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글. 대항해 시대와 중상주의: 먼저 세고, 그다음 값을 매기다
무역수지와 은의 흐름을 국가의 장부로 만든 중상주의는 광산, 회사, 플랜테이션과 노동을 계산 가능한 단위로 재편했다. 세계를 측정하는 척도는 측정 대상 자체를 바꾸었다.
이 글의 목차
1. 국가의 장부 한 권
1664년에 인쇄된 작은 책자에서 영국 상인 토머스 먼은 훗날 몇백 년 동안 거듭 인용될 한 문장을 썼다. 대외무역이 우리 부의 척도라는 말이었다.
곧이어 그 척도를 어떻게 쓰는지도 설명했다. 해마다 외국에 파는 물건의 값이, 우리가 들여와 소비하는 외국 물건의 값보다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산수에 가까운 셈도 하나 내놓았다. 영국이 해마다 220만 파운드어치의 상품을 수출하고, 수입해 국내에서 소비한 상품의 값은 200만 파운드라고 하자. 그러면 그 차액 20만 파운드가 재물의 형태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셈해서 나온 숫자보다 그렇게 셈하는 방법 자체가 훨씬 중요하다.
서로 다른 상품, 서로 다른 항로, 서로 다른 시장이 있다. 천과 납, 주석, 생선, 곡물, 향신료, 비단이 있다. 그 모두가 마지막에는 숫자 하나로 눌려 들어간다. 올해는 더하기인가, 빼기인가. 얼마나 남았고 얼마나 모자라는가.
나라 하나를, 마지막에 총결산을 낼 수 있는 장부 한 권으로 상상한 것이다.
오늘 들으면 당연한 생각 같지만 당시에는 새로웠다. 그전까지 왕국이 부유한지는 분명히 말하기 어려운 인상들로 가늠했다. 곡식 창고는 가득한가. 성벽은 잘 쌓았는가. 군대를 먹여 살릴 수 있는가. 왕실 창고에는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있는가. 이제 누군가 이 모든 것을 숫자 하나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해마다 다시 계산해서 지난해와 견줄 수도 있고, 이웃 나라와 견줄 수도 있다고 했다. 국가는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전체에서, 해마다 보고서를 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앞서 복식부기를 다룰 때, 상사는 처음으로 연말에 제 재산과 수입, 진 빚을 모두 한 장의 표에 모아 그해에 벌었는지 잃었는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똑같은 일이 왕국 하나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국가에도 대차대조표가 생겼다.
국가에 연간 잔액이 생기면, 원칙상 그 안의 모든 것은 이 표의 항목이 된다. 밭과 광산, 배와 관세, 인구까지 모두 그 잔액을 얼마나 늘려주는가에 따라 평가받는다.
인구가 특히 그랬다. 이 계산법에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일할 손이 한 쌍 늘면 수출할 생산물도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놀고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이다. 벌어들이는 것은 없으면서 밥은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정책 문서들을 읽으면 인구를 국력의 비축분처럼 관리하려는 말투를 자주 만난다. 얼마나 낳게 할 것인가.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도록 내버려두어도 되는가. 특정한 기술이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해도 되는가. 사람에게 아직 가격표가 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관리해야 할 보유량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먼 자신은 후대 교과서가 그린 것처럼 지하실에 금을 가두어놓는 구두쇠가 아니었다. 그는 돈이 국경을 넘으면 곧 손해라는 당시의 상식을 반박하는 데 한 장을 따로 썼다. 현금을 무역의 밑천으로 내보내 중계무역에 쓰면 오히려 더 많은 은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현금 10만 파운드를 동유럽으로 보내 곡물을 사고, 그것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되팔면, 나라가 되가져오는 재물은 본전이 아니라 그 두 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은은 부가 취하는 모습인 동시에 더 많은 무역을 움직이는 연료였다. 은을 모으는 일은 늘 가만히 쌓아두는 일만을 뜻하지 않았다. 은과 상품, 배와 보험, 중계무역을 하나의 순환으로 잇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순환을 하더라도 도착점은 같았다. 연말의 숫자가 반드시 양수여야 한다.
이 도착점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성질이 있다.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쪽이 흑자인 것은 다른 쪽이 적자이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더 많이 들여오려면 다른 나라에서는 더 많이 나가야 한다. 이 계산법은 처음부터 나라 사이의 관계를 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이 잃는 것으로 적었다. 내가 이기는 것이 곧 네가 지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리켜 ‘무역의 질투’라고 불렀다. 그 뒤 몇백 년 동안 관세 전쟁과 항해법, 식민지의 독점, 심지어 실제 무기를 맞대는 전쟁까지 이 계산법에서 자기 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2. 왜 은이었을까
후대의 교과서는 이 모든 것을 흔히 한 문장으로 줄인다. 중상주의자들은 금과 은이 곧 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반만 맞는 말이다. 틀린 나머지 절반은 분명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세라는 1613년에 책 한 권을 썼다.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광산 없는 나라에 금과 은이 풍부해질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에 대하여』쯤 된다. 제목만 보면 금은을 부와 동일시한 전형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그렇게 읽으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세라가 실제로 물은 것은 다른 일이었다. 광산 하나 없는 나라가 어떻게 제조업과 상업의 연결망을 통해 귀금속을 끌어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더 일찍, 1558년에는 어느 스페인 작가가 자국 사람들을 비판했다. 신대륙에서 얻는 엄청난 재물이 국내의 제조업을 대신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원료만으로 경제가 번영할 수는 없다. 그 원료가 금과 은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최근 수십 년의 연구는 이 대목을 거듭 바로잡아왔다. 이른바 중상주의자들 대부분은 돌을 금으로 바꾸듯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어리석음을 믿지 않았다.
