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축은 하나로 매듭지을 수단을 갖추었지만 사람은 쓰지 않았다
바르심과 탐베리가 금메달을 나눈 것은 규칙을 바꾼 일이 아니었다. 규칙이 미리 열어 둔, 결과를 하나로 매듭짓지 않아도 되는 출구를 이용한 것이다. 제도는 승패를 더 가릴 능력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가리지 않을 권한을 줄 수 있다.
이 글의 목차
1 심판이 먼저 계속할 수 있다고 했고 선수는 그다음에 멈춰도 되는지 물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남자 높이뛰기 결승. 바르심과 탐베리는 2.37미터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고, 2.39미터에서는 각각 세 번씩 실패했다. 시도와 실패 횟수를 따지는 기존의 순위 결정 규칙으로도 두 사람은 완전히 같았다.
그때 심판이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다.
그 말은 누가 이겼는지 판정할 수 없다는 것도, 공동 1위로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점프오프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심판이 처음 알려 준 것은 아직 밟을 수 있는 절차가 하나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구축은 승패를 더 가릴 수단을 쥐고 있었고, 심판은 그 수단부터 꺼내 보였다.
그러자 바르심이 물었다.
금메달을 두 개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심판은 가능하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 순서에 이 글의 핵심이 전부 들어 있다. 심판이 둘을 가릴 수 없으니 공동 1위라고 한 것이 아니다. 심판은 계속 가릴 수 있다고 했고, 선수는 가리지 않아도 되는지 물었다. 구축이 먼저 승패를 가릴 수단이 아직 있다고 알렸고, 선수는 그 수단을 쓰지 않아도 되는지 물었다.
앞선 열여섯 편에 등장한 구축과는 다르다. 앞에서 구축은 줄곧 하나로 매듭지을 방법, 어떤 일을 하나의 확정된 결과로 판정할 방법을 찾았다. 척도를 만들고, 기록 체계를 세우고, 참가 자격선을 긋고, 환산표를 짜고, 출발의 문턱값을 정했다. 어느 것이든 미결인 일을 하나의 답으로 귀결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경기를 단 한 명의 챔피언으로 매듭지을 능력이 분명히 있었고 점프오프라는 수단도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 마지막 매듭을 지을지 말지를 선수들에게 넘겼다.
이 글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한다. 구축은 하나로 매듭지을 수단을 갖추었고, 사람은 그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있다.
이 일을 따로 한 편에 담을 만한 이유는 이 시리즈에서 거듭 마주친 질문의 뒷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앞선 열여섯 편은 거의 모두, 구축이 어떤 일을 하나의 확정된 답으로 매듭지으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때로는 그 노력이 얼마나 헛되는지를 다루었다. 여기서는 매듭지을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 부족한 것은 그렇게 하려는 의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단계에서는 그 의지까지 자신이 정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늘 확실함을 좇던 것이 불확실함을 위해 적법한 자리를 남겨 두었다. 이 사례에서 가장 뜻밖이면서도 곱씹을 만한 대목이다.
먼저 널리 퍼진 몇 가지 이야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 사례는 거의 모든 대목이 한 번쯤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다.
2 먼저 걷어 내야 할 몇 가지 이야기
첫째로 걷어 낼 이야기는 도쿄의 심판이 먼저 금메달 두 개를 주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심판이 먼저 점프오프를 계속할 수 있다고 설명하자, 바르심이 곧바로 금메달을 두 개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승패를 가리지 말자고 먼저 제안한 쪽은 선수였다. 심판이 제시한 것은 계속 가리는 선택지였다.
둘째는 심판이 누가 더 잘했는지 알아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금메달을 두 개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 판독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축에는 승패를 더 가릴 능력이 충분했다. 점프오프가 바로 그 방법이다. 바를 어떤 높이로 올려 누가 넘고 누가 못 넘는지 보면 곧 갈린다. 구축이 가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선수가 그 절차에 들어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셋째는 두 사람의 우정 때문에 규칙에 그때만 예외를 두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이고, 부상과 씨름한 경험도 공유한다. 이것으로 왜 금메달을 나누고 싶었는지는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왜 적법한지는 설명할 수 없다. 결과를 성립시킨 근거는 오래전부터 존재한 규칙 조항이었다. 두 선수가 전혀 모르는 사이였거나 심지어 서로를 싫어했더라도, 똑같은 공동 결정을 내렸다면 규칙이 내놓는 결과도 같아야 한다. 우정은 동기이지 근거가 아니다.
