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를 떠받들지 말라
이 장의 중국어 원문
백서 정리본 · 이 주석에서 채택한 중국어 본문
不上贤,使民不争。不贵难得之货,使民不为盗。不见可欲,使民不乱。是以圣人之治也,虚其心,实其腹,弱其志,强其骨,恒使民无知无欲也。使夫知不敢弗为而已,则无不治矣。
판본과 구두점에 관하여
저자의 『道德经注·君子不器』에서 채택한 백서 정리본을 따릅니다. 갑본과 을본을 함께 참고하고 글자를 교정하거나 보충한 본문으로, 어느 한 사본을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장 번호는 통행본을, 구두점은 이 주석을 따릅니다. 읽는 언어를 바꾸어도 경문의 중국어 표기는 바뀌지 않습니다.
1. 우민론자라는 오명
노자는 이천 년 동안 우민론자라는 비난을 들어 왔는데, 그 비난이 주로 나온 곳이 바로 3장이다.
현명한 이를 위에 올려 세우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는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이 되지 않는다. 바랄 만한 것을 내보이지 않으면 백성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不上賢,使民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爲盜。不見可欲,使民不亂)
전통적으로 흔한 오독은 글자를 이렇게 따라간다. 백성이 재능 있는 사람을 우러르지 못하게 하면 다투지 않고, 드문 물건이 귀해 보이지 않게 하면 훔치지 않고, 탐낼 만한 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뒤에는 더 독한 말이 이어진다.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고,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한다.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
흔한 오독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아니 비틀어서 받아들인다. 백성의 마음을 텅 비우고 뜻을 꺾어 놓되 배는 부르고 뼈는 튼튼하게 해 주면, 다루기 쉽고 생각 없는 이상적인 무리가 된다는 것이다.
역대로 노자를 싫어한 사람들이 주로 물고 늘어진 것이 이 장이다. 유가는 그를 반지성이라 욕했고, 20세기 초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진보에 반대한다고 욕했으며, 오늘의 독자는 사람을 길들여 노예로 만들자는 소리로 듣는다.
사실 이 오명은 통행본과 그 주석이 뒤집어써야 할 몫이 더 크다. 통행본으로 읽으면 정말 우민론처럼 읽히기 쉽다. 그러나 백서(帛書)로 읽으면, 특히 이 장의 가장 깊은 한 구절에 이르면, 뜻 전체가 뒤집힌다.
2. 상(上)은 동사다
먼저 앞의 세 구절을 제대로 읽어 보자.
불상현(不上賢)의 상은 동사다. 사역으로 쓰여 ‘…을 위에 올린다’는 뜻이 된다. 노자는 현명한 이를 우러르는 감정이나 태도를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현명함을 딱지로 세우는 동작을 하지 말라고 한다.
통행본은 이 글자를 상(尙)으로 적어서, 동작을 감정이나 태도로 누그러뜨렸다. 백서의 상(上)은 더 구체적이다. 끌질 한 번, 곧 착(鑿)이다.
현명함을 구(構)로 세우는 것은 사회에 끌을 한 번 대는 일이다. 그렇게 경계를 가르면, 본래 저마다 잘하는 것이 따로 있던 사람들이 이 잣대에 따라 두 무더기로 나뉜다. 한쪽은 현명함, 다른 쪽은 현명하지 않음이다. 뒤쪽 무더기는 원래 거기 있던 것이 아니라, 잣대가 세워지는 찰나에 튕겨 나온 것이다.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현명함 쪽 무더기에 들어가려고 서로 밀치기 시작한다.
다툼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이 날 때부터 다투는 게 아니다. 이 잣대가 생기고 나서야 다투기 시작한다.
어느 IT 기업에서나 날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우수 사원’이라는 딱지를 세우면, 그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저절로 ‘우수하지 않음’으로 분류된다. 그러면 다들 연말 인사고과를 두고 다투기 시작한다. 무슨 일을 할지를 두고 다투는 게 아니라, 딱지의 어느 쪽에 떨어지느냐를 두고 다툰다. ‘유니콘’이라는 딱지를 세우면, 기업가치 10억 달러에 못 미치는 회사는 모두 상대적인 실패작이 된다. 그러면 다들 기업가치라는 숫자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시작한다.