그들을 금덩어리만 부라고 여긴 어수룩한 사람들로 그려놓으면 설명은 편해진다. 대신 정작 중요한 물음을 피하게 된다. 그들이 어수룩하지 않았다면 더 까다로운 일을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왜 끝내 금과 은을 중심으로 도는 제도를 만들어냈을까. 답은 대개 그들의 머릿속보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진짜 물음은 어디에 있을까.
이론상 금은을 부로 잘못 알았느냐에 있지 않다. 왜 당시의 국가 기구는 실제로 움직일 때마다 번번이 금과 은을 향해 모여들었느냐에 있다.
까닭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같이 현실적인 까닭이다.
첫째, 귀금속은 멀리 있는 곳에 대금을 치르기에 가장 편했다. 수천 리 떨어진 군영에 급료를 보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 군수품을 사고, 빚을 갚고, 외교에 돈을 쓰고, 전쟁을 이어가야 했다. 그 모든 일에는 누구의 것인지 묻지 않으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고 지역을 넘어 통하는 물건이 필요했다.
둘째, 금과 은은 장부에 적어넣기 가장 쉬웠다. 광산에서 거두는 세금, 주조한 돈, 항구에서 들어오는 수입, 해외에서 돌아오는 재물까지 모두 확인하고 검산할 수 있는 숫자로 만들 수 있었다.
셋째, 나라들이 서로 겨루는 체제에서 귀금속은 그 자체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은 창고, 내가 주조한 돈, 내 무역 흑자를 늘어놓으면 곧 다른 나라보다 얼마나 앞서는지 드러났다.
이 세 가지를 합치면 답이 보인다. 은이 국가의 목표가 된 것은 누군가 틀린 이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부라고 여길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세기 쉽고, 옮기기 쉽고, 보관하기 쉽고, 비교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가장 손쉽게 공통의 척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세 가지 이유를 따라 더 생각해보면 한 겹이 더 보인다. 국가는 물건의 값어치만 따지지 않는다. 다루기 쉬운지도 따진다. 기름진 밭은 분명 재산이다. 그러나 옮길 수 없고, 쪼개 쓸 수도 없으며, 재해가 들면 소출이 줄어든다. 거기서 나는 것은 먼저 곡물이 되고 다시 돈으로 바뀌어야 국고에 들어간다. 은은 다르다.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 저기로 갈 수 있다. 썩지도 병들지도 않고, 얼마인지도 분명하다. 이런 성질은 모두 은을 더 유리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유리함은 은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여기서 앞선 글들에는 없던 일이 나타난다.
그전까지 자의 문제는 정확히 재지 못하거나, 닿지 못하거나, 재고도 정작 중요한 것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이제 더 적극적인 일이 하나 보태진다. 어느 한 가지가 국가의 목표로 선택되면 사회 전체가 그것을 향해 제 모습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자는 더 이상 세계를 재기만 하지 않는다. 세계를 고치기 시작한다. 더 쉽게 잴 수 있는 세계로 만든다.
세계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잔여항의 처지도 달라진다. 그전의 잔여항은 빠뜨린 것이었다. 장부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는 장애물이 된다. 길을 가로막으니 치우거나 피해 가야 하는 것이 된다. 정해진 차례에 일하러 나가려 하지 않는 마을 공동체, 은의 액수로 바꾸어 적을 수 없는 지방의 관습, 수출품을 내지 못하는 땅은 이 계산법에서 단지 셈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방해가 되는 것이다. 구축은 잔여항을 그냥 두던 데서, 잔여항을 처리하는 쪽으로 옮겨간다.
3. 중상주의는 하나의 체계였을까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상주의라는 말 자체가 이 역사를 다룰 때 가장 조심해서 써야 할 말이다.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상업 체계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뒤, 후대의 역사 서술이 이 말을 늘이고 눌러 펴고 다시 조립해왔다.
잠시 멈추어 생각할 만한 대목이다. 이 시대 전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반대하는 쪽에서 붙인 이름이라면, 흔히 가장 반박하기 쉬운 모양으로 빚어진다. 뒤의 사람들이 그렇게 빚어진 모양을 들고 사료로 돌아가면, 그 모양에 맞는 부분만 보고 맞지 않는 부분은 지나치기 쉽다. 이른바 중상주의 가운데 얼마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주장한 것이고, 얼마가 후대 사람들이 때릴 표적을 만들려고 묶어놓은 것인가. 그 비율은 지금도 분명하게 셈해지지 않았다.
스웨덴의 경제사가 헥셔에 이르면 중상주의는 대체로 일관된 정치경제 체계가 된다. 경제정책의 역사에서 한 단계를 가리키는 동시에, 국가 권력과 보호, 화폐와 사회 질서에 관한 견해들을 묶은 것이 된다. 그의 생각을 정리한 연구자에 따르면, 헥셔는 중상주의를 경제와 규제, 행정과 정치에 관한 사고의 체계로 이해하고 그 체계성을 강조했다. 그에게 최종 목표는 국가 권력이었다. 보호정책과 통화정책, 무역수지는 그 수단이었다.
이 서술은 흩어진 것들을 엮는 힘이 크다. 관세와 항해법, 식민지 무역의 독점, 금은의 유입, 인구정책, 산업 육성을 모두 하나의 틀 안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수정론자들의 반론도 강력했다. 콜먼은 몇몇 세부사항보다 그 작업 자체를 문제 삼았다. 서로 다른 사정과 논쟁,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에 놓인 말들을 하나의 커다란 체계로 묶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이었다. 그는 중상주의를 실제 경제 여건에서 떼어놓는 서술을 비판했다. 그 주장들을 각각의 상업 위기와 정치적 충돌, 재정상의 필요 속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 설명이 된다는 지적이었다.
