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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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육상 · 한국어 독립 재구성판
제 21 편 / 전23편

장부는 스스로 보증할 수 없는 항목들을 간직한다

과거 기록은 오늘날의 조건으로 다시 검증할 수 없어도 유효할 수 있다. 체계 전체에 관한 증거, 통계적 이상, 개별 위반의 입증은 서로를 대신할 수 없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아직 장부에 남아 있는 기록들

오늘날 세계육상연맹의 여자 기록부를 펼치면, 1983년부터 1988년 사이에 세워진 기록들이 아직 거기에 있다.

여자 800m, 1분 53초28, 1983년. 여자 400m, 47초60, 1985년. 여자 포환던지기, 22.63m, 1987년. 여자 원반던지기, 76.80m, 1988년. 같은 시기에 나온 단거리와 도약, 7종경기 기록들도 있다.

이 기록들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이 장부는 그 기록들을 보증할 수 없다.

도핑 없이 세워진 기록이라는 것을 입증할 길이 없다. 이 기록들이 나왔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시료를 장기간 보관했다가 나중에 다시 검사하는 제도가 없었다. 대부분은 현대의 방법으로 재검사할 수 있는, 기록 당일의 시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장부는 이 성적들이 깨끗하다고 말할 증거를 내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도핑으로 세워졌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도 아니다. 이 개별 기록들을 무효로 한 조치가 없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소한 반도핑 판정도 없다. 따라서 장부는 이 성적들이 오염되었다고 말할 판정 역시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기록들은 장부 안에 그렇게 매달려 있다. 깨끗하다고 입증되지도 않았고, 도핑 기록이라고 판정되지도 않았다. 장부는 그것들을 보관하면서도 보증하지 못한다.

이 글은 바로 그 항목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들을 장부에서 지우려던 한 제안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실패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실패의 양상은 이 연작이 줄곧 이야기해 온 한 가지를 가장 첨예한 형태로 드러낸다. 장부는 자신조차 보증할 수 없는 항목들을 보관할 수 있다. 그것들을 남겨 두는 이유는 믿어서가 아니다. 정당하게 없앨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연작 앞부분에 등장했던 장부들과는 다른, 새로운 곤경이다. 제11편에서 혼의 그 투척에 대해 장부는 알고 있었다. 적법한 성적이지만 이후의 성적들과 같은 척도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별도의 옛 장부에 넣어 두었다. 처리는 명확했다. 장부는 그 성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글의 기록들은 다르다. 장부는 그것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혼의 경우처럼 적법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기록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비교 가능성이 아니라 신뢰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뢰도에 관해 장부는 참이라는 것도, 거짓이라는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보증할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는 중간 지대에 걸려 있다. 그 중간 지대를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는 장부 자신도 모른다.

2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장부 정리

2017년, 유럽육상연맹은 이 기록들을 지우려 한 적이 있다.

우선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짚어야 한다. 거의 모든 대목이 한 번쯤은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2017년에 추진된 일이었다. 2015년도, 2016년도 아니었고, 이미 오래전에 끝난 기록 삭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2017년 1월 26일, 유럽육상연맹은 기록 신뢰도 실무그룹을 발표했다. 이 그룹은 몇 차례 회의를 거쳐 원래 가을로 잡혀 있던 일정을 약 다섯 달 앞당겼고, 4월에 문서 하나를 내놓았다.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이사회는 이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문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과 기록이 실제로 삭제된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세계육상연맹, 당시의 국제육상경기연맹은 이 초기화 방안을 실행하지 않았다. 유럽육상연맹은 8월에 그 방안을 국제육상경기연맹 이사회에 가져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8월 초에는 이미 반대 여론 속에서 원안이 재검토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세계육상연맹은 지금도 그 기록들을 인정한다. 첫 절에서 본 1980년대의 여자 기록들은 오늘도 세계육상연맹 기록부에 남아 있다. 삭제가 정말 이루어졌다면 거기에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널리 퍼진 한 가지 이야기를 곧바로 바로잡아야 한다. 유럽육상연맹이 표결로 2005년 이전의 모든 기록을 지웠다는 이야기다.

