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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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知道德經解 · 한국어 편집·재구성판
제4장 · 총 81장

도는 비어 있다

秦汉(대지) · Han Qin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道冲,而用之有弗盈也。渊呵,似万物之宗。锉其兑,解其纷,和其光,同其尘,湛呵,似或存。吾不知其谁之子,象帝之先。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 주석은 논문의 설명에 따라 을본의 ‘道冲’을 채택합니다. 일부 온라인 전재본에 나오는 ‘道中’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바탕이 된 논문 읽기 (영어·중국어)

1. 기어를 바꾸다

4장에 이르면 기어가 확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앞의 세 장에는 저마다 구체적인 시연이 있었다. 1장은 유와 무가 끌질 한 번, 곧 같은 착(鑿)에서 나온다고 했고, 2장은 아름다움을 세우면 추함이 함께 선다고 했으며, 3장은 성인이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말했다. 어느 장이든 구체적인 장면 하나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4장은 첫머리부터 이렇다.

도는 비어 있으면서 솟아오른다. 쓰고 또 써도 차지 않는다. (道沖,而用之有弗盈也)

구체적인 장면은 사라지고, 독자는 느닷없이 순수한 추상과 마주한다. 여기까지 따라오다가 조금 버겁다고 느낀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4장은 앞의 세 장이 하지 않은 일을 한다. 앞에서 시연한 것 전부를 한 층 위로 끌어올린다. 주어가 성인에서 도로 바뀌고, 물음이 ‘성인은 어떻게 하는가’에서 ‘도는 어떠한가’로 바뀐다.

구체가 추상으로 바뀌었을 뿐, 말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2. 써도 또 차지 않는다

첫 구절이다.

도는 비어 있으면서 솟아오른다. 쓰고 또 써도 차지 않는다.

충(沖)은 비어 있으면서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우물을 떠올리면 된다. 들여다보면 텅 빈 것 같은데, 퍼 쓰면 물이 끊임없이 솟는다.

용지유불영야(用之有弗盈也)의 유(有)는 우(又)와 통해서 되풀이를 뜻한다. 써도 또 차지 않고, 써도 또 차지 않는다.

통행본에는 혹불영(或不盈)이라고 되어 있다. 혹(或)은 불확실함을 나타내는 말이라, 어쩌면 조금 빈 데가 남을지도 모른다는 투가 된다. 백서(帛書)의 유불영, 곧 ‘또 차지 않는다’는 되풀이해서 못 박는 말이다. 쓸 때마다 차지 않는다.

두 판본은 세기가 한 단계 다르다. 통행본은 ‘도는 써도 어쩐지 늘 가득 차지는 않는 것 같다’로 읽히고, 백서는 ‘도는 써도 또 차지 않고, 써도 또 차지 않는다. 영영 포화되지 않는다’로 읽힌다. 글자가 품은 깊이가 전혀 다르다.

왜 도는 써도 차지 않을까?

1장의 핵심으로 돌아가 보자. 도는 보편적 여항(餘項)이다. 착으로 경계를 한 번 가를 때마다 구(構)가 하나 선다. 하지만 구를 어떻게 세우든 여항은 그대로 있다. 착이 여항을 가져다 쓸 때마다 여항은 여전히 남아 있고, 언제든 다시 깎아 낼 수 있다. ‘써도 또 차지 않는다’는 바로 이 이야기다.

도는 우물이지만, 이 우물의 물은 정해진 저장량이 아니다. 두레박으로 한 번 길어 올려도 우물은 여전히 가득하다. 언제나 가득하다.

아무리 써도 비지 않는다. 착구 순환(鑿構循環)이 끝내 포화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이다.

4장은 여기서 도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한 층 더 파고든다. 1장은 도가 여항이라고 했고, 4장은 그 여항이 무한하다고 말한다.

3. 만물의 근원인 듯하다

두 번째 구절이다.

깊구나, 만물의 근원인 듯하다. (淵呵,似萬物之宗)

연(淵)은 깊은 물이다. 겉보기엔 고요하지만 밑바닥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만물지종(萬物之宗)은 만물의 근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글자가 하나 있다. ‘만물의 근원이다’가 아니라 ‘만물의 근원인 듯하다(似)’다.

한 글자 차이다.

도가 만물의 근원‘이다’라고 하면 도는 가장 높은 구가 되어 버린다. 가장 높은 생산자, 가장 높은 원천, 가장 높은 주재자가 된다. 노자는 ‘듯하다’를 쓴다. 도는 만물의 근원처럼 보일 뿐이다.