이후의 한 연구자는 중간 길을 택했다. 중상주의에는 고정된 교리도, 통일된 교회도 없었으며 모든 저자가 같은 원칙을 공유한 것도 아니라고 인정했다. 콜먼의 말을 옮겨, 중상주의에는 애초에 신조 같은 것이 없었고 어쩌면 계몽시대 자유주의자들이 자기 신념을 위해 세운 허수아비였을 뿐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을 아예 버리려 하지는 않았다. 공통된 어휘와 문제의식을 지닌 일련의 논의로 이해하자는 쪽이었다. 무역과 화폐, 국가와 해상 경쟁, 식민 지배와 무역의 질투를 놓고 당시의 저자들은 분명 같은 언어로 이야기했다. 다만 같은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이 논쟁에는 아직 결론이 없다. 여기서 대신 결론을 내려줄 필요도 없다.
다만 양쪽이 지키려는 것은 서로 꽤 다르다. 어느 편에 설지 정하기보다 그 차이를 아는 편이 더 쓸모 있다. 한쪽은 여기저기 흩어진 정책과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전체로 묶을 틀이 있는지 묻는다. 다른 쪽은 그렇게 묶다가 구체적인 사정을 눌러 지워버리지 않는지 묻는다. 책자 한 권 뒤에 있던 바로 그 위기, 바로 그 빚, 바로 그 정치적 다툼이 모두 보이지 않게 되지는 않느냐는 것이다. 앞의 쪽이 원하는 것은 설명력이고, 뒤의 쪽이 원하는 것은 실제 모습에 대한 충실함이다. 어느 연구에서나 둘 다 끝까지 높이기는 어렵다.
어느 쪽에 서더라도 인정해야 할 일은 있다. 중상주의가 스스로 앞뒤가 맞는 하나의 체계였든 아니었든, 16세기와 17세기의 수많은 정책 문서와 상인들의 책자, 회사의 특허장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국가는 서로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하나의 척도로 환산하는 일에 갈수록 집착했다.
그 척도가 반드시 금은 자체였던 것은 아니다. 유리한 무역수지일 수도 있고, 세금을 매길 수 있는 흐름, 등록할 수 있는 주식자본, 수량을 셀 수 있는 재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 대양을 가로지른 제국들의 경쟁에서 금과 은은 가장 단단하고, 가장 가지고 다니기 쉬웠다. 지방의 관습법이나 인간관계에 얽힌 의리처럼 공통의 척도에 올리기 까다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금과 은은 몇 번이고 세계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한마디를 더 보태야 한다. 환산되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바다도 환산할 수 있었다. 1494년 이베리아반도의 두 왕국은 조약 한 장에 서명하고 지도 위에 북극에서 남극까지 선 하나를 그었다. 아직 점령하지도 않았고 측량조차 끝내지 못한 바다와 땅을 먼저 종이 위에서 나누었다. 1503년에는 세비야에 별도의 기관이 생겼다. 아메리카와의 무역을, 뒤에는 아시아와의 무역까지 허가하고 장부와 세금, 해도를 관장했다. 대양을 건너는 항해는 처음부터 자유롭게 떠도는 선단의 일이 아니었다. 허가와 등록과 징수의 일이었다. 세계는 사람들이 실제로 구석구석 다녀보기도 전에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몫으로 갈라져 있었다.
4. 산 하나
1545년, 오늘날 볼리비아에 속하는 고원에서 은이 풍부한 산 하나가 발견되었다.
포토시였다.
처음에는 캐내기가 비교적 쉬웠다. 은 함량이 높고 제련하기 쉬운 광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60년대에 이르자 그런 좋은 광석은 거의 다 캐냈고, 은 생산량이 한때 줄었다.
포토시를 진정한 거대 기계로 만든 것은 1570년대에 일어난 두 가지 변화였다.
하나는 기술이었다. 수은으로 광석에서 은을 분리해내는 아말감법이 널리 쓰이면서 함량이 낮은 광석도 제련할 수 있게 되었다. 수은의 공급, 광석을 빻는 시설, 은을 제련하는 작업장이 이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제도였다. 톨레도 총독은 안데스 사회를 다시 짰다. 부역과 인구, 세금을 한꺼번에 재편했다.
그때부터 포토시는 단순한 광산이 아니었다. 갱도와 제련소, 수은 공급, 부역 징발, 운송과 주화 주조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장치 한 벌이었다.
쉽게 캐낼 수 있는 광석에서 수은을 써야 하는 광석으로 옮겨간 변화는 말로 들을 때보다 깊다. 앞의 경우 은은 어느 정도 산속에 원래 있던 것이었다. 사람이 가서 가져오면 되었다. 뒤의 경우 은은 거대한 공정 전체가 내놓는 생산물이 되었다. 수은도 있어야 하고, 분쇄기도 있어야 하고, 수력도 있어야 했다. 제련 작업장과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 일손, 그 모든 것을 산 위로 공급할 운송도 필요했다. 자연에 있던 것이 계속 투입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제품으로 바뀐 것이다. 투입이 계속되어야 하는 곳에는 배치와 조정도 계속되어야 한다. 배치와 조정이 계속되어야 하는 곳에는 사람까지 그 안에 넣어 움직일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어떤 연구는 포토시를 아예 스페인 제국, 나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공급자로 부른다.