4월의 문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않다. 2005년이라는 고정된 기준선 자체가 없다. 실제 구상은 기존 기록 가운데 새로 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것만 계속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2005년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그 무렵 시작된 장기 시료 보관에 있다. 제안에 들어 있던 10년간 재검사가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을 그보다 오래된 기록 대부분은 사실상 충족할 수 없었다. 당시 언론과 후대의 연구는 그 실질적인 효과를 두고 2005년 이전 기록을 초기화하는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솔직하게 밝혀 두어야 할 빈칸도 있다. 국제육상경기연맹 이사회 회의록에서는 ‘거부’, ‘철회’, ‘무기한 보류’를 명시한 공식 최종 동의안을 찾을 수 없다. 공개된 증거로 확립되는 사실은 이 방안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행되지 않은 것과, 부결을 명시한 동의안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별개다. 전자는 확인할 수 있고 후자는 찾을 수 없다. 찾을 수 없는 표결을 있었던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성공한 장부 정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장부 정리의 이야기다. 무엇을 하려 했는지보다 왜 해내지 못했는지가 문제를 더 잘 보여 준다.

때로는 성공한 제안보다 실패한 제안이 어떤 일의 실제 구조를 더 잘 드러낸다. 성공한 제안은 부딪친 난관을 해결했거나 피해 갔기에, 그 난관들이 결과 아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반면 실패한 제안은 어디서 막혔는지를 통해 그 일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을 정확히 가리킨다. 유럽육상연맹의 이 장부 정리는 지지자가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지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도 한때는 호의적이었다. 그것이 막힌 곳은 더 깊은 곳이었다. 증거와 공정성에 관한, 비켜 갈 수 없는 지점이었다. 어디서 막혔는지를 분명히 보면, 왜 그 기록들이 지금까지 장부에 남아 있는지도 보인다.

3 세 갈래 길과 각각의 막다른 골목

실무그룹은 세 갈래 길을 검토했다. 문서에는 각각 이름이 붙어 있다. ‘급진적 수술’, ‘창던지기’, ‘1913’. 이 세 길이 저마다 어떤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는지를 보면, 장부 정리가 왜 그토록 어려웠는지 전부 드러난다.

첫 번째 길은 급진적 수술이다.

급진적 수술이란 옛 기록을 하나씩 심사해, 불공정한 방법으로 얻었다고 입증된 기록을 지우는 것이다. 가장 직관적인 길이다. 도핑으로 세운 기록이라면 없애면 된다.

실무그룹은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자백이나 다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는 주관적 근거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문서는 그런 자의성이 공정성을 훼손하고, 유럽육상연맹과 회원 연맹들을 소송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연작에서 거듭 이야기한 문제다. 기록 하나를 지우려면 그것이 도핑 기록임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된 기록 대부분에 대해서는 이를 입증할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도핑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 기록 당일의 시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증거가 없으면 의심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의심으로 기록을 하나하나 지우는 일은 자의적이다. 실무그룹 자신도 그 자의성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가장 직접적인 이 길을 포기했다.

두 번째 길은 창던지기다.

‘창던지기’라는 이름은 실제 선례에서 왔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창의 규격이 바뀌었고,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기록 계보가 필요했다. 따라서 창던지기가 가리키는 구상은 이렇다. 기구나 기술 규정을 바꿔 모든 종목의 기록에 새 시대를 열자는 것이다. 옛 기록은 옛 기구로 세운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효력을 잃는다.

실무그룹은 이 길도 택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럿이었다. 종목마다 받는 영향이 달랐고, 새 기구는 일선 체육 현장에 큰 비용을 안길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새로운 기술 규격으로는 미래의 부정행위가 새 기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의 단절은 새 장부를 만들 수 있지만, 더 믿을 만한 장부를 만들지는 못한다. 새 장부를 펼친다고 옛 장부의 의혹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새 장부 바깥에 격리될 뿐이다. 새 장부 역시 훗날의 부정행위로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다.

