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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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경제
제09편 · 총 23편

아홉째 글. 스미스와 보이지 않는 손: 한 번도 계산대에서 제대로 치우지 못한 잔여항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만으로 시장이 완성된다고 쓰지 않았다. 공감과 정의, 자제와 교육을 함께 놓은 저작에서 몇 문장만 떼어 낸 후대의 압축이 어떻게 또 다른 스미스를 만들었는지 되짚는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마지막 판본

1790년, 애덤 스미스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던 해에 한 가지 일을 마쳤다.

『도덕감정론』을 한 번 더 고쳐 썼다.

생전에 나온 여섯 번째 판이었다. 처음 출판사에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두 부분에 조금씩 덧붙일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다룰 것이 늘어났다. 결국 덕성과 양심, 자제력, 도덕감정이 부패하는 과정을 다루는 부를 통째로 하나 더 넣었다. 생애 마지막으로 벌인 큰 집필 작업이었다.

당시 그는 몸이 많이 상해 있었고,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때에 사람이 펜을 들면, 대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끝내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을 쓴다. 그가 쓰기로 한 것은 덕성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양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부패하는지였다.

그 판본에 새로 넣은 부분에서 그는 자제력을 길게 다루었다. 의미심장한 선택이다. 자제력이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의 문제다. 그것이 필요한 까닭은 사람이 손익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기계에는 자제력이 필요 없다. 계산만 정확하면 된다. 자제력을 논하려면 먼저 사람에게는 계산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시간의 순서 때문이다.

『도덕감정론』은 1759년에 나왔다. 『국부론』은 1776년에 나왔다. 대대적인 증보는 『국부론』을 낸 지 14년 뒤에 이루어졌다.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는 이렇다. 젊은 스미스는 동감과 도덕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프랑스에 가서 세상을 보고 생각이 트였으며, 『국부론』을 썼다. 사람은 사실 자기 이익만 좇아도 사회를 돌아가게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앞의 책은 미숙한 시절의 것이고, 뒤의 책이야말로 성숙한 생각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말년에 그가 할 법한 일은, 동감을 논한 그 책으로 돌아가 책을 더 두껍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덕성과 양심을 다루는 장 하나를 통째로 보탤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다. 그러나 후대의 어떤 해석도 비켜갈 수 없는 단단한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도덕철학을 버렸다던 사람이,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도덕철학에 보탤 글을 쓰고 있었다.

다르게 말해보자. 『국부론』이 정말 작별이었다면, 작별한 사람은 14년이 지나서도 자기가 떠나왔다던 쪽에 벽돌을 더 얹고 있었다. 군데군데 손질한 정도도 아니다. 새로운 부 하나를 통째로 지었다. 이 사실로 두 책 사이의 긴장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적어도 가장 손쉬운 설명 하나는 더는 통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한 사람이 자기모순에 빠졌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문제다.

앞선 여덟 편에서 구축이 눌러 담은 것은 세계였다. 빚, 가격, 화물, 항해, 사람이었다. 스미스에 이르면 구축은 한 사람의 사상을 눌러 담는다.

그 과정에서 밀려난 절반은, 훗날 거듭 돌아온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면 먼저 스미스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부터 보아야 한다.

1752년, 그는 글래스고대학교의 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

경제학 교수가 아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런 학문이 없었다.

후대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도덕철학 수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었다. 자연신학, 윤리학, 정의에 관한 법학, 그리고 적정성 또는 정치경제학이라 불리던 부분이었다.

이 순서를 눈여겨보자.

훗날 윤리학 저술로 분류된 『도덕감정론』과 경제학 저술로 분류된 『국부론』은, 스미스 자신의 수업 구성 안에서는 본래 같은 강의 안에 나란히 있던 부분들이었다.

두 개의 인격이 아니다. 한 강의안의 두 번째 부분과 네 번째 부분이다.

이 순서는 또 하나를 보여준다. 스미스의 강의에서 정치경제학은 맨 마지막에 있었다.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이지 기초가 아니었다. 앞의 세 부분은 세계가 대체로 어떤 질서를 이루는지, 사람이 무엇에 근거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지, 어떤 규칙을 강제로 집행할 수 있는지를 다루었다. 네 번째 부분은 그 모든 것이 선 뒤에 한 사회가 어떻게 부유해질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에게 부유해진다는 것은 더 큰 학문의 마지막 대목이었지, 학문 전체가 아니었다.

시간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학생들이 1762년부터 1763년까지 적은 필기에 그의 법학 강의가 남아 있다. 분업, 화폐, 가격, 부에 관한 핵심 논점 상당수가 프랑스에 가기 전에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강의 필기는 1896년에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공개되자마자 프랑스 여행이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힘을 잃었다.

이 일이 어떤 모양인지도 잠깐 보자. 거의 100년 동안 널리 받아들여지던 설명을 학생들의 수업 필기 한 묶음이 뒤집었다. 새로운 논증이 해낸 일이 아니다. 본래부터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종이들이 해낸 일이다. 뒤에서도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도덕을 말하다가 나중에 경제로 진로를 바꾼 사람이 아니다. 그는 줄곧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경제는 그 과목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두 책 모두 한 번 새기고 끝낸 비문이 아니었다는 것도 덧붙여두자. 『도덕감정론』은 생전에 여섯 판이 나왔고, 『국부론』은 다섯 판이 나왔다. 평생 손을 놓지 않고 고쳐 쓴 책들이었다.