이 산을 지구 반대편과 잇는 일도 일어났다.
1571년 마닐라가 세워진 뒤 아메리카의 은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교환망에 한결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이 시대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때부터 이른바 대서양 경제를 대서양만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은이 아시아로 계속 흘러갔고, 중국이 은을 빨아들이는 힘은 거꾸로 유럽과 아메리카의 무역 모양을 다시 짰기 때문이다.
앞선 글의 끝에서, 명대의 지폐 실험이 실패한 뒤 사회 전체는 은으로 물러나 돌아갔다. 은을 진짜 척도로 삼았다.
그 은의 상당 부분을 이 포토시라는 산에서 캐내야 했다.
양쪽의 사정은 각각 단순하다. 함께 놓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동아시아 쪽에서는 거대한 사회가 지폐의 붕괴 뒤에 믿고 가격을 매기며 재산을 모아둘 만한 것을 찾았다. 그래서 은으로 돌아섰지만 자체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비단과 도자기, 다른 상품들을 내주고 은을 얻어야 했다. 아메리카 쪽에는 은이 나는 산이 있었다. 그 산을 파려면 수천수만 명의 일손이 필요했다. 사이에는 여러 선단과 몇 겹의 시장이 있었다. 그렇게 동아시아에서 은을 갈망하는 마음이 안데스고원의 일손 수요로 바뀌었다.
동아시아의 한 왕조가 자기가 만든 종이를 포기했다. 그러자 안데스고원의 사람들이 갱도로 내몰렸다. 두 사건 사이에는 지구 반 바퀴가 놓여 있고, 몇 겹의 시장과 여러 선단이 놓여 있다. 당사자들은 서로 얼굴도 모른다. 그래도 두 사건은 분명 같은 사슬의 양 끝이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척도로 바꾸는 일이 멀리 퍼지면 이런 모습이 된다. 어느 곳의 장부를 맞추기 위해, 그곳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이것은 공통 척도가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다. 자가 멀리 뻗을수록 인과의 사슬은 길어진다. 사슬이 길어지면 대가를 감당하는 사람과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더 이상 서로 마주치지 않는다. 증여의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하면 자신도 알고 상대도 알고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았다. 이제는 마드리드에서 장부를 대조하는 사람, 푸젠에서 은을 바꾸는 사람, 포토시의 갱도에 있는 사람이 서로를 전혀 모르면서 같은 셈에 엮인다. 공통의 자는 세계를 잇는 동시에 책임을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얇게 흩어놓았다.
5. 13퍼센트
이제 이 기계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볼 차례다.
기계를 움직인 것은 미타라는 강제 교대 부역이었다.
1575년 톨레도는 포토시에 미타 징발 거점을 설치했다. 강제로 보내진 원주민 광부들을 조직하고 정해진 때에 도착하도록 보장하는 곳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새로운 부역 제도는 해마다 원주민 남성 노동자 약 1만 3,400명을 포토시로 보냈다.
1585년 현지인이 남긴 기록에는 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온다. 전체 인원을 조사한 뒤 여러 지방에서 납세 의무가 있는 성인 남성의 약 13퍼센트에서 16퍼센트를 뽑았다. 그렇게 포토시에 모인 인원은 모두 1만 3,340명이었다.
이 계산법을 눈여겨보자. 그저 대강 사람을 부역에 끌어낸 것이 아니다. 지방별로, 비율별로, 납세 인구별로, 교대 차례별로 구체적인 사람들을 은의 생산함수 안에 편입한 것이다.
이 계산법 안에서 한 사람의 신분은 어느 지방에 할당된 부역 인원 한 몫이었다.
전혀 새로운 신분이었다. 그전에는 어느 마을 공동체에 속하는지, 어느 혈통인지, 어느 우두머리 밑에 있는지, 제의에서 어느 자리에 서는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했다. 이런 신분에는 내용이 있었다. 구체적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내용 없는 신분 하나가 더해졌다. 어느 지방의 성인 남성 가운데 13퍼센트에 든 한 명. 이 신분은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숫자가 차는지만 묻는다. 그리고 바로 이 내용 없는 신분이 그로 하여금 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걸어 어느 산으로 가도록 했다.
같은 기록에는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벌어진 일도 남아 있다. 징발된 남자들과 그들의 아내, 아이들을 합쳐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살던 마을을 떠났다. 길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왕국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문장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왕국 전체가 움직인다. 산 하나에서 은이 제때 나오게 하려고.
그 4만여 명이 누구인지도 보아야 한다. 징발된 남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명부가 요구한 것은 남자 한 명이었지만 실제로 움직인 것은 가족 전체였다. 명부와 현실 사이에는 이렇게 끝내 메워지지 않는 틈이 있다. 명부가 세는 것은 떼어내어 보낼 수 있는 노동력이고, 길을 걷는 것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함께 길을 나선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할당량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 할당량과 함께 집을 떠났다.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는 당대에도 쓴 사람이 있었다. 1550년 한 수사는 원주민 사무를 관장하는 기관에 편지를 보내 포토시를 지옥의 입구라고 불렀다.
그 묘사는 수사적인 과장이 아니었다. 물가와 거리를 적어놓은 고발이었다. 그곳은 차가운 황무지였다. 근처에는 가축에게 먹일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았다. 곡물 값은 터무니없이 높았다. 당시의 곡물 계량 단위로 한 분량을 사려면, 밀은 흔히 금화 30닢, 옥수수는 15닢에서 20닢이 들었다. 원주민의 주식인 말린 감자마저 12닢에서 15닢을 주어야 했다. 사람들은 180리그가 넘는 거리, 곧 천 킬로미터도 넘는 곳에서 강제로 끌려왔다. 그들이 받는 처벌은 수사의 말대로라면 이성에 어긋났고, 자유인에게 적용되는 법에도 어긋났다.