세 번째 길은 1913이다.

‘1913’이라는 이름은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출범 초기에, 1913년 무렵 확립한 정관상의 기능에서 왔다. 기록을 심사하고 등록하는 기능이다. 실무그룹은 이 역사적인 공인 권한에서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공인할 권한이 관리 기구에 있다면 공인의 기준도 바꿀 수 있고, 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옛 성적은 더 이상 공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채택된 것은 이 길이었다. 핵심은 문서가 고수한 한 가지 구별에 있었다. 어떤 기록의 공인을 중단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성적이나 선수가 부적법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볼 길이 바로 이것이다. 이 길은 극도로 미묘한 일을 시도했다. 특정 선수 어느 누구에게도 부정행위의 혐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일련의 기록을 장부에서 빼내려 했다. 급진적 수술이 안고 있던 개별적인 혐의 제기의 자의성을 피하려 한 것이다. 아무도 고발하지 않고 공인 기준만 일괄적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그러나 문제 하나를 비켜 가는 바로 그 순간, 다른 문제와 맞닥뜨렸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그 문서를 ‘세 가지 조건’으로 줄여 부를 때 자주 가려지는 내용이다. 문서는 기록 보유자에게 공인 이후에도 스포츠의 정직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려 했다. 나중에 중대한 위반을 저지르면 공인을 철회할 수 있게 하려 한 것이다. 그 후일의 위반이 원래 기록을 낸 성적에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가 없더라도 말이다. 이 조항은 개념적으로 기록 당일의 시료를 요구하는 것보다 더 급진적이다. 기록의 지위가 미래의 행동에 달리도록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기록 보유자가 수년 뒤 전혀 무관한 일에서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록이 취소될 수 있다. 그 위반이 해당 기록과 아무 상관이 없어도 그렇다.

4 서로 다른 두 가지 오류

1913이라는 길은 부정행위를 했다고 한 번도 판정받은 적 없는 기록 보유자들을 난처한 자리에 세웠다. 이 길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글이 엄격히 삼가야 할 일은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두 진영은 사실 서로 다른 오류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초기화의 지지자들이 있다. 그들이 감수하려는 오류는 실제로는 적법한 옛 기록 일부를 잘못 제외하는 것이다. 그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모든 항목이 현대의 검증 기준을 충족하는 장부를 얻으려 한다. 이들에게 검증할 수 없는 옛 기록이 섞인 장부는 전체의 신뢰도가 손상된 장부다. 그 전체의 신뢰도를 위해서라면 적법할 수도 있는 옛 기록 일부를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다른 쪽에는 반대자들이 있다. 그들이 감수하려는 오류는 역사적 불확실성 일부를 남겨 두는 것이다. 특정 성적을 취소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인을 집단적으로 철회하면, 아무런 부정행위도 인정된 적 없는 무고한 기록 보유자들이 위반 판정 없이 제재와 비슷한 결과를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두 입장 가운데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 것이 아니다. 둘은 오류의 우선순위를 서로 다르게 매긴다. 지지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장부 전체가 믿을 수 없게 되는 일이다. 그러느니 적법한 기록 일부를 잘못 지우는 편을 택한다. 반대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실제로 깨끗할 수도 있는 특정한 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이다. 그러느니 장부에 어느 정도 불확실성이 남는 편을 택한다.

