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다 더 단단해지지 않아도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天下之至柔,驰骋于天下之至坚。无有入于无间。吾是以知无为之有益也。不言之教,无为之益,天下希能及之矣。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한다
처마 끝의 물이 같은 자리에 떨어져 돌에 조금씩 자국을 낸다.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장면은 단단한 것을 움직이려면 반드시 더 단단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흔든다.
그렇다고 물에 힘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흐르는 물과 떨어지는 물방울도 물리적인 힘을 가한다. 침식의 속도는 돌의 성질과 물의 양, 시간 같은 조건에 달려 있다. 어떤 돌이든 아주 작은 물방울만 있으면 반드시 뚫린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이 장을 물에 관한 과학 설명으로 만들면 비유에서 얻을 수 있는 생각까지 놓치기 쉽다.
더구나 43장 본문에는 물이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는다. 물은 우리가 보태 보는 하나의 이미지다. 경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天下之至柔,驰骋于天下之至坚.’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 사이를 내달린다.
눈길이 가는 것은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때려눕힌다는 문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힘겨루기와는 다른 움직임이 있다. 더 단단한 것을 들이대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통할 가능성은 없을까? 물방울을 마음에 두고 이 물음을 일상으로 가져가 보려 한다.
2. 이기고 지는 것 말고도 움직일 수 있다
지유와 지견은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끝까지 벌려 놓는다. 내 힘이 조금 약하니 상대보다 강해질 때까지 훈련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자에서 길이를 재는 경쟁 자체를 잠시 벗어나게 한다.
치빙(驰骋)에는 힘차게 달리며 누비는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사전적 의미 자체가 저항 없이 통과한다거나 모든 대립이 사라진다는 보증은 아니다. 다만 경문이 승리라는 말 대신 이 움직임의 말을 놓았다는 점에서, 나는 승패만이 아닌 길을 찾는 독법을 끌어낸다.
36장에는 유약승강강이라는 대조가 있었다. 43장을 읽을 때는 그것을 더 약해져야 이길 수 있다는 기술로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고 일이 진행될 수 있다면, 쓰러뜨리는 일까지 목표로 삼을 까닭이 없다. 벽을 부수는 것 말고 문을 찾는 움직임도 있다.
물은 이런 생각을 돕는다. 바위에 닿아 멈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형을 따라 갈라지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조건이 맞으면 틈을 지난다. 같은 물이지만 장소에 따라 움직이는 방식이 다르다. 형태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황을 받아들여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에게는 의도를 지키면서 방법을 바꾸는 힘이 된다. 대화의 목적이 문제를 푸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제가 졌습니다’라는 말까지 받아 낼 필요는 없을 수 있다. 반대로 상대가 해를 끼치는 상황에서는 대화를 더 하는 것보다 떠나는 일이 필요할 수 있다. 부드러움은 그 자리에 끝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다.
3. 형태가 없다는 것과 어디든 들어간다는 것
‘无有入于无间.’ 있는 것으로 붙들 수 없는 것이 틈 없는 곳에 들어간다. 앞의 문장을 이어 경문은 더욱 대담한 이미지를 놓는다.
이것을 물은 형태가 없으므로 밀폐된 어떤 물질에도 들어간다는 설명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물은 놓인 곳에 따라 형태를 얻는 것이지 실제로 모양도 부피도 없는 것이 아니다. 지하수도 서로 연결된 공극이나 갈라진 틈을 통해 흐른다.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물질을 물이 반드시 뚫는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지하수 설명
무유와 무간은 물리적인 침투 장치라기보다 익숙한 유형의 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작용을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 이미지로 읽고 싶다. 단단한 도구를 더 크게 만들어도 다룰 수 없는 일이 다른 관계 맺기로 움직일 때가 있다. 사람 사이에서는 요구를 세게 하는 대신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일 수 있다.
가령 상대가 반드시 찬성해야 한다는 자세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상대의 대답을 바꾸는 것만 목적이라고 드러나면 상대는 사정을 말하지 않게 된다. 내 결론을 잠깐 옆에 놓고 무엇이 걱정되느냐고 물을 때 비로소 문제의 모양이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는 의견이 있거나 경계를 밝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분명한 사람에게 오히려 마음 놓고 말할 수도 있다. 경직은 명확함이 아니라, 어떤 답을 들어도 내 이해가 전혀 달라질 수 없는 상태다.
또 상대의 경계를 풀어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남의 내면에 내 목적을 위해 뚫어도 되는 벽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할지, 관계를 맺을지는 상대가 정할 수 있다. 부드러움이 유익하다면 동의를 우회해서가 아니라 서로 동의할 관계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어야 한다.
4. 무위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吾是以知无为之有益也.’ 나는 이로써 무위가 이로움을 안다고 한다. 여기에 지(知)가 있다. 통행본에도 이 글자가 있으므로 백서에만 보존된 차이라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가 이로써 안다며 앞의 이미지에서 생각을 이어 간다는 점이다.
부드러움이 단단함 사이를 달리고 무유가 무간에 들어간다. 이 역설에서 우리는 밀어붙이기만 유효한 행동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얻는다. 무위의 모든 의미를 다 정의하는 풀이는 아니지만 생활에서 시험해 볼 입구는 된다.