한 사람이 두 권의 책에서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는 것은 흔한 일이다. 정말 설명이 필요한 것은 따로 있다. 왜 후대 사람들은 하필 그중 한 권만 남겼는가. 더구나 그 한 권에서도 왜 몇 문장만 남겼는가.

남겨진 그 몇 문장마저 비틀려 있었다. 푸줏간 주인과 빵 굽는 사람을 다룬 대목에서는 뒤의 절반이 잘려나갔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구체적인 분석에서 뽑혀 나와 일반 법칙이 되었다. 분업은 오직 좋은 소식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잘라내고 고치는 일은 무엇을 버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남겨놓은 부분도 다시 재단해 서로 빈틈없이 맞물리게 한다. 그러면 하나의 완성된 체계처럼 보인다.

2. 사람을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더라도

『도덕감정론』의 첫 문장은 훗날 만들어질 경제학자 스미스에 대비해 미리 놓아둔 예방주사 같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을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더라도.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그러므로 사회 질서는 오직 이익 계산에 기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이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고, 다른 이의 행복을 자기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느끼게 하는 원리가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남의 행복을 바라보는 작은 기쁨뿐일 때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곧이어 그는 동감의 뜻을 정했다. 그가 말하는 동감은 연민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어떤 감정이든 함께 느끼는 일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남의 감정에 동참한다는 말을 우리는 쉽게 동정, 곧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좁혀 읽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말한 것은 그보다 바탕에 있는 능력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지금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 능력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고통받는 사람 때문에 슬퍼할 수 있게도 하고, 일이 잘 풀린 사람과 함께 기뻐하게도 하며, 남이 화낼 때 덩달아 화가 나게도 한다. 스미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중립성이었다. 이를 사람에게 선행을 권하는 데 쓰려던 것이 아니라 판단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만 작용하는 장치로는 판단의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는 이 장치를 조금도 신비롭게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남의 감정에 직접 들어갈 통로가 없다고 거듭 말했다. 상상으로 자신을 상대의 처지에 놓고, 나라면 어떨지를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판단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당사자와 관찰자 사이에서 생겨난다. 당사자가 감정을 드러내면 관찰자는 그 감정을 따라가보려 한다. 따라갈 수 있으면 우리는 그 감정이 적절하다고 여긴다. 따라갈 수 없으면 지나치고 어긋났다고 여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실제로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다. 사정을 알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관찰자가 나를 따라올 수 있느냐다.

이 한 걸음이 절묘하다. 도덕적 판단을 ‘내가 느끼기에는’이라는 자리에서, 서로 말을 나누어볼 수 있는 자리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나는 억울하다고 하면 그 느낌 자체를 두고 다툴 수는 없다. 사정을 잘 알고 편들지 않는 사람이 보아도 내가 억울하겠느냐고 하면 함께 논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는 말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보겠느냐고. 그 순간 쓰는 것이 바로 스미스의 이 장치다.

뒤에 그는 이 관찰자를 사람의 마음속으로 옮겼다. 양심을 가슴속의 사람이라 불렀고,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라고도 불렀다.

이성에 다른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다. 오랜 사회생활 속에서 바깥의 시선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만들어진, 스스로를 심판하는 장치다.

그 장치가 하는 일은 치우침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억눌러 바로잡는 것은 아니다. 자리를 바꾸어 자신을 보는 것이다. 스미스의 설명은 소박하다. 혼자 있으면 자기의 작은 득실이 시야 전체를 채운다. 다른 사람도 보고 있음을 떠올리면, 그 득실은 마땅한 크기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손해 보는 일과 남이 피해 입는 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까닭이 남을 자신보다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고까지 했다. 마음속 관찰자가 자기 편에 서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애는 늘 제 작은 이익을 너무 무겁게 치려 한다. 그러나 가슴속의 사람은 인정하라고 다그친다. 남의 눈에 우리는 여럿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며, 남보다 본래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그러므로 스미스는 자기애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본래 사람에게 있는 것이되, 관찰자의 눈으로 한 번 다듬어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이것만으로도 셈밖에 모른다는 스미스와는 이미 거리가 멀다.

또 눈여겨볼 것은, 이 장치가 밑바닥부터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 두고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제 이익만 셈하는 사람은 스미스에게서는 도덕적 판단 능력조차 갖지 못한다. 빌려 서서 자신을 바라볼 자리가 그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3.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을 만한 것

『도덕감정론』에서 무엇보다 잘라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의 구별이다.

스미스는 사람이 사랑받고 칭찬받고 찬양받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랑과 칭찬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짧다. 칭찬받기를 바랄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하기를 바란다.

이 문장은 두 가지를 갈라놓는다.