딱지 하나를 세우는 일은 곧 착 한 번이고, 억눌리는 부류 하나를 만드는 일이며, 다툼 하나를 불러내는 일이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도 같은 논리다. 희귀함을 가치의 딱지로 세우면, 희귀한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모두 상대적으로 깎아내려진다. 도둑질은 이 잣대에서 나온다. 사람의 본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희귀함이라는 구가 불러낸 것이다.
‘바랄 만한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다. 바랄 만한 것을 딱지로 세우면 욕망이 이 잣대에서 나온다. 욕망은 원래 마음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세워진 구가 불러낸 것이다.
세 구절의 참뜻은 이렇다.
구를 세우는 동작을 하지 말라.
하나를 세우면 한 부류가 튕겨 나오고, 억눌리는 한 부류가 생긴다.
2장에서 이미 말했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아보면 추함은 이미 거기 있다. 아름다움을 세우면 반드시 추함이 튕겨 나오니, 이것이 착구 순환(鑿構循環)의 대가다. 3장은 이 대가를 다스림의 자리로 가져온다. 다스림의 첫걸음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구를 세우고 있는 동작부터 거두는 것이다.
세 구절이 모두 불(不) 자로 시작하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소극성이 아니다. 다스림의 층위에서 하는 덜어 내기다. 식민화(殖民化)의 압력을 낳는 동작부터 거두어 놓고,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를 말한다.
3. 네 방향은 양생 비결이 아니다
앞의 세 구절에서 거두기를 말한 노자는, 이어서 성인(聖人)이 무엇을 하는지 말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고,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하여, 늘 백성이 앎도 없고 욕망도 없게 한다. (是以聖人之治也,虛其心,實其腹,弱其志,强其骨,恒使民無知無欲也)
이 다섯 구절은 몸을 보살피는 양생(養生) 비결처럼 읽히지만, 사실은 정밀한 구조적 조치다.
핵심은 이것이다. 조치의 대상은 백성이지만, 참뜻은 백성을 어떤 모습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백성을 성인의 구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데 있다.
왜 그럴까? 백성의 마음과 뜻과 욕망은 많은 경우 백성 스스로 길러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이 구를 세운 뒤에 식민화되어 들어온 것이다.
현명함을 위에 올려 세우면, 백성은 현명해지는 것을 뜻으로 삼는다.
재화를 귀하게 여기면, 백성은 재화를 얻는 것을 욕망으로 삼는다.
바랄 만한 것을 내보이면, 백성의 마음은 그것으로 가득 찬다.
백성은 제가 원하는 것을 좇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인이 세운 구의 심부름을 하고 있다. SAE 틀에서 말하는 내적 식민화의 전형이다. 제 목표를 좇는다고 여기지만, 실은 남이 세운 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흔한 모습은 이렇다. 어떤 아이가 어려서부터 ‘전교 1등’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름이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 아이는 커서 정말로 전교 1등이 되려고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모든 시간을 그쪽에 쏟아붓는다. 스스로는 그것이 제 뜻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위에서 그 잣대가 내려온 뒤 현명함 쪽으로 잘려 들어갔고, 그 뒤로 남은 삶 전부를 이 잣대를 위해 일한 것이다.
그 아이 자신의 뜻은 어디 있을까? 자랄 기회가 없었다. 그 자리를 식민화되어 들어온 가짜 뜻이 꽉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네 방향의 조치가 정말로 하려는 일은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 성인의 개념이 채워 넣은 예측의 틀을 비워 낸다. 마음이 비어야 백성이 제 것을 넣을 수 있다.
배를 채운다: 삶의 바탕에 여유가 있게 한다. 네 방향 가운데 정말로 무언가를 하는 동작은 이것 하나다.
뜻을 약하게 한다: 식민화되어 들어온 가짜 뜻을 약하게 한다. 성인이 백성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백성 자신의 뜻은 자랄 곳이 없다.
뼈를 튼튼하게 한다: 백성이 제 뜻으로 설 수 있을 만한 바탕을 갖추게 한다.
네 방향을 합치면, 백성이 스스로 서는 데 필요한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 된다.