왜일까? 모든 구는 여항에서 깎여 나오니, 만물은 도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는 만물을 소유하지 않고, 세우지 않으며, 하나의 주체로서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 도는 만물이 솟아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일 뿐이다.

이 한 글자의 차이가 곧 식민화(殖民化)와 함육(涵育)의 차이다.

‘만물의 근원이다’ — 도는 높은 곳에 앉은 주재자이고 만물은 그 산물이다. 식민화의 자세다.
‘만물의 근원인 듯하다’ — 도는 만물이 솟아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일 뿐 만물을 차지하지 않는다. 함육의 자세다.

뒷날의 주석가들은 흔히 ‘듯하다’를 ‘이다’로 읽어, 노자의 도를 가장 높은 형이상학적 실체로 쌓아 올렸다. 그러나 노자는 분명히 말했다. ‘듯하다’이지 ‘이다’가 아니라고.

4. 네 가지 동작

이어지는 네 구절이 이 장의 핵심이다.

날을 꺾고, 얽힘을 풀고,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과 함께한다. (銼其兌,解其紛,和其光,同其塵)

네 구절은 가락이 같다. 모두 세 글자에 동작 하나씩을 담았다. 시처럼 읽히지만, 풀어 놓고 보면 아주 정밀한 구조적 조치다.

날을 꺾는다(銼其兌): 태(兌)는 예(銳), 곧 날카로움의 본래 글자다. 날카로운 데를 꺾어 무디게 한다.

날카로움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구가 다른 층을 베고 들어가려 할 때 앞장서는 그 끝이다. 구를 세우는 동작에는 모두 날이 있다. 현명함을 올려 세우는 것도, 아름다움을 정하는 것도, 딱지를 붙이는 것도 날이다. 날을 꺾는다는 것은, 구를 세우는 동작이 막 식민화의 압력을 낳으려 할 때 베고 들어가던 힘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얽힘을 푼다(解其紛): 분(紛)은 뒤엉킴이다. 뒤엉킨 것을 풀어낸다.

얽힘이란 무엇인가? 구와 구가 서로 뒤엉켜 서로를 짓누르는 상태다. 현명함을 하나 세우면 더 현명함을 또 세워야 하고, 법을 하나 세우면 그 아래 시행령을 또 세워야 한다. 구 하나를 세우면 그것을 떠받치느라 수많은 구를 세워야 한다. 얽힘을 푼다는 것은, 이렇게 뒤엉킨 구들의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 구마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다.

빛을 누그러뜨린다(和其光): 여기서 빛은 눈부심이다. 눈부신 것을 부드럽게 가라앉힌다.

빛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구가 번쩍이며 남의 속까지 비추려 드는, ‘나는 진리를 보았다’는 자세다. 구를 세우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되기 쉽다. 제 구가 서자마자 자기가 눈부시게 빛나니 남을 비춰 주어야 한다고 느낀다. 빛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은 이 빛을 거두어 부드럽게 가라앉혀, 눈을 찌르지 않게 하는 일이다.

티끌과 함께한다(同其塵): 티끌은 이미 내려앉은 것이다. 흙먼지와 함께 있는다.

티끌과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를 따로 내세우지 않는 것, 위에 있는 자리, 바깥에 있는 자리, 앞서 나간 자리, 초월한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 최상위 구가 되지 않는다.

이 네 동작을 합치면, 2장과 3장이 말한 함육을 추상의 층위로 옮겨 놓은 판본이 된다.

2장은 성인이 자기에게 하는 일이다. 무위, 불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음.
3장은 성인이 백성과 아는 사람에게 하는 일이다. 현명함을 올려 세우지 않기,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기, 발을 빼지 못하게 하기.
4장은 도 자신이다. 꺾고, 풀고, 누그러뜨리고, 함께한다.

주어는 바뀌었지만 구조는 같다.

이 네 동작에는 한 층 더 깊은 뜻이 있다. 도는 구를 없애지도, 구에 맞서지도, 구를 대신하지도 않는다. 다만 꺾고, 풀고, 누그러뜨리고, 함께할 뿐이다.

도는 구의 맞은편에 서 있는 무엇이 아니다. 모든 구 안에 있고 모든 구와 함께 있지만, 어느 구에도 거둬들여지지 않는 나머지다.

