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고도 여지는 남는다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大成若缺,其用不弊。大盈若冲,其用不穷。大直如诎,大巧如拙,大赢如溶。躁胜寒,静胜炅。清静可以为天下正。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훌륭함의 얼굴을 하지 않은 것
숙련된 사람의 일이 너무 평범해 보일 때가 있다. 중요한 순간에 손이 망설이지 않고 군더더기 동작이 없으며, 끝나고 나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게 당연했던 것 같다. 보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요란하게 애쓰는 쪽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것이면 좋아 보여야 한다는 기대가 있다. 완성이라면 흠이 없어야 하고, 충만하다면 빈틈이 없어야 하며, 정직하다면 곧고, 능숙하다면 현란하고, 승리라면 눈부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45장은 그 기대 앞에 다섯 문장을 놓는다. 이 연재가 채택한 본문은 ‘大成若缺,大盈若冲,大直如诎,大巧如拙,大赢如溶’이다. 큰 완성은 모자란 듯하고, 큰 충만함은 빈 듯하며, 큰 곧음은 굽은 듯하고, 큰 솜씨는 서툰 듯하며, 큰 이김은 녹아드는 듯하다.
앞서 읽은 41장의 대기면성이 여기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못 만든 것일수록 사실은 더 뛰어나다며 평가를 뒤집으려는 것은 아니다. 완성의 표정을 짓는지보다 실제로 쓰이고, 달라진 사정에 응답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장이다.
2. 완성은 고칠 일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大成若缺,其用不弊.’ 큰 완성은 모자란 듯하고 그 쓰임은 해지지 않는다.
완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일 수 있다. 하나는 맡은 일을 마치고 쓸 수 있는 것을 건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제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앞의 일은 필요하다. 뒤의 선언은 완성한 것이 현실과 다시 만날 입구까지 막아 버릴 수 있다.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하자. 약속한 기능을 하고 안전하게 쓸 수 있으며 사용자에게 건넬 수 있다. 그때 완성을 축하해도 된다. 그런데 사용되는 동안 만드는 사람이 몰랐던 불편이 드러난다. 사정이 바뀌어 새로운 쓰임이 필요해진다. 그때 고칠 길을 남겨 두었다고 첫 완성이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완벽하다고 말한 체면 때문에 문제를 알리는 사람을 적으로 삼으면 겉으로는 완성을 지켜도 사용하는 사람의 생활에서는 멀어진다. 약결을 일부러 결함을 남기라는 지시가 아니라 완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태도로 읽으면 이 차이가 보인다.
사람도 그렇다. 성숙한 사람이 그 부분은 몰랐다고 말하면 믿음직하지 못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알아볼 수 있는 편이 아는 척을 계속하는 것보다 믿을 만하다. 경험을 갖되 그 경험이 닿지 않는 자리가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용불폐는 어떤 물건이든 계속 업데이트하면 영원히 망가지지 않는다는 기술적 보장이 아니다. 쓰임을 오래 보존하려면 실제 손질과 수정이 필요하다. 완성과 여지를 반대편에 놓지 않고 완성했기 때문에 시작되는 일을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모자란 듯하다는 말은 납품하지 않는 핑계가 아니라 건넨 뒤에도 책임지는 모습이 된다.
3. 가득한 사람에게도 받을 자리가 있다
‘大盈若冲,其用不穷.’ 크게 가득 찬 것은 빈 듯하고 그 쓰임은 다하지 않는다. 여기의 충은 비어 있음과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4장의 도의 빈자리와 5장의 풀무가 이어진다.
풀무 속이 비어 있는 것은 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 공간이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잔도 속까지 재료로 꽉 차 있으면 물을 받을 수 없다. 사람에게 비유를 옮기면 지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받을 자리를 남기라는 뜻이 된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 물었는데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조건이냐고 되묻는다. 지식이 있기 때문에 조건에 따른 차이를 아는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눈앞의 사정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로 쓰지 않는다.
