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글. 송대의 교자: 금속이 물러난 뒤에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쓰촨의 무거운 철전에서 태어난 교자는 종이의 재질이 아니라 상인의 이름과 국가의 세금 수납으로 가치를 얻었다. 발행 약속이 흔들릴 때 손실을 누가 떠안는지가 지폐의 진짜 문제였다.
이 글의 목차
1. 철전의 무게
세계 최초의 지폐가 왜 사천에서 나왔는지 알려면, 먼저 당시 사천 사람들이 지니고 다니던 돈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손에 얹어보아야 한다.
북송은 촉 땅을 통일한 뒤에도 오랫동안 그곳에서 철전을 쓰도록 허용했다. 한때는 구리로 만든 동전이 양천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기도 했다. 뒤에 그 금지를 일부 풀었지만 철전을 밖으로 내가는 일은 여전히 허용하지 않았다. 철은 값이 쌌다. 같은 물건을 사려 해도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그만큼 무거웠다. 상인이 사천 경계 안으로 동전 한 닢을 가져오면 철전 열네 닢으로 바꿀 수 있었다. 천 한 필을 사려면 철전을 얼마나 짊어져야 하는지, 산길을 한 번 가려면 짐꾼 몇을 고용해야 하는지는 몸으로 겪는 문제였다.
철전이 그렇게 무거웠던 까닭은 간단하다. 돈의 값어치 절반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에 달려 있었다. 구리가 철보다 비싸니 같은 값을 치르려면 철을 더 많이 써야 했고, 많이 쓰면 무거워졌다. 사서에는 놀랄 만한 무게도 남아 있다. 비단 한 필을 사려면 백 근이 넘는 철전을 메고 가야 했다고 한다. 비단 한 필을 사는 것은 보통 집안에서 살림을 꾸리는 일이지 거창한 거래가 아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일을 하려면 먼저 돈을 가게까지 어떻게 옮길 것인지부터 풀어야 했다.
세금은 사정을 더 어렵게 했다. 관에서는 한동안 조세와 전매 이익금을 낼 때 철전 열 닢을 동전 한 닢으로 환산하도록 요구했다. 사천에는 원래 동전이 많지 않았다. 사서는 동전이 이미 말라버렸고 백성이 이를 몹시 괴로워했다고 적었다.
『송사』에는 눈을 찌르는 몇 줄도 남아 있다. 세금을 낼 때 동전을 더 많이 요구하던 시절, 지방의 관리와 아전들은 그 틈을 타 이익을 챙겼다. 환산 비율에 단계마다 웃돈이 붙었고 백성의 고통도 커졌다. 어떤 사람은 옛 무덤을 파헤치고 불상과 기물을 부수어 겨우 동전 너덧 닢을 마련했다. 그러다 죄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 몇 줄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화폐 제도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구체적인 사람에게 이런 뜻이다. 남의 무덤을 파야 한다. 집에서 모시던 불상을 깨뜨려야 한다. 관에서 요구하는 모양을 갖춘 구리 조각 몇 개를 모으기 위해서다. 그러고도 형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서 공통의 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너무 무거웠다. 사람이 등에 지고 가야 할 만큼 무거웠고, 그 규격을 맞추느라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해야 할 만큼 무거웠다.
여기서 보이는 한 가지는 뒤에서도 거듭 나타난다. 자가 쓸 만한지는 정확한가에만 달려 있지 않다. 얼마나 무거운지, 가지고 갈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앞선 글들에서 서로 다른 것을 같은 척도로 바꾸려 할 때의 난점은 끝까지 셈을 분명히 할 수 있느냐였다. 사천에서는 곤란의 모습이 달라졌다. 셈은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셈을 다 하고 나면 그 돈을 옮길 수가 없다. 옮기지 못하는 물건은 아무리 정확해도 쓸모가 없다.
이 자리에는 이미 잔여항 하나가 숨어 있다. 철전으로 비단 한 필의 값은 정확히 셀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고 반나절 산을 넘는 힘, 길에서 사람을 고용하는 품삯, 도둑을 만날 위험은 그 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장부에도 적히지 않으면서 거래가 될지 안 될지를 정하는 것들이다. 교자가 풀려고 한 것은 바로 이 장부 바깥의 몫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종이 한 장을 떠올렸다.
2. 열여섯 집의 이름
『송사』는 이 일을 한 문장으로 적었다. 처음에 촉의 백성들이 철전이 너무 무거워 사사로이 증서를 만들고 교자라 불렀으며, 거래를 편리하게 하려고 부유한 열여섯 집이 그 일을 맡았다는 것이다.
뒤에 이유가 쓴 『송조사실』에는 더 자세한 모습이 나온다. 익주의 유력한 집 십여 곳이 서로 보증을 서서 교자를 만들었다. 같은 종이에 집과 나무, 사람의 그림을 찍고, 가게마다 자기 상호의 서명과 비밀 번호를 넣었다.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를 섞어 자기들끼리 알아보는 표시로 삼았다. 액수는 그 자리에서 써넣었으며 몇 관을 적든 제한이 없었다. 한 관은 천 문을 세는 단위였다. 교자를 현금으로 바꾸려면 한 관마다 서른 문을 수수료로 뗐다.
그 종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눈여겨보자. 통일된 종이, 정해진 그림, 각 집의 서명, 비밀 번호, 붉고 검게 섞인 사적인 표시들이다. 어느 것도 얼마짜리인지를 설명하려고 넣은 것이 아니다. 누가 내놓은 것인지, 남이 흉내 낼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장치들이다.
달리 말하면 이 종이를 만드는 데 들인 궁리의 대부분은 위조를 막고 발행자를 밝히는 데 쓰였다. 값을 적는 칸이 오히려 가장 수월했다. 그 자리에서 쓰면 그만이고, 몇 관을 쓰든 상관없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이 한 장이 진짜이며 바로 그 집들이 내놓은 것이라고 믿게 하는 일이었다. 금속으로 만든 돈은 이런 걱정을 덜었다. 동전 한 닢이 진짜인지 보려면 손에 올려 무게를 가늠하고, 깨물어보고, 단면을 살피면 어쨌든 알아낼 길이 있었다. 종이는 그렇지 않았다. 종이의 진위는 종이 안에 있지 않았다. 다른 곳에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서 종이 한 장을 받아들일 근거는 무엇인가. 종이 자체는 아니다. 그 열여섯 이름이다.
