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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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구주기율(鑿構周期律) · 육상 · 한국어 독립 재구성판
제 13 편 / 전23편

구축이 담아내지 못하는 몸

피스토리우스 사건은 의족이 이점을 주는지에 단순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비교의 기준이 될 몸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제도가 불확실성과 입증책임을 어떻게 배분하는지를 드러냈다.

Han Qin (秦汉)
이 글의 목차

1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질문

먼저 이 글이 묻는 바를 분명히 해두자. 글 전체가 이 질문에 걸려 있고, 이 질문에는 직접 답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탄소섬유 의족으로 달리는 선수가 비장애인 선수들과 함께 공개 경기에 출전하려 한다. 경기 단체가 판단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 의족이 의족을 쓰지 않는 선수들에 비해 그에게 경기 전체에 걸친 경쟁상 이점을 주는가.

이 판단을 정식으로 풀어 쓰면 하나의 반사실적 질문이 된다. 이 선수에게 그 의족 대신 온전한 생물학적 다리가 있었다면, 같은 종목에서 얼마나 빨리 달렸을까.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은 관측할 수 없다.

온전한 생물학적 다리를 가진 그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종아리가 없다. 어떤 실험도 그의 두 종아리를 다시 자라나게 한 뒤 한 번 달리게 해서, 의족을 썼을 때의 기록과 비교할 수는 없다. 팔다리를 잃은 선수에게 그와 같은 세계의 상태는 영원히 실험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잠시 멈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선 글들에서 만난 어떤 불확실성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비먼의 그 도약에 고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원리상 존재하는 값이다. 다만 다른 요인과 얽혀 있어 떼어낼 수가 없다. 그것은 분리의 어려움이다. 러닝화가 에너지를 얼마나 아끼게 해주는지는 원리상 측정할 수 있다. 다만 개인차가 크다. 그것은 변이의 어려움이다. 여기서의 어려움은 훨씬 철저하다. 비교해야 할 대상 자체가 이 세상에 없다.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작아서 측정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만들어진 적이 없다. 한 사람의 생물학적 종아리가 절단되고 나면, 그 다리는 그것으로 달렸다면 나왔을 기록과 함께 관측 가능한 것들의 세계에서 사라진다. 구축이 비교의 기준으로 삼으려는 자리는 비어 있다.

연구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 빈자리에 다가갈 수밖에 없다. 다른 선수와 비교하고, 같은 선수에게 서로 다른 의족 구성을 적용하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인체계측학으로 몸을 재구성하고, 통계적으로 예측하거나 이 방법들을 조합한다. 스포츠중재재판소는 리퍼 사건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한 선수가 온전한 팔다리를 가졌을 경우의 경기력을 예측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근거 있는 추정이지,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이 아니다. 거기에는 제거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들어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앞선 모든 글과 다르다.

앞선 글들에서 구축이 마주한 문제에는 어느 정도 관측 가능한 사실의 핵이 있었다. 비먼의 그 도약 가운데 정확히 얼마가 고도 덕분인지 계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변수들은 존재했고, 측정된 적도 있었다. 단지 서로 분리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제12편에서 러닝화로 세운 기록을 인정해야 하는가는 가치의 문제였지만, 논쟁 양쪽 모두 관측 가능한 데이터 위에 서 있었다. 이 글의 문제는 계산이 안 된다는 데 있지 않다. 가치판단의 문제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판단해야 할 그 사실 자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사실을 볼 수 없을 때, 구축은 어떻게 판정하는가.

이 질문은 이 글에만 속하지 않는다. 모든 측정 제도가 언젠가는 부딪힐 벽이다. 측정을 업으로 삼는 구축의 권위는 전적으로 볼 수 있고, 달아볼 수 있는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판단해야 할 것 중 일부는 어김없이 그 시야 밖에 놓인다. 앞선 글들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다가갈 수 있는 존재였다. 흩어져 사라진 원문, 뒤엉킨 원인, 선택되지 않은 선택지였다. 이 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몸이다. 보고 재는 능력, 구축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이 보고 잴 대상조차 없는 문제 앞에서 무력해질 때, 구축에는 두 길이 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거나, 그 대상을 직접 보지 않고도 판정을 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입증책임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이 글이 다룰 것은 이것이다. 답은 뜻밖이면서도 전적으로 이치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진실을 가릴 수 없을 때 판정은 그보다 앞선 질문으로 물러난다.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인가. 그 답이 입증책임의 배분이다. 그리고 입증책임을 누구에게 배분하느냐, 그 배분 자체가 판정이 된다.