칭찬은 남이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으며, 바깥의 사람들이 결정한다. 얻으려 애쓸 수 있고, 관리할 수 있으며, 꾸며낼 수도 있다.

칭찬받을 만하다는 것은 다르다. 자기 마음속에 있으며, 제 가슴속의 재판관이 결정한다. 남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두 가지는 자주 어긋난다.

온갖 찬사를 받는 사람이 속으로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뭇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 속으로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알 수도 있다. 앞의 마음을 켕긴다고 하고, 뒤의 마음을 억울하다고 한다. 두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한 사람 안에 이 두 개의 자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두 자는 재는 방법부터 전혀 다르다. 칭찬받는지는 알아보아야 한다. 남이 뭐라고 하는가. 몇 사람이나 그렇게 말하는가. 얼마나 큰 소리로 말하는가. 칭찬받을 만한지는 알아보러 다닐 필요가 없다. 자기 마음이 안다. 알아볼 필요가 없기에 꾸며낼 수도 없다. 모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마음속에서 자신을 심판하는 그 무엇은 속일 수 없다. 그것마저 속일 수 있다면, 그 무엇은 이미 사라진 뒤다.

스미스는 또렷이 보았다. 시장 사회도, 궁정 사회도, 사교계도 칭찬받을 기회를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내줄 수 없다.

돈으로 남의 수고를 살 수는 있다.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살 수 없다.

한 걸음 더 가보자. 돈은 존경처럼 보이는 것을 많이 살 수 있다. 호사스러운 겉모습, 좌석의 서열, 남들의 깍듯한 태도, 신문의 지면을 살 수 있다. 모두 실제로 존재하며, 재어볼 수 있고, 값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전부 바깥을 향한 쪽에 있다. 살 수 없는 그 하나는 남의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 그러니 누구도 그것을 팔아줄 수 없다.

이 경계는 스미스가 직접 그었다. 후대 사람이 대신 그어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계가 한 가지를 가격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남겨두었다는 사실이다.

가격은 바깥을 향한다. 두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견주어 얻는 숫자다. 칭찬받을 만하다는 것은 안을 향한다. 혼자서도 지닐 수 있으며, 누군가 값을 매겨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어이 이 둘을 거듭 뒤섞는다.

스미스는 이 문제에 극도로 민감했다. 사람들이 부자와 권세 있는 이를 거의 숭배하듯 떠받들면서 가난한 사람은 업신여기거나 못 본 체한다고 썼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도덕감정을 부패시키는 가장 크고 가장 널리 퍼진 원인이라고 했다.

이 문장은 『도덕감정론』 전체가 상업 사회에 끼얹는 한 동이의 찬물로 읽어야 한다.

상업 사회가 사람의 눈길을 신분에서 가치로 저절로 옮겨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부 자체를 누구는 보이게 하고 누구는 보이지 않게 하는 새로운 기계로 만들 수 있다. 존경받을 만한 것과 부러워 보이는 것을 더욱 구별하기 어렵게 할 수 있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잴 수 있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잴 수 없다. 잴 수 있는 쪽이 갈수록 눈에 띄면, 사람은 그것을 잴 수 없는 쪽 대신 쓰기 쉬워진다.

후대가 스미스에게 억지로 얹은 비판이 아니다. 그 자신이 썼다.

4. 정의와 선행

빠뜨릴 수 없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이 건물 전체의 기초를 놓는 대목이다.

스미스는 정의와 선행을 엄격히 구별했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너그러이 내주고, 우애를 나누는 일은 언제나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다.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미움과 비난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대체로 강제력을 동원할 일은 아니다.

정의는 다르다. 정의를 어기면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실제로 분명한 피해를 준다. 그러므로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고, 어겼을 때 처벌할 수 있다.

그는 결과도 구체적으로 말했다. 선행이 없으면 사회는 덜 유쾌해진다. 정의가 없으면 사회는 아예 유지될 수 없다.

두 문장은 무게가 다르다. 스미스는 일부러 다르게 놓았다. 덜 유쾌하다는 것은 정도의 문제이고,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는 좋은 일을 모두 의무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 선한 마음마저 요구하고 심사하고 이행 실적을 내야 하는 것으로 바뀌기 쉽기 때문이다. 지키려는 것은 최소한의 선이었다. 그 선 위의 넓은 영역은 설득과 여론, 칭찬과 부끄러움이 조절하도록 남겨두려 했다.

『국부론』을 이해하려면 이 구별이 더없이 중요하다.

일상의 모든 주고받음이 선의에서 나와야 한다고 사회가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빵을 사면서 빵 굽는 사람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그도 빵을 팔면서 당신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주고받음에는 남을 해치는 일도, 침해도, 기만도 없어야 한다.

스미스는 모두가 자비로워야 한다는 도덕의 입법자도 아니었고, 각자 자기 것만 챙기면 다 잘되리라는 냉정한 계산론자도 아니었다. 그가 그은 선은 달랐다. 선행은 하지 않을 수 있다.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 선이 바로 앞선 글에서 완전히 뚫렸던 선이다.