이 대립은 앞선 몇 편과 구조가 같다. 제13편에서는 관측할 수 없는 반사실 때문에 판정이 입증 책임의 배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누구에게 입증 책임을 지울지는 가치의 선택이었다. 제20편에서는 엄격책임이 규정 위반과 과실을 두 층위로 나누었다. 경기 결과를 바로잡는 일과 개인을 비난하는 일을 분리해야 하는지 역시 가치의 선택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장부 전체의 신뢰도를 위해 위반 판정이 내려진 적 없는 기록들을 취소할 것인가. 그것은 불확실성의 대가를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에 관한 선택이며, 그 선택에는 객관적인 답이 없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 보려면 한 가지에 주목하면 된다. 이 두 오류는 동시에 피할 수 없다. 깨끗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는 단 한 명도 억울한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한다면, 도핑으로 세워졌을 수도 있는 기록 일부가 장부에 남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핑 기록일 가능성이 있는 항목은 단 하나도 장부에 남겨서는 안 된다고 고집한다면, 깨끗할 수도 있는 사람 일부가 잘못된 피해를 입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라진 증거 때문에 두 목표는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의심스러운 것을 모두 지우면서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은 없다. 의심스러운 경우와 무고한 경우를 가르는 데 필요한 것, 바로 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 꼼꼼하게 일하면 양쪽을 다 지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두 가지 오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그 선택은 사실 판단이 아니라 가치 판단이다.

5 상처받는 것은 구체적인 사람이다

이 제안에 반대하는 목소리 가운데 가장 무게 있는 것은, 실제로 그 대상으로 거론된 선수들에게서 나왔다. 그들의 말은 추상적인 두 가지 오류를 아주 구체적인 일로 바꾸어 놓았다.

래드클리프는 ‘나’를 앞세워 가장 강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반응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상처를 받았고, 이것이 내 명예와 존엄을 훼손했다고 정말로 느낀다.” 그녀는 제안의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더 최근 시대의 기록에는 자동으로 신뢰를 주고, 더 오래된 기록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전제였다. 모두를 한꺼번에 쓸어 버리는 것은 개별 사례에서 위반을 입증해야 하는 더 어려운 과제를 회피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세계올림픽선수협회도 단체 차원에서 같은 반대 의견을 냈다. 협회가 내세운 말은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다’였다. 이 기준들은 협회가 깨끗하다고 보는 선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며, 제안이 깨끗한 선수들에게 불공정하다고 했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은 기록의 공인을 집단적으로 철회하는 일이 아니었다. 더 강력하고 독립적인 반도핑 체계, 더 많은 재원, 깨끗한 경쟁자를 보호하는 장치였다.

미국육상연맹의 반응은 지지가 아니라 신중함이었다. 이 제도가 낳을 결과를 충분히 연구해 보기를 원했다. 특히 도핑 검사에서 한 번도 양성 판정을 받은 적 없는 선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맹 차원에서 제기된 중요한 반론이다. 과거의 시료가 없다는 것은 불리한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것과 같지 않다.

이 반론들은 한데 모여 같은 곳을 가리킨다. 제안은 누구에게도 혐의를 제기하지 않고 기준만 바꾸려 했다. 그러나 기준이 바뀌어 그 바깥으로 밀려난 구체적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는가. 제안이 그들의 적법성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라고 아무리 선언해도, 대중의 눈에는 그들의 기록이 빼앗긴 것이다. 기록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들에 대한 도덕적 판정으로 읽히는 것을 막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1913이라는 길이 맞닥뜨린 문제다. 공인 중단과 도덕적 판정을 분리하려 했다. 기록이 공인을 잃더라도 그 보유자가 부정행위를 했다는 뜻은 아니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대중이 실제로 받아들이는 방식에서는 그 구별을 지켜 낼 수 없다. 선수가 기록을 잃으면 사람들은 이유를 묻는다. 의심스러운 기록을 정리한다는 이름의 제안에서는, 기록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행위의 암시를 품는다. 그래서 이 제안은 한편으로 아무에게도 혐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한 번도 위반 판정을 받은 적 없는 사람들에게 혐의 제기와 비슷한 결과를 안겼다. 거듭 거론된 이중 처벌이란 바로 이것이다. 부정행위가 입증된 적 없는 선수가 우선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없고, 다시 그 입증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록을 잃는 것이다.

6 그 시대에도 검사는 있었다

이 기록들을 공정하게 보려면 먼저 널리 퍼진 인상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1980년대는 검사라곤 없던 무법천지였다는 인상이다.