넷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도쿄 이후에야 세계육상연맹이 공동 금메달을 허용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 공동 1위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는 조항은 적어도 2009년 11월 1일부터 효력을 가진 규칙에 이미 들어 있었다. 도쿄보다 약 12년 앞선다.
이 점은 따로 짚을 만하다. 이 사례가 성립하는 제도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2008년 규칙에서는 동률 판정 절차를 거친 뒤에도 1위가 같으면, 정해진 방식으로 바를 높이거나 낮추며 한 번씩 더 뛰어야 했다. 동률이 해소될 때까지 선수들은 매번 승패를 가리는 시도에 참여해야 했다. 모두 그만 뛰기로 결정하고 공동 1위를 남겨 두는 지금의 출구는 그때 없었다.
2009년 규칙 개정이 이 출구를 새로 열었다. 해당 선수들이 더 뛰지 않기로 결정하는 경우를 포함해, 점프오프를 하지 않으면 공동 1위가 유지된다. 이 새 규칙은 2009년 1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그러니 도쿄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었고, 예외는 더더욱 아니었다. 2009년에 써 둔 규칙을 2021년에 사용한 것이다. 그 규칙은 12년 동안 규칙집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도쿄는 온 세상이 처음으로 그것을 보게 했을 뿐이다.
3 허용된 것은 금메달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매듭짓지 않을 권한이었다
이 사례를 정확히 이야기하려면 규칙이 대체 무엇을 허용했는지 보아야 한다. 심판에게 금메달 두 개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정확하고 더 근본적인 무언가다.
규칙의 법적 구조는 이렇다. 동률 판정 절차를 거친 뒤에도 공동 1위라면 원칙적으로 점프오프를 한다. 점프오프를 하지 않으면 공동 1위가 유지된다. 규칙은 선수들이 더 계속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경우를 그중 하나로 명시한다.
이 구조를 잘 보아야 한다. 규칙은 심판이 금메달 두 개를 수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특정한 경우 공동 1위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올림픽의 메달 제도는 1위인 사람마다 금메달 하나를 준다. 따라서 금메달 두 개는 순위 결과에 따라오는 귀결이지, 직접 두 개를 주기로 한 결정이 아니다. 규칙이 먼저 두 명의 1위를 남겼고, 메달 제도가 그 두 명에게 금메달을 하나씩 준 것이다. 선수가 심판에게 금메달 한 개를 더 달라고 신청한 것이 아니다.
이 인과관계의 순서가 권한이 어디에 놓이는지를 정한다. 심판이 금메달을 주는 것이라면 재량의 문제다. 결정권은 구축에 있고,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으며, 몇 개를 줄지도 구축이 정한다. 하지만 실제 작동 방식은 다르다. 규칙은 이런 상황에서 공동 순위가 유지된다고 정한다. 재량으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생기는 순위 결과다. 여기서 심판에게는 재량권이 없다. 금메달을 하나 줄지 두 개 줄지 정할 수 없으며, 선수들의 공동 결정으로 발동된 규칙상의 순위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결정의 출발점은 심판의 재량이 아니라 선수들의 공동 선택에 있다. 심판은 그 선택을 순위로, 다시 그 순위를 메달 수로 옮겨 주는 중간 고리다.
이 구분은 말꼬리를 잡는 일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가 어디에 놓이느냐가 달린 문제다. 심판이 금메달을 주는 것이라면 결정권은 심판에게, 구축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축이 한 일은 두 명의 1위라는 순위 결과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를 발동시킨 것은 더 뛰지 않겠다는 선수들의 공동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결정권은 선수들에게 있다.
이 선택권은 한층 더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해도 부정확한 이야기로 바뀌기 쉽다.
부정확한 설명은 이렇다. 선수는 승패 가리기를 거부하고 금메달을 지킬 수 있다.
