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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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38장 · 총 81장

벽에 쓴 말보다 중요한 것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上德不德,是以有德。下德不失德,是以无德。上德无为而无以为也。上仁为之而无以为也。上义为之而有以为也。上礼为之而莫之应也,则攘臂而扔之。故失道而后德,失德而后仁,失仁而后义,失义而后礼。夫礼者忠信之薄也,而乱之首也。前识者道之华也,而愚之首也。是以大丈夫居其厚而不居其薄,居其实而不居其华。故去彼取此。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회사는 정직을 말한다

회사에 들어서면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가치부터 만난다. 정직, 혁신, 고객 제일. 말은 좋다. 믿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의견을 냈더니 상사의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혁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망스러운 것은 가치를 말로 썼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과 그곳의 생활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에서는 같은 약속이 제 몫을 할 수 있다. 납기를 명확히 알리고, 잘못을 인정하고, 문제를 제기한 직원을 벌주지 않는다. 여기서는 벽에 쓴 말이 사람들이 따져 물을 근거가 된다. 회사를 보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검증받겠다는 약속이다.

『도덕경』 38장은 이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설명을 지키고 있는가? 38장은 덕경의 첫 장이다. 덕경을 앞에 놓는 백서의 순서로는 책 전체도 여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첫머리부터 ‘상덕은 덕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2. 좋은 사람이라는 모습을 지키기 시작할 때

‘상덕부덕, 시이유덕(上德不德,是以有德).’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읽고 싶다. 덕이 두터운 사람은 ‘나는 덕 있는 사람이다’라는 팻말을 매번 관계 한가운데 놓지 않는다.

친구가 어려움을 겪어서 도왔다. 친구의 사정이 나아지기를 바라면 된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뻐해도 된다. 문제는 어느 순간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네가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관계의 중심이 될 때다.

그때부터 친절의 장부를 쓴다. 베푼 일마다 답이 돌아와야 한다. 오늘 친구가 무심하게 대하면 어제의 도움까지 부정당한 듯하다. 도움은 여전히 주고 있다. 다만 다른 일도 함께 시작되었다.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자기 모습을 관리하는 일이다.

부덕(不德)을 가치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정직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면 남들도 그 약속을 근거로 물을 수 있다. 내려놓아야 할 것은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간판이다. 누군가 약속을 어겼다고 지적했을 때, 약속으로 돌아갈 기회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 인격을 공격한 적으로 취급하는가?

3. 저절로 되지 않아도 연습할 수 있다

‘하덕불실덕, 시이무덕(下德不失德,是以無德).’ 덕을 잃지 않으려 붙드는 마음이 오히려 덕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날카로운 말이다.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에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이 필요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데 이 말을 쓰지는 말자. 성미가 급한 사람이 말을 꺼내기 전 두 초를 기다린다. 책임을 피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 약속한 일을 종이에 쓴다.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고 그 연습이 거짓은 아니다.

여기서 나는 차선을 지킨다는 생활의 독법을 끌어낸다. 애쓰지 않고 돌볼 수 없다고 해서 돌봄을 포기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응용이다. 하덕을 곧바로 ‘칭찬할 만한 이등’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경문의 비판을 지우는 것도 아니다.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을 다잡는 일과 도덕적으로 훌륭하다는 인정을 받아 내려는 일은 둘 다 힘이 들어 보인다. 그러나 방향은 다르다. 하나는 해야 할 일을 살피고, 다른 하나는 평판만 살필 수 있다. 물어볼 것은 노력했느냐만이 아니다. 그 힘이 누구를 위해 쓰이고 있느냐다.

4. 돌보던 손이 팔을 잡아끌 때

이어지는 대목은 상덕, 상인, 상의, 상례를 차례로 놓는다. 상덕은 무위이면서 무이위이고, 상인은 행하되 무이위이며, 상의는 행하되 유이위이다. 마지막 상례는 상대가 응하지 않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끌어당긴다.

무이위(無以爲)와 유이위(有以爲)에는 동기나 목적, 무엇을 붙드는 마음에 관한 풀이가 있다. 실제 도구를 갖고 있느냐 없느냐로 직역할 수는 없다. 무위도 훌륭한 사람에게 행동 능력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의 독법에서 상덕은 자기 행동을 내세우는 데 바쁘지 않다. 상인은 먼저 나서서 돌보지만 보답을 받아 내는 것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상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는 이유를 가지고 행동한다. 마지막에 이르면 상대의 답을 듣기보다 정해 둔 답을 반드시 받아 내려고 한다.

그 마지막 장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존중을 표현하려던 몸짓이 응하지 않는 사람의 팔을 잡아끈다. 상대는 한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채워져야 할 역할이 되어 버린다.

가족 모임을 정성껏 준비했는데 한 사람이 오기 싫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도 되고, 서운하다고 말해도 된다. 의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널 위해 애쓰는데 안 오면 불효야’가 되는 순간, 돌봄은 복종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명확한 규칙이 눈치로 맞추는 협력보다 무조건 못한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과 임금, 이의를 제기할 절차는 ‘우리는 가족’이라는 말보다 사람을 잘 지킬 수 있다. 문제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형식이 사람의 사정에 더는 응답하지 않는 데 있다.