그렇지 않다. 올림픽 약물 검사는 이미 1968년에 시작되었다. 단백동화 스테로이드 검사는 1972년 시범 실시를 거쳐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공식 검사가 되었다. 따라서 1983년부터 1988년 사이의 그 기록들은 주요 대회에서 스테로이드 검사가 이미 제도로 자리 잡은 시대에 세워졌다. 그때는 검사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다만 곧바로 나머지 절반도 덧붙여야 한다. 1980년대의 체계는 이후에 등장한 장기간의 추적 체계와 본질적으로 크게 달랐다.

핵심적인 차이는 검사의 유무가 아니라 검사 방식이다. 1980년대에는 대회를 중심으로 검사했고, 지속적인 감시는 훨씬 약했다. 이후의 제도는 경기 기간 외 검사, 소재지 정보 신고, 장기간에 걸친 생체 정보, 장기 보관 시료의 재분석을 결합했다. 세계반도핑기구의 역사 자료에 따르면, 주요한 조직적 경기 기간 외 검사 프로그램은 1988년 존슨 사건 이후에야 설계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정확한 설명은 이렇다. 1980년대의 기록들은 검사가 전혀 없는 진공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의 대회 검사를 거쳤다. 그러나 그 검사에는 이후의 지속적인 감시, 경기 기간 밖의 검사, 사후 재검사가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장부가 그 기록들에 관해 할 수 있는 말은 당시의 검사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더 촘촘한 검사도 통과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늘의 검사가 요구하는 증거물, 나중에 다시 검사할 수 있는 시료를 당시에는 대부분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제안 안에 있던, 기술적으로 진정한 의미를 지닌 유일한 장치가 나온다. 10년간의 시료 보관이다.

7 한 방향으로만 쓸 수 있는 능력

그 제안은 새 기록의 시료를 보관하고, 10년 동안 재검사에 이용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했다. 제안 전체에서 기술적으로 진정한 의미가 있는 진전은 이것 하나였다. 과거에 관해 얼마나 아는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얼마나 알 수 있는지를 바꾸기 때문이다.

장기 보관의 가치는 실제 사례로 입증되었다. 2015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은 2005년 헬싱키와 2007년 오사카 세계선수권대회의 보관 시료를 재분석해, 대회가 끝난 지 여러 해 뒤에 새로운 불리한 검사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바로 이것이 그 제안이 미래의 기록에 갖추어 주려던 것이다. 검사 기술이 발전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증거물. 시료를 보관해 두면 몇 년 뒤 검사 방법이 발전했을 때 다시 꺼내 검사할 수 있다. 당시에는 검출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검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능력에는 결정적인 성질이 하나 있다. 시간상으로 비대칭적이라는 것이다.

미래의 기록을 더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게 해 준다. 오늘 보관한 시료를 10년 뒤에 재검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라진 1983년이나 1988년의 시료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 옛 기록들은 당시부터 시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보관하고 재검사하는 능력이 아무리 강력해도 과거로 돌아가, 수십 년 전에 끝난 경기의 시료를 뒤늦게 채워 넣을 수는 없다.

이 대목은 사실 연작 초반의 한 관찰과 호응한다. 제5편에서 말했듯, 이 구축은 가장 통제해야 할 것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규율하는 쪽으로 기운다. 여기서도 비슷하다. 이 구축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부터 새 시료마다 사후 재검사가 가능한 보관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은 1983년으로 돌아가 그 800m 경기에서 남기지 않은 시료를 뒤늦게 확보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미래의 증거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증거다. 그런데 옛 기록들의 문제는 바로 과거에 속한다. 그러므로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이 능력은 과거에 속한 결핍 앞에서 무력하다.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향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이 비대칭이 이 글의 핵심이다. 그 제안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서만 쓸 수 있는 능력으로 과거에 속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미래의 기록만이 충족할 수 있는 조건을 옛 기록들에도 요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조건, 재검사할 수 있는 시료는 기록이 세워진 바로 그날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이 지나면 영원히 보충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옛 기록들에 대해 10년간 시료를 보관하라는 조건은 한 번도 실제 성적 검사가 된 적이 없다. 옛 성적이 넘어설 수 없는 서류상의 문턱이었을 뿐이다. 옛 성적이 탈락하는 것은 검사에서 무언가 검출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에 보관해 두지 않아 이제는 복원할 수도 없는 시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앞만 볼 수 있는 자로 이미 지나간 일을 재면, 그 일은 필연적으로 부적격이 된다. 그 일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그 자가 거기까지 닿지 못해서다.