여기가 이 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다. 철전이 통하는 까닭의 절반은 관에서 인정하기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자체가 철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누가 들고 있든 그 철은 그대로 남는다. 종이는 다르다. 종이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로 통할지는 전적으로 그 뒤에 선 사람들이 책임을 인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갚으려 하는가, 갚을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돈에서 금속을 빼낸다고 신뢰가 덜 필요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금속을 덜어낸 만큼 신뢰 위에 얹히는 무게가 늘어났다.
앞선 글들에서 익명의 자를 떠받친 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에게 매인 것들이었다. 점토판에는 인장과 증인이 필요했고, 주화에는 발행자의 명성과 나중에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검인 자국이 필요했다. 장부에는 문서함 가득한 편지와 보증인들이 필요했다. 교자에 이르면 이 관계가 끝까지 밀려간다. 그 몇 이름 말고는 종이가 정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약속일 뿐, 대신 버텨줄 금속이 없다.
문제도 곧 따라왔다. 부유한 상인들이 받은 철전은 창고 안에 얌전히 누워 있지 않았다. 그 돈으로 물건을 사들여 쌓아두고 가게와 집, 정원과 밭, 값진 물품을 널리 사들였다. 위조가 나타났고 소송이 생겼으며, 한꺼번에 바꾸어달라는 요구가 몰렸다. 끝내 사람들이 떼로 모여 다투기에 이르렀다. 관에서 나서 중재해도 한 관에 겨우 칠팔백 문을 돌려받는 일이 흔했다. 모자라는 이삼백 문은 증서를 쥔 사람이 잃었다.
뒤의 몇백 년 동안 더 큰 규모로 수없이 되풀이될 교훈이었다. 발행자는 다른 사람의 신뢰를 손에 쥔다. 그리고 신뢰는 먼저 써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유혹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창고에는 철전이 한 무더기 쌓여 있다. 바꾸러 오는 사람은 늘 띄엄띄엄이다. 오늘 몇 명, 내일 몇 명이 올 뿐, 모두가 같은 날 한꺼번에 오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일부를 먼저 꺼내 재산을 사두면 어떨까. 재산에서는 수익이 나오고, 그 수익으로 다시 재산을 살 수 있다. 셈의 어느 단계도 틀리지 않는 듯하다. 구멍은 오직 ‘거의 없다’는 말에 있다. 어느 날 정말 모두가 함께 찾아오면, 그전까지 각 단계에서 옳았던 이유들이 한꺼번에 무효가 된다.
이 종이가 대체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지를 놓고 연구자들의 설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그 간격도 작지 않다.
한쪽은 신뢰의 관계망을 강조한다. 허핑은 초기 교자를 곧바로 현대적인 의미의 신용화폐로 설명하는 데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그가 보는 핵심은 추상적인 신용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닫힌 사천이라는 지역, 차 상인 집단의 명망과 지급 능력, 부유한 열여섯 집의 공동 보증, 지역사회에서 서로 아는 사람들이 맺은 관계다. 종이가 한 가게에서 나와 낯선 사람의 손까지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무리에 속한 사람들의 명성이 잠시나마 종이에 공적인 신빙성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쪽은 증서와 채권을 더 중시한다. 이쪽의 오래된 설명에 따르면 교자는 돈을 맡아두는 곳에서 내준 예금 증서와 비슷하다. 발행자는 채무자이고, 증서를 가진 사람은 채권자다. 그 증서가 시장에서 오래 손을 바꾸다 보면 화폐에 가까워진다. 이 설명에서 출발점은 막연한 사회적 신뢰가 아니다. 돈을 맡기는 일과 돌려받는 일 사이의 구체적인 관계다.
두 설명은 같은 종이를 보면서 서로 다른 뿌리를 읽는다. 한쪽에서는 관계 속에서 자랐다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빚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학자들끼리만 따질 차이가 아니다. 관계 속에서 자랐다면 종이의 뿌리는 어느 한곳, 어느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있다. 사천을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 빚 속에서 자랐다면 그 뿌리는 어디서든 되풀이할 수 있는 형식에 있다. 누가 되었든 바꾸어줄 수 있는 증서를 내놓는 곳에서는 비슷한 것이 자랄 수 있다. 첫 번째 설명은 왜 하필 사천에서 교자가 나왔는지를 잘 설명한다. 두 번째 설명은 관에서 왜 나중에 그 일을 넘겨받을 수 있었고, 또 다른 것으로 바꾸어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양쪽은 저마다 한 끝을 붙잡고 있다.
이 종이에 제대로 된 형태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논쟁거리다. 여러 지역사와 후대의 대중적인 역사서는 장영을 교자의 아버지로 부른다. 교자 가게를 정비하고 부유한 열여섯 상인 집안을 공동 보증자로 지정한 일에 구체적인 연도도 붙인다. 하지만 최근의 일부 연구는 그 설명을 되묻는다. 장영의 집안에서 남긴 행장과 묘지명에는 그가 교자를 발명했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적혀 있지 않다는 이유다. 더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정도일 것이다. 장영은 마침 민간 교자가 제 모습을 갖추던 시기에 그 자리에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런 물건은 흔히 어느 한 사람이 어느 날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저마다 눈앞의 곤란을 해결하다가, 해결하고 또 해결하는 사이에 어느새 자라나 있다.
3. 관의 인장이 찍히다
민간 교자의 문제를 사료는 아주 직접적으로 적었다. 부유한 집들이 차츰 가산을 잃어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성 원년, 곧 1023년 11월에 조정은 익주교자무를 설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듬해인 1024년에는 관에서 발행하는 교자가 정식으로 나왔다. 첫 발행분의 한도는 125만 6,340민으로 정해졌다. 민은 돈을 꿴 꾸러미를 세는 단위였다.