일이 멈췄을 때 독촉을 늘린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필요한 정보가 오지 않았는지, 책임이 불분명한지, 기한이 무리한지 먼저 살필 수 있다. 정보를 건네고 역할을 다시 의논하면 일이 움직이기도 한다. 모두 실제 행동이며 수고가 든다. 무위를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사이 누군가 전부 처리해 주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관계가 굳었을 때도 지금 당장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 말고 할 일이 있다. 자신의 말투를 돌아보고, 이야기할 시간을 바꾸고,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다. 내 책임인 일에는 사과하고 상대의 책임인 일에는 경계를 전한다. 그렇다고 관계가 반드시 회복되지는 않는다. 상대에게도 의지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있을 수도 있다.
유익한 것은 내 의도를 세계에 그대로 관철하려는 불필요한 힘을 덜고, 실제로 필요한 일에 힘을 옮기는 데 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보는 것이다.
5. 말보다 먼저 생활이 가르친다
‘不言之教,无为之益,天下希能及之矣.’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이로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고 장은 끝난다.
불언지교를 설명하지 않는 교육이 가장 좋다는 명령으로 읽으면 답답해진다. 위험한 도구를 쓸 때는 설명이 필요하다. 처음 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려 주어야 한다. 싫은 것은 싫다고 분명히 말해도 된다. 침묵의 뜻을 알아서 짐작하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배려는 아니다.
그래도 말이 대신할 수 없는 가르침이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수한 사람을 비웃는 직장에서는 모두가 말과 다른 것을 배운다. 반대로 책임자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과정을 보여 주면 한 번의 연설보다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한 말을 생활이 뒷받침하는 것이다.
2장의 불언지교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남을 내 말대로 만들기보다 내 행동으로 다른 방식이 가능함을 보여 준다. 질문이 오면 답하고 필요하면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설명했으니 상대도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하지 않는다.
희능급은 배울 자격이 있는 소수 계층이 고정되어 있다는 선언이 아니다. 화와 불안, 마감의 압박 속에서 강요를 덜고 필요한 일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앞서 읽은 41장의 세 반응도 우리 안을 오갈 것이다.
알면서 못하는 날이 있다. 그 사실을 이제 배울 자격이 없다는 판결로 삼기보다 다음 장면에서 조금 다른 행동을 골라 볼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어려운 가르침은 한 번 알아들었다고 끝나지 않는다.
6. 사람, 막힌 판, 넘을 수 없는 턱
이 독법을 세 장면에 놓아 보자. 어느 것도 부드러워지면 반드시 이긴다는 처방은 아니다. 더 단단해지는 것 말고 실제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 찾는 연습이다.
먼저 강경한 사람을 만났을 때다. 나도 목소리를 키우면 서로의 목소리 크기만 문제가 되는 일이 있다.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자세 뒤의 목적을 물어보자. 무엇을 지키려는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운가?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그 사람에게 대화할 의미가 있는가?
가령 동료가 새로운 방안을 완강하게 거절한다. 처음에는 변화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들어 보니 인수인계도 없이 업무만 늘어날까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개선과 상대가 원하는 일의 예측 가능성은 함께 이룰 수도 있다. 시험 기간을 정하고, 부담을 나누고, 문제가 생기면 되돌릴 절차를 만든다. 상대를 말로 이기지 않아도 일이 움직일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목적이 정말 충돌할 수도 있다. 지배하려는 사람의 요구까지 충족할 의무는 없다. 두려움의 이유를 이해했다고 가해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위험하면 떠나고, 제삼자의 도움을 구하고, 대화를 끝내는 일도 선택지다. 이해는 복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다음은 상황 자체가 굳었을 때다. 눈앞의 한 수를 통과시키려 할수록 판 전체를 놓칠 수 있다. 지금 예산, 지금 담당자, 지금 마감이라는 작은 틀 안에는 정말 길이 없을지 모른다. 한 걸음 물러나 그 세 가지를 모두 고정해야 하는지 살펴보면 다른 질문이 생긴다.
한꺼번에 완성하려 하지 말고 먼저 한 부분만 건넬 수는 없을까? 순서를 바꾸면 기다리던 다른 일이 시작되지 않을까? 내가 지키려는 작은 성과를 놓는 편이 공동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국소 최적이라는 말을 빌릴 수는 있지만, 한 걸음 물러나면 반드시 전체 최적을 찾는다는 수학적 보장은 아니다. 넓게 보아도 어려움은 남는다. 그래도 같은 벽을 같은 각도로 미는 것 말고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넘지 못할 턱 앞에 섰을 때다. 물은 바위를 돌아가기도 하고 조건에 따라 위를 넘기도 하며 틈을 지나거나 수량이 달라질 때까지 고이기도 한다. 한 방법이 막혔다는 것과 목적을 향한 길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은 구별할 수 있다.
다른 경로는 없는가? 시간을 두면 조건이 달라질까? 혼자서는 안 되지만 도움을 받으면 가능한가? 필요한 것을 배운 뒤 돌아올 수는 없을까? 이렇게 묻다가 지금의 방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계속 다치게 하고 있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반대로 목표 자체가 위험하거나 이루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때는 다른 목표를 택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허락해야 한다. 유연함은 모든 장애를 결국 돌파하라는 새로운 의무가 아니다.
다시 물방울로 돌아가자. 눈에 띄지 않는 물이 시간과 조건 속에서 단단한 돌의 모습을 바꾼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단단함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힘이 있다. 모든 바위를 뚫을 수 없기에 오히려 흐를 곳을 볼 필요가 있다.
다음에 더 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앞에 잠깐 질문을 놓아 보자. 지키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방법밖에 없는가? 도움을 구할 수 있는가? 떠나도 되는 자리는 아닌가? 돌보다 더 단단해지지 않아도 아직 고를 수 있는 움직임이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