8 체계의 증거가 개별 기록의 판정은 아니다

이 옛 기록들 중 일부는 동독에서 나왔다. 그리고 동독은 특별한 종류의 증거를 제공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를 극도로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프랑케와 베렌동크의 동료 심사를 거친 연구는 과거 기밀이었던 동독 문서를 토대로, 국가가 조직한 호르몬 도핑 프로그램을 기록했다. 2017년 유럽육상연맹 문서 자체도 동독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독일이 거듭 기록 초기화를 요구하게 된 역사적 배경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 그러므로 동독에 국가가 조직한 도핑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문서 증거가 있는, 확립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체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개별 기록에 대한 판정과 같지 않다.

기록부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떤 나라나 훈련 체계에 도핑이 있었느냐가 아니다. 어느 특정한 성적이 법적으로 취소되었느냐, 또는 관리 기구에 다른 근거로 그 성적을 취소할 권한을 주는 규정이 있느냐다. 세계육상연맹 데이터베이스는 오늘도 살아남은 동독 시대의 400m와 원반던지기 기록들을 인정한다. 이는 세계육상연맹이 그 기록들에 대해 법적 효력을 갖는 취소 조치를 내린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진술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기록의 바탕이 된 성적들이 약물 없이 나왔음을 입증하는 말이 아니다. 도핑 체계에 관한 역사적 증거 또한 그 개별 기록들이 약물을 사용해 세워졌다는 판정이 되지는 않는다. 이 진술이 말하는 것은 오직 이 장부에서 그 개별 기록을 무효로 하는 조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국가 차원의 체계가 존재했다는 명제와, 특정 기록 하나가 그 체계의 산물이므로 무효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다르다. 그 사이에는 해당 기록에 대한 판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판정은 없다.

이것은 제20편에서 지킨 것과 같은 원칙이다. 제20편에서는 러시아의 체계가 존재했다는 점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체계에 대한 인정과 개인의 위반은 별개의 명제였다. 계획이 존재했더라도, 특정 선수와 위반을 구성하는 행위를 연결해야 했다. 여기서도 같다. 동독의 체계가 존재했다는 점은 확립되었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기록을 그 체계의 산물이며 무효로 해야 할 기록이라고 인정하려면, 그 기록에 대한 판정이 필요하다. 지금 살아남은 기록들에는 그런 판정이 내려진 적이 없다.

이 구별을 그토록 엄격히 지켜야 하는 이유는, 조금만 느슨해져도 아주 위험한 추론으로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도핑 체계가 있었으니 그 나라 선수의 모든 기록은 그 체계의 산물이라는 추론이다. 이것은 체계에 관한 참인 역사적 명제를, 각각의 구체적인 개인에 관한 입증되지 않은 주장으로 곧장 확장한다. 가장 중요한 고리, 바로 이 기록과 그 체계를 연결하는 증거를 건너뛴다.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체계가 있었다는 것에서 어떤 개별 기록이 그 산물이라는 것으로 건너가려면, 그 기록에 대한 구체적인 입증이 필요하다. 체계의 존재 자체가 그 입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제20편의 원칙이 여기서 다시 성립한다. 계획 하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집단의 유죄로 삼을 수는 없다.