정확한 설명은 이렇다. 여전히 공동 1위에 있는 해당 선수 전원이 함께 승패를 가리는 절차를 끝낼 수 있다.
두 설명은 크게 다르다. 어느 한 사람에게 단독 거부권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한 선수만 더 뛰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선수는 뛰겠다고 하면, 뛰지 않는 선수는 더 높은 순위를 다툴 자격을 잃고 뛰겠다는 선수가 이긴다. 여전히 공동 1위인 선수 모두가 함께 그만 뛰기로 해야만 공동 1위가 유지된다. 이것은 집단의 종료권이지 개인의 거부권이 아니다.
도쿄에서 공동 1위였던 사람은 바르심과 탐베리, 둘뿐이었다. 3위인 네다세카우도 2.37미터를 넘었지만, 앞선 시도에서 실패한 적이 있어 동률 판정 절차를 거쳐 3위로 확정되었다. 따라서 세 명 모두가 금메달을 나눌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완전히 같은 두 사람, 바르심과 탐베리가 함께 더 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4 선수는 규칙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규칙이 내준 길 하나를 골랐다
여기서 경계할 오해가 있다. 선수들이 규칙 위에 올라섰다거나, 이 순간 규칙이 효력을 잃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둘 다 아니다. 선수들은 어떤 규칙도 고쳐 쓰지 않았다. 규칙이 이미 내준 두 갈래의 적법한 길 가운데 하나를 골랐을 뿐이다.
첫 번째 길은 점프오프를 계속하는 것이다. 구축은 추가 시도를 통해 결과를 단 한 명의 1위로 매듭짓는다.
두 번째 길은 여전히 1위를 다투는 선수 전원이 함께 멈추는 것이다. 구축은 공동 1위를 받아들인다.
두 길은 모두 규칙에 미리 쓰여 있었다. 더 뛰지 않으면 공동 순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제도에 마련된 설정이지, 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얻어 낸 양보가 아니다. 선수들은 이미 닦여 있는 두 길 앞에 서서 두 번째를 골랐다. 그 선택은 진짜였다. 다만 자신들이 만든 선택지가 아니라 구축이 내준 선택지에서 골랐다.
그러므로 이 글의 주제를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구축은 결과를 하나로 매듭지을 능력을 자기 손에 단단히 쥔 채, 그 능력을 계속 사용할지 말지의 스위치는 자신이 판정하는 사람들에게 넘겼다.
이 문장에서는 어느 부분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구축이 매듭지을 능력을 쥐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점프오프는 온전히 구축의 장치다. 바를 높이고 낮추는 일, 넘었는지 못 넘었는지 판정하는 일은 모두 구축이 한다. 선수들이 승패를 가리는 방법을 마음대로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장치를 작동시킬 것인지, 그 스위치는 선수들에게 넘어갔다. 구축은 반드시 가려야 한다고도, 반드시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할 것인지에 관한 결정, 그 한 단계 위의 결정을 밖으로 내주었다.
자신이 판정하는 사람들이 그 스위치를 받았다. 가장 미묘한 대목이다. 선수들은 구축의 판정 대상이다. 그들의 성적은 구축이 재고 순위도 구축이 정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판정받는 대상들이 구축으로 하여금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게 할지 말지 정하는 스위치를 손에 넣었다. 판정하는 쪽이 하나의 결정을 판정받는 쪽에 넘겼다.
5 같은 제도 네 번의 경기 두 가지 결과
이 규칙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경기에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구축은 그대로인데 선택하는 사람이 달라지자 결과도 달라졌다.
2015년 베이징 세계선수권 남자 높이뛰기에서는 제도를 끝까지 사용했다. 본경기를 마친 뒤에도 드루인, 본다렌코, 장궈웨이가 공동 1위였고, 세 사람은 점프오프에 들어갔다. 먼저 2.36미터에서 모두 실패했다. 바를 2.34미터로 낮추자 드루인은 성공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실패했다. 드루인이 단독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었고, 다른 둘은 공동 은메달을 받았다. 이때 선수들은 계속하기를 골랐고, 구축은 결과를 단 한 명의 챔피언으로 매듭지었다.
