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어디까지 갈까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万物。万物负阴而抱阳,中气以为和。天下之所恶,唯孤、寡、不谷,而王公以自名也。物或损之而益,或益之而损。故人之所教,夕议而教人。故强梁者不得死,吾将以为学父。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주석은 ‘夕议’를 그대로 두지만, 두 글자를 ‘亦我’로 읽는 교주도 있습니다. 논문이 여기서 이끌어 내는 해 질 무렵의 숙고는 저자의 해석이지, 이견이 없는 글자의 뜻은 아닙니다.
1. 강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
더 빨리 움직여라. 공격적으로 나가라. 경쟁자를 압도하라. 일 잘하는 법에도 인생을 사는 법에도 비슷한 말이 붙는다. 망설임은 나약함으로, 물러남은 패배로, 의견을 고치는 일은 소신 없음으로 읽히기 쉽다. 강한 사람이란 같은 힘으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도덕경』 42장의 끝에는 반대 방향의 경고가 있다. ‘强梁者不得死.’ 강포하게 힘을 휘두르는 사람은 좋은 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체력이 좋거나 결단력 있는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는 문장이 아니다. 강량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상대가 응답할 자리를 없애는 태도다. 그렇다고 이 경고를 읽은 뒤 가해자가 곧 벌받을 것이라며 안심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폭압적인 사람이 오랫동안 이익을 누리기도 한다. 경문은 세계가 자동으로 정의로워진다는 보증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 장 앞부분에는 도생일로 시작하는 거대한 생성의 그림이 있을까? 만물이 생겨나는 일과 한 사람이 강포해지는 일은 어떻게 이어질까? 나는 관계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펼쳐지는 세계와, 자신을 한 가지 힘으로 고정하려는 태도를 나란히 놓아 보게 된다.
2. 도에서 하나로, 둘로, 셋으로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万物.’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짧은 문장 안에서 세계가 몇 겹으로 열린다.
일·이·삼에는 오래전부터 여러 우주론적 풀이가 있었다. 여기서는 유일한 고대의 뜻을 확정하기보다 이 연재의 철학적 독법 하나를 내놓는다. 아직 개별 형상으로 갈라지지 않은 도에서 첫 구별이 생긴다. 구별에는 서로 마주하는 면이 생긴다. 두 면이 관계를 맺으면 단순히 둘을 나란히 놓은 것과는 다른 움직임이 생긴다. 그런 얽힘 속에서 갖가지 사물과 작용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하나를 첫 분화로, 둘을 상대하는 양면으로, 셋을 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읽는 셈이다. 숫자로 쓴 현대 물리학도 아니고 고대 사람들이 모두 이 모형을 머릿속에 그렸다는 주장도 아니다. 완성된 물건들이 외부에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하면서 모습을 얻는 세계를 생각하기 위한 독법이다.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떠올려도 좋다. 씨앗에는 자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뒤의 나무 전체가 이미 완성되어 접힌 채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가지가 어디로 뻗을지는 흙과 빛, 물과 바람, 상처와 주변 나무에 따라 달라진다. 펼쳐짐은 미리 만들어진 완제품의 포장을 벗기는 일이 아니다.
40장의 유생어무와 함께 읽으면 두 방향이 보인다. 그 장은 눈앞의 만물에서 유로, 다시 무로 거슬러 간다. 이 장은 도에서 일·이·삼을 거쳐 만물로 나온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고 하나는 펼쳐지는 앞을 본다. 우주 기원을 입증하는 두 개의 과학 공식이 아니라, 이미 나타난 것을 그 바탕과 관계 속에서 읽는 두 길이다.
3.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는다
‘万物负阴而抱阳,中气以为和.’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품으며 중기로 조화를 이룬다.
음인 사람과 양인 사람을 두 줄로 세워 놓으면 이 구절의 재미를 잃는다. 각각의 사물이 두 면을 함께 지닌다. 앞으로 나오는 작용에는 뒤에서 받쳐 주는 조건이 있다. 일하는 시간은 쉬는 시간과 아무 관계 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드러난 면 하나로 그 존재 전체를 다 말할 수는 없다. 2장의 서로 기대는 말들도 여기에서 다시 들린다.
이 연재는 ‘중기(中气)’를 채택하며, 통행본에서 흔히 보는 ‘충기(冲气)’와 구별한다. 다만 충을 충돌로만 풀이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중이라는 글자만이 유일하게 옳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중을, 한쪽에만 자신을 가두지 않고 두 면이 살아 움직일 관계를 지킨다는 방향으로 읽는다.