이 자료가 매서운 까닭은 은의 다른 면을 눈앞에 바로 펼쳐놓기 때문이다.
금속 한 가지를 세계 어디서나 결제에 쓰는 재물로 만들려면 먼저 음식과 연료, 여정과 몸, 죽음까지 모두 이 광산의 시간표에 복종시켜야 했다.
그 편지의 가격표는 특히 들여다볼 만하다. 먹을 것이 터무니없이 비싼 까닭은 원래 그곳에서 식량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멀리서 가져와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식량도 나지 않는 곳에 머물러야 하는 까닭은 산속에 은이 있기 때문이다. 일의 순서가 뒤집혔다. 사람이 먼저 살다가 광산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광산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없는 땅으로 사람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어느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는지를 그 땅 자체가 결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땅 밑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가 결정했다.
미타가 사람을 최대한 할당량에 맞추어 배치해도 현실은 계속 넘쳐났다.
첫째, 왕실의 명부만으로 부역이 저절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지방의 우두머리와 마을 조직, 호송을 맡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을 실제 현장까지 데려와야 했다. 이름을 지운 조세 명부 뒤에는 여전히 구체적인 관계망들이 서 있었다.
둘째, 국가는 은 생산을 세금을 매기고 감독할 수 있는 공식 경로에 가두려 했다. 그러나 광석과 부산물은 시장에서 뒤섞여 흘렀다. 같은 기록에는 포토시의 코카 잎 광장에서 원주민 여성들이 코카 잎을 내주고 물건을 바꾸었다고 나온다. 광석도 얻고 은도 얻었다. 또 재판관이 성문 앞에서 은으로 광석을 사는 일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 허용은 문 하나를 열었다. 은을 가진 사람들이 광석을 사들여 제련 작업장을 키울 수 있는 문이었다.
이처럼 강력하게 모든 것을 같은 척도로 바꾸는 체계에서도, 같은 척도로는 셈할 수 없는 나머지가 계속 새어 나왔다. 부역을 피하는 일과 대신 가는 일, 가족의 해체, 지역의 물물교환, 질병과 갱도 사고, 마을 인구 구성의 오랜 파괴가 남았다.
그 나머지 가운데 일부는 구축이 스스로 길러낸 것이었다. 명부는 해마다 필요한 인원을 고정했다. 하지만 사람은 병들고 죽고 달아났다. 그러니 대신 부역을 가는 사람이 생겼다. 누군가는 돈을 주고 자기 대신 갈 사람을 구했고, 누군가는 아예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여 원래 공동체를 떠났다. 그 명부에서 더는 세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명부가 딱딱해질수록 명부에서 사라지려는 방법도 늘어났다. 구축은 제 장부를 맞추려다가 오히려 그 장부를 피해 다니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그 나머지는 제국이 사라졌다고 함께 사라지지도 않았다.
2021년에 발표된 한 경제사 논문은 오늘날의 성씨 분포를 정량적 증거로 삼았다. 논문은 1573년에 도입된 식민지 미타가 현지에서 태어난 남성 인구를 급격히 줄였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면 40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그 제도적인 수탈은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성씨에 남아 있다.
장부는 오래전에 쓰기를 멈췄다. 왕조도 사라진 지 오래고 광산도 더는 그때의 광산이 아니다. 그런데 그 셈이 남긴 흔적은 아직 사람에게 있다.
잔여항이 무엇인지 이보다 손에 잡히게 보여주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장부는 덮을 수 있고 제도는 없앨 수 있으며 문서는 모조리 태울 수 있다. 그러나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끊어진 가계는 아무도 기록하려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남는다. 구축이 셈 안에 넣을 수 있던 것은 구축과 함께 사라졌다. 셈 안에 넣을 수 없던 것은 도리어 오늘까지 남았다.
6. 특허장
같은 시대, 지구의 다른 바다들에서는 또 다른 장치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1600년 말 엘리자베스 1세는 런던 상인들에게 특허장을 내주었다. 동인도와 무역하는 회사를 만들도록 허락한 것으로, 처음 정한 기한은 15년이었다. 규정은 세세했다. 총재 한 명과 위원 24명이 회사를 운영한다. 항해 한 번에 외국 주화나 금은괴를 최대 3만 파운드어치까지 내보낼 수 있다. 해마다 큰 배 여섯 척과 작은 배 여섯 척에 선원 500명을 태워 보낼 수 있다. 회사와 회사가 허가한 사람 외에는 어떤 신민도 그 지역에서 무역할 수 없었다. 어기면 배와 화물을 몰수당하고 감옥에도 가야 했다.
2년 뒤인 1602년에는 네덜란드에서도 동인도회사가 생겼다.
네덜란드 국가기록원이 그 특허장에 붙인 설명은 분명하다. 국가는 기존 회사들 사이의 경쟁을 끝내고 새 회사에 21년 동안의 독점권을 주었다. 이 회사 외에는 연합주 어느 누구도 희망봉 동쪽에서, 또는 마젤란 해협을 거쳐 항해하며 무역할 수 없었다. 회사가 만들어진 까닭도 장사로 얻을 이익에만 있지 않았다. 스페인과 싸우는 군사적·전략적 도구로 여겨졌다.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역보다 훨씬 넓었다. 협상하고, 요새를 짓고, 재판하고, 병사를 모집하고,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해외 영토를 점령해 다스릴 수도 있었다. 국가기록원의 설명에는 아주 직접적인 문장이 있다. 사실상 아시아의 한 주권국가처럼 행동했다는 것이다.