반대로 배울 만큼 배웠다고 여기는 사람은 새로운 말을 익숙한 분류에 곧 넣는다. 낯선 사실도 예전에 알던 것의 사소한 예외로 처리한다. 지식이 많은 사실보다 지식이 바뀔 자리를 잃는 일이 문제다.
빈 잔의 비유는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계속 말하라는 뜻이 아니다. 경험과 기술은 소중한 내용물이다. 그것을 쓰면서도 더할 것과 고칠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수 있다. 44장의 지족도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칸을 가득 메우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 이어진다.
빈칸이 있다고 저절로 배우는 것은 아니다. 듣고 시험하고 틀린 것을 바로잡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래도 이미 꽉 찼으니 들일 것이 없다고 정하지 않는 태도가 그 수고를 할 출발점이 된다.
4. 굽어 보이는 곧음, 드러나지 않는 솜씨, 녹아드는 이김
‘大直如诎.’ 큰 곧음은 굽은 듯하다. 정직하다는 것이 언제나 같은 표현과 같은 순서를 고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불편한 사실을 알려야 한다면 알릴 책임은 지킨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이해할 순서를 생각하고 말을 고르고 확인할 시간을 둘 수 있다. 방법은 돌아가는 듯해도 사실을 숨기지 않는 방향은 지킨다. 43장의 물 이미지도 의도를 잃지 않고 방법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융통성을 핑계로 부정을 눈감거나 경계를 흐리는 것까지 큰 곧음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大巧如拙.’ 큰 솜씨는 서툰 듯하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보이게 하는 것과 그 복잡함을 감당해 쓰기 쉽게 만드는 것은 다르다. 잘 만든 도구는 쓰는 사람이 구조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숙련된 장인은 필요 없는 볼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27장의 잘 다니는 이가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이미지와도 가깝다.
그러나 연습 부족과 숙련의 조용함을 겉모습만으로 구별할 수는 없다. 서툴러 보이는 것이 기술의 증거가 아니라, 일이 정말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움직임 뒤에는 반복과 실패와 수정이 있다. 능숙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능숙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大赢如溶.’ 이 연재는 통행본의 익숙한 ‘大辩若讷’ 대신 이 문장을 채택한다. 필자의 본문 선택이며 모든 사본 전승에서 한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바뀌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여기서 큰 이김은 대립 자체가 녹는 듯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현대적 의미를 끌어내는 것도 나의 해석이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던 두 부서가 업무 인계 방식을 다시 만든다고 하자. 한쪽이 굴복해서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같은 혼란을 반복하지 않을 절차가 생긴다. 누가 이겼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성과는 남는다. 승자의 얼굴을 크게 내걸지 않는 이김이다.
42장의 강량에 대한 경고와 뒤에 나올 68장의 선승적자불여도 이런 물음과 만난다. 경쟁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경기에는 승패가 있고 공정한 경쟁이 실력을 키우기도 한다. 다만 상대의 굴욕까지 목표에 더하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일이 있다.
녹아야 하는 것이 피해자의 목소리나 책임의 소재는 아니다. 화해를 위해 상처받은 사람이 사라지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책임을 분명히 하면서 대립을 다시 만드는 조건을 줄여 보자는 것이다. 자기를 지우는 일보다 승자임을 영원히 연기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읽고 싶다.
5. 움직일 때와 가라앉을 때
‘躁胜寒,静胜炅.’ 움직임은 추위에, 고요함은 열기에 대응한다. 큰 역설들 뒤에 아주 익숙한 몸의 감각이 나온다.
추울 때 손발을 움직이면 온기를 느낀다. 더운 가운데 바삐 움직이고 있다면 잠시 움직임을 줄여 편해질 수도 있다. 같은 방법이 어느 상황에서나 맞는 것은 아니라고 읽을 수 있다. 움직임에는 움직임의 쓰임이 있고 고요함에는 고요함의 쓰임이 있다.