두 일을 함께 놓으면 한계가 분명해진다. 빵을 파는 사람이 당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선을 넘지 않는다. 사람을 배에 실어 옮긴 뒤 팔아버리는 사람은 선을 넘는다. 앞의 경우는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속하고, 뒤의 경우는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말에 속한다. 스미스의 선이 중요한 까닭은 요구하는 수준을 높이 잡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 선마저 뚫고 나가면 변명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

5. 핀 공장

이제 『국부론』을 보자.

가장 유명한 첫머리는 분업에 관한 것이다.

스미스는 작은 핀 공장 하나를 예로 들었다. 열 사람이 일을 약 열여덟 공정으로 나누면 하루에 4만 8,000개 이상의 핀을 만들 수 있다. 반면 이 일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저마다 혼자 만들면 하루에 스무 개는커녕 한 개조차 만들지 못할 수 있다.

이 사례가 오래 살아남은 것은 숫자가 놀라워서만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적 기술 하나를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산출물은 한 사람이 만능이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작과 시간, 기술과 도구를 나눌 수 있고, 되풀이할 수 있고, 서로 이어 붙일 수 있는 순서로 만드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스미스는 사람들이 자주 건너뛰는 말을 했다.

분업은 인간의 어떤 지혜가 보편적인 풍요를 내다보고, 그것을 이루려고 계획한 결과가 아니라고 했다.

인간에게 있는 어떤 성향에서 서서히 나온 결과라고 했다. 서로 교환하고, 거래하고, 가진 것을 주고받아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성향이다.

분업에는 먼저 청사진이 있고 나중에 실행이 따랐던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교환이 무수히 쌓이는 동안 천천히 자라났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이 시리즈에서 무게가 있다. 분업은 누군가의 방안이 아니었다. 청사진도 없었고, 위에 앉아 전체를 지휘하는 사람도 없었다. 제각기 주판을 튕기던 사람들이 셀 수 없이 흥정하는 동안 한 가지 일을 차츰 열여덟 공정으로 나누어놓았다. 훗날 누군가는 이것을 근거로 저절로 자라난 것은 무엇이든 좋다고 했다. 스미스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책의 뒤쪽에서 이 체계가 치르게 하는 대가를 썼다.

여기에도 눈여겨볼 순서가 있다. 스미스는 먼저 누군가 분업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어 놀라운 생산량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고 말한다. 세 문장을 함께 놓으면 분업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것이 보인다.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것이 엄청난 이익과 엄청난 손상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둘은 같은 과정에서 생겨나므로 떼어낼 수 없고, 한쪽만 가질 수도 없다.

그다음은 모든 교과서가 따로 떼어 싣는 대목이다.

푸줏간 주인, 맥주 빚는 사람, 빵 굽는 사람.

그 문장의 뜻은 이렇다. 우리가 기대는 것은 그들의 자비가 아니라 그들의 자기애다.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이 얻을 이익이다.

핵심은 뒤의 절반이다. 그런데 자주 버려진다.

이 대목이 실제로 설명하는 원리는 선의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설득이다.

교환을 성사시키려면 먼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상대에게 이로운 것으로 바꾸어 말해야 한다. 이 행동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들어 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어떻게 말해야 기꺼이 응하겠는가.

그러므로 스미스에게 시장의 행동은 다른 사람을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다. 자기 목적을 갖고 있어서 설득해야 하는 상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이름 없는 가격이 사람과 사람의 교섭을 아직 대신하지 않았다. 교섭의 말이 바뀌었을 뿐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이, 당신에게도 이익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이 변화에는 이로운 점이 있다. 작지 않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자신을 상대의 선의에 맡긴다. 줄지 말지는 온전히 상대의 마음에 달린다. 당신에게도 이익이라는 말은 두 사람 모두 확인할 수 있는 바탕에 이야기를 놓는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필요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다. 셈만 분명히 할 수 있으면 된다. 이 한마디로 나를 알지도, 나에게 관심이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시장이 진정으로 숨을 돌리게 해주는 자리는 여기다. 먼저 남의 마음에 들어야만 살아갈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 홀가분함에는 대가가 있다. 스미스도 피하지 않았다. 같은 원리가 한쪽에서는 누구에게도 비위를 맞추지 않고 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다른 쪽에서는 상대가 나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도 거래를 마칠 수 있게 한다. 의존에서 풀려나는 동시에 서로 마음 쓰고 걱정하는 관계에서도 풀려난다. 앞선 글들에서도 했던 이야기다. 스미스에 와서는 처음으로 한 사람이 그 양 끝을 함께 보고, 같은 학문 안에 써넣었다.

이어서 스미스는 화폐를 들여온다. 화폐가 해결하는 것은 직접 물물교환을 할 때의 성가신 문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침 갖고 있으면서, 마침 내가 가진 것을 원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돈이 있으면 푸줏간 주인이 매번 소고기를 먹고 싶어 하면서 빵도 가진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돈은 그렇게 어지럽게 흩어진 필요와 공급을 하나의 공통된 자 위로 끌어올린다.