더 서늘한 추론도 뒤따른다. 국가를 대신해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을 벌일 수 있었으므로, 전쟁 포로를 노예로 만드는 법적 근거도 얻었다.
특허장 한 장이 장사할 권리와 전쟁할 권리, 사람을 재산으로 만들 권리를 같은 봉투 안에 담았다.
원래 이 세 권리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했다. 시장과 주권과 사람의 몸이었다. 한 문서에 함께 집어넣은 것은 누군가 잠깐 판단을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 시대에 수만 리 밖에서 장사를 이루려면 셋 가운데 어느 것도 빠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고팔 수 있어야 하고, 스스로를 지키고 공격할 수 있어야 하며, 일할 사람도 확보할 수 있어야 했다. 특허장은 그 현실을 인정하면서 세 권리를 함께 내주었다. 그렇게 회사 하나가 상사인 동시에 군대가 되고, 법정이 되고, 노예주가 되었다.
다만 이 회사들이 처음부터 후대 교과서에서 보는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양도할 수 있는 주식, 영구자본, 유한책임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영국 회사보다 일찍 갖추었다. 창립 때 모은 자본은 약 640만 길더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자금이 한곳에 모인 것이다. 그러나 같은 연구에서 정작 중요한 발견은 이 근대적인 특징들이 처음부터 모두 설계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주식 양도와 주주의 유한책임은 대체로 처음부터 있었다. 영구자본은 1612년에야 실제로 자리 잡았고, 이사의 유한책임은 1623년에야 분명해졌다.
후대에 익숙해진 익명의 자본은 단번에 발명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운영상의 난관, 전쟁과 자금 압박 속에서 한 조각씩 맞추어졌다.
기억해둘 만한 대목이다. 후대에는 주식회사를 잘 설계된 발명품으로 쓰기 쉽다. 누군가 영구자본과 유한책임의 원리를 먼저 다 생각한 뒤 그대로 만들었다는 식이다. 사료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르다. 급히 돈을 모아야 해서 주식이 생겼다. 주식을 쉽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해서 양도가 가능해졌다. 양도가 늘자 처음 약속한 기한에 청산하기가 어려워졌고, 그래서 아예 자본을 청산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을 청산하지 않으니 이사의 책임도 새로 정해야 했다. 한 걸음마다 앞선 걸음에서 생긴 곤란이 다음 걸음을 밀어냈다.
영국 회사의 사정은 더 불안정했다. 연구에 따르면 처음에 그 독점권은 법적으로 상당히 약했다. 군주는 2년 전에 알리기만 하면 철회할 수 있었다. 회사는 왕권과의 관계에, 뒤에는 정부와의 관계에 계속 기대어 수명을 늘리고 돈을 빌리며 특권을 지켜야 했다. 왕권과 독점회사의 동업이었다. 회사는 통치자에게 추가 세수와 대출, 전시의 도움을 제공했다. 통치자는 회사에 이익을 독차지할 권리를 주었다.
여기서 오래 보아온 두 가지가 다시 얽힌다.
한쪽에는 갈수록 사람의 개별성에서 벗어나는 교환 도구들이 있다. 주식과 배당, 어음, 표준화된 향신료와 천의 가격이다. 주식은 처음 돈을 낸 사람에게서 떨어져 다른 손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먼바다 무역에 대한 권리는 한층 더 익명적이고 유통하기 쉬운 자산이 되었다.
다른 한쪽에는 어느 모로 보아도 구체적인 사람과 관계를 떠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누가 이사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정부에서 권한을 갱신받을 수 있는가. 누가 아시아에서 조약을 성사시킬 수 있는가. 누가 본국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가. 이 일들은 여전히 종교와 가문, 도시국가의 정치와 명망에 크게 기대었다.
초기의 회사는 경제에서 사람을 빼내지 않았다. 이름 없는 권리들을 갈수록 많이 만들어, 이름과 얼굴이 너무도 분명한 권력 구조 위에 올려놓았다.
두 층위에서 무게가 놓이는 자리도 바뀌었다. 가진 주식을 언제든 팔 수 있을수록 주주는 회사가 아시아에서 무엇을 하는지 마음 쓸 필요가 줄었다. 그런데 회사가 아시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몇몇 이름 있는 이사와 그 뒤의 정치적 관계에 점점 더 달려 있었다. 익명의 층은 아래로 내려가 사고팔 수 있는 숫자의 나열이 되었다. 사람에게 매인 층은 위로 올라가 갈수록 집중된 결정권이 되었다. 어느 한쪽이 커져 다른 쪽을 밀어낸 것이 아니다. 둘 다 저마다 자기 쪽 끝을 향해 갔다.
7. 구리 솥과 사람
세 번째 장치는 아메리카의 땅에서 자라났다.
플랜테이션의 시작은 한 줄로 이어지지 않는다. 포르투갈인들은 먼저 대서양의 섬들에서 사탕수수와 압착 시설, 노예 노동을 결합했다. 16세기에 걸쳐 그 체제를 브라질 북동부로 차츰 옮겼다. 1600년 무렵 브라질은 이미 유럽에 설탕을 가장 많이 공급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현지 농장주들은 처음에는 원주민도 부렸으나 곧 노동력의 중심을 아프리카인으로 옮겼다. 어떤 연구는 브라질을 최초의 중요한 플랜테이션 체제로, 바베이도스를 성숙한 플랜테이션 제도가 자라난 곳으로 본다.