똑같은 원칙을 1980년대의 다른 모든 기록에도 적용해야 한다. 관리 기구의 장부에 특정 기록을 겨냥한 제재나 무효화 조치가 없다면, 기록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선수의 체격, 국적, 정치 체제, 성적의 격차, 소문이나 사후의 의심을 슬그머니 위반 인정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세계육상연맹이 계속 공인한다는 사실이 부여하는 것은 그 성적의 법적·통계적 지위다. 더 강한 경험적 주장을 펼치는 데 필요한, 지금은 없는 과거의 실험실 증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9 통계적 거리는 증거가 아니다

어떤 기록이 얼마나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는지, 다른 선수들이 그 기록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고 도핑 기록인지 추론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충동은 분명히 막아야 한다.

우선 달라진 사실부터 보자. 이 달리기 기록들 가운데 몇몇은 이제 누구도 근처에 가 본 적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여자 100m에는 10초49에 맞서는 10초54가 있다. 200m에는 21초34에 맞서는 21초41이 있고, 400m에는 47초60에 맞서는 47초78이 있다. 여자 800m에서는 베로가 2026년 6월 28일 1분 53초80을 달려, 1분 53초28과의 차이를 불과 0.52초로 좁혔다. 각각의 격차는 약 0.48%, 0.33%, 0.38%, 0.46%다. 앞의 비교는 6월 시점의 것으로 남겨 둔다. 2026년 8월 27일 취리히에서 베로는 다시 1분 53초 70을 기록했다. 1분 53초 28과의 차이는 0.42초, 기록 시간의 약 0.37%다. 더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그 격차를 도핑 유무의 증거로 만들지는 않는다.

필드 종목의 사정은 다르다. 세계육상연맹에는 라인슈가 1988년에 세운 원반던지기 76.80m가 등재되어 있다. 올먼의 2025년 73.52m는 그보다 3.28m, 약 4.27% 짧다. 위에서 본 단거리와 중거리 기록의 격차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점점 따라잡히는 달리기 기록이든, 여전히 멀리 있는 원반던지기 기록이든, 통계적 거리는 그 기록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관한 증거가 아니다. 다른 선수가 가까이 갔다고 그 기록이 깨끗하다는 것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멀리 있다고 도핑으로 세웠다는 것이 입증되지도 않는다. 거리는 거리일 뿐이다. 통계적 거리를 도핑의 증거로 삼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다. 이 오류는 옛 기록 정리를 둘러싼 논쟁에 나타나는 의심의 논리를 더 거칠게 드러낸다. 성적이 얼마나 유별나 보이는지를 보고, 틀림없이 문제가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다.

이 연작이 줄곧 지켜 온 원칙이 여기서 다시 적용된다. 제15편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성을 읽어 내고 그것을 원인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사이의 인과 사슬은 한 번도 측정하지 않는 서사의 오류를 보았다. 여기서 기록의 오랜 지속이나 먼 거리를 보고 의심을 읽어 내는 것 역시 같다. 통계적 관찰을 그것이 뒷받침할 수 없는 인과적 결론으로 바꾸는 것이다. 거리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기록을 넘어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다. 그 기록이 당시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말해 주지 못한다.

10 장부는 스스로를 보증할 수 없다

이제 이 글의 논의를 모아 보자.

기록 하나를 지우는 데는 사실 단단한 길이 있다. ‘그 시대를 더 이상 믿지 않겠다’는 것보다 훨씬 단단하다. 기록의 바탕이 되는 성적을 취소하는 길이다. 반도핑 규정은 그렇게 작동한다. 성적을 취소하고, 그 성적에서 나온 타이틀과 보상도 함께 취소한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성적은 거기서 파생된 기록의 근거로 남을 수 없다.