2021년 도쿄는 앞에서 본 사례다. 선수들이 함께 계속하지 않기로 했고, 구축은 공동 1위를 받아들였다. 금메달은 두 개였다.
2023년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 여자 장대높이뛰기에서는 도쿄의 구조가 다른 종목에 다시 나타났다. 문과 케네디는 동률 판정 절차를 거쳐도 같았다. 두 사람은 점프오프를 하지 않고 세계 챔피언 자리를 나누기로 했다. 세계육상연맹도 이후, 두 선수가 점프오프를 계속하는 대신 공동 우승에 합의했다고 분명히 밝혔다.
2024년 파리 올림픽 남자 높이뛰기에서는 같은 규칙이 도쿄와 반대의 결과를 냈다. 커와 매큐언은 본경기에서 모두 2.36미터를 넘었고, 동률 판정 절차를 거친 뒤에도 같았다. 둘은 점프오프를 계속하기로 했다. 추가 시도에서도 실패가 이어진 뒤 바가 낮아졌고, 커가 2.34미터에 성공하며 유일한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매큐언은 나중에도 단 한 명의 챔피언을 가려야 한다며 그 선택을 분명히 옹호했다.
이 네 번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지가 보인다. 2015년에는 썼고, 2021년에는 쓰지 않았고, 2023년에도 쓰지 않았으며, 2024년에는 썼다. 같은 제도, 같은 규칙, 네 번의 경기, 두 가지 결과다. 어느 결과로 갈지를 정한 것은 규칙이 아니라 그 갈림길에 선 선수들이 고른 길이었다.
이것이 도쿄가 예외적인 한 번의 사건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올림픽의 우연이 아니었다. 수직 도약 종목의 규칙에 담긴 일반적이고 실제로 실행 가능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파리는 가장 값진 반대 사례다. 제도가 내준 출구는 같았지만 커와 매큐언은 계속하기를 골랐고, 결과는 공동 금메달에서 금메달과 은메달로 바뀌었다. 구축은 그대로였고 선택한 사람이 달라졌다. 결과도 금메달 두 개에서 금메달 하나와 은메달 하나로 달라졌다.
그러니 도쿄와 파리를 따뜻함 대 잔혹함, 우정 대 경쟁으로 써서는 안 된다. 같은 제도 안에서 이루어진 두 가지 적법한 규범적 판단이다. 도쿄 쪽은 본경기에서 이미 같았으니, 그 같음만으로 두 사람이 함께 1위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파리 쪽은 구축이 1위라는 결과를 계속 좁혀 하나의 값으로 매듭지어야 한다고 보았다. 두 판단 모두 규칙이 인정하며, 둘 다 적법하다.
여기에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깊이가 있다. 두 판단의 차이는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공동 순위 자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도쿄 쪽은 동률을 실제로 성립한 경기 결과로 본다. 두 사람이 본경기에서도, 시도와 실패 횟수를 따진 결과에서도 완전히 같다면, 두 사람은 본래 같은 것이다. 그 같음이 경기의 참된 결론이다. 점프오프는 하나의 순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추가 절차일 뿐, 실은 달랐던 두 사람의 차이를 밝혀내는 수단이 아니다. 파리 쪽은 동률을 해결해야 할 미결 상태로 본다. 두 사람이 잠시 비겼을 뿐이고 챔피언이라는 자리는 본디 단수이므로, 누군가 이길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두 이해 방식 모두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이 시리즈가 줄곧 되묻던 질문과 정확히 맞닿는다. 같다는 것은 끝내 깨뜨려야 할 교착 상태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결과인가. 규칙은 이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을 내놓지 않았다. 답을 당사자들에게 남겼다.
6 자신의 선택에는 찬성하면서 그 규칙에는 반대한 사람
공동 금메달에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논쟁의 진짜 초점은 감동적이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하나로 매듭지을 권한을 누가 가져야 하느냐였다.