날을 꺾지 않으면 구와 맞서게 된다. 맞서는 순간 구에 반대하는 한 파가 되고, 그것이 또 하나의 새 구가 된다.
얽힘을 풀지 않으면 구의 얽힘 속에 빠져든다. 빠져드는 순간 구에 먹혀 구가 되어 버린다.
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면 눈을 찌르는 이물질이 된다. 눈을 찌르는 순간 밖으로 밀려난다.
티끌과 함께하지 않으면 스스로 새로운 최상위 구로 선다. 스스로 서는 순간 도 자신을 거스르게 된다.

네 면을 한꺼번에 해야 도는 모든 구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느 구에도 거둬들여지지 않는다.

5. 자리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막아 두어야 할 오독이 하나 있다.

위의 네 구절을 읽고 나면, 도가 의도를 지닌 주체처럼 스스로 나서서 꺾고, 풀고, 누그러뜨리고, 함께한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읽으면 도는 의도를 가진 집행자, 곧 가장 높은 주체가 된다. 결국 다시 제(帝), 하늘 꼭대기의 주재자가 되고 만다.

노자는 이 장 끝에서 이런 이해를 틀어막는다(‘제보다 앞선 듯하다’). 그러니 여기서 이 구분부터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참뜻은 두 층까지 읽어야 드러난다.

첫째 층: 도 자신은 동작을 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꺾고, 풀고, 누그러뜨리고, 함께하는 것은 도가 나서서 하는 일이 아니다. 구가 도에 부딪칠 때 스스로 꺾이고, 풀리고, 누그러지고,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떠올려 보자. 돌로 물을 내리치면 닳아 매끄러워지는 쪽은 돌이다. 빛이 깊은 못에 비쳐 들면 빛은 스스로 흩어진다. 물도 깊은 못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들에 부딪치려 드는 것은 무엇이든 부딪치는 순간 스스로 바뀐다.

도도 그렇다.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에 부딪치려 드는 구, 곧 스스로 최상위 구가 되어 모든 것을 덮으려는 구는 부딪치는 순간 제 날이 꺾이고, 제 얽힘이 풀리고, 제 빛이 누그러지고, 티끌과 함께하게 된다.

도는 자리이지, 주체가 아니다.

둘째 층: 그러나 도를 배우는 함육하는 사람은 도가 아니다. 그에게는 주체가 있다.

함육하는 사람이 할 일은 도의 ‘함’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도는 애초에 ‘하지’ 않으니까. 그가 할 일은 자기 자신을 그런 자리로 만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자기의 날을 꺾고, 자기와 남 사이의 얽힘을 풀고, 자기의 빛을 누그러뜨리고, 티끌과 함께한다. 남의 구에 맞서지 않고, 자기를 식민화의 압력을 내뿜는 자리에서 남이 스스로 서게 하는 자리로 옮겨 놓는다.

주체는 도의 자리를 본받되, 도 행세를 하지는 않는다.

두 층을 합치면 이렇다.

도는 주체 행세를 하지 않는다(그러면 다시 제가 된다).
함육하는 사람은 도 행세를 하지 않는다(그러면 다시 구를 세우는 사람이 된다).

도는 자리로서, 함육하는 사람은 그 자리를 배우는 주체로서 있다. 4장의 네 동작이 글자 그대로 품고 있는 깊이가 이것이다.

6.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지는 구절이다.

맑고 깊구나,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湛呵,似或存)

담(湛)은 맑고 깊고 고요하다는 뜻이고, 사혹존(似或存)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이다.

도는 거기 서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허무도 아니다. 있음과 있지 않음 사이의 어떤 상태다.

언제 있고, 언제 없는가?

구가 조일수록 여항은 달아난다.
구가 느슨할수록 여항은 드러난다.

어떤 구체적인 구를 붙든 채 ‘도를 찾아야겠다, 도는 어디 있나’ 하고 나서면 도는 곧바로 달아난다. 이미 도를 하나의 목표 구로 삼아 쫓고 있기 때문이다. 도는 모든 목표 구 바깥에 있는 여항이다. 반대로 어떤 구도 붙들지 않고, ‘도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조차 세우지 않으면 도는 거기 있다.

1장에서 말한 두 가지 수행을 달리 말한 것이기도 하다. ‘늘 욕망 없이 그 미세한 시작을 본다(恒無欲也,以觀其眇)’는 ‘나는 원한다’를 내려놓으면 묘(眇)가 드러난다는 말이고, ‘늘 욕망을 품고 그것이 닿는 경계를 본다(恒有欲也,以觀其所徼)’는 방향을 품고 해 나가면 요(徼)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늘 욕망이 없을 때 도가 있는 것이 보인다.
‘도를 찾아야겠다’는 욕망을 품으면 도는 달아난다.

