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N | 中文 | 繁體 | 日本語 | Français | Deutsch | Español | 한국어
← 대지 도덕경 해설
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41장 · 총 81장

대기만성이라는 위로 너머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上士闻道,堇而行之;中士闻道,若存若亡;下士闻道,大笑之。弗笑不足以为道。是以建言有之曰:明道如费,进道如退,夷道如类。上德如谷,大白如辱,广德如不足,建德如偷,质真如渝。大方无隅,大器免成,大音希声,天象无形,道褒无名。夫唯道善始且善成。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언젠가 이루어진다는 약속

“대기만성이잖아.” 남보다 늦는다고 느낄 때 듣고 싶은 말이다. 취업이 늦어졌을 때, 오래 준비한 일이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할 때, 나이만 먹는 것 같을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 주면 조금은 숨이 놓인다. 큰 그릇은 오래 걸리는 법이니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그 위로를 굳이 빼앗을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말이 마음속에 그려 놓는 결승선은 살펴볼 만하다. 지금은 덜 된 사람이고 언젠가는 다 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날 성공을 인정받으면 오늘의 초조함도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현재의 삶 전체가 완성을 기다리는 대기실이 되기도 한다.

이 연재가 41장에서 채택한 문장은 ‘대기면성(大器免成)’이다. 익숙한 만(晚) 대신 면(免)이 놓여 있다. 두 글자의 관계에는 논쟁이 있고 음의 연관성을 보는 견해도 있다. 글자 하나로 통행본의 뜻이 완전히 뒤집혔다거나 원뜻이 최종 확정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면성을 ‘마지막 틀에 굳어지는 일을 면한다’는 방향으로 읽어 보려 한다.

그렇게 읽으면 질문이 달라진다. 나는 언제 완성될까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고도 계속 달라질 수 있을까가 된다.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 완성되는 사람만을 가리킬까? 충분히 자란 뒤에도 지금의 모양으로 자신을 다 설명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장은 그런 질문에 어울리는 역설을 잇달아 내놓는다. 밝은 길이 밝아 보이지 않고, 나아감이 물러남처럼 보이며, 큰 덕이 덕스러운 표정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보기 쉬운 훌륭함과 실제로 삶을 지탱하는 힘 사이에 틈을 내는 것이다.

2. 한 말을 듣는 세 가지 반응

‘上士闻道,堇而行之;中士闻道,若存若亡;下士闻道,大笑之.’ 도를 듣고 꾸준히 행하는 사람이 있다. 알 듯 말 듯, 믿었다 잊었다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있다.

상사·중사·하사를 처음부터 정해진 세 부류의 인간으로 굳힐 필요는 없다. 경문에 반응의 높낮이가 있다고 해서, 누구는 태어나면서 깨닫고 누구는 영원히 배울 수 없다는 신분표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사람도 일에 관해서는 받아들이는 말을 가족 문제에서는 비웃을 수 있다. 어제는 터무니없던 말이 한 번의 실패 뒤에 절실하게 들릴 수도 있다.

‘弗笑不足以为道.’ 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나는 여기서 조금은 자신을 향한 웃음도 듣는다. 더 세게 밀고 더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사람에게 큰 그릇은 마지막 모양으로 굳지 않는다고 말해 보자. 성공의 비법을 물었는데 완성품이 되지 말라니, 무슨 소리냐고 웃을 만하다.

그러나 비웃음을 샀다는 사실이 곧 옳다는 증거는 아니다. 근거 없는 주장도 웃음을 사고, 좋은 말에도 검토해야 할 허점이 있다. 이 구절은 조롱당한 모든 주장을 도로 인증해 주지 않는다. 즉시 익숙하게 들리는 것만 참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판단 습관을 흔든다.

배우는 때를 남이 대신 정해 줄 수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고, 스스로 해 보이는 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이해한 척하게 만드는 것과 실제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다르다. 『도덕경』을 써서 계속 말을 건네는 일 자체가 교육의 포기는 아니다. 37장의 ‘만물장자화’와 연결해 보면, 자랄 조건을 돌보는 일과 남의 내면을 대신 완성하는 일은 같지 않다.

3. 나아가는 길이 물러남처럼 보일 때

‘是以建言有之曰’ 다음에 세 구절이 나온다. ‘明道如费,进道如退,夷道如类.’ 밝은 도가 환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나아가는 도가 물러남처럼 보이며, 평탄한 도가 평탄해 보이지 않는다는 흐름이다.

건언(建言)에는 이미 세워진 말을 인용하는 듯한 어조가 있다. 그렇다고 이 표현만으로 어느 시대의 옛 격언을 빌렸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비(费)와 류(类)의 풀이에도 문제가 남는다. 오늘날의 낭비나 종류라는 뜻을 그대로 대입하고 그것이 유일한 어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세 문장이 함께 보여 주는 것, 곧 겉모습과 실제 작용의 어긋남을 따라가 보자.