일의 자리까지 정해놓은 그 숫자 자체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민간의 종이에는 현장에서 액수를 써넣었다. 몇 관을 적든 제한이 없었다. 관의 발행분은 미리 한도를 못 박았다. 일의 자리까지 박아두었다. 앞의 액수는 거래 한 건 한 건의 필요가 정했고, 뒤의 액수는 공문 한 장이 정했다. 똑같은 종이가 그때그때 시장 사정에 맞추어 움직이는 물건에서, 위에서 총량을 먼저 계산한 다음 아래로 내보내는 물건이 된 것이다. 정액이라는 두 글자가 관영 제도 전체의 뼈대였다.
『송조사실』에는 새 제도의 세목도 남아 있다. 별도의 관서를 두고 교자무의 구리 인장을 만들었다. 장부를 마련하고, 현금을 창고에 거두고, 계약에 적힌 표지와 번호에 맞추어 교자를 내주었다. 한 관마다 서른 문을 떼는 것은 같았다. 이번에는 인쇄에 드는 품과 먹값이라는 명목이었다.
이때부터 종이 뒤에 서 있는 것은 열여섯 상인의 명성이 아니었다. 관에서 마련한 장치 한 벌이었다.
그 장치가 한 일은 하나씩 꼽을 수 있다. 먼저 액면을 표준화했다. 처음에는 1관부터 10관까지였고, 뒤에는 5관과 10관, 다시 뒤에는 1관과 500문으로 바꾸었다. 주기도 표준화했다. 정기적으로 찍고, 정해진 때에 묵은 발행분을 새것으로 바꾸었다. 수량도 표준화했다. 매번 뚜렷한 상한이 있었다. 수수료도 한 관에 서른 문으로 맞추었다. 내보낼 때와 거두어들일 때 모두 장부에 적어야 했다. 위조와 훼손까지 인장을 확인하고 기한에 맞추어 회수하는 절차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 오면 돈은 금속 한 조각을 점점 덜 닮는다. 행정과 회계를 처리하는 절차 한 벌을 점점 더 닮는다.
한 겹 더 생각해볼 말이다. 동전이나 은 같은 돈은 금속이 먼저 있고 제도가 나중에 그것을 다스린다. 교자 같은 돈은 제도가 먼저 있어야 종이가 돈이 된다. 관의 인장, 장부, 발행 한도, 교체 기한, 바꾸어주겠다는 약속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그림을 찍은 종이 한 장이다. 돈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철저히 제도가 만들어낸 물건이 되었다. 글로 적고, 집행하고, 또 고칠 수도 있는 규칙 한 벌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준비금도 있었다. 『송사』에 따르면 예전에는 한 계의 교자를 만들 때 밑천 36만 민을 마련하고, 새것과 옛것을 이어 운용했다. 허핑은 이강의 문헌을 인용하면서 다른 수치를 내놓는다. 보통 밑천 100만 관을 남겨두어 교자 300만 관을 떠받쳤다는 것이다.
두 수치는 맞지 않는다. 후대에 말하는 준비금 비율이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제도적 상수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시기와 문헌의 출처, 무엇을 기준으로 서술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도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송나라 사람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지폐가 통하려면 아무 데도 기대지 않은 채 허공에 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송나라 사람들이 후대보다 더 또렷하게 말한 대목도 있다. 여중은 천성 연간에 교자무를 설치한 일을 논하며, 이것이 지폐의 시작이라고 썼다. 그러나 현금으로 종이를 유통시키고 종이로 현금의 흐름을 조절했으며, 자식과 어미가 서로 통하여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폐단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백성이 현금을 종이처럼 보고 종이를 현금처럼 보았다는 것이다.
자모균통. 자식과 어미가 고르게 함께 통한다는 이 네 글자는 이 일을 가장 일찍, 또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말 가운데 하나다.
종이는 혼자 날아오르지 않았다. 어미가 있어야 했다.
자식과 어미라는 비유가 좋은 까닭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대신한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생겼다고 어미가 없어지지 않는다. 어미가 있다고 자식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있어야 하고, 서로 돌보아야 하며,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떠날 수 없다. 11세기의 한 사람이 벌써 핵심을 보았다. 종이가 얼마나 편리한지보다 종이와 돈이 오가는 관계가 제대로 서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 뒤 몇백 년 동안 거듭 생긴 문제도 모두 이 관계에서 터졌다.
4. 계, 돌아와야 하는 돈
이 제도에서 가장 절묘하게 고안된 부분은 계였다.
계란 몇 년마다 새 교자를 한 무더기 찍고, 그와 동시에 묵은 교자를 거두어 무효로 만든 뒤 새것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누어 발행한 한 묶음을 한 계라고 불렀다.
영리한 설계였다. 지폐의 가장 큰 위험은 끝없이 찍는 데 있다. 많이 찍을수록 값어치는 떨어진다. 계를 두면 몇 년마다 한 번씩 판을 정리해야 한다. 옛것을 거두어 없애고 새것은 정한 한도 안에서 내보낸다. 유통되는 총량을 다스릴 수 있는 리듬에 묶어놓는 것이다. 발행하고, 유통시키고, 회수하고, 다시 발행한다. 스스로 닫힐 수 있는 고리가 만들어진다.
이 설계가 품은 생각은 앞선 글들에서 장부의 셈을 맞추려던 노력과 한 갈래다. 방향만 달라졌다. 장부는 공간에서 셈을 맞춘다. 모든 항목을 양쪽에 모아 합계를 같게 만든다. 계는 시간에서 셈을 맞춘다. 내보낸 것이 기한에 맞춰 돌아오고, 돌아온 다음에야 새것을 내보내게 한다. 앞의 것은 장부 한 권이 닫히는가를 다루고, 뒤의 것은 돈 한 차례분을 다시 거둘 수 있는가를 다룬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생각을 향한다. 이 일에는 남김없이 끝맺을 수 있는 형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설계할수록 잔여항이 드러나는 자리도 정확해진다. 장부가 맞지 않으면 얼마가 비는지 한눈에 보인다. 한 계의 돈을 다 거두지 못하면 얼마가 남았는지도 한눈에 보인다. 눈금이 촘촘할수록 새어 나간 것들이 숨을 곳은 없어진다. 계의 기한을 늘리는 일이 그토록 눈에 거슬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닫혀야 할 고리를 환히 열린 채 두는 행동이었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고리가 닫히려면 한 가지가 되어야 한다. 기한이 왔을 때 정말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정말로 바꾸어줄 수 있는지는 다시 다른 일에 달려 있다. 그때 나라에 더 급하게 돈 쓸 곳이 있느냐는 것이다. 영리한 설계에서 가장 무른 부분이었다. 총량의 통제를 오직 발행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행동 하나에 매달아놓았다. 그런데 발행자에게 돈이 모자라면 가장 쉬운 길은 하필 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규칙이 아무리 세밀해도 그것을 지켜야 하는 사람과 가장 깨고 싶어 하는 사람이 같다면, 고리는 단단하지 못하다.