이 길에는 명료한 사례가 있다. 미국 남자 4×400m 계주가 1998년에 세운 기록은 200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이사회에서 무효가 되었다. 페티그루가 해당 시기에 성장호르몬과 에리트로포이에틴을 사용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성적이 기록 계보의 맨 위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성적이 나온 시기와 연결되는 자백이 있었다. 단지 10년 전의 시료를 내놓지 못한 것이 아니다. 2017년 실무그룹에 영향을 준 네덜란드의 선례도 같았다. 1984년 올림픽 원반던지기 우승자 스탈만이 대회 전에 스테로이드를 사용했다고 2016년에 인정했고, 그제야 그녀의 기록 지위가 재검토되었다.

두 사례의 공통점을 분명히 보자. 둘 다 자백이 있다. 특정 성적과 도핑을 연결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이 있으면 무효화는 정당한 조치가 된다. 자의적인 조치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1980년대의 그 기록들에는 없다. 자백도 없고, 살아남은 시료도 없고, 특정 기록과 도핑을 연결하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그 단단한 길로는 나아갈 수 없다. 그 길이 요구하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길, 공인 기준을 바꾸는 1913이라는 길은 한 번도 위반 판정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재와 비슷한 결과를 안긴다. 장부는 한편으로 기록들을 정당하게 지울 증거가 없고, 다른 한편으로 자의적으로 지울 수도 없다. 그래서 보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 글의 잔여항이다. 이 연작에서 거듭 나타난 한 가지가 가장 첨예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앞선 글들의 잔여항은 명단에 들지 못한 이름들이었고, 셈할 수 없는 원인들이었고,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성적들이었고, 선 밖으로 밀려나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글의 잔여항은 장부가 보관하면서도 보증하지 못하는 항목들이다. 증거가 없으므로 깨끗하다고 입증되지 않았다. 판정이 내려진 적 없으므로 도핑 기록이라고 판정되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장부 안에 매달려 있다. 장부가 스스로 보증할 수 없는 항목들이다.

그 항목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관리 기관이 속으로 믿는지 의심하는지를 읽어 낼 수는 없다. 대중의 의심은 기관의 판정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록은 여전히 유효하며, 역사적 의혹과 사라진 시료, 오늘날의 기준만으로는 각 성적을 취소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보존은 현대적 조건에서 새로 발급한 결백 증명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 증명서가 없다는 사실 역시 삭제의 충분한 이유는 아니다. 증거 앞에서의 절제는 비난과 보증 모두를 제한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온다. 장부를 초기화하는 것은 결코 증거가 사라진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증거가 없다는 대가를 누가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이다.

그 증거, 기록 당일의 시료들은 대부분 이제 없다. 영원히 없다. 이 결핍은 메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장부가 그 항목들을 보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가를 치르는 쪽은 장부다. 보증하지 못하는 기록들을 신뢰도의 짐으로 짊어진다. 다른 하나는 그 항목들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면 대가를 치르는 쪽은 구체적인 선수들, 실제로는 깨끗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부정행위가 입증되지 않은 채 기록을 잃는다. 유럽육상연맹은 후자를 택하려 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세계육상연맹은 옛 장부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관리 기관에 기록부를 바꿀 권한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페티그루의 기록 취소가 그 사례다. 다만 구체적 증거에 따른 취소에서 한 시대의 기록을 일괄 초기화하는 결정으로 가려면 또 다른 정당화가 필요하다. 이 글은 현대의 검증 조건을 소급해 충족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유효한 이 성적들을 취소한 최종 판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나는 여기에 초기화 제안의 핵심 난점이 있다고 본다. 기관의 내적 동기가 입증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구축은 숫자를 정확히 장부에 적을 수 있다. 1분 53초 28, 47초 60, 76미터 80. 그러나 100분의 1초와 센티미터까지 정확하다는 것이 당시의 모든 검증을 현대적 조건으로 다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진 시료는 새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이 빈틈은 추가 보증과 소급한 비난, 두 가지를 함께 제한한다. 장부는 여전히 유효한 기록을 인정한다. 그 인정을 전지적인 보증으로 부풀려서도, 증거의 부족을 기관이 불신을 확정했다는 뜻으로 바꿔서도 안 된다. 두 진술 사이의 거리를 지켜야 한다.

자는 아직 정확히 재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