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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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14장 · 총 81장

오늘의 도를 붙들다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视之而弗见,名之曰微。听之而弗闻,名之曰希。搏之而弗得,名之曰夷。三者不可致诘,故混而为一。一者,其上不谬,其下不惚,寻寻呵,不可名也,复归于无物,是谓无状之状,无物之象,是谓沕望。随而不见其后,迎而不见其首。执今之道,以御今之有,以知古始,是谓道纪。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오늘을 붙드는가, 옛날을 붙드는가

『도덕경』 주석서를 아무거나 펴서 14장의 마지막 대목을 찾아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옛 도를 붙들어 오늘의 있음을 다스린다. (執古之道,以御今之有)

옛날의 도를 손에 쥐고 오늘의 일을 운용한다는 말이다. 도는 옛날에 있고 경전 속에 감추어져 있으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뒤를 돌아보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독법이다.

지난 이천 년 동안 통행본을 따라 이 장을 읽어 온 방식이 이것이다.

그런데 백서(帛書)에 적힌 것은 ‘옛날(古)’이 아니다. 백서에는 ‘오늘(今)’이라고 적혀 있다.

오늘의 도를 붙들어 오늘의 있음을 다스린다. (執今之道,以御今之有)

오늘의 도를 손에 쥐고 오늘의 일을 운용한다는 말이다.

한 글자 차이로 방향이 뒤집힌다.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다.
변함없는 옛 도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 돌아가고 있는 도를 붙드는 것이다.

전통을 거스르는 말이다.

도는 옛날에 있지 않다.
도는 오늘에 있다.
순간마다 돌아가고 있다.
순간마다 새롭다.

하지만 이 명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장 앞부분에 깔린 세 단계의 밑그림부터 읽어야 한다.

2. 세 감각 모두 붙잡지 못한다

14장은 세 구절로 시작한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이름하여 미(微)라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이름하여 희(希)라 한다.
만져도 잡히지 않으니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
(視之而弗見,名之曰微。聽之而弗聞,名之曰希。搏之而弗得,名之曰夷)

노자의 말은 이렇다.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귀로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손으로 만지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감각 셋에 부정 셋이다.

왜 하필 이 세 감각일까?

사람이 구체적인 사물을 붙잡는 가장 기본적인 세 방향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알아볼 때 우리는 늘 그것이 어떤 감각에 남긴 반응을 통해 안다. 색이 있고(시각), 소리가 있고(청각), 모양이 있다(촉각). 이 셋은 세계를 구체적인 사물들로 잘라 내는 세 벌의 칼이다.

노자는 이 세 벌의 칼로는 도를 잘라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시각으로는 색을, 청각으로는 소리를, 촉각으로는 모양을 잘라 낼 수 없다.

도는 어느 감각의 단면에도 들어 있지 않다.


면적과 건물 나이만으로 집값을 추정하는 모델을 떠올려 보자. 규칙은 배울 수 있지만 오후에 방으로 드는 빛이나 주민이 떠나기 아쉬워하는 이유는 모른다. 그런 것이 없어진 게 아니라 모델의 질문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데이터에 있지만 모델이 활용하지 않는 정보와, 아예 데이터에 기록되지 않은 삶의 경험은 다르다. 후자까지 ‘학습 데이터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도구의 표현 범위가 세계의 범위와 같지 않다는 점이다. 도가 존재한다는 증명도 아니고, 도를 아직 학습하지 못한 피처로 줄이는 것도 아니다.

그 한계를 기억하며 세 부정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읽는 도는 분류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분류로 다 담을 수 없는 움직임이다.

3. 붙잡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노자는 이어서 말한다.

이 셋은 끝까지 캐물을 수 없으니, 뒤섞여 하나가 된다. (三者不可致詰,故混而爲一)

치힐(致詰)은 끝까지 캐묻는다는 뜻이다.

왜 보아도 보이지 않는지, 왜 들어도 들리지 않는지, 왜 만져도 잡히지 않는지를 따로따로 물을 수는 없다. 세 부정이 가리키는 것이 세 가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은 합쳐서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그 자리는 무엇인가?

바로 도의 자리다.

영 셋을 더해 놓고 합이 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부재도 존재도 증명되지 않는다.

이 독법에서 세 부정은 도를 구체적인 물건으로 찾으려는 세 방법을 내려놓게 한다. 도가 ‘있다’는 것은 이 글이 펼쳐 가는 철학적 판단이지, 감각의 무반응에서 계산해 낸 답이 아니다.


여기서 오독 하나를 막아 두어야 한다.

붙잡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 가장 분명히 짚어 두어야 할 점이 이것이다. 감각에 반응이 없다는 것, 곧 붙잡을 만한 구체적인 사물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도는 거기 있다. 다만 감각으로 붙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으로 있지 않을 뿐이다.