찬성 쪽을 대표하는 것은 주로 공식적인 서술이다. 세계육상연맹은 당일 그 결과를 함께 나눈 성공으로 표현했고, 연말 회고에서는 한 해의 가장 빛나는 순간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바르심 자신의 이유도 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본경기가 이미 그날 두 사람의 경기력이 같았음을 보여 주었으니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탐베리는 함께 겪은 경험, 서로에 대한 존중, 챔피언 자리를 함께하는 가치를 강조했다. 어느 쪽이든 그 행동을 능동적인 선택으로 설명한다. 체력이 없어 더 못 뛴 것도, 심판이 멈추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반대 쪽의 핵심 논리는 올림픽 챔피언은 한 사람으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부 논평자는 올림픽 결승에서 금메달을 나눠서는 안 된다며 점프오프를 했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일부 육상 관찰자들도 한 명의 승자가 나올 때까지 선수들이 싸웠어야 한다며 실망을 드러냈다. 주의할 것은 이런 반대가 도쿄의 판정을 위법이라고 고발하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하는 것은 규칙이 지향하는 가치다. 결과가 적법함을 인정하면서도 규칙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중 가장 무게 있는 비판 하나는 탐베리 본인에게서 나왔다.
도쿄 대회가 끝난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탐베리는 바르심과 금메달을 나눈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도 선수들에게 이런 선택의 기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 글의 주제를 거의 정면으로 꿰뚫는다. 탐베리는 도쿄에서 내린 그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결정에 찬성한다. 자신은 그렇게 고를 것이다. 하지만 제도에 관한 이 결정을 선수에게 넘기는 규칙에는 반대한다. 규칙이 자신에게 고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명제다. ‘나는 이렇게 고르겠다’는 주어진 규칙 아래에서 개인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명제다. ‘규칙은 내가 고르게 해야 한다’는 규칙 자체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에 관한 명제다. 탐베리는 앞의 명제에는 그렇다고, 뒤의 명제에는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의 사례로 두 명제를 선명하게 갈라 놓았다.
그 규칙의 혜택을 직접 받았고 자신의 선택을 옹호하는 사람이 동시에 그 규칙의 존재에 반대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진짜 쟁점이 드러난다. 그 구체적인 결정을 어떻게 보느냐보다 그 결정권을 넘겨야 하느냐가 문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글의 주제다. 구축은 마지막 한 단계를 자신이 판정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야 하는가.
하나로 매듭지을 권한이라는 이 문제를 더 오래된 역사에 잠시 놓아 볼 필요가 있다. 결승선 사진 판독이 막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매듭짓기의 서로 다른 두 역할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는 성격이 정반대인 두 사례가 있었다. 둘을 구분해야 한다. 남자 100미터에서 톨런과 멧캘프의 공식 기록은 모두 10.3초였고, 결승선 통과는 극히 근소했다. 심판들은 촬영 기록을 세밀히 검토했으며, 공식 결과가 공동 순위로 바뀐 적은 없다. 1위는 톨런이었다. 이후 오늘날의 규칙이라면 멧캘프가 이겼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이는 근거 있는 역사적 가정이다. 당시에는 몸 전체가 결승선을 완전히 지나야 완주로 인정하는 옛 기준을 적용했고, 그 기준은 톨런이 먼저 충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반사실적 가정과 당시 내려진 판정을 하나의 명제로 섞어서는 안 된다. 사진이 멧캘프의 승리를 입증했는데 심판들이 일부러 톨런에게 우승을 주었다는 더 강한 주장에는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규칙의 차이, 그리고 톨런을 1위로 정한 최종 판정뿐이다. 같은 대회 남자 110미터 허들은 정반대였다. 처음에는 켈러가 3위였지만, 필름을 검토한 뒤 핀리가 3위로 정정되어 동메달을 받았다. 여기서 촬영은 논란을 만든 것이 아니라 논란을 매듭짓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구축의 판독 도구에는 두 방향이 있었다. 마땅히 끝냈어야 할 논쟁을 끝내지 못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고, 사람의 눈이 잘못 매긴 순위를 실제로 바로잡아 확정할 수도 있었다. 이 둘은 나누어 보아야 한다. 모두 뭉뚱그려 ‘논란 사례’라고 부를 수는 없다.
7 구축은 더 세밀하게 보기도 하고 스스로 보지 않기도 한다
도쿄에서의 그 한 걸음이 지닌 무게를 이해하려면, 구축이 하나로 매듭지을 능력을 갖추어 온 역사 전체 속에 놓아 보아야 한다. 그 역사에는 두 방향이 있다. 구축이 갈수록 더 강한 능력을 얻는 방향, 그리고 이미 가진 능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방향이다.