2 반드시 나눠야 할 세 단계

피스토리우스 이야기에 앞서 원칙 하나를 세워두자. 이 글에서 가장 쉽게 잘못 짚을 수 있는 부분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일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한데 섞으면 모든 것이 뒤엉킨다.

첫째, 실험실이 역학적 또는 생리학적 차이를 측정했다.

둘째, 경기 단체가 그 차이를 이점이라고 불렀다.

셋째, 중재재판소가 그 단체가 특정 규정에 따라 전체적인 경쟁상 이점을 입증했는지 판정했다.

이 세 단계는 서로 다른 세 명제다. 차이가 측정되었다고 해서 그 차이가 이점인 것은 아니다. 이점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법적으로 전체적인 이점이 입증된 것도 아니다.

일상의 논의에서는 이 구별이 거의 언제나 지워진다. 그러면 아주 흔한 오해가 생긴다. 의족이 생물학적 발목관절보다 더 많은 탄성에너지를 돌려준다고 들으면,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틀림없이 이점일 것이며, 따라서 의족을 쓰면 분명히 이득을 볼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탄성에너지를 더 많이 돌려준다는 것은 고립된 역학적 사실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이점이 되려면 경기 전체에서 가져오는 이득이 동시에 가져오는 손해보다 크다는 것부터 입증해야 한다. 낼 수 있는 힘이 더 작다거나, 가속이 더 느리다거나, 안정성이 더 떨어지는 손해까지 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법적으로 성립하는 전체적인 이점이 되려면, 정해진 입증 기준 아래 유리한 요인과 불리한 요인을 함께 저울질해 명확한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에너지를 몇 줄 더 돌려주었다는 말과 이득을 보았다는 말 사이에는 넓은 골이 두 개나 있다. 그 두 골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관측할 수 없는 그 반사실이다.

피스토리우스를 보자. 2007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은 독일 쾰른체육대학교의 브뤼게만 연구팀에 검사를 의뢰했다. 연구에서는 양쪽 무릎 아래를 절단한 선수 한 명, 곧 피스토리우스와 비장애인 단거리 선수 다섯 명이 실내 직선 주로에서 60미터를 달렸다. 연구가 제시한 것은 몇 가지였다. 지지기에 수행한 역학적 일이 더 적었고, 의족 발목, 무릎, 엉덩관절 사이에서 일이 분배되는 양상이 크게 달랐다. 다리의 질량도 더 작았고, 블레이드가 흡수한 역학적 에너지에 비해 돌려준 에너지의 비율은 매우 높았다. 연구는 이로부터 그 의족을 쓰면 더 적은 대사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같은 단거리 경기력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것은 첫 번째 단계, 측정과 추론이다. 연구자들 자신이 쓴 표현도 이 측정들이 “하나의 가설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가설이지, 결론이 아니다. 역학적 일에서 끌어낸 추론이지, 생물학적 다리를 가진 채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선수를 실험으로 직접 재현한 것이 아니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공식 요약은 한 걸음 더 나갔다. 같은 속도로 달릴 때 피스토리우스가 비장애인 주자보다 약 25퍼센트 적은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 측정한 차이를 이점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정작 논란의 핵심은 역학적 차이가 측정되었느냐가 아니었다. 차이는 측정되었다. 쟁점은 출발, 가속, 곡선 주로 달리기, 피로, 낼 수 있는 힘의 상한과 온갖 불리한 요소를 모두 고려하고도 그 측정들이 경기 전체의 이점을 확립했느냐였다.

이 세 번째 단계는 법적 판정이다. 실험실의 측정이 아니다. 세 단계를 구별하는 일이 이 글 전체의 기초다.