그러면서 스미스는 다른 한 가지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이론상 더 깊은 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가치를 재는 척도는 화폐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것이다. 돈은 공동으로 쓰는 상업의 도구이며, 유통의 큰 수레바퀴일 뿐이다. 사회의 소득 자체는 아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도 말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돈은 교환가치를 정확히 재는 척도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고 장소가 달라지면 그 척도는 흔들린다.

기억할 만한 말이다. 훗날 모든 것을 같은 척도로 재는 일의 아버지처럼 여겨진 사람 자신이, 같은 척도로 바꾸는 동안 새어 나가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가 찾던 더 깊은 자에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노동이라는 자는 더 손에 잡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하루 노동과 다른 사람의 하루 노동을 어떻게 견줄 것인가. 가벼운 일과 고된 일, 숙련자의 일과 초보자의 일, 위험한 일과 안전한 일은 또 어떻게 환산할 것인가. 스미스 자신도 책 안에서 이 문제들을 거듭 맴돌았다. 뒤에는 한 세대 내내 논쟁해도 끝나지 않는 주제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풀었느냐가 아니다. 왜 굳이 찾으려 했느냐다. 돈으로만 셈하면 맞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통의 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통의 자에는 언제나 맞아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돈 바깥에서 더 깊은 자를 다시 찾으려 했다.

6. 드물게 나타나는 그 손

이제 그 손을 말해보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은 『국부론』에 단 한 번 나온다. 『도덕감정론』에도 단 한 번 나온다.

한 번이다.

『국부론』에서는 상인들이 왜 국내에 자본을 투자하기를 더 좋아하는지 논하는 대목에 나온다. 그 손이 움직이는 원리는 매우 구체적이다.

스미스의 설명은 이렇다. 상인은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볼 수 있고, 관리할 수 있으며, 비교적 잘 아는 국내 산업에 돈을 넣기를 더 좋아한다. 또 자본을 생산가치가 가장 커지는 용도로 쓰려 한다. 그렇게 자기 안전과 수익을 좇는 동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사회 전체의 산출을 늘린다.

무엇이 이 손을 움직이게 하는지 눈여겨보자.

추상적인 보편적 이타심도 아니고, 가격 체계가 이루는 최적의 배분도 아니다. 위험을 얼마나 감수할지, 눈으로 볼 수 있는지, 감독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선호다.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곳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훗날 시장을 저절로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고 이야기된 그 손을, 정작 스미스의 문장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불신이다. 상인은 멀리 돈을 넣기가 겁난다. 먼 곳의 일은 관리할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잘못되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가까운 곳에 남겨둔다. 사회는 그 덕에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이익의 근원은 시장의 완전함이 아니다. 불확실한 것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다.

스미스는 곧이어 단서도 붙였다. 다른 많은 경우에도 이런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 언제나 생긴다고 하지는 않았다.

더없이 매서운 한마디도 덧붙였다. 공익을 위해 장사한다는 사람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해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늘날 이 문장은 멋진 풍자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인용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 뜻의 절반만 쓴다. 스미스가 말하려는 것은 공익을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입에 공익을 달고 사는 상인들을 선뜻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책에는 상인을 향한 의심이 곳곳에 있다. 같은 업종의 사람들이 모이면 이야기가 가격을 올리려는 담합으로 흐른다고 썼다. 상인들이 내놓는 법률 제안은 무엇이든 각별히 조심해서 살펴야 한다고 경고했다. 상인들에게 마음껏 맡기자고 했다던 사람이, 실제로는 상인들을 썩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이 문장은 보통 위선적인 상인을 비웃는 말로 읽힌다. 실제로 그런 말이다. 동시에 그가 반대한 것이 공공의 목표 자체가 아니었음도 보여준다. 입으로는 공공선을 말하면서, 실제로 더 잘 알지도 더 믿을 만하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더 뒤에서는 개인에게 자기 자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주려는 정치가를 아예 위험한 인물로 그렸다.

『도덕감정론』의 유명한 말과 멀리서 서로 응답하는 대목이다. 스미스는 거기서 체계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부른 인간형을 비웃었다. 사회를 체스판처럼 여기며 자기 머릿속 그림대로 말 하나하나를 다시 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체스판 위의 말은 하나하나 저마다의 운동 원리를 갖고 있다.

이 문장은 시리즈 전체에 붙이는 주석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정확하다. 구축이 가장 바라는 것은 체스판 같은 상태다. 말 하나하나의 위치와 가치와 움직이는 법을 말을 놓는 사람이 정하는 상태다. 스미스는 말들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을 일깨운다. 저마다의 궁리가 있고, 판단이 있고, 내주려 하지 않는 무엇이 있다. 내 그림대로 놓아두면, 그 말은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러므로 스미스가 반대한 것은 정부가 일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이 대목은 자주 비틀린다. 그는 국가가 교육을 맡고, 길을 놓고, 사법을 운영하고, 개인이 할 수 없는 몇몇 일을 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반대한 것은 다른 태도다. 자신이 이미 전체를 훤히 보았으므로 말 하나하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대신 정해줄 수 있다는 태도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를 흔히 뒤섞지만, 스미스에게서는 분명히 나뉘어 있었다.