계획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잠시 중단한다. 일정표에서는 후퇴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에 사람과 시간을 더 넣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회의에서 결론을 미루고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속도는 느려진다. 대신 뒤늦게 계획 전체를 고쳐야 할 일을 줄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멀어지는 한 걸음이 실제로는 목적에 가까워질 조건을 마련한다.

40장의 되돌아감도 이렇게 이어진다. 앞으로만 가야 진전이라고 생각하면 방향을 바로잡는 행동은 모두 실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처음 바라던 것을 잃지 않으려고 돌아가는 일도 있다. 속도를 낮추는 것이 일을 버리는 것과 같지는 않다.

물론 물러났다고 모두 잘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낭비 많은 일을 ‘명도여비’라는 말로 멋있게 꾸밀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외양의 평가를 무조건 뒤집는 것이 아니다. 외양만 보고 판단을 끝내지 않는 것이다.

4. 덕 있어 보이지 않는 덕

이어지는 문장은 사람의 됨됨이를 이야기한다. ‘上德如谷,大白如辱,广德如不足,建德如偷,质真如渝.’ 높은 덕은 골짜기 같고, 큰 흰빛은 더러워진 듯하며, 넓은 덕은 모자란 듯하고, 굳건한 덕은 게으른 듯하며, 참된 바탕은 변하는 듯하다고 한다.

상덕여곡의 골짜기는 자기 높이를 증명하지 않는다. 회의에서 남이 말할 자리를 만드는 사람이 가장 오래 말하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겉으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자기 의견을 꺼내는 동료도 있다. 15장의 골짜기 같은 너름, 28장의 천하의 골짜기가 이런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백여욕은 혼자 깨끗해 보이는 일과 실제로 정직한 일을 떼어 놓는다. 복잡한 문제에 관여하면 오해를 받기도 한다. 약한 사람 편에서 책임을 묻는 사람이 도리어 소란을 일으킨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욕먹는 사실만으로 결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했고 누구에게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광덕여부족에서는 다른 사람이 참여할 여지가 보인다. 혼자 다 할 수 있는 모습을 만들지 않으니 모자라 보일 수 있다. 건덕여투에서는 애쓴 흔적을 늘 전시하지 않아도 되는 단단함이 보인다. 미리 준비를 끝낸 사람은 시종 바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덜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질진여유(质真如渝)도 같은 물음을 깊게 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의견을 고친 사람은 변덕스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에 충실하기 때문에 어제 한 말을 바꾸어야 할 때도 있다. 변하기만 하면 진실한 것이 아니라 무엇에 충실하려고 바꾸는지가 중요하다.

38장의 ‘상덕부덕’으로 돌아가면 뜻이 또렷해진다. 덕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 행동을 검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보이지 않던 기여를 보기 위해 조금 더 자세히 보자는 뜻이다. 수수하면 선하고 화려하면 나쁘다는 새 외모 규칙을 만들면, 기껏 열어 놓은 질문을 다시 닫게 된다.

5. 큰 그릇을 마지막 모양으로 굳히지 않는다

이제 다섯 개의 큰 이미지가 놓인다. ‘大方无隅,大器免成,大音希声,天象无形,道褒无名.’ 천상과 도포를 포함한 이 문장은 이 연재의 필자가 채택한 본문이다. 출토된 두 백서의 글자를 있는 그대로 한 글자씩 옮겼다는 뜻은 아니다. 그 구별을 두고 다섯 구절을 하나씩 읽어 보자.

‘대방무우.’ 큰 모에는 모서리가 없다. 어떤 판단에도 내 이해가 여기까지라는 경계가 있다. 그런데 그 선으로 세계 전체를 다 잘랐다고 생각하지 않는 넓이가 가능하다. 나는 이 구절에서 작은 틀의 모서리를 세계 자체의 모서리로 착각하지 않는 태도를 읽는다.

‘대기면성.’ 실제 그릇은 모양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밥그릇은 구워져야 밥을 담는다. 그렇지만 사람을 그릇에 빗댈 때 한 사람 전체를 단 하나의 용도로 구워 굳힐 필요는 없다. 기술을 익히고, 책임을 맡고, 전문가가 되어도 된다. 다만 그 이름만으로 답할 수 없는 물음이 왔을 때 여전히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 독법에 마음이 가는 까닭은 주변 구절들도 익숙한 형상을 넘어서는 크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과 잘 어울린다는 판단이 면과 만의 문헌 문제를 종결하지는 않는다. 만성이라는 독법에도 오래 자라는 삶의 풍요가 있다. 여기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란 뒤에도 스스로를 봉인하지 않는 쪽을 바라본다.

‘대음희성.’ 큰 소리는 귀에 잡히는 소리로 다 붙들 수 없다. 14장의 희(希)를 떠올리게 한다. 소리가 무한히 커지면 들리지 않는다는 음향학 이야기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작용이 반드시 가장 큰 목소리로 자신을 알리지는 않는다는, 다른 듣기의 이미지다.