세 단계를 반드시 나눠야 하는 이유는 각 단계에서 무엇을 얼마나 확실히 세울 수 있는지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첫 단계인 측정은 확립할 수 있다. 역학적 수치가 눈앞에 있다. 두 번째 단계, 그 측정을 이점이라고 부르는 일은 이미 해석이다. 그 차이가 성적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러려면 차이를 경기 전체 속에 놓고 보아야 한다. 세 번째 단계, 전체적인 이점이 입증되었는지 판정하는 것은 법적 행위다. 정해진 입증 기준 아래 양방향의 증거를 저울질해야 한다. 이 세 단계를 섞을 때 가장 흔히 벌어지는 일은 첫 단계의 확실성을 세 번째 단계에 슬쩍 빌려주는 것이다. 역학적 차이가 확실하니 전체적인 이점도 확실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확실한 역학적 차이에서 논쟁적인 이점으로, 다시 직접 입증할 수 없는 전체적인 순이점으로 갈수록 확실성은 줄어든다.

3 입증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2008년 1월 14일, 국제육상경기연맹 이사회는 피스토리우스의 치타 의족이 규정 제144.2조 제5항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그 의족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연맹 규정이 적용되는 경기에 출전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단순한 과학적 발표가 아니라 자격에 대한 결정이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스포츠중재재판소에 불복 신청을 냈다. 이틀간의 심리를 거쳐 2008년 5월 16일, 재판소는 그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연맹 이사회의 결정을 즉시 취소하고, 해당 사건에서 심사한 의족으로 연맹 공인 대회에 출전할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이 판정의 핵심은 재판소가 의족에 이점이 없다고 인정했다는 데 있지 않다. 재판소는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 핵심은 입증책임이 어느 쪽에 있었느냐였다.

2007년의 규정 제144.2조 제5항은 이점을 “제공하는” 장치를 금지했다. 문법으로 보나 법적으로 보나, 금지의 근거가 되는 사실은 이점의 존재였다. 따라서 피스토리우스를 금지하려면 이점이 존재함을 입증해야 했다. 입증할 책임은 이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 곧 국제육상경기연맹에 있었다.

판정문은 이렇게 썼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은 자신에게 입증책임이 있음을 올바르게 받아들였으며, 이 점은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문장이 이 글의 첫 번째 받침점이다.

연맹이 입증책임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그 의족이 전체적으로 순이점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연맹이 입증해야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연맹은 입증하지 못했다. 재판소는 쾰른의 실험 설계가 일정한 속도의 직선 달리기에 집중했으며 출발, 가속, 곡선 주로 달리기와 이점을 상쇄하는 모든 불리한 요소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체적인 이점을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따라서 입증책임의 원칙에 따라 주장한 쪽인 국제육상경기연맹이 졌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목하자. 재판소는 의족에 이점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점이 있다고 주장한 쪽이 요구되는 기준까지 그것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두 문장은 전혀 다르다. 앞의 문장은 사실에 대한 단언이고, 뒤의 문장은 입증 여부에 대한 판정이다. 비교에 필요한 반사실을 직접 관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판소가 내린 것은 뒤의 판정이었다. 앞의 단언처럼, 존재하지 않는 몸의 실제 경기력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적용된 것은 민사상의 입증 기준으로, 흔히 ‘개연성의 우월’이라고 부른다. 증거가 팽팽히 맞설 때는 입증책임을 지는 쪽이 진다는 뜻이다.

이 원칙은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건에서는 양쪽 증거가 팽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쪽 증거가 더 강하면 판정도 그쪽을 따르고, 입증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결과를 바꾸지 않는다. 입증책임이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때는 양쪽 증거가 균형을 이뤄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다. 의족 사건에서는 중심에 놓인 반사실을 관측할 수 없으므로, 그와 같은 판단 불능에 부딪힐 위험이 유난히 크다. 간접 증거로도 어느 쪽인지 가려내지 못하면, 평소 눈에 띄지 않던 원칙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다른 곳에서는 가장자리에서만 작동하던 원칙이 여기서는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핵심 사실을 영원히 직접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간접 증거가 법적 입증 기준을 충족할 가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증거로도 저울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이지 못할 때, 끝내 남는 빈자리를 입증책임이 메운다.

