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쉬면 모두가 기다린다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故曰:为道者非以明民也,将以愚之也。民之难治也,以其知也。故以知知邦,邦之贼也;以不知知邦,邦之德也。恒知此两者,亦稽式也。恒知稽式,此谓玄德。玄德深矣远矣,与物反矣,乃至大顺。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답이 너무 빠른 사람 곁에서
어떤 상담에도 곧바로 답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 계획을 보면 문제를 찾고 누군가 막히면 한마디로 길을 연다. 주변 사람은 도움을 받고 일도 분명히 나아간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 새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그 사람을 바라본다.
그가 휴가를 가면 일이 느려진다. 돌아온 사람은 아직도 맡길 수 없느냐고 생각하며 더 많은 일을 가져온다. 주변 사람들은 더 기다리게 된다. 뛰어난 능력이 어느새 모두의 의존을 떠받치는 구조가 된다.
도움을 받는 쪽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다른 감각도 알 것이다. 내 생각이 문장이 되기 전에 선배가 답하고 작업까지 마친다. 정답은 쌓이는데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제65장에는 ‘非以明民也,將以愚之也’라는 어려운 구절이 있다. 지혜는 사람을 자라게 하는가, 아니면 다루기 쉽게 만드는가. 이 글은 그 물음을 먼저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돌려 보고 싶다.
2. 어려운 문장을 없애지 않고 읽기
통상적인 문법으로 ‘明民’과 ‘愚之’를 백성을 밝게 함과 백성을 어리석게 함으로 읽을 수 있다. 지(之)가 백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문법상 실제 가능성이다. 우민적 생각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이유로 옛 해석들이 모두 주어를 잘못 읽었다고 정리할 수는 없다.
고주에도 폭이 있다. 왕필은 밝음을 술수와 교묘한 거짓에 연결하고, 어리석음을 참됨을 지키는 소박함으로 설명한다. 그래도 누가 다른 사람이 알아도 될 것을 결정하느냐는 정치적 문제는 남는다. 따뜻한 표현으로 바꾼다고 고대의 가부장적 통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연재가 택하는 것은 그것과 구분되는 철학적 다시 읽기다. 제20장의 ‘我愚人之心也哉’, 제10장의 밝게 알면서도 앎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를 연결하며, 질문을 도를 행하는 사람 자신에게 돌린다. 상대의 밝음을 줄이기 전에, 나만 비추는 사람이 되려는 자세를 내려놓을 수는 없을까.
백성을 어리석게 한다는 통상적인 사동적 해석에서도 문법상 주어는 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차이는 주어가 아니라 소박함을 요구받는 쪽이 통치자 자신인지, 그가 다스리는 백성인지에 있다. 여기서 제안하는 독해는 책 안의 다른 목소리와 대화하며 오늘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 구분이 있으면 고전의 어려움을 숨기지 않고도 고전에서 더 나은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비판하려는 것은 지식도 가르침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이해가 다른 사람이 이해를 키울 자리까지 전부 채우는 일이다. 상대를 낮추는 대신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먼저 공간을 내어 주는 방향으로 읽어 보자는 것이다.
3.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일 때
‘民之難治也,以其知也.’ 채택 본문에는 지(知)가 있고 통행본에는 ‘智多’가 있다. 하지만 한 글자가 적다는 사실만으로 고대의 정치 문장이 현대적 자율성을 곧바로 찬양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문만으로 전승자의 의도를 판정할 수도 없다.
오늘의 생활로 가져오면 사람이 물건처럼 배치되지 않는 것은 그 자신도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루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은 내가 답하기 싫은 질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절차를 곧장 따르지 않는 것은 다른 조건을 보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신입에게 모든 절차를 주면 첫 작업은 빨리 끝난다. 그러나 조건이 달라지면 어디를 바꾸어도 되는지 모른다. 다른 신입에게는 이유를 말하게 하고 안전한 범위에서 시도할 기회를 준다. 시간이 더 걸려도 스스로 판단하는 경로가 자랄 수 있다.
그렇다고 기초를 가르치지 않은 채 헤매게 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잘못을 일부러 겪게 해서도 안 된다. 가르친 뒤 상대가 이전보다 잘 이해하고 결정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지시를 기다리는 데 더 익숙해졌을 뿐인가. 그 차이를 보는 것이다.
앞 장의 ‘輔万物之自然’을 사람 사이에 옮기면, 영원히 내가 상대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뿌리내릴 조건을 돕는 일이 된다.
4. 더 잘 고쳐 주면서 배울 기회를 없애다
‘以知知邦,邦之賊也。以不知知邦,邦之德也.’ 적(賊)에는 해친다는 뜻이 있다. 이 연재는 그 해를 상대가 스스로 알아볼 기회를 가져가는 일로 생각한다. 적이라는 글자 하나가 오직 그것만 뜻한다는 풀이가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 적용한 비유다.
선배가 신입의 결과물을 보고 완성도가 아쉬워 통째로 다시 만든다. 제출물은 좋아졌다. 하지만 신입에게 보이는 것은 자기 버전이 사라진 사실뿐이다. 어디가 문제였고 무엇을 생각하며 바꾸었는지 모르면 다음에도 같은 곳에서 막힌다. 매번 그렇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도 결국 교체될 뿐이라고 배울지 모른다.