머신러닝 비유에도 경계가 있다. 영이 아닌 오차에는 학습 부족뿐 아니라 잡음, 측정 오류, 주어진 입력으로 없앨 수 없는 불확실성도 포함될 수 있다. 전부를 ‘아직 못 잡은 실제 신호’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나의 표현을 사태의 전부로 착각하지 말자는 비유이지, 손실 함수로 도를 측정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자가 14장의 이 대목에서 세우는 것도 같은 일이다. 도는 없는 것이 아니다. ‘감각으로 붙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감각으로 붙잡을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그 일이지, 존재 자체가 아니다.

4. 상태 없는 상태

노자는 이어서 떠오른 이 자리에 이름을 붙인다.

그 하나는 위라고 밝지 않고, 아래라고 어둡지 않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구나, 이름 붙일 수 없다. 다시 사물 없음으로 돌아간다. (一者,其上不謬,其下不惚,尋尋呵,不可名也,復歸於無物)

위라고 밝지 않고, 아래라고 어둡지 않다. 빛나는 신성한 무엇도 아니고, 캄캄한 허무도 아니다. 양 끝의 어떤 묘사도 들어맞지 않는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구나(尋尋呵)’는 면면히 끊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청나라의 공광삼은 운을 근거로 兮의 옛소리를 阿처럼 읽는 견해를 제시했다. 출토 문헌의 可·呵·兮 대응은 옛소리와 글자 통용을 논하는 증거를 더해 준다. 그러나 ‘옛사람은 현대 중국어의 아로 읽었고 후대 사람은 이천 년 내내 틀렸다’고 단순화할 수는 없다.

이 글은 정리본의 呵를 남기되 감탄하는 ‘아’나 ‘구나’로 그 말투를 살린다. 목소리를 가깝게 듣기 위한 선택이지, 선진 시대 발음을 완전히 복원했다는 선언은 아니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구나, 이름 붙일 수가 없어.” 먼저 무언가를 가리키며 감탄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경전의 높은 자리에 올려놓기 전에 말이다.


이름을 붙이는 대목을 계속 보자.

이를 일러 상태 없는 상태, 사물 없는 형상이라 한다. (是謂無狀之狀,無物之象)

이 두 구절은 이 장에서 가장 절묘한 두 이름이다.

상태 없는 상태. 아무 상태도 없는 상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이것이 ‘상태 없음’이 아니라 ‘상태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아무 구체적인 상태도 없음’ 자체가 하나의 상태다.

사물 없는 형상.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형상 없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 없는 형상’이다.

‘아무 구체적인 사물도 없음’ 자체가 하나의 형상이다.

두 이름은 아주 정확한 일을 한다. 철저히 부정하고 난 뒤에도 남는 그 자리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상태 없음’과 ‘사물 없음’은 계기의 수치가 영으로 다가가는 수학적 극한이 아니다. 그렇게 쓰면 비유가 증명인 척하게 된다.

내가 읽는 것은 도를 한 가지 모양이나 물건으로 고정하려 할 때마다 그 규정에서 벗어난다는 관계다. ‘상태 없는 상태’는 그 고정할 수 없음에 말을 붙인다.

숨은 실체를 계산해 낸 것이 아니다. 이미 정해진 형태를 움직임의 전부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일러 물망(沕望)이라 한다. (是謂沕望)

沕望은 어렴풋하다는 뜻이다.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주의하자. 沕望은 모호함이 아니다.

모호함은 또렷하게 붙잡지 못하는 것이다.
沕望은 ‘붙잡을 수 없지만 있다’는 구조적 상태를 정확하게 그려 낸 말이다.

모호함은 도구의 한계다.
沕望은 붙잡히는 대상 자체가 놓인 자리다.

이렇게 읽는 沕望은 미지를 정확히 측정된 것처럼 꾸미지 않는다. 붙잡을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아는 것도 명료함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5. 머리도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 구절이다.

따라가도 그 뒤가 보이지 않고, 맞이해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隨而不見其後,迎而不見其首)

뒤따라가도 꼬리가 보이지 않고, 마주 나가 맞아도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두 구절은 도가 시간 속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도는 지금 이 순간 가만히 멈춘 채로만 상태도 사물도 없는 것이 아니다. 시간 속에서도 머리가 없고 꼬리가 없다.

뒤에서 쫓아가도 끝에 닿지 못하고, 앞에서 맞이해도 시작을 찾지 못한다. 도는 줄곧 움직이지만, 여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도 여기가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도 없다.

도는 만들어져 나온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에 끝나지도 않는다.