그러므로 피스토리우스가 이긴 것은 의족에 이점이 없다고 입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규정 아래에서는 국제육상경기연맹에 입증책임이 있었고, 연맹이 개연성의 우월이라는 기준까지 이점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증책임의 방향이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사실의 결과를 누가 감당해야 하는지 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곧 판정 자체였다.

4 방향을 뒤집은 규정 개정

스포츠중재재판소는 이 판정의 적용 범위를 분명히 제한했다. 다른 선수나 다른 의족에는 이 결정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사건은 각자의 사실관계에 따라 심사해야 했다.

그러니까 피스토리우스의 승소가 포괄한 것은 피스토리우스라는 선수, 그가 사용한 바로 그 의족, 그 사건에서 심사한 구체적 사안이었다. 의족이라는 장치 전체에 일반적인 면제를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 좁은 범위는 나중에 대단히 중요해졌다.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15년, 렘을 둘러싼 논란과 법률 검토를 거쳐 국제육상경기연맹이 해당 규정을 개정했다. 새 규정 제144.3조 제4항은 모든 기계적 보조 수단의 사용을 금지했다. 다만 선수가 개연성의 우월이라는 기준에 따라, 그 보조 수단이 그것을 쓰지 않는 선수들에 비해 자신에게 전체적인 경쟁상 이점을 주지 않음을 입증하면 예외로 했다.

이 한 문장이 방향을 통째로 뒤집었다.

옛 규정에서는 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금지의 근거였고, 입증책임은 그것을 주장하는 국제육상경기연맹에 있었다. 새 규정에서는 이점이 없다는 사실이 사용을 허용하는 조건이 되었고, 입증책임은 사용을 신청하는 선수에게 돌아갔다.

이 변화는 실험실 측정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과학은 그대로였고, 반사실도 여전히 관측할 수 없는 반사실이었다. 바뀐 것은 단 하나, 증거만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 누가 그 결과를 감당하느냐였다. 옛 규정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연맹이 지고, 선수는 출전할 수 있었다. 새 규정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면 선수가 지고, 출전할 수 없었다.

판단할 수 없다는 동일한 사실이 두 규정 아래에서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그 반대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직 입증책임의 방향이 뒤집힌 데서 나왔다.

이것이 이 글의 핵심 명제이며, 여기서 처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결정적인 사실을 관측할 수 없고 증거로도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 판정의 실질적인 내용은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그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대가를 누구에게 지울지 배분하는 일이다. 그 배분은 규정의 문구 하나로 뒤집힐 수 있다. 뒤집히고 나면 같은 증거가 정반대의 결말로 이어진다.

2015년의 규정은 불확실성의 법적 위험을 선수에게 배분했다.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곧 예외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선수는 출전할 수 없었다.

공정하게 보자면, 당시 선수에게 입증책임을 지운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저 선수를 괴롭히려는 조치는 아니었다. 연맹의 입장은 선수가 그 장치의 사용을 통제하며, 장치의 구성과 훈련 이력, 관련된 개인 경기력 데이터를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외를 신청한 사람에게 입증을 맡기면 경기의 공정성을 지킬 수 있고, 행정적으로도 실행 가능하다고 보았다. 가볍게 넘길 이유는 아니다. 예외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 예외가 해롭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하는 일은 다른 많은 상황에서는 타당하다. 문제는 이 특정한 상황에 다른 곳에는 없는 특징이 하나 있다는 데 있다. 선수가 입증해야 할 것이 관측할 수 없는 반사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합리적인 입증책임의 배분이 여기서는 한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직접 실험해 입증할 길이 없는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되었다.

5 판단을 거부한 연구

이 규정의 무게를 제대로 보려면 구체적인 연구 하나에 적용해보아야 한다.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렘과 독일의 체육 기관들은 여러 기관이 참여하는 연구를 의뢰했다. 렘을 포함해 무릎 아래를 절단한 멀리뛰기 선수 세 명과 경험 많은 비장애인 멀리뛰기 선수 일곱 명을 검사했다. 연구에서는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두 가지가 발견되었다.

한쪽에는 불리한 점이 있었다. 절단 선수 집단의 평균 최고 질주 속도와 도움닫기 속도가 비장애인 집단보다 낮았다. 다만 렘 개인의 속도는 비장애인 집단의 범위 안에 들어갔다.