5. 친밀함을 잃어도 책임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도를 잃은 뒤 덕, 덕을 잃은 뒤 인, 인을 잃은 뒤 의, 의를 잃은 뒤 예.’ 이 내려가는 흐름은 묻는다. 원래 두터웠던 관계에서 무엇이 사라졌기에 다음의 버팀목이 필요해졌는가?

이것은 경고이지 안심하고 내려가도 되는 계단표가 아니다. 그래도 생활의 질문 하나는 얻을 수 있다. 이미 소중한 무엇을 잃었다면, 지금도 지킬 만한 것은 무엇인가?

더는 친밀하지 않은 두 사람도 함께 맡은 일을 공정하게 정리할 수 있다. 손발이 맞지 않게 된 동료도 약속을 지키고 밀린 보수를 치를 수 있다.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로 책임까지 취소할 필요는 없다.

책임이 있다고 관계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경계를 말하고 협업을 공정하게 끝내는 일이 지금 가능한 가장 정직한 배려일 수 있다. 지킨다는 말은 가둔다는 말이 아니다. 실망했다고 해칠 권리가 생기지 않으며, 약속이 있다고 떠날 권리가 사라지지도 않는다.

6. 형식이 빈 껍데기가 될 때

‘예란 충성과 믿음이 엷어진 것이며 어지러움의 첫머리다(夫禮者忠信之薄也,而亂之首也).’ 질서를 지킬 것 같은 예가 어째서 관계를 더 어지럽게 만들 수 있을까?

금이 갔는데 겉모습만 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서러운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다. 그런데 명절 사진에는 모두 웃고 있어야 한다. 사진을 완벽하게 만들려 할수록 웃지 못하는 사람이 화목을 깨뜨리는 사람으로 몰리기 쉽다.

똑같은 행사도 다르게 쓰일 수 있다. 같이 밥을 먹으니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눈다. 추모하는 자리가 있으니 평소에는 말할 수 없던 슬픔을 표현한다. 의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비판의 초점은 속이 빈 예에 있다. 사람의 구체적인 처지가 형식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고, 형식이 오히려 사람에게 감정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다. 그러면 예는 메우려던 틈을 더 벌릴 수 있다. 말과 규칙과 의식은 남아도 된다. 다만 그것들이 실제 생활을 검증하지 않아도 되는 면허가 되어서는 안 된다.

7. 너무 빨리 똑똑해지는 일

‘전식은 도의 꽃이며 어리석음의 첫머리다(前識者道之華也,而愚之首也).’ 전식에는 미리 아는 일과 지혜를 부리는 일에 관한 해석이 있다. 여기서는 익숙한 버릇 하나를 생각해 본다. 사정이 펼쳐지기도 전에 결론부터 도착하는 버릇이다.

동료가 회의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곧바로 무책임하다고 판단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몇 번 의견을 내려고 했지만 번번이 끊겼다. 첫인상이 이미 판결이 되었다면 새 사실도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화(華)와 뒤의 실(實)은 보기 좋은 꽃과 맺힌 열매를 떠올리게 한다. 반응이 빠르고 분류를 잘하면 영리해 보인다. 그런데 그 영리함 덕분에 눈앞의 사람을 더 잘 알게 되었는가? 아니면 듣는 일을 더 일찍 끝내게 되었는가?

결론을 닫지 않는 것은 영원히 판단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보인다’고 근거를 밝히고, 새 정보가 들어오면 고칠 길을 남겨 둔다. 잠정적인 판단은 행동을 돕는다. 고칠 수 없는 판단은 행동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

8. 두터운 쪽에 머문다

마지막 구절은 엷음보다 두터움, 겉모양보다 알맹이를 택하며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고 끝난다.

약속을 지켰는가? 누가 불편하다고 말했을 때 들어 주었는가? 잘못이 드러났을 때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었는가? 화려하지 않을지 몰라도 흠잡을 데 없는 자기소개보다 무거운 일들이다.

채택한 글자 거(居)에서는 자리를 잡고 머무는 느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판본의 처(處)도 능동적인 선택을 나타낼 수 있다. 한 글자는 능동, 다른 글자는 수동이라고 갈라놓을 필요가 없다. 선택의 힘은 이미 거피취차(去彼取此)에 있다. 겉모습을 방어하던 관심을 그 모습을 참되게 할 생활로 돌리는 것이다.

두텁다는 것은 형식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형식 아래에 실제로 무언가 있다는 말이다.

9. 다시 그 벽 앞에서

다음에 벽에 적힌 정직을 보면 곧바로 믿지도, 곧바로 비웃지도 말자. 그 말이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뀌는지 보면 된다. 이 문제에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가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하고, 연습하고, 약속하고, 특별한 날을 정성껏 기념해도 된다. 다만 말했다는 사실을 이미 실천했다는 증거로 쓰지는 말자.

최선이 어렵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성실함을 택하자. 친절의 대가로 복종을 받아 내려는 마음은 조금 줄이고, 상대가 자기 사정을 말할 자리는 조금 넓힌다.

벽에 쓴 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문을 들어온 사람이 실제로 어떤 대우를 받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