물론 쉬기만 하면 위험한 더위가 해결된다는 의료 조언은 아니다. 몸을 계속 움직이면 어떤 추위도 견딘다는 뜻도 아니다. 필요한 보호와 대응은 따로 있다. 생활의 관찰에서 얻을 것은 상황에 따라 작용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청정이 나온다고 해서 움직이는 일을 일률적으로 부정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 초조해서 움직이는가, 실제로 행동이 필요해서 움직이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조용한가, 상황을 본 뒤 불필요한 혼란을 보태지 않아서 조용한가? 이 짧은 대조는 그 차이를 볼 준비를 한다.
6. 청정은 방치와 다르다
‘清静可以为天下正.’ 맑고 고요함은 천하의 바름이 될 수 있다. 이 말은 37장의 천지장자정과 호응한다. 내가 모든 것을 움직여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조금 떨어져 다른 존재가 작용할 여지를 지킨다.
두 문장을 연결하면 세계의 펼쳐짐과 그것을 돌보는 사람의 태도가 함께 보인다. 만물은 우리가 매번 지시하지 않아도 달라진다. 한편 사람이 권한을 갖는 자리에서는 그 변화를 자기 뜻대로만 묶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청정이라는 말에는 이런 정치적인 무게도 있다.
하지만 다스리는 사람이 차분하면 사회가 자동으로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원이 모자란 곳에는 자원이 필요하다. 부당한 대우가 있는 곳에는 그것을 막을 규칙과 이의를 제기할 통로와 실제 개입이 필요하다. 어려운 사람에게 자연에 맡기자고 말해도 그를 받칠 조건이 생기지는 않는다.
좋은 책임자는 구성원의 모든 움직임을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역할과 권한, 정보와 시간을 마련하고 문제가 생기면 맡아야 한다. 자기 불안을 달래기 위한 잦은 간섭은 줄이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실제 지원은 늘린다. 그런 고요함이라면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정도 그렇다. 어른의 불안과 통제가 줄면 아이가 자랄 공간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식사와 휴식, 안전과 관심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계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위험할 때 보호하고, 어려우면 의논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청정은 돌봄을 그만둔 집의 정적보다 안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의 고요함이었으면 한다.
자기 생활에도 이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조급한 마음대로 일정을 늘리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본다. 필요한 일에는 움직이고, 모든 결과를 내 공이나 실패로 끌어안지는 않는다. 청정은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이 아니라 불필요한 지배를 덜고 필요한 응답을 고르기 위한 차분함이다.
7. 모자라 보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다섯 문장은 훌륭해 보이기만을 바라는 삶의 긴장을 푼다. 모자라 보여도 쓰임이 있고, 비어 보여도 받을 능력이 있으며, 굽어 보여도 방향을 잃지 않고, 서툴러 보여도 일이 제대로 전달되며, 승자가 눈에 띄지 않아도 성과는 남는다.
그렇다고 자기 결함을 전부 위대함의 증거로 바꾸지는 말자. 기한을 지키지 못하는 일, 설명이 부족한 일, 연습이 모자란 일은 실제로 고쳐야 할 수 있다. 외양에 속지 않는다는 것은 결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겉치레 대신 쓰임과 책임을 확인한다는 뜻이다.
일 하나를 마쳤다면 무엇을 해냈는지 인정하자. 그러면서 고칠 자리를 남긴다. 무언가 배웠다면 그것을 쓴다. 그러면서 모르는 것이 왔을 때 앉을 자리를 비워 둔다. 중요한 것에 성실하되 말하는 방법과 진행 순서는 궁리할 수 있다. 잘하고 싶다면 연습하고, 잘해 보이기만을 위한 움직임은 줄여 본다.
이겼을 때에는 무엇을 얻고 싶었는지 돌아본다. 문제가 풀렸다면 상대가 졌다는 사실을 몇 번씩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피해와 책임이 있다면 지우지 않고 다룬다. 그런 다음 같은 싸움을 다시 할 필요가 없는 조건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한다.