따라서 스미스가 경계한 것은 추상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자신이 추상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경계한 것은 다른 일이다. 추상이 현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고 여기는 일이다.

7. 무디어지다

이제 『국부론』에서 가장 드물게 인용되는 대목을 말할 차례다.

제5권에 있다.

스미스는 사람이 평생 극히 단순한 동작 몇 가지만 되풀이하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무지해질 수 없을 정도가 된다고 썼다.

이어서 그런 사람은 이성적인 대화에 낄 수 없을 뿐 아니라, 너그럽거나 고귀하거나 다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판단을 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 대목을 핀 공장 대목과 함께 놓아보자.

같은 사람이 같은 책에서 먼저 4만 8,000개의 핀으로 분업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이 체계가 일하는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고 썼다.

가난해진다는 말도 아니다. 무디어진다는 말이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다. 가난해지는 것은 장부 위의 일이다. 임금과 생산량, 물가로 잴 수 있고, 성장으로 메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무디어지는 것은 다르다. 판단력, 호기심, 복잡한 일을 견디는 참을성, 남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수십 년 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가 닳아 없어지면, 어떤 소득으로도 그것을 도로 살 수 없다. 스미스가 쓴 것은 장부에 없는 마모였다. 바로 장부 위의 성장을 얻는 대가로 생긴 마모였다.

더 어려운 것은 같은 평면 위에서 이 셈을 상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생산량이 30퍼센트 늘었으니 판단력이 20퍼센트 무디어져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애초에 같은 자 위에 있지 않다. 같은 자로 잴 수 없는 것들을 한데 놓고 견주면, 손해 보는 쪽은 언제나 잴 수 없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비교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이 일은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그가 기록한 것은 분업의 경제적 대가가 아니다. 정신적 대가다.

한 사람의 산출은 올라가고, 그 사람 안의 다른 무엇은 내려간다. 그 다른 무엇은 어떤 생산량 통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가격이 없고, 장부에 들어가지 않으며, 어떤 장부의 셈도 어긋나게 하지 않는다.

앞서 복식부기를 다룰 때 말했다. 구매력이 없는 필요는 어느 장부에도 오류를 내지 않으니, 어느 장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여기서는 같은 일이 다른 모습을 한다. 사람이 무디어져도 생산량은 줄지 않고, 임금은 그대로 나가고, 장부는 여전히 맞는다. 장부는 아무 의견이 없다. 애초에 이 일을 위한 칸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미스가 놀라운 것은 자신이 이 장부를 만들면서, 동시에 장부 바깥의 그 칸을 보았다는 데 있다.

그는 대책도 내놓았다. 국가는 이 일에 힘을 써야 하며, 특히 교육에 힘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 손상이 저절로 회복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로 맡아서 돌보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대목을 앞에서 본 도덕감정의 부패에 관한 말과 함께 놓으면, 교과서의 인물과는 사뭇 다른 스미스가 나타난다.

그는 분명 부가 어떻게 늘어나는지를 다룬 책을 썼다. 같은 책 안에서 성장이 치르게 하는 두 가지 대가도 썼다. 하나는 사람의 판단력에, 다른 하나는 사람의 도덕적 시선에 떨어지는 대가였다.

상업 사회는 사물을 공통의 척도 안에 넣는 데 능하다. 산출을 늘리는 데 능하고, 가격으로 낯선 사람들을 잇는 데 능하다.

동시에 판단을 부패시키고, 부와 권세를 숭배하게 한다. 가난한 사람이 오가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며, 일하는 사람을 단조로운 공정 속에서 무디게 한다.

후대가 스미스 대신 붙여준 양심의 부록이 아니다. 그 자신이 상업 사회를 해부한 결과다.

8. 그 절반은 누가 잘라냈는가

이제 그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절반은 어떻게 사라졌는가.

이 문제에는 정식 이름이 있다. 애덤 스미스 문제다. 19세기 독일 학계에서 체계적으로 제기된 뒤, 나중에 이 이름을 얻었다.

논쟁은 대체로 몇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는 전향설이었다. 『국부론』을 스미스가 도덕철학에서 물질주의로 기울었다는 증거로 읽었다. 프랑스에 가서 그곳 경제학자들을 만난 뒤, 인간의 본성을 다르게 보는 학설로 믿음을 바꾸기라도 한 듯했다.

이 설명은 1896년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해 1762년부터 1763년까지의 강의 필기가 공개되었다. 정치경제학의 핵심 생각 상당수가 프랑스에 가기 전부터 이미 분명하게 존재했음을 그 필기가 보여주었다.

둘째 단계는 두 책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해석이었다. 두 책의 주안점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되, 인간의 서로 다른 면을 다룬다고 보았다. 어떤 이는 자기 이익을 동력으로, 동감을 그 동력을 조절하는 것으로 읽었다. 어떤 이는 동감이 자비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판단 장치이므로 자기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두 책을 더 큰 문명사 안에 놓고, 앞의 책은 인간의 도덕적 발전을, 뒤의 책은 물질적 발전을 다룬다고 했다.