마지막 구절 ‘늘 백성이 앎도 없고 욕망도 없게 한다’에 이르면 많은 사람이 벌떡 일어선다. 봐라, 노자는 백성에게 지식도 욕망도 없게 하려 하지 않느냐, 이게 우민이 아니면 뭐냐고.
아니다.
노자가 하는 말은 백성이 아는 사람의 구에 식민화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백성에게 ‘아는 자의 앎’이 없게 하고, ‘아는 자의 욕망’이 없게 하라는 뜻이다. 백성 자신의 앎과 욕망은 스스로 자라나야 한다. 아는 사람의 뜻이 백성의 자리에 부어져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읽고 나면 노자의 얼굴이 통째로 달라진다. 그는 우민론자가 아니라 반식민론자다. 특히 자리에 앉은 사람이 제 앎과 욕망으로, 평범한 백성이 본래 스스로 가질 수 있었던 앎과 욕망을 식민화하는 데 반대한다.
4. 이 장의 가장 깊은 한 구절
3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맨 끝에 있다.
저 아는 이들이 감히 하지 않을 수 없게 할 따름이니, 그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使夫知不敢弗爲而已,則無不治矣)
통행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저 지혜로운 자들이 감히 하지 못하게 한다. (使夫智者不敢爲也)
두 판본은 방향이 정반대다.
백서는 ‘使夫知不敢弗爲’, 부정이 두 겹이다. 아는 사람이 감히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니, 반드시 하게 한다는 말이다.
통행본은 ‘使夫智者不敢爲’, 부정이 한 겹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감히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통행본대로 읽으면 이 장의 핵심 자세는, 능력 있는 사람을 모두 입 다물게 하는 것이 성인의 가장 높은 다스림이라는 말이 된다. 식민화에는 반대하되 앎에도 함에도 반대하지 않는 이 책 전체의 입장과 전혀 맞지 않는다.
백서로 읽으면 이렇다.
아는 사람들이 감히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노자는 앎에 반대한 적도, 함에 반대한 적도 없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구를 세워 식민화하는 일이다. 그러니 성인이 할 일은 아는 사람들을 판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는 사람을 모두 판에 나서게 하되, 아무도 구를 세우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이(而已), 곧 ‘따름’이라는 두 글자가 한도를 긋는다. 성인이 아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발을 빼지 말라는 데까지다. 기준도, 지침도, 규칙도 세우지 않는다. 이 바닥선 위에서는 아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일을 하고, 성인은 간섭하지 않는다.
이 대목이 이 장 앞부분의 뒷면을 보여 준다.
앞부분은 백성을 향한다. 자리를 내어 주는 면으로, 자리를 비켜 주어 백성이 스스로 서게 한다.
뒷부분은 아는 사람을 향한다. 막아서는 면으로, 발을 빼지 못하게 하여 아는 사람이 반드시 판에 나서게 한다.
두 쪽을 함께 해야 온전하다.
왜 아는 사람이 숨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까? 성인이 정말로 능력 있는 사람을 모두 물러나게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자.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그 빈자리를 메운다. 그런데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대개 식민화하려는 의지가 가장 강한 부류다.
성인이 한 발 물러서면 식민화하려는 자들이 밀려든다.
그러니 성인이 하는 함육(涵育)의 참뜻은 아는 사람을 모두 물러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아는 사람을 모두 판에 나서게 하되, 아무도 구를 세우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두 방향의 함육이 글자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다.
백성에게는 자리를 내어 준다. 백성이 스스로 제 뜻을 세우게 한다.
아는 사람에게는 막아선다.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어느 쪽에서도 손을 놓지 않고, 어느 쪽에도 구를 세워 식민화하지 않는다.
막아서기도 함육의 하나다. 함육 바깥의 다른 동작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는 함육의 모습이다. 백성에게는 자리를 내주는 모습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막아서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통행본은 불(弗) 자를 지웠다. 지우는 순간 두 방향의 함육에서 막아서는 면이 사라지고, 이 장 전체가 우민론의 선언문으로 읽히게 되었다. 백서는 이 글자를 남겨 두었다. 백서를 저본으로 삼는 편이 더 믿음직한 까닭이 여기 있다.