먼저 이 방식을 다른 지역으로 넓히려는 시도가 있었다. 희녕 초년, 조정은 교자 제도를 하동과 섬서에 옮겨보려 했다. 곧 지방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문언박과 장경헌은 모두 촉에서는 시행할 수 있어도 섬서에서는 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얼마 뒤 시도는 중단되었다.
이유는 현실적이었다. 사천에서는 산길과 무거운 짐, 지역 안의 유통을 가로막는 장애 때문에 종이와 철전이 짝을 이루었다. 재정의 구조가 다르고 상품의 구성이 다르고 지역 사정이 다른 곳에서는 그 조합이 성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교자의 성공은 처음부터 어디에나 마찰 없이 복제할 수 있는 만능의 틀이 아니었다.
이 점은 기억해둘 만하다. 좋은 방법은 저절로 퍼진다는, 후대 사람들이 쉽게 하는 말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사료가 보여주는 모습은 다르다. 똑같은 방식이 여기서는 통하는데 저기로 옮기면 통하지 않는다. 반대하는 까닭도 옛것만 지키려 해서가 아니다. 그곳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도는 땅에서 떨어져 나온 도면이 아니다. 구체적인 지형과 구체적인 화폐, 구체적인 세금 제도 위에서 자란다. 옮겨 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저절로 뿌리내리지는 않는다.
이 고리를 정말로 짓눌러 망가뜨린 것은 군사비였다.
희녕 5년, 제22계를 바꿀 때가 다가왔는데 그다음 계의 돈을 벌써 너무 많이 써버렸다. 제25계를 더 찍어 제23계에 난 구멍을 메워야 했다. 두 계가 함께 유통되는 일이 벌어졌다. 『송사』의 이어지는 말은 매섭다. 교자는 많이 내보냈는데 현금은 모자라 값이 지나치게 떨어졌고, 뒤에는 실제 돈이 아예 없어져 이 방식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관 원년에 지난 일을 정리한 기록도 있다. 군사를 써서 황·곽·서녕을 차지한 뒤로 교자를 변경의 군사비를 보태는 데 썼다는 것이다. 천성 때 한 계의 발행량과 견주면 스무 배를 넘어섰고, 값은 갈수록 더 떨어졌다. 묵은 교자를 새 교자로 바꾸는 때에는 옛것 넷을 내야 새것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넷을 주고 하나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손에 쥔 그 종이가 새것으로 바뀌는 순간, 본래 값의 4분의 1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숫자 뒤에는 아주 구체적인 일이 있다. 한 사람이 일 년 내내 애써 교자 몇 관을 모았다. 내년에 새것으로 바꾸어도 그대로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꿀 때가 되자 옛 교자 4관을 내야 새 교자 1관을 준다. 그는 잘못한 일이 없다. 도박하지도 않았고, 빌리지도 않았고, 투기하지도 않았다. 관에서 내놓은 돈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믿었을 뿐이다. 손해는 그렇게 그의 몫이 되었다.
여기서는 일이 분명히 보인다. 지폐가 밑천의 문제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재정에 급히 쓸 돈이 필요해질수록 국가는 그 밑천을 갖추는 일을 조금 더 뒤로 밀어두고 싶어 했을 뿐이다.
최근의 연구는 이 과정을 재정국가가 전진하는 모습으로 읽곤 한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북송 후기에는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이 이미 농업 바깥에서 나왔다. 화폐로 거두는 간접세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남송 전후에는 교환을 요구할 수 있는 신용 수단의 규모가 한때 한 해 조세 수입마저 넘어섰다. 국가 재정이 과세 기반에 기대던 데서 신용에 기대는 쪽으로 옮겨갔다는 설명이다. 다른 연구는 송대 지폐의 작동 원리를 본위, 상환, 전쟁, 물가 상승이라는 네 요소로 묶는다. 초기에는 본위와 상환 원칙을 엄격히 지켜 잘 돌아갔지만, 뒤에는 전쟁 자금 조달이 그 장치를 끊어놓았다. 최고로 늘었을 때에는 실제 발행액이 엄격한 본위 아래 허용되는 발행액의 35.4배에 달했다고 한다.
더 선명한 해석도 있다. 가오충밍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대목을 민간 교자가 아니라 관영 교자가 국가 신용화폐로 바뀌는 순간에서 찾는다. 그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민간 상인들이 어떻게 공동 보증을 섰느냐가 아니다. 재정 지출을 점점 더 많이 교자로 치르게 된 과정이다. 관에서 군량과 말먹이를 사고, 청묘법의 대출 밑천을 대고, 상평창이 곡식을 사들이는 자금을 내면서 교자를 쓰되 그에 맞먹는 철전을 따로 준비하지 않게 되면 종이의 신용이 기대는 곳도 달라진다. 그 신용의 주된 근거는 더 이상 철전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다. 국가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주며 세금으로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관영 교자가 민간 교자보다 더 근대적이라고 본다.
5. 관에 밑천이 없는데 백성이 무엇을 믿겠는가
남송은 이 실험을 더 멀리 밀고 갔다. 동시에 그 실험을 둘러싼 망설임도 더 뚜렷이 남겼다.
소흥 원년, 무주에 군대가 주둔하면서 군사비를 옮길 필요가 생겼다. 배로 갈 수 있는 길은 없고 현금은 너무 무거웠다. 관에서는 먼저 관자를 만들어 군사비를 조달했다. 하지만 곧 불만이 터졌다. 주와 현은 곡식을 사들이는 대금으로 관자를 내밀었는데, 사실상 강제로 떠넘기는 성격을 띠었다. 전매를 맡은 관서는 날마다 요구액의 3분의 1만 갚아주었다. 사람마다 탄식하며 원망했다.