먼저 능력이 커지는 쪽을 보자.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결승선 사진 판독이 사용되었다. 그 초기 시스템의 정확한 성능 수치는 오늘날 엄밀하게 재구성할 수 없다. 초당 몇 프레임이었고 정밀도가 몇 밀리초였다고 써서는 안 된다. 남아 있는 증거를 넘어서는 말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때부터 구축에 사람의 눈을 넘어서는 판독 도구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커비의 ‘두 눈’ 촬영 시스템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카메라는 초당 약 128프레임을 촬영했다. 명목상의 프레임 간격은 1/128초, 약 0.0078초였으며, 전기시계와 함께 사용하면 100분의 1초 단위의 값을 읽을 수 있었다. 2024년 파리의 공식 결승선 스캔 시스템은 초당 4만 회를 기록할 수 있다고 알려졌다. 명목상의 샘플링 간격은 약 25마이크로초, 즉 100만분의 25초다.
구축은 갈수록 더 세밀하게 본다. 오늘날 결승선에서 차이를 구별하는 능력은 공식 기록으로 발표하는 자릿수를 이미 한참 넘어섰다.
여기서 중요한 초기의 현상 하나가 나타난다. 구축이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공식 기록도 반드시 그만큼 세밀하게 발표하는 것은 아니다. 1932년 남자 100미터에서 톨런과 멧캘프의 공식 기록은 모두 10.3초로 적혔지만, 자동 계측에서는 약 10.38초 수준까지 값을 읽을 수 있었다. 촬영의 핵심 기능 하나는 순서를 가리는 것이지, 내부에서 더 세밀하게 측정한 값을 모두 공식 기록의 자릿수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는 이 점이 분명하다. 세계육상연맹 자체의 결승선 사진 판독 지침은 진출 여부가 걸린 일부 동률을 가릴 때 1000분의 1초까지 다시 읽는 것을 명시적으로 허용한다. 현대 올림픽 결승선 스캔의 샘플링 능력은 이보다도 훨씬 세밀하다. 따라서 장비가 충분히 정밀하지 않아 육상에서 1000분의 1초를 쓰지 못한다는 설명은 더는 성립하지 않는다. 공식 단거리 기록을 일반적으로 1000분의 1초까지 발표하지 않는 것은 규칙의 선택이지, 카메라의 능력 부족이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못 박아야 한다. 기술적 한계 때문이라고 여기는 흔한 오해를 걷어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육상 기록을 100분의 1초까지만 표시하는 이유가 그보다 세밀하게는 장비로도 정확히 잴 수 없어서라고 생각하곤 한다. 사실은 반대다. 장비는 오래전부터 더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구축도 진출권이 걸린 동률을 가려야 할 때는 스스로 1000분의 1초까지 읽는다. 현대의 결승선 스캔은 샘플링 간격이 이미 마이크로초 수준까지 내려가 있다. 그러니 100분의 1초라는 발표 단위는 장비 능력의 천장이 아니라 구축이 스스로 정한 표시 형식이다. 구축이 보는 것은 발표하려는 것보다 훨씬 세밀하다. 이미 확보한 정밀도의 일부를 내부에 남겨 두고 특정한 상황에서만 꺼내 쓴다. 이것은 구축이 자신의 능력에 거는 제한이다. 이런 자기 제한은 도쿄에서 스위치를 넘겨준 행동과 성격이 같다.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지는 않기로 고른 것이다.
이번에는 스스로 내려놓는 쪽을 보자. 수영이 가장 선명한 예를 제공한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남자 400미터 개인혼영에서 라르손과 매키는 100분의 1초까지 보면 모두 4분 31.98초였다. 장비는 더 세밀하게 읽었다. 라르손은 4분 31.981초, 매키는 4분 31.983초였다. 라르손은 0.002초 차이로 금메달을 받았다.