5. 왜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는가
노자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러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則無不治矣)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게 저절로 천천히 나아지리라는 무른 소리가 아니다. 무불치(無不治)는 다스림에 관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선언, 모든 문제가 다스려졌다는 선언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 문제의 뿌리가 통째로 뽑혔기 때문이다.
백성이 식민화되지 않으니, 백성이 스스로 길러 낸 요구는 참된 요구다. 참된 요구는 본래 환경과 들어맞으니 따로 다스릴 필요가 없다.
아는 사람이 발을 빼지 않으니, 일하는 사람이 자리에 있다.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일이 버려지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구도 세우지 않으니, 일하는 과정에서 다스려야 할 가짜 문제가 새로 생기지 않는다.
식민화의 문제도, 발을 빼는 문제도 더는 생기지 않는다. 다스려야 할 문제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노자의 역설이다.
다스리는 힘은 구를 세워 식민화하지 않는 것과 발을 빼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함께할 때 가장 커진다.
유위(有爲)할수록, 곧 구를 더 많이 세우고 층을 더 많이 누를수록 다스림은 어려워진다. 구를 세울 때마다 새로운 식민화 압력이 생기고, 그 압력이 다스려지지 않는 새 문제를 낳고, 그 문제를 처리하려고 또 새 구를 덧대야 한다.
식민화는 더 많은 식민화로 처리해야 할 문제를 만들어 낸다. 스스로 불어나는 악순환이다.
현대 행정의 사고방식 전체, 곧 법을 만들고, 규제하고, 부처를 늘리고,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일은 거의 다 유위의 논리 안에 있다. 문제가 하나 생길 때마다 새 기관, 새 법규, 새 절차가 하나씩 불려 나온다. 다스릴수록 문제가 늘어나는 것은 다스림 자체가 문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천사백 년 전에 이미 이 막다른 길을 보았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내버려 두기가 아니라 양쪽을 함께 쥐는 것이다. 구를 세워 식민화하지 않는 것, 그리고 발을 빼지 못하게 하는 것.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한다. 식민화하는 동작을 거두면, 식민화가 낳은 다스려지지 않는 문제들은 곧바로 사라진다. 그러나 거두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아는 사람이 발을 빼는 것도 막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빈자리를 더 나쁜 식민화의 주체가 채운다.
두 가지를 함께 할 때 비로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의 온전한 뜻이 된다.
6. 우민론자가 아니다
그 오명으로 돌아가자. 노자는 이천 년 동안 우민론자라는 비난을 들어 왔다. 그러나 이 장을 다 읽고 나면, 그것도 백서로 읽고 나면, 이 오명은 설 자리가 없다.
노자는 앎에도, 함에도, 현명함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이것들을 구로 세우고, 그 구로 남의 층을 식민화하는 일이다.
노자의 ‘마음을 비운다’는 백성에게서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백성의 생각이 성인의 구에서 빠져나오게 하라는 말이다.
노자의 ‘백성이 앎이 없게 한다’는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라는 말이 아니라, 아는 사람의 앎에 식민화되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노자의 ‘아는 이들이 감히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능력 있는 사람의 입을 막으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판에 나서게 하라는 말이다.
노자가 말한 것은 결코 세상을 등지는 소극성이 아니다. 또 다른 적극성이다.
구를 세우는 동작을 적극적으로 거둔다.
자리를 적극적으로 내어 준다.
아는 사람이 발을 빼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막는다.
이 세 가지 적극성을 합치면 법규 만 개를 세우는 것보다 강하다.
노자는 어리석은 백성을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제 뜻을 세우는 백성을 원한다.
고분고분한 아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발을 빼지 않는 아는 사람을 원한다.
더 많은 다스림을 원하지 않는다. 다스려야 할 문제가 사라지기를 원한다.
2장은 함육의 작동 정의를 내놓았다. 3장은 다스림의 층위에서 함육이 내리는 구체적인 처방을, 자리를 내어 주는 면과 막아서는 면까지 함께 내놓는다.
막아서는 면은 통행본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이천 년 동안 독자들이 만난 것은 반지성의 노자였다.
백서가 그 면을 되살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