소흥 6년, 조정은 한때 임시 수도에 행재교자무를 설치했다. 곧바로 비판이 쏟아졌다. 그때 나온 한마디는 이 역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조정은 현금을 바탕으로 관자를 마련하려 했는데, 담당 관청이 차츰 본뜻을 잃고 교자로 바꾸어버렸다. 관에 밑천이 없는데 백성이 무엇을 믿겠는가.
쉽게 풀면 이렇다. 관이라는 당신들이 가진 돈도 없는데, 백성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 종이를 받아야 하는가.
얼마 뒤 교자무는 없어졌다. 대신 전매 관서에 현금을 쌓아두고 관자를 찍도록 명령했다.
이 질문이 짚어낸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크다. 지폐가 국가의 권위에 점점 더 기대더라도 준비금이 있는지, 실제로 바꾸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익명으로 오가는 교환의 매개는 넓어졌다. 그러나 누가 책임지며 무엇으로 책임질 것인가라는 물음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민간 발행자를 두고 한 번 드러났던 문제가 이제 국가를 두고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되었다.
부유한 열여섯 집에서 왕조 하나로 바뀌었다. 발행자의 몸집은 몇 배인지 모를 만큼 커졌지만 근본적인 물음은 한 글자도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뒤에서 보증하는가. 무엇을 걸고 보증하는가. 보증에 써야 할 것을 먼저 써버리지는 않을 것인가. 몸집이 크기에 오히려 더 위험한 곳도 있었다. 부잣집이 망하면 소송이라도 할 수 있고 남은 재산을 받아낼 수도 있다. 왕조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증서를 쥔 사람은 고소할 곳조차 없다.
회자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은 소흥 30년 이후의 일이다. 조정은 전단례에게 회자를 만들고 현금을 준비해 성 안팎에서 유통시키도록 했다. 이듬해 회자무는 도다장, 곧 차를 관장하는 관서에 속하게 되었다. 소흥 32년에는 위조를 다스리는 법조문이 정해졌다.
처음에 회자는 양절에서만 통했다. 뒤에는 회남과 절강, 호북, 경서로 퍼졌다. 적지 않은 지역에서 조정에 바치는 돈을 전액 회자로 낼 수 있었고, 장강을 따라 있는 주와 군에서는 현금과 회자를 절반씩 냈다. 민간에서 땅과 집, 말과 소, 배와 수레를 저당 잡히거나 팔 때에도 대금을 모두 회자로 치를 수 있었다.
깊이 들어간 걸음이었다. 회자는 더 이상 재정을 다루는 도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토지와 가축, 운송 수단 같은 큰 재산을 거래하는 데 들어갔다. 가치가 한결 철저하게 통일된 글씨가 찍힌 종이 위로 환산되었다.
효종 때에는 제도화가 더 나아갔다. 200문, 300문, 500문짜리 액면이 새로 생겼다. 건도 4년에는 3년을 한 계로 삼고 한 계의 발행 한도를 1천만 관으로 정했다. 계가 바뀔 때마다 새것을 찍어 옛것을 바꾸어주었다. 묵은 회자가 훼손되어도 관과 백 단위의 액수를 나타내는 글자가 남아 있고 인장을 확인할 수 있으면 교환해주었다. 한 장마다 비용으로 20문을 받았다. 아울러 주와 현이 상납하는 각종 세금은 7할을 현금으로, 3할을 회자로 거두도록 바꾸었다.
계의 기한, 발행 한도, 인장의 확인, 수수료, 세금을 나누어 받는 비율까지 모두 같은 눈금 안에 들어왔다. 흐릿한 신용을 장부에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이었다.
7할은 현금, 3할은 회자로 받는다는 규정에는 특히 깊은 계산이 담겨 있다. 세금을 한 번 거둘 때마다 자기가 찍은 종이를 얼마나 받아줄지 관에서 스스로 정한 것이다. 영리한 수였다. 지폐를 가장 단단히 받치는 것은 창고 안에 현금이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다. 관 자신이 받아주려 하느냐다. 세금을 낼 때 통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면 여전히 돈이다. 그러나 이 수는 약점이기도 했다. 얼마나 받을지는 관 자신이 정한다. 적게 받고 싶어지면 3할을 2할로 고치면 그만이다.
그 뒤 이 눈금은 제 손으로 제 기반을 허물었다.
순희 3년에는 제3계와 제4계의 기한을 각각 3년 늘렸다. 소희 원년에는 제7계와 제8계를 다시 각각 3년 연장했다. 신료들이 곧바로 따져 물었다. 회자는 3년을 한도로 삼는데, 늘리고 또 늘려 9년이 되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신의를 보일 것인가.
정확한 질문이다. 여기서 지폐의 신의란 추상적인 도덕을 가리키지 않는다. 전에 약속한 그 날짜가 정말 유효한가라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다.
계의 기한은 본래 옛 지폐를 회수하고, 화폐 총량을 다시 제도의 리듬 안에 묶어놓기 위해 있었다. 재정에 필요하다고 거듭 기한을 늘리는 순간, 원래의 계량 질서는 스스로를 허물게 된다.
결과는 숫자로 남았다. 경원 원년에는 한 계의 회자 한도가 이미 3천만 관으로 늘어 있었다. 가정 2년에는 회수를 하고도 제11계가 1,360여만 관 남아 있었다. 제12계는 4,700여만 관, 제13계는 5,700여만 관이었다. 조정은 별도로 쌓아둔 재물을 보관하는 봉장고에서 금을 꺼내야 했다. 도첩도 발행했다. 관에서 승려에게 내주는 증명서로, 사고팔 수 있는 문서였다. 소금 전매 수입까지 동원해 회자의 값을 떠받치려 했다.
이 장면은 잠깐 들여다볼 만하다. 처음 세운 것은 반듯한 눈금 한 벌이었다. 3년에 한 계, 한 계에 1천만 관, 기한이 오면 새것으로 교환한다. 그 눈금이 버티지 못하자 국가는 금을 내놓고 승려의 도첩을 내놓고 소금 전매 수입을 내놓아 종이 밑을 받쳤다.