경험 있는 사람이 직접 고치는 일 자체는 필요할 때가 있다. 시간이 없거나 위험이 큰 경우도 있다. 차이는 그다음에 있다. 이유를 설명하는가, 다음 부분을 본인에게 돌려주는가, 이번의 개입을 다음번 독립의 발판으로 만드는가. 대신 끝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실리콘밸리에서 내가 만난, 사람을 잘 키우는 이들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을 줄 알았다. 그 질문의 힘은 이미 아는 것을 일부러 숨기고 상대에게 맞혀 보라고 하는 데 있지 않다. 상대의 판단 과정을 실제로 듣고 다른 답도 검토하는 데 있다.
‘以不知’를 실천한다면 무능한 척하거나 정보를 쥐고 신비감을 유지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이 부분은 경험이 있지만 저 부분은 나도 아직 모른다고 정직하게 나누어 말한다. 지식을 전하는 일과 모든 답을 독점하지 않는 일은 함께할 수 있다.
또 채택 본문의 ‘邦之德’에 비해 통행본에는 ‘國之福’이 있다. 덕이라는 글자는 이 연재가 관계에서 자라는 능력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러나 복도 단순한 요행이 아니라 나라에 생기는 좋은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좋은 판본과 나쁜 판본이라는 이야기로 끝내기보다, 지금의 실천이 누구의 능력을 늘리는지 물어야 한다.
5. 당장 매끄러운 일과 오래 이어지는 일
‘恒知此兩者,亦稽式也.’ 둘을 계속 분별하는 것이 참조할 틀이 된다. 글은 그것을 현덕이라 부르고 ‘深矣遠矣,與物反矣,乃至大順’으로 이어 간다.
여기서 하나의 잣대를 얻을 수 있다. 내가 도운 뒤 상대는 더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아니면 더 나를 떠날 수 없게 되었는가. 선의로 시간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답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깊음과 멂을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렵다는 뜻에만 가둘 필요는 없다. 작용이 곧바로 눈에 띄지 않고 멀리 이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처리하면 오늘은 매끄럽다. 휴가 중 아무도 이어받지 못할 때 비로소 그 매끄러움의 약함이 보인다.
판단을 조금씩 돌려주면 처음에는 느리고 의견도 고르지 않다. 그러나 정보와 경계와 지원이 있다면 그 불균일함은 참여의 시작일 수 있다. 언젠가 예전에 나를 기다리던 사람이 내가 없어도 일을 해 나간다. 그때 다른 종류의 순조로움이 나타난다.
이는 제41장의 나아가는 길이 물러나는 듯 보인다는 감각과도 통한다. 다만 혼란 자체를 깊이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더 무력해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지원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 일부러 이상하게 하는 것이 현덕은 아니다.
6. 안다는 말을 다리로 사용하기
다음에 누군가 상담하러 오면 지금 필요한 것이 분명한 답인지, 이유의 설명인지, 생각을 끝까지 말할 시간인지 살펴보자. 셋 모두 도움이 될 수 있다. 답을 주지 않는 것까지 새 교리로 만들 필요는 없다.
직접 보여 준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도 이야기한다. 시도하게 한다면 가능한 범위와 막혔을 때 돌아올 곳을 알려 준다.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며, 실패의 책임을 상대에게만 맡기는 일도 아니다.
나와 다른 방법을 볼 때 다름과 틀림을 곧바로 포개지 않는다. 실제 결과에 관련된 기준도 있지만 내 취향에 불과한 부분도 있다. 이를 구분하면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늘고 상대도 매번 내 기분을 추측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잣대는 자신에게도 쓸 수 있다. 이제 다 알았다는 신분을 영구히 가지려 하면 새 경험이 들어올 자리를 잃는다. 풀리지 않은 질문을 인정하는 것은 쌓아 온 능력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능력이 닫힌 문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지식은 다리가 될 수 있다. 먼저 건넌 사람이 돌아와 건너는 법을 설명한다. 뒤따르는 사람을 영원히 자기 앞에 멈춰 세우는 검문소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7. 계속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제64장의 돕되 대신하지 않는다는 물음이 여기서는 배움과 이끎의 관계로 들어왔다. 가볍게 방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이 능력을 익히도록 돕는 데에는 대신 끝내는 것보다 더 많은 인내가 필요할 때도 있다.
제10장과 제51장의 현덕에도 도움을 소유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울림이 있었다. 여기서는 경험이 길을 여는지, 아니면 모두가 돌아가야 하는 벽이 되는지를 묻게 된다.
제66장은 강과 바다를 통해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기 무게를 어떻게 다룰지 읽는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것도 같은 작은 움직임이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대신, 곁의 사람들이 조금씩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내 일은 중요하다. 그 중요함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함께 일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방법이 더 많아졌다는 사실에도 있다.
자세한 주석과 본문 비교는 제8논고와 Zenodo 판을 참고할 수 있다. 앞선 논고: 제1편, 제2편, 제3편, 제4편, 제5편, 제6편, 제7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