셋째 단계에서는 양립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되살아났다. 1927년의 유명한 논문 한 편이 두 책의 차이를 다시 강조했다. 스미스가 1790년에 『도덕감정론』을 고쳐 썼어도 그 충돌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영향이 큰 주장이었다. 그래서 20세기 중엽까지 일관성을 주장하는 해석은 줄곧 있었지만, 불일치를 주장하는 해석을 완전히 누르지는 못했다.

넷째 단계는 1976년이다. 두 책의 글래스고 교감판이 나온 해다. 새 판본의 서론은 대체로 애덤 스미스 문제를 무지와 오독이 만들어낸 가짜 문제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다른 연구자도 이 문제가 동감과 자기 이익이라는 두 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왔다고 정리했다.

오늘날 학계는 대체로 통일적으로 읽는 쪽에 더 기운다. 그렇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 학술사를 정리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지금의 논쟁에서 여전히 일부는 문제가 부분적으로만 풀렸다고 본다는 점을 일깨운다.

정말 달라진 것은 질문의 모양이다. 그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었느냐는 물음에서, 하나의 체계 안에 있는 층위의 차이와 집필 시점의 간격, 개념의 뜻이 옮겨가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는 물음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 자체도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어떤 문제가 풀리는 것은 누군가 답을 내놓아서가 아니라, 묻는 방식이 바뀌어서일 때가 있다. 원래 질문은 두 책이 일치하거나 모순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전제했다. 바뀐 질문은 한 사람이 30년 동안 서로 다른 주제에 서로 다른 층위의 말을 할 때 그 사이에 어떤 긴장이 생기는가를 묻는다. 뒤의 질문이 물론 더 번거롭다. 그러나 실제 그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깝다.

학계가 천천히 꿰매어 붙이는 동안, 바깥에서는 잘라낸 판본이 오히려 더 널리 퍼졌다.

그것을 특히 크게 증폭한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교과서의 행동 가정이다. 어떤 경제학자는 유명한 논문에서 인간이 주로 자기 이익에 지배된다는 자신의 이론을 스미스의 길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훗날 한 학자가 이를 두고 가시 돋친 말을 했다. 애덤 스미스를 지나치게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고.

다른 하나는 그 손의 현대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48년의 영향력 큰 경제학 교과서는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완전경쟁에 연결했다. 뒤에는 그 비유가 일반균형과 후생 정리를 미리 내다본 것이라고까지 했다. 본래 구체적이고, 한계가 있으며, 수사적 성격이 짙었던 비유 하나가 학문 전체를 대표하는 토템으로 바뀌었다. 그 연구자의 요약은 거침없다. 개인의 이기심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뜻으로 읽혔다는 것이다.

이 개조에 누군가 일부러 속이려는 마음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점은 짚어두어야 한다. 교과서는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가르치려면 기억할 수 있는 말이 필요하다. 거듭 쓰이는 비유 하나가 일곱이나 여덟 개의 단서가 달린 분석보다 훨씬 가르치기 쉽다. 그래서 단서를 빼고, 그 말이 나온 상황을 빼고, 매서운 덧붙임을 뺀다. 손 하나가 남는다. 덜어내는 걸음마다 그때로서는 이유가 있다. 모두 덜어낸 뒤에는 그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게 두 겹의 삭제와 개작이 이루어졌다.

첫째는 두 책에 한 번씩 나오는 비유를, 스미스의 사상 전체를 여는 열쇠로 고쳐놓은 것이다.

둘째는 자기 이익이라는 말을 늘인 것이다. 사람이 본래 자신을 먼저 돌본다는 뜻을, 사람은 오직 제 이익만 계산한다는 뜻으로 늘여 썼다.

스미스 자신은 어느 쪽도 쓰지 않았다. 교환을 다룬 대목에서는 상대가 자기에게 이익이 있음을 어떻게 보게 할지에 관심을 두었다. 『도덕감정론』에서는 양심과 부끄러움, 관찰자의 시선,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을 만한 것의 차이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두었다. 『국부론』 제5권에서는 분업이 일하는 사람의 지성을 무디게 만들까 걱정했다. 국가가 교육에 힘을 쏟아야 할 만큼 걱정했다.

자기 이익만 좇으면 저절로 최선이 된다는 말로 줄어든 스미스와는 너무나 멀다.

그래서 훗날 스미스로 돌아가자는 말은 흔히 시장 근본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다. 더 복잡하고, 구호로 외치기도 더 어려운 풍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시장 질서에는 가격과 분업, 화폐와 제도가 필요하다. 동시에 정의와 자제력, 관습, 아직 얼굴을 붉힐 줄 아는 능력, 남의 처지를 상상하는 힘, 가난한 사람을 완전히 못 본 체하지 않는 공공의 시선에도 기대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모형에 써넣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으면 모형 속의 체계도 돌아가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 이 대목이 시리즈 전체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앞선 여덟 편에서 구축이 눌러 담은 것은 세계였다. 빚진 것을 점토판의 숫자로, 가치를 주화 하나로, 장사를 차변과 대변 두 칸으로, 국가를 연간 잔액 하나로, 사람을 화물 명세의 한 줄로 눌러 담았다.