통일된 눈금에서 빠져나간 것들이 다른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밑에 받친 물건들은 하나씩 돈에서 멀어졌다. 금은 그래도 돈이 오래 해오던 일에 속한다. 소금 전매 수입을 쓴다는 것은 한 전매 사업의 장래 수입을 담보로 거는 것이다. 도첩은 더 기묘하다. 관에서 승려의 신분을 인정해주는 문서로, 본래 사고파는 일과는 무관했다. 그런데 돈을 받고 팔 수 있다는 이유로 지폐를 떠받치는 데 끌려왔다. 구축은 버티기 어려워지면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움켜쥔다. 잡는 것들이 잡다해질수록, 원래 세운 눈금이 더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또렷해진다.
회자를 둘러싼 논쟁은 교자 때보다 복잡하다. 전통적인 설명은 돈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전 부족이 회자의 성장을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연구도 있다. 화폐의 총량이 반드시 부족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역 간 분포의 불균형, 현금과 회자를 함께 내게 한 세제, 줄일 수 없는 전쟁 자금의 수요가 문제였다는 설명이다. 교자와 회자의 가장 큰 차이를 더 약한 태환 가능성에서 찾는 연구도 있다. 회자는 금속으로 바꿀 수 없는 불환지폐에 더 가까웠으며, 그래도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세금으로 받아주고, 관에서 돈을 내어 사들이고, 계의 기한에 맞추어 회수하는 제도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자에서 회자로 가는 길은 지폐가 갈수록 근대적으로 바뀌어가는 일방향의 진화가 아니다. 익명화와 표준화, 재정에 기대는 비중은 커졌다. 그러나 준비금과 계의 교체, 세금으로 받아주는지의 문제, 관청의 수납과 시장의 할인이라는 오래된 문제들은 한 번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지폐가 모든 인격적 관계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다. 벗어난 것은 어느 한 상호, 어느 한 무리의 지인에게 매여 있던 관계뿐이다. 곧바로 더 큰 인격에 다시 묶였다. 국가라는 발행자가 약속을 지킬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6.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원나라는 이 실험을 더 급진적인 자리로 밀어붙였다.
중통 원년, 곧 1260년에 쿠빌라이는 견사를 밑바탕으로 삼은 교초를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해 중통원보초도 발행했다. 10문부터 2관까지 열 종류의 액면이 있었으며, 1관은 앞서 만든 교초 1냥과 같고 2관은 은 1냥과 같았다.
원 초기의 새 지폐는 처음부터 은에 분명히 닻을 내린 셈이다. 지폐 2관을 은 1냥으로 바꾼다. 1271년에는 더 나아가 중통초를 유일한 법정통화로 선포했다. 다른 금속화폐들은 명목상 폐지되었다.
송나라의 실험과는 크게 다른 걸음이었다. 국가는 이제 금속과 나란히 지폐를 관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지폐를 가장 중심에 앉히려 했다.
마르코 폴로가 본 것은 이 체제의 가장 눈부신 얼굴이었다. 그는 쿠빌라이가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에 관리들의 서명과 붉은 인장을 찍어 돈을 만들었다고 썼다. 그 지폐로 제국 어느 곳에서나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종이가 극히 가볍다는 데도 놀랐다. 금화 열 닢에 해당하는 지폐를 모아도 금화 한 닢보다 가벼웠다는 것이다. 상인들이 황제에게 금과 은과 보석을 팔면 황제는 종이로 값을 치렀다.
13세기의 베네치아 사람에게는 일종의 연금술처럼 보였을 것이다. 종이 한 장을 내밀어 다른 사람 손에 있던 금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그 놀라움에는 그 자신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을 한 겹이 들어 있다. 고향에서는 돈이 금과 은이었고, 금과 은은 그 자체로 값졌다. 이곳에서는 돈이 종이였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큰 권력이 값진 것이라고 말했기에 값이 생겼다. 그리고 그 권력은 정말로 대도에서 강남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그가 본 것은 하나의 화폐라기보다 통치의 크기였다. 종이 한 장을 수천 리 안에서 두루 통하게 하는 일 자체가 국력을 드러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는 마르코 폴로의 감탄이 제도의 역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서양에서 중국 지폐에 대해 품어온 인상이 그의 지나치게 긍정적인 서술에 자주 좌우되었다고 명시적으로 문제 삼는 연구자도 있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근대 불환지폐 실험에도 숱한 실패와 붕괴, 후퇴가 있었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본 것은 제국 중심부의 가장 장대하고 가장 효율적인 면이었다. 감탄하는 그의 문장에는 재정이 감당할 몫을 앞질러 쓴 일, 지역별로 달리 매겨진 할인, 은의 조용한 귀환, 원 말기의 최종 붕괴가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은은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원나라는 사적인 거래에서 은이 유통되는 것을 금했다. 그런데도 큰 거래, 특히 토지를 사고파는 일은 여전히 은으로 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에서 정한 교환 비율을 보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1260년에는 2관이면 은 1냥이었는데, 1309년에는 25관을 주어야 1냥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산하면 이 기간만 해도 지폐의 연평균 가치 하락률은 약 5퍼센트에 이른다.
여기서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명목상 지폐만이 유일한 법정화폐였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말 중요한 큰 거래를 할 때에는 마음속에 다른 자를 두고 있었다. 그 자는 은이었다. 국가는 자가 하나뿐이라고 선언할 수는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다른 자를 없앨 수는 없다.
사람들이 언제 다른 자를 꺼냈는지도 보아야 한다. 땅을 살 때였다. 날마다 하는 자잘한 거래라면 지폐를 써도 된다. 어차피 금세 다시 쓰고 나갈 돈이다. 하지만 자식과 손자에게 물려줄 큰 재산이라면 생각은 더 멀리 간다.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값어치를 지닐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오래 보관해야 할 가치일수록 사람들은 그 종이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이 구별은 많은 것을 말한다. 지폐는 거래를 매개할 수 있지만 가치를 담아두는 그릇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마음을 쓰는 것은 하필 뒤의 일이다.