‘있는 듯 없는 듯하다’는 얼버무리는 말이 아니다. 여항이 구에 반응하는 원리를 정확히 짚은 말이다.

7. 나는 모른다

이 구절들을 지나고 나면 노자는 뜻밖의 말을 한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 (吾不知其誰之子)

철학 고전을 쓰는 사람이 제 책에서 ‘나는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도 한계를 인정하는 말,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 아니다. 구조상 반드시 해야 하는 ‘모른다’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할까?

‘도는 누구의 자식인가’라는 물음은 겉으로는 도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이 물음 자체가 이미 도를 하나의 구로 놓고 그 출처를 캐묻고 있다. 그런데 도는 여항이지 구가 아니다. 여항은 어떤 구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구의 공통 조건이다.

여항의 출처를 묻는 것은 ‘모든 물음의 전제는 어떤 물음에서 나왔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전제는 물음보다 앞서니 물을 수가 없다.

노자가 도는 무엇무엇에서 났다고 답했다면, 1장에서 스스로 세운 규칙을 곧바로 어겼을 것이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也,非恒道也).’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모른다(吾不知)’뿐이다.

이 세 글자는 노자가 1장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이다.

여기서 짚어 둘 세부가 하나 더 있다. 노자는 아(我)가 아니라 오(吾)라고 썼다. 책 전체에서 노자는 이 두 글자를 구별한다.

‘아’는 관계 속에서 말하는 대명사다. ‘내가 무위하니 백성이 스스로 변화한다(我無爲而民自化)’의 ‘아’는 나와 백성이라는 맞대응 속에 서 있다.
‘오’는 알아차림 자체가 나서서 내는 목소리다. ‘나는 모른다’의 ‘오’는 어떤 맞대응 구조 안에도 있지 않다.

뒷날 장자는 이 구분을 하나의 수행으로 만들었다. 오상아(吾喪我), 곧 오가 아를 잃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잃는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X다, 나는 Y다’ 하는 관계 속의 자리를 하나씩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자리를 내려놓으면 오가 거기 있다.

노자가 여기서 ‘오’를 쓴 것은 알아차림 자체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모른다’ 한마디의 무게가 여기서 나온다.

8. 제(帝)보다 앞선 듯하다

마지막 구절이다.

제보다 앞선 듯하다. (象帝之先)

제보다도 이르다는 말이다.

제란 무엇인가? 모든 구 가운데 가장 높은 것, 가장 높은 자리에서 구를 세우는 자, 가장 높은 주재자, 가장 높은 질서다. 노자는 도가 이 가장 높은 구보다도 앞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앞섬은 시간의 앞섬이 아니라 구조의 앞섬이다.

구를 세우는 자든, 주재자든, 질서든, 일단 서고 나면 그것은 이미 구다. 여항은 그것이 서기 전부터 거기 있었고, 선 뒤에도 언제까지나 그 밖으로 새어 나온다. 여항은 모든 구 세우기보다 앞서고, 또 모든 구 세우기보다 뒤에 있다.

여항은 시간의 사슬 위에 있지 않다. 그 사슬의 모든 고리 바깥에 있다.

그러니 도를 ‘더 높은 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를 다시 구로 만들어 버린다.

도는 제라는 구를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여항이다.


4장은 이 책의 첫 번째 추상이다. 앞의 세 장이 시연한 함육의 조치를 모두 한 층 위로 끌어올려, 도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에 내려앉힌다.

이 장은 ‘도는 어떠한가’에 글자 그대로의 정의를 내놓는다. 충(비어 있으면서 솟아남), 연(깊고 고요함), 사(‘이다’가 아님), 꺾고 풀고 누그러뜨리고 함께함(네 면의 동작), 담(있음과 없음 사이).

또 가장 빠지기 쉬운 오독, 곧 도를 가장 높은 주재자로 여기는 길을 틀어막고, 알아차리는 사람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을 보여 준다. ‘아’가 아니라 ‘오’로 말한다.

이 장 전체가 결국 하는 일은 자리 매김 하나다.

도는 자리로서, 함육하는 사람은 그 자리를 배우는 주체로서 있다. 도는 주체 행세를 하지 않고, 함육하는 사람은 도 행세를 하지 않는다.

둘이 저마다 제자리에 있는 것. 뒤에서 도 닦기를, 성인을, 백성 다스리기를 말하는 모든 장이 되돌아올 자리 나눔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