그 뒤 국제 수영계는 한 가지 조치를 취했다. 소수점 셋째 자리를 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데이터에서, 장비가 읽어 낼 수 있어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데이터로 바꾸었다. 규칙은 자동 계측 기록을 100분의 1초까지만 기록하도록 명시하고, 소수점 셋째 자리는 기록해서도 안 되며 시간이나 순위를 결정하는 데 써서도 안 된다고 정한다.
수영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계측학적으로 강력한 이유가 있다. 수영장의 기하학적 치수에는 허용오차가 있다. 자동 터치패드를 설치한 50미터 수영장의 기준 길이는 50미터이며, 허용 범위는 대략 플러스 1센티미터다. 정상급 선수가 1000분의 1초 동안 나아가는 거리는 몇 밀리미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계측기가 1000분의 1초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두 레인의 경기 거리를 그 자릿수까지 공정하게 비교할 만큼 정확히 알고 있다는 보장이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신중해야 한다. 국제 수영계가 수영장의 허용오차 때문에 공식적으로 1000분의 1초를 폐지했다고 말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인과관계를 주장하게 된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양 끝이다. 한쪽에는 소수점 셋째 자리를 기록과 순위 결정에 쓰지 못하게 한 명시적 규칙이 있고, 다른 쪽에는 시설 규격상의 길이 허용오차가 있다. 1972년 이후의 이 정책 변화가 그 경기와 관련 있다는 설명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당시 회의록에서 ‘수영장의 허용오차가 얼마이므로 1000분의 1초를 폐지한다’고 명시한 문장은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이유는 원래의 의결 근거를 찾은 사실처럼 다루지 말고, 일단 미결로 남겨 두어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레인 간 3센티미터 차이도 과거의 옛 규격을 설명하는 수치이지 현행 수치가 아니다. 지금의 허용오차는 더 엄격하다.
여기서 수영과 육상은 구축이 자신을 제한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을 보여 준다. 수영에서는 장비가 소수점 셋째 자리를 제공해도 규칙이 그 자리에는 판정 효력이 없다고 선언한다. 육상에서는 장비와 내부 판독이 1000분의 1초, 그보다 더 세밀한 단위까지 들어가더라도 공식 단거리 시간은 여전히 100분의 1초로 기록하고, 순위는 결승선 영상으로 확정한다. 두 사례 모두 같은 점을 입증한다. 측정할 수 있는 능력과, 제도가 그 측정에 어느 정도의 법적 효력을 부여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8 미리 남겨 두어 적법하게 비워 둘 수 있는 칸
이 글의 논의를 모아 보자.
앞선 열여섯 편에서 구축은 줄곧 하나로 매듭짓기를 추구했다. 모든 일을 확정된 결과 하나, 이름 하나, 기록 하나, 순위 하나, 승패 하나로 귀결시키려 했다. 그러고는 거듭 실패했다. 그 안에 담을 수 없는 것, 계산해 낼 수 없는 것, 판정할 수 없는 것, 자리를 마련할 수 없는 것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담기지 않은 것들이 앞선 글들의 잔여항이었다.
이 글에서 구축은 처음으로 반대 방향의 일을 한다. 하나로 매듭지을 능력을 잃은 것이 아니다. 점프오프는 여전히 손안에 있고, 언제든 도쿄의 그 경기를 단 한 명의 챔피언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미리, 하나로 매듭짓지 않은 결과가 존재해도 된다고 규칙으로 허용했다. 자신의 규칙 안에 길 하나를 써 두었다. 공동 1위로 가는 길, 하나의 값으로 환원되지 않은 결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이 글의 잔여항이 나온다. 그 모습은 앞선 모든 잔여항과 반대다.
앞에서 잔여항은 구축이 하나로 매듭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남은 것이었다. 명단에 들지 못한 이름은 구축이 받아 내지 못한 것이었다. 계산으로 가려낼 수 없는 원인은 구축이 분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정 속의 몸은 구축이 닿지 못하는 것이었다.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현실은 구축이 정의로 배제한 것이었다. 모두 구축의 능력이 끝나는 자리였고, 구축이 원했으나 얻지 못한 것이었다.