다른 쪽에는 유리한 역학적 특성이 있었다. 절단 선수들은 발구름 때 잃는 수평 속도가 더 적었다. 의족이 돌려주는 탄성에너지도 대조군의 무릎 아래 관절들이 돌려주는 에너지보다 많았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하나의 답을 향하지 않았다. 측정된 것 중 일부는 렘에게 불리했고, 일부는 유리했다. 게다가 두 부분은 서로 다른 단위로 측정되었기에 그대로 더할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여기서 이 글에 더없이 중요한 행동을 했다. 판단할 수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들이 쓴 말은 이렇다. “현재 연구 단계에서는 마르쿠스 렘의 의족이 그에게 전체적인 이점을 주었는지, 주지 않았는지 말할 수 없다.”

이 문장은 “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보다 훨씬 강하다.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이 연구로는 어느 방향으로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한 가지 동작 기술에 유리한 요인이 다른 기술에는 불리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기술에서 무엇이 수행을 제한하는지도 당시에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제 판단을 유보한 이 연구를 선수에게 입증책임을 지우는 규정 안에 넣어보자.

규정은 선수에게 이점이 없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연구는 이점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규정 아래에서 선수는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없음을 입증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수는 출전할 수 없다.

여기서 입증책임의 방향이 어떻게 결말을 곧바로 결정하는지 보인다. 판단할 수 없다고 밝힌 똑같은 연구를 놓고도, 입증책임이 연맹에 있으면 연맹은 이점을 입증할 수 없고 선수는 출전한다. 입증책임이 선수에게 있으면 선수는 이점이 없음을 입증할 수 없고 경기장에서 배제된다. 연구 자체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판단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중립적이며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연구가, 입증책임의 두 방향 아래서 선수를 각각 경기장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내보낸다.

이 연구를 해석하는 당사자들 역시 서로 반대편으로 갈라졌다. 렘은 2016년 5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의족으로 인한 이점을 확인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를 올림픽 출전 자격을 계속 추진할 근거로 삼았다. 반면 비판자들인 베크먼과 동료들은 이점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규정 아래에서 이점의 부재를 입증했다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연구팀 자신의 입장은 두 명제 어느 쪽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세 주체가 세 가지 말을 했다. 모두 똑같은 연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차이는 연구에 있지 않았다. 각자가 입증책임의 어느 편에 서 있었느냐에 있었다.

이 대목에서 이 글의 명제가 유난히 선명해진다. 판단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한 하나의 연구에서 세 주체가 세 가지 의미를 읽어냈다. 그 의미가 갈리는 지점은 연구가 무엇을 측정했느냐가 아니었다. 판단할 수 없다는 결과를 누가 떠안아야 하느냐였다. 렘은 출전을 원하는 쪽에 서 있었으므로, 이점을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비판자들은 규정을 지키는 쪽에 서 있었으므로, 이점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점의 부재를 입증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예외 조건도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연구팀은 과학의 편에 서 있었다. 어느 명제도 확립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연구 자체는 중립적이었다. 판단을 다른 이들에게 남겨두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판단할지는 입증책임이 어느 쪽에 놓여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해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렘이 그 단계에서는 이점의 부재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맹과 논의한 뒤 렘은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 자격을 더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확인했다.

6 방향을 되돌린 판정

이후 입증책임의 방향은 다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중재판정을 통해서였다.

2020년, 리퍼의 사건이 스포츠중재재판소에 올라왔다. 리퍼는 양쪽 무릎 아래를 절단한 단거리 선수였다. 그는 의족으로 달린 자신의 기록을 비장애인 선수들의 기록과 함께 순위에 올려달라고 신청했다.

이 사건에서 재판소는 반드시 나눠 보아야 할 두 가지 판단을 했다.