도는 착구 순환(鑿構循環)이 돌 때마다 순간순간 솟아나는 여항(餘項)이다. 처음 솟아난 때도 없고, 마지막으로 솟아날 때도 없다. 착구 순환이 돌고 있는 한 여항은 계속 솟아난다.

6. 도는 오늘에 있다

밑그림을 여기까지 깔았으니 이제 마지막 대목을 읽을 수 있다.

오늘의 도를 붙들어 오늘의 있음을 다스리고, 그로써 옛 시작을 안다. 이를 도기(道紀)라 한다. (執今之道,以御今之有,以知古始,是謂道紀)

오늘의 도를 붙들어 오늘의 구체적인 것들을 운용하고, 그로써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도의 리듬이다.

‘오늘(今)’이라는 글자가 결정적이다.

도는 옛날에 정해져 경전 속에 감추어진 채 우리가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는 골동품이 아니다.

도는 오늘 돌아가고 있다.

순간마다 돌아가고, 순간마다 새롭다.


앞의 대목들과 한 줄기로 이어진다.

둘째와 셋째 대목은 도가 감각으로 잴 수 있는 극한 너머에 있지만 그 자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세웠다.
넷째 대목은 그 자리에 ‘상태 없는 상태, 사물 없는 형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섯째 대목은 시간 속의 움직임을 그렸다. 따라가도 맞이해도 머리와 꼬리가 없고, 도는 줄곧 움직이되 시작도 끝도 없다.

여섯째 대목이 이것을 거두어들인다. 도에 시작도 끝도 없고 도가 줄곧 움직인다면, 도는 옛날 어느 순간에 한 번 놓이고 만 골동품이 아니라 순간마다 솟아나는 움직임이다.

붙드는 것은 옛날에 놓여 있던 골동품이 아니다.
붙드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솟아나고 있는 움직임이다.

오늘의 도를 붙든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노자는 오늘의 도를 붙들어 그로써 옛 시작을 안다고 말한다.

붙드는 것은 오늘의 도인데, 어떻게 거꾸로 옛날의 시작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순이 아니다.

오늘의 도에는 옛날의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도는 영영 사라지지 않고 순간마다 새로 솟아난다’는 그 일 자체는 들어 있다.

오늘의 여항은 오늘의 것이고, 옛날의 여항은 옛날의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다.

그러나 ‘여항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는 일은 옛날에도 오늘에도 똑같다.

오늘 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똑히 보는 사람은 옛날의 시작도 이해할 수 있다. 옛날의 시작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여항은 영영 사라지지 않고 순간마다 새로 솟아난다’는 바로 이 구조였기 때문이다.

옛 도를 찾으러 옛날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오늘의 도 안에 옛 도가 돌아가던 방식이 이미 들어 있다.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이를 도기라 한다.’

이것이 도의 리듬이다. 도는 줄곧 돌아가고 있지만(紀), 머리도 꼬리도 없다. 순간마다 새로 솟아날 뿐이다.

장 전체의 추론이 여기서 매듭지어진다.

감각의 부정 → 떠오르는 자리 → 그 자리에 붙인 이름 → 그 자리가 시간 속에서 돌아가는 모습 → 오늘을 붙든다 → 거꾸로 옛 시작을 안다 → 도의 리듬.

모든 구절이 마지막 한 구절을 위해 일한다.

7. 왜 옛날이 아니라 오늘인가

마지막으로 첫머리의 글자 차이, 오늘을 붙드느냐 옛날을 붙드느냐로 돌아가 보자.

백서의 ‘집금(執今)’과 통행본의 ‘집고(執古)’는 글자로는 한 자 차이다.

이 글이 ‘오늘의 도를 붙든다’를 택하는 까닭은 앞의 물음을 눈앞으로 돌려놓기 때문이다. 고정된 물건으로 붙잡을 수 없는 도를 지금의 움직임에서 만난다. 오늘의 생겨남으로 예나 지금이나 일어나는 생겨남을 이해할 때 ‘오늘’과 ‘옛 시작’이 이어진다.

‘옛 도를 붙든다’도 복고나 보수로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금을 관통하는 도를 지킨다고 읽는 길도 있다. 그래도 이 글은 ‘오늘’로 들어가려 한다. 답을 전부 과거에 맡겨 놓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논문 두 번째 편이 비교하는 해석의 무게중심이다. 통행본이 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증명도, 옛사람이 왜 글자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백서로 읽으면 노자가 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도는 옛 경전 속에서 당신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도는 오늘, 순간순간의 움직임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 솟아나는 여항을 붙든다.
그것으로 지금 이 순간의 일을 운용한다.
그러면 옛날의 시작도 알게 된다.

이 일은 옛날에도 오늘에도 똑같기 때문이다.

순간마다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