그 관계는 무조건 중간값을 택하는 타협이 아니다. 빨리 결정해야 할 때도 있고 더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분명하게 거절할 때도, 자기 판단을 되물을 때도 있다. 모든 것을 반씩 섞어 묽게 만든다고 조화가 되지는 않는다. 지금 어떤 작용이 필요한지 살피는 능력이 중요하다.
5장의 수중도 이런 뜻으로 되새길 수 있다. 언제나 강해야 하고 언제나 빨라야 하고 언제나 이겨야 한다고 자신에게 요구하면, 쉼과 수정과 협력의 가치를 놓치게 된다. 반대로 언제나 양보해야 한다고 정하면 자기를 지킬 힘을 잃을 수 있다. 조화는 학대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사이에서 절반씩 양보시키는 일이 아니다. 해를 멈추고 안전을 확보하는 명확한 경계도 관계를 바로 세우는 데 필요하다.
4. 덜어서 더해지고, 더해서 덜어질 때
경문은 왕공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고·과·불곡이라는 말을 자기 이름으로 쓴다고 한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외롭고 적고 넉넉하지 못한 쪽을 연상시키는 호칭을 쓰는 것이다. 겉으로 낮추는 말과 실제 힘이 언제나 반비례하거나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장면이다.
겸손한 호칭을 쓴다고 곧 좋은 통치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스스로를 높여 보이는 일만이 권위를 지탱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구는 된다. 39장에서 보았듯 높은 자리를 받쳐 주는 낮은 곳이 있다. 그 바탕을 인정하는 일은 단순히 자기 값을 깎는 행동이 아니다.
이어 ‘物或损之而益,或益之而损’이 나온다. 어떤 것은 덜어 주어 이로워지고 어떤 것은 더해 주어 해로워진다. 여기서 혹(或)을 놓치지 말자. 그럴 때가 있다는 말이다. 무엇이든 줄이면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모아 두는 일이 언제나 해로운 것도 아니다.
일정표를 생각해 보면 쉽다. 빈 시간을 전부 업무로 채우면 숫자로는 생산적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연락 하나, 피로 한 번을 받아 낼 자리가 없다. 서둘러 끝낸 일을 고치느라 다음 일정까지 흔들린다. 한 가지를 거절해 빈칸을 남기는 편이 이미 맡은 일을 제대로 마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줄인 것은 일의 개수이지 일을 아끼는 마음이 아니다.
재산도 마찬가지다. 생활을 지켜 주는 준비금과 아무리 늘어도 안심할 수 없는 경쟁은 다르다. 필요한 것조차 부족한 사람에게 덜 가지면 풍요로워진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물을 것은 그 증가가 무엇을 지키며 무엇을 소모하느냐이다. 41장의 광덕여부족에서 44장의 지족과 지지까지, 남기는 여지가 실제 삶을 어떻게 받치는지 보는 흐름이 이어진다.
5. 강량, 응답하지 않는 힘
‘故强梁者不得死,吾将以为学父.’ 이제 끝의 경고로 돌아오자. 강량은 강포하고 횡포한 태도를 가리킨다. 강은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동사이고 량은 지붕의 들보가 되려는 동사라고 나누어, 그것을 확정된 어원처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현대의 비유로 들보를 떠올릴 수는 있다. 같은 자리, 같은 각도로 영원히 버티려는 사람이다. 건물을 받치는 데 유용한 단단함을 사람의 삶 전체에 적용해 버린 모습이다. 이 비유가 비추는 것은 힘 자체보다 그 힘을 쓰는 방식을 바꾸지 못하는 태도다.
어떤 책임자가 한 방식으로 큰 성과를 냈다. 시간이 지나 사정이 달라지고 현장에서 문제가 올라온다. 그런데 그는 ‘나는 이걸로 성공했다’며 반대 의견을 충성심 부족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보고하지 않게 된다. 겉으로는 모두가 한 방향을 보는 듯하지만, 실제로 상황을 읽고 고칠 능력은 줄어든다.
30장과 36장의 힘에 대한 경계도 여기와 만난다. 힘을 갖는 것과 상대를 계속 굴복시켜야만 자신을 유지하는 것은 다르다. 충분히 강한 사람도 잘못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고 방법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움직임이 언제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76장의 살아 있는 것의 부드러움과 죽은 것의 굳음도 떠오른다. 그렇다고 성숙한 사람을 죽은 사람에 비유해서는 안 된다. 경험이 많거나 입장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주변의 말과 사정에 응답하는 작용이 닫히는 것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부득사는 그런 강포함의 위험을 단호하게 말한다. 개인의 최후를 계산하는 공식으로 삼기보다, 그 행동이 반발을 낳고 신뢰를 깎으며 수정에 필요한 정보를 멀리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남을 지배하지 않는 힘에는 단호한 거절도, 피해를 막는 개입도 포함된다. 폭력에 대항할 힘까지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6. 경고를 자기 스승으로 삼는다
이 연재의 본문은 ‘학부(学父)’를 따르며 통행본의 ‘교부(教父)’와 다르다. 나는 이를 배움의 바탕에 놓는 가르침, 자신을 다시 가르쳐 줄 경고라는 쪽으로 읽는다. 부라는 한 글자만으로 특정 가문이 감춰 전한 가훈이나 선택된 사람만 들어가는 지혜를 복원할 수는 없다.