첫째는 입증책임에 대한 판단이었다. 재판소는 2015년 규정 가운데 선수에게 입증책임을 지운 조항이 위법하고 무효라고 판단했다. 장애인 선수에게 차별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입증책임의 전환이 필요하지도 비례적이지도 않다는 이유였다. 특히 인접한 일반 기술 규정에서는 연맹에 입증책임을 두고 있었다. 판정문 제359항은 이 규정이 “전체적인 경쟁상 이점이 없음을 확립할 책임을 선수에게 지운다는 점에서 위법하고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소가 한 일은 해당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었다. 기계적 보조 수단에 대한 금지 전체를 없애지는 않았다. 그 부분을 도려낸 뒤 제362항은 리퍼, 또는 의족을 사용하려는 어떤 장애인 선수든 그 특정한 의족으로 전체적인 경쟁상 이점을 얻는다는 사실을 연맹이 입증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입증책임에서는 방향이 2008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선수가 이점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연맹이 이점이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이 부분에서는 리퍼가 이겼다.

둘째는 사건의 실체에 대한 판단이었다. 재판소는 이어 이 사건의 구체적인 증거에 비추어 세계육상연맹이 리퍼의 그 특정 의족이 전체적인 경쟁상 이점을 준다는 사실을 실제로 입증했다고 판단했다. 특히 당시 구성의 의족으로 얻게 되는 키와 그에 따른 다리 길이 덕분에, 그는 온전한 생물학적 다리를 가졌을 경우의 추정 속도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리퍼가 졌다. 그의 불복 신청은 일부만 받아들여졌다.

이 두 판단의 분리가 이 글에서 가장 정교한 대목이다. 글 전체의 명제가 지나치게 단순한 구호로 읽히지 않도록 막아준다.

입증책임의 방향은 어디에서 시작할지를 정한다. 증거만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 누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정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종착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리퍼 사건에서는 세계육상연맹에 입증책임이 배분되었지만, 연맹은 그 특정 사건에서 실제로 이점을 개연성의 우월이라는 기준까지 입증했다. 따라서 입증책임이 연맹 쪽에 있었어도 선수는 졌다.

그러므로 입증책임의 방향은 유일한 결정 요인이 아니다. 결정적인 출발점이다. 증거가 팽팽하게 맞설 때 승패를 가른다. 반면 증거가 팽팽하지 않을 때, 어느 한쪽이 실제로 요구되는 기준까지 입증할 수 있을 때에는, 실체에 관한 판단이 입증책임에 따른 기본 결론에 우선한다. 리퍼의 의족 높이 문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증거는 팽팽한 상태에 머물지 않았고, 입증 기준에 도달했다.

의족의 높이 자체도 잠시 살펴볼 만하다. 관측할 수 없는 것이 중심에 놓인 이 영역에서 비교적 손에 잡히는 몇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리를 절단한 단거리 선수의 의족 높이는 서 있을 때의 키와 다리 길이를 직접 결정한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더 긴 다리는 더 긴 보폭을 뜻한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생물학적 몸을 재구성해야만 판단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의족의 실제 치수와 인체계측에서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관계를 이용해 추정할 수 있다. 리퍼 사건에서 세계육상연맹이 기준에 맞게 이점을 입증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관측 불가능한 반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이런 단서 덕분이었다. 이는 거꾸로 앞서의 논리를 확인해준다. 비교적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면, 입증책임에 따른 기본 결론은 뒤로 물러나고 실체에 관한 증거가 판정을 넘겨받는다.

따라서 중재재판소는 한 연맹의 입증책임 배분 규정을 무효로 하면서도, 적법하게 다시 배분된 입증책임 아래에서 선수의 배제를 유지할 수 있다. 입증책임과 사건의 실체는 별개로 보아야 할 두 판단이다. 리퍼 사건은 그 구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7 방향을 정한다고 허용할 불확실성의 크기까지 정해지지는 않는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 종목의 입증책임 배분은 세 단계를 거쳤고, 방향은 두 번 뒤집혔다.

2007년 규정은 이점을 제공하는 장치를 금지했고, 입증책임은 국제육상경기연맹에 있었다. 피스토리우스 사건에서 연맹은 그 책임을 받아들였으나 입증하지 못했다. 선수는 출전했다.

2015년 규정은 선수에게 이점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요구했다. 입증책임이 선수 쪽으로 뒤집혔다. 렘은 판단할 수 없다고 밝힌 연구를 앞에 두고 입증을 마치지 못했다. 그는 출전하지 못했다.