바베이도스의 중요성은 흔히 설탕혁명이라 부르는 변화에 있다. 1640년부터 1660년 무렵까지 이곳은 소농이 담배와 목화, 인디고를 기르는 곳에서 생산 과정이 통합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으로 바뀌었다. 노동력의 중심도 백인 계약 노동자에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으로 넘어갔다. 백인 계약 노동자는 뱃삯을 갚으려고 일정 기간 일하기로 계약한 유럽인들이었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저절로 일어난 변화인지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수정론자들은 그토록 갑작스러운 전환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그 사이에는 실험과 실패가 있었고, 자본을 어디서 가져왔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제국 사이를 건너다닌 기술이 있었다. 어떤 연구는 1640년대 바베이도스 설탕 산업을 일으킨 자금의 주된 출처가 신화처럼 부풀려진 네덜란드 모델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런던에 있던 영국 상인들의 투자와 신용, 무역망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플랜테이션은 어떻게 대서양 경제 전체의 제도적 중심이 되었을까.
땅과 노동력, 기계와 시간, 수출 시장을 한데 묶어, 기록하고 수탈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장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탕 공장은 사탕수수밭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 공정이 맞물려 있었다. 압착기가 사탕수수의 즙을 짜내면 즙은 끓이는 작업장으로 흘러갔다. 줄지어 놓인 구리 솥에 석회와 풀을 태운 재를 넣어 즙을 맑게 거르고, 끓이고, 졸였다. 그런 다음 결정화 작업장으로 옮겨 굳히면서 당밀이 밑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각 단계는 그 일을 맡은 감독과 숙련 노동자들이 관리했다.
사탕수수에는 한 가지 성질이 있다. 베어낸 뒤에는 최대한 빨리 즙을 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한다. 그래서 공장 전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속으로 돌아가야 했다. 타협할 수 없는 박자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 박자는 사람이 아니라 사탕수수가 정했다. 수확철이 오면 압착과 끓이기, 결정화가 한 고리씩 맞물려 이어져야 했다. 어느 한 고리라도 멈추면 앞에서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농장의 시간표를 정하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때도, 사람이 얼마나 힘을 낼 수 있는지도 아니었다. 작물의 화학적 성질과 설비의 처리 능력이었다. 사람은 그 박자 속에 들어가 따라잡는 수밖에 없었다. 훗날 공장에서 기계의 리듬에 맞추어 사람을 배치하는 방식이 이미 이곳에서 싹텄다. 공장보다도 훨씬 잔혹한 조건에서였다.
그 박자 속에서 사람은 무엇이었을까. 답은 분명하다.
1690년 무렵 바베이도스에서 면적 100에이커에 노예로 부려지던 아프리카인 50명과 계약 노동자 7명을 둔 사탕수수 농장의 자본 비용은 3,620파운드로 추산되었다.
가장 눈을 찌르는 것은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가이다.
땅과 압착 시설, 구리 솥과 가축, 주택, 그리고 그 50명이 모두 같은 투자 계정 안에 들어갔다.
‘같은 칸’이라는 말이 이 일의 핵심이다. 같은 칸에 넣는다는 것은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 열 명을 더 사는 것과 구리 솥 두 개를 더 놓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이익인가. 수로를 한 구간 내는 것과 감독 한 명을 더 두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본전을 빨리 찾는가. 사람과 기물이 같은 표 위에 놓이면 사람에 관한 결정에도 기물을 다루는 논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는 데 누군가 악의를 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그 표를 앞에 놓고 성실하게 계산하기만 해도 된다.
여기에 이르면 사람은 더 이상 은을 캐라고 내몰린 노동력만이 아니다. 장부의 자본 항목이 되고, 보험의 대상이 되고, 담보로 잡힐 물건이 되고, 미래 수익의 원천이 된다.
이 신분들은 하나같이 노동력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노동력은 그래도 한 사람이 하는 일을 가리킨다. 자본 항목과 담보물, 보험 대상과 수익 원천이 가리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다. 쓰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유된다. 일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장부 위에 보유된 한 몫이 된다. 가치를 평가할 수 있고, 감가상각할 수 있고, 양도할 수 있다. 아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도 있다.
여기서도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 설탕은 표준화된 수출품이다. 런던과 암스테르담, 브리지타운의 가격을 서로 견줄 수 있다. 농장에는 계산할 수 있는 재고와 대출, 선박 운항 일정과 보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농장 안쪽은 무엇으로 돌아가는가. 감독과 관리인, 주인의 처벌권, 식민지 법정, 상인의 신용과 오래 이어진 거래 관계로 돌아간다.
어떤 연구는 17세기 중반 바베이도스 설탕 산업에 돈을 댄 영국 상인들이 흔히 구체적인 무역 분야에 믿을 만한 연줄을 지녔으며, 동시에 동인도회사 이사 같은 직함을 겸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서양 세계가 익명의 가격과 표준화된 수출을 향해 나아갈수록, 이름과 얼굴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더 깊이 기대었다. 보증을 서고, 돈을 빌려주고, 소송에 나서고, 정치적 관계를 뚫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8. 먼저 수에 넣고, 그다음 값을 붙이다
세 장치를 한데 놓으면 한 줄기가 분명해진다.
토머스 먼은 국가에 총결산을 낼 수 있는 장부 한 권을 주었다. 그 장부의 연말 잔액이 양수가 되려면 은이 들어와야 한다. 은이 들어오려면 누군가 캐내야 한다. 캐낼 사람이 있으려면 골짜기와 마을마다 흩어져 제 삶을 살던 사람들을 지방별로, 비율별로, 교대 차례별로 움직일 수 있는 숫자로 바꿀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미타가 나타났다. 13퍼센트에서 16퍼센트. 1만 3,340명. 길 위를 걷는 4만여 명. 왕국 전체가 움직이는 듯 가득 찬 길.