‘천상무형.’ 하늘의 큰 모습을 한 장의 고정된 그림 안에 다 넣을 수 없다고 읽어 볼 수 있다. 하늘에는 형태 있는 것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한 모습이 전체를 다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포무명’도 이어진다. 널리 품는 도를 하나의 이름으로 다 붙들 수 없다. 이름은 이해를 도와도 이해의 완료 증명서는 아니다.

다섯 구절을 사람에게 돌려보면, 완성한 성과가 있는 것과 완성된 인간이 되었다고 믿는 것이 다름을 알게 된다. 영원히 어려야 하는 것도, 계속 초보자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숙련에는 숙련의 넓어지는 방식이 있다. 자신이 해낸 일을 기뻐하면서도 아직 모르는 것을 물을 수 있다.

‘이제 이루었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에는 대개 축하할 만한 일이 있다. 그 기쁨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뒤에 ‘그러니 이제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를 붙이지 말자. 면성은 성취의 금지가 아니라 성취가 앞으로 들어올 삶의 입구를 막지 않게 하는 말이다.

6. 잘 시작하고, 잘 마친다

장은 뜻밖에 단정한 말로 끝난다. ‘夫唯道善始且善成.’ 오직 도는 잘 시작하고 또한 잘 이룬다는 것이다.

이 끝을 빼면 면성은 편리한 핑계가 된다. 가능성을 남기겠다며 제출하지 않고, 완벽할 수 없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나는 성장 중이니 다른 사람이 기다리는 일을 계속 미완성으로 두는 식이다. 하지만 경문은 시작만 칭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루는 일도 함께 말한다.

일 하나를 마쳤다고 세계 전체를 닫는 것은 아니다. 책을 다 쓰면 독자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보내온다. 집을 완공하면 사람이 살기 시작하고 보수가 필요해진다. 아이의 한 시기 돌봄이 끝나면 다른 방식의 관계가 시작된다. 완성은 다음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매듭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만물의 펼쳐짐이 각자의 결실에 이르도록 하는 도의 모습을 읽는다. 40장의 유와 무를 통해 시작을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실제로 열매 맺는 데까지 본다. 형태를 만드는 능력은 중요하다. 다만 만든 형태를 영원히 유일한 답으로 보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잘 시작하고 잘 마친다. 마친 것에도 새로운 쓰임을 허락한다. 면성과 선성은 서로 취소하는 말이라기보다 이런 호흡을 만든다. 오늘의 일은 끝낼 수 있지만, 오늘의 나로 내일의 나까지 다 결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7. 두 장의 순서에 관하여

백서의 배열에서는 상사문도로 시작하는 장이 반자도지동으로 시작하는 장보다 앞에 온다. 우리가 통행본의 번호로 41장과 40장이라고 부르는 두 장의 순서가 반대인 셈이다. 이 연재에서는 다른 판본과 찾아 대조하기 쉽도록 널리 쓰이는 통행본 번호를 유지한다. 후난박물원의 백서 개요

순서를 바꾸어 읽으면 다른 맛이 있다. 먼저 밝은 것이 밝아 보이지 않고 나아감이 물러남처럼 보이는 장면들을 만난다. 그런 뒤 되돌아감과 약함이라는 말로 그 놀라움을 생각해 본다. 구체적인 모습에서 움직임으로 가는 길이다. 거꾸로 40장을 먼저 읽으면 움직임에 관한 생각이 다음 장에서 여러 장면을 얻는다.

어느 순서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는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배열의 차이만으로 후대의 특정 인물이 어떤 사상적 의도로 순서를 바꾸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 이 작은 메모의 목적은 새 정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배열도 읽기의 시야를 바꿀 수 있음을 알리는 데 있다.

8. 아직이라는 말을 대기실로 만들지 않기

두 가지를 가져가면 좋겠다. 첫째, 언젠가 완성될 날까지 지금의 삶을 미루지 않는 일이다. 지금 배우는 것, 지금 지킬 수 있는 약속, 지금 깊어지는 관계는 훗날의 직함이 없어도 진짜다. 늦는다고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미래의 성공만이 현재의 나에게 가치를 줄 수 있다면 오늘은 계속 임시 생활이 된다.

둘째, 겉으로 알아보기 쉬운 훌륭함만 좇지 않는 일이다. 잘 듣는 사람이 가장 영리해 보이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준비가 잘된 일이 고생을 가장 많이 호소하는 일과 같지는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볼품없다는 이유로 후한 점수를 주자는 말은 아니다. 약속을 어떻게 지켰고 잘못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고쳤는지를 보자.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부족한 점을 발견했을 때 그 자체가 큰 그릇의 증거라고 위로하기보다, 배울 수 있는 한 부분으로 다루면 된다. 이미 할 줄 아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다음에 고칠 것을 찾는 일이다. 그 일에는 나이나 지위가 정해 주는 최종회가 없다.

대기만성이라는 위로 너머로 가 보자는 것은 위로를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그 뒤에 한 가지 자유를 더 놓자는 뜻이다. 언젠가 완성품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오늘의 일은 제대로 마쳐도 된다. 그리고 내일의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다음 장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