이 글의 잔여항은 구축이 매듭지을 수 있으면서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선택하여 남긴 것이다. 그 공동 1위는 구축의 실패가 아니다. 승패를 가리지 못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가릴 수 있는데도 가릴 필요는 없다고 택했다. 자신의 장부 안에 미리 남겨 둔, 적법하게 다 채우지 않아도 되는 칸이다.
잔여항이라는 개념이 한 번 뒤집힌다. 앞선 열여섯 편에서 잔여항은 줄곧 구축의 결함이었고,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선을 긋고 싶었으나 정확히 긋지 못했거나 엉뚱한 곳에 그었다는 증거였다. 여기서 잔여항은 처음으로 결함이 아니라 설계가 된다. 공동 1위가 구축을 곤경에 빠뜨린 것이 아니다. 구축이 스스로 공동 1위의 자리를 규칙 안에 남겨 두었다. 때로는 하나로 매듭짓지 않은 결과도 온전하고 적법한 최종 결과일 수 있음을 인정했다.
이 인정은 보기보다 무겁다. 이 시리즈의 첫 편부터 구축의 존엄은 거의 전부 하나로 매듭짓는 능력에 기대어 있었다. 미결인 일을 하나의 확정된 답으로 귀결시키는 능력이다. 확정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구축은 실패했고 무능해 보인다. 그러니 하나로 매듭짓지 않은 결과도 온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로 매듭짓기만이 성공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라고 인정하는 일이다. 자신을 지탱해 온 것의 일부를 내려놓는 일이다. 구축이 이 인정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역설적으로 다른 곳에서 이미 충분히 강하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를 하나로 매듭지을 수 있기에, 극히 드문 경우에는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여유가 있다. 허약하고 자주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구축은 감히 공동 순위를 규칙으로 허용하지 못한다. 자신의 무능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언제나 매듭지을 만큼 강한 구축만이, 하나로 매듭짓지 않는 결과를 위해 자기 규칙 안에 떳떳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그 스위치를 내주는 것이었다. 구축은 언제 공동 순위여야 하는지 혼자 정하지 않았다. 완전히 같아서 자신이 더는 구별할 수 없는 선수들에게 결정을 넘기고, 그들이 함께 정하게 했다. 여기서 구축은 한 가지를 인정한다. 자신의 척도가 이미 두 사람을 완전히 같다고 판정했을 때, 본경기 성적도 순위 산정에 쓰는 시도와 실패 횟수도 똑같을 때, 추가 절차를 동원해 굳이 둘을 갈라놓을 것인가. 그 일만큼은 어쩌면 혼자 정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은 16편과 정확히 한 쌍을 이룬다. 16편에서 구축은 생리학적 가설 하나를 정의로 얼려 놓고 0.100초라는 선을 굳게 지켰다. 자신이 의뢰한 연구의 증거조차 그 선을 흔들지 못했다. 그곳에서 구축은 마지막 단계의 통제권을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점프오프라는 매듭짓기 수단을 쥐고도, 끝까지 갈 것인지의 스위치를 스스로 내주었다. 같은 구축이 출발에서는 꽉 붙들고, 높이뛰기에서는 손을 놓는다.
붙드는 것과 놓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마지막 한 단계에 대한 구축의 두 가지 다른 처분이다. 어떤 선은 반드시 자신이 그어야 하며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여긴다. 그 선 자체가 그다지 든든한 근거 위에 서 있지 않더라도 그렇다. 0.100초가 그런 선이다. 어떤 결과는 자신이 대신 결정할 능력이 충분해도 당사자들이 함께 정하게 해도 된다고 여긴다. 공동 1위가 그런 결과다. 구축이 언제나 끝까지 하나로 매듭지으려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마지막 한 걸음 앞에서 멈추고, 그 한 걸음을 자신이 판정하는 사람들에게 남긴다.
이 구축은 두 높이뛰기 선수의 시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할 수 있고, 그들의 성적이 완전히 같다고 계산할 수 있으며, 언제든 바를 올려 한 번 더 뛰게 해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못해서가 아니다. 오래전에 이미 이 순간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을 써 두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길이다. 구축은 승패를 가릴 모든 수단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수단을 쓸지 말지의 마지막 결정은, 이미 자신이 구별할 수 없게 된 두 사람의 손에 돌려주었다.
자는 아직 정확히 재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