비슷한 ‘강량자부득기사’라는 말은 『공자가어』 「관주」에 전하는 「금인명」에도 나온다. 이것만으로 주공이 아들 백금에게 준 가훈이라고 단정하거나, 두 문헌 사이의 차용 방향과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다. 가까운 경고가 다른 전승에도 남아 있음을 확인하면 충분하다. 『공자가어』 「관주」
이 장에는 남에게 배운 것을 다시 남에게 가르치는 흐름도 있다. 물려받은 말을 장식으로 걸어 두지 않고 생각해 보며 행동의 자리로 가져오는 것이다. 경고를 학부로 삼는다는 것은 남을 꾸짖는 자료로 쓰기 전에, 자신도 그 말에 배울 수 있게 두는 일일 것이다.
어려운 까닭은 뜻을 알아듣기가 특별히 어려워서만은 아니다. 화가 날 때도, 이길 것 같을 때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횡포가 나쁘다고 말하던 사람이 자기 제안만큼은 아무 조건 없이 통과시키고 싶어 한다. 41장의 세 반응은 이때도 한 사람 안에서 번갈아 나타날 수 있다.
처음 웃은 사람이라고 평생 배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잘 실천한 사람이라고 더 배울 필요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말이 가장 자주 돌아와야 할 스승이 되기도 한다.
7. 다음번에 밀어붙이고 싶어질 때
이 장을 읽고 나약해지겠다고 결심할 필요는 없다. 목표가 있어도 되고, 거절해도 되며, 지켜야 할 것을 위해 강하게 행동해도 된다. 점검할 것은 힘이 목적을 돕고 있느냐, 아니면 강함을 증명하려고 목적을 희생하고 있느냐이다.
먼저 강한 모습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쉬는 일, 듣는 일, 물러서는 일까지 전부 패배로 세고 있지는 않은가? 필요할 때 다른 힘을 쓸 여지는 소심함이 아니다. 현실에 맞게 판단할 폭이다.
다음으로 바꾸지 않는 것 자체가 소신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키려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방법을 바꿔야 할 때도 있다. 사람을 아끼는 조직이라면 옛 관행을 보존하는 것보다 지금 거기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그 가치에 충실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증가만 허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정, 소유, 권한, 주목 가운데 하나를 조금 줄여 지킬 수 있는 것은 없는가? 생활과 안전에 필요한 대비는 남겨도 된다. 적게 갖는 일 자체를 새로운 경쟁으로 만들지 말고 실제로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을 구별하자.
유연함, 수정, 여백, 중을 지킨다는 말을 표어로만 남기지 않았으면 한다. 상대를 이기려 들기 전에 물을 한 가지는 무엇인가? 이번 주의 부담 가운데 다시 나눌 것은 무엇인가? 내가 틀렸음을 알아차린 사람이 안심하고 내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 구체적인 질문에서 이 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8. 만물의 펼쳐짐에서 한 사람의 행동으로
도에서 하나로, 둘로, 셋으로, 그리고 만물로. 장은 크게 열렸다가 마지막에 한 사람이 힘을 쓰는 자리로 돌아온다. 우주 이야기로 윤리를 기계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하며 모습을 얻는 세계에서 나 혼자 변하지 않는 한 면으로 굳으려는 태도를 다시 보게 한다.
음을 지고 양을 품는다는 것은 한쪽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덜어 냄이 버팀목이 될 수 있고 더함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미는 것만 힘이라고 부르면 세계에서 작용하는 힘의 상당 부분을 놓친다.
횡포한 사람이 망하는 날을 기다리려고 이 경고를 외우는 것은 아니다. 내가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 갔을 때, 쓰기 전에 기억하려고 읽는 것이다. 강해도 된다. 하지만 강하기 위해 남의 목소리와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함께 없애지는 않아도 된다.
끝까지 걸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도 아직 들을 수 있고, 아직 방법을 바꿀 수 있으며, 무엇을 지키려고 쓰는 힘인지 다시 물을 수 있다는 것은 걸음을 이어 갈 소중한 자원이다. 강함을 입증하느라 바쁘지 않은 만큼 다음 한 걸음을 더 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