스미스에 이르면 구축이 눌러 담는 것은 한 사람이 써놓은 글이다.

평생 네 부분으로 된 강의를 한 사람에게서 네 번째 부분만 남았다. 두 권의 책을 쓰고 말년에도 돌아가 첫 번째 책을 더 두껍게 만든 사람에게서 두 번째 책만 남았다. 그 두 번째 책에서도 핀 공장과 푸줏간 주인과 빵 굽는 사람, 그리고 단 한 번 나온 그 손만 남았다.

눌러 담는 논리는 앞선 글들과 똑같다. 모형에 들어가는 것은 남기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건너뛴다. 자기 이익은 가정으로 쓸 수 있고, 형식화할 수 있고, 계산할 수 있다. 동감, 부끄러움, 칭찬받을 만함, 가슴속의 사람, 분업이 낳는 정신의 마모는 방정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자 다른 무엇이 된다. 본론 이전의 역사가 되고, 부록이 되고, 젊은 날의 잘못이 된다.

이 처리법은 앞선 글들에서 이미 보았다. 고리대금이 금지되던 시대에는 이자를 보상금으로 고쳐 불러 금지령의 사정거리 밖으로 빼냈다. 여기서는 반대다. 판단 장치 한 벌을 통째로 부록이라고 고쳐 불러 이론의 사정거리 밖으로 빼낸다. 둘 다 이름을 바꾼다. 한쪽은 무엇인가를 들여오기 위해서이고, 다른 쪽은 무엇인가를 내보내기 위해서라는 차이가 있다.

이번의 잔여항에는 앞선 글들에 없던 성질이 하나 있다.

포토시에서 구축이 셈에 넣지 못한 것은 성씨의 분포에 남았다. 400년 뒤의 통계가 있어야 볼 수 있었다. 중간 항로에서 구축이 셈에 넣지 못한 것은 봉기의 횟수와 도망친 노예들의 산속 공동체에 남았다. 조각난 기록을 맞추어보아야 했다.

여기서 구축이 잘라낸 절반은, 줄곧 책꽂이에 온전히 꽂혀 있었다.

잔여항이 존재하는 아주 특별한 방식이다. 앞선 글들에는 나오지 않았다. 포토시처럼 인구의 빈자리만 남은 것도 아니고, 중간 항로처럼 흩어진 기록을 맞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온전한 책으로 묶여 있으며, 판을 거듭해 인쇄되었고, 언제든 펼칠 수 있다. 그것을 잘라내고 고친 사람들도 책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다만 읽지 않을 수 있었고, 남들에게도 읽지 않도록 가르칠 수 있었다.

불태워지지도, 금지되지도 않았다. 반박당한 것조차 아니다. 읽히지 않았을 뿐이다. 누구든 그 책의 첫 장을 펼치면 ‘사람을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더라도’라는 문장을 만날 수 있다. 뒤로 넘기면 ‘칭찬받기를 바랄 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하기를 바란다’는 문장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거듭 돌아올 수 있다.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누군가 다시 읽기만 하면 된다.

글이라는 것의 기묘한 성질도 여기 있다. 앞선 글들에서는 구축이 남긴 장부가 언제나 잔여항보다 오래 살았다. 점토판이 남았고, 화물 명세서가 남았고, 보험증권이 남았다. 거기에 셈해 넣었던 사람들은 성씨의 빈자리만 남겼다. 여기서는 거꾸로다. 구축은 교과서의 설명 한 벌을 남겼다. 그런데 그 설명이 근거로 삼은 책은, 그 설명이 잘라낸 절반까지 함께 보존하고 있다. 잘라내는 쪽과 잘려나간 것이 같은 표지 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왜 그토록 규칙적으로 되돌아오는지도 설명해준다. 불탄 것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운에 달렸다. 책꽂이에 그대로 있는 것이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어느 세대에나 본래의 책을 펼쳐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구축은 한 시대가 무엇을 읽을지 정할 수는 있다. 영원히 정할 수는 없다.

1896년 강의 필기가 공개되자 전향설의 절반이 무너졌다. 1976년 교감판이 나오자 가짜 문제라는 판단이 세워졌다. 그 뒤에도 누군가는 글을 써서, 통째로 외면당한 그 책을 다시 일깨웠다.

돌아오는 것은 매번 같았다. 그 사람이 써놓았고, 사람들이 읽지 않기로 한 절반이었다.

그 절반이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 자신의 한 문장이 가장 짧게 말해준다.

사람은 칭찬받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칭찬받을 만하기를 원한다.

앞의 것은 시장이 줄 수 있다. 가격으로 잴 수 있고, 남의 눈길을 셈해볼 수 있다.

뒤의 것은 줄 수 없고, 잴 수 없고, 셈할 수 없다.

오직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곳에 있다.

스미스는 평생 두 가지를 썼다. 세계를 어떻게 공통의 척도 안에 넣을 것인가.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후대는 앞의 것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한 적 없는 보증까지 붙였다. 철저하게 넣기만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좋아진다는 보증이다. 그는 그런 보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판본에 통째로 덧붙인 그 한 부가 다룬 것은, 바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었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