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DubitoEssays in the Self-as-an-End Tra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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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Han Qin (秦汉) · 한국어판 · 2026-10-09

이 판본에 관하여

판본 안내: 중국어 원작의 논지를 한국어 독자를 위해 새로 풀어 쓴 글이다. 중국어 원문은 같은 페이지에서 간체와 번체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오즈는 어떤 사람인가?

주인공의 설명에 따르면, 몇 년이고 햇빛을 못 본 듯 창백한 얼굴에 눈 밑은 거멓고 생김새는 요괴 같다. 남이 곤경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거짓말이 몸에 배었다. 남의 좋은 일만 골라 망쳐 놓는다.

두 사람은 함께 연인들을 갈라놓으며 ‘검은 큐피드’라는 악명을 얻는다. 하지만 주인공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악명의 그림자가 주로 오즈에게 드리운다.

이 사람이 모든 평행세계에서 그의 곁에 찰싹 붙어 있다.

그의 진단

지난 2년에 대한 주인공의 진단은 결국 언제나 같은 곳에 닿는다.

그때 오즈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검은 머리 소녀와 장밋빛 인생을 살고 있을 텐데.

작품에서 수없이 나오는 말이다. 그가 내세우는 모든 이론이 이 한 문장에 기대어 있다.

아주 근거 없는 말도 아니다. 오즈는 실제로 얄미운 짓을 숱하게 한다. 연인들 머리 위로 불꽃을 쏘아 올리라고 부추기고, 온갖 함정을 파 놓으며, 주인공의 일이 잘 풀리려는 순간마다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한두 번도 아니다.

작품도 뒤늦게 이 일들을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 그때 불꽃을 쏜 건 너를 위해서였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불꽃 소동은 그저 장난질이었고, 주인공은 그 때문에 고생했다.

마지막에 돌아보면

마지막 화는 관객이 오즈가 지난 2년 동안 해 온 일을 돌아보게 한다.

앞선 화들에 흩어져 있던 장면들이 서로 이어지며 보이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주인공을 애태웠던 정체불명의 펜팔 상대 ‘히구치 게이코’. 이 편지의 내막은 이미 8화에서 밝혀졌다. 오즈가 장난을 시작했고, 아카시가 대신 편지를 썼다. 오즈가 싫증을 낸 뒤에도 아카시는 편지를 이어 갔다. 그 일이 주인공을 아카시 앞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과정 전체와 결과를 모두 오즈가 처음부터 계획한 호의로 돌릴 수는 없다.

오즈의 행동에는 짓궂은 장난과 도움, 자기 재미가 서로 뒤엉켜 있다.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 해도 ‘서투르다’는 말은 남겨 두어야 한다. 정확한 말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지극히 형편없고, 결과는 자주 정반대로 흐른다. 게다가 오즈 자신도 이 과정을 즐긴다. 도와주는 동시에 상대가 허둥대는 모습을 구경하며 재미를 본다.

오즈는 오해받은 착한 사람이 아니다. 방법이 형편없는 사람이, 굳이 말로 밝힐 생각은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독백

11화에 나오는 독백 하나가 이 시리즈의 세 번째 글이 닿으려는 곳이다.

뜻을 풀어 옮기면 이렇다. 오즈는 몸이 여러 개라도 되는 듯 종횡무진 활약하며 제 대학 생활을 한껏 즐겼다. 그러는 한편으로 모든 ‘나’에게 손을 뻗쳤다.

이런 사람과 함께였다면 내 대학 생활은 꽤 재미있었을 것이다.

오즈는 아무래도 ‘나’의 유일한 절친이었던 것 같다.

이 독백이 끝나자 주인공은 운다.

작품은 여기서 전편을 통틀어 유일하게 웃기지 않는 순간을 내놓는다. 앞선 열 화에서는 거의 매 순간 쉴 새 없이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이 대목은 조용하다.

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2년 동안 그 사람을 탓했다

이제 이 일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펼쳐 보자.

주인공은 지난 2년 동안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거듭 말했다. 괜찮은 동아리도 없고, 친구도 없고, 연애도 없고, 장밋빛 생활도 없다고.

바로 그동안 매일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매일 달라붙고, 매일 온갖 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어느 평행세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2년을 들여, 그 한 사람을 자신에게 다른 것이 없는 원인으로 규정했다.

반어도 아니고 도덕적 교훈을 주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주 현실적인 순서의 문제다.

그는 먼저 ‘장밋빛 대학 생활’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그다음 그 기준으로 주변의 것들을 쟀다. 오즈가 이 기준에서 받은 점수는 형편없었다. 못생겼고, 성가시고, 하는 짓이라고는 죄다 쓸모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즈는 ‘장애물’이라는 칸에 들어갔다.

일단 그 칸에 넣고 나면, 이후 2년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분류가 옳다는 증거로 읽힌다.

오즈가 좋은 일을 하면 속셈이 있어서다. 나쁜 일을 하면 본성이 그래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못된 꿍꿍이를 품고 있어서다.

분류가 한번 끝나면, 그 분류가 스스로 증거를 찾아낸다.

오즈 쪽의 삶

그렇다고 작품이 오즈를 주인공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제 생활이 있고, 무척 떠들썩하게 지낸다. 여러 동아리에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고, 아는 사람도 많다. 여기저기서 일을 벌이느라 몹시 바쁘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가씨도 있다. 코히나타다. 휴대전화 비밀번호도 그 이름이다.

그러니까 지난 2년 동안 주인공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단정한 사람은, 정작 주인공보다 제 인생을 더 잘 살고 있었다.

그러고도 매일 이 사람을 찾아와 귀찮게 굴 여력이 있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주인공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두 가지는 동시에 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구별을 분명히 해 두자. 이 글에서 가장 쉽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쓸 수도 있다. 오즈는 사실 줄곧 그를 돕고 있었다. 그러니 주인공이 오즈를 잘못 탓한 셈이다. 따라서 이것은 오해와 화해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은 그런 서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오즈는 실제로 계속 그를 방해했다. 불꽃은 정말 쏘아 올렸고, 함정은 정말 팠으며, 골칫거리는 실제 골칫거리였다. 오즈 때문에 주인공이 입은 구체적인 손해는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그 2년 내내 곁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참이며,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작품 역시 둘이 서로를 지워 버리게 하지 않는다. 마지막 화가 끝난 뒤에도 오즈는 여전히 오즈다. 여전히 못생겼고, 여전히 성가시며, 여전히 쓸모없는 일을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한 가지뿐이다. 주인공이 그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본다.

그 사실을 알아보았다고 실질적인 결과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즈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지난 2년이 쓸모 있어지지도 않는다. 장밋빛 대학 생활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장부의 한 칸을 다시 계산하게 된다. 지난 2년 동안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는가.

결말이 오즈를 깨끗이 씻겨 착한 사람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주인공도 자신이 겪은 골칫거리를 우정이 베푼 은혜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진정 달라진 것은 하나다. 2년 치 장부에, 줄곧 곁에 있었던 한 사람이 마침내 기록된다.

같은 시간 동안 그보다 더 작은 무언가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방 안에 걸려 있다. 운명도 인생 계획도 아니다. 언제든 아카시에게 돌려줄 수 있었는데도 2년 동안 미루어 온 일 하나다.