어떤 연구는 원대의 지폐사를 세 시기로 나눈다. 1260년부터 1276년까지는 은으로 온전히 바꿀 수 있던 시기다. 1277년부터 1309년까지는 명목상 은으로 바꿀 수 있던 시기다. 1310년부터 원 말기까지는 법으로 통용시키는 불환지폐의 시기다. 첫 시기에는 남는 지폐를 은으로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뒤의 두 시기에는 그 닻이 갈수록 약해지다가, 마침내 법률의 강제만으로 통하는 순수한 지폐로 바뀌었다.
지폐가 단번에 금속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은본위에서 약해진 은본위로, 거기서 다시 법정지폐로 여러 겹의 후퇴를 거쳤다.
7. 돈 위에 찍힌 환산표
명나라는 지폐를 또 다른 극단으로 가져갔다.
홍무 8년, 곧 1375년에 명나라는 대명통행보초를 발행했다. 지금 남아 있는 실물을 보면 크기부터 눈에 들어온다. 세로가 약 34센티미터, 가로가 20여 센티미터였고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에 찍었다. 윗부분에는 대명통행보초라는 큰 글씨가 있고, 가운데에는 가령 일관이라는 액면과 함께 돈꿰미 열 묶음의 그림이 있다. 아래에는 긴 법률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핵심은 이렇다. 조정의 승인을 받아 만들었으며 동전과 함께 쓴다. 위조한 자는 목을 벤다. 신고한 사람에게는 은 250냥을 상으로 주고, 범인의 재산은 몰수한다.
『명회전』에 따르면 지폐 1관은 동전 1천 문, 은 1냥에 해당했다. 4관은 금 1냥으로 쳤다.
환산표 한 벌을 거의 통째로 돈 위에 찍어놓은 셈이었다.
환산표를 돈에 찍는 행동에는 깊은 뜻이 있다. 이 종이는 돈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서로 바꾸어 셈하는 총칙이기도 하다는 선언이다. 1관은 1천 문이고 은 1냥이며, 4관은 금 1냥이다. 전부 그 위에 적혀 있으니 시장에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공통의 척도로 바꾸려는 길에서, 답 자체를 곧바로 인쇄해 내놓은 보기 드문 시도였다. 그러나 시장의 교환 비율은 종이에 적힌 말을 따르지 않는다. 찍어놓은 비율이 굳어 있을수록 실제 비율과 벌어지는 틈도 더 눈에 띈다.
명 초기의 야심은 송이나 원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보초 제도가 자리를 잡은 뒤 금과 은을 쓰는 거래, 물물교환을 모두 금했다. 동전도 유통에서 거두어들였고, 한때는 사용을 금하기까지 했다. 보초 쪽에 정당한 화폐의 자리를 몰아주려는 목표였다.
앞선 어느 시도보다 철저하게 모든 것을 하나의 척도 안에 넣으려 했다. 국가는 금과 은, 동전, 온갖 상품의 교환을 미리 찍어놓은 액면과 법령 속으로 전부 환산해 넣으려 했다. 여기서 지폐는 시장의 매개물만이 아니다. 모든 지불 수단을 하나의 가격 체계로 눌러 넣는 국가의 도구이기도 했다.
명대의 문제도 바로 이 자리에서 터졌다.
어떤 연구는 명나라의 재정 운영이 잘못되었고, 특히 송나라처럼 지폐로 세금을 효과적으로 거두어 지폐를 회수하지 못한 탓에 보초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고 정리한다. 15세기 초에는 명의 지폐가 이미 대체로 제 구실을 잃었다. 뒤이어 중국 시장은 은괴를 기준으로 삼는 체계로 옮겨갔고, 명의 재정 계산과 조세도 차츰 은을 바탕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연구는 명나라를, 중국의 전근대 불환지폐 실험이 결국 유럽의 근대 초기보다 더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선명한 사례로 본다. 1430년 무렵에는 국가도 지폐를 실제 유통의 중심으로 붙들어두려는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명의 지폐가 실패한 까닭을 좀 더 나누어보면, 적어도 세 가지 설명이 나란히 있다.
하나는 재정을 조직하는 근본 질서의 변화를 중시한다. 송·원대에 지폐를 받쳐준 것은 상업세와 간접세에 기대는, 화폐화가 깊이 진행된 재정 구조였다. 명 초기의 재정은 그보다 현물과 부역, 강제 동원에 많이 의존했다. 국가는 지폐를 내보내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회수와 조세를 통한 흡수에는 힘이 약했다. 지폐가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설계의 결함을 강조한다. 보초 제도는 처음부터 재정의 압박을 덜어주려고 만들어졌다. 화폐가 재정의 도구가 되면서, 지나친 발행은 거의 제도 안에서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더 통속적이지만 아주 틀린 설명은 아니다. 은을 금하고 동전을 금하고 물물교환을 강제로 막는다고 해서, 더 믿을 만한 것에 가치를 저장하려는 시장의 선호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명목상의 법정화폐와 실제 결제 수단이 더 빨리 갈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 설명에는 저마다 일리가 있다. 함께 놓으면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 너무 많이 내보낸 것이 한쪽 문제이고,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 다른 쪽 문제이며, 너무 엄하게 막은 것이 세 번째 문제다. 발행, 회수, 금지, 세 군데가 모두 어긋났다. 하나만 떼어놓으면 반드시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셋이 포개지면 버틸 수 없다. 어느 하나만 범인으로 지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도가 스스로에게 요구한 일이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다.
명대의 붕괴는 같은 일을 다시 보여주었다.
금속에서 가치를 떼어냈다고 해서 가치가 그 뒤로 평판에서까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발행자의 명성, 재정 능력, 법 집행의 신빙성에 가치의 무게가 더 집중된다. 국가가 세금과 태환, 관의 수납과 지출을 통해 이 종이가 돌아오는 고리를 계속 닫아주지 못하면, 시장은 가치를 다시 은이나 동전, 그 밖에 더 믿을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겨놓는다.
명나라가 뒤에 은본위로 돌아선 것도 더 앞선 것이 자연스럽게 승리한 결과가 아니다. 대규모 지폐 실험이 실패한 뒤, 사회가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더 잘 지킬 수 있는 다른 계산과 가치 저장의 체계로 물러난 일이었다.