2020년 리퍼 판정은 선수에게 입증책임을 지운 조항을 도려내고 책임을 연맹으로 되돌렸다. 그렇게 되돌아간 책임 아래서도 세계육상연맹은 리퍼의 그 의족이 주는 이점을 입증했다. 선수는 일부 패소했다.

세 단계, 두 번의 방향 전환, 세 가지 결과였다. 이 결과들이 갈린 까닭은 상당 부분 과학의 진전보다 입증책임의 방향에 있었다. 다만 리퍼 사건에서는 연맹이 실제로 이점을 입증했다는 점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이 글이 말하려는 핵심은 이것이다. 결정적 사실을 관측할 수 없고 증거만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영역에서는, 판정의 실질적인 내용이 입증책임의 배분이 된다. 그 배분은 규칙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택이다. 문구나 판정으로 방향이 바뀔 수 있으며, 증거가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라면 결과도 그에 따라 뒤집힌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한계를 덧붙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명제를 지나치게 멀리 밀고 가게 된다.

입증책임의 원칙이 정하는 것은 증거가 팽팽할 때 누가 지느냐이다. 과학적 방법을 정하지 않는다. 최소 표본 수를 정하지 않는다. 인정할 만한 비교 대상을 정하지도,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합산하는 알고리즘을 정하지도 않는다. 개연성의 우월이라는 말은 저울이 수평일 때 어느 쪽으로 기울여야 하는지만 알려준다. 저울로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입증책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그어주기 때문이다. 입증책임은 증거로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에도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과학으로 분명히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건이 영원히 미결 상태에 남지 않도록, 어쨌든 판정 하나는 나오게 보장한다. 하지만 과학이 어디까지 도달해야 분명히 말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더 나은 연구 방법, 더 적합한 비교 대상, 경기의 각 단계에서 얻고 잃는 것을 합산하는 알고리즘은 과학과 정책이 답해야 할 문제다. 입증책임은 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입증책임은 최후에 받쳐주는 원칙이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판정이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바닥을 받친다. 그러나 진실로 가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길로는 갈 수 없음을 인정한 뒤에야 꺼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입증책임을 옮기면 실험실 측정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법적 결과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과학적 불확실성을 얼마만큼 허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족의 순이점을 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떤 비교 대상을 두고, 무엇을 어떻게 합산해 판단할 것인가. 입증책임의 원칙은 이 더 깊은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는다. 다만 답할 수 없을 때, 답할 수 없다는 대가를 누가 치를지를 정한다.

이곳에서 구축이 처한 상황은 이렇다. 관측할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하고 있다. 생물학적 다리를 가진 그 선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사실 자체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한 단계 앞선 자리로 물러나, 진실을 가리려는 대신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대가를 누가 감당할지 배분한다. 그런데 그렇게 물러난 자리에서조차 어느 쪽에 배분해야 할지를 정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 책임을 연맹에 줄 것인가, 선수에게 줄 것인가. 그것 자체가 가치와 법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세 번 이루어졌고, 그 사이 방향이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8 하나의 구축 안에 담기지 않는 몸

이제 이 글을 한데 모아보자.

이 구축은 하나의 가정 위에 서 있다. 성적은 서로 비교할 수 있으며, 비교에는 공통의 바탕이 필요하다는 가정이다. 비장애인 선수들 사이에서는 생물학적 몸이 그 바탕이다. 몸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두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근육, 힘줄, 뼈가 신경의 통제 아래 움직인다. 이 공통의 부류가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의족으로 달리는 선수는 그 공통의 부류를 깨뜨린다. 몸이 추진력을 주고받는 부분 가운데 일부가 생물학적이지 않다. 달리기용 의족은 주로 수동적으로 작동한다. 자체의 강성, 기하학적 형태, 정렬 상태와 받는 힘에 따라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돌려주며, 동시에 다리의 질량과 지레팔 길이, 관절 사이에서 일이 분배되는 양상을 바꾼다. 생물학적 다리와 같은 종류의 물건이 아니다.