첫 번째 걸음이다. 사람을 행정적으로 수량화한다.
이 체제 안에서 한 사람은 먼저 어느 지방에 할당된 부역 인원의 한 몫이 된다. 아직 값이 붙지는 않았다. 그러나 벌써 수 안에 들어갔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두 번째 걸음이 마무리되었다.
100에이커. 노예가 된 사람 50명. 계약 노동자 7명. 3,620파운드. 사람이 구리 솥, 가축, 주택과 함께 같은 칸에 들어갔다.
두 번째 걸음이다.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가격을 매긴다.
먼저 수에 넣는 일과 그다음 값을 붙이는 일 사이에는 백 년이 넘는 시간과 대양 하나가 놓여 있다. 그러나 두 걸음은 같은 방향으로 갔다.
그쪽으로 밀어간 힘은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었다. 주된 원인이 어떤 이론적 오류였던 것도 아니다. 더 단순한 일이 있었다. 한 나라가 같은 물건을 쌓아두는 일을 목표로 삼았다. 더 많이 쌓으려면 쌓는 과정을 계산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고, 감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 안에 셈해 넣을 수 있는 것은 남겨두고 강화하고 불렸다. 셈해 넣을 수 없는 것은 피해 가거나 납작하게 누르거나 장애물로 여겨 치웠다.
이 사슬의 어느 단계도 악인 하나를 필수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흑자를 내려면 은이 필요하다. 은이 필요하면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생산량을 늘리려면 일손이 꾸준해야 한다. 일손이 꾸준하려면 수에 맞춰 사람을 배치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매 단계가 앞 단계의 합리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끝까지 가고 나면 한 사람은 어느 지방의 부역 할당량 한 몫이 되어 있다. 악한 결과가 반드시 악의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는 그럴듯해 보이는 추론의 연쇄만으로도 온전히 생겨날 수 있다. 그 연쇄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 물음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렇다. 지금 세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앞선 글들에서 자의 문제는 재지 못한다는 것이거나,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이거나, 재고도 정작 닿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항해의 시대에 이르면 자는 더 철저한 일을 한다. 자기 모양에 맞춰 세계를 다시 배치한다.
마을의 생활 리듬은 광산의 교대에 맞추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일생은 투자의 회수 기간에 맞추어야 한다. 고원 전체의 인구 구성은 유럽 어느 왕실의 연간 잔액에 맞추어야 한다.
세계가 장부에 들어오려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 아니다. 장부가 먼저 손을 뻗어 세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더 쉽게 장부에 들어오게 하려고.
구축이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위험한 걸음이었다. 앞선 글들에서 구축과 잔여항의 관계는 아직 수동적인 편이었다. 구축이 가서 재고, 재지 못한 것은 바깥에 빠뜨렸다. 이제 구축에는 힘이 생겼다. 세계를 먼저 자기가 잴 수 있는 모양으로 깎아놓은 다음 잴 수 있다. 더 잘 깎아낼수록 바깥에 남은 것은 애초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양에 맞지 않던 것은 이미 깎는 동안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넘쳐 나온 것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포토시에서는 코카 잎 광장의 물물교환과 성문 앞에서 사사로이 거래되는 광석, 부역을 피하는 사람과 대신 가는 사람, 갱도 사고와 흩어진 가족이 남았다. 회사 쪽에서는 끝내 정리되지 않는 이사들의 사익과 사기 혐의, 끝없는 다툼이 남았다. 인간관계와 총애, 대출에 기대어야만 지킬 수 있는 특권이 남았다. 사탕수수 농장에서는 몸이 상하고 장애를 입는 일, 죽음, 어느 화물 명세서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 남았다.
그 가운데 끝내 셈을 맞추기 가장 어려운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그는 명부의 숫자가 되고, 자본 계정에 적히고, 해마다 채워야 할 부역 인원과 에이커당 나와야 할 생산량으로 환산되었다. 그래도 한 부분은 장부 밖에 남았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수백 리 길을 걷던 사람들에게 남았다. 달아난 사람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남았다. 400년 뒤 성씨에서도 읽을 수 있는 빈자리로 남았다.
이 가운데 차변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변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없다.
그저 그곳에 있다.
그것들이 아직 보이는 까닭은 흔히 장부에 있지 않다. 다른 것들에 있다. 물가를 한탄하는 편지 한 통, 사람이 가득 찬 길을 적어놓은 기록 한 대목, 400년 뒤 통계로 얻은 성씨의 분포다. 모두 장부를 쓰려고 남긴 것이 아니었다. 구축이 남긴 것은 분명하게 셈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잔여항이 남긴 것은 조각조각 흩어져 꼴을 갖추지 못했으나 끝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다음 걸음은 더 멀리 나아간다. 포토시에서는 사람을 비율에 따라 징발해 은을 캐게 했다. 농장에서는 사람을 자본 계정의 한 항목으로 셈했다. 그다음에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사람 자체를 운송하고, 사고팔고, 수량을 세는 화물로 삼는 것이다. 대양 이쪽에서 저쪽으로 실어 보내며 배 한 척 한 척의 화물 명세서에 적어넣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다음 글에서는 그 일을 따로 다룰 것이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중문 원문의 논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어 독자의 호흡에 맞게 구성과 문장을 새로 짠 독립 편집·재구성판이다. 中文・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