초조함이 올라오면 청정으로 돌아온다. 지금 행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불안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인가? 필요한 행동과 불필요한 분주함을 나누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 질문을 갖는 일이 하나의 여지가 된다.
아직 모자라다는 말은 배울 곳을 가리킬 수도 있고 끊임없이 자신을 꾸짖는 버릇이 될 수도 있다. 이 장을 뒤의 버릇에 보태고 싶지는 않다. 된 것은 받아들이고 모자란 것은 구체적으로 다룬다. 완성과 다음 이야기는 함께 가질 수 있다.
8. 아홉 장을 다시 걸어 본다
45장은 다섯 번째 논고가 다루는 37장부터 45장까지의 결말이다. 이 아홉 장은 도가 생활과 관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여러 방향에서 살폈다. 끝에서 한 장씩 다시 걸어 보자.
37장에서는 모든 것을 내 설계에 맞추지 않아도 존재들이 달라지고 자란다는 것을 보았다. 남이 움직일 공간을 남기는 일은 지탱할 조건을 거두는 일이 아니다. 열린 질서는 방치와 다르다.
38장에서는 덕이라는 이름과 실제 행동을 구별했다. 정직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지만 가치를 말하고 연습하는 일이 거짓인 것도 아니다. 약속이 매일의 생활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가 중요했다.
39장에서는 하나의 존재를 지탱하는 관계를 보았다. 수레 부품의 목록이 수레의 작용을 다 설명하지 않듯 성과 목록도 한 사람의 생을 다 말하지 못한다. 쥔 손을 푸는 것은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것을 홀로 완벽한 물건으로 만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40장은 되돌아감과 유연함을 말한다. 방법이 목적을 해치기 시작하면 방향을 바꿔도 된다. 경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고칠 수 있게 둔다. 성숙한 사람도 계속 응답할 수 있다.
41장의 대기면성은 삶을 완성 대기 시간으로 만들지 않는 독법으로 이어졌다. 개별 일은 마쳐도 된다. 한 사람 전체를 마지막 용도에 맞춰 구워 굳힐 필요는 없다. 성숙과 그 뒤의 성장은 반대말이 아니다.
42장에서는 만물의 펼쳐짐과 강량의 경고를 함께 놓았다. 힘은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을 함께 받아들이고 더하는 일과 덜어 내는 일을 모두 선택할 폭이 있다.
43장은 더 단단해지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행동을 찾았다. 물의 비유는 만능의 승리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래도 듣고, 방법을 바꾸고, 도움을 구하고, 필요하면 떠나는 것을 행동의 선택지로 돌려준다.
44장에서는 무엇을 얻으려고 몸과 삶을 내주는지 물었다. 지족과 지지는 필요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바람 속으로 자기 생활을 되찾아 오고 지속할 조건을 지키는 작용이었다.
그리고 45장은 완성과 충만함 안에도 여지를 남긴다. 이루고도 고칠 수 있다. 풍부하게 알면서도 들을 수 있다. 청정은 힘을 쓰지 않겠다는 맹세보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지 잘 살피는 차분함이 된다.
아홉 장을 잇는 것은 모든 것이 저절로 좋아진다는 보장이 아니다. 간판을 보존하는 것보다 실제 작용을, 지배하는 것보다 응답하는 일을, 전부 쥐는 것보다 지탱할 조건을 소중히 여기는 방향이다. 그 방향에도 어려운 판단과 수고는 남는다. 그래도 나를 끝없이 입증하는 것 말고 다른 삶의 길이 열린다.
대성약결. 대영약충. 대직여굴. 대교여졸. 대영여용. 다음에 아직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지면 이 다섯 문장을 떠올려 보자. 겉모습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걸어온 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음에 필요한 일을 하나 찾는다. 이루고 나서도 삶에는 다음 이야기가 있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