짚었다. 이런 해석 안에는 기능주의가 숨어 있다. 어떤 제도는 생산력을 촉진하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하는데, 그 유지가 어떤 장치를 통해 이루어지는지는 누구도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역사는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목적은 어느 누구의 목적도 아니다. 생물의 진화에 빗대면 이론에 우연이 들어설 자리는 넓어지지만, 장기적인 예측력도 그만큼 약해진다. 강한 예측력을 지키려 하면 목적론이라는 의심이 더 짙어진다.

그 직선에 반대하는 자료도 마르크스 자신에게서 나온다. 무게도 가볍지 않다.

1877년, 그는 러시아의 한 잡지 편집부에 편지를 썼다. 서유럽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해 자기가 그린 역사적 밑그림을, 모든 민족이 따라야 하는 보편적인 행군 노선으로 고쳐 읽는 데 항의했다. 거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썼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역사를 모든 민족에게 운명처럼 강요되는 보편적 경로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지나친 영예를 주는 동시에 자신을 오해하는 일이라고 했다. 로마 평민들이 토지를 빼앗긴 예도 들었다. 비슷한 사건도 서로 다른 역사적 환경에 놓이면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역사를 초월한 만능열쇠 하나로 모두 열 수는 없다고 했다.

1881년, 그는 러시아 혁명가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와 보내지 않은 여러 초안에서 이를 더 분명하게 말했다. 러시아의 농촌공동체가 다른 사회 형태로 가려면 반드시 먼저 서유럽식 자본주의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른바 역사적 필연성이 적용되는 범위를 그는 명시적으로 서유럽 국가들에 한정했다.

한 연구 흐름은 이 후기 자료들에 주목하여, 말년의 마르크스가 단선적인 발전 도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유럽 중심의 한 경로를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히고, 여러 경로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를 전면적인 반전으로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대체로 다투는 것은 후기의 글에 열린 가능성이 있느냐가 아니다. 그 열림이 옛 틀을 수정하고 심화한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단절인지다.

모두 함께 놓으면, 자료에 가장 가까운 설명은 아마 이럴 것이다. 마르크스의 손에는 펜이 두 자루 있었다. 한 자루는 큰 화살표를 그리기 좋아했다. 그 펜으로 쓰는 문장에는 방향과 단계와 종착점이 있었다. 다른 한 자루는 구체적인 자료에 부딪힐 때마다 되돌아가 화살표를 고쳤다. 러시아의 공동체, 식민지, 서유럽 바깥의 경로를 만나면 그어놓은 선을 구부리고, 심지어 부러뜨렸다. 두 자루 모두 그의 것이었다. 모두 글씨를 남겼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지우지 않았다.

화살표라는 것은 따로 한 번 들여다볼 만하다.

장부의 셈을 맞추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장부가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으면 미래에 이어 붙인다. 지금 셈이 맞지 않는 것은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이 오면 맞지 않던 모든 항목이 한 번에 청산될 것이라고 한다. 종착점은 맞지 않는 셈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그 어긋남이 잠시뿐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잔여항을 위해 쓰던 장부는 여기까지 오면 다시 스스로를 닫으려는 구축이 된다. 자기에게 생긴 잔여항을 다루는 방법은 결산하는 날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자신은 두 번이나 제 손으로 그 화살을 구부렸다.

두 번 모두 구체적인 자료 앞에서 구부렸다. 한 번은 누군가 그의 책으로 다른 나라를 설명하려 했을 때였다. 다른 한 번은 러시아의 농촌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군가 물어왔을 때였다. 그는 도식을 지키려고 자료를 잘라내지 않았다. 도식을 고쳤다. 그가 죽은 뒤에는 이 태도가 그리 많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가장 단단하게 버티는 절반에는 오히려 화살표가 필요 없다. 임금계약은 거래를 다 정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값을 매긴 것은 어떤 능력 하나뿐이다. 그 사람의 생명활동 전체, 몸이 닳는 일, 집 안에서 아무도 값을 매기지 않는 돌봄, 비용 항목 하나로 취급될 때의 그 느낌까지 정산한 적은 없다. 이렇게 셈이 끝나지 않는 것은 어느 나쁜 고용주가 만든 일이 아니다. 임금을 올린다고 없앨 수 없고, 어느 날이 오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정산 가능한 항목으로 다룰 때 필연적으로 남는 몫이다.

그 자신이 정의 안에 이 몫의 이름을 남겨두었다. 역사적·도덕적 요소다. 어떤 삶이라야 삶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공동 판단이다. 이 판단에는 단위가 없다. 더할 수도 없다. 세대마다 다시 논의하며, 논의를 마친 뒤에도 또 변한다. 방정식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방정식에서 빼낼 수도 없다. 그래서 줄곧 그 장부의 가장자리에 머문다.

장부는 노동시간을 시간 단위로 바꾸고, 시간을 실링으로 바꾸고, 실링을 이윤율로 바꿀 수 있다. 한 단계 한 단계 더없이 말끔하게 환산할 수 있다. 환산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 앞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이다. 그는 칸 하나가 아니며, 칸 하나가 되려 하지도 않는다. 지치고, 병들고, 자리를 떠나고,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함께 손을 멈춘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장부의 숫자는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 조정하고 나서도 그 밑의 한 칸은 여전히 비어 있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