그러면 구축은 자신의 비교 틀 안에 자리를 마련해줄 수 없는 몸을 마주하게 된다. 그 몸을 비장애인 선수들과의 비교 속에 넣으려면 의족이 전체적인 이점을 주는지 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질문에는 관측할 수 없는 반사실, 생물학적 다리를 가진 그 선수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 글의 잔여항이다. 연작 전체에서 처음 나타나는 형태다.

앞선 글들의 잔여항은 명단에 들지 못한 이름, 계산할 수 없는 원인, 판정되지 않은 기술, 선택되지 않은 선택지, 합법이지만 비교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장부 밖에 남았지만, 모두 한때 존재했거나 무엇이라고 가리킬 수 있는 것을 향했다. 이 글의 잔여항은 다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다. 생물학적 다리로 달리고 있는 그 선수다. 그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영원히 관측할 수도 없다. 구축이 판단하려는 것은 장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예 이 세상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 앞에서 구축은 그 사실을 판정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한 걸음 물러나, 진실을 가리는 대신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대가를 누가 감당할지 배분하는 것이다.

이 물러남은 연작 전체에서 구축이 거듭 보여준 동작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앞선 여러 글에서 구축은 스스로를 닫아 완결할 수 없을 때 한 걸음씩 물러났다. 원인을 계산할 수 없으면 결과만 적고 원인은 적지 않았다. 기술의 우열을 판정할 수 없으면 성적만 관리하고 과정에는 손대지 않았다. 인정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할 수 없으면 둘 다 성립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물러날 때마다 닿을 수 없는 하나를 포기하고 닿을 수 있는 하나를 지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멀리 물러난다. 판단해야 할 사실 자체에도 닿을 수 없다. 그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방어선까지 물러난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면, 적어도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과를 누가 감당할지는 정하자. 완전한 공백을 마주한 구축이 그래도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그것이 입증책임이다. 입증책임은 구축이 자신을 완결할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그 의족에 실제로 이점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명료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명료하게 말할 수 없을 때 누가 그 결과를 감당할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판정은 진실을 가리는 데서 대가를 배분하는 데로 물러난다. 그 대가를 배분하는 방향이 세 단계에 걸쳐 두 번 뒤집혔다는 사실은, 그렇게 물러난 자리에도 객관적인 발 디딜 곳이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서는 몹시 조심해야 한다. 이 글을 어느 쪽이 이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글이 아니다. 피스토리우스, 렘, 리퍼는 저마다 자신의 말을 했다. 피스토리우스는 장애인 선수에게 비장애인 선수와 공정하게 겨룰 기회를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렘은 판단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를 이점이 있다는 증거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것들은 선수들의 규범적 입장이지 과학적 증거가 아니다. 이 글은 그 입장들 사이에서 승패를 가리지 않는다. 중재재판소들이 법적 입증 기준에 따라 판정을 내렸어도, 관측할 수 없는 그 몸의 실제 경기력 자체를 끝내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던 것처럼.

역사에는 팔다리가 다른 사람들이 공개 경기에 들어간 사례들이 있다. 뒤투아는 오픈워터 수영에 출전했고, 아이저는 나무 의족을 달고 체조 메달을 땄다. 포용의 역사로 기록될 일이다. 하지만 탄소섬유 의족 문제의 선례로 삼을 수는 없다. 그 사례들은 순이점이라는 기준 아래에서 판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다르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공개부 출전 자격이 반드시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까지만 보여준다. 종목의 역학을 바꿀 수 있는 기계적 보조 수단을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관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입증을 누가 떠맡아야 하는지는 답하지 않는다.

이 구축은 의족이 탄성에너지를 얼마나 돌려주는지 측정할 수 있다. 한 번의 발구름에서 수평 속도를 얼마나 잃는지도 잴 수 있다. 성적 하나하나를 센티미터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의족을 쓰는 이 몸이 생물학적 몸이었다면 얼마나 빨리 달렸을지는 측정할 수 없다. 그 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 사실 앞에서 구축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는 대가를 누가 치를지 정하는 것뿐이다. 그 결정은 세 번 이루어졌고, 방향은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매번, 정작 알아야 했던 사실 그 자체를 직접 알아내는 일은 똑같이, 철저하게, 불가능했다.

자는 아직 정확히 재지 못했다. 그래도 여전히 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