8. 금속을 벗겨낸 뒤
이 천 년을 한데 놓고 보면 가장 좋은 정리는 후대의 이론에 있지 않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세 마디에 있다.
첫째는 여중의 말이다. 돈으로 종이를 통하게 하고 종이로 돈의 흐름을 조절하여, 자식과 어미가 고르게 함께 통한다. 종이와 돈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교체가 아니라 배합이었다.
둘째는 소흥 6년에 나온 물음이다. 관에 밑천이 없는데 백성이 무엇을 믿겠는가. 밑천이 없으면 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셋째는 반대 뜻이면서도 똑같이 참인 말이다. 관청에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으면 백성의 마음에도 저절로 의심이 없어진다. 국가가 받아주려 해야 민간도 믿으려 한다.
세 마디를 합치면 이 일의 어려움이 모두 담긴다. 지폐가 서 있으려면 한쪽에는 밑천이 있어야 하고, 다른 쪽에는 받아주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쪽은 물건이고, 다른 쪽은 신뢰다.
흥미로운 것은 세 말 사이에도 긴장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밑천이 없으면 믿음도 없다고 한다. 셋째는 관에서 받아주기만 하면 사람들이 믿는다고 한다. 하나는 창고 안에 뿌리를 내리고, 다른 하나는 관청의 태도에 뿌리를 내린다. 첫째는 그 사이에 서서 둘을 고르게 배합해야 하며 어느 쪽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송나라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200년을 다투었다. 다툼 끝에 남은 세 입장은 뒤의 모든 화폐 이론이 다루어야 할 세 자리를 고스란히 짚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사실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앞서 복식부기를 이야기할 때 자는 장부 쓰기의 편의를 위해 스스로 몸을 벗었다. 실제로 유통되지 않는 순수한 수가 되었다. 교자에 이르면 돌아다니는 돈이 금속을 벗는다.
금속을 벗은 뒤에 벌어진 일은 돈이 사람을 덜 필요로 하게 된 것이 아니다. 더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동전 한 닢은 누가 쥐고 있든 그 자체가 구리 조각이다. 값어치의 절반은 자기 몸에 놓여 있다. 종이는 그렇지 않다. 종이의 가치는 100퍼센트 다른 사람에게 걸려 있다. 발행한 사람이 인정할 것인가. 관에서 받을 것인가. 내년에도 바꾸어줄 것인가.
그러므로 지폐에서는 두 방향의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유통은 더 익명적이 된다. 종이 한 장은 누구나 쥘 수 있으며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는다. 그러나 뿌리는 더 인격적이 된다. 그 약속 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금속을 덜어낸 만큼 명성 위에 얹히는 무게는 늘어난다. 이쪽이 가벼워지면 저쪽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지폐를 두고 화폐의 역사에서 인격성이 퇴장하기 시작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거꾸로 말한 것에 가까울 것이다. 오히려 인격성이 처음으로 무대 맨 앞에 밀려 나온 순간과 닮았다. 전에는 발행자를 믿는 일의 무게를 금속도 절반쯤 함께 짊어졌다. 지폐부터는 그 믿음 혼자 전부를 버텨야 한다. 버틸 수 있는지는 이제 땅속에 광물이 얼마나 묻혀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어느 정권이 돈이 가장 아쉬운 해에도 몇 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려 하느냐에 달려 있다.
잔여항도 이곳에서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앞선 글들에서 장부 밖으로 넘친 것은 잴 수 없는 것이거나, 재서는 안 되는 것이거나, 재기는 했지만 정작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 넘쳐 나오는 것은 또 하나의 자다.
원나라는 지폐가 유일한 법정화폐이며 다른 것은 모두 무효라고 선포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땅을 사고파는 것처럼 정말 중요한 거래에서는 마음속으로 은을 써서 계산했다. 명나라는 금과 은, 동전과 물물교환을 금하고 환산표를 지폐에 직접 찍었다. 그런데 15세기에는 오히려 은이 다시 사회 전체의 진짜 척도가 되었다.
구축은 자기가 유일한 자라고 선언할 수 있다. 사람들 마음속에 따로 남겨둔 자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 여분의 자는 평소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구축 자신이 믿을 수 없게 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떠오른다. 바깥에서 쳐들어와 구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줄곧 그곳에 있었다. 구축 스스로 신의를 저버렸기에 다시 앞으로 불려 나온 것이다.
금지령이 번번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도 이로써 설명된다. 금지령이 하는 일은 늘 같다. 다른 자를 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자를 찾는 까닭은 다른 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손에 든 자가 정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지령은 대체물을 치울 수 있어도 대체물을 찾게 하는 이유는 치우지 못한다. 그 이유가 남아 있는 한, 대체물은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대가가 누구에게 돌아갔는지는 앞의 대목들에 이미 적혀 있다. 민간 교자에 환급 요구가 몰려 한 관에 칠팔백 문밖에 돌려받지 못했을 때, 잃은 사람은 증서를 들고 온 사람이었다. 교자를 넷 대 하나로 바꾸었을 때, 잃은 사람은 묵은 교자를 쥐고 있던 사람이었다. 회자의 계를 늘리고 또 늘렸을 때, 잃은 사람은 3년이라는 약속을 믿었던 사람이었다. 명의 지폐 값이 떨어졌을 때, 잃은 사람은 그 지폐를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발행자는 남의 신뢰를 먼저 써버릴 수 있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언제나 맨 마지막에 종이를 쥔 사람이다.
그 종이에는 이 일을 적는 칸이 한 번도 없었다.
교자 한 장에는 액면이 있고 계의 번호가 있고 상호와 표지가 있다. 위조한 자의 벌이 적혀 있으며 한 관마다 품과 먹값을 얼마나 뗄지도 적혀 있다. 무엇이든 적었지만 한 칸만은 없다. 기한이 되어도 바꾸어줄 수 없으면 누가 손해를 감당하는가. 그 칸이 없는 까닭은 잊었기 때문이 아니다. 적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적는 순간 이 종이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자기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 종이는 그날로 돈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종이 바깥에 남을 수밖에 없다. 맨 마지막에 그것을 손에 쥔 사람에게 남겨진다.
셈은 아직